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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불편한 진실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 2026년 6월
평점 :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끝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내가 이것을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훈민정음』 서문에는 ‘어린 백성’을 가엾게 여겨 새 문자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후대에는 이를 자연스럽게 오늘날의 의미인 일반 백성으로 이해해 왔다. 그러나 중세의 ‘백성’은 현대의 ‘국민’이나 ‘민중’과 같은 개념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대상이 누구였는가를 밝히는 일이 한글의 위대함을 흔들지는 않는다. 책에서 말하는 ‘불편한 진실’ 역시 결정적인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세종이 누구를 ‘어린 백성’으로 보았든, 그들이 글을 몰라 겪는 어려움을 가엾게 여겼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위대한 발명은 처음 의도한 목적을 넘어서는 경우가 많다. 발명자의 손에서 탄생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시대와 사회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한글도 마찬가지다. 처음 누구를 위해 만들어졌든,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기록하고 표현하는 문자로 자리 잡았다. 그것이야말로 한글이 지닌 가장 큰 위대함이다.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일이 필요하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 역사는 시대의 관점에 따라, 같은 자료도 읽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이 책의 주장에 모두 동의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익숙한 통설에 질문을 던지고, 한글의 탄생과 활용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한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읽어볼 가치가 있다.
한글은 민중문자로 만들어졌지만, 오히려 지배계급의 한문 사용을 보조할 수 있는 적합한 도구로 기능했다.
세종은 어리석은 백성을 위해 한글이라는 표음문자를 만들었다, 하지만 한글 사용자는 백성에게만 한정되지 않았고, 한글 사용 영역은 대단히 넓었다, 문자를 만들 때 범용성을 의식한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만든 뒤 시험 삼아 사용하는 과정에서 집현전의 젊은 관료는 그 범용성에 놀라 마지않았다.
한글은 모든 소리를 적을 수 있었다. … 운서의 번역과 편찬에 골몰했던 것은 이 민중문자의 범용성을 적극 활용한 예다.
지배계급이 자신이 현실적으로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한 영역에서부터 한글을 사용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중국어 학습에 활용되었다. 이전에는 표기 불가능했던 중국어 발음을 이 표음문자 표기할 수 있었다. … 외국어 학습서를 언해한 후 한글로 음을 달기 시작했다. 한글은 지배계급의 외국어 학습을 위해 사용되었다.
불경 언해도 같은 맥락에서 진행되었다. … 지배계급은 자신의 필요에 의해 불경을 언해했을 뿐,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실용서도 다수 언해되었다. 그중 의서 언해는 보다 넓은 범위의 이용자를 의식한 조치였다. 이 책은 지방이 몇몇에서 목판을 만들어 인쇄했다.
한글이 사용된 책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것은 경서의 언해본이었다. 국가적 차원의 표준 번역이 있어야만 했다.
언해본이야말로 한글 창제가 사족士族에게 끼친 최고의 혜택이었다.
사족士族은 한글을 사용하긴 했지만 주로 언해의 영역에 머물렀다. 물론 ‘언문’ 편지의 영역에 국한되었다. 일반적인 글쓰기를 대체한 것은 아니었다. 일반적인 글쓰기에는 여전히 한문을 사용했다.
민중의 적극적인 한글 사용은 민중을 대상이 아닌 주체로 만드는 길이었다. 하지만 그런 길은 열리지 않았다. 세종은 지배계급의 대표자였고,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대변하는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한글, 불편한 진실, 강명관, 푸른역사,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