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망
정도상 지음 / 실천문학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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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암에 걸린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여자는 사랑했던 한 남자를 떠올린다. 그리고 준비한 칼을 들고간 여자는 엘리베이터에 탄 장군을 찌른다. 여자는 40년간 장군을 잊은 적이 없지만 장군은 여자를 까맣게 잊은 듯 했다. 살인미수범으로 체포된 여자는 국선 변호사 채운주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희망보육원 출신의 영식은 곱상하게 생긴 외모 때문에 예삐라는 별명으로 불렸지만 깡다구가 있어 싸움만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잭나이프를 잘 써 별명이 '재크'인 병수가 같은 보육원의 길자를 건드린 것이 발단이 되어 영식과 싸움이 벌어진다. 영식은 그 싸움에서 귓바퀴 일부를 잘리우고 짝귀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재크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둘은 친구가 된다.

서울로 올라온 짝귀는 씨라이막에 들어가 넝마주이가 되는데, 짝귀가 속한 남산구쫘 양동 씨라이막의 조마리인 찐따는 식구들을 갈취하여 제 잇속만 채우려 드는 자였다. 짝귀는 먼저 서울에서 자리를 잡은 재크의 도움을 받아 찐따를 몰아내고 고향 후배인 '사타'와 '구니', '찌끼미'와 '토깽이' 등과 더불어 씨라이막을 정비한다. 

씨라이막은 점차 틀이 잡혀 갔지만 짝귀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양동 사창가에서 몸을 파는 길자의 마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길자는 한사코 짝귀의 마음을 외면했다. 짝귀는 한달에 두어 번 술에 취하면 몽둥이를 들고 양동으로 가 온 골목을 휘저의며 손님을 몰아내고 행패를 부렸다. 그러나 짝귀의 성깔을 아는 팸프며 둥기들은 말릴 수가 없었고 고스란히 장사를 공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길자의 주인이 짝귀를 고발하고, 짝귀는 국가재건위원회에 끌려가게 된다. 재크와 함께 강원도 산골에 갇히게 된 짝귀는 혹독한 중노동에 시달린다. 재크와 짝귀는 악질상사인 '단춧구멍'의 비위를 맞추지 않아 심한 괴롭힘을 당했고, 급기야 짝귀가 국기게양대에 묶여 구타를 당하다 기절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재크는 분을 이기지 못해 나이프로 단춧구멍의 눈을 찌르고 자신은 대검에 찔려 죽고 만다. 짝귀는 제주도로 강제 전출 된다. 

한편 짝귀가 잡혀가자 사타는 짝귀를 서슴없이 배신하고 씨라이막을 예전의 찐따 시절처럼 운영한다. 거기에 한 술 더 떠 길자에게 치근덕대기까지 한다. 길자는 그제서야 짝귀의 마음을 받아주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길자는 자신의 몸이 더러워졌다고 생각했고 그런 이유로 짝귀의 순정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느 날 사타가 길자를 사러 오자 길자는 양동 사창가를 도망쳐나온다. 하지만 방을 얻고 취직을 한 길자를 사타가 찾아낸다. 찌끼미는 짝귀에 대한 의리로 사타를 살해한다. 길자는 강원도로 짝귀를 찾아 가지만 이미 제주도로 전출이 된 후였다.

제주도로 전출 간 짝귀는 오로지 단춧구멍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탈출을 감행하지만 온몸에 동상을 입고 만다. 동상에 걸려 의무대에 입원한 짝귀는 기회를 틈타 다시 탈출을 시도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군인들에게 포위되고 결국 자신이 학비를 대어 사관학교에 가도록 도와준 보육원 동기 영필의 총에 맞아 숨진다.

 

장군이 된 영필은 길자의 칼을 맞았지만 목숨은 건진다. 그는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었고 아들의 병역면제 혐의도 받고 있다. 찌끼미는 사타를 살해한 죄로 무기징역을 받고 20년을 복역했으며 그 후로 금고털이 전과 3범으로 다시 20년을 복역한다. 길자는 암이 온 몸에 퍼져 재판을 받을 수 없는 상태로 판정받아 병원에 수감된다. 세 명의 수양딸을 길러낸 길자는 자신이 모은 돈 3억을 희망보육원에 기증하는 유서를 남긴다.

