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
임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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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나'의 가족이 트럭을 타고 광주로 이사를 오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트럭에는 소가 함께 타고 있었다. '나'의 가족은 싼 값에 동승한 처지였다. 소가 부데끼면서 트럭 여기저기에 똥과 오줌을 갈겨댄다. 사람도 덩달아 여기저기 토하는 통에 트럭은 난장판이 되고 만다.

겨우겨우 가족이 도착한 곳은 광주 계림동과 산수동의 경계에 있는 판자촌이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후미골, 또는 늴리리 동네라고 불렀다. 이삼백호가 모여사는 그곳에서 '나', 엄마, 은분이누나, 그리고 어렸을 때 침을 잘 못 맞아 '엄바, 밥쭤...' 정도의 말밖에 하지 못하는 은매누나가 둥지를 튼다. 아버지는 집에 찾아오지 않은지 오래였는데, 광주에 딴 살림을 차렸다고 했다.

엄마가 겨우 삯바느질감을 얻어서 생계를 꾸려갔지만 팍팍했고, 은분이 누나가 과자공장에 나가 살림을 보탰다. 그러나 누나가 벌어오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았고, 그나마 뜨거운 갱엿물에 손을 데이기까지 한다.

'나'는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배돌기만 한다. 말쑥한 차림의 여선생이 책상에 칼자국을 냈다는 이유로 '나'를 함부로 때려 얼이 빠지고 코피가 터지는 사건이 있은 뒤로 '나'는 학교를 툭하면 빼먹는다.

대신 동네사람들과 정서적 교류를 갖게 되는데, 그 사람들은 모두가 어딘지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항상 바보처럼 웃기만 하면서도 '나'를 동생처럼 살뜰히 챙겨주는 양심이, 고고한 척하며 마을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고오목양, 새나라이발관을 경영하는 안씨와 군출신 의리파 안씨 아내, 그리고 집이 가난해 매일 배급받은 빵을 집으로 가져가는 까마귀 귀옥이...

5년여의 세월이 흐른다. 그동안 은매 누나가 비를 맞아 몹시 앓은 뒤 가족의 곁을 떠나고, 칠만이 아저씨가 술에 취해 기차에 치어 죽는다. 그리고 아버지 때문에 속이 만신창이가 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은분이 누나와 '나'는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간다.

시간이 흘러 은분이 누나는 수녀가 되고, '나'는 외항선원이 된다. 선원이 되어 조금씩 끼적인 시들이 묶여서 책이 되어 출판되고, '나'는 예전에 사는게 너무 서럽고 힘들어 자살을 결심했던 등대 밑에 와서 술을 마신다. 그때, 별안간 '나'의 머리 위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카랑카랑하게 들려온다.

 

'걱정 말아라. 얘야. 걱정할 것 하나도 없응께!'

 

유리알같이 맑고 투명한 별들이 밤하늘 가득히 좌르르 흩어져 반짝이고 있었고, '나'는 그 별들 중 하나가 어머니, 또 다른 별 하나가 은매 누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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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빨리 먹으면 45분 가량 시간이 남는다. 그 시간에 읽은 책이다. 좋은 책은 한꺼번에 많이 읽기가 어렵다. 조금 읽고 생각에 잠기고, 또 조금 읽고 어렸을 적 기억에 함께 아파하고... 그렇게 읽었다. 그러다가 은매누나가 죽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울었다. 눈이 빨개져서 혼자 코를 훌쩍이며 울었다.

나는 어렸을 적에 광주에서 자랐다. 다른 식구들은 서울에서 살다 이사를 갔기 때문에 사투리를 쓰지 않았지만, 어렸을 적에 주변에서 들린 그 사투리들은 내 정서에 깊은 인상을 남겼음에 분명하다. 그래서 소설 속 어머니가 하는 이야기들이 마치 내 어머니가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들렸고, 가슴이 아렸다.

