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ashing Pumpkins -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 - [배철수의 음악캠프가 선정한 100대 음반 시리즈 86]
스매싱 펌프킨스 (Smashing Pumpkins) 노래 / 이엠아이(EMI) / 1984년 5월
평점 :
품절


...제아무리 정치와 문화는 별개라지만 그 역시 완벽하지만은 않은 논리다. 아니, 오히려 틀릴 수도 있는 논리다. 지금 현재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대중음악을 잠식하고 있는 나라는 누가 뭐래도 미국이다. 모두 미국에서 자라난 사람들이, 미국식 사고방식으로 그들 자신들만의 세계를 노래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이외의 지역에서 오히려 더 큰 인기를 얻는 경우가 많다.


희대의 살인마인 조지 W. 부시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데이브 머스테인, 그리고 이라크를 박살내는 것만이 인류평화로 가는 지름길이라며 자신의 무식을 한껏 뽐내는 잭 와일드...
미친 개처럼 재잘거리며 쥐어뜯고 싸워대던 건스와 너바나도 미국의 국기(성조기라는 표현은 안쓰겠다)만큼은 공통적으로, 가장 자랑스런 패션으로 애용할 정도로 '미국'이라는 나라는 그곳의 락 뮤지션들 뿐만 아니라 그곳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경의의 대상이 되는, 아주 성스럽기까지 한 존재다.

이렇게 미국이라는 국가의 경외감이 국민 한명한명의 머리속 뿌리까지 각인되어 있는 상황에서, 과연 그런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음악에 그들의 사상이 녹아있지 않다는 논리가 타당한 것일까. 과연 정치와 문화는 별개라는 소리가 냉정한 판단에서 나온 소리일까.


우리의 위대한 공자님부터 시작해서 유럽친구들 자칭 최고의 철학자라는 장 폴 사르트르까지...좀 유명하다 싶은 철학자들이 한결같이 강조하는 윤리는 바로 '행동하는 철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이라는 것이 여지껏 관념적이라는 이미지를 탈피하지 못한 것은 '행동'이라는 것보다 '정신'이 선행하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실천이 중요한들 잘못된 생각을 행동에 옮겨버리면 그러지 않음만 못하다. 그러다보니 학자들조차, 철학 최후의 단계는 '실천'임을 잘 알면서도 그것을 '정신'보다 잘 강조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옳은 정신과 적극적인 행동이 결합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미국 락 뮤지션들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래서 솔직히 미국인 그들만의 음악을 내가 왜듣고 있나 하는 자책감도 적지 않게 들었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도...탐 모렐로나 빌리 코건같은 예외가 있었다.


많은 미국의 락스타들이 잡지사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들의 무식을 만천하에 드러낸다. 커트니 러브같은 천하의 걸레만도 못한 쓰레기가 사회의 저명인사로 취급되는 미국의 비정상적인 상황을 보면 대한민국은 정말 건강한 나라임에 틀림없다. 토크쇼에 나와서 애들만도 못한 온갖 상소리를 자랑스러운듯 쏟아내는 헐리웃 스타들...
우리 한국인들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미국인들이 얼마나 무식한가를.

그런 와중에서 마치 군계일학처럼 우뚝 서있는 빌리 코건이라는 뮤지션을 보면 얼마간의 질투심이 느껴지는게 사실이다. 마치...전쟁에서 반드시 제거해야할 적장-개인적으로는 더없이 훌륭하지만-을 보는 것 처럼.

빌리 코건은 해산직전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마지막 공연을 한국에서 할 것이라고 약속했고, 자신의 말을 실천에 옮겼다. 내한 당시의 인터뷰에서도 그의 지적인 캐릭터는 빛을 발했다. 신변잡기식의 질문에는 거의 대답하지 않았고 거의가 시사적인 문제에만 자신의 관심을 표명하는 매우 인텔렉추얼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한국에 대한 그의 생각 역시 여타 다른 무식쟁이들과는 분명히 달랐다. 주한미군 문제부터 일본과의 껄끄러운 관계, 미국내 한국인들의 특수한 상황 등등 빌리로부터 인터뷰어가 들은 대답은 하나같이 기대 이상으로 세세한 것들이었다.
...이러한 올곧은 사고방식이 있었기 때문에 스매슁 펌킨스는 락 히스토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길 수 있었다. ...너바나와 스매슁 펌킨스 중 어떤 팀이 더 음악성이 뛰어난가에 대해 아직도 고민하는 얼간이가 있을까.


