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는 밤 : 시 밤 (겨울 에디션)
하상욱 지음 / 예담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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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 직원이 과장님께 탈탈 털리던 중 우연히 책꽂이에 꽂힌 책 제목 때문에 뿜을 뻔 했단다. 시밤.

시 읽는 밤이라기에 읽어보니 말장난에 詩라는 이름을 달아 11,200원의 정가를 붙였다. 창조경제다. 

앞 자리 직원은 이 책을 어떤 연유로 소유하게 되었을까. 시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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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토끼 차상문 - 한 토끼 영장류의 기묘한 이야기
김남일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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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도 안 간 여선생, 심지어 아이들이 화장실도 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바로 그 여선생이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토끼라는 풍문이 돌았다. 그녀의 이름은 유진숙이었다. 유진숙이 양잿물을 퍼마시고 자살을 기도할 그 즈음에 그녀의 오빠 유진명은 똥물을 두어 양동이나 받아 마셔야 했다.

사정은 이렇다. 유진명은 반정부 인사로 분류되어 '업계에서 기술이 좋기로 소문난' 차씨 성 가진 자에게 지독한 고문을 당하였고, 매를 맞아 죽게 생겼기에 어혈을 풀기 위하여 똥물을 받아 먹은 것이다. 한편, 차씨 성 가진 자는 유진명의 동생 유진숙을 겁간하여 임신시켰는데, 유진숙은 이것이 치욕스러워 죽으려고 양잿물을 마셨던 것이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유진숙은 살아 남았고 열 달 뒤에 아이를 낳았는데, 낳고 보니 토끼였다. 유진숙은 침묵으로 차씨 성 가진 자에게 반항하다 정신에 문제가 생겨 오락가락하는 사람이 되었지만 토끼는 차상문이라는 이름을 얻어 착실히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토끼가 또래 아이들보다 영특하였고, 미국에서 저개발 국가의 인재들을 모아 미국에서 교육을 시키는 B.P.라는 프로젝트의 혜택을 받아 유학을 떠나게 된다. 

미국은 한창 베트남전에 발을 잘 못 들여놔 반전 열풍이 불 때였다. 학생들이 반전 구호를 외치고, LSD에 취한 히피들이 짐 모리슨을 들었으며, 프리 섹스 유행이 살풋 불어닥치던 시기였다. 차상문은 본디 여성 알레르기가 있어서 이성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으나 룸메이트 밥의 소개로 신씨 성의 동종 토끼를 만나 첫사랑에 설레게 되고, 자위의 몽롱한 맛도 알게 된다. 하지만 이성 토끼가 하필이면 재수 없게 북조선 토끼라는 사실 때문에 첫사랑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그저 수학 공부를 열심히 하다가 덜컥 교수까지 되고 만다.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대 교수 자리를 꿰어 찬 차상문은 80년대 한국의 민주화 열풍 한 가운데 서게 된다. 나름의 신념으로 시국을 돌파해 보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시대의 분위기에 떠밀려 강단을 떠나게 된다.

강단을 떠난 차상문에게 충격이 된 말이 있었으니 '쿵쿵거리지 마라, 땅이 놀란다' 였다. 차상문은 이 말에 감명 받아 인간 위주로 사고하며 만유를 파괴하는 인본주의를 거부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 저기 출몰하며 가장 효과적이라 생각되는 선전 선동을 벌이는 차상문의 행동은 별다른 반향을 얻지 못하고 끝내 테러리즘 흉내를 끝으로 스스로 벽 속에 갇히고 만다.


