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교육
로맹 가리 지음, 한선예 옮김 / 책세상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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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트바르도브스키는 아들을 위해 숲 속에 은신처를 마련한다. 얼마 후 독일군들이 악마적인 계획을 실행한다. 폴란드 여성들을 구금한 후 강간하기 시작한 것이다. 저택 외곽에 기관총을 배치하고 기다리면 빨치산들이 무모한 공격을 감행해 올 것이었다. 

몇 차례 의미 없는 공격이 간헐적으로 이어졌고, 빨치산들은 사살 당했다. 트바르도브스키는 저택에 의사면허증 등을 보여주고 들어간다. 그는 왕진 가방에서 총을 꺼내 독일군을 향해 발사한다. 그리고 자신도 죽고 만다. 그의 아내도 저택에 구금되어 있었다.

이제 혼자가 된 열 네살의 야네크는 숲속의 은신처에서 아버지가 남겨 둔 감자 자루와 함께 살아가기 시작한다. 낮에는 빨치산들과 생활했지만 밤에는 은신처로 돌아왔다. 

야네크는 빨치산들의 심부름을 해주다가 쇼팽의 피아노 연주에 매료된다. 야네크는 자신이 음악을 연주하고, 음악을 들으며 평생을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독일군과 음악 덕분에 친해지기도 하지만 그 독일군은 빨치산들이 트럭을 습격할 때 야네크의 눈 앞에서 사살된다.

야네크와 비슷한 또래의 조시아는 독일군에게 몸을 팔고 그들이 외로움에 겨워 털어 놓는 말들을 주워 모아 빨치산들에게 전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야네크를 만난 후 조시아는 독일군에게 가기를 그만 둔다. 그전에 독일군들과 할 때에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지만 야네크에게서 무언가를 느낀 후에는 독일군에게서도 느낄까봐 두려워했다. 더 이상 독일군에게 몸을 팔아 정보 얻는 일을 하지 않겠따고 말하자 빨치산들은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녀가 필요할 때 빨치산 중 한명이 그녀에게 몸을 팔 것을 요청한다. 요청한 빨치산은 자신이 짐승과 같다고 괴로워한다. 

도브란스키는 빨치산이 되기 전에는 대학생이었다. '유럽의 교육'이라는 책을 쓰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희망과 우화가 가득 차 있었다. 야네크는 도브란스키가 전설적인 나데이다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들은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이 패배하기를 기대하며 추운 겨울을 견뎌내고 있었다. 마침내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이 패퇴되고 폴란드를 해방하러 온다는 소식이 들려올 즈음, 도브란스키가 총에 맞는다. 도브란스키는 자신이 쓰던 '유럽의 교육'을 야네크에게 건내며 책을 완성해달라고 부탁한다.

 

'유럽의 교육'은 도브란스키가 쓰던 책 이름이기도 하고, 야네크가 지옥같은 현실에 절망하며 자신이 받은 교육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로맹 가리는 전쟁이 강요하는 절망적인 상황과 그 속에서 인간성이 망가져가는 인물들을 아프게 그려낸다.  

 

즈보로브스키 형제 중 하나가 조시아에게 독일군 병사에게 가서 몸을 팔아 정보를 캐내오도록 권유할 때 조시아는 생각한다.

 

고통을 겪는 데 '마지막'은 없었다. 그리고 희망은, 새로운 고통을 견뎌내도록 인간을 격려하기 위한 신의 술책에 지나지 않았다......사람들은 어떤 사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다른 사람들에게 맞서기 위해서 싸우고 있따는 것, 병사의 힘은 분노가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것, 그리고 문명의 발자취들은 폐허일 뿐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편이 빨치산이 되어 산으로 가서 겨울을 견뎌낼 때, 빨치산의 아내는 독일군 앞잡이가 식량을 준다는 이유로 그와 침대에서 뒹군다. 이를 본 또다른 밀고꾼은 절망하며 독백한다.

 

'오 하느님! 이 모든 일을 정녕 당신이 조종하고 있는 겁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는 현기증을 느끼고 구역질을 한다.

 

야네크가 천진한 어린이의 모습으로 독일군을 안심시킨 후 어느 날 그들을 다이나마이트로 폭사시키고, 저항할 수 없는 상태의 독일군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 후 말한다.  

