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커스 : 세상을 바꾼 컴퓨터 천재들 (무삭제판)
스티븐 레비 지음, 박재호.이해영 옮김 / 한빛미디어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해커'를 다룬 책은 굉장히 드물 뿐더러 대중적 인지도 및 관심 또한 낮은 편입니다. 

언론보도의 악영향으로 '해커'란 단어에 대한 인상은 아직까지 범죄자 수준에서 크게 나아지지 않았지만

컴퓨터가 우리의 삶에 미친 지대한 영향력을 감안한다면 

해커들의 세계가 대중들에게 이렇게까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게 오히려 의외죠.

<해커스, 세상을 바꾼 컴퓨터 천재들>은 베일에 싸인 해커들의 세계와 

그들의 사고방식을 들여다볼 수 있어서 대단히 흥미롭고도 의미 있는 책입니다.


본문은 이들이 활약한 20세기 중후반, 1950~1980년대 위주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1부. 진정한 해커> 캠브리지 : 50년대와 60년대 에서는 MIT 연구실에서 컴퓨터가 처음 생기기까지의 배경을,

2부. 하드웨어 해커> 북부 캘리포니아 : 70년대 에서는 지금은 간단히 주문하면 바로 받아볼 수 있는 하드웨어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소리없는 노력을 통해 어렵게 탄생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3부. 게임 해커> 시에라 : 80년대 부터는 

컴퓨터가 게임을 통해 본격 '기업', 하나의 '산업'으로 부상하는 흐름을 보여줍니다.

특히 초기 컴퓨터 체스대전이나 인공지능 채팅, 핀볼기계를 대체한 조이스틱 게임의 등장, 

갤러그의 전신인 스페이스워부터 미스테리하우스, 모든 게이머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드는 던전앤드래곤 및

리처드 개리엇의 울티마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초기 게임들의 등장과정은 대단히 재미있게 다가올 것이고

팩맨 관련 저작권 분쟁 또한 흥미롭습니다.


최종 4부. 마지막 진짜 해커> 캠브리지 : 1983년 후반부 후기에는 

청년 시절 해킹에 푹 빠져 살았던 각 인물들이 현재 과연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들의 현황 혹은 짤막한 인터뷰가 담겨있는 부분이 아주 재미있게 읽힙니다.



이 책은 해킹의 역사를 담고있긴 하지만 저자가 말하듯 공식 역사서는 아닙니다.

또한 대단히 의미있는 역할을 수행했어도 사교성이 떨어지는 대부분의 해커들은 은둔자의 모습을 보여왔기에

본문에 나오는 숱한 인물들의 이름은 대부분 생소합니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MS의 빌 게이츠나 애플의 두 스티브 등과 달리 본인들을 알릴 생각조차 하지 않은 이들 또한

진정한 '슈퍼 히어로'이자 '마에스트로'였음에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 같습니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 괴짜인 이들의 기행은 정말 가지각색인데 재미있는 몇 가지를 소개하면

1) 피터 샘슨이 동아리에 기고한 '프로그래밍 詩'

2) '장 본 물건 옮기는 일 좀 돕고 싶어요?'라고 물을 때마다 거부하는 남편에게 분노한 아내가 따지자

  '물론 나는 돕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이 도와달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다른 문제지요' 라고 대답한 선더스.

  프로그래머에게는 질문의 맥락보다 질문의 내용(코딩)이 중요해서 

  구문 입력이 잘못되면 프로그램 회로가 돌아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내 마지가 질문의 오류를 고친 후에야

  선더스가 자신의 머리라는 회로를 통해 프로그램을 정상적 성공적?으로 돌릴 수 있었다는 것ㅎㅎ 

  - 어떤 면에선 리걸 마인드가 연상되는 부분

3) 담배연기를 막으려고 중국 식당에 직접 만든 선풍기를 들고 가서 흡연자 쪽으로 연기를 점잖게 되돌려보내는 

  유쾌한 TMRC 해커들의 모습과 '새콤달콤 쓴 멜론' 에피소드

4) 게임이 끝나면 프로그램이 점수를 평가하는 논평을 내놓는데 BOA 사람들이 대출한도액을 논하러 오는 자리인데도 

  '완전 멍청함' 같은 멘트가 나오도록 코딩할 정도로 초기 스타트업들이 순진/순수?했었다는 점(애플 워즈니악)