 

중학교 때 작은형의 책꽂이에 꽂힌 대학교 교지에서 소설을 한 편 읽은 적이 있다. 시골에서 홀어머니가 농사를 지어 대학을 보냈는데 그 아들은 시대의 현실을 인식하고 운동권이 된다는 이야기로,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를 그대로 표절, 혹은 필요에 의한 한국적 변용(?)이었는데 당시에는 그런 것을 몰랐었다. 다만 당시에는 소설이라는 것이 그렇게 사실적이어도 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따옴표 안의 왁살스럽게 느껴지는 전라도 사투리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정도상의 <아메리카 드림>을 읽고 충격을 받았었다. 정의라든가 도덕이라든가 그런 것들이 이 땅에는 없는 것인지, 이대로 사회가 계속 유지되어도 괜찮은지, 무수한 의문을 갖게 되었다. 정도상은 나에게 그런 작가였다. 

그의 소설을 읽다보면 '돌직구'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우직하게 포수의 미트를 향해 혼신의 힘을 다해 뿌린 직구 말이다. 철저히 역사, 그리고 그 속의 인간을 담아내는 정도상의 소설은 기교라든가 상징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별로 없다. 그래서 정도상의 소설을 읽으면 언제나 <친구는 멀리 갔어도>의 책 날개에 실린 물들인 군용 야상을 입은 작가의 사진이 떠오른다. 

 

소설의 결말을 보자면 역사적으로 해결된 것은 별로 없어보인다. '단춧구멍'은 복수를 당하지 않고 천수를 누렸을 것이고, 친구를 밀고한 후 여자친구를 가로채고, 학비를 대어준 영식을 살해한 영필은 길자의 칼에 죽지 않는다. 그리고 영필이 구속당한 이유는 과거의 죄과 때문이 아니라 현재의 부정 때문이다. 

<누망縷望> 은 한가닥 실낱같이 가늘게 남아 있는 희망을 말한다. 정도상은 작가 후기에서 자신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영식과 길자의 사랑 이야기였다고 말한다. 실낱같은 희망은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후기에서 자신이 걸어갈 길에 대해서도 이야기 한다. 시대와의 불화를 택해 길을 걸었다고. 가끔 길을 벗어날 때도 있었지만, 시대의 유행을 쫓지 않았고 앞으로 걸어갈 길 역시 순탄치 않으리라고 이야기 한다. 그것으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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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파고스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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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년 전인 AD 1986년, 과야킬은 남미의 작은 공화국 에콰도르의 항구였다. 항구의 한켠에는 호텔 엘도라도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곳의 투숙객들은 '세기의 자연 유람' 여행에 참가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원래 갈라파고스는 '무가치한 곳'으로 인식 되고 있었는데 한 사업가가 수완을 발휘하여  '무한한 가치가 있는 곳'으로 사람들의 견해를 바꾸어 놓았다. 

당시 인간들은 수시로 견해를 바꾸곤 했는데 화폐의 가치에 대해서 견해를 갑자기 바꾸어 공황이 일어났다. 또 너무나 거대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100만년이 지난 지금의 인류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하곤 했다.

어쨌든 '세기의 자연 유람'은 유명 인사들이 참석하기로 한 덕분에 전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이 예약을 했다. 하지만 세계 경기가 불황으로 돌아서자 대다수의 사람들이 예약을 취소하였고 '다윈호'에 탈 사람은 얼마 남지 않게 되어 취소가 불가피해보였다. 그런데 그 때 파산한 페루가 에콰도르에 선전포고를 한 후에 폭격을 하는 사태가 일어났고 이 혼란통에 다윈호로 피신한 사람들이 갈라파고스로 준비되지 않은 항해를 하게 된다.

한편 갈라파고스를 제외한 전 세계에 인류의 난자를 갉아먹는 바이러스가 퍼져 인류는 멸종되고 갈라파고스에 도착한 사람들이 100만년이 지난 오늘날의 인류가 된다. 인류는 갈라파고스에 적응하면서 손이 퇴화되어 지느러미가 되고 두뇌는 헤엄치기 적당하게 유선형으로 바뀌면서 크기가 작아지고 만다. 