소설 속 이야기들은 내 어릴 적 기억들을 떠올린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복도에서 뛰었다고 여선생이 내 뺨을 십여대 때렸던 기억, 나와 나이가 같은 조카가 물에 빠져 죽은 사건, 그리고 같은 반 친구가 혈우병으로 죽은 일, 고아원에서 다녀서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녔던 쌍둥이 일호와 이호...그런 기억들이 떠오르면서 어쩐지 슬픈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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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레 씨, 홀로 죽다 매그레 시리즈 2
조르주 심농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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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파르조 센에마른에 주소지를 둔 방문 판매 사원 에밀 갈레가 25일에서 26일 밤 사이에 상세르의 라 루아르 호텔에서 사망한 채 발견된다. 메그레 경감이 피해자 신원 확인을 위하여 갈레씨의 집에 찾아간다. 갈레 부인은 자세가 꼿꼿하고 자존심이 세 보이는 여자였다. 그녀는 남편이 최근에 엽서를 보낸 곳과 사망한 장소의 지리적 거리가 멀다는 점에 근거하여 사망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신을 본 뒤에 그녀는 남편이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어쩐지 슬퍼하는 태도가 어색해보였다.

갈레씨의 시신도 기묘한 점이 있었다. 총알이 얼굴을 관통하여 망가뜨려 놓았고, 단도가 심장에 꽂혀 있었다. 총과 칼을 모두 이용하여 누군가를 살해한다는 것은 좀처럼 보기 힘든 일이었다.

 

메그레는 갈레씨가 어떤 인물인지 조사하는데, 조사를 하면 할수록 기묘한 점들이 발견된다. 그는 간질환을 앓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만프랑짜리 생명보험에 가입되어 있었다. 보험회사에서는 질병을 앓고 있는 그의 보험을 인수하는 조건으로 고액의 보험료를 요구했을 것이었다. 

사실 갈레씨는 방문 판매 사원 일을 그만둔 지 오래였다. 그는 왕당파의 부흥을 바라는 노인네들에게 사기를 쳐서 돈을 우려내 생계를 꾸려온 지 벌써 14년째였다. 하지만 가족들은 그런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과연 사기를 쳐서 집에 생활비를 대고 보험료까지 납부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었다.

 

그러던 중 유력한 용의자로 갈레씨의 아들과, 호텔 인근의 귀족이 떠오른다. 갈레씨의 아들은 나이 많은 과부를 정부로 두고 있었는데, 이 일로 아버지와 껄끄러운 말다툼을 한 것 같았다. 또 호텔과 인접한 성에 사는 귀족 생틸레르도 갈레씨와 몇 차례 언성을 높인 것이 목격된다. 하지만 둘 다 알리바이가 확인되어 사건은 다시 미궁으로 빠진다.

그러다가 갈레씨를 인도네시아에서 알고 지냈다는 제보자가 나타난다. 그는 갈레씨가 인도네시아에서 현지 여성과 사기 결혼하기 위해 벌였던 엉뚱한 일들을 한바탕 늘어 놓는다. 메그레 경감은 그제서야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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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는 코냑 한 통, 그리고 심농 소설과 지내는 게 최고다. 루이스 세풀베다

만약 아프리카 우림에서 비 때문에 꼼짝 못하게 되었다면, 심농을 읽는 것보다 더 좋은 대처법은 없다. 그와 함께라면 난 비가 얼마나 오래 오든 상관 안 할 것이다. 헤밍웨이

깊이의 거장. 심농은 허구에서든 현실에서든, 열정적이든 이성적이든 한결같이 자유로웠던 소설가이다. 존 르 카레

심농을 읽지 않았다면 <이방인>을 이렇게 쓰지 않았을 거다. 알베르 카뮈

 

심농은 거장으로 불릴만한 소설가들로부터 유독 많은 사랑을 받았던 추리소설가이다. <갈레 씨, 홀로 죽다>는 1930년 여름에 집필되어 1931년에 발표되었는데, 쓰인 것은 <수상한 라트비아인>보다 나중이지만 가장 먼저 출간된 소설이다.

 

소설은 제목과 같이 무척 쓸쓸한 분위기를 띤다. 갈레씨의 장인은 왕당파의 부흥을 지원하는 신문을 발행하고 있었는데, 말년에는 자금이 떨어져 곤란을 겪는다. 그 때 갈레씨의 3만 프랑이 요긴하게 쓰인다. 그러나 장인은 3만 프랑을 얻을 욕심에 딸을 내준 뒤에도 갈레씨를 낮춰 보고 무시했다. 그것은 갈레씨의 아내와 처제 내외도 마찬가지였다.

