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메를 고쳐매며
이문열 지음 / 문이당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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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도 정치적 편향으로 욕을 그의 공만큼이나 먹고 있는 작가중에 하나이다. 얼마전 알라딘에서 구매한 그의 산문집 <신들메를 고쳐매며>를 읽었다. 다른 글들은 저자의 말처럼 12년만에 산문집을 엮었고 '이것 저것 건드린 잡문(?)들'이기에 각기 읽는 이에 따라 느낌이 다를 것이다.

어떤 일을 왜 하는가란 물음은 한마디로 그 일을 하는 목적을 묻는 것이고, 목적이란 대개 그 일을 통해 어떤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도를 말한다. 그리고 그 적극적인 의도는 크게 두 단계로 형성된다. 첫째는 어떤 가치의 존재를 인지하는 단계이고, 다음은 그 가치의 실현을 위해 자기를 내던질 결의를 하게 되는 단계이다.
그중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에서 자신의 문학관에 대한 생각을 말하고 있다. 더하여 세상 사람들이 "문학을 통하여 어떤 가치를 가지고 실현하고자 하는지"의 물음에 대한 자신의 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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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소설가 지망생이던 나를 늘 곤혹스럽게 만들었고, 등단한 뒤에도 대답하기도 쉽지만은 않았던 물음에 이제 와서 다시 받고 아득한 느낌을 받는다. 왜 문학을 하는가. 너는 왜 문학을 하는가.

(...)

등단 이듬해인가, 어떤 잡지사가 마련한 최인훈 선생과의 대담이다. 그때 나는 최 선생님은 왜 소설을 쓰는지 진심으로 궁금하여 여쭈어 보았다.

그걸 왜 내가 대답을 해야 하나? 소설이란 내가 창안한 것도 아니고, 또 존재해야 할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면, 몇 세기나 존손해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미 가치를 승인받고 존속되어 온 소설이란 문화적 제도를 활용하고 있을 뿐이다. 더 이상 어떤 설명이 필요한가.

선생님은 대강 그런 뜻으로 말씀하셨는데, 솔직히 내게는 충격이었다. 당신의 작품에 담겨 있는 그 엄청난 관념선네 비해 그 답이 너무 간명하고 단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서 재활용하기에는 오히려 수월해, 그 뒤 얼마간 나는 왜 문학을 하느냐는 물음을 받으면 곧잘 선생님의 말씀을 인용했다.

하지만 내 나이 마흔을 넘기고 이제는 속절없이 소설가로 늙어 죽게 되리라는 예감이 강해지면서 내 마음도 달라졌다. 여전히 왜 소설을 쓰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그런 식의 대응이 너무 성의 없게 들릴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고백하듯 털어놓게 된 게 소극적 선택의 개념 사인성이었다.

문학이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좋아서가 아니라 덜 싫었기 때문이며, 난파한 내 삶의 바다에서 가장 헤어 가기 좋은 곳에 우연히 있었던 돌섬 같은 것이었다는 소극적 선택의 내용이다. 또 문학은 누구보다도 나 자신을 위해, 나를 으뜸가는 독자로 삼는 사적 행위라는 것이 사인성의 논리다. 딴에는 겸손하면서 진솔한 답이라고 믿으면서 한 10년 다시 그것으로 잘 버텨 냈다.

그런데 50대도 중반을 넘기면서 보니 아직도 그것만으로는 답이 궁색해 보인다. 그동안 문학에 바친 만큼이나 많은 빚을 지고, 좋아하는 쪽으로부터든 싫어하는 쪽으로부터든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아와서 일까, 늦어서야 문하의 공리적 실용이란 것에 눈이 떠졌다. 문학은 소극적 선택으로 가 닿을 수 있는 우연의 섬이 아니며, 사인성만으로는 결코 온전하게 영위될 수 없는 삶의 한 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 이문열 <신들메를 고쳐매며>(문이당, 2004) 중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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