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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쿤데라는 『소설의 기술』에서 '늙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나이든 학자는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젋은이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 교실에서 자유라는 특권을 지닌 사람은 자기 혼자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내하면 그는 나이가 들었던 것이다. 사람은 늙어서야 비로소 집단의 의견, 대중의 의견, 미래의 의견을 무시할 수 있게 된다. 오직 그 혼자만이 닥쳐올 죽음과 함께 있는데, 죽음에는 눈도 귀도 없어서 비위를 맞출 필요가 없다. 그는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다."
일흔이 넘은 쿳시와 작가 세뇨르 C의 경계는 선명하게 갈라서지 않는다.
"카프카가 요제프 K보다 관심을 끌게 되는 순간부터 죽은 카프카는 또다시 죽게 된다" (『소설의 기술』 p.196)라며 쿤데라는 다시 작가와 작품의 동일시를 경계하지만 그럼에도 나에게,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는 소설을 읽어나감에 따라 소설 속 작가인 '세뇨르 C'가 지워지고 실제의 인물인 '쿳시'라는, 작가이기 전에 한 개별적 인간으로서 그가 살아온 삶의 조각들이 퍼즐이 합쳐지듯 점점 구체적인 인상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장편소설'임에도 책의 삼분의 이 가량이 국가와 정치, 문화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노작가의 개인적 에세이들이 중심 텍스트를 이루고 있다면, 작중 화자와 그녀의 타이피스트인 안야, 그녀의 남자친구인 앨런이 만들어가는 짧은 단편은 상부텍스트를 담아내는 컨텍스트로 구성되어있다. 이런 실험적 형식이 작가와 화자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지만 결국,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는 애초부터 그런 둘의 분리를 의미 없는 형식적 제약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55개 꼭지의 에세이 중에서 정치와 국가를 바라보는 쿳시는 대단히 비판적이고 동시에 냉소적이기까지 하다. 가령 "민주주의는 민주적인 시스템 밖에서의 정치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전체주의다"(p23) , "뭔가를 입 밖으로 얘기할 때 당신이 직면하게 되는 것은 침묵하게 만드는 검열관의 일격이 아니라 추방 명령이다."(963)와 같은 주장들은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일견 정당해 보이면서도 '조류독감' '경쟁' 소아성애' 등에 대한 의견은 중립적 비판에 '냉소'라는 첨가물 없이는 그 정도로까지 나아갈 순 없던 것들이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든다.
남아프리카에서 네덜란드계 백인으로 태어나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어두운 역사와 그 시간 속에 점철된 지독한 인종차별을 온몸으로 지나왔고, 알 수 없는 이유로 (만델라로 상징되는 흑백의 장막이 사라진 뒤에도 쿳시는 혹시, 남아공의 현실적 상황이 결코 바뀌지 않았다고 느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의 막바지에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하였지만, 그곳에서 쿳시가 맞닥뜨린 건 '테러와의 전쟁' '이민법의 강화' 등 점점 보수화 되어가는 대륙의 미래였다. 쿳시의 세상에 대한 냉소와 비판이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자신만의 안락한 서재에서 바라 본, 노인들만의 전유물이라 할 수 있는 자조섞인 푸념이나 훈계가 아닌 실제적 무게를 갖게 되는 것은 과거로부터 지금, 이곳에서 그가 직접 체험한 세계로부터 발아 된 것이었기 때문일테다.
하지만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가 정치적 에세이가 아닌 '장편소설'이 될 수 있었던 것, 삶과 세상에 대한 비판과 냉소만이 작가가 독자에게 전해줄 수 있는 전부가 아닐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사랑'이 소설의 중심을 가로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3단으로 나뉜 독특한 구성에서 실제 텍스트의 분량으론 삼분의 일에 지나지 않음에도 '세뇨르 C'와 '안야'의 사랑과 소통, 그로인한 인간애 대한 공감이 에세이에 첨부된 단순한 곁다리 단편이 아닌 전체 소설을 묶어주는 컨텍스트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저 '사랑'의 힘 때문이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이야기임에도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가 한 편의 소설로서, 작품으로서 다가오는 것은 어쩌면 저 '늙음'이 갖고 있는 시간의 무게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일흔이 넘은 작가, 그가 보는 세상은 여전히 암울하고 비관적이지만 그럼에도 세상의 독자들에게 쿳시가 진정으로 전해주고 싶었던 것은 '사랑으로 낙관하라'는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사족.
세뇨르 C에겐 생의 가장 빛나는, 축복된 한 해였음에도 왜 작가는 제목을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로 정했을까.
반어적으로도 해독되지 않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