갈레씨는 결혼 뒤 곧 방문 판매 사원 일을 그만둔다. 그 일로 생계를 유지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대신 장인이 발행하던 왕당파 신문에 후원금을 낼만한 노인네들을 찾아다니며 사기를 친다. 그것은 조금 돈이 되었다. 하지만 얼마 뒤 갈레씨의 사기행각을 알아차린 갈레씨의 아들이 갈레씨를 익명으로 협박하여 돈을 우려내기 시작한다. 갈레씨는 자신이 이런식으로 계속 해나가기 어렵다는 것을 예감한다. 간도 나빠져서 회복되기 어려워보였다. 그는 생명보험에 가입한다. 30만프랑은 아내와 아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협박범으로부터 2만 프랑이라는 거금을 요구받은 갈레씨가 생틸레르를 찾아가 돈을 요구한다. 생틸레르는 거절한다. 생틸레르는 과거에 갈레씨에게 3만프랑을 주고 이름을 샀다. 귀족 이름이 필요하다며 돈을 건낸 것이었지만, 사실은 생틸레르의 먼 친척이 사망하면 막대한 유산이 들어올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었다. 생틸레르라는 이름을 사고난 뒤 4년 후, 그는 120만 프랑의 유산을 상속받는다. 3만 프랑으로 120만 프랑을 산 셈이었다. 그 뒤 생틸레르는 자신의 이름으로 살게 된 갈레씨에게 푼돈을 던져주곤 했다. 하지만 2만 프랑을 요구받자 냉정히 거절한다.

갈레씨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권총을 메달아 자신에게 발사되도록 설치한다. 총 세발이 발사될 것이었다. 한발이 얼굴을 관통한다. 갈레씨는 얼굴 반쪽이 날아간 상태에서도 자신을 죽여줄 총알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하지만 장치가 고장났는지 총알은 발사되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단검을 꺼내 자신의 심장에 찔러 넣는다. 그렇게 갈레씨는 홀로 죽는다.

 

귀족으로 태어났지만 이름을 팔아 넘기고, 가짜 귀족으로부터 멸시 받은 사내. 아내는 자신을 멸시하고 아들은 자신을 협박하여 돈을 우려낸다는 사실을 모른 채, 가족들을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14년간 돈을 번 사내. 

유예의 시간이 다하자, 예정된 결말처럼 자살하고 마는 갈레씨. 메그레 경감은 진상을 모두 파악한 뒤에 사건을 미결로 처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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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 - 제12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서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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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한 사내가 지하철에서 깨어난다. 그는 자신이 누구이고,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 생각 나지 않는다. 지갑을 열자 10달러 짜리 지폐 3장과 신용카드, 사진 몇 장이 나온다. 신용카드에 찍혀 있는 'KIM HA JIN'이라는 이름이 낯설다. 사진에는 아내인 듯한 여인과 아들로 추정되는 아이가 찍혀 있다. 하지만 그것도 추측일 뿐이다. 사내는 자신이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생각한다.

그는 지하철 역을 벗어나 지상으로 나가려하지만, 햇빛을 보기만 하면 정신을 잃는다. 그리고 어딘가 상처를 입은 채 다시 지하철에서 깨어나길 반복한다.

지하철에서 키보드로 폴카를 연주하는 앤디의 도움으로 사내는 한국인이 모여사는 곳에 전단지를 붙인다. 얼마 뒤 앤디에게 어떤 여자가 전화를 걸어온다. 자동응답기에 남겨진 그녀의 말에 의하면, 자신의 남편은 3개월 전에 죽었다고 했다. 앤디는 사내에게 언제 음식을 먹었는지, 용변을 본 기억이 있는지 묻는다. 사내는 자신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지상으로 한 발 내딛는다. 또다시 앞이 새하얗게 변하고 땅바닥에 쓰러진다.

 

<2부>

 

사내는 선배의 말만 믿고 미국으로 이주했다. 닷컴버블 때문에 컴퓨터 비슷한 것만 만지작거려도 돈이 되던 시기였고, 사내는 프로그래머였다. 아내 미라는 법률을 공부해 변호사가 되겠다고 했다.

얼마 뒤 버블이 붕괴되었고, 사내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아내 미라는 뱃속의 아이가 미국에서 태어나 시민권자가 되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법률을 공부해 변호사가 되겠다고도 했다.

LA에서 친척이 있는 뉴욕으로 이사온 뒤 사내는 프로그래머 직업을 버리고 당장 돈이 되는 목수가 된다. 아내는 억척스럽게 공부에 매진하더니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다. 하지만 둘 사이는 예전같지 않았다. 대화가 뜸해졌고, 아내는 사내에게 서먹한 태도를 취했다.

