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이디스 워턴 지음, 김욱동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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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봄날, 비 온 뒤 쑥쑥 키를 높여가는 죽순(竹筍)의 허리를 뎅겅 잘라 손바닥에 문질러보면 아득하고 또 아득한 향기가 코끝을 찌르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다지 아름답다고 할 수도 없는 대나무의 마른 허우대를 쓰다듬으며 가느다랗지만 질긴 대나무의 뿌리를 생각해보는 일은 죽순의 은밀한 냄새를 맡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지요. 지진처럼 갈기갈기 찢겨진 삶의 괴로움을 땅속에 고스란히 품고 사는 이 메마른 나무의 고요한 울음을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알 겁니다. 삶이란 갈등의 매순간이며 원하든 그렇지 않든 스스로 택한 길을 끝끝내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요.

이러한 대나무를 닮은 뉴잉글랜드의 이선은 재능 있고 꿈 많은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시골에 파묻힌 채 환자인 어머니를 돌보면서 모든 이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요. 결국 어머니가 병으로 사망한 뒤 어머니를 간호하던 먼 친척 여자와 결혼하면서 그의 꿈은 더욱 부르기 힘든 이름이 되어버렸고요. 결혼 후 아내마저 병에 걸려 이선은 궁지에 빠졌고 처음부터 애정이 없던 그들의 결혼 생활은 그녀의 질병과 괴팍한 성격으로 더욱 악화되었지요. 그런데 바로 그때 아내의 조카인 매티가 고모를 돌보기 위해 이선의 집으로 온 겁니다. 이선은 열일곱 살의 매티와 금방 사랑에 빠졌어요.

 매티의 건강한 육체, 철모르고 발랄한 그녀의 순수한 영혼을 흠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처음 맛보는 사랑의 달콤함! 하지만 얼마 후 이런 사실을 눈치 챈 아내는 매티를 쫓아내려고 했지요. 이별의 슬픔에 절망한 두 사람은 함께 썰매를 타고 언덕 밑에 있는 느릅나무에 부딪쳐 자살을 시도하지만, 운명은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매티는 척추가 부러지고 이선은 절름발이가 되어 오히려 아내의 보살핌을 받게 된 거지요. 이선은 그렇게 고달픈 삶을 살아갑니다.

신은 우리에게 숙명이라는 멍에를 씌우고, 갈매기가 비행을 유지해야 하듯 각자에게 주어진 잔은 마땅히 비울 것을 요구합니다. 이선은 사랑에 한 번 몸을 담근 죄로 수십 년을 운명에 저당 잡힌 셈이지요. 무서운 일일까요? 아니면 비극적인 아름다움일까요?

생각해보면 저 이선의 모습은 나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제는 다 부질없는 옛이야기, 술상에 올라오는 시금털털한 안주 같은 이야기로 치부해버리고 말지만, 이따금 놓쳐버린 날들을 되새김질하려 할 때마다 저 생의 발가락 끝에서부터 아득아득 치통이 몰려옵니다. 모두가 사랑이었고, 모두가 사랑이 아니었지요.

그해 겨울, 눈은 참 많이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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