5) 온라인 시스템즈의 뛰어난 개발자이자 젊은 억만장자였지만 연애에 있어서는 완전 먹통이자 소위 '대마법사'였던 

  존 해리스의 총각딱지 떼주기 프로젝트 등은 절대 놓치지 않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초창기 순수하고 열정이 가득했던 해커들이 공유했던 '해커주의'와 '해커윤리'도 인상적인데

현대에 소프트웨어의 가치를 가장 제대로 인정해주는 국가인 미국에서

대다수 해커들이 각종 프로그램들과 정보를 오픈소스로 무한히 공유하고 싶어했다는 건 은근한 아이러니입니다.

여기에는 10대의 어린 나이일 때부터 OS의 무궁무진한 잠재력과 가능성을 간파하고 

영리성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이를 통해 결국 대성한 빌 게이츠의 영향이 제법 크겠지요.

MS는 IBM과 더불어 프로그래머들로부터 수많은 비난을 받지만 

소프트웨어라는 무형자산에 대한 대가 지불 없이 개발자들의 순수한 열정에만 의존한다는 것도 어불성설이기에

전 당시 빌 게이츠의 생각에 어느 정도 공감하는 편입니다. 



<해커스, 세상을 바꾼 컴퓨터 천재들>라는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든 생각은

교과서에 정규과정으로 편성되는 등 일반상식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는 음악 혹은 미술 등의 역사와 달리

해커들에 대한 이야기는 놀라울 정도로 수면 아래 잠기고 묻혀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컴퓨터가 현대인의 삶에 미치는 지대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MS, 애플, 구글, 페이스북의 대표 몇몇을 제외하면 우리에게 너무 덜 알려진 게 아닐런지.

이는 교과목을 그저 열심히 공부하는 공부기계(tool)들과 달리 해커들은 해킹이라는 행위 자체가 즐거웠을 뿐이고 

또한 영리보다 무한한 공유를 지향했던 초창기 해커들의 성향 상 대중적 인지도에 애초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할겁니다.


하루종일 컴퓨터와 씨름하는 괴짜들은 불과 50여 년 만에 이 세상을 완전히 변화시켰고...

가상세계의 마법사들이 일궈낸 이 놀라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결국

거인의 어깨에 걸터앉아있는 소소한 존재임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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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부대 - 2015년 제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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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을 가장 뜨겁게 달군 국내 소설 작가는 단연 장강명.

집단자살을 다룬 문제작 <표백>으로 본인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이 작가는 

현대 한국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잘 헤집으면서 어느새 주목받는 작가로 거듭났습니다.


변화구와 직구 중 저는 직구를 대단히 선호하는 편이고

오프라인에서 사람을 만날 때 아무리 독설이 심하더라도 솔직한 걸 겉돌면서 빙빙 말돌리는 것보다 훨씬 좋아하는지라

한국사회의 폐부를 이리저리 찔러대는 작가의 성향 자체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시각입니다.

대신 (누구나 알고 있는) 맨살을 드러낸다는 것 외 별다른 대책이 보이지 않는다는건 

향후 작가가 극복해야 할 한계라는 생각은 드네요.

추가로 <표백>, <한국이 싫어서>, <댓글부대>와 다른 방식의 소설들, 

특히 작가가 SF 매니아라고 하니 그 경계선에 서있는 차기작도 나와주길 고대합니다.


한 때 <부러진 화살>이나 <도가니>, <부당거래> 같은 영화가 큰 반향을 얻었고 

작년만 해도 <베테랑>이나 <암살>, <내부자들> 같은 작품들이 관객들의 반응을 이끌어낸 것처럼

이 책도 삼성전자의 백혈병 사건이나 국정원 댓글 조작 같은 실화들에 기반한 일종의 세미픽션 혹은 르포 성격을 지닙니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허구지만 과거든 현재든 역사적 서사에 살짝 기댄 작품은

독자들의 반응을 얻는데 상당한 강점이 있는 편이고, 이는 <칼의 노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작가들은 소설 뿐만 아니라 인터뷰가 재미있는 경우가 많은데

작품만으로는 도저히 생활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공모전, 문학상을 정조준했다는 작가의 말은

이번 작품의 경우 '제주 4·3 평화문학상'을 겨냥했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국내 문학이 완전히 죽었다는건 익히 알고 있었어도

여러 인터뷰 중 약 1만권 정도만 팔리면 국내 소설부문 베스트셀러 1위가 될 수 있다는 말은 상당히 충격적...


