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세르크 31
미우라 켄타로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평범한 대중문화 컨텐츠를, 포스트 모더니즘이니 뭐니 하는 이런저런 학술용어들로 포장해 짐짓 '있어 보이는' 예술 영역으로 끌어들이려 하는 같잖은 시도들이 많다. 영화가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분야라 할 수 있는데..여튼 나는 대중문화에 '있지도 않은' 예술성을 억지로 부여하는 모습들이 언제나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다.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 되는 거 아닌 것처럼...재래식 화장실에 페인트칠 한다고 그게 수세식 화장실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몇몇 일본 만화들은 경우가 좀 다르다. 펜터치, 붓터치 하나하나에 그만의 심오한 철학을 담은 일필휘지의 기재들, 이를테면 다케히코 이노우에 같은 사람들은 어느새 '마에스트로', '비루투오조' 같은 존칭을 부여받고 있으며, 실제로 그의 작품들 역시 그런 표현이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님을 손쉽게 증명해주고 있다. 자기가 생각한 스토리에 딱 어울리는 그림체, 딱 어울리는 분위기와 표정을 구현하기 위해 그들은 선 하나를 그리는 데 있어서도 끊임없는 탐구정신을 가지는 것이다. 열번 생각해서 그리는 그림이랑 한번 생각해서 그리는 그림이랑 그림의 깊이가 같을 수가 없다. 

베르세르크의 미우라 켄타로 역시 일필휘지의 동양화적 드로잉 스킬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선이 굵으면서도 세밀한 터치, 그리고 독자의 머릿속 저변을 일깨우는 심도한 실존주의 철학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21세기 대중문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으로 통할만 하다. 뭐 최초 시작된 것은 1989년으로 알려져 있지만...
 
업보의 개념이 많이 암시되는 탓인지 불교철학의 냄새가 많이 풍기고, 또 그런 부분의 연장선상인 때문인지 쇼펜하우어나 야스퍼스의 이름들도 많이 거론된다. 이들 철학의 공통점은 인간의지와 운명에 관한 것들이다. 이 세상엔 인간의 힘으로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어떤 원리가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하나의 세계 속에서 인간 개개인이 가지는 의지와 행동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들인가? 어떤 이는 초인적인 힘으로 인해 세상의 이 원리를 스스로 창조하기도 하고, 또 어떤 '하찮은' 이들은 그런 거대한 원리에 그저 가볍게 희생되기만 할 뿐이다. 거대한 일반원리가 있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모든 것이 항상 그 원리대로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이런 대회가 나온다.

"인간의 운명은 타원형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런 장대한 스케일의 플롯 위에서, 주인공은 홀로 모험한다. 그리고 그 모험의 주된 테마는 때로는 개인의 존재이유와 고독이 되며, 또 때로는 삶에 있어서의 소중한 인연들이 된다. 연인과의 사랑, 친구/전우와의 사랑, 그리고 증오의 감정. 순정만화틱한 필치가 두드러지는 부분에서는 주인공들끼리의 동성애적인 분위기가 스토리의 핵심을 이루며, 하드코어 판타지로 그림의 질감이 바뀌는 부분에서는 스토리가 다시 지독히 무자비한 액션 어드벤처로 거듭난다.

여튼 내용을 읽다 보면 데미안의 스토리 구성이 많이 떠오르는 게 사실인데, 불교와 쇼펜하우어, 그리고 헤르만 헷세가 동일한 철학적 줄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베르세르크 역시 이쪽 분야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은 확실해 보인다.

순간순간의 명대사로 독자들의 심장을 휘어잡는 베르세르크. 내가 기억하는 대사들만 해도 벌써 몇 개인지 모르겠다.

현대철학의 정수를 피부로 느껴보고 싶다면, 안쓰러운 문체로 번역돼있는 학술서보다 서른 한권의 이 만화책들을 선택하시길..강력히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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