 

이 유럽의 교육이라는 것은 바로, 그들이 너희 아버지를 쏠 때, 또는 너 자신이 뭔가 대단한 명분을 내세워 누군가를 죽일 때, 또는 네가 죽도록 굶주리고 있을 때, 또는 네가 마을을 파괴하고 있을 때 이루어지는 거야. 우리는 훌륭한 학교에 있었어. 우리는 정말 교육되었어......


......유럽의 교육이 가르치는 것은 결국, 자기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사람을 죽이는 데 소용이 될 만한 그럴싸한 이유들과 용기를 찾아내는 법일 뿐이에요.

 

무표정한 태도로 살육하고, 거기에 원인을 찾아내 정당화하는 것이 바로 유럽의 교육이라는 냉소적인 발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희망 없이는 하루도 버텨내기 힘든 빨치산들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다. 

로맹 가리는 도브란스키가 희망을 담아 써내려간 '유럽의 교육'이라는 제목의 책을 야네크가 완성하도록 한다. 전쟁이 끝나고, 야네크가 완성한 '유럽의 교육'에는 극한의 절망 속에서 끝내 지켜내야 할 무엇인가를 담아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영원히 죽지 않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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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거리에서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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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전 올 스타즈의 노래 '러브 어페어~비밀의 데이트'를 모티프로 쓴 소설 <새벽 거리에서>는 가정이 있는 남자가 같은 회사 파견사원과 불륜에 빠지면서 겪게 되는 갈등과 고통, 찰나의 기쁨과 두려움 등을 매우 섬세하게 포착한 소설이다.  

 

화자인 '나'는 어느 날 친구들과 술을 마신 후 배팅 연습장에 들렀다가 파견사원으로 근무하는 아키하를 우연히 만난다. 술김에 친구들이 아키하에게 노래방에 동석하자고 권하자 그녀는 흔쾌히 따라나선다. 하지만 그날 아키하는 만취해서 '나'의 양복을 더럽히고 만다. 

다음 날 아키하는 양복값을 변상하겠다고 봉투를 내밀지만 '나'는 진솔한 사과가 먼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녀에게 싫은 소리를 하고 만다. 그 사건이 계기가 되어 '나'와 아키하는 몇 차례 만나게 되고 차츰 서로에게 끌리게 된다. 

순간순간 아내와 딸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그녀와의 달콤한 밀애가 점차 횟수와 깊이를 더하게 되자 '나'는 언젠가 아내와 딸에게 죄를 지어야 할지 아니면 아키하를 버려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올 것을 예감한다. 

한편 아키하에게는 가슴 아픈 과거가 있었다. 아키하의 어머니는 아버지와 이혼한 후 자살했는데 얼마 뒤 아버지의 불륜 상대인 여비서도 아키하의 집에서 강도의 칼에 찔려 살해된 것이다. 15년 전 그 사건의 공소시효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칼에 찔려 죽은 여비서의 동생과 당시 사건을 맡았던 형사는 사건의 진범은 아키하라 믿고 계속 조사를 하고 있었다. 

공소시효가 만료되는 날 밤, 아키하는 자신의 범인이라 믿고 범행을 숨기기에 급급했던 아버지와 이모에게 뜻밖의 이야기를 꺼낸다. 그 사건은 자살이었고, 유서가 있었다는 것. 왜 그녀는 유서를 숨긴 채 자신을 범인으로 오인하도록 만들었을까? 왜 아버지와 이모에게 아무런 얘기도 꺼내지 않은 것일까? 

 

Love Affair ~ 秘密のデト by  Southern All Stars

 

夜明けの街ですれ違うのは月の殘骸と 昨日の僕さ

새벽 거리에서 엇갈리는 달의 그림자와 어제의 내 모습


二度と戾れない境界を越えた後で嗚呼この胸は 疼いてる

두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경계를 넘어선 내 가슴이 아파 와

 

振り向くたびに せつないけれど 君の視線を 背中で受けた

뒤돌아볼때마다 안타까운 너의 시선을 등진 채

 

連れてかえれない たそがれに 染まる家路 嗚呼 淚隱して憂う Sunday

황혼으로 물든 길을 돌아갈 수 없어 눈물을 숨기며 울먹이고 있는 Sunday

 

君無しでは 夜每 眠らずに 闇を見つめていたい

너 없이는 밤마다 잠에서 깨어 우울함에 마음이 아파 와

 

