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런 버핏의 주주 서한 - 워런 버핏이 직접 쓴 유일한 책
워런 버핏 지음, 로렌스 커닝햄 엮음, 이건 옮김, 신진오 감수 / 서울문화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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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고속도로가 있는데 굳이 우회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랜 기간 워런 버핏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빈번하게 인용되어왔고 

그의 이름이 들어간 책만해도 수두룩한데

본인이 직접 쓴 유일한 내용을 먼저 접하는 게 좋겠죠.

엄밀히 말해 이 책은 버핏이 보낸 주주서한들을 집약한 일종의 편지모음 성격입니다만 

지구 상에서 가장 놀라운 성공을 거둔 투자자의 핵심철학이 집약되어있는만큼 내용의 질은 압권입니다.


단 오래 전 기술된 주주서한이 많다보니 회계 쪽 챕터에 GAAP 체제 관련 내용이 많다는 건 살짝 아쉽고

비기축통화국이자 소규모 개방경제인 국내 특성에 대한 별도의 고민은 필요하겠으나

그것이 투자철학과 문맥을 살펴보는데 조금도 지장을 주진 않습니다.

무엇보다 이번 개정판에서 대단히 매끄러워진 문장의 흐름과 번역에 찬사를 보냅니다.



기업지배구조부터 금융투자, 보통주 및 보통주의 투자대안, 인수합병, 회계 등으로 분리 구성된 주요 챕터에는

영화, 우화, 유명인사들의 에피소드를 인용한다거나 일상사를 빌어 

깊이있는 내용을 쉽게 전달하는 버핏의 농익은 표현력이 잘 깃들어 있습니다.

어려운 내용을 쉽게 전달하는 건 이를 완벽하게 체득해야 가능한 역량이죠.

담백하고 편안하게 이야기를 건네는 것 같은 본 방식은 국내 몇몇 운용사에서도 벤치마킹한 방법입니다.


버핏의 주요 투자철학은 그간 많이 소개되어왔기에 숱한 명문구들을 굳이 옮길 필요는 없어보이고

직접 감상하면서 그 맛을 느끼는 게 정석입니다. 

특히 증시 참여자 및 관련업계 종사자라면, 문장의 행간을 음미하면서 공감하는 부분이 대단히 많지 않을까 합니다.


전 기업지배구조, M&A, 자산 배분에 대한 내용이 상당히 인상깊었습니다.


본서 첫 장이 '기업지배구조' 관련 내용인데

국내 증시에 실제 참여하고 있는 투자자라면 이 부분이 참 쓰라리게 다가올거라고 봅니다.

버크셔 같은 회사는 세계적으로도 극히 드문 사례라 애초에 이 정도 퀄리티는 바라지도 않지만

찰리와 버핏이 '그것이 알고싶다' 1,000회 특집을 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매우 궁금하군요 -_-)a


가치투자에는 종종 트렌드와 동떨어지고 소외되면서 겪게되는 '밸류트랩'이라는 장애물도 있고,

대단히 후진적인 국내 기업지배구조 이슈도 잘 비껴가야합니다. 

회사도 좋고 재무구조도 뛰어나지만 소액주주들은 자기 몫을 전혀 가져갈 수 없는 경우가 잦은만큼

순환매와 세일즈가 그득한 아수라장은 상기 여러 요인들이 복합 작용하여 더욱 심해지는 측면도 있겠지요.

이런 상황에서 너무나도 담백한 주주서한과 

주인 대리인 함정에서 거의 완벽하게 벗어났다고까지 볼 수 있는 이상적인 이사회 및 의사결정 구조, 

투자지주사로서의 경영철학을 보면 그저 부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추가로 기업인수 및 합병 및 자산배분 관련 기술은 

장밋빛 전망들로 가득채운 인수금융 IM 자료를 숱하게 봐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내용들.

수수료를 지향하는 브로커들의 근본적인 한계와 

야성이 넘치는 경영자들의 자신감에 대한 경각심을 계속 일깨우는 버핏은

수많은 비유를 동원하면서 EBITDA의 문제점을 꾸준히 지적합니다.

