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씨방 일곱 동무 비룡소 전래동화 3
이영경 글.그림 / 비룡소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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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열리는 도서전에는 꼬박꼬박 가곤 한다. 이번에도 역시 안 가면 아쉬울 것 같아서 나들이하듯 도서전에 마실을 나갔는데 거기서 산 책이 바로 이 아씨방 일곱동무다. 내가 읽을 책 한 권 사려고 했는데 딱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어 초등학교 1학년인 친척동생 줄 요량으로 어린이책을 샀다. 도서전은 갈 때마다 느끼는 건데 해가 갈수록 어린이책 위주로 바뀌는 것 같아 좀 아쉽기도 하다.

아씨방 일곱동무는 규중칠우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표지에서도 전래동화 분위기가 팍 풍기는데 삐죽이 열린 문 사이로 여섯 여인들의 얼굴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큰 문 사이로는 골무 할미의 얼굴도 보인다. 음.. 뭔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다.

이 책의 주인공은 바느질을 좋아하는 빨간 두건 아씨와 자, 가위, 바늘, 실, 골무, 인두, 다리미 등의 규중칠우다. 본문 첫 페이지를 넘기니 빨간 두건 아씨는 곤히 잠을 자고 있고 규충칠우가 하나씩 나서서 자기가 최고라고 떠들어대기 바쁘다. 큰 키의 부인은 자, 바늘 각시는 머리 장식으로 뾰족한 바늘을 사용했고 홍실 각시는 얼굴도 자태도 곱기만 하다. 저마다의 특징에 맞게 일곱 동무의 그림을 그려 아이들에게 설명해 주는 재미도 있다.

게다가 일곱 동무가 자기 자랑하기 바쁜 소리에 슬며시 잠에서 깨는 발간 두건 아씨의 표정도 너무나 생생하다. 친척동생에게 이 동화책을 읽어줄 때 아씨의 표정도 함께 지적해 주었더니 너무나 좋아한다. 하품하는 얼굴은 무섭다며 얼른 넘기기도 하고..^^ 결국 잠에서 깬 아씨는 규중칠우를 나무라며 자신이 없으면 바느질이 되겠냐고 화를 낸 후 뒤돌아 누워버리고 일곱동무는 저마다 서러워 눈물을 흘리고 만다. 성미 급한 가위 색시가 뛰쳐나가려는 걸 뜯어말리는 골무 할미의 모습도 어찌나 코믹하던지~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장면은 빨간 두건 아씨의 꿈속으로 이어진다. 꿈속에서 아무리 아무리 찾아도 규중칠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결국 울고 마는 아씨.. 일곱동무는 자면서 울고 있는 아씨를 깨우기 위해 꼬집기도 하고 귀에 대고 소리를 지르기도 하는데 그 중 다리미 소저는 누가 다리미 아니랠까 봐 물이 가득 든 대야를 들고 급히 뛰어온다.

일곱 동무 덕에 악몽에서 깨어난 빨간 두건 아씨는 자신이 화낸 걸 사과하고 모두가 함께 해야 훌륭한 바느질이 된다는 걸 깨닫는다. 아씨와 일곱동무는 다시 흥겹게 바느질을 시작하고 책의 마지막 장면은 일곱동무 아니 여덟동무의 협동으로 만들어진 치마, 저고리, 버선 수저집 등 아름다운 수예품이 그려져 있다.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지 못하고 책을 덮으니, 이런! 뒷표지에도 선물이 숨어 있다. 바로 앞 표지에서 얼굴만 삐죽이 나왔던 일곱 동무의 뒷모습들~!!

