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 이야기 (무선) 문학과지성사 이청준 전집 20
이청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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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나를 용서한다구요? 게다가 주님께선 그를 먼저 용서하시구… 하긴 그게 아마 사실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나는 질투 때문에 더욱더 절망하고 그를 용서할 수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것이 과연 주님의 뜻일까요? 당신이 내게서 그를 용서할 기회를 빼앗고, 그를 먼저 용서하여 그로 하여금 나를 용서케 하시고… 그것이 과연 주님의 공평한 사랑일까요. 나는 그걸 믿 을 수가 없어요. 그걸 정녕 믿어야 한다면 차라리 주님의 저주를 택하겠어요. 내게 어떤 저주가 내리더라도 미워하고 저주하고 복 수하는 인간으로 살아가겠다는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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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불편한 진실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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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끝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내가 이것을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훈민정음』 서문에는 ‘어린 백성’을 가엾게 여겨 새 문자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후대에는 이를 자연스럽게 오늘날의 의미인 일반 백성으로 이해해 왔다. 그러나 중세의 ‘백성’은 현대의 ‘국민’이나 ‘민중’과 같은 개념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대상이 누구였는가를 밝히는 일이 한글의 위대함을 흔들지는 않는다. 책에서 말하는 ‘불편한 진실’ 역시 결정적인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세종이 누구를 ‘어린 백성’으로 보았든, 그들이 글을 몰라 겪는 어려움을 가엾게 여겼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위대한 발명은 처음 의도한 목적을 넘어서는 경우가 많다. 발명자의 손에서 탄생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시대와 사회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한글도 마찬가지다. 처음 누구를 위해 만들어졌든,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기록하고 표현하는 문자로 자리 잡았다. 그것이야말로 한글이 지닌 가장 큰 위대함이다.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일이 필요하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 역사는 시대의 관점에 따라, 같은 자료도 읽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이 책의 주장에 모두 동의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익숙한 통설에 질문을 던지고, 한글의 탄생과 활용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한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읽어볼 가치가 있다.

한글은 민중문자로 만들어졌지만, 오히려 지배계급의 한문 사용을 보조할 수 있는 적합한 도구로 기능했다.

세종은 어리석은 백성을 위해 한글이라는 표음문자를 만들었다, 하지만 한글 사용자는 백성에게만 한정되지 않았고, 한글 사용 영역은 대단히 넓었다, 문자를 만들 때 범용성을 의식한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만든 뒤 시험 삼아 사용하는 과정에서 집현전의 젊은 관료는 그 범용성에 놀라 마지않았다.

한글은 모든 소리를 적을 수 있었다. … 운서의 번역과 편찬에 골몰했던 것은 이 민중문자의 범용성을 적극 활용한 예다.

지배계급이 자신이 현실적으로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한 영역에서부터 한글을 사용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중국어 학습에 활용되었다. 이전에는 표기 불가능했던 중국어 발음을 이 표음문자 표기할 수 있었다. … 외국어 학습서를 언해한 후 한글로 음을 달기 시작했다. 한글은 지배계급의 외국어 학습을 위해 사용되었다.

불경 언해도 같은 맥락에서 진행되었다. … 지배계급은 자신의 필요에 의해 불경을 언해했을 뿐,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실용서도 다수 언해되었다. 그중 의서 언해는 보다 넓은 범위의 이용자를 의식한 조치였다. 이 책은 지방이 몇몇에서 목판을 만들어 인쇄했다.

한글이 사용된 책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것은 경서의 언해본이었다. 국가적 차원의 표준 번역이 있어야만 했다.

언해본이야말로 한글 창제가 사족士族에게 끼친 최고의 혜택이었다.

사족士族은 한글을 사용하긴 했지만 주로 언해의 영역에 머물렀다. 물론 ‘언문’ 편지의 영역에 국한되었다. 일반적인 글쓰기를 대체한 것은 아니었다. 일반적인 글쓰기에는 여전히 한문을 사용했다.

민중의 적극적인 한글 사용은 민중을 대상이 아닌 주체로 만드는 길이었다. 하지만 그런 길은 열리지 않았다. 세종은 지배계급의 대표자였고,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대변하는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한글, 불편한 진실, 강명관, 푸른역사,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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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아닌 것으로도 읽은 기분 읽어본다
요조 (Yozoh) 지음 / 난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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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매일의 ‘읽기’를 기록한 서평이다.