그런 면에서 감가상각비를 더한다면 법인 운영을 위해 매년 지출되는 Capex의 차감도 같이 고려하여 

밸류에이션해야 한다는 버핏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리고 자산 배분, 

일반적으로 대형 투자기관들의 포트폴리오에는 채권, 여신 등이 대거 혼합되기 마련인데 

독특한 투자지주사로 대부분 주식에 의지하면서도 이들이 일궈낸 꾸준하면서도 경이적인 결과물은

복리의 법칙을 정말 잘 보여준 사례겠지요. (하지만 주요 기관들은 결코 따라할 수 없는 포트폴리오ㅎ)

실제 주요 기관투자자들의 전략적? 자산배분은 대부분 주먹구구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긴 합니다.

하지만 자산 배분은 다양한 투자섹터와 각 분야의 특성·규모·현황, 회사의 투자성향 및 부채조달구조, 가용자본 등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조율해야하는 고도의 역량이 필요한 영역이기에... 이런저런 실정 상 이해는 됩니다.



실제 투자를 하다보면 각양각색의 투자방식을 직간접적으로 접하게 되고 

굉장히 다양한 철학이 존재함을 느끼곤 합니다. 

그렇더라도 찰리&버핏의 기본 투자원칙을 근간으로 버크셔가 장기간에 걸쳐 보여준 모습은 

주식 투자 뿐만 아니라 대주주-이사회-경영진 간의 관계 설정 같은 기업경영 측면에서도 굉장한 영감을 선사할 뿐더러

금융업 각 섹터에 대한 다양한 시사점을 제공해줍니다.


이들이 거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원동력과

주주들의 지나친 간섭도 없으면서 의사결정이 대리인이나 소수에 의해 왜곡되지 않을 수 있는 시스템이 궁금하다면

뻥 뚫린 고속도로를, 한 번 정주행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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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션 - 어느 괴짜 과학자의 화성판 어드벤처 생존기
앤디 위어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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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좆됐다.

나는 좆됐다.

내 인생 최고의 시간이 될 줄 알았던 한 달이 겨우 엿새 만에 악몽으로 바뀌어버렸다.


쉽게 잊기 힘든, 찰진 멘트로 서두를 장식하는 <마션>은 로빈슨크루소의 SF버전으로

작가의 데뷔작이라는 게 정말 놀라운 고퀄의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우주과학 전분야에 걸친 해박한 고증과 세밀한 디테일이 일품인데

72년생 작가 앤디 위어가 샌디아 국립연구소 재직 경력이 있는 프로그래머(이자 전형적인 덕후)라는 사실이 

작품 집필에 크나큰 힘이 되었을 듯 합니다.


화성에 홀로 고립된 우주비행사 마크 와트니가 척박한 환경에 맞서 생존하기 위한 과정을 그려내면서

이를 화성일지를 기록하는 형태로 소설을 전개하는 방식은 독창적이고

너무 일지에만 의존하게 되면 소설 전개가 다소 밋밋해질 수 있다보니 외부 시점을 적절히 추가, 

맛깔나게 혼합하는 모습은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소설작가로서 꽤나 원숙한 느낌마저 줍니다.


허구와 상상력에 단순히 묻히지 않도록 

598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 상당한 고문/자문을 통해 기술되었다는 게 일단 훌륭한 동시에,

반대로 너무 과학적 진실성에 쏠리지 않도록

소설로서의 재미나 센스있는 필체, 플롯 구성 등에서도 대단한 재능을 발휘한 셈이죠.

비록 거의 살아나기 어려운 환경에 처했지만 긍정적인 성격과 유머를 잊지 않으면서

잊을만하면 웃음을 선사하는 기술방식이 깔끔하면서도 가벼워 보이지 않습니다.


가령 목적지로 떠날 준비를 마치고 준비물을 기재하면서

390화성일째의 일지기록

식량 : 감자 1,692개, 비타민제, 물 620리터

공기 : 로버와 트레일러 합쳐 액화 산소 14리터, 액화 질소 14리터

전력 : 36킬로와트시 저장 가능. 태양전지 29개 적재 가능

……

디스코 : 평생분

같은 위트와 센스는 줄곧 돋보입니다 ^^


사고를 당한 그를 떠나보낸 동료들의 심리, 

아폴로 이후의 최대 기사거리를 어떻게든 써먹으려는 언론 특유의 모습,

도우는 듯하면서 미묘하게 서로를 조금씩 견제하는 미국과 중국의 관계 등

허구의 우주, 전형적인 SF를 그려내면서도 현실과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는 건 박수를 받아 마땅하고,

또한 번역도 꽤 잘 되어 원작에 담긴 유머러스함이 '쪼오아~' 등의 한국어로 나름 잘 옮겨져 있습니다.