 

이러한 모든 일들의 기록자인 레온은 SF 소설가인 아버지가 생계는 책임지지 못하면서도 어머니를 업신여겼다고 생각하여 가출을 했고, 그 뒤에 해병대에 들어가 베트남전에 참전한다. 베트남에서 레온은 자기편 병사를 죽인 노파를 총으로 쏘아죽였인 후 그 마을에 살고 있는 남녀노소 모두를 무차별적으로 살육한다. 그 후 레온은 성병에 걸리고 병을 치료해주던 스웨덴인 의사가 자신의 아버지를 훌륭한 소설가로 알고 있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린 후 스웨덴으로 정치적 망명을 한다. 그곳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던 레온은 다윈호를 용접하다가 철판이 떨어지는 사고로 목숨을 잃고 그 후로 유령이 된다. 그는 인간들의 본성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 저 세상으로 떠나지 않고 다윈호와 갈라파고스를 살펴보았으며 그것을 기록한 것이다. 

 

커트 보네거트는 '모방을 불허하는 이 시대 최고의 풍자문학가', '환상의 세계를 창조하여 인류의 멸망을 경고하는 주술사', '20세기 포스트모던 시대의 마크 트웨인' 등 갖가지 찬사를 받으며 무라카미 하루키 등 다른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갈라파고스>는 인간이 거대한 두뇌를 갖고 있으면서도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한 결과 이성이 없는 동물과 같은 상태로 퇴화되고 만다는 풍자적인 이야기이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레온'은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자신의 동료를 잃고 그 복수로 죄없는 마을사람 전체를 몰살시킨 미군 병사다. 레온은 인간의 본성이 과연 무엇인지 알기 위해 기꺼이 100만년을 유령으로 떠돌고 그 결과 최후의 인간들이 멸종되고 신인류가 탄생하는 과정을 지켜본다. 

 

우수고객 초청행사가 있어 안성의 서일농원에 가게 되었는데 가는 차 안에서 읽었다. 서일농원은 <신들의 만찬>이라는 드라마 촬영 장소라고 하는데 장독이 2,000여개 늘어서 있는 것이 장관이었다. 그곳에서 나오는 음식은 달거나 감칠맛이 나지 않아 입맛에 맞는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남사당패의 공연까지 보고 오니 밤 10시가 넘었다. 피곤한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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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실 - 2005년 제1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무삭제 개정판
김별아 지음 / 해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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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진과 영실 사이에 묘도가 나고 그 묘도가 낳은 딸이 미실이다. 미실의 집안은 대원신통으로 색공지신(色供之臣)이었다. 

지소는 태종과 상간하여 세종을 낳았고 후에 입종갈문왕과 정식 혼인하여 태후가 된다. 세종은 진군의 위를 갖게 되며 진흥제와 형제가 된다. 지소태후는 세종이 성장하였으므로 여인을 알게 하였고 세종이 선택한 여자가 미실이었다. 세종은 미실과 상통한 후 그녀의 아름다움에 도취된다.

한편 미실의 이모가 되는 사도황후는 진흥제의 정식 부인으로 시어머니 지소태후의 심한 견제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미실에게 방책을 묻는다. 미실은 진흥제만이 사도황후의 지위를 보존해주리라 간하고 사도황후는 가까스로 위기를 벗어난다. 지소태후는 미욱한 사도황후에게 꾀를 내준 사람이 미실이었음을 알고 그녀를 궁에서 쫓아낸다. 미실은 울며 쫓겨나고 세종은 그날로부터 미실을 잃은 슬픔과 괴로움에 잠긴다.

쫓겨난 미실은 화랑 사다함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사다함이 전쟁에 나가기 전 둘은 혼인을 언약한다. 하지만 상사로 죽을 지경에 이른 세종을 구하기 위해 지소태후가 미실을 다시 불러들인다. 하지만 세종을 향한 미실의 마음은 이미 식어있었다. 미실이 궁으로 돌아갔음을 안 사다함은 깊은 슬픔에 잠기고, 자신을 사모하는 무관랑이 죽자 그 뒤를 따라 명을 다한다. 지소태후에 대한 깊은 원한을 갖게 된 미실은 사도황후의 권고에 따라 동륜태자를 유혹한다. 

