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화과정 1 한길그레이트북스 9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지음, 박미애 옮김 / 한길사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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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1권만 보고 잊고 있다 중고서점에서 우연히 2권을 발견하여 다시 본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문명화 과정>.

사실 상당수의 고전, 그리고 고전이 아니더라도 사회학·철학 등 인문계통 서적들은

때로는 1천쪽을 훌쩍 상회할 정도의 분량 압박에 '사유의 남발'이 지속되고 비슷한 내용이 반복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본서도 2권을 합하면 800쪽에 달하는 분량인데다가 옮긴이의 논문과 두 번에 걸친 서문이 담긴 도입부만으로도 

무려 100페이지에 달한다는 부담이 있는 책이죠. 특히 건조하게 전개되는 2권은 가독성이 정말 낮습니다.


그렇지만 인문서적 특유의 몇몇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현대인 다수가 체득하고 있는 여러 예의범절이 중세 유럽 사회에서 처음에 왜 도입되고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역사의 페이지를 들춰주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눈요기거리를 선사합니다.


특히 1권 2장에는 중세의 다양한 행동양식들이 나옵니다. 재미있는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1) 초기 포크의 사용은 불경하다며 성직자들로부터 천벌을 받을 것이라는 예언을 받음 (결국 상용화에 장시간 소요)

2) 어떤 궁중예법서에는 종종 한 다리로 서있기를 권장하기도

3) 손을 씻지 않고 먹으면 안된다. 손가락이 마비될 수 있으니까...? 라는,

 분명 맞는 말인데 과학이 체계적으로 발달하지 못하다보니 얼토당토 않은 이유가 제시되기도 함

4) 식탁에서 고기를 잘라 나누어주는 건 매우 명예롭고 영광스러운 일이어서 집주인이나 명망있는 손님이 맡았고 

 고기를 자르는 방법이 사냥, 펜싱, 댄스 같은 필수 사교능력이자 교양으로 여겨졌다는 점

5) 기사가 많다보니 나이프로 이를 쑤시는 경우...가 많아 이를 금지했다는 것

이외에도 손씻기, 침뱉기, 각종 생리현상, 이성관계, 침대예절 등 당시의 다양한 예법들이 나오고,

당시의 다양한 삶의 양식들을 훑어보다보면 정상과 비정상이란 경계의 모호함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현대인들은 흔히 '과거'와 '기사도'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고 이에 기초한 문학작품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막상 당시의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15세기 중세만 하더라도 노상방뇨, 남녀혼욕, 나체 외출 등이 나름 흔한 일이었는데

기사들의 덕목인 명예, 신앙, 겸손, 사랑, 용맹, 관용, 약자 보호 등은 

초기엔 그와 정반대 현상이 빈번했기에 집권단체나 종교계를 비롯 상류층에서 권장한 개념에 가깝습니다.


결국, 문명화 과정은 위생·건강 같은 합리적인 이유에 의거 촉발된 측면도 분명 있겠으나 그보다는

상류층의 환심을 사거나 상류층 및 궁정문화를 차별화시키고 신분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는 게 엘리아스의 지적.

어떤 면에선 춘추전국시대 명재상 관중의 '의식이 풍족해야 예를 안다'는 말과 상통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현대에도 영미권의 몇몇 대학에서 자신들만의 독특한 억양을 굳이 만들고 사용하는 것처럼

타인과의 차별화를 꾀하려는 이런 모습은 과거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17~18세기 독일 상류층은 아예 프랑스어 혹은 라틴어를 쓰거나 

독일어를 쓰더라도 가능한 한 프랑스어를 많이 섞어쓰는 게 유행이었다는 문구를 보면 문득

한국에서 최근까지 유행한 '보그병신체'가 떠오르기도 하네요ㅎ

이는 근대 시민의식의 발로 못지않게 '우월함'에 대한 욕구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특히 문명화 과정이 처음에는 외부로부터 강제되다가 점차 자기강제로 바뀌어갔다는 점도 흥미로운데,

대다수 국가에서 궁정사회가 사라진 이 시대에는 

문명화의 흐름이 엘리아스 때와 달리 자유도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역행하고 있다는 것도 특이점입니다.

어쩌면 복장 자유도 등이 향상되면서 오히려 '억눌려져있던 욕구들이 해방'되는 분위기 그 자체가 

'또 다른 방식의 문명화'일 수 있겠단 생각도 듭니다.


프로이트적 시각에 기반한 기술이 제법 많기도 하고 

기술된 당시의 사회상과 현재가 상당히 다르다는 점에 대한 감안은 필요해도

우리 몸과 정신에 새겨진 행위와 생각의 연원을 되짚어본다는 점에서 고전을 탐독할 가치는 충분하지 않을런지. 

장황한 기술이 부담스럽다면 저자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 서문과 당시의 주요 사회상이 담겨있는 

1권만 보면서 궁금하거나 필요한 부분 위주로 건져보는 것도 괜찮지 않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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