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은 하나의 텍스트인가, 두 개의 텍스트인가? 도덕의 세계와 경제의 세계는 동일한 원리로 연결되어 있는 세계인가, 서로 다른 원리가 작동하는 세계인가? 1800년대 중반 독일의 사회·경제 사상가들이 애덤 스미스의 두 저작을 읽고 그의 사상 체계 전체에 대해 던졌던 질문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도, 경제 위기가 상존하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똑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도덕과 경제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도메 다쿠오의 <지금 애덤 스미스를 다시 읽는다>(우경봉 옮김, 동아시아 펴냄)는 이 질문에 하나의 관점을 보여준다.

애덤 스미스의 두 저서를 함께 다루는 도메 다쿠오의 저서는 금융 위기가 발생하여 세계 경제가 불황에 빠져 있던 2008년 3월 발간되었다. 그는 스미스의 두 저서를 서로 연결시켜 해석하면서 "애덤 스미스가 '탐욕'을 용인했다는 것에 대한 오해를 푸는" 동시에 "'탐욕'이 시장 경제를 파탄시킬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려고 한다(6쪽).


▲ <지금 애덤 스미스를 다시 읽는다 :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의 세계>(도메 다쿠오 지음, 우경봉 옮김, 동아시아 펴냄). ⓒ동아시아
그의 표현을 빌면, 자신이 제시하려고 하는 "애덤 스미스의 이미지는 종래의 이미지, 다시 말해 규제를 철폐하여 경쟁을 촉진함으로써 한 나라의 경제 효율을 향상시키고 높은 성장률을 실현하여 풍요롭고 강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254쪽).

그는 독일의 역사학파 사회·경제 이론가들이 제기한 '애덤 스미스 문제'와 관련해서 '문제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주려고 한다. <도덕감정론>과 <국부론> 사이에 단절 또는 전환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애덤 스미스가 "시장 경제의 기본 원리를 해명하면서 결코 '인간'의 문제를 놓치지 않았"(6쪽)다는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 "애덤 스미스의 독창성은 인간에 관한 기존의 폭넓은 연구를 바탕으로 경제학의 체계를 확립한 데 있다."(6쪽) 인간은 두 세계 모두의 중심에 놓여 있으며 또한 두 세계를 이어주는 고리이다.

도메 다쿠오는 자신의 저서에서 인간의 도덕적 감정을 다루는 <도덕감정론>에서 출발하여 국민들의 부를 다루는 <국부론>으로 나아간다. 스미스의 두 저작을 어렵지 않고 쉬운 방식으로, 가끔 도식을 사용하여 간결하게 정리하면서, 그는 도덕철학이나 경제학에 친근하지 않은 독자들도 논의를 쉽게 쫓아갈 수 있도록 만든다.

도덕의 원리가 자연스럽게 경제의 원리로 연결되고, 도덕의 세계와 경제의 세계는 이음매가 없는 완전한 하나의 세계가 된다. 그리고 마침내 "참된 행복은 마음이 평온한 것"(258쪽)이라는 신념이 애덤 스미스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귀중한 유산이라는 주장이 저서의 핵심적 주장으로 제시된다.

길지만 그의 결론을 인용해 보자.

"부와 지위, 명예는 추구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개인이 부와 지위를 추구함으로써 사회가 번영한다. 그러나 부와 지위가, 가까이 있는 행복의 수단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사회적 성공이라는 큰 뜻을 품으면서도, 자기 마음의 평정을 위해서는 무엇이 정말로 충족되어야 하는지를 마음속 깊이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각 개인의 몫으로 나누어지는 행운과 불운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가치가 있든 없든, 우리는 우리 몫으로 나누어지는 행운과 불행을 모두 달게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다. 그렇다면 우리는 행운 속에서 오만해지지 않고 불행 속에서 절망하는 일 없이, 자신을 평안한 상태로 되돌리는 강인함이 우리 자신에게 있음을 믿고 살아가야 한다. 나는 애덤 스미스가 도달한 이러한 경지야말로, 현대의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어진 가장 귀중한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259~260쪽)

도메 다쿠오가 스미스의 가장 귀중한 유산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행운과 불행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평정을 지킬 수 있는 강인함을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음을 믿고 살아갈 줄 아는 것'이다. 여기에서 갑자기 우리는 의아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경제의 세계는 사라지고 도덕의 세계만 남은 것이 아닌가? 진정 우리가 강인하다면, 어떠한 조건에도 상관없이 우리의 마음은 평안할 것이다. '강인함'은 우리를 경제의 세계로부터 자유롭게 해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신념이나 깨달음이 아무리 훌륭한 정신적 유산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애덤 스미스만의 유산은 아니다. 인류는 이미 애덤 스미스 이전의 시대로부터 수많은 종교와 철학의 지혜를 물려받았다. 애덤 스미스에게서 근대 사상의 새로움은 사라지고 만다. 또한 이러한 수많은 지혜는 상존하는 경제 위기 속에서 불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의 일상에 쉽게 다가오지도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도메 다쿠오가 책의 결론 부분에서 강조하고 있는 '애덤 스미스의 사상 체계에서 배울 수 있는 내용' 세 가지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네 번째 내용은 검토하지 않을 것이다.)