<댓글부대>는 거의 <내부자들>의 소설판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아주 적나라한 내용들을 담고 있고

역대 제가 본 모든 책을 통틀어 'ㅆㅂ' 같은 욕이 가장 많이 나온 소설입니다ㅎ

그렇지만 저는 카톡 방식의 내용 기재나 

오유/위키/일베 등등 이 사회에서 나름 널리 쓰이고 있는 다양한 은어 및 문장들을 그대로 가져와 

'순수문학'이라는 굴레, 금고아에 갇혀있는 작법에서 벗어났다는 점에는 오히려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기자 출신의 작가로는 누구나 김훈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죠.

같은 경력을 가지고 있는 이 두 작가의 문체가 완연히 다르다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물론 기자 출신이기 때문에 두 작가 모두 최대한 사족을 줄이고 문장을 되도록 간결하게, 

'끊어치는' 스타일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나 

한 명은 문장 그 자체가 너무나도 유려한 미문을 구사하는 반면, 다른 한 명은 어떤 면에선 기사에 가까운 문장을 구사합니다.

두 작가의 문체를 비교해보는 것도 소설을 보는 분들의 또 한 가지 관전 포인트가 될 수 있겠습니다.


작가가 인더스트리얼 락의 대표주자 마릴린 맨슨의 신규 앨범을 계속 반복 재생하면서 이 책을 썼다고 하는데

이를 보고 오랜만에 맨슨의 음악을 다시 듣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2집 앨범 자켓부터 충격적인 비주얼과 반기독교적 분위기를 물씬 풍겼던 마릴린 맨슨과

삐딱한 시선으로 이 사회를 쳐다보는 작가 간의 교집합이 느껴지는만큼

걸작 <매트릭스>에 담긴 'Rock is Dead', <레지던트 이블>의 'The Fight Song' 등을 돌이키면서 

적나라한 내용이 가득 담긴 이 책을 다시 감상해봐야겠습니다.



작가와 뮤지션이 삐딱한 걸까요.

아니면 이 사회 자체가 삐딱한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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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309동1201호(김민섭)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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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쓰고 '나는 꼰대다'라고 읽는 잉크 묻은 종이에 대한 답변.


제목이 강렬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지라 작년 11월 출간되자마자 읽고 뒤늦은 후기를 남기네요.

요즘은 거시적인 책과 미시적인 책을 번갈아가며 읽는 편인데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는 제가 현실적인 책을 찾아보는 이유에 잘 들어맞는 내용이었습니다.


일단 본서는 수많은 ‘지방시’들이 처한 열악한 상황을 대단히 차분하고도 정돈된 어조로 기술해나가기 때문에 

제3자 입장에서 봤을 때 고발서 성격은 아닙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 관계자들은 광분했겠지만.

작년 11월에 읽을 때 자의든 타의든 학교를 오래 다니진 않겠구나... 어렴풋이 생각은 했어도 

그 시점이 바로 출간 다음 달이 될 줄은 몰랐네요. -_-

아마 저자는 이 책을 펴내면서 이미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여기 나오는 여러 에피소드 중에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많고 그 외 저자가 ‘안 적거나 못 적은’ 내용도 꽤 있겠으나

당장 제 주변만 둘러보더라도 본문에 담긴 내용 못지않은 사례들이 많아서 

오로지 본인만 겪고 있는 특수한 상황을 지나치게 과장한 거란 생각은 안 듭니다. 

시간강사로 살아가기 힘들다는 건 제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직간접적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으니.