SF에 대한 추억이 있는 분이라면 로빈슨크루소, 맥가이버 같은 고전류 작품이 

21세기에는 얼마나 세련되게 탈바꿈될 수 있는 지 직접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강추!



다들 아시듯 이 소설은 다음달 영화로도 개봉합니다.

본 시리즈 이후로는 주춤했던 맷데이먼이 뛰어난 원작에 힘입어 다시금 주목받는 작품이 될 것 같네요.

<그래비티> 등 우주를 그린 영화는 대부분 나레이션 위주로 진행되고 

따라서 영화 내 음악이 메시지 전달에 꽤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데 

원작의 유머코드로 자주 활용된 '디스코'가 영화의 맛을 살리는데 큰 도움이 될 걸로 보입니다.

Staying Alive~!


상당히 기대하고 있는 다음 달 영화에서는 특히 

 - 마지막 모래폭풍과 협곡의 비탈길

 - Staying Alive를 비롯한 디스코 음악들

 - 드디어 욕조 목욕을 하면서 맷 데이먼이 지을 표정 등이 아주아주 궁금합니다ㅎㅎ



마지막으로

데뷔작이라지만 전형적인 '양덕'일 앤디 위어는 실제론 20대부터 숱한 습작을 써왔고

<마션>은 '킨들 버전'으로 '자가 출판'된 후 '14년 종이책으로도 발매된 케이스입니다.

언더그라운드에서 시장의 힘에 의거 메이저 무대로 올라오고

거기에 헐리웃의 선택까지 받아 전세계 배급되는 영화로까지 제작된 건 

양질의 콘텐츠가 부각되고 장르 간 퓨전을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이상적인 흐름으로

이런 선순환 생태계가 확보되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역량인지 재삼 재사 느끼게 됩니다.


국내에서 이런 사례로 비견될 수 있는 작가로는 '요즘 과수원하시는 그 분'을 떠올리게 되는데

그 분의 신간은 도대체 언제 나올지 모르겠네요. 

일반 재화/상품과 달리 책은 번역되면서 거의 새로운 작품이 되어버리고 언어 장벽이 가장 높은 영역이라

어떤 면에선 한국어권 시장 저변이 얕다는 게 참 아깝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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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int it Rock 1.2.3 세트 - 전3권 - 남무성의 만화로 보는 록의 역사 Paint it Rock
남무성 지음 / 북폴리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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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국내엔 은근 록 매니아들이 많고, 조용해 보이는 사람이 의외로 록·메탈을 좋아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회적으로 자신을 감추고 살도록 강제하는 문화적 특성 상 각자의 발톱을 감추고 살아야하다보니 

이를 해소시킬 분출구가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네요. 


그림으로 방대한 음악의 역사를 그려내겠다는 시도는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참신한데

재즈를 다룬 <Jazz it up>에 이어 록을 다룬 <Paint It Rock>이 '드디어' 완결되었습니다.

매니아들이 득실대는 재즈와 록의 흐름에 손을 댄다는건 <삼국지>를 만화로 그려내는 부담 못지 않은 작업임을,

음악에 관심있는 분이라면 누구나 알고 계실 겁니다.


<Paint It Rock>의 상당 분량은 '만화로 듣는 올댓록'이라는 웹툰으로 기 연재되었었고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수많은 록 매니아들의 댓글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1권이 출간된 후 5년 넘게 아무런 소식이 없어 수많은 애호가들을 애타게 만들다 

작년 말에 2, 3권 출시 포함 개정판이 나오면서 드디어 종지부를 찍게 되었습니다.


척 베리, 밥 딜런, 비틀즈, 롤링스톤즈, 야드버즈, 더 후, 제니스 조플린, 지미 헨드릭스, 핑크 플로이드부터 

레드제플린, 딥퍼플, 퀸, 이글스, 러쉬, AC/DC, 스콜피언즈,

본 조비, 메탈리카, 메가데스, 건즈&로지스, U2, 레드핫칠리페퍼스, 너바나, 드림시어터, 그린데이까지


재즈를 다룬 전작이든 이번 록이든 음악을 깊게 파고드는 강성 매니아라면

특정 장르나 뮤지션이 있고-없고 여부나 분량조절 등에 민감해할 수도 있겠으나 

이건 취향의 문제에 가깝고 전반적인 록의 흐름을 보여주기에 별 무리는 없는 구성으로 봅니다.