マリンル-ジュで 愛されて 大黑 埠頭で 虹を見て

마린루즈에서 사랑을 받으며 부두에 서린 무지개를 바라 봐

 

シ-ガ-ディアンで 醉わされてまだ離れたくない

바다에 취해 위로 받으며 헤어지고 싶지는 않아

 

早く去かなくちゃ夜明けと共にこの首筋に 夢の跡

빨리 갈 수 없어서 새벽과 함께 남겨진 꿈의 흔적

 

愛のしずくが 果てた後でも何處にこれほど 優しくなれる

사랑의 느낌이 끝난 다음에도 어째서 이렇게 마음에 솔직할 수 있는지

 

二度と戾れない ドラマの中の 二人 嗚呼 お互いに 氣づいてる

두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드라마 속 두 연인의 모습인 것을 서로 알았어

 

すてもなくしも僕は出來ないただそれだけは臆病 なのさ

버릴 수도 없었던 일로도 난 못하겠어 단지 그것만은 겁이 나

 

連れて步けない 役柄は いつも 他人 嗚呼 君の仕草を 眞似る Sunday

함께 걸을 수 없어 나와 언제나 타인으로 지내야 하는 너의 행동을 닮은 Sunday

 

好き合うほど 何も 構えずに 普通の男で いたい

서로 좋아하는데 아무것도 해줄수 없어 평범한 남자라서 마음이 아파

 

ボウリング場で カッコつけて ブル-ライトバ-で 泣き濡れて

볼링장에서 폼을 잡고, 블루라이트바에서 눈물에 젖어

 

ハ-バ-ビュ-の 部屋で抱きしめ また□くちづけた

하버뷰의 방에서 꼭 껴안고 그리고 입을 맞췄지

 

逢いに行かなくちゃはかない夢と 愛の谷間たにまで 溺れたい

만날 수 없어서 헛된 꿈만 꿀텐데도 사랑에 빠지고 싶어

 

マリンル-ジュで 愛されて 大黑 埠頭で 虹を見て

마린루즈에서 사랑을 받으며 부두에 서린 무지개를 바라 봐

 

シ-ガ-ディアンで 醉わされてまだ離れたくない

바다에 취해 위로 받으며 헤어지고 싶지는 않아

 

早く去かなくちゃ夜明けと共にこの首筋に夢の跡 

빨리 갈 수 없어서 새벽과 함께 남겨질 꿈의 흔적일테니까

 

だから愛の谷間たにまで 溺れたい

그래서 사랑에 빠지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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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피를 입은 비너스 펭귄클래식 61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 지음, 김재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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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Leopold Von Sacher-Masoch)는 1836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변방, 현재 우크라이나 지역에 있는 렘베르크에서 경찰국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라츠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딴 후 역사학 교수로 일하다가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마조흐는 하나의 틀을 가지고 사랑, 재산, 국가, 전쟁, 죽음을 테마로 여섯 권의 책을 쓰기로 계획하고 이 연작소설들에 '카인의 유산'이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첫 번째가 바로 '사랑'을 테마로 한 <모피를 입은 비너스(1870)>이다. 

 

소설은 갈리시아 출신의 귀족이자 지주로 이제 갓 서른 즈음 된 제베린 폰 쿠지엠스키가 <모피를 입은 비너스>라는 그림에 얽힌 자신의 기묘한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시작된다. 

제베린의 집 위층 방에는 반다 폰 두나예프라는 이름의 돈 많고 아름다운 미망인이 살고 있었다. 제베린은 돌로 된 비너스상을 남몰래 흠모해오다가 반다에게서 차가운 비너스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녀에게 청혼한다. 하지만 반다는 자신이 제베린을 한 달이나 두 달을 사랑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영원히 제베린을 사랑할 수는 없다면서 거절한다. 제베린은 그녀를 소유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그녀의 노예가 되는 자신의 환상을 실현시켜달라고 부탁한다. 

반다는 제베린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고 당분간은 그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의 기묘한 부탁에 머뭇거린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이 누군가를 지배하고 괴롭히는 것을 좋아하는 면이 있음을 발견하고 쾌감마저 느끼게 되고, 급기야 제베린에게 다른 이름을 사용하길 강요하고 고문과 죽음의 권한도 자신이 소유한다는 계약서를 작성하게 한다.