코레일 등이 적자 공기업이라고 해서 그 구성원들이 못난 게 아니고

거래소 같은 흑자 공기업의 구성원들이 잘난 게 절대 아니듯 

기업이 아닌 학교 또한 마찬가지로, 특정인의 소속/처지와 실제 역량은 분명 다릅니다.

하지만 갑을관계·서열짓기 문화가 만연한 국내 대다수 영역에서 지위가 한 번 고착화되면 지속성이 강하므로

안정적인 단계에 진입한 후에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이 굉장히 뛰어나다고 생각(착각)하기 쉽습니다.

특히 한 번 그 자리를 얻고 나면 향유할 수 있는 것들이 차고 넘친다는 문제를 안고 있지요...

뛰어난 시간강사와 교수 사이의 능력차보다 그 '한 끗 차'가 빚어내는 현실적 격차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전 학부 때 인문계열 소속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지금은 아예 다른 분야에 몸담고 있지만 

한 때 인문학 계통 석박 과정으로의 진로 변경을 진지하게 고려했던 사람으로 남의 일 같지가 않네요.

결국 전 '현실을 너무 많이 쟀기 때문에' 커리어패스를 인문학 쪽으로 바꾸지 않았습니다.

교수직을 얻을 수 있을지 전혀 알 수 없는데다, 만약 교수가 되지 못한다면 현실적으로 삶이 많이 힘들어지겠기에 

모 아니면 도, 1 아니면 0에 가까운 디지털적 결과가 부담스러웠거든요.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만약 그 길을 갔다면 지금쯤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짐작해보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모든 인생은 각기 하나의 드라마이기에 ‘좋아하는 일을 그저 하라’란 말을 함부로 해선 안 된다고 봅니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은 다를 수 있고, 

만약 그 둘이 같으면서 현재 하고 있는 동시에 잘 풀리기까지 한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축복인 것이죠.

특히 학생시절 꿈꿨던 해당 분야와 일이 정말 상상에 부합하는지 아니면 희망사항에 불과한지는 

그 업종에 진입 후 실제 겪어보면서 세부적으로 알게 되며 인간이라는 생명체에 주어진 시간은 

다양한 관심대상 모두를 직접 경험해보고 최종 취사선택할 수 있을 정도로 길지 않습니다. 



저자의 세부전공 및 해당 분야에 대한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등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으니 

능력에 대한 판단은 배제하더라도 본문을 통해 사회생활에 필요한 정치적 센스(?)가 다소 부족한 동시에 

상당히 내성적인 성격이라는 정도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미디어가 너무 잘 발달한 현대사회는 갈수록 마케팅이 중요해지고 있고 인문학도 예쁘게 포장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를 맞아

포장이 먼저인지 내용물이 먼저인지 모르겠는 이상한 가짜 인문학 약팔이들이 넘쳐나고 있는 요즘 세태을 보면

솔직히 이 사회에서의 생존에 불리한 스타일 아닌가 그런 생각마저 들었네요.

리뷰를 남길 경우 대부분 읽자마자 바로 적는 편이데 유독 이 책에 대해 뒤늦은 후기를 남기게 된 데에는

은근한 공감과 더불어 이에 부수되는 심적 불편함이 이유 아니었을까 합니다.


꿈을 찾으려다 비록 지금은 후회하고 있지만, 저자가 봄날을 맞이할 수 있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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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화과정 1 한길그레이트북스 9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지음, 박미애 옮김 / 한길사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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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1권만 보고 잊고 있다 중고서점에서 우연히 2권을 발견하여 다시 본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문명화 과정>.

사실 상당수의 고전, 그리고 고전이 아니더라도 사회학·철학 등 인문계통 서적들은

때로는 1천쪽을 훌쩍 상회할 정도의 분량 압박에 '사유의 남발'이 지속되고 비슷한 내용이 반복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본서도 2권을 합하면 800쪽에 달하는 분량인데다가 옮긴이의 논문과 두 번에 걸친 서문이 담긴 도입부만으로도 

무려 100페이지에 달한다는 부담이 있는 책이죠. 특히 건조하게 전개되는 2권은 가독성이 정말 낮습니다.


그렇지만 인문서적 특유의 몇몇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현대인 다수가 체득하고 있는 여러 예의범절이 중세 유럽 사회에서 처음에 왜 도입되고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역사의 페이지를 들춰주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눈요기거리를 선사합니다.


