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베르의 앵무새 열린책들 세계문학 56
줄리안 반즈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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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 소설의 전형으로 꼽히는 <플로베르의 앵무새>는 퇴역한 의사 제프리 브레이스웨이트가 프랑스 북서부 노르망디 지역의 루앙을 여행하면서 시작된다.

브레이스웨이트는 플로베르가 쓴 <순수한 마음>의 여주인공 펠리시테가 소중히 여겼던 앵무새 룰루가 박제되어 보존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문제는 이 박제 앵무새가 두 마리라는 것이었다. 브레이스웨이트는 두 마리 중 어느 것이 진짜인지 밝히고 싶었다. 만약 이 문제를 해결하면 플로베르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더욱 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브레이스웨이트는 왜 플로베르에 대해 탐구하고자 하는가? 그 해답은 소설의 후반부에 나오는데, 브레이스웨이트에게는 에마라는 아내가 있었다. 그녀는 '결혼생활의 진부함'에서 탈출하기 위한 '가장 인습적인 방법'으로 간통을 저질렀다. 그리고 얼마 뒤 자살했는데, 브레이스웨이트는 이러한 자신의 상황이 <보바리 부인>의 내용과 매우 흡사함을 깨닫고 플로베르를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을 느꼈던 것이다.

브레이스웨이트는 아마추어 탐구자로서 플로베르에 대한 이런저런 사실들을 나열하고, 자신의 감상을 덧붙이며, 일반에게 잘못 알려진 내용들(비평가 에니드 스타키의 비평)을 바로잡기도 한다. 인생과 예술, 전기적 진리의 모호함, 사랑의 문제, 과거는 인식될 수 있는지 여부 등이 픽션, 문학비평, 풍자, 전기, 우화, 시험지 등의 형태로 제시되고 브레이스웨이트 자신의 삶과 교차되기까지 한다.

자, 그러면 처음으로 돌아가 플로베르의 진짜 앵무새는 둘 중 어떤 것이었을까? 결론은 허무하다. 플로베르는 소설을 쓸 당시 박물관으로부터 앵무새를 빌렸었는데 이 앵무새는 반납된 기록이 있었다. 나중에 그의 생가와 박물관에 소품으로 쓰기 위해 가장 그럴싸해보이는 앵무새가 놓여졌으므로 어떤 앵무새가 룰루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두 앵무새 중 하나가 진짜일 수도, 아니면 모두 가짜일 수도 있는 것이다.

브레이스웨이트는 과거로부터 삶의 통찰을 얻어 현재의 자신을 분석하고자 했지만 '어떤 것이 진짜 박제 앵무새인지' 조차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러면 브레이스웨이트의 이 긴 여정은 단지 헛수고였을까? 진리는 진정 <기름으로 범벅이 된 돼지 새끼>와 같아서 잡을 수도 없고, 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고 마는 것일까?


줄리언 반스는 1946년 영국 중부의 레스터에서 태어났는데, <옥스퍼드 영어 사전> 편집 일을 했고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기도 했지만 작가에 뜻을 두어 1980년에 처녀작 <메트로랜드>를 발표하며 등단한다. <플로베르의 앵무새>는 그의 세번째 소설인데 그의 인문학적 박식함에 형식적 실험이 적절히 결합되어 독자와 평론가 모두로부터 좋은 평을 얻어 제프리 페이버 기념상, 메디치상, E.M.포스터상, 구텐베르크상 등을 수상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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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묘관의 살인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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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와미나미는 가마쿠라의 시계관에서 일어난 대량 살인사건 취재반으로 일한 후 <CHAOS> 편집부에 서 일하게 된다. 그가 맡은 작가는 시시야 가도미. 본래는 주지의 아들이지만 절을 물려받는 대신 마니악한 추리소설을 쓰는 작가이다.

