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망
정도상 지음 / 실천문학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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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암에 걸린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여자는 사랑했던 한 남자를 떠올린다. 그리고 준비한 칼을 들고간 여자는 엘리베이터에 탄 장군을 찌른다. 여자는 40년간 장군을 잊은 적이 없지만 장군은 여자를 까맣게 잊은 듯 했다. 살인미수범으로 체포된 여자는 국선 변호사 채운주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희망보육원 출신의 영식은 곱상하게 생긴 외모 때문에 예삐라는 별명으로 불렸지만 깡다구가 있어 싸움만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잭나이프를 잘 써 별명이 '재크'인 병수가 같은 보육원의 길자를 건드린 것이 발단이 되어 영식과 싸움이 벌어진다. 영식은 그 싸움에서 귓바퀴 일부를 잘리우고 짝귀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재크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둘은 친구가 된다.

서울로 올라온 짝귀는 씨라이막에 들어가 넝마주이가 되는데, 짝귀가 속한 남산구쫘 양동 씨라이막의 조마리인 찐따는 식구들을 갈취하여 제 잇속만 채우려 드는 자였다. 짝귀는 먼저 서울에서 자리를 잡은 재크의 도움을 받아 찐따를 몰아내고 고향 후배인 '사타'와 '구니', '찌끼미'와 '토깽이' 등과 더불어 씨라이막을 정비한다. 

씨라이막은 점차 틀이 잡혀 갔지만 짝귀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양동 사창가에서 몸을 파는 길자의 마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길자는 한사코 짝귀의 마음을 외면했다. 짝귀는 한달에 두어 번 술에 취하면 몽둥이를 들고 양동으로 가 온 골목을 휘저의며 손님을 몰아내고 행패를 부렸다. 그러나 짝귀의 성깔을 아는 팸프며 둥기들은 말릴 수가 없었고 고스란히 장사를 공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길자의 주인이 짝귀를 고발하고, 짝귀는 국가재건위원회에 끌려가게 된다. 재크와 함께 강원도 산골에 갇히게 된 짝귀는 혹독한 중노동에 시달린다. 재크와 짝귀는 악질상사인 '단춧구멍'의 비위를 맞추지 않아 심한 괴롭힘을 당했고, 급기야 짝귀가 국기게양대에 묶여 구타를 당하다 기절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재크는 분을 이기지 못해 나이프로 단춧구멍의 눈을 찌르고 자신은 대검에 찔려 죽고 만다. 짝귀는 제주도로 강제 전출 된다. 

한편 짝귀가 잡혀가자 사타는 짝귀를 서슴없이 배신하고 씨라이막을 예전의 찐따 시절처럼 운영한다. 거기에 한 술 더 떠 길자에게 치근덕대기까지 한다. 길자는 그제서야 짝귀의 마음을 받아주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길자는 자신의 몸이 더러워졌다고 생각했고 그런 이유로 짝귀의 순정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느 날 사타가 길자를 사러 오자 길자는 양동 사창가를 도망쳐나온다. 하지만 방을 얻고 취직을 한 길자를 사타가 찾아낸다. 찌끼미는 짝귀에 대한 의리로 사타를 살해한다. 길자는 강원도로 짝귀를 찾아 가지만 이미 제주도로 전출이 된 후였다.

제주도로 전출 간 짝귀는 오로지 단춧구멍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탈출을 감행하지만 온몸에 동상을 입고 만다. 동상에 걸려 의무대에 입원한 짝귀는 기회를 틈타 다시 탈출을 시도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군인들에게 포위되고 결국 자신이 학비를 대어 사관학교에 가도록 도와준 보육원 동기 영필의 총에 맞아 숨진다.

 

장군이 된 영필은 길자의 칼을 맞았지만 목숨은 건진다. 그는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었고 아들의 병역면제 혐의도 받고 있다. 찌끼미는 사타를 살해한 죄로 무기징역을 받고 20년을 복역했으며 그 후로 금고털이 전과 3범으로 다시 20년을 복역한다. 길자는 암이 온 몸에 퍼져 재판을 받을 수 없는 상태로 판정받아 병원에 수감된다. 세 명의 수양딸을 길러낸 길자는 자신이 모은 돈 3억을 희망보육원에 기증하는 유서를 남긴다.

 

중학교 때 작은형의 책꽂이에 꽂힌 대학교 교지에서 소설을 한 편 읽은 적이 있다. 시골에서 홀어머니가 농사를 지어 대학을 보냈는데 그 아들은 시대의 현실을 인식하고 운동권이 된다는 이야기로,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를 그대로 표절, 혹은 필요에 의한 한국적 변용(?)이었는데 당시에는 그런 것을 몰랐었다. 다만 당시에는 소설이라는 것이 그렇게 사실적이어도 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따옴표 안의 왁살스럽게 느껴지는 전라도 사투리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정도상의 <아메리카 드림>을 읽고 충격을 받았었다. 정의라든가 도덕이라든가 그런 것들이 이 땅에는 없는 것인지, 이대로 사회가 계속 유지되어도 괜찮은지, 무수한 의문을 갖게 되었다. 정도상은 나에게 그런 작가였다. 

그의 소설을 읽다보면 '돌직구'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우직하게 포수의 미트를 향해 혼신의 힘을 다해 뿌린 직구 말이다. 철저히 역사, 그리고 그 속의 인간을 담아내는 정도상의 소설은 기교라든가 상징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별로 없다. 그래서 정도상의 소설을 읽으면 언제나 <친구는 멀리 갔어도>의 책 날개에 실린 물들인 군용 야상을 입은 작가의 사진이 떠오른다. 

 

소설의 결말을 보자면 역사적으로 해결된 것은 별로 없어보인다. '단춧구멍'은 복수를 당하지 않고 천수를 누렸을 것이고, 친구를 밀고한 후 여자친구를 가로채고, 학비를 대어준 영식을 살해한 영필은 길자의 칼에 죽지 않는다. 그리고 영필이 구속당한 이유는 과거의 죄과 때문이 아니라 현재의 부정 때문이다. 

<누망縷望> 은 한가닥 실낱같이 가늘게 남아 있는 희망을 말한다. 정도상은 작가 후기에서 자신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영식과 길자의 사랑 이야기였다고 말한다. 실낱같은 희망은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후기에서 자신이 걸어갈 길에 대해서도 이야기 한다. 시대와의 불화를 택해 길을 걸었다고. 가끔 길을 벗어날 때도 있었지만, 시대의 유행을 쫓지 않았고 앞으로 걸어갈 길 역시 순탄치 않으리라고 이야기 한다. 그것으로 되었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172828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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