매일의 기록답게 담담하게 써 내려간다. 과하지 않은 점은 장점이다. 하지만 그 장점은 동시에 한계이기도 하다. 기록으로서는 충분하지만, 딱 거기까지만.

서평은 읽은 사람이 자신의 기록을 남기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읽는 사람을 책으로 이끄는 글이어야 한다. 한 권이든 두 권이든 상관없다. 독자가 책을 펼치게 하고, 더 나아가 구매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리뷰의 목적이다.

이 목적은 충실하게 만족시키고 있다.

요조는 말한다.

“창작의 고통이 아니라 성실의 고통에 괴로웠다.”

다시 이런 작업을 하겠느냐는 질문에는 “정말 진짜 죽어도 안 할 것이라는 마음으로 승낙할 것이다.“라고 답한다.

솔직한 고백이다. 괴롭지만 결국 다시 하게 되는 일. 매일의 ‘읽기’와 ‘쓰기’가 그렇다.

공감하는 대목도 많았다. 특히 책을 읽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가 오래 남았다.

내가 자주 가는 상수동의 커피발전소에서 『쇼코의 미소』(최은영, 문학동네, 2016)를 읽었다. 첫 번째 단편 「쇼코의 미소」를 읽고는 더 읽는 것을 멈추었다. 한 번에 끝까지 후루룩 읽고 싶은 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커피발전소에 갈 때마다 단편 하나를 천천히 읽고, 그 뒤에 나의 일을 했다.
출처 입력

좋은 책은 읽는 장소와 함께 기억되기도 한다. 어떤 카페에 들어서면 그곳에서 읽었던 책이 떠오르고, 어떤 골목을 지나면 한 문장이 문득 생각난다. 책은 내용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까지 함께 기억 속에 묶어 둔다.

꼭 커피발전소가 아니어도 좋다. 자주 가는 카페 하나쯤 정해 두고 그곳에서는 단편 하나, 아니 시 한 편만이라도 읽어보자. 책을 많이 읽는 것보다 오래 읽는 일이 더 행복할 때도 있다.

하지만 끝내 동의하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고양이 중성화에 대한 이야기다.

옛날에 키우던 고양이에게 발정기가 와서 엄청나게 울어대며 괴 로워하던 것을 나도 괴롭게 지켜보다가 결국 병원에 중성화 수술을 하러 데려갔을 때 의사 앞에서 그랬다.

“아무래도 좀 잔인한 것 같아서 망설이다 왔는데 영 내키지가 않아요......”,
그러자 의사가 나한테 그랬다.

“주기적으로 섹스하고 싶어지는 애를 집안에 계속 가둬둘 거면 서 그게 더 잔인한 거 아닌가요? 애 발정기 올 때마다 집 앞에 풀어 줄거예요?”

나는 그 얘기를 듣고는 바로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했더랬다.

지금 키우는 두 마리 고양이 또와 라이도 진즉 중성화는 완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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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선택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반려동물을 키우기 위해 중성화를 한다. 결국 인간이 함께 살아가기 편하도록 내리는 결정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것을 ‘동물을 위해서’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

마지막에서 요조는 이렇게 말한다.

“인생의 모든 즐거움이 섹스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섹스 말고 더 많은 즐거움을 차근차근 선사해 줄 테니까. 오래만 살아다오.”

따뜻한 마음은 충분히 전해진다. 다만 그 말보다 먼저 떠오른 것은 다른 한마디였다.

‘미안하다.’

인간의 선택으로 그들의 삶을 바꾸었다면, 적어도 그것이 우리를 위한 선택이었다는 사실만큼은 솔직하게 인정하는 편이 옳지 않을까.