<천재토끼 차상문>은 패배주의자의 씁쓸한 중언부언에 불과한 소설이다. 소설은 <청년을 위한 한국현대사>와 같은 진보적 현대사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질 법한 사건들 전반을 걸터듬는데, 인간과는 다른 '토끼' 라는 종을 탄생시켜 새로운 시각을 도모하나 사실 새로운 시각이란 거의 없다. 토끼의 시각과 견해는 오히려 '맛이 가기 시작하던 시기'의 김지하가 '밥' 타령을 하던 모습, 감옥에 갔다온 박노해가 '사람만이 희망' 이라며 두루뭉술 해지던 시기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 김남일은 현대사의 질곡과 모순에 눈 돌리지 않으려는 근성을 보여주지만, 그 질곡을 헤쳐나가려던 수많은 패배자들에 대한 조롱기 섞인 희화화에도 별다른 주저함이 없다. 하지만 정작 그 자신도 대안이 없기는 마찬가지어서, 소설은 후반부로 갈수록 토끼가 도대체 뭘 주장 하고자 하는지 알 수가 없고 비맞은 중이 중얼거리듯 어수선하다.


지금도 인도에서는 180만여 명의 신도를 지닌 자이나교가 가장 아름다운 대안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철저한 불살생과 무소유, 그리고 엄격한 고행을 추구한다... 아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들인가!


이 대목에서 분명 김남일은 기존의 변혁 운동과 저항에 대한 반성과 대안으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극단적 근본주의' 에 잠시 현혹되는 듯 하다. 하지만 바로 다음 문장을 보자.


하지만 바로 그다음 순간, 차상문은 그들의 시간이 제 어머니의 그것처럼 움직이지 않거나 혹은 영원 속에 갇혀 있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다. 아무리 좋은 사상이라도 중력이나 자기장을 견디지 못 한다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쨌든 인간만을 중심에 놓는 오만한 인도주의에 대한 경종을 울릴 필요는 있었다.


근본주의는 아닌 것 같고, 토끼를 내세웠으니 인도주의는 거부해야 할 것 같고, 그렇다고 거부 이후의 그림을 그릴 수도 없으니 얼결에 '어쨌든' 으로 얼버무리고 마는 것인가.


소설이 매우 진보적인 듯 하면서도 패배주의자의 중언부언으로 읽힐 소지가 바로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 진지한 성찰과 반성을 통한 교훈 없이 '해봤지만 안되었으니 일단 틀린 거였다' 식으로 대충 덮어버리는 태도는 위험하다. 긍지 높았던 패배자들이 조롱받고 희화화 될 때, 그들이 저항한 질곡과 억압의 역사 역시 '견딜만 했던, 나름대로 유머가 있던 시대'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설의 맥을 끊는 만연체와, 그 만연체 곳곳에서 나타나는 비문이 거슬리는 대목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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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 2003 제27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종은 지음 / 민음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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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는 서울이 고향인 네 명의 별볼일 없는 젊은이들의 이야기이다. 이들을 특성 짓는 것은 그들이 나고 자란 도시 '서울', 그리고 각자의 이름이다.

깨우쳐 나아가라는 뜻의 유진(諭進), 살펴 다스리라는 뜻의 찰리(察理), 기운을 불러 일으킨다는 뜻의 호기(護氣), 무리를 이끌라는 뜻의 중만(衆蔓). 작가는 각자의 이름을 얻게 되는 과정을 구성진 가락으로 풀어낸다.

물론, 이들이 이름에 걸맞게 살아온 것은 아니다. 어딘가 하자와 흠결을 갖고 있는 가정에서 자라서 모양꼴을 제대로 못 갖춘 성인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찰리가 플랜A를 제출하기 시작하고 플랜K를 거치는 동안 계획은 점차 정교해 지는데, 계획이란 다름 아닌 은행 털기 따위이다. 찰리의 계획이 고속도로 휴게소를 터는 데 이르자 넷 모두가 계획의 구체성과 실현 가능성에 공감하게 되어 실행에 옮긴다. 

준비된 결말은 두가지인데 성공적으로 강탈한 돈을 가지고 건물을 사서 저마다 취향에 맞는 장사를 하며 살아간다는 해피앤딩, 그리고 죄다 경찰서에 굴비두름 엮이듯 잡혀가서 얼토당토 않은 범행동기를 댄다는 언해피 앤딩이 그것이다.