어느 날 진흥제가 미실을 보고 한눈에 반하고 미실은 진흥제에게 색공을 바치게 된다. 이후 진흥제는 미실에 취해 미실 이외의 여자가 눈에 차지 않는다. 미실은 사다함의 동생 설원과 상간하여 설원을 손에 넣는다. 한편 동륜태자가 진흥제의 품으로 간 미실을 잊지 못해 때때로 미실에게 관계해줄 것을 요구하여 미실은 자신이 위태로운 지경에 처했음을 알게 된다. 미실은 동생 미생에게 동륜태자를 여색에 빠지게 만들어 관심을 돌리도록 한다. 계교는 성공했으나 동륜태자가 보명에게 너무 깊이 빠진 나머지 보명궁을 지키던 개에게 물려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동륜태자의 죽음을 캐던 진흥제는 미생과 미실의 이름이 수시로 나오자 분노한다. 미실은 모든 것을 버리고 또 다시 궁 밖으로 나간다. 미실은 진흥제가 모든 진실을 알고 싶어하지는 않을 것이고, 시간이 흐른 후에는 자신을 다시 찾을 것이라 믿는다. 

세종이 다시 미실을 찾아와 함께 지내기를 간청한다. 세종은 미실의 마음 방향과는 무관하게 곁에 있을수만 있다면 족한 상태였다. 미실은 세종에 대한 미안함에 그렇게 한다. 진흥제가 미실의 예상대로 다시 찾아오고 미실은 세종과 함께 궁으로 돌아간다.

세월은 진흥제만 비껴가지 않았고 진흥제가 기력을 잃기 시작하고 마침내 자리보전하기에 이른다. 미실과 사도황후는 금륜태자를 색으로 회유하기로 한다. 하지만 막상 보위에 오른 금륜태자는 미실을 내치고, 미실은 속 깊은 앙심을 품는다. 금륜태자는 선대왕의 위업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다가 막상 자신의 뜻대로 세상을 다스리게 되자 색에 빠져들고 만다. 

세종에게는 문노라는 강직한 화랑이 수하에 있었다. 문노는 미실이 남자를 미혹하여 독을 뿜는 존재로 생각하였다. 하지만 세종에 대한 의리와 충성심으로 미실이 금륜태자를 폐하는 거사에 참여한다. 금륜태자는 폐위되어 유폐되고 진평이 제위에 오른다. 미실은 진평제에게 색공을 올린 후 궁을 떠난다. 떠나는 미실을 따른 것은 설원이다. 미실이 병에 걸려 오랫동안 앓다가 꿈을 꾼 후 가까스로 몸을 추스린다. 미실은 설원이 남은 생을 자신에게 주고 생을 마감했음을 알게 된다. 설원의 관 뚜꼉을 덮는 미실은 법구경의 한 구절을 읊조린다.

 

이 집 지은 사람 이제 보았으니

너는 다시 집을 짓지 마라

너의 모든 서까래는 부서지고

기둥과 대들보도 내려앉았다

이제 내 마음을 짓는 일 없거니

사랑도 욕망도 말끔히 사라졌다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미실이라는 여인이 김별아의 손 끝에서 되살아났다. 유가적 성도덕이 채택되기 이전의 미실은 철저히 현세적이고 즉자적인 가치관에 충실하다. 사실 소설 속 미실이 독자에게 시사하는 바는 그다지 새롭지 않다. 김원일은 "여성 인권 신장에 한 켜를 보탠 혁신적 성과"라 하였고, 성석제는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자유혼, 모성의 관능을 느끼게 해준다"고 하였지만 나는 이러한 평가에 동의할 수 없다.  

미실의 행적은 단순히 말하자면 방중술을 익힌 총명하고 아름다운 여인이 여색을 무기로 한바탕 신명난 삶을 산 궤적이며, 그 궤적이 공교롭게도 왕실과 닿아 있었던 까닭에 권력을 능히 손아귀에 쥔 과정이다. 이러한 미실의 삶이 여성 인권이나 자유혼과 어떤 연관을 갖는지는 사실 의문이다. 