—눈이 아닌 것으로도 읽은 기분, 요조, 난다, 2017

덧_
요조는 세상에는 나쁜 책, 좋은 책, 이상한 책, 세 종류가 있다고 했다. 나쁜 책은 읽으면 돈밖에 남지 않는 책, 좋은 책은 그런 책을 제외한 책, 이상한 책이 흥미로운데, 세상의 모든 시집이란다. 요조의 이번 책은 좋은 책과 이상한 책의 중간쯤이다. —요조의 인터뷰 中

덧_둘
나중에 알았다. 난다의 ‘읽어본다’ 시리즈 中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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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분 30초 안에 음료가 나가지 않으면 생기는 일
이성혁 지음 / 숲물결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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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는 신사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 무례함은 인간 본성의 문제에 가깝다. 환불을 요구하는 고객의 말에 속으로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고 생각하는 마음. 정작 무례한 사람은 자신의 무례를 모른다.

젊은이에게 무례한 이가 하필 ‘노인’일까. 나이 먹은 값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이가 많으니. 나이 먹었다고 다 어른이 아니다.

젊다고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며 덜 힘든 것도 아닐 거다. 무작정 견디라고 할 수도 없다. 하지만 견디는 게 쉬운 일이겠느냐마는 사는 게 그렇다고 말할 뿐,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엄마, 일시불로 하라고? 엄마 돈 많아?”
“그게 아니라 너 저번에 학원비 아직도 내고 있어, 학원비 따블로 내기는 엄마 마음이 좀 그렇다~. 그냥 이번에는 한방에 내.”

이 대목에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들은 알게 되었다.

“멍청했다. 엄마는 여태 아들의 낙방한 시험과 다음 시험의 학원비를 동시에 내고 있었다. ……”

돌아가신 엄마가 생각난다. 그때 엄마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그땐 몰랐다. 그래도 현명하고 좋은 아들이다. 이미 알고 있으니. ‘멍청했다’라고 생각하니 말이다.

2분 30초 안에 음료가 나가지 않는다고 세상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모니터에는 빨간 숫자가 깜빡이지만, 늦었다고 소리치는 고객은 없다. 차근차근 레시피를 따라 정성을 다해 음료를 만들면 된다.

말한다. 천천히 둘러보고, 하나씩 살피고, 정성을 다해 살아가면 된다. 좋은 음료를 만들듯 맛있는 인생을 만들어 가면 된다.

인생을 마라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마라톤 우승자는 100미터를 16~17초 속도로 쉼 없이 달리는 사람이다. 평범한 사람은 그렇게 살 수 없다.

인생은 오히려 걷기에 가깝다. 끝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뚜벅뚜벅 걸어가는 일.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자신을 몰아붙이면 결국 지치고 만다.

그냥 가야 한다. 오늘 걸을 만큼 걷고, 내일 또 걷는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이해하게 된다. 한데 그때는 부모가 없다. 그게 아쉬울 뿐이다.

하지만 그게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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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책 - 결국 사라지겠지만 결코 사그라지지 않는 찰나에 대하여, 2026 문학나눔 선정도서
맹현 외 지음 / 편않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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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온한 책이다.  

책에 적힌 가격은 16,666원이다. 알라딘은 16,666원, 교보문고는 16,670원으로 표기한다. 파는 이에 대한 배려는 없다. 만들고, 편집하고, 찍어 낸 쪽의 마음만 남아 있다. 팔리면 팔리고, 아니면 말고. 그런 태도처럼 보인다.


고양시 도서관 어린이 도서관을 빼고 18개 중에서 4곳에서 보유하고 있다. 22.2%다.  

그덕분에 지금, 이 책을 읽고 이 글을 남긴다.  

전국에 1,000개 도서관이 있다면, 최소한 그 정도는 팔렸을 것이다. 또 그 만큼은 팔렸을테니, 초판을 다 팔았을까?


인터뷰집이 아니다. 통상 인터뷰란 인터뷰이에 주목한다. 걸어온 궤적, 획득한 자본, 구축한 세계 ……. 발화 속에서, 자료 속에서, 이러한 자국을 탐색하는 일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없고 무엇보다 관심이 별로 없다. 오로지 인터뷰어-저자의 판단과 실천에 주목했다. (편집 후기)


기획 의도는 이해했다.  

그런데 편집은 왜 이렇게 했을까.


읽으라는 것일까, 아니면 읽지 말라는 것일까.  

인터뷰도 하고 정리도 해서 써 놓았으니,  

읽는 너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  

이 정도 성의는 가지고 읽으라는 뜻일거라고 생각한다.