컨텐츠가 내공 있는 이의 손을 거쳐 텍스트 + 작화로 표현되었을 때의 전달력은 어마어마하지요.

총 3권에 걸쳐 워낙 많은 뮤지션들과 앨범들이 쏟아져 나오기에

특별히 록을 좋아하지 않는 분이라도 알고 있는 밴드/뮤지션이나 음반이 분명 꽤 많을텐데

밴드/뮤지션들의 특징, 유명 에피소드들을 콕 찝어서 그림으로 그려내는 내공에는 엄지를 절로 치켜올리게 됩니다.

그걸 캐치해낼 수 있는 분이라면 페이지를 넘기면서 작화에 담긴 수많은 유머, 풍자, 해학에 

키득키득 웃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


오지 오스본, 레드 핫 칠리 페퍼스, 키스의 캐리커쳐는 역시나 대박이고

영원히 회자될 오아시스 겔러거 형제의 '개드립' 등은 당연히 들어가 있습니다.

특히 프레디 머큐리나 액슬 로즈의 특징을 그려낸 작화를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옵니다ㅋㅋ

각자 좋아하거나 잘 아는 뮤지션들이 소개될 때 대부분 씨익 웃으며 읽게 되리라 장담합니다.

가령 제가 좋아하는 드림씨어터를 소개하면서

제임스 라브리에 - 록 역사상 가장 큰 얼굴을 자랑하고, 생긴거 답지않게 매끄러운 목소리를 내시는 분 

같은 찰진 멘트를 보면 빵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는~


내용을 더 소개하는 건 큰 의미가 없고, 직접 보는 게 정답인데

록 매니아들이 즐길 수 있는 수많은 꺼리들과 별도로, 에필로그는 인상적입니다.


"이 조그마한 지구에 이렇게 무수히 많은 음악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에 머리가 수그러진다.

 음악은 저 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들처럼 헤아리기가 불가능하다.

 더구나 우리 눈에 보이는 별보다 감춰진 별들이 더 많다.

 언젠가 여러분들도 나도, 그중에 일부만을 듣고 이 지구를 떠나게 되는 것이다."

 - 성시완의 글 중


시대를 풍미하고 떠나간 이 수많은 밴드와 뮤지션들은 빛나는 초신성이었던 동시에 

전부 모아놓고 보면 (어쩌면) 우리 곁을 스쳐간 수많은 별들 중 하나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무엇하나 겹치지 않았고 모두가 그들만의 드라마를 쓰다 떠나갔지요.

우리는 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조금씩이라도 어루만져보면서 즐길 수 있다는 데 족하면 그만일겁니다.


음악을 즐기는 분들께 적극 일독을 권하며, 

마지막으로 많은 이들의 추천사 중 배철수 씨의 추천사 일부를 담아봅니다.



"이제부터 탁월한 이야기꾼이자 그림쟁이 남무성 씨가 우리에게 Rock칠을 해주실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옷을 벗고 전신에 Rock의 세례를 받도록 할까요? Long Live Rock & Ro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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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스트 Axt 2015.7.8 - 창간호 악스트 Axt
악스트 편집부 엮음 / 은행나무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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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새로운 문학잡지, 정말 어려운 도전입니다. 

16명의 staff와 34인의 the contributors 총 50명이 참여했고 가격은 삼천원도 안되는 2,900원, 

두 달에 한 번씩 삼천부?가 나가더라도 매출액은 870만원에 불과하듯

우연히 눈에 띄어 집어들자마자 든 생각은 '쉽지 않겠다'였습니다. 


평론, 단편, 인터뷰 등이 담긴 잡지의 구성은 일반적인 잡지의 흐름과 유사합니다.

존 스칼지의 <노인의 전쟁>이나 노라조의 <니 팔자야> 뮤비 등을 다룬 내용도 있고 네임드 작가들의 단편도 있는데 

소설, 평론보다 훨씬 재미있기 읽힌 건 창간호의 인터뷰. 

커버에서 알 수 있듯 인터뷰 대상은 바로 천명관입니다.



