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유령의 삶 - 디지털 세계에서 인간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에릭 사댕 지음, 박지민 옮김 / 김영사 / 2026년 4월
평점 :
#서평단
#유령의삶 #에릭사댕 #김영사 #철학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손바닥 안 네모 기계가 많은 것을 강요한다.
이런 물건 좋아하니까 내가 추천해 줄게.
요즘 이 테마에 대해 관심 있는 것 같으니까
내가 미리 알려줄게.
아니야, 괜찮아.
관심 없어.
필요하면 내가 찾아서 볼게.
에이, 그러지 말고 이것 좀 봐봐.
얼마나 예쁘게?
얼마나 재미있게?
얼마나 알차게?
그만해. 필요 없어.
진짜 괜찮데도 그러네.
아이 참, 나 좀 보라니까?
생각하지 마. 내가 널 알아.
네가 원하는 게 이거야, 이거라고.
넌 이걸 원해.
봐! 이걸 보라고!
아우, 제발 그만 좀 해!
시끄러워!
정신 사나워!
나 좀 내버려둬!
정도가 지나쳐서 짜증이 솟구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대체 너는 무슨 권리로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계속해서 소비를 조장하고
필요 이상의 콘텐츠를 계속 소비하게 만드니?
네가 날 너무 무력하게 만들어.
이 책은 현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작가인 에릭 사댕의 작품이다.
그는 디지털 기술이 어떻게 인간을 도구화하고
주체성을 상실시키며 사회 구조를 바꾸고 있는지 연구하고
관련된 저서를 다수 출간했는데
'디지털 세계에서 인간은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부제에 맞게
현재 우리 모두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와 향후 마음가짐에 대한 이야기한다.
서론. 도래하는 현재 中
9p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이 유령들은 악의에 가득 차서 우리에게 가야 할 길을 알려준다.
유령들은 특별한 경우에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쉼 없이 계속 나타난다.
이 유령들의 인도를 받은 우리는 어느새 <햄릿>에 나오는 군중이 되고,
밤낮으로 쏟아지는 알림에는 반응하면서도, 매우 중요한 메시지에는 반응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도 전 지구적 차원에서, 기계적인 버전으로 말이다.
아이 햄릿 iHamlet
아이폰으로 상징되는 인공지능 유령에 의존하느라,
스스로 고뇌하고 결정하는 인간 본연의 모습(햄릿)을 잃어버린 현대인을 지칭하는 표현
10-11p
인간의 삶을 무한히 밝힐 유령 군단이 우리 손에 쥐어졌다.
이 유령들은 계속해서 소리를 울리고 진동하며 스크린을 번쩍이고
매우 친절한 각종 알림으로 우리를 방해한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며 정성을 다하는 유령들은 몇 년 전부터 우리에게 큰 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셀 수 없이 많은 유령들이 거의 매 순간 인간을 보조하는 조수로 탈바꿈한 것이다.
잡스의 아이폰이 이토록 엄청난 단절 rupture*을 가져온 것은 2000년대 중반 인공지능이 급작스럽게 발전한 덕분이기도 하다.
인간의 인지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속도와 자칭 더 높은 신뢰도를 지니고 현실에서 점점 더 많은 영역을 분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게다가 분석을 통해 이런 식보다는 저런 식으로 행동하는 편이 낫다고 조언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평소 철학서를 거의 접해보지 않은 데다가
인공지능이나 알고리즘 등의 카테고리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해
쉽게 읽어내기에는 어려운 책이었다.
하지만 끙끙대면서도 한 문장 한 문장 읽어나가다 보니
장강명 작가님의 추천사처럼
'몇 번 머리 위에서 벼락이 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번갯불은 때로는 우아하게, 때로는 섬뜩하게
우리가 길을 잃고 깊숙이 들어온 유령의 숲이
얼마나 기괴하고 앙상한 장소인지 보여줬다.'.
시간을 들여 다시 한번 더 천천히 읽어보고 싶다.
자주 망각하는 나에게 유령들에게 또 속지 말라고 주기적으로 채찍질하기 위해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된다.
홀려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이 닿기를,
그래서 현실을 직시하고 우리가 우리임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192p
지평(들). 진실의 시간 中
유령에 맞서, 세상에 온전히 존재하는 우리와 감각적인 것의 풍요로움을 기리자.
연거푸 승리하는 알고리즘의 규범에 맞서, 우리 고유의 지성과 행동력을 기리자.
신성불가침적 다원성을 존중하며 개인과 집단의 운명을 자유롭게 결정할 권리를 수호하자.
죽음이 도사리는 언어와 상징의 인공적 생성에 맞서, 무한한 형태의 창조적 충동이 일상에서 우리에게 활기를 불어넣도록 하자.
우리의 근간을 이루는 생명력과 도덕적 법칙이 온전히 발휘되고,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사라지지 않고 번영하도록 하자.
더 나아가, 어디에서건 끊임없이 수많은 불빛이 빛나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