본작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에서 스매슁 펌킨스가 보여주는 음악적 지평은 동시대의 어떤 락 뮤지션도 감히 범접치 못할, 그야말로 언터처블한 수준이다. 마치 한편의 장대한 현대판 오케스트라를 듣는 것처럼 짜릿함과 설레임이 공존하는 90년대 최고의 판타스틱 에니메이션... 감히 누가 이런 대작을 구상할 수 있겠는가.

전작 [Siamese Dream]역시 연주력, 작곡력, 통일성 모두가 골고루 빛을 발한 명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작의 가치는 그것을 몇배나 뛰어넘고도 남는 수준이다.
전체적으로 많이 소프트해졌고 전작에서 보여주었던 최면적인 느낌보다는 밝고 서정적인 감성을 부각시켰다. 악기편성 역시 이전과는 달리 피아노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였고 효과음 및 샘플링도 무시못할 수준으로 '이용'하였다.(음악적 역량이 뛰어난 사람에게는 샘플링도 엄연한 '악기'이리라) 어설픈 3류 뮤지션이라면 이런 시도들이 조잡하게 조립되어 오히려 마이너스의 효과를 가져왔겠지만 역시 빌리는 1류 뮤지션 답게 정반대의 결과를 이끌어내었다.

수록곡들은 모두 동화적이고 로맨틱한 앨범의 컨셉에 잘 어울리게끔 하나같이 영롱한 색깔을 띠고 있다. 심지어 'Bullet With Butterfly Wings', 'Zero', 'Jelly Belly'등에서 나타나는 시끄러운 시도들조차도 전체적인 컨셉에 어색함이 없을 정도로 수록곡 하나하나는 분명한 연결고리가 있다.
'Tonight Tonight', 'Galapagos', '1979' 는 본작의 컨셉을 전형적으로 그려내는 트랙들로 어린시절을 연상케하는 향수어린 곡조가 감동적이다.
한없이 길고 다사다난했지만 결국 하룻밤의 꿈으로 마무리되는 피터팬과 오즈의 마법사의 스토리처럼, 펌킨스의 본작 역시 그에 어울리는 한편의 자장가로 끝을 맺는다.

팝/락은 물론이요 뉴에이지의 방법론과 스케일마저도 초월하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음악성때문에 본작에 대한 평가는 그 위력을 아는 사람일수록 분명히 언급을 꺼리게 될 것이다.
...빌리 코건이라는 뮤지션이 열린 자세를 갖고 있지 않았다면 이런 초인적인 작품은 절대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열린자세로 다른 사람들의 세계관을 수용하고, 그것을 발판삼아 자기자신의 직관력과 인식의 지평을 넓혀가는 자세를 가져야만이 보다 폭넓고 수준있는 예술을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늘 미국의 음악이 가장 우월하다고 외쳐대는 무식쟁이들이 득실대는 한 미국의 대중음악은 분명히 자멸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이 부분은 빌리 코건이 인터뷰에서 분명히 경고한 대목이었다.

스매슁 펌킨스는 음악을 통해서 어떠한 정치적 견해도 드러내지 않았지만, 뮤지션으로서의 건강한 자세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모범은 분명히 보여주었다. 잭 와일드가 진정 뮤지션으로서의 철학이 있다면 보다 열린 자세를 가진 사람이 될 것이고, 그렇다면 무고한 이라크인들을 죽이는데 찬성하는 어이없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음악과 예술은 휴머니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나의 빗나간 즐거움이 다른 사람에게는 고통이 될때, 그것은 무언의 폭력이 된다.
모든 상황은 간단하다. 내가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 만큼, 남의 행복도 배려해주는 자세가 필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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