어느 날, 이들에게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된다. 편지는 신주쿠 파크사이드호텔 직인이 찍힌 편지지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씌여 있었다. 내용은 시시야 가도미가 쓴 <미로관의 살인>을 최근에 읽었는데 자신이 겪은 사건에 나오는 장소와 연관성이 있어 꼭 상담해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얼마 뒤 약속 장소에 나타난 사람은 최근 시나가와 호텔 화재 사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로 나이는 60대이고 이름은 아유타 도마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진술에 자신 없어 했다. 화재 사건의 충격으로 기억상실증에 걸렸기 때문이다. 이름도 다른 사람이 알려줘서 알게된 것일 뿐, 그 이름이 자신의 이름이라는 자각은 없었다. 그가 상담을 청한 이유는 불에 타 죽을 위기에서도 손에서 놓치 않은 한 권의 수기 때문이었다. 그 수기에 씌여 있는 내용은 너무나도 기묘했다.


수기에 따르면 아유타 도마는 <흑묘관>이라 불리는 별장의 관리인이었다. 별장을 관리하는 동안 주인은 거의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호젓한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의 아들과 친구들이 별장에서 며칠 묵어간다는 연락이 온다. 아유타 도마는 노구를 이끌고 집을 치운 후 이들을 맞는다. 찾아온 사람은 총 네 명으로, 흑묘관 소유주의 아들인 가자마 유키, 가자마 유키의 사촌형인 히카와 하야토, 그리고 친구인 기노우치 신과 아사오 겐지로였다. 이들은 세이렌이라는 이름의 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했는데 최근 보컬인 레이코가 탈퇴해서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히카와 하야토를 뺀 셋은 개망나니로 LSD를 복용하고 대마초를 피우며 별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외출했다 돌아오면서 쓰바키모토 레나라는 여자를 데리고 돌아온다. 그날 밤도 이들은 마약 파티를 벌이다가 히카와 하야토까지 끌어들인다.

다음 날 아침, 아유타 도마가 광란의 파티가 벌어진 장소에 가보니 쓰바키모토 레나가 빨간 스카프에 목이 졸려 죽은 시체로 발견된다. 방은 밀실이였고, 네 명 모두 그녀와 난교를 벌인 기억만은 뚜렷하다. 결과적으로 넷 중 하나는 살인자였다. 공황 상태에 빠진 이들이 경찰을 부르려고 할 때 아유타 도마가 만류한다. 그녀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별장으로 왔으니 별장 지하에 묻으면 아무도 모를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별장 지하에서 이들은 소녀와 고양이의 시체를 발견한다. 심약한 겐지로가 자신이 쓰바키모토 레나를 죽인 것 같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해버리자 이들은 마음의 짐을 조금 덜었다는 느낌으로 모든 사건을 덮어버린다.


아모 박사는 양녀와 살기 위해 20년 전에 나카무라 세이지에게 흑묘관을 건축을 의뢰한다. 나카무라 세이지는 어떤 인물인가? 금세기 초반에 활동한 기괴한 건축가 줄리앙 니콜로디는 시대에 대한 혐오로 쓸모 없는 건축물만 지었다고 하는데, 나카무라 세이지는 이에 영향 받아 비밀 장치와 비밀 방이 있는 기괴한 건축물들을 만들어 왔다. 그리고 흑묘관도 그 중 하나였다.

수기를 사실이라 가정한 가와미나미와 시시야 가도미는 <흑묘관>을 열심히 추적하지만, 흑묘관과 비슷한 건물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수기는 단지 흥미본위의 소설에 불과했던 것일까?


