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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션 - 어느 괴짜 과학자의 화성판 어드벤처 생존기
앤디 위어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아무래도 좆됐다.
나는 좆됐다.
내 인생 최고의 시간이 될 줄 알았던 한 달이 겨우 엿새 만에 악몽으로 바뀌어버렸다.
쉽게 잊기 힘든, 찰진 멘트로 서두를 장식하는 <마션>은 로빈슨크루소의 SF버전으로
작가의 데뷔작이라는 게 정말 놀라운 고퀄의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우주과학 전분야에 걸친 해박한 고증과 세밀한 디테일이 일품인데
72년생 작가 앤디 위어가 샌디아 국립연구소 재직 경력이 있는 프로그래머(이자 전형적인 덕후)라는 사실이
작품 집필에 크나큰 힘이 되었을 듯 합니다.
화성에 홀로 고립된 우주비행사 마크 와트니가 척박한 환경에 맞서 생존하기 위한 과정을 그려내면서
이를 화성일지를 기록하는 형태로 소설을 전개하는 방식은 독창적이고
너무 일지에만 의존하게 되면 소설 전개가 다소 밋밋해질 수 있다보니 외부 시점을 적절히 추가,
맛깔나게 혼합하는 모습은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소설작가로서 꽤나 원숙한 느낌마저 줍니다.
허구와 상상력에 단순히 묻히지 않도록
598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 상당한 고문/자문을 통해 기술되었다는 게 일단 훌륭한 동시에,
반대로 너무 과학적 진실성에 쏠리지 않도록
소설로서의 재미나 센스있는 필체, 플롯 구성 등에서도 대단한 재능을 발휘한 셈이죠.
비록 거의 살아나기 어려운 환경에 처했지만 긍정적인 성격과 유머를 잊지 않으면서
잊을만하면 웃음을 선사하는 기술방식이 깔끔하면서도 가벼워 보이지 않습니다.
가령 목적지로 떠날 준비를 마치고 준비물을 기재하면서
390화성일째의 일지기록
식량 : 감자 1,692개, 비타민제, 물 620리터
공기 : 로버와 트레일러 합쳐 액화 산소 14리터, 액화 질소 14리터
전력 : 36킬로와트시 저장 가능. 태양전지 29개 적재 가능
……
디스코 : 평생분
같은 위트와 센스는 줄곧 돋보입니다 ^^
사고를 당한 그를 떠나보낸 동료들의 심리,
아폴로 이후의 최대 기사거리를 어떻게든 써먹으려는 언론 특유의 모습,
도우는 듯하면서 미묘하게 서로를 조금씩 견제하는 미국과 중국의 관계 등
허구의 우주, 전형적인 SF를 그려내면서도 현실과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는 건 박수를 받아 마땅하고,
또한 번역도 꽤 잘 되어 원작에 담긴 유머러스함이 '쪼오아~' 등의 한국어로 나름 잘 옮겨져 있습니다.
SF에 대한 추억이 있는 분이라면 로빈슨크루소, 맥가이버 같은 고전류 작품이
21세기에는 얼마나 세련되게 탈바꿈될 수 있는 지 직접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강추!
다들 아시듯 이 소설은 다음달 영화로도 개봉합니다.
본 시리즈 이후로는 주춤했던 맷데이먼이 뛰어난 원작에 힘입어 다시금 주목받는 작품이 될 것 같네요.
<그래비티> 등 우주를 그린 영화는 대부분 나레이션 위주로 진행되고
따라서 영화 내 음악이 메시지 전달에 꽤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데
원작의 유머코드로 자주 활용된 '디스코'가 영화의 맛을 살리는데 큰 도움이 될 걸로 보입니다.
Staying Alive~!
상당히 기대하고 있는 다음 달 영화에서는 특히
- 마지막 모래폭풍과 협곡의 비탈길
- Staying Alive를 비롯한 디스코 음악들
- 드디어 욕조 목욕을 하면서 맷 데이먼이 지을 표정 등이 아주아주 궁금합니다ㅎㅎ
마지막으로
데뷔작이라지만 전형적인 '양덕'일 앤디 위어는 실제론 20대부터 숱한 습작을 써왔고
<마션>은 '킨들 버전'으로 '자가 출판'된 후 '14년 종이책으로도 발매된 케이스입니다.
언더그라운드에서 시장의 힘에 의거 메이저 무대로 올라오고
거기에 헐리웃의 선택까지 받아 전세계 배급되는 영화로까지 제작된 건
양질의 콘텐츠가 부각되고 장르 간 퓨전을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이상적인 흐름으로
이런 선순환 생태계가 확보되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역량인지 재삼 재사 느끼게 됩니다.
국내에서 이런 사례로 비견될 수 있는 작가로는 '요즘 과수원하시는 그 분'을 떠올리게 되는데
그 분의 신간은 도대체 언제 나올지 모르겠네요.
일반 재화/상품과 달리 책은 번역되면서 거의 새로운 작품이 되어버리고 언어 장벽이 가장 높은 영역이라
어떤 면에선 한국어권 시장 저변이 얕다는 게 참 아깝다는 생각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