심사평을 쓴 소설가와 평론가들은 미실의 삶을 자유,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으로 해석하나 미실의 삶은 제한된 선택권 중 가장 권력과 근접한 것을 택해온 삶에 다름 아니다.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사다함을 미실이 버리는 장면이야 말로 이를 웅변한다. 그녀는 자유로웠던 적도 없고 무언가로부터 해방된 적도 없다. 다만 권력과 색욕이 시키는 바에 충실했을 뿐이다. 유교적 성도덕이 채택된 이후의 여인들과도 다른 점이 없다. 그 이후로도 왕권의 주변에서 색을 무기로 권력을 좌지우지하던 여성은 존재했고, 그런 여성에 대해 여성인권이니 자유혼이니 하는 것은 우습다. 남성이 가진 것을 여성이 좌지우지 할 수 있었다고 하여 그것이 곧 여성인권이나 자유혼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조악한 페미니즘이다. 

작가는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서문에 나오는 미학에 충실하다. "아름다운 사물에서 추한 의미를 찾아내는 사람은 아무런 매력 없이 타락한 인물이다"로 시작되는 그 현세적이고 즉자적인 미학 말이다. 

그래서 미실이 마지막으로 설원을 묻고 법구경을 읊조리는 장면은 뜬금 없다. 결국 미실이 깨달은 것이  공(空)이란 말인가. 알 수 없는 결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실이라는 인물을 재구성해내는 작가의 솜씨는 발군이다.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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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친한 친구들 스토리콜렉터 4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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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하임 지방경찰청 수사반장 올리버 폰 보덴슈타인과 형사 피아는 크론베르크 오펠 동물원에서 사람의 신체 일부가 발견되었는 제보를 받고 수사에 착수한다.

살해당한 사람은 한스 우를리히 파울리라는 사람으로 고등학교 선생이었다. 그는 동거녀인 에스터 슈미트화 함께 채식주의자를 위한 식당을 운영했고, 동물 학대에 반대했으며, 새로 뚫리는 도로 B8 계획의 이면에 추악한 커넥션이 있다고 주장했다. 파울리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에게 살의를 품을 정도였고, 반면에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를 추앙하는 지경이었기에 용의자는 넘쳐났고 그를 비호하는 사람의 말은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낙제점을 받아 대학에 떨어진 것을 이유로 앙심을 품은 제자, 집문제로 다툼을 거듭하던 전부인, 파울리가 죽은지 며칠도 지나지 않아 태연히 다른 남자를 끌어들이고 자신의 집에 방화를 하는 동거녀 에스터, 공식석상에서 소시지 장수라 놀림을 받고 파울리를 폭행한 콘라디 등 모두에게 동기는 충분했다. 용의자들의 알리바이를 조사하던 보덴슈타인과 피아는 파울리가 죽던 날 밤 여학생 하나가 스쿠터를 타고 급히 집에서 나갔다는 진술을 확보한다. 

 

여학생의 이름은 스베냐로 요나스라는 학생과 사귀고 있었다. 요나스와 루카스, 타렉은 더블라이프라는 인터넷 가상 서비스를 제작한다. 처음에는 단지 컴퓨터 실력을 과시할 계획으로 시작한 것이었지만 점차 규모가 커졌고 사람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타렉은 더블라이프를 통해 큰 돈을 벌고자 했지만 루카스는 이를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 그러던 중 최근 요나스와 스베냐가 무슨 일인가로 다툰 직후 스베냐의 노출 사진이 인터넷을 통해 퍼져나갔고 스베냐는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스베냐는 요나스의 아버지 카르스텐 보크와도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타렉은 카르스텐 보크의 숨겨진 아들이자 요나스의 배다른 형제였다. 타렉은 의붓아버지 카르스텐 보크의 컴퓨터를 주기적으로 해킹해오던 중 B8 계획의 비밀을 알게 되었고 이를 파울리와 공유했다. 파울리는 B8 계획의 비밀을 폭로하기 직전 타렉과 다투다가 살해당한다. 이를 목격한 스베냐를 타렉은 카르스텐 보크와의 관계를 이용해 입막음하고 요나스가 눈치채자 역시 살해한 것이다. 