특히 1권 2장에는 중세의 다양한 행동양식들이 나옵니다. 재미있는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1) 초기 포크의 사용은 불경하다며 성직자들로부터 천벌을 받을 것이라는 예언을 받음 (결국 상용화에 장시간 소요)

2) 어떤 궁중예법서에는 종종 한 다리로 서있기를 권장하기도

3) 손을 씻지 않고 먹으면 안된다. 손가락이 마비될 수 있으니까...? 라는,

 분명 맞는 말인데 과학이 체계적으로 발달하지 못하다보니 얼토당토 않은 이유가 제시되기도 함

4) 식탁에서 고기를 잘라 나누어주는 건 매우 명예롭고 영광스러운 일이어서 집주인이나 명망있는 손님이 맡았고 

 고기를 자르는 방법이 사냥, 펜싱, 댄스 같은 필수 사교능력이자 교양으로 여겨졌다는 점

5) 기사가 많다보니 나이프로 이를 쑤시는 경우...가 많아 이를 금지했다는 것

이외에도 손씻기, 침뱉기, 각종 생리현상, 이성관계, 침대예절 등 당시의 다양한 예법들이 나오고,

당시의 다양한 삶의 양식들을 훑어보다보면 정상과 비정상이란 경계의 모호함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현대인들은 흔히 '과거'와 '기사도'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고 이에 기초한 문학작품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막상 당시의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15세기 중세만 하더라도 노상방뇨, 남녀혼욕, 나체 외출 등이 나름 흔한 일이었는데

기사들의 덕목인 명예, 신앙, 겸손, 사랑, 용맹, 관용, 약자 보호 등은 

초기엔 그와 정반대 현상이 빈번했기에 집권단체나 종교계를 비롯 상류층에서 권장한 개념에 가깝습니다.


결국, 문명화 과정은 위생·건강 같은 합리적인 이유에 의거 촉발된 측면도 분명 있겠으나 그보다는

상류층의 환심을 사거나 상류층 및 궁정문화를 차별화시키고 신분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는 게 엘리아스의 지적.

어떤 면에선 춘추전국시대 명재상 관중의 '의식이 풍족해야 예를 안다'는 말과 상통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현대에도 영미권의 몇몇 대학에서 자신들만의 독특한 억양을 굳이 만들고 사용하는 것처럼

타인과의 차별화를 꾀하려는 이런 모습은 과거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17~18세기 독일 상류층은 아예 프랑스어 혹은 라틴어를 쓰거나 

독일어를 쓰더라도 가능한 한 프랑스어를 많이 섞어쓰는 게 유행이었다는 문구를 보면 문득

한국에서 최근까지 유행한 '보그병신체'가 떠오르기도 하네요ㅎ

이는 근대 시민의식의 발로 못지않게 '우월함'에 대한 욕구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특히 문명화 과정이 처음에는 외부로부터 강제되다가 점차 자기강제로 바뀌어갔다는 점도 흥미로운데,

대다수 국가에서 궁정사회가 사라진 이 시대에는 

문명화의 흐름이 엘리아스 때와 달리 자유도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역행하고 있다는 것도 특이점입니다.

어쩌면 복장 자유도 등이 향상되면서 오히려 '억눌려져있던 욕구들이 해방'되는 분위기 그 자체가 

'또 다른 방식의 문명화'일 수 있겠단 생각도 듭니다.


프로이트적 시각에 기반한 기술이 제법 많기도 하고 

기술된 당시의 사회상과 현재가 상당히 다르다는 점에 대한 감안은 필요해도

우리 몸과 정신에 새겨진 행위와 생각의 연원을 되짚어본다는 점에서 고전을 탐독할 가치는 충분하지 않을런지. 