그런데 결말은 하나가 더 있으니, '그들이 휴게소를 털어 성공시킨다'는 것은 네 명이 버거킹에서 모여 나누던 잡담이라는 것이다. 잡담이 끝날 무렵 유진이 버거킹 영업이 몇 시까지 인지 묻고, 매출을 물은 다음 "야 셔터 내려!" 라며 버거킹을 털기 시작한다는 결말이다. 결말이 곧 시작인 구조인 것이다.

 

내 고향은 서울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고향이 어디냐고 물을 때엔 본적지를 대거나, 오랫동안 살았던 지방 도시의 이름을 대곤 한다. 겨우 다섯살이 되기 전에 서울을 떠났기 때문에, 서울과 관련한 기억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고향은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두번째 숫자'로 표기되어 있을 뿐 정서적으로는 나에게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내 고향이 서울이면서도,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서울을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할 때가 있었다. 

작가의 문체는 구성진 가락을 띤다. 만연체이고, 만연체가 때로 그렇듯 비문이 드문 드문 섞여 있다. 이문구식의 해학도 얼핏 엿보인다. 하지만 아직은 내공이 부족한 느낌도 많이 든다. 해학이란 모름지기 비틀고 꼬고 과장하되 상황을 공감하게 만드는 기운까지 더불어 갖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김종은은 공감하게 만드는 면에서 내공이 아직은 부족한 것 같다. 

 

http://blog.naver.com/rainsky94/220508795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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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의 생각을 읽자 - 만화로 읽는 21세기 인문학 교과서 인문학의 생각읽기 3
윤순식 지음, 박지훈 그림, 손영운 / 김영사on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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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만(1875~1955)는 1929년, 그의 나이 54살에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로 노벨문학상을 받는데 작가 자신은 심사위원들이 <마의 산>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 데 불만이었다고 한다.

그는 80년의 생애 동안 장편 소설 8편을 비롯 단편 소설, 희곡, 일기 등 수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자신의 서간문과 일기는 사후 25년 뒤 공개하라고 유언을 남긴다. 1980년에 봉인된 서고를 공개한 결과 동성애 관련 글이 많이 발견되어 그의 문학이 새로운 각도에서 활발하게 조명된다.


처녀작은 <타락>으로 1894년에 발표되었는데 한 순진한 젊은이가 어느 여배우에게 반하여 그녀와 첫사랑을 나누지만 그녀에게 애인 겸 후원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어 파멸한다는 내용이다. 3년 뒤인 1897년에 <키 작은 프리데만 씨>가 발표된다. 두 작품은 19세기 말 데카당스 느낌의 분위기를 잘 나타낸다.

그의 첫 장편은 1901년에 발표된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이다. 부제는 '한 가문의 몰락' 이었는데, 뤼베크 시민의 가정을 모델로 4대에 걸친 한 시민 계급 가문의 몰락 과정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부덴브로크 가문 사람들은 1, 2대(代)때 성실과 신뢰를 바탕으로 부를 축적하고, 3대 때에는 시정 장관이 될 정도로 성공하지만 4대인 '하노'에 이르러 상인 기질이 섬세하고 유약한 예술가 기질로 변하고 만다. '하노'는 어린 나이에 죽고, 이로써 부덴브로크 가문은 몰락하고 만다.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은 부르주아 계급의 필연적 몰락을 나타내는 리얼리즘 작품의 본보기로 사회주의 비평가들에게 극찬을 받았고, 후기 시민 계급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킨 작품이었다. 이런 이유로 1901년 이후 작품은 500만부 이상이 팔렸다.

작품은 토마스 만의 삶이 녹아들어 있는데, 토마스 만이 17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가업으로 100년 이상 이어오던 곡물상회가 파산하자 가족이 모두 뤼베크를 떠나 독일 남부로 이사를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화재보험회사의 견습 사원으로 취직한 그는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글을 썼는데 이런 경험이 작품의 바탕이 되었다. 또 이러한 토마스 만의 경험이 독일 북부의 현실적인 성향을 극복하고 남부의 예술적인 성향으로 변신하는 과정이라고 분석되기도 한다. 