도대체 뭐가 그리 부끄럽다고 사진찍을 때 앞을 못보는지, 항상 정면을 본다는 작가.

우주적인 작품 <고래>나 위트가 넘치는 <고령화 가족>을 읽은 분들은 작품에서부터 이미 느끼셨겠지만 

자신에게 소명의식 따윈 없다고 말하는 그는 아주 솔직 담백합니다.

위선과 허영으로 가득찬 몇몇 네임드 가짜 작가들과 극명하게 대비될 뿐더러 

출판사에서 창간호의 커버 및 인터뷰 대상으로 천명관을 원한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겠지요.


"한 작가의 삶에 이야기해보자. 문창과나 국문과를 나와 적당한 나이에 등단, 문장도 나름 개성있으면서 훌륭하고 

평론가들이 심심하지 않게 이 시대의 징후를 포착할만한 단서들을 떡밥처럼 던져주기도 한다.

서서히 주목받기 시작하면 매 시즌 빠지지 않고 주요 문예지 및 문학상 후보에 이름을 올린다. 

그러면서 단편집도 내고 문학상도 슬슬 수집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커리어를 쌓고 대학에도 연결되어 강사도 병행, 

어쩌면 대학교수로도 부임, 이후에는 심사위원으로도 본격 활동하면서 존경받는 문단의 원로로 늙어간다. 


근데,

그의 대표작이 뭐지? 하면 딱히 제목이 떠오르지 않는다. 겨우 제목을 떠올려도 근데 그게 다였나? 라는 느낌이 든다. 

이름은 드높지만 작품을 생각해보면 뭔가 허전한 기분이 드는건 왜일까? 

그것은 기획상품처럼 순전히 시스템이 만들어낸 작가이기 때문이다."

 - 천명관 인터뷰 중 -



일전에 예술의 전당에서 무슨 음대 교수가 리사이틀이라도 열었는지 

연주회를 마치고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에 제자들이 '선생님' 주변에 구름떼처럼 몰려들어

'선생님, 오늘 연주 들으면서 눈물이 났어요' 같은 시덥잖은 아양들을 들으면서 피식 웃은 기억이 납니다.


문단의 작가들이 등 뒤 엄한 선생님들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은 대단히 의미심장합니다.

이들이 작가의 문학적 성취와 지위를 결정하다보니 권위적 전근대적 시스템이 50년 넘게 문단을 지배하고 있어 

아무런 예기 없이 공장에서 찍어낸 것 같은 습작들만 나올 뿐 아무런 발전도, 대중들의 호응도 없을 수 밖에요.

예술가/작가라는 게 기본적으론 내가 하고싶은 이야기를 하려는건데 

자의식 과잉까진 몰라도 남의 시선을 잔뜩 의식해야 한다면

출근을 안한다는 것 외에는 일반 직장인과 하등 다를 게 없습니다ㅎ


인터뷰 내용 중 국악계 무용계 등도 세상과 무관하게 대학을 근거로 존속하고 있을 뿐, 

문학은 아직 시어머니 칠순잔치에 제자들 동원해서 공연을 시키거나 꽃다발로 구타를 할 정도는 아니니 

아직 형편이 나은지도 모르겠단 말은 아주 우울한 얘기죠. 

사교클럽도 아닌 밀교집단이 되어 정부에서 주는 창작지원금과 지원금 성격의 문학상 상금으로 생계를 꾸려야 한다면, 

그래서 무엇보다 처신이 중요한 예술이라면 그게 예술가고 작가인지, 

세상에서의 유효성을 상실했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이미 50줄에 접어들었고 그간 많은 굴곡을 겪어온 인간이자 작가로서, 

작가가 되려면 글을 써서 생계를 유지할 수는 있어야 하며

지난 십 년 간 등단한 작가 중 회사원 정도의 수입을 올리는 작가가 거의 한 명도 없을거란 이야기, 

그리고 되도록 선생님들이 지켜보는 가망 없는 단편생활을 해야 하는 문단 안보다는 

바깥에서 작가의 길을 모색해보라는 말은 진정 '안습'입니다.

(설마... 그래도 열 명은 되지 않을런지 -_-...)