여행지에서 화가를 압도적인 매력으로 지배하게 된 반다는 모피를 입고 엎드린 제베린을 밟고 있는 그림을 그리게 한다. 그 후 그리스 출신 젊은이에게 반한 반다는 제베린을 교묘하게 속여 결박한 후 그리스 남자로 하여금 제베린을 채찍으로 고문하도록 만든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제베린이 고향으로 돌아와 얼마간 가업을 되살리며 삶을 꾸려가고 있을 때 한 통의 편지와 꾸러미가 도착한다. 반다가 보낸 편지에는 제베린의 환상을 충족시켜준 자신 덕분에 이제는 건강해졌길 빈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고, 꾸러미에는 언젠가 독일인 화가가 그린 그림 <모피를 든 비너스>가 들어 있었다.

 

욕망하는 쪽은 남성이고 여성은 그 욕망의 대상이죠. 이것이 여성이 갖는 전적이고도 결정적인 이점이에요. 자연은 남성이 지닌 열정을 통해 남성을 여성의 손아귀에 넘겨주었어요. 그러니 남성을 자신의 종으로, 노예로, 한마디로 노리갯감으로 만들어 결국에는 깔깔대며 차버리지 못하는 여자는 뭔가 잘못된 여자에요...... 여성이 잔인하고 불충하고 게다가 남성을 학대하고 모욕적으로 가지고 놀며 동정 같은 것을 보이지 않으면 않을수록 여성은 남성의 욕망을 자극하여 남성에게 사랑을 받고 또 숭배를 받을 수 있어요.


'너는 망치가 아니면 모루가 되어야 한다' 라는 괴테의 말이 남녀 관계에서처럼 딱 들어맞는 곳도 없을 겁니다...... 남자의 유일한 선택은 폭군이 되든지 아니면 노예가 되는 겁니다.

 

1890년 크라프트에빙이 성적도착의 개념으로 발표한 마조히즘의 유래가 된 <모피가 된 비너스>에서는 사실 성적도착에 관한 보고서라기 보다는, 남성과 여성이 관계를 갖게 될 때에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권력의 구도를 파헤친 소설로 평가받아야 한다. 자허마조흐는 그런 권력의 불균형이 계속될 것이라고 예견한다.


여자가 남자의 동료가 되려면 권리 면에서 남자와 동등하고 또 교육과 일을 통해 남자와 동등해져야 해요. 지금으로서는 망치냐 모루냐 하는 양자택일의 선택밖에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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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雅歌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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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70년대 말, 산업화의 그늘에서 뿌리뽑힌 자가 되어 도회로 끌려나간 '우리'가 어느새 저마다 귀밑머리 희끗한 중년이 되어가고 있을 무렵, 초등학교 동창회 초대장이 날아든다. 다시 모인 그들 중 누군가가 '당편이'에 대해 묻는다. 

당편이는 신체적으로는 곱추에 다리를 저는 불구였고, 정신적으로 온전하다고 할 수 없었다. 어느날 마을에 버려진 당편이를 문중의 녹동어른이 거두었는데, 그날부터 당편이는 그럭저럭 마을에서 더불어 살았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전쟁을 겪고, 산업화가 가속화되면서 당편이가 스며들 수 있는 곳은 점점 사라져 간다. 당편이는 결국 적극적인 걸식에 의하지 않고는 생존마저 어려운 지경에 처하기도 한다. 함께 살던 건어물장수 영감이 죽자 당편이는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자들을 수용한 시설로 떠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들은 우리 곁에서 하나둘 사라졌다. 정신병원과 각종 수용소, 재활원, 보호소 같은 시설들이 그들 중 생산 능력이 없으면서 사회의 미관과 편의만 해치는 이들을 먼저 골라 데려갔다. 그리고 예전의 환유 대신 구호 대상자, 정신병자, 심신미약자, 장애인, 지체부자유자 같은 전문화되고 기능적인 호칭을 그들에게 부여한 뒤 우리가 볼 수 없는 곳에 감추어버렸다.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 적힌 글이 아니다. 이문열의 <아가>에 쓰여진 글이다. 