이러한 독일 북부와 남부의 서로 다른 모습이 심화되어 창작된 소설이 1903년 발표된 <토니오 크뢰거>이다. 건전하고 행복한 시민의 삶을 동경하면서도 그 속에 뛰어들 수 없는 예술가의 숙명적인 고독과 고뇌를 그린 이 작품의 모티프는 그 이후로도 토마스 만 작품에서 자주 차용된다. 그리고 이러한 서술방식을 '아이러니'라고 표현했는데, 사물의 상반되는 두 측면을 다룰 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음으로써 양면을 모두 볼 수 있게 해주는 서술 방식이다. 즉, 양극적 모순 속에서 깊은 고뇌를 통해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토마스 만의 산문 정신이자 소설 기법인 것이다.

1912년, 37세 때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을 발표한다. 소설은 탁월한 예술가인 '에센바하'가 베네치아에서 만난 미소년 '타치오'에게 반해 예술가적인 냉정함을 잃고 타치오와 인간적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무기력과 탈진상태에서 죽음에 이른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쇼펜하우어, 바그너, 니체의 영향을 받았는데 쇼펜하우어로부터는 염세주의를, 바그너로부터는 '음악에 대한 도취를 통한 죽음에의 동경'을, 니체로부터는 '삶의 이념'을 물려받는다.


한편, 토마스 만의 형 하인리히 만(1871~1950)은 독일 시민 계급의 봉건적 노예근성과 비민주적 사고 방식을 날카롭게 풍자하고 비판하였다. 그는 권위주의적 국가와 파시즘의 폭정에 반대했기 때문에 사회 참여적인 프랑스 문학에 가까왔다. 반면, 토마스 만은 초기에 정신적, 미학적 문제에만 집중했다.

1918년 토마스 만은 <한 비정치인의 고찰>이라는 책에서 보수주의적이고 국수주의적 면모를 보인다. 이러한 두 진영의 논쟁을 독일 문학사에서는 <형제 논쟁>이라 부른다. 

하지만 1924년, 토마스 만이 49세가 될 때 큰 변화가 일어나는 데 장편소설 <마의 산>을 발표하면서 부터였다. <마의 산>에서도 과거에 중요시 하던 '시민성과 예술성', '생과 죽음', '문명과 야만' 등 양극적인 문제를 놓고 고뇌하는 모습이 나오지만 과거의 많은 것들과의 결별이 드러난다. <마의 산>에서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의 입을 빌려 "인간은 선과 사랑을 위해 결코 죽음에 자기 사고의 지배권을 내주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게 함으로써 현실 참여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특히 1차 세계대전을 다룸으로써 사회와 시대를 분석하기 시작한다.

1930년, 55세가 되던 해 발표한 <마리오와 마술사>라는 단편소설에서는 나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그렸고, 나치 반대 강연에도 나선다. 그러던 중 1933년, 토마스 만이 스위스에 있을 때 나치가 집권하고 토마스 만은  귀국을 포기하게 된다. 1938년까지 스위스에서 지내던 그는 미국으로 망명한다. 형과 화해한 토마스 만은 1940년부터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이라는 방송에서 연설을 했다. 창작 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고, 망명해 온 작가들에게 생활비 지원 등 많은 도움을 준다. 그 중에는 브레히트도 있었다.

1943년, <요셉과 그 형제들>이 발표된다. 토마스 만은 나치의 폭정이 너무 가혹해서 직접 거기에 저항하는 묘사를 하는 것은 별 효과가 없다고 생각하였기에 유대 정신을 그려 나치의 반유대감정과 교묘히 대비시켜 그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하였다. 이와 비견되는 작품이 1939년에 발표된 <바이마르의 로테>라는 소설이다. 괴테가 바이마르 공화국의 재상이 되었을 무렵 로테가 그녀의 딸과 바이마르에 와서 괴테와 만나고 돌아가기까지의 이야기인데 여기서도 역시 나치의 박해를 직접적으로 다루진 않는다. 하지만 토마스 만은 이런 내용을 통해 나치의 야만성을 유럽 문화의 신화적 세계와 찬란한 독일 문화의 전성시대와 비교하고자 하였다.