이너서클과 네트워크 문제는 어떤 분야에서든 만성 고질병이지만

최근 '유명한 선생님' 중 한 분은 만천하게 다 드러난 표절을 마지막까지 감싸고 도는 모습까지 보였듯

둘둘둘 얽혀있는 굴비 문제의 해결은 어렵습니다. 본디 부당할수록 자기들끼리는 똘똘 잘 뭉치는 법~ 

 - 정치권력 같은 큰 영역에서의 이너서클이 궁금한 분들껜 <독재자의 핸드북>이라는 책을 추천합니다.

'이런 소리 해봤자 결국 암 것도 안 바뀔 테고, 선생님들은 만수무강하실 테고, 

나는 기껏해야 또 적이나 잔뜩 만들었겠지 쩝'

입맛을 다시는 치기따위 없는 50대 작가의 마지막 한 마디가 폐부를 콕 찌르네요.



새로운 문학잡지가 과연 얼마나 존속할 수 있을지, 현실적으로는 회의적입니다. 

그렇더라도 팔리지 않는 소설에 대해 소설가들이 비난받는 세상 속, 

작가들을 위한 잡지를 만들겠다는 창간호의 멘트를 보며

가짜 선생님들의 빨간 펜에서 벗어나 쾌락을 위한, 독자를 위한, 

아니면 작가 본인들이라도 그저 즐거운 놀이를 할 수 있는 신나는 '도끼'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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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별이 남긴 먼지입니다 - 최고의 과학자 13인이 들려주는 나의 삶과 존재 그리고 우주
슈테판 클라인 지음, 전대호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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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는 모두 별이 남긴 먼지입니다>는 과학 분야의 석학 13인을 대상으로

다양한 주제에 대한 대담이 이루어지는 인터뷰 형태의 책입니다.

주로 현존하는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대담이 진행되지만 인류학자(제레드 다이아몬드), 행동경제학자(에른스트 페르), 

심지어 레오나르도 다빈치와의 가상의 인터뷰도 이루어집니다. 

 - 다빈치와의 대담은 그가 남긴 원고, 일기를 바탕으로 기술되어 단순 저자의 상상에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본서의 특장점은 과학자 같은 특정 분야의 전문가들과 인터뷰할 때 

대부분의 인터뷰어가 상대의 지식에 어느 정도 함몰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비해

슈테판 클라인 본인 또한 과학자이기 때문에 동등한 상황에서 대담이 진행된다는 것.

따라서 상대방의 의견에 때로는 강한 반론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상호 반응이 이루어집니다.


시트콤 '빅뱅이론'이 과학자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잘 활용해서 히트했듯 

과학자들은 대개 괴짜로 여겨지고 일반인들에겐 거리감이 느껴지는 대상인데 

이 책에서도 화학자와의 첫 대담의 시작이

"교수님이 가장 좋아하는 분자가 있습니까?"  

"헤모글로빈이요. 바로크 예술처럼 화려한 분자랍니다." 입니다. 절로 웃음이 나오죠ㅎㅎ

그렇지만 13명의 대담을 보면 앎의 욕구에 평생을 바친 그들의 인생이 일반인들과 크게 다르지만은 않음을 느끼게 됩니다.


13회의 대담이 제각기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인상적인 것들을 아주 간략히 남겨보면

- 분자에서 읽어내는 시 -   아름다움에 대하여

처음 소개되는, 헤모글로빈을 열렬히 사랑하는 화학자 겸 시인 로알드 호프만은 

얼핏 다른 세계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인간이자 예술가로서 그의 감수성은

"아름다움은 긴장에서 나와요. 질서나 무질서 사이의 긴장, 단순함과 복잡함 사이의 긴장"이라는 표현을 통해 

유감없이 엿볼 수 있습니다.

또한 본인이 탁월하게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을 다른 사람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할 줄 알기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에서 암호 해독의 마지막 열쇠를 풀어내지 못하던 괴짜 천재 앨런 튜링이 

일상적인 대화로부터 영감을 받아서 결국 해결해내는 장면과도 오버랩되는 장면입니다.


- 우리는 모두 별이 남긴 먼지입니다 -   세계의 시작과 끝에 대하여

본서의 제목이 담긴 챕터로 우주론자 마틴 리스는 신이 우리를 만들지 않았고, 

우리가 어쩌다 우연히 생겨난 먼지같은 존재라고 하여 존엄하지 않은 게 아님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후반부 제레드 다이아몬드와 더불어 수백만의 인구가 인류의 진보된 기술문명의 희생자가 될 가능성을

상당히 높게 보는 그의 의견은 석학들 중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상상하는 이들이 참 많다는 걸 다시 한 번 보여주네요.