 

<타우누스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이다. 자비 출판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2007년 겨울 독일에서 해리포터 시리즈를 뛰어 넘는 판매고를 기록했다. 도입부부터 수많은 용의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결국 혐의를 풀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의 추악한 면모를 드러내보인다. 

재작년 이맘때쯤 독일에 갔었고, 작년 이맘때쯤엔 발리에서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을 읽었다. 그리고 올해는 재작년과 작년 운 좋게도 해외 여행을 갈 수 있었던 때를 기억하면서 집에서 <너무 친한 친구들>을 읽는다. 책을 통해 추억들이 연상되는 것은 독특한 경험이다. 독서일기를 쓰는 이유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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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한때는 자작나무를 탔다
김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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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한때는 자작나무를 탔다>는 진보적 가치에 투신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특히나 여성들의 후일담이다. 소설에는 운동 중에 만난 동지와 결혼한 세 쌍의 부부 이야기가 나온다. 수민과 철호, 인실과 영수, 미정과 태식이 그들이다. 세 쌍의 부부는 진보운동이 지향점을 잃고 비틀거리는 시기에 파국을 맞는다. 그 파국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진보적 가치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숨기고 눌러둔 모순이 진보운동의 파국과 함께 드러난 것일 뿐이다.

수민은 활동을 위해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철호의 신념에 반하여 희빈을 낳는다. 그녀는 더 이상 현장 활동에 투신할 용기와 신념을 잃어버린지 오래다. 철호는 운동적 가치에 반하는 그녀의 삶에 실망하여 수민을 버린다. 

영수는 진보운동이 좌절하자 기성 정치인의 보좌관으로 차를 갈아탄 인물이다. 그는 신념만 버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마저 기성 정치인의 그것으로 갈아탄다. 딸만 둘을 낳은 인실이 이 과정에서 시댁과  갈등을 겪고 남편의 입신양명을 위해 희생할 것을 강요 당한다. 결국 인실은 알코올중독이 되고 만다.

태식과 미정의 경우는 미정이 변화한 경우이다. 그녀는 경제적으로 무능한 태식에게 실망하고 보험회사에 들어가 자본주의적 상품화 과정에 몸을 맡긴다. 그녀는 세련되졌으나, 그녀를 보는 수민 등은 위태로워 보일 뿐이다.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에는 소련이 붕괴한 뒤였다. 진보 진영의 반절은 전향을 하거나 좌절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했고, 나머지 반절도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혼란스러워 할 때였다. 동아리방에 굴러다니던 잡지 <길>에서 사노맹의 백태웅이 쓴 글을 읽었다. "운동은 종교와 다르다. 천국에 가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활동해서는 안된다. 소련이 붕괴했다고 해서 우리사회가 변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운동은 과정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 내용이었다.  

과정으로서의 운동을 해내기엔 그 시대가 너무나 험난했을 것이다. 도서관에서 몸에 밧줄을 묶고 삐라를 뿌릴 사람을 뽑을 때, 연행과 폭행 그리고 징역의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이 '과정을 통한 변모' 였을까, 가치에 대한 신념에서 오는 '희생' 이었을까는 묻지 않아도 자명하다. 

그런 가치에 대한 희생이 인정받던 한 시기가 지나고, 소련이 붕괴하고 곧 올 것만 같던 사회는 점점 멀어져갈 때에 운동권 내부로부터 하나의 문제가 제기된다. 레닌의 '민주주의적 중앙집권제'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것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졌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 소설 속에서도 인실의 이야기를 통해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의 그것이 비교되어 나온다. 그리고 중앙집권이라는 이름으로 억압받고 은폐되었던 여성들의 문제가 이야기된다.

사실 김연은 낯선 이름이지만 차주옥이라는 이름은 그리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동아리방에 한권쯤은 꽂혀 있었던 <함께 가자 우리>의 차주옥이 바로 김연이다. <나도 한때는 자작나무를 탔다>는 사실 후일담 소설의 전형이지만 공지영 등의 그것과 비견하여 가치를 지니는 이유는 작가가 현실을 고통스럽게 직시한 흔적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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