얼마 뒤 사내는 우연히 아내를 지하철에서 만나고, 어떤 예감 때문에 그녀를 미행한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은 그녀가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고, 생계를 꾸리기 위해 안마시술소에 다니기 시작했으며, 백인남성과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내는 자신이 알게 된 사실을 아내에게 얘기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내가 사내에게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지 채근한다. 관계는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사내가 주택 수리를 하던 도중 축이 되는 기둥을 건드려 건물이 붕괴한다. 붕괴 직전에 사내는 지하철역과 연결된 터널로 몸을 날린다.

 

<3부>

 

사내가 몸을 날린 터널은 뉴욕의 지하철역에 연결되어 있었다. 뉴욕의 지하철에는 지도에 나오지 않은 지역이 광범위하게 존재했다. 사내는 그런 지역 중 한 군데로 간 것이었다.

이미 그곳에 거주하던 에이프릴과 의사 폴이 사내의 상처를 치료해준다. 에이프릴은 천인형을 끼고 다녔는데, 그녀는 인형을 자신의 잃어버린 딸 스텔라라고 생각했다. 의사 폴이 주는 약은 마약이었는데 중독성이 강했다. 약을 먹지 못하면 12시간을 고통 속에서 보내야 했다. 폴은 그 '언더그라운드'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여러가지 계명들을 만들어 냈고, 마약으로 사람들을 조종하고자 했다.

프레디라는 소년이 사내를 돕는다. 몇 차례 실패 끝에 사내는 아들 민규에게 이메일을 보내는데 성공하고, 언더그라운드에서 탈출한다. 민규와 코니아일랜드에서 재회하지만 경찰이 사내에게 총을 발사한다. 부상당한 사내가 마술에 참가한다. 마술사는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사내는 아내 미라와 코니아일랜드에 와있다. 뱃속의 아이 이름을 민규라고 짓기로 하며 행복해한다. 사내는 자꾸만 잠이 온다. 미라의 어깨에 기대어 잠을 청한다. 사내는 자신이 가진 모든 기억이 사라져버리는 것만 같다. 이상하게 눈꺼풀이 무거워져서 뜰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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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 지상의 이야기는 2부이다. 지상의 이야기는 사실에 근거하여 시간 순서대로 구성되어 있다.

2부를 간략히 정리해보면, ① 사내(김하진)과 아내 미라가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 ② 사내와 미라는 둘 다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좌절한다 ③ 사내는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할 뿐 아내를 설득하지 않는다 ④ 반면 아내가 변호사에 합격했다는 사실은 아무런 의심없이 받아들인다 ⑤ 아내 미라는 변호사에 합격했다고 거짓말 한 뒤 안마시술소에 나가 돈을 벌며 바람을 피운다 ⑥ 이런 사실에 절망한 사내는 공사현장에서 아무 생각 없이 주축이 되는 기둥을 도끼로 찍는다 ⑦ 이 때문에 집이 무너져 내린다.

주인공 사내는 현실에서 이미 실패했다. 그가 도피한 공간이 언더그라운드인데, 언더그라운드는 현실의 도피처가 되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그곳은 중독에 의한 망각만 존재하는 디스토피아이다. 

이 이야기가 공포스러운것은, 주인공 사내가 언더그라운드를 벗어나 현실로 다시 되돌아오려 한다는 점이다. 그는 이미 실패, 혹은 사망했을지도 모르는 곳으로 다시 오고 싶어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실패한 분야를 상징하는 노트북을 이용해야 한다. 

2부인 현실을 중심으로 1부와 3부가 순서를 달리해도 이야기가 되고, 무한 반복될 수도 있게 구성해 놓은 소설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재기발랄함이 엿보인다. 일요일 숙직의 지루한 시간을 덕분에 잘 보냈다.

 

http://blog.naver.com/rainsky94/221005782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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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를 봤다 작가정신 소설향 8
성석제 지음 / 작가정신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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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소설가의 시답잖은 이야기>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거짓말 같기도 하고 참말 같기도 한 짤막한 에피소드가 변주를 거듭하며 연달아 나오는데, 각각의 이야기는 얼핏보면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같지만 또 자세히 들여다 보면 우리네 사는 이야기가 그렇듯 긴밀한 연관을 갖고 있다. 

각각의 에피소드에 나오는 인물들은 저마다 사기성이 엿보이는 사업에 뛰어들거나, 그런 일들과 본의 아니게 연관 되어 실패를 맛보는데, 그 과정이 희극적인 요소를 담고 있어 실소를 금치 못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작품 중 재미난 부분이 있어 옮겨 적어 본다.