- 기억하나요? -   기억에 대하여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온 질투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신경생물학자 한나 모니어는 

비정상성의 매력을 언급하면서 '기억'이라는 현상을 재미있게 소개합니다.

세계적인 과학자인 대담자 대다수가 과학소설이나 SF영화 등도 즐겨본다는 점이 흥미로웠는데 

후각으로 기억을 연상하는 유명한 보리수차 에피소드처럼 작가적 직관과 주관적 상상력이 

종종 과학자의 영감까지 자극한다는 건 과학과 문학 간의 은근하고도 오묘한 만남입니다.


- 머릿속의 타인들 -   공감에 대하여

우주도 흥미롭지만 아무래도 인간의 컨트롤타워인 뇌는 그 누구나 관심을 쏟을만한 내용이죠.

인간이 비슷한 타인을 보며 뇌에서 먼저 인지하고 반응한다는 '거울 뉴런'을 발견한 신경과학자 비토리오 갈레세와의 대담.

거울뉴런은 미드 <닥터 하우스>에서도 자주 활용된 소재이고 

우리가 스포츠 경기를 보면서 열광하고 빠져드는 것 또한 거울뉴런의 활성화에 따른 일종의 공감입니다. 

타인의 입장이 되어보기 위해서도, 새로운 내용의 학습을 위해서도, 

궁극적으로 사회의 정반합을 위해 '공감능력'은 인류가 받은 최고의 축복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다만 상대방의 고통을 공감할 수 있기 때문에 사디스트가 쾌락을 느끼며, 

따라서 공감과 이타심(혹은 도덕심)은 별개라는 그의 말은 공감 자체만으론 충분하지 않다는 경종을 울립니다.


- 진화의 여성적 측면 -   모성에 대하여

인류학자 세라 허디와의 대담에서는 

본인에게 양육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후 아기를 버리기도 하는 인간 어머니와 달리

장애가 있는 새끼도 열심히 돌보고 심지어 죽은 새끼도 안고 다니는 애틋한 랑구르 원숭이 관찰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인간이 과연 원숭이보다 더 '인간적'인지 '비인간적'인지, 헷갈리게 되는 내용인 동시에

세라 허디가 말하는 다양한 내용/주장들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갸웃거리기도 하게 되는 챕터


- 거울로 된 방에서 -   의식에 대하여

인도의 뇌과학자 빌라야누르 라마찬드란은 인도인답게(?) 다른 과학자들과는 꽤나 다른, 

인도인 특유의 직관적 사고를 많이 보여줍니다. 

아기를 갖고 싶은 욕구가 지나친 여인에게 생기는 '상상임신'

거울을 이용해서 환상으로 환상을 치료하는 '유령 팔다리 절단'

탁자 위아래에 손을 놓고 쓰다듬는 실험 등 살짝 신비스러운 내용들이 많이 소개되고,

특히 '환생'이라는 대전제에 대해 두 과학자가 가지는 시각차에서는 각자의 문화적 기반을 여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13인의 과학자들이 이 세상을 바라보는 프레임들은 각기 조금씩 다르고 

의식의 전이가 가능한가 등의 질문에서 의견이 엇갈리기도 하지만

공통적인 한 가지는 다빈치를 비롯하여 그들이 열정적으로 앎을 추구했다는 사실입니다.

과학과 예술은 정반대 지점에 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이 책에 담긴 과학자들의 마음을 읽어보면 

무한한 지적 희구를 탐하는 이들의 예술적 재능 및 감성 또한 탁월하다는 데 공감하게 되지요.


무엇보다도 마지막 장에서 스티븐 와인버그가

인간이라는 존재는 (신이 창조했다는) 거창하고 우주적인 드라마의 주인공이라기보다는

그 어떤 대본도 없이 무대 위에서 어슬렁거리는 즉흥배우에 더 가까워 보인다는 말은 많은 감상을 자아냅니다.


지적 탐구를 통해 인생에 대한 성찰을 일궈낸 이들에게 찬사를 보내며




우주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인간의 삶을 광대극에서 조금은 벗어나게 하고,

인간의 삶에 한 가닥 비극의 품위를 불어넣는다.

 - 스티븐 와인버그의 <최초의 3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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