이런 동화책이라면 이제 다 커 버린 나도 쌍수를 들고 환영이다! ㅎㅎ 참 재미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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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주체성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6
탁석산 지음 / 책세상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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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치하 이후 미군정 실시 현재는 미국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현실에서 주체성에 대한 이야기는 자주 대두되어 왔고 또 논란의 핵이 되는 이야기임이 틀림없다. 심지어 우리 역사를 바라보며 주체성의 상실을 이야기 함에 있어 신라가 당과의 연합을 주체성 상실의 증거로 보는 이도 있으며 조선시대 사대정치라는 정치 구도를 주체성 상실의 역사적 증거로 제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탁석산 씨의 한국의 주체성이란 책은 참으로 흥미로운 책이 아닐 수 없다. 친구랑 서점에 갔을 때 내가 책을 유심히 보자 선물로 받은 것인데 지하철을 타면서 쉬는 시간 짬짬이 시간 내서 읽기가 편한 책이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허나 책의 내용에 있어서 나와는 많은 차이를 발견한 책이었기에 그리 호응하기는 힘들지만 두고두고 그 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겠다. 국어를 전용으로 사용하자와 핵무기를 보유하자 그리고 강대국에게 할 말은 하고 살자가 가장 큰 주장들이었는데 물론 그의 주장들이나 몇몇 사례는 지엽적으로 동의하나 대부분의 것은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 두드러지지 않았나 하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우선은 국어를 사용함에 있어 한자 및 영어의 사용을 금지하자는 주장에서는 현실성이 없으며 그가 제시한 안은 지엽적인 몇몇 사례에 불과하다. 한자에 대해 지나치게 과소평가를 한다던가 영어를 사용함에 있어 모든 것을 한글화시키자는 주장 등은 납득하기 힘들었다. 예를 들면 그는 이 책에서 한글 전용 국어사전 편찬을 제시했는데 가령 사과라는 단어를 찾을 때 사과 : 과실류의 종류 사과 : 자신이 실수를 했을 때 그 실수를 상대방에게 인정하는 행위 이렇게 분류되어 있는 현재 사전편찬에서 사과 : 1) 과실류의 종류 2) 자신이 실수를 했을 때 그 실수를 상대방에게 인정하는 행위와 같이 그 단어의 근원을 구분하지 말고 동음이의어로 보고 한 단어로 보아 사전을 편찬하자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사전이라 함은 단어의 뜻을 알고자 하는 용도도 있지만 그 단어의 파생의미나 혹은 그 단어의 생성원리도 유추할 수 있는 용도로 사용함을 감안할 때 동음이의어란 의미로 한 단어에다 모든 뜻을 부여할 땐 사전의 유용성을 제한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주장함에 있어 동음이의어가 많을수록 언어의 풍부한 의미로 인해 문학적으로 문화적으로 다양한 효용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한자를 사용함에 있어 그것이 과연 불가능한가도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가령 피서를 위해 난 피서를 했다 라는 문장을 농담함아 했다 치자. 공부하는 사람이 여름에 피서를 위해 피서를 했다 피서하면 더위를 피한다라는 뜻이 있지만 여기서 한자를 변화시켜 서를 책 서로 쓴다면 더위를 피하기 위해 책을 피하다란 뜻이 된다. 한자를 사용함에 있어 더욱더 많은 언어적 유희를 추구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한 언어학자는 명사를 제외한 단어는 절대 다른 단어를 대체할 수 없다고 했다. 이는 약간 극단적인 주장이지만 이 주장을 따르면 단어의 변역이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가령 슬프다란 단어를 들면 영어로 sad가 가장 옳겠지만 그 속에 담겨진 분위기나 의미는 약간 다르다. 이는 영어사전을 유심히 바라보면 쉽겠다. 따라서 일상 언어야 대체되겠지만 가령 섬세한 번역이 따르는 것이나 학술용어일수록 가능하면 억지로 번역을 하는 것보다 차용해서 사용하는 것도 필요할 때가 있는데 그런 것까지 부정하고 무조건식 한글 전용 사용을 주장하는 것이란 무리가 있다고 판단된다.

핵무기 보유 주장은 워낙 미묘한 문제이기 때문에 쉽사리 이야기할 거리가 되지 않아 여기서 이야기를 하지는 않겠다. 이 책에서 가장 맘에 들지 않는 주장 중 또 하나는 정보강국에 대한 우리나라의 포부를 너무 쉽게 부정한다는 점에 있다. 정부의 정보통신 강국을 위한 계획에 대하여 사소한 오류를 확대 해석하고 어떤 데이타나 혹은 논리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감정이나 짐작으로 부정하는 듯하여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정보통신망 구축에 대하여 고속도로만 쌓고 실제로 차는 해외차만 다닐 거라며 정보통신망 구축을 돈들여 쌓아 놓으면 그 통신망 이용은 다 외국일 것이라는 비관적인 이야기는 동의하기 힘들었다. 핸드폰을 예로 들 수 있겠다. 핸드폰이란 하드웨어를 개발하면서 이와 동시에 그 핸드폰 콘텐츠 시장이 발전되었고 또한 핸드폰뿐만이 아닌 다른 산업 전반에 걸친 발전을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 정보통신망도 마찬가지다. 전국적인 정보통신망 구축은 인터넷 대중화를 이끌었고 따라서 대중화됨으로 인한 인터넷 내에서의 가치시장 규모는 커졌으며 마치 발명가가 발명을 하듯이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 중이고 이미 우리나라에서 개발된 콘텐츠가 세계시장에도 모범이 되는 것 또한 다양한 것도 직시해야 할 것이다.