다소 억지스러운 면은 있지만 역위증, 도지슨(루이스 캐럴의 본명), 기억상실 이라는 키워드를 절묘하게 조합하여 반전을  엮어내는 솜씨는 본격물 마니아들에게 큰 선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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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제벨의 죽음 동서 미스터리 북스 81
크리스티나 브랜드 지음, 신상웅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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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장교 조니 와이즈가 약혼자 파페튜어 커크를 만나기 위해 이세벨의 집으로 간다. 이세벨은 파페튜어 커크를 얼 앤더슨이라는 배우와 엮어주고, 그 댓가로 돈푼이나 쥐게 되길 원했기에 조니 와이즈가 달갑지 않았다. 조니와 이세벨은 문간에서 잠시 들어가니 못 들어가니 실랑이를 벌이고, 마침내 조니 와이즈가 방문을 연다. 방 안에서는 파페튜어 커크와 얼 앤더슨이 껴안고 있었고, 그 장면을 목격한 조니 와이즈는 그날 밤 자살하고 만다.


그로부터 7년의 세월이 흘렀다. 영국령 말레이시아 영사관에서 근무했던 중년의 에드거 포트는 야외극(pageant)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내 포트 부인은 왜 남편이 뜬금없이 야외극에 뛰어 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에서 돌아온 노처녀 수잔 베틸레이는 그 이유가 뻔하다고 생각했다. 에드거 포트는 육감적인 이세벨에게 빠졌고, 이세벨은 야외극에서 주인공을 하고 싶어 했다. 수잔 베틸레이 역시 에드거 포트의 제안으로 야외극에 참여한다.

그 밖에도 수마트라에서 귀국한 '브라이언 투 타임즈', 파페튜어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조지 엑스마우스, 배우 얼 앤더슨 등이 야외극에 참여했다.

야외극 상연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이세벨과 얼 앤더슨, 그리고 파페튜어에게 협박장이 배달된다. 그들 모두가 곧 죽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마침내 야외극의 막이 오르고, 탑 위에 올라갔던 이세벨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녀는 곧 바닥으로 추락한다. 말이 놀라 뛰쳐 나가고, 11명의 기사 중 한 명이 황급히 이세벨에게 뛰어가지만 그녀는 이미 사망한 뒤였다. 기사 역시 놀라서 대기실로 나가 버린다. 이 모든 것을 지켜봤던 관객 중에는 유능한 경감 콕크릴도 있었다. 콕크릴은 시체 주변에서 두 개의 밧줄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세벨의 몸에서 나온 것은 다이아몬드 브로치와 한 편의 시가 적힌 종이 쪽지였다.


그대를 찬양하는 자

남몰래 간직한 뜨거운 사랑을

살며시 그대에게 전하노라.

보잘것없는 이 선물을 보낸 사람은 누구?

그 이름은 왼편에 늘어선 수수께끼의 기사


유력한 추리는 이렇다. 탑 위에 누군가 다이아몬드 브로치와 쪽지를 놓아 둔다. 이세벨은 다이아몬드 브로치를 발견하고 얼른 품 안에 갈무리한 후 쪽지를 읽게 된다. 쪽지에는 다이아몬드 브로치를 놓아둔 사람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에 고개를 내민다. 그 때 범인은 두 개의 밧줄을 이용하여 이세벨을 땅바닥으로 떨어뜨린다. 군중들이 놀란 틈을 타 그녀의 용태를 살피는 척 하며 기사가 다가가 목을 조른다. 그의 손은 망토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모두에게 알리바이가 있어서 일견 타당한 이 추리는 점차 설득력을 잃게 된다. 그러자 이번에는 여러명이 모의하여 범행을 저지른 것이 아닌가 하는 가설이 떠오른다. 하지만 역시 증거가 없었다. 


이세벨이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실종 되었던 얼 앤더슨의 목이 소포로 배달되고, 이제 남은 사람은 파페튜어 뿐이다.


<당신이 잃어버린 머리들 Heads You Lose(1941)>를 시작으로 <초록은 위험해 Green For Danger(1944)> 등을 발표하며 유명해진 크리스티아나 브랜드가 1948년에 발표한 다섯번째 작품이다.