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던 1943년 독일 망명 문학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는 <파우스트 박사>를 집필하고 1947년에 발표한다. 부제목은 '한 친구가 이야기하는 독일 작곡가 아드리안 레버퀸의 생애'였는데 이 소설에서도 나치의 박해와 야만성은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천재적 음악가 아드리안 레버퀸은 더 이상 새로운 창작을 할 수 없게 되자 악마와 계약하게 된다. 즉, 의식적으로 성병에 감염되는 것이다. 토마스 만은 독일인의 성정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은 음악이라 생각하였다.

1951년 <선택받은 사람들>을 발표한다. 근친상간이라는 죄를 지은 죄인이 속죄 후 신의 은총을 받고 교황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후로도 1953년 <기만당한 여인>등 몇 작품을 발표하지만 이 시기 그가 가장 아끼는 작품은 <파우스트 박사>였다. 이후로도 활발한 강연 활동을 벌이다가 1955년 8월 22일 혈전증으로 취리히 시립병원에서 생을 마감했고, 취리히 근교 소도시 교회 묘지에 안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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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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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굴지의 대기업 회장 아들이 미국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는 기사. 연이어 자신이 7급 공무원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는, 다소 생뚱 맞은 이야기. 다음 장의 액자 속 이야기에서는 적그리스도니 소크라테스니 하는, 다소 자의식 과잉의 등장인물들이 맥락 없이 떠들어 대고 있다. 다소 산만하고 혼란스러운 이 구성은 소설을 읽다보면 서로 연관을 갖기 시작한다.


화자인 '나'는 7급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고, 일면 마초적인 인물로 별명은 적그리스도이다. 인서울 대학에 다니고 있지만 이렇다 할 열정은 없다. 세속적인 성공을 쫓아 아첨을 일삼는 부류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그렇기에 대기업에 취직한 선배들이 후배들을 모아 놓고 인생 선배로서 그럴싸한 소리를 뇌까릴 때 대놓고 비아냥 거릴 수가 있었다.

이때 화자의 발언에 온도 차는 있지만 동조하여 자취방을 찾아든 이가 휘영, 병권, 그리고 세연이다. 이 중 세연이 가장 주목할만한 인물인데, 그녀는 빼어난 머리도 좋고 얼굴도 예뻤다. 그녀 주변에는 소문이 끊이질 않았는데 매우 추악한 소문부터 그녀의 뛰어난 능력을 간증하는 소문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했다. 그런 세연이 학교 연못, 그것도 불과 50cm에 불과한 연못에 빠져 죽는다. 여러가지 정황상 자살이었다. 세연은 죽기 전 '나'와 휘영, 병권 등에게 인터넷 예약 메일로 유서와 잡기 묶음을 남긴다. 묶음 중 일부는 암호가 걸려 있었는데, 암호는 '잡기 속에서 등장하는 주요 인물이면서 재키(세연), 소크라테스(휘영), 재프루더(병권), 루비(추윤영), 하비(?), 제리(?), 메리(?)가 아닌 누군가' 였다. '나'인 적그리스도는 암호가 아니었다. 