각 나라마다 정보통신발달 분야가 다르고 따라서 직접적인 비교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분야에서만큼은 우리나라가 세계적으로 앞서 나가는 것이 사실이며 또한 그렇지 못하는 것일지라도 적어도 세계 유수의 기업에 도전을 하고 있는 것도 많다는 사실이다. 다만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변환할 때 농사짓는 사람이 공장에 가면 막연한 두려움으로 그것이 어떻게 우리 밥벌이를 해주냐며 비관적으로 바라보듯이 탁석산 씨 역시 정보통신에 대한 무지가 이런 어이없는 주장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 책에서 논리가 맞지 않는 분야는 철학자가 마냥 비현실적이며 관념적이라고 주장을 하다가도 자기 논지를 주장함에 있어 유리하다 싶으면 철학자가 배제된 우리 사회는 잘못되었다고 주장함은 논리의 일관성에서 오류가 있다.

하여간 그의 책에서 드러난 오류는 이와 같다. 자신이 느끼고 생각한 것이 우러나서 쓴 글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먼저 자신이 제목을 지어놓고 나서 그 제목에 맞는 논지를 수집하고 짜 맞추다 보니 논리를 폄에 있어 매끄럽지 못하고 극단적인 사고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분명 그의 글은 흥미롭지만 그 흥미가 고개를 끄덕이게 하지는 못한다. 못난 사람이 자신의 가족을 흉본다고 자기에 대해 똑바로 보아야 한다는 논리로 마냥 근거없는 자기 나라에 대한 혐오적인 접근법은 분명 잘못되었다.

참고로 책에 있는 그 사람의 이력 중에서 학력고사는 잘 나왔는데 내신이 안 좋아서 서울대학교에 떨어졌다는 건 왜 쓴 걸까? 갑자기 궁금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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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신불 - 김동리 단편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13
김동리 지음, 이동하 책임 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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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운명이란 것을 믿지 않는다. 운명이라는 것은 마치 나의 의지를 나약하게 만드는 것 같기 때문이다. 미래는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믿는다. 등신불을 읽었다. 김동리의 소설을 많이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그의 소설을 보면 토속적이고 민속적인 면이 저변에 흐르는 듯하여 반갑고도 편안하다. 다만 그의 소설을 읽을 때면 허무주의가 더 맞겠다.

그런 느낌이 들어 가슴 아픔과 저림을 함께 느끼곤 한다. 등신불은 부처가 된 아니 부처라고 사람들에게 불리게 된 이의 이야기다. 들기름을 몸에 부어 절여서 점점 화석이 되게끔 만든 후 나중에 몸을 불살라 몸을 부처님께 공양한 것이다. 그렇게 하여 타고 남은 그 몸에 금박을 붙여 금불상을 만들어 후세에 부처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그게 바로 등신불. 문제는 그렇게 자신의 몸을 불살라 공양하게 된 계기가 바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운명 때문이었는데 그리하여 그 불상은 부처의 여유로움과 너그러움과는 거리가 먼 묘한 표정을 짓게 된다.

인간의 허무와 한계라는 것은 과연 어디까지일까? 비록 우주선을 쏘아 올리고 인공위성을 날리는 시대를 산다 하여도 인간의 사고에서 오는 운명에서 오는 그 한계는 과연 시대가 흐른다 하여도 풀리게 되는 것인지 의문이 온다. 벗어나고자 하나 벗어날 수 없는 한계에서 우리는 간혹 풀썩 주저앉기도 하고 때론 마음속이 오기와 독기로 가득 차기도 한다. 때로는 풍자나 해탈로 모든 것을 극복하려는 또는 회피하려는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허나 풍자와 해탈로 독기와 허무로 삶을 설명하고 또 전부가 될 수는 없을 듯 싶다.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에서 나타낸 인간의 운명에 대한 한계성에 대한 허무주의는 그래서 아쉽기만 하다. 비록 그 소설이 어떤 문학사적 가치를 지녔고 또한 아름답고 잘 지어진 소설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는 어쩌면 지나친 낙관주의로 비춰질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 낙관주의가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한 방편이 될 수도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곳곳에 자신의 의지가 꺾여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눈에 자주 띈다. 그 사람들 중에 내가 있기도 하고 내 주변에 그 사람들이 있기도 하지만 하늘이 높고 구름이 아름답다. 이제 한번 하늘을 바라보고 어깨를 필 필요성을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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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
김탁환 지음 / 동방미디어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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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어투가 있다는 것-소설가는 문체라고 하겠지만-그것은 대단한 재능임이 틀림없다. 그것이 자연스럽게 생활에서 성장과정에서 혹은 타고난 재능에서 얻어진 것이라면 행운이라 불려도 좋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는 그렇다. 자신만의 문체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그런 재주를 지닌 소설가. 여기서 문체라는 것은 단순히 어투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안목도 그리고 소설을 씀에 있 어서의 태도도 포함하는 것이다.