모두에게 살인 동기가 있고, 그들 모두가 결백을 주장하다가 돌연 태도를 바꾸어 자신이 범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여러가지 가설 모두가 합리적으로 사건을 설명해 주기 때문에 어느 가설을 채택하든 스토리가 이어지는 독특한 작품이다. 크리스티아나 브랜드의 작품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탐정은 콕크릴이고, 그 외에 찰스워스, 처키 등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시리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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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없는 나체들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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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가 오사카 성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성관계하는 동영상이 세간에 유출된다. 그 동영상에 등장하는 남녀는 '미키 & 미치' 로 불렸다. 미키는 요시다 기미코, 미치는 가타하라 미쓰루였다. 동영상은 그쪽 계열 인터넷 게시판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요시다 기미코는 사이타마현 W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신용금고 직원, 어머니는 초등학교 급식 조리사였다. 요시다 기미코는 공립학교를 거쳐 도내 사립대학을 졸업한 후 시가 현 M시의 교원 임용시험에 합격, 사회과를 가르치는 교사가 된다.

그녀는 반성하는 습관이 거의 없었고, 한가지를 꾸준히 생각하는 일도 없었다. 따라서 추상능력도 그다지 높지 않았다. 가타하라 미쓰루와의 사건이 일어나기 전 두 명의 남자와 관계를 가졌으므로 그쪽에 능숙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열한 살 경에 초경을 했고, 성기에 관해서는 무지한 편이었다. 5학년 봄 성기를 최초로 의식하였으나 미숙하게 손가락을 사용하여 통증을 느꼈고, 곧 죄의식을 느껴 그만둔다. 생리통이 심했는데 이것이 그녀의 성격에 얼마간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른다.

사귀었던 두 명의 남자도 특이한 점은 별로 없었다. 첫 번째 남자는 촌티를 벗지 못한 군마현 출신의 대학생이었고, 두 번째 남자는 처음 부임한 학교 교사였다.


한편, 가타하라 미쓰루는 친구가 별로 없었다. 학창 시절 소지품 검사에서 공격용 너클이 튀어 나와 선생과 급우들은 그를 음울한 녀석이라고 기억했다. 여성관은 비뚤어져 있었는데 그가 여성과 관계를 맺는 방식은 대부분 전화방, 만남 사이트 등을 통해서였다. 그는 성적인 관계에서 유별나게 자존심을 세우고 싶어했다. 그가 자존심을 세우는 방식은 집요하게 여성의 클리토리스를 바이브레이터 등을 이용하여 자극하는 것이었다. 그가 자주 애용하던 DVD방 남자는 가타하라 미쓰루가 훔쳐보기, 도촬 등의 코너를 섭렵했다고 증언한다.

가타하라 미쓰루에게는 일상 생활을 하는 여성과 성교를 할 때의 여성이 동일인이라는 인식이 없었다. 그에게는 성교를 할 때의 여성만이 '가면을 벗은 진정한 여성' 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전혀 다른 둘이 만나게 된 과정은 어땠을까? 요시다 기미코의 경우 만남 사이트에 접속하게 된 계기는 순전히 학생지도 차원이었다. 하지만 일단 만남 사이트에 '미키'라는 가명으로 가입하고 나니 호기심에 접속을 시도하게 되었고, 몇 건의 메시지를 받게 되자 조금 대담해지게 된다.

요시다 기미코가 자신의 프로필을 섹스어필하는 방향으로 고쳐 쓰자 메시지가 더 많이 날아왔고, 그 중 가장 무난한 사람과 만남을 시도한 바 그가 바로 가타하라 미쓰루였다.

가타하라 미쓰루는 요시다 기미코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못 생겼다'고 생각하여 실망했지만, 그녀의 가슴이 크고 직업이 교사라는 사실에 점차 흥분하게 된다. 요시다 기미코 역시 자신의 진정한 모습과 '미키'는 별개라고 생각하여 '미치' 앞에서는 기꺼이 '미키'가 되고자 한다.


