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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국내 굴지의 대기업 회장 아들이 미국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는 기사. 연이어 자신이 7급 공무원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는, 다소 생뚱 맞은 이야기. 다음 장의 액자 속 이야기에서는 적그리스도니 소크라테스니 하는, 다소 자의식 과잉의 등장인물들이 맥락 없이 떠들어 대고 있다. 다소 산만하고 혼란스러운 이 구성은 소설을 읽다보면 서로 연관을 갖기 시작한다.
화자인 '나'는 7급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고, 일면 마초적인 인물로 별명은 적그리스도이다. 인서울 대학에 다니고 있지만 이렇다 할 열정은 없다. 세속적인 성공을 쫓아 아첨을 일삼는 부류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그렇기에 대기업에 취직한 선배들이 후배들을 모아 놓고 인생 선배로서 그럴싸한 소리를 뇌까릴 때 대놓고 비아냥 거릴 수가 있었다.
이때 화자의 발언에 온도 차는 있지만 동조하여 자취방을 찾아든 이가 휘영, 병권, 그리고 세연이다. 이 중 세연이 가장 주목할만한 인물인데, 그녀는 빼어난 머리도 좋고 얼굴도 예뻤다. 그녀 주변에는 소문이 끊이질 않았는데 매우 추악한 소문부터 그녀의 뛰어난 능력을 간증하는 소문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했다. 그런 세연이 학교 연못, 그것도 불과 50cm에 불과한 연못에 빠져 죽는다. 여러가지 정황상 자살이었다. 세연은 죽기 전 '나'와 휘영, 병권 등에게 인터넷 예약 메일로 유서와 잡기 묶음을 남긴다. 묶음 중 일부는 암호가 걸려 있었는데, 암호는 '잡기 속에서 등장하는 주요 인물이면서 재키(세연), 소크라테스(휘영), 재프루더(병권), 루비(추윤영), 하비(?), 제리(?), 메리(?)가 아닌 누군가' 였다. '나'인 적그리스도는 암호가 아니었다.
세연이 죽기 전 '나'에게 소개해주고 간 여자가 추윤영이다. 그녀는 세연 못지 않게 예뻤고 세연을 추종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세연은 추윤영에게 '나'와 사귀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추윤영은 '나'와 사귀기 시작한 뒤로 관계에 몹시 집착했고, 자신을 세연으로부터 지켜달라고 애걸한다. 세연은 추윤영에게 자신을 따라 자살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추윤영과 동거하며 7급 공무원 준비를 시작한다. 2년쯤 흐른 뒤 추윤영이 공부에 도움 되지 않는다는 사실과, 그보다는 처음부터 느꼈던 찜찜함과 욕정적인 관계를 정리하고 싶은 욕망에 글자 그대로 '도망친다'. '나'는 가까스로 7급 공무원에 합격하고, 추윤영은 미국으로 유학간다.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공무원 생활과 '내'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휘영은 잡지가 기자가 되어 일간지 기자를 동경하며 살았고, 병권은 공인회계사 준비를 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whydoyoulive.com이라는 자살 사이트가 열린다. 세연이 사망한지 5년이 되던 즈음이었다. 자살선언문이 사이트에 올라오는데, 간략히 요약하자면 '우리 세대는 더 이상 이룰 것도, 변화시킬 것도 없다. 기껏해야 이미 다 이루어진 세상을 잘 굴러가도록 하는 노예 역할이 주어졌을 뿐이고, 그 과정에서 충족감을 느낀다고 해도 비루한 감정일 뿐이다. 따라서 자살을 통해 세상에 메시지를 던질 수 밖에 없다'는 모순되는 듯 하면서도 일면 공감이 가는 내용이다. 단서 조항으로는 '다른 사람들이 자살의도를 오해하지 못하도록 가장 완벽한 상태에서 죽어야 한다' 가 달려 있었다. 즉, 취업에 실패했다거나 금전적인 문제가 생긴 직후 자살선언에 따라 죽어봤자 언론과 사람들은 '돈에 쪼들렸거나 우울증이 원인이 되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 오도한다는 것이다. 이 사이트에는 세연의 잡기가 매일같이 조금씩 올라왔다. 세연은 자신을 뒤따라 자살하도록 암시를 걸고, 윽박지르고, 심리적으로 약한 면을 건드리고, 추종자의 애정을 이용해 왔다. 그녀가 그들에게 암시하고 약속을 받아낸 시점이 자신이 자살한 뒤 5년 뒤였다.
추윤영이 사이트에 자살예고문을 올린 후 물에 빠져 죽고, 대기업 회장 아들(그가 하비였다)이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형태의 자살을 성공시킨다. 얼마 뒤 병권이 자살한다.
우연한 계기로 암호가 풀린다. 재키, 소크라테스, 재프루더 등의 별명은 모두 케네디 암살과 관련된 이름들이었으므로 빠진 이름은 캐네디였다. 잡기를 읽은 후 '나'는 '죽음의 굿판'을 걷어내기 위해 사이트에 도발성 글을 올리고, 사이트 운영자(그녀가 메리로 보인다)가 '나'에게 연락을 해온다. 약속 장소에 간 나는 그녀가 세연과 너무 닮아서 놀라고 만다. 그녀는 자신이 세연의 동생이라고 했다. 그녀가 제리였다. '나'는 그녀에게 자의식 과잉의 억지 논리로 사람들을 자살로 내몰지 말라며 3년 내에 다른 형태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고 소리친다. '나'는 나중에서야 그 장면과 음성이 모두 녹화되어 사이트에 올라가 결과적으로 자살사이트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자신의 적수가 누구인지를 알 때만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는 새뮤얼 헌팅턴의 말을 떠올리며 whydoyoulive.com과는 다른 대안을 찾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살아갈 것을 다짐한다.
처음엔 이 책도 <철수사용설명서>와 같은 부류의 책인가 싶었으나 그것은 오해였다. 하지만 썩 와닿는 소설도 아니었다. 그 이유가 뭘까 곰곰히 생각해보았는데, 한수산의 <부초>가 자꾸 떠올랐다. 왜 한수산의 <부초>가 떠올랐을까, 나는 한수산을 썩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점심 먹고 멍하게 있다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한수산이 <부초>를 쓰기 위해 써커스단을 따라다니며 취재하며 근성을 보였던 데 반해 최근의 한국소설들은 머리 속에서 씌여진다. 그럴싸한 책을 인용하고, 짜집기하고, 이럴것이다 저럴것이다 해가면서 한 권의 책이 레포트 씌여지듯 완성된다. 그리고 평론가들은 문제작이다, 공론을 일으켰다 하면서 상을 준다. 어쩌면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라서 많은 기대를 했기 때문에 이런 박한 평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럴 땐 내가 옛날 사람같다고 느낀다.
아니면 작가가 기자라는 직업을 가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소설에서는 국회의원 보좌관을 쓰레기쯤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나는 기자도 보좌관과 오십보백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행태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 적어도 내가 경험하기론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