나, 황진이란 소설을 읽고 한참을 감동에 휩싸여 그의 글을 찾아 읽겠다고 다짐했었다. 그의 비평도 읽어 보았고 드디어 또 다른 소설 한 권을 읽었다.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이 바로 그 소설이다.
     
마치 삼류 연애소설 같은 제목이 마치 어설픈 유언장 같은 제목이 눈에 거슬렸지만 소설의 이야기 전개 내내 그 제목의 뜻을 유지하면서 맛깔스런 그의 입담을 늘어놓고 있다. 저자가 말했던 추리소설의 형식을 통해 결국엔 인간을 이야기하는 소설이었다. 저자는 자신이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충분히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개인적으로 스케일이 크고 주제가 큰 소설을 즐겨 읽긴 하지만 그렇다고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그런 소설들은 소설가가 그의 이야기에 휩싸여 작가가 작품을 이끌지 못하고 휩싸이는 형국을 나타낸다. 소설은 말이고 작가는 그 말을 이끄는 사람이다. 훌륭한 작가는 그 말을 부려 자신의 의도대로 가고자 하는 곳을 갈 수 있어야 한다. 말이 난동을 부려 엉뚱한 곳으로 간다면 훌륭한 마부가 되지도 못하고 목적지에도 도착하지 못한다. 마부와 마부의 재량에 맞는 말이 중요한 것이지 아무리 천하의 명마라 해도 마부가 말을 통제하지 못하면 그것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 된다. 하여 소설가는 소설을 쓸 때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것을 이야기로 써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 김탁환은 그 말의 습성을 알고자 끊임없는 노력을 한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여기저기서 수줍은 듯 드러나는 고증을 통한 인용은 그의 소설이 힘을 갖고 앞으로 힘차게 나아가게끔 해준다. 단순히 그의 문체는 여성스럽고 아름답지만 그의 글 전체가 커다란 힘을 느끼게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요즘 많은 소설가들이 글을 쓰는 것을 너무도 쉽게 생각하고 소설의 상상력이라는 것을 무기로 하여 무책임하게 글을 쓰는 듯 하여 안타까운 이때 이것이 바로 그의 소설에 애정을 갖게끔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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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메이트
맥스애플 / 동녘라이프(친구미디어) / 199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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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들어와 부러워했던 것이 자취를 하는 친구들이었다. 혼자 자취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대부분 친구 혹은 선후배와 함께 자취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집에 갈 걱정하지 않고 술 마시고 놀 수 있었던 친구들이 부러웠던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 이유는 함께 지내는 친구와 저녁에 츄리닝 차림으로 편의점이나 동네 호프집에서 맥주 한 잔씩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부러워서였다.

그런데 그런 경험을 한 것이 산업체에 들어가서였다.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생활했었지만 나이가 같은 친구와 함께 맥주 한 잔 사러 슈퍼에도 가고 늦게까지 이야기도 나누며 회사나 세상에 대한 푸념과 희망을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다투기도 많이 했지만 그래도 그때의 경험은 소중하다.

룸메이트는 그런 존재다. 같은 방을 쓴다는 것 자체가 생활을 같이 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사생활이 거의 대부분 공개되고 또 상대의 장단점이 공개되는 룸메이트이기 때문에 다툼도 많지만 그만큼 가까워지고 나중에는 생각이나 행동이 닮게 된다.

소설 룸메이트는 사실 일반적인 룸메이트와는 조금 다르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함께 살면서 서로 의지하고 사랑하고 또 생각을 나누는 일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기 때문인지 편안하고 평범한 문체로 쓰여졌다.

주인공이 결혼을 하게 되었을 때 룸메이트였던 할아버지는 사랑하는 손자를 잃은 것이라고 느낀 것인지 질투심도 드러내고 손자 며느리와 자주 다투게 되지만 불치병에 걸리자 자기가 아는 선에서 그 병을 고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깊은 감동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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