세연이 죽기 전 '나'에게 소개해주고 간 여자가 추윤영이다. 그녀는 세연 못지 않게 예뻤고 세연을 추종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세연은 추윤영에게 '나'와 사귀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추윤영은 '나'와 사귀기 시작한 뒤로 관계에 몹시 집착했고, 자신을 세연으로부터 지켜달라고 애걸한다. 세연은 추윤영에게 자신을 따라 자살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추윤영과 동거하며 7급 공무원 준비를 시작한다. 2년쯤 흐른 뒤 추윤영이 공부에 도움 되지 않는다는 사실과, 그보다는 처음부터 느꼈던 찜찜함과 욕정적인 관계를 정리하고 싶은 욕망에 글자 그대로 '도망친다'. '나'는 가까스로 7급 공무원에 합격하고, 추윤영은 미국으로 유학간다.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공무원 생활과 '내'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휘영은 잡지가 기자가 되어 일간지 기자를 동경하며 살았고, 병권은 공인회계사 준비를 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whydoyoulive.com이라는 자살 사이트가 열린다. 세연이 사망한지 5년이 되던 즈음이었다. 자살선언문이 사이트에 올라오는데, 간략히 요약하자면 '우리 세대는 더 이상 이룰 것도, 변화시킬 것도 없다. 기껏해야 이미 다 이루어진 세상을 잘 굴러가도록 하는 노예 역할이 주어졌을 뿐이고, 그 과정에서 충족감을 느낀다고 해도 비루한 감정일 뿐이다. 따라서 자살을 통해 세상에 메시지를 던질 수 밖에 없다'는 모순되는 듯 하면서도 일면 공감이 가는 내용이다. 단서 조항으로는 '다른 사람들이 자살의도를 오해하지 못하도록 가장 완벽한 상태에서 죽어야 한다' 가 달려 있었다. 즉, 취업에 실패했다거나 금전적인 문제가 생긴 직후 자살선언에 따라 죽어봤자 언론과 사람들은 '돈에 쪼들렸거나 우울증이 원인이 되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 오도한다는 것이다. 이 사이트에는 세연의 잡기가 매일같이 조금씩 올라왔다. 세연은 자신을 뒤따라 자살하도록 암시를 걸고, 윽박지르고, 심리적으로 약한 면을 건드리고, 추종자의 애정을 이용해 왔다. 그녀가 그들에게 암시하고 약속을 받아낸 시점이 자신이 자살한 뒤 5년 뒤였다.

추윤영이 사이트에 자살예고문을 올린 후 물에 빠져 죽고, 대기업 회장 아들(그가 하비였다)이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형태의 자살을 성공시킨다. 얼마 뒤 병권이 자살한다.

우연한 계기로 암호가 풀린다. 재키, 소크라테스, 재프루더 등의 별명은 모두 케네디 암살과 관련된 이름들이었으므로 빠진 이름은 캐네디였다. 잡기를 읽은 후 '나'는 '죽음의 굿판'을 걷어내기 위해 사이트에 도발성 글을 올리고, 사이트 운영자(그녀가 메리로 보인다)가 '나'에게 연락을 해온다. 약속 장소에 간 나는 그녀가 세연과 너무 닮아서 놀라고 만다. 그녀는 자신이 세연의 동생이라고 했다. 그녀가 제리였다. '나'는 그녀에게 자의식 과잉의 억지 논리로 사람들을 자살로 내몰지 말라며 3년 내에 다른 형태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고 소리친다. '나'는 나중에서야 그 장면과 음성이 모두 녹화되어 사이트에 올라가 결과적으로 자살사이트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자신의 적수가 누구인지를 알 때만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는 새뮤얼 헌팅턴의 말을 떠올리며 whydoyoulive.com과는 다른 대안을 찾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살아갈 것을 다짐한다.


처음엔 이 책도 <철수사용설명서>와 같은 부류의 책인가 싶었으나 그것은 오해였다. 하지만 썩 와닿는 소설도 아니었다. 그 이유가 뭘까 곰곰히 생각해보았는데, 한수산의 <부초>가 자꾸 떠올랐다. 왜 한수산의 <부초>가 떠올랐을까, 나는 한수산을 썩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점심 먹고 멍하게 있다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한수산이 <부초>를 쓰기 위해 써커스단을 따라다니며 취재하며 근성을 보였던 데 반해 최근의 한국소설들은 머리 속에서 씌여진다. 그럴싸한 책을 인용하고, 짜집기하고, 이럴것이다 저럴것이다 해가면서 한 권의 책이 레포트 씌여지듯 완성된다. 그리고 평론가들은 문제작이다, 공론을 일으켰다 하면서 상을 준다. 어쩌면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라서 많은 기대를 했기 때문에 이런 박한 평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럴 땐 내가 옛날 사람같다고 느낀다.

아니면 작가가 기자라는 직업을 가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소설에서는 국회의원 보좌관을 쓰레기쯤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나는 기자도 보좌관과 오십보백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행태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 적어도 내가 경험하기론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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