<감시와 처벌>을 통해 푸코가 개인이 원자처럼 분리되고, 타자와의 관계가 파괴되며, 공동체의 연대의식이 붕괴된 끝에 합리적인 예속화에 길들여지는 과정을 분석해냈다면, 이문열은 비슷한 경로를 거쳐 과거를 향수한다. 이문열은 끝내 시대와 불화할 것이다. 그가 믿는 이상향은 언제나 두고 떠나온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문열이 진보를 조롱하는 것은 유별난 행동이 아니다. 그는 언제나 일관되게 반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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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년
김연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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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그린비의 상상>의 화자는 소설가다. 화자는 매우 현실적인 거리를 걷고 있다. 지나가는 거리의 상점 간판을 세밀하게 나열하는 수법 때문에 독자는 90년대 중반의 한 거리를 화자와 함께 걷고 있다는 착각을 할지도 모른다. 끊임 없이 비가 내리는 어두운 거리를 화자와 함께 걸으면서, 우리는 화자가 상상하는 소설 스토리 속으로 들어간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불임의 피아노 학원 원장, 이혼하고 소설을 쓰는 남자, 말을 더듬는 단신의 슬지라는 여자. 남자는 아름다운 피아노 학원 원장을 떠난 후 불구의 슬지와 관계를 맺는다. 불임의 아름다운 여성과 소설 쓰는 불구의 여성을 대비시킨 점은 낯간지럽다. 

<심판>은 주인공이 오손 웰스의 영화를 보다가 잠들어 꾼 꿈 이야기이다. 이 소설에서도 화자의 직업은 소설가로 유추될 수 있는데, 가나다 순으로 정렬되지 않은 국어사전이 소지품으로 나온다. 그녀는 세금을 자동이체 해두었기 때문에 고지서를 받을 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날 한 통의 고지서를 받는다. 재판에 피고인으로 앉게 된 화자에게 T/F 식 질문을 끊임 없이 던져댄다. 

<미성년>은 '현선이라는 소설 쓰는 학생과 자세히 보면 한쪽 다리를 저는 교수 지훈에 관해' 소설을 쓰는 이야기이다. 역시 소설가를 화자로 상정하고, 그 소설가가 쓴 소설에 대한 자기 비평을 가하고 있다. 

<배반>은 '호랑이가 닭에게 잡아먹힌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하얀 공간 속에 호랑이와 닭이 평화롭게 공존하다가, 어느 순간 호랑이가 이계의 공간에서 욕망할 대상들을 새로이 알게 된 후 겪게 되는 기이한 이야기이다.

그 밖에 헤어진 연인을 자취방이라는 공간에서 기다리는 동안 느끼는 병적 정신상태를 불안한 필치로 그린 <기다림>, 작가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추측되는 <은유희>, 있음과 없음의 경계에 대해 '낙태'라는 사건을 통해 이야기한 <아이, 이미지의 장례식>, 대학 졸업식에 참석한 여자를 스토킹하는 남자(혹은 사물, 또는 그 무엇도 아닌)에 대해 묘사하는 <세레모니>가 실려 있다.

 

김연경의 소설집 <미성년>에 수록된 작품들은 소설가의 자기 분열 양상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김연경은 에고이즘의 방패를 둘러치고 있다. 자신의 소설이 비평가들에게 난도질 당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소설이 타인에게 비평될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두려워하는 듯 보인다. 그래서 소설의 화자는 소설을 쓴다. 그들이 소설을 쓰는 과정을 묘사하고, 이런 저런 이유를 붙이고, 화자가 스스로 소설을 비평한다. 완벽하다. 그러나 그 완벽성은 소설 속에서 완벽할 뿐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김연경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실에 대해, 겪지 못한 것들에 대해 일체 함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역시 에고이즘의 발로로 보인다. 소설은 지극히 제한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전개된다. 

낙태에 관련한 이야기들이 흥미롭다. 어떤 가치판단이나 죄의식을 이야기하지 않으면서도 여러차례 다루어진다는 점이 그렇다. <피아노, 그린비의 상상>, <심판>, <아이, 이미지의 장례식>에서 다루어지는데, 먼저 <심판>에서 판사는 피고인에게 낙태한 사실에 대해 죄를 물으며 T/F식 질문을 던져댄다. 피고인은 이를 부당하다고 느낀다. <아이, 이미지의 장례식>에서는 화자가 착상되었다가 칼에 난도질 당해 떨어져 나간 수정체이다. 그런데 수정체는 자신이 이미 죽어버렸다면서, 사실은 죽지 않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낙태라는 사건에 대한 혼란을 소설 쓰기를 통해 정리하려는 시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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