둘은 주 2~3회 관계를 맺었고, 그녀의 집에도 드나들게 된다. 바이브레이터와 같은 기구를 사용했음은 물론, 로프 등을 사용하기도 했다. 미치는 미키에게 젊은 시절의 아름다운 모습을 남겨두어야 한다고 설득해 사진과 동영상도 찍기 시작한다.


요시다 기미코가 자신들의 성행위 장면이 모 사이트에 게시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된 것은 우연이었다. 얼굴은 모자이크가 되어 있었지만 그녀는 내심 불쾌했다. 하지만 점차 불쾌하다는 감정이 사라짐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이 그 사이트에 게시된 다른 여성들보다 풍만한 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역시 미치와는 이제 관계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미치가 "결혼하자"는 이야기를 꺼낸 것도  결심을 부추기는 계기가 되었다. 요시다 기미코는 미키와 자신을 분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것은 그 둘을 동일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요시다 기미코는 그런 상황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 역시 진정한 자아와 '성적인 자아'는 엄연히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들의 엽기적인 행각은 결혼 제안 이후 조급해진 미치가 미키를 데리고 자신의 모교에서 성행위 동영상을 촬영하다 교사에게 들키자 칼을 휘둘렀다가 체포되면서 세간에 알려지게 된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75년생으로 교토대 법학부 재학 시절인 1998년 문예지 <신조>에 투고한 소설 <일식>이 게재되었다가 다음 해인 1999년 제120회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면서 화려하게 데뷔했다.

우리나라에도 출간되었고 2000년 즈음에 사서 읽었는데 내용은 거의 기억 나지 않는다. 의고체 문장이라고 하나 번역 후에 이를 느끼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일본 소설인데 중세 수도사 이야기가 나와서 다소 의아해 했던 기억이 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책 제목과 작가가 기억에 남는 것은 책을 빌려주었다가 돌려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책을 거의 빌려주지 않기 때문에 빌려준 책은 아주 잘 기억한다. 특이하게도 빌려준 책은 단 한 권도 돌려받지 못했다. <원미동 사람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한 줄도 너무 길다> 등등등.

<달>은 '한번 책을 산 작가의 책은 반드시 한 권 더 사서 본다'는 습관 때문에 샀던 책인데 아직도 책꽂이에 꽂혀만 있다.


<얼굴 없는 달>은 프랑수와 모리아크의 말을 인용하면서 시작된다.


마음속에 아름다운 비밀만 가득하고 암울한 비밀이 없는 인간에 대해 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내면에 암울한 비밀을 지니지 않은 인간은 이야기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 프랑수아 모리아크