읽고 나니 내용과 직접 닿아 있지는 않지만 「출판은 제조업이니까」라는 글이 떠오른다. 『冊에 대한 book에 대한 책』에 실린 한 꼭지다. 만드는 일도 중요하지만, 결국 더 중요한 일은 파는 일이다. 잘 만들었다고 잘 팔리는 법은 없고, 못 만들었다고 잘 팔리지 않는다고도 단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잘 만들어야 한다. 출판은 제조업이니까.


시작은 미약했지만, 끝은 폐기되어 폐지로 남는다. 그뿐이다.






사라진 출판사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절판된 책의 최후를 헌책방이나 도서관에서 하릴없이 독자를 기다리는 것쯤으로 상정했다. 그 끝이 폐기라는 현실은 결이 다른 비극이었다. 존재하지만 알지 못하는 책과 형태를 잃고 사라져 닿을 수 없는 책이 주는 감각의 차이는 컸다.


거래종료요청서  

더 이상 출판사 운영을 하지 않게 되어 물류창고 이용을 종료하고자 합니다.  

모든 도서를 폐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단 종별 20부씩 보관하여 주시면 추후 방문하여 술령하겠습니다.)


망했다, 폐업했다, 문을 닫았다. 출판사의 끝을 의미하는 단어 중 어느 것도 탐탁치 않던 자리에 ‘돌아가다다라는 단어를 넣었다. 사라진 별이 우주 공간으로 돌아가듯, OOO를 구성했던 모든 물질이 제자리로 돌아가 출판계를 이루고 있다.


책은 왜 폐기되어야만 할까?


나름의 이유를 품고 세상에 나왔지만, 선택받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폐지 더미로 가야 할까. 물론 각자의 사정은 있다. 창고 비용이 있고, 회전율이 있고, 자본의 계산이 있다. 그 논리 앞에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순간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지금도 절판된 책을 찾고 있다. 한 권을 구하기 위해 헌책방을 뒤지고, 온라인 중고 서점을 헤맨다. 그렇다면 다른 길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다른 유통 방식, 순환 구조는 정말 불가능한가.


자본의 논리라면 차라리 솔직하다. 팔리지 않으면 정리한다는 계산이니까. 그러나 정책 때문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제도가 책의 생명을 단축해야만 하는 걸까?


책을 상품이라 부르며 표지를 바꾸어 다시 팔고, 책보다 굿즈에 더 많은 힘을 쏟다가, 폐기 직전에만 문화라 말하는 태도. 이 모순은 오래 방치됐다.


책은 처음부터 문화였고, 동시에 상품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편리할 때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


정말로 이 책은 버려져야만 하는가.


할 일이 있을 때는 끝을 생각하기 어렵다.


책 만드는 과정을 더 상세히 알게 되었다. ‘기획 - 원고 집필 - 편집 - 디자인 - 인쇄 - 출간 - 유통 - 홍보·마케팅’. 멀리서 보면 유유히 흐르는 출판 과정을 줌인하면 북디자이너가 ‘판면의 하단 여백을 25mm로 할 것인 지 22.6mm로 할 것인지, 첫 행 들여쓰기는 3.35mm가 좋을지 3.3mm가 좋을지, 본문 시작을 9행부터 할 것인지 10행이 좋을지 심사숙고하고 있다. 눈이 둔한 독자는 보여도 보지 못 하는 요소이다. 독자를 유혹하는 표지 디자인이나 작가의 의도를 헤아리기 좋은 글자체, 행간을 읽어 내기에 적절한 행간을 정하는 일은 앞에서 한 ‘헛된’ 숙고에 비하면 독자와 대면하는 수준의 일이다.


일반 독자는 보여도 보지 못하는 것이 편집이다.  

그런데도 읽다 보면, 왜 이렇게 했을지 의구심이 드는 순간이 있다.


남의 돈으로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한 것은 아닌지,  

보고 싶은 것을 만든 것인지, 아니면 보여주고 싶은 것을 만든 것인지.  

‘눈이 둔한 독자’는 보이지만, 이해 못 하는 경우가 많다.