장황한 기술이 부담스럽다면 저자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 서문과 당시의 주요 사회상이 담겨있는 

1권만 보면서 궁금하거나 필요한 부분 위주로 건져보는 것도 괜찮지 않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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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 - 게임 키드들이 모여 글로벌 기업을 만들기까지, 넥슨 사람들 이야기
김재훈 카툰, 신기주 글 / 민음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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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 혹은 IT에 관심있는 사람이든 게이머든 투자자든 우리가 놀이를 즐기는 '호모 루덴스'인 이상 

독자를 막론하고 아주 재미있는 책이 나왔습니다. 제목부터 <플레이>

이해진, 김정주, 송재경 등 기재들이 등장한 시기는 한국 IT/소프트웨어 산업의 태동기로

이들이 일궈낸 새로운 비즈니스에 대한 책들이 하나씩 나오는걸 보면

이제 이런 신산업들도 본격 성인이 되었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책은 규모를 갖춘 주요 게임기업들 중 역삼동 오피스텔에서 시작하여

<바람의 나라>, <어둠의 전설>, <퀴즈퀴즈>, <택티컬커맨더스>, <크레이지아케이드>, <카트라이더>, <마비노기>를 비롯 

수많은 히트작들을 선보인 넥슨과 그 구성원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국내 게임회사들의 역사를 경영·경제적인 측면과 같이 살펴본다는 면에서

체급차는 있되 M&A에 있어선 거의 LG생활건강이 떠오를 정도의 회사 넥슨은 가장 적합한 사례겠지요.


그리고 주요 인물들의 특징을 잘 캐치한 수준 높은 캐리커쳐가 인상적인데다

각 장마다 만화를 삽입해서 명료하게 요점을 간추린 구성·전개 방식도 깔끔하고 좋습니다.

이해진 김정주 송재경 김택진 등이 전부 모여있으면서 한국 최초의 PC방이나 다름없었었던 카이스트 이야기부터

너무나도 익숙한 각종 게임들의 개발과정, 수많은 시행착오들이 나타난 초기 경영 과제들,

그리고 개발자들 간의 협력과 불화, 이탈과 재합류에 이르기까지의 사건들은 

드라마보다 극적인 '실화'이기에 더더욱 흥미진진합니다.  

단 한 줄에 불과했어도 <단군의 땅>과 <아크메이지>의 '마리텔레콤'이 나온 것도 반가웠구요.  


이 책은 게임업계를 돌이켜본다는 의미 외 스타트업과 성장통, 조직관리 문제 등 경영 측면에서도 다양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 조직관리 : 개방성과 시스템 사이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스타트업은 초기엔 직급 호칭 결재 등등 답답한 모든 것들을 가볍게 넘기는 유연성이 있되

규모가 커질수록 결국 어느 정도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는 문제점을 만나기 마련입니다. (김정주 → 정상원 → 데이비드 리)

이는 벤처기업 대부분이 겪는 성장통이고 이를 슬기롭게 잘 헤쳐나가야 진정한 중견기업, 대기업으로 커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덩치가 커진 후의 시스템화로 인해 '검투사'와 같은 창의성과 혁신이 사그라들 수 있다는 난제도 있죠.

특히 게임회사 같은 곳일수록 이 둘간의 접점을 찾는 데에는 굉장히 많은 시행착오가 따르기 마련이고

본서에는 그간 넥슨이 겪은 수많은 시행착오들이 잘 기술되어 있습니다.


 - 현재의 캐시카우와 미래사업 간의 갈등

당시 웹구축을 통해 회사 운영비를 벌어들이던 인터넷 사업부와 게임사업부 간의 충돌 문제는 

비단 게임사만의 문제가 아닌, 성장동력을 준비 중인 모든 회사들의 공통 이슈입니다.

제 지인만 보더라도 현재의 캐시카우에 해당되는 본부에 배치되어 굉장히 고생하고 있는지라 

미래 성장동력으로 준비하고 있는 모바일 게임사업부에 대한 불만이 엄청납니다ㅎ

좋은 결과가 나올지 아니면 매몰비용으로 증발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 둘 간의 갈등을 잘 봉합할 수 있는지 또한 신규 사업을 준비하는 기업들을 지켜볼 때의 관전 포인트.


 - 사업가/경영 vs 개발자/콘텐츠 

김정주와 송재경이 이 두 가지를 대표할 단적인 인물인데

한국은 위로 올라갈수록 기술자보다 관리자를 지나치게 우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넥슨 또한 개발인력 컨트롤에 한계를 보이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초기 직접개발한 작품들보다

M&A로 인수한 회사들의 게임에 의지하게된 것도 어느 정도는 사업가 위주 경영방식에 더 의존했기 때문이겠죠.