성적인 측면은 자주 어둡고 암울하게 다루어지거나 '무시의 대상' 이 된다. 성적 욕구가 무시되거나 어둡게 다루어지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이 이루어낸 많은 가치있는 것들과 배치(背馳)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적당히 이성이나 법, 제도, 종교 등과 조화를 이루게 하려 해도 워낙에 성격이 다르다 보니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진다. 동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발버둥쳐서 이룩한 모든 것들 저변에 깔려 있는 동물적인 욕구의 음험한 냄새. 그것을 어떻게 적당히 손질하여 조화롭게 배치(配置)할 수 있는가 말이다. 그것은 법과 도덕, 종교에 필적할 만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성적 욕구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만 충족되면 수면 위로 부상한다. 문제는 이 욕구에 대해 정당한 대접을 해주지 않으면 비뚤어게 된다는 것이다. 비뚤어진 욕구는 '無'를 잡아 먹고 자란다. 어느 정도 자라난 그것은 숙주인 자아를 벗어나 실체를 가진 덩어리가 되고, 자아를 짓누르고, 자아를 변질시킨다. 이를 의식한 자아의 선택은 한 가지 밖에 없다. 성적 자아와 이성적 자아의 분리이다. 물론 분리는 성공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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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야 삼촌
윤정모 지음 / 다리미디어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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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사촌 동생이 '휴가를 가야하니 아버지를 맡기겠다'고 통보한 뒤 '나'의 집 앞에 삼촌을 세워 두고 도망 가버렸다. 삼촌은 이제 겨우 오십줄이었는데 머리에는 온통 서리가 내렸고 기억 상실을 동반한 치매끼도 있었다. 4수생 아들 은수와 감옥에 있는 남편 만으로도 우울한 내 생활에 치매에 걸린 삼촌까지 끼어들자 '나'는 눈물이 날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삼촌을 데리고 놀이터로 간다. 갑자기 삼촌이 눈을 까뒤집더니 '나'에게 "와 무섭다고 하지 않노?" 라고 묻는다. 모래밭으로 데리고 갔더니 자갈을 골라 주며 '먹어보라' 한다. 이제 본격적인 치매 노인 노릇을 시작할 참인가 싶어 울상 짓던 '나'는 문득 과거의 기억 한 자락을 떠올린다. 눈을 까뒤집어 보이며 '나'를 웃겨 보려던 삼촌, 땅콩을 골라주던 삼촌. 그렇다. 삼촌은 지금 열 다섯 소년 때로 돌아간 것이다. 엄마와 헤어져 외갓집에 맡겨졌던 어린 '나'를 부모처럼 보살펴 주던 그때의 삼촌으로.


전쟁이 터졌을 때 '나'의 엄마는 스물 셋이었다. 아버지는 나팔장이였다. 읍내에 들어와 공연하던 아버지 모습을 본 엄마가 첫 눈에 반해 쫓아다녀 둘은 결혼했다. 피난 도중 아버지가 군에 차출 당하고, '나'와 엄마만 외갓집으로 향한다. 도중에 우방군의 오폭으로 기차가 폭파되고, '나'와 엄마는 한참을 걷다가 곰박사니 때문에 온 몸을 긁게 된다. 마침 발견한 냇가에서 목욕을 하는데, 군인들이 엄마를 발견하고 어디론가 끌고 간다. '나'는 큰 뒤에야 엄마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알게 된다.

외갓집에 '나'를 맡기고 엄마는 아버지를 찾는다며 집을 나가버린다. '나'를 돌보아준 사람은 인보 삼촌과 인구 삼촌이었다. 인구 삼촌이 지금 치매를 앓고 있는 꾸야 삼촌이다.


보야 삼촌과 꾸야 삼촌은 '나'를 지극정성으로 돌봐 주었다. 특히 꾸야 삼촌이 그랬다. 꾸야 삼촌은 매일 울기만 하는 '나'를 위해 토끼를 잡아 주었고, 익살스러운 짓으로 웃음 짓게 만들었다. 전선이 밀려 내려와 외갓집도 위태로와 졌을 때, 식구들은 경주로 피난을 가게 된다. 그때 꾸야 삼촌은 함께 피난갈 수가 없었다. 군인들이 길잡이 시킨다고 꼴을 베던 꾸야 삼촌을 데려갔기 때문이었다. 며칠 뒤 다시 마을로 돌아왔을 때, 꾸야 삼촌이 뒤꼍에서 달려나왔다. 꾸야 삼촌은 우리들이 돌아올 때까지 뒤꼍 벽에 세워진 멍석에 몸을 말고 숨어 있었던 것이다. 꾸야 삼촌은 우리들이 피난 가 있는 동안 군인들을 따라가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보았는지 이야기하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은 당시 꾸야 삼촌이 많은 시체들을 보았고, 그 시체들 속에는 꾸야 삼촌의 친구와 '나'에게 잡아다 준 토끼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 뒤로 꾸야 삼촌은 군인들을 무서워 했다.