기왕 ‘열린책들’과 관련 있는 (‘열린책들’에 근무했던) 글이니 묻고 싶다.  

‘열린책들’의 문학전집은 왜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까. 물론 개인적인 호불호다.  

문장을 따라가도, 행간이 쉽게 읽히지 않는다. 행간이 좁다.  

충분히 고민했을지라도, 그 고민이 결국 자기만의, 그들만의 리그 안에서 만들어진 여백은 아닐는지.  

그래서 가능하면 ‘열린책들’보다 가독성이 좋은 다른 책을 찾는다. 나는.


우린 결국 책의 끝을 마주하지만


책을 만든다는 건 어떤 경험을 담는 일이기도 하다. 흰 바탕 위 까만 활자 안에 그냥 흩어져서는 안 되는 목소리를 싣는 것이다. 관심 없어 하는 타인에게 어떤 문제를 들여 다보게 하고 서로 연결 짓는 일. 책의 전지전능함을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책은 분명 좋은 변화를 끌어내는 가능성이 될 수 있다.


좋은 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냐는 마지막 질문에,  

“책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 때문에 책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데?”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책을 다 읽고 나면 다른 책을 펼치듯 …”


출판사가 계속 생기고 사라지는 이유는  

책을 읽는 독자가 있어서가 아니다.  

책을 내고 싶어하는 —쓰고 싶어하는 게 아니다— 사람이 계속 생겨나기에  

책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출판사는 생기고 사라지고 할 것이다.


가드, 흘러가는 시간을 견디는 하나의 방법


임프린트는 출판사에서 브랜드 다각화를 위해 브랜드를 가지치기하여 운영하는 방식인데, 지금은 대형 출판사뿐 아니라 중소 출판사에서도 이 방식을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다.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출판시장은 호황과 성장의 시기를 맞이했고, 1996년에 한국은 WTO에 가입하면서 출판시장을 개방했다. 이 성장과 변화의 시기에 대형 출판기업가 탄생했는데, 이들은 자회사 제도 · 분사 제도 · 임프린트 제도를 도입하면서 규모를 확장하고 효율적으로 조직을 분화 했다.


요즘은 1인 출판사에서도 임프린트 브랜드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대형 출판사의 임프린트는 회사의 유능한 편집자나 외부의 편집자를 섭외해 자신의 브랜드를 운영하게 한다.


하지만 보통 2년마다 매출 성과를 통해 존폐 여부가 결정된다고 하니, 임프린트의 대표가 된다는 것은 피를 말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 임프린트 제도의 철저한 매출 결과주의가 있었다.


좋은 의미를 가지고 일을 하는 게 모두 좋은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임프린트도 그 중 하나일게다.


계열의 확장으로 진행하고자 하지만  

결국 매출,  

효율적인 정리를 위한 그런 좋은 모양새를 갖추는 것,  

그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결과는 그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누구에게는 기회이기에  

나쁜 것은 아니다.


곁가지를 보살피는 순간


출판사의 시작은 의외로 소박했다.  

“노후에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용돈 200만원만 벌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10여 년 전에 시작해 현재까지 50여 종의 책을 출간해 냈다. 작은 출판사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비결이요? 정부의 돈이죠.”


책을 기획하고 선정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무엇일까?  

“자료적 가치가 있어야 해요. 오래 남을 책, 두고두고 책장에 꽂힐 책.”


“책은 결국 기록이예요. 사라지지 않게 붙잡는 일. 그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나이먹어도 할 수 있는 내 일,  

출판과 관계없는,  

책을 좀 읽었다는, 책을 좋아한다고 착각하는,  

한데 결코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출판사를 시작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절대 소박한 이유는 아니다.


10년 동안 지속한다는 것은 꼭 출판이 아니더라도 대단한 일이다.  

지속가능한 일을 한다는 사실 자체에 큰 의미를 두고 싶다.  

다만, 그게 ‘정부의 돈’에 매이는 모습은 좋아보이지 않지만,  

이 또한 현실이다.  

꼭 출판이 아니더라도.


책을 낸다는 것은  

꼭 많이 읽히게 하는 것에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그저 두고두고 책장에 꽂히게 하는 것,  

그게 출판이 아닐까  

하는 것에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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