 

불교에서 나와서 세속에서 다른 뜻으로 쓰이는 말은 꽤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이판사판이다. 이판理判은 세속을 떠나 도를 닦는 일이고 사판事判은 절의 재산을 관리하고 맡아 처리하는 일인데 이 두 일을 하는 사람이 한치의 양보도 없이 맞서면 '막다른 데에 이르러 더는 어찌할 수 없게 된 판'이 된다. 이럴 때 한 수 가르쳐서 정리를 할 수 있는 고승 아사리가 나서야 하는데, 그랬는데도 수습이 되지 않는 어지러운 판이 아사리판이다... 어지러운 정도의 우열을 표시하면 이판사판<아사리판<=난장판<개판이 된다. 난장판과 개판 사이에는 '개판 5분 전'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입담이 바로 성석제 소설이 주는 감칠맛이다. 최근에 성석제의 소설을 여러 권 샀다. 이문구 이후로 전성태와 성석제가 나에게 소설읽는 즐거움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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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유효하지 않다
로맹 가리 지음, 이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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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화자 '나'는 1936년에는 국가대표 럭비선수였고,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드골과 함께 레지스탕스로도 활동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출판사를 설립해 많은 이윤을 거두었지만, 최근에는 유가가 폭등하고 경기가 침체되는 바람에 회사 경영에 곤란을 겪는 중이다. 

게다가 59세의 나이로, 스무 살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로라와의 관계를 계속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자각하는 중이다. 지금은 그럭저럭 로라와 관계 맺을 정도의 상태는 되지만, 성기능이 퇴화되고 있다는 것을 매순간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로라와 관계맺는 행위가 '자연스러운 잠자리'가 아니라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고 안도하는 행위'로 변질된지 오래이지만, 로라는 이러한 '나'의 불안함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호텔에서 로라와 자던 '나'는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잠이 깬다. 도둑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나의 목덜미에 칼을 들이밀고 고가의 시계를 훔쳐가려 한다. 그때 나는 도둑의 야성적인 외모에 매료된다. 그리고 그에게 도망갈 길을 일러주는데, 그때 도둑이 무심결에 '시 세뇨르' 라고 답변한다. '나'는 어쩐지 그 도둑을 찾아내어 잘 길들이면 '나'의 젊음을 그가 대신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든다. 하지만 그것은 실현되지 못할 환상이었다. 결국 '나'는 과거 레지스탕스 활동 중에 알게 된 포주 릴리 마들렌을 찾아가서 자신을 죽여달라는 부탁을 한다. 릴리 마들렌은 '나'를 죽이는 대신 로라에게 '나'의 성기능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전한다.

'나'는 아들에게 남기는 노트를 금고에 넣고, 도둑을 운전기사 삼아 로라와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그 여행이 무엇으로부터 떠나는 여행인지, 무엇을 발견하게 될 여행인지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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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문학의 오랜 주제였다. 그런데 '죽음'보다 더 비극적인 것이 '늙음'이다. '늙음'은 '죽음'의 계속적인 경험이다. '늙음'을 최초로 경험하는 순간부터, 인간은 '죽음'을 의식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추체험이다. 

불가역적인 노화현상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그것은 질병이 아니므로 치료될 수도 없다.노화를 다소 완화할 수 있는 기구와 처치들에 감사해 하고, 또 일부 영구적인 기능 상실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시대가 저물었다는 것을 느낀다.   

 

"이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유효하지 않다"는 프랑스 지하철역에 붙어 있는 경고 문구이다. 로맹 가리는 이 소설을 쓰기 직전에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그로칼랭>을 발표했고, 이 소설 발표 직후에 역시 에밀 아자르 이름으로 <자기 앞의 생>을 발표하여 콩쿠르상을 수상한다. 당시 평론가들은 로맹 가리를 박하게 평가했고, 심지어 그가 신예 소설가 에밀 아자르의 문체를 모방했다고까지 비난했다. 로맹 가리는 자신이 에밀 아자르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다.

진 세버그와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고 결국 그녀가 79년에 자살하자 로맹 가리도 이듬해에 유서를 남기고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승차권을 손에 쥐고 씁쓸해 하는 날이 우리 모두에게 올 것이다. 생은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와 같이 우리가 선택한 삶은 사후적으로밖에 알 수 없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언제나 황혼녘에 날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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