그렇지만 결국 이 두 역량은 맞물린 톱니바퀴와 같아서 하나만 부각되면 부작용이 생기기 쉽고 상호 보완이 필요합니다.

송재경이 이탈한 초기 넥슨이 상당히 고전하기도 했고

반대로 송재경이 직접 진두지휘하는 엑스엘게임즈도 장기간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것처럼.


 - 성과보상(상장 그리고 인센티브의 함정)

상장시점을 늦춘 김정주 회장의 판단이 결과적으론 엄청난 성공으로 귀결되었지만

구성원들의 경우 고된 업무 끝에 얻는 보상이 지나치게 작거나 늦으면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매출의 3%라는 성과보상체제가 생긴 후에는 

벤처정신이 사라지면서 배부른 잉여, 거품 같은 문제도 발생한다는건 조직관리의 어려움을 잘 보여줍니다.

결국 개성 강한 개발자와 개발부서들에 대해서는 수치 기반 성과보상체제를 만들지 못했다는 것만 보더라도

성과보상이 지닌 양날의 검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아닐런지. 

관련 내용이 생생하면서도 자세하게 소개되고 있는만큼 놓치지 않길 권합니다.


 - 부분유료화, '돈슨' 문제

게임을 즐기고 사랑하는 독자라면 아마 가장 관심있게 지켜봤을 대목.

넥슨은 국내 게이머들로부터 그리 좋은 평을 듣진 못하는 회사여서

과연 이 문제에 대해 균형잡힌 시각으로 기술했는지 대단히 궁금했는데 

본문 곳곳에서 나름 솔직하게 부분유료화의 문제점과 이것이 심해진 원인을 짚고 있습니다.

하지만 '돈슨'이라는 표현을 끔찍하게 싫어한다는 경영진이 그 오명을 씻어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 그리 와닿진 않았습니다.

투자자 입장에서야 비즈니스 모델의 신기원을 만났다며 마냥 좋아할지 몰라도 

게임성을 끌어내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게 바로 넥슨이 시작한 부분유료화 모델인지라...

넥슨이 진정 게이머들로부터 재평가받고 싶다면 다양하게 준비 중이라는 차기작들이 

패키지 판매나 기간 정액제 등을 채택하여 현질로 게임 밸런스에 영향을 주지 않아야 가능할겁니다.

그런 차기작을 선보이지 않는 이상, 이 책에 기술된 관련 내용들은 공염불에 불과합니다.


 - Next 넥슨, 그들의 미래 

매출이 늘어나고 상장까지 완료한 이후 갈수록 조직이 대형화 관료화되어가는 것을 우려한 초기 경영진이 

새롭게 '인큐베이터'에서 '컴투사'들을 양성하고 있다는건 나름 기대되는 소식입니다.

어떤 평을 듣더라도 타고난 사업가인 김정주 회장이 자기만의 확고한 철학을 지니고 있는 기재임은 분명하고

바야흐로 넥슨이 대기업이 된 현재 닌텐도나 디즈니를 바라보면서 꿈꾸는 것들이 

또 다른 시행착오들을 통해 구현될 수 있을지는 넥슨人들이 앞으로 내놓는 게임을 통해 판단할 수 있겠지요.

대기업이 된 후에도 TF 운영을 통한 '손드는 문화' 구현이 가능할지, 궁금합니다.



학교에서 만난 친구, 지인들과 함께 역삼동 오피스텔에서 시작하여 이제 굴지의 기업으로 우뚝 선 넥슨.

21세기 나날이 중요해지는 콘텐츠 지적재산권(IP)과 무형자산의 힘을 여실히 보여준 이 회사가 

앞으로는 어떤 행보를 보여줄까요.

국내 게임업계를 선도한 기업의 역사적 흐름이라는 퍼즐 조각을 잘 엮어낸 저자에게 박수를 보내며,

게임과 콘텐츠에 관심있는 모든 이들의 일독을 적극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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