외갓집인 나우리로 어느 날 엄마의 편지가 날아 들고 '나'는 삼촌과 함께 엄마를 찾아간다. 엄마는 의사인 새아버지와 재혼을 하여 서울에서 살고 있었다. 엄마는 과거의 그 사건 때문인지 아이를 갖지 못했다. 외갓집에서의 어린 시절은 빠르게 잊혀져간다.

다시 삼촌을 만난 것은 삼촌이 군기피자가 되어 서울로 도망왔을 때였다. 삼촌은 과거의 사건 때문에 군에 가느니 차라리 잡혀가겠다며 무서워했다. 새아버지가 빽을 써서 편하다는 카투사에 넣어 주었는데, 얼마 뒤 엄마에게 '누님 살려달라' 는 편지가 와서 다시 일반 군대로 옮겨준다.

제대하던 날 기찻간에서 여자를 만난 삼촌은 그 여자와 결혼한다. 직장이 없었기 때문에 새아버지의 권유로 오토바이를 타고 의약품 배달하는 일을 얻었는데 1년만에 사고가 나서 그만 두게 된다. 그 뒤로 삼촌은 차만 보면 무서워했다.

숙모가 임신하자 삼촌은 어떻게든 돈벌이를 해보려고 애를 쓰다가 전화 가설 브로커 노릇을 하게 된다. 하지만 전화국장이던 친구 아버지가 갑자기 파면 당하자 '와이로'를 썼던 사람들에게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징역을 살게 된다. 그 뒤로 삼촌은 빈둥거렸고, 숙모는 집을 나가버린다. 당시 새아버지도 모르핀을 복용하다 수사가 좁혀오자 자살해버린 참이었으므로 두 집 모두 엉망진창이었다. 삼촌 집에 찾아갔다가 삼촌이 아이들과 농약을 먹으려는 걸 간신히 말려놓은 '나'는 '나'라도 돈을 벌어야 했기에 장당 50원짜리 번역일을 시작한다.


그러다가 삼촌네 막내 동우가 크게 다치는 사건이 일어난다. 동우에게 보상금이 조금 들어오자 숙모가 집으로 들어와 살림을 다시 합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숙모는 보상금까지 챙겨서 야반도주한다.

삼촌은 낙심하다가 대구에 지방 공무원 자리를 잡는다. 하지만 이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두게 된다. 군인과 민간인의 교통사고에 휘말렸다가 수배가 된 삼촌은 또 다시 우리집으로 도망을 와 숨어 살았다.

1979년 10월 26일 박대통령이 서거할 즈음, 삼촌은 기소 중지가 된다. 찬우 대학 등록금이라도 벌 요량으로 삼촌은 포장마차를 시작한다. 엄마는 삼촌을 지극정성을 돕는다.

82년에는 좋은 일 두 가지와 슬픈 일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났다. 좋은 일은 찬우가 대학에 합격한 일과, '나'와 남편의 사업이 빛을 보게 된 일이다. 국가원수의 기록물을 취급하게 된 남편의 출판사는 날로 번창하게 된다. 

슬픈 일 두가지는 할머니와 숙모의 죽음이다. 숙모의 장례식장에 간 우리는 숙모가 중앙부처의 고위공직자와 재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숙모의 새 식구들은 찬우와 동우가 숙모를 엄마라고 부르지 말았으면 한다고 했다. 그것에 고인에 대한 예의라면서. '나'는 진짜 예의가 무엇인지 생각하며 분노한다. 하지만 삼촌은 혼자 잔디밭에서 술을 마시며 숙모와 오래도록 이야기를 할 뿐이었다.


남편 출판사에서 잠깐 일을 맡아보던 삼촌은 어느 날부터 설사병이 났다며 출근을 안하더니 얼마 뒤 대학 수위가 되어 나타난다. 찬우가 다니는 대학교의 수위였다. 84년에 찬우가 학내 시위 도중 끌려간다. 남편이 빽을 써서 찬우를 빼내 주지만 86년도에 찬우가 집에 오더니 '살인마를 옹호하여 부자가 되었다'고 비난을 퍼붓는다. 얼마 뒤 강도가 들었는데 '나'는 그것이 찬우 짓임을 알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 같았던 출판사의 호황과 '나'의 안락한 생활은 94년 즈음에 끝이 난다. 남편은 유력한 인사를 만나 위성방송사업을 계획했고, 출판사는 내가 경영하게 된다. 남편은 자본금을 끌어대며 사업을 구체화 시켰고, 나는 노벨상 수상 가능성이 있는 동독 작가를 만나 작품을 계약하는 등 야심차게 추진해 나갔다. 하지만 IMF가 터지고, 사업은 부도가 나고 만다. '나'와 남편 명의의 재산은 모두 차압을 당했고, 그러고도 빚갈이가 안 되어  남편은 구속된다. 그 때 엄마가 자신이 살던 아파트를 내준다.


그런 생각들 끝에 설움이 북받힌 '나'는 삼촌 앞에서 엉엉 운다. 삼촌이 그 옛날 어렸을 적의 '나'를 달랠 때처럼 토닥여 준다. '나'는 부엉이가 정말 사람 눈을 빼먹는지, 피난 갔다 와서 없어진 토끼를 삼촌이 잡아 먹었는지... 그런 것들을 어린아이처럼 삼촌에게 묻는다.


이제, 어머니도 삼촌도 '나'의 곁에 없다.

동독에서 들었던 얘기인데 2차 세계 대전 당시 소련군들이 동독 여성을 강간하자 그녀들이 고발을 했다고 한다. 강간을 한 소련군들은 붙잡혀 총살을 당한다. 서독에서도 미군들이 강간을 했는데, 서독 여성들은 고발하지 않았다고 한다. 특이한 사실은 동독 여성들은 그 뒤로 오래도록 정신병에 시달렸는데 서독 여성들은 그럭저럭 살았다고 한다. 그것이 삶의 모든 부분에 천착하는 복잡 미묘한 여성 심리 때문일까? 확실한 대답은 알 수가 없다. 엄마도 전쟁 중에 군인들에게 강간을 당했다. 그 뒤로 엄마는 나, 삼촌, 그리고 손자인 은수에게 무한한 애정을 쏟아붓는다. 그것이 마치 자신의 삶의 목적인 듯이.

삼촌은 지난 3월 위암으로 죽었다. 숙모도 위암이었다. 한평생 착하게만 살았던, 하지만 너무나 재수가 없었던 삼촌이 숙모를 만나 행복하길 빈다.


2~3개월 가량 눈이 너무 아파서 독서를 별로 못했는데, 그 때 궁여지책으로 <라디오 문학관> 같은 옛날 프로그램을 들었다. <꾸야 삼촌>도 그런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책의 초반부를 성우들이 조금 낭독하고 뒷부분은 작가가 나와서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형식이었는데 못내 내용이 궁금해 견딜 수가 없어 결국 책을 사서 보게 된 것이다. 송기숙의 <암태도>, 최수철의 <고래뱃속에서>, 그리고 <꾸야 삼촌>을 당시에 들었는데 앞의 두 책은 절판이어서 구하기가 어려웠다.

사실 윤정모의 소설은 97~8년 즈음 읽은 기억이 있는데, 아마 <고삐>였던 것 같다. 너무 교조적인 느낌을 받아 그 뒤로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꾸야 삼촌>은 그때의 윤정모와는 매우 다른 느낌을 준다. 아주 잘 쓰인 소설은 아니지만 가볍게 읽히는 소설도 아니고, 세대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공감 가는 대목이 많은 소설이다. '우리 부모가 저렇게 살았던 것을 '내'가 봤었지' 하는,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이 드는 소설이다. 라디오에서 듣기로 <꾸야 삼촌>에서 작가 자신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뒤로 또 어떤 작품 활동의 길을 걸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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