먼저 도메 다쿠오는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서 파악하는 것"을 스미스 사상 체계의 첫 번째 핵심 요소로 들고 있다. "개인은 자신이 소속된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공평한 관찰자'를 마음속에 형성하여 자신의 감정과 행위를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가 인정하는 것이 되도록 노력한다."(246쪽) 이러한 노력을 할 줄 아는 것이 '현명함'이다.

그런데 인간은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의 판단보다 자신의 이해관계 또는 세간의 평판을 우선시하여 행동하는" '연약함'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연약함' 때문에 인간은 부를 축적하려는 야심과 경쟁에 빠져든다. 당연히 이러한 야심과 경쟁은 '현명함'이 우리 마음속에 형성시켜 놓은 정의감에 의해 제어되어야 한다.

"제어되지 않은 야심과 경쟁은 사회 질서를 어지럽혀 사회의 번영을 방해한다." (247쪽)

이제 우리는 '강인함'보다는 약화된 형태의 덕성인 '현명함'과 인간의 약점인 '연약함' 사이에서 인간이 부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애덤 스미스가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 다소 안도한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야심과 경쟁이 '어느 정도로' 제어되어야 하는지를 알 수 없다.

또한 우리는 '현명함'과 '연약함'이라는 두 개념보다는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 '자신의 이해관계', '세간의 평판' 등의 개념이 더 주요한 분석 도구이며, 이러한 스미스의 개념들을 둘러싼 논쟁들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다. 합리성이나 정의/공평, 이기심과 동감/공감 등의 개념들이 여전히 철학적·분석적 차원에서 복잡하게 논의되고 있는 상황에서, '현명함'이나 '연약함'과 같은 개념으로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다소 의외라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완전히 강인하지 않고 또한 '현명함'이 완전히 '연약함'을 제어하지 않아야만, '연약함'은 사회를 번영으로 이끌 수 있다. 우리는 부와 지위를 추구하는 경제의 세계에서 살아가게 된다. 도메 다쿠오는 애덤 스미스의 사상 체계에서 배울 두 번째 핵심 내용이 바로 이 경제의 세계, 곧 '시장 사회에서 부의 기능'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

부는 단순히 인간의 생존과 안락을 위한 것을 넘어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시장에서 특별한 애정이 없는 사람들이 상호 동감을 바탕으로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다. 경제 성장은 단순히 부의 증가를 의미하지 않고, '투자하는 부자들'과 '임금을 받고 일하는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관계가 생겨나는 것을 의미한다. 무역은 언어와 문화, 관습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교류를 심화시켜 상호 의존 관계를 강화시킨다. 도덕의 원리가 경제의 세계에 적용되면서, 경제의 세계는 상호 존중과 평화가 지배하는 세계로 그려진다.

"부는 시장을 통해 한 나라 안의 사람들을 연결하고, 성장을 통해 부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이으며, 나아가 무역을 통해 서로 다른 나라의 국민들을 연계시킨다. 시장, 성장, 무역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부의 기능에서 각각 다른 국면을 나타낸다. 말할 것도 없이, 부가 이러한 기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250쪽)

스미스가 <국부론> 전체에 걸쳐 틈틈이 강조하는 지주/자본가/노동자 세 계급으로 구성된 (따라서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계급 관계라는 경제 체제의 핵심 속성에 따라 설명되어야 할) 자본주의 경제와 중상주의 체제의 어두운 면은 완전히 사라지고, 순수한 시장경제와 자유로운 무역질서의 아름다운 모습만이 드러난다.

그런데 중상주의나 식민지 지배라는 어두운 현실 역사에 대한 스미스의 비판(7장, 8장)을 잘 알고 있는 도메 다쿠오는 스미스로부터 배워야 할 세 번째 내용으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부의 기능을 충분히 살릴 수 있는 경제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이라는 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250쪽)

"애덤 스미스는 참가자의 독점과 부정을 막기 위해 시장은 어느 정도 정부에 의해 감시되고, 법에 의해 규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251쪽)

하지만 이것이 도메 다쿠오가 생각하는 스미스의 마지막 말이 아니다. 시장에서의 독점과 부정을 막기 위해 공적 기관의 감시와 법의 규제가 필요하지만, 충분한 감시와 적절한 규제는 쉽지 않으며 또한 공적 기관이 도덕적으로 부패할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 경제 체제는 공적 기관이라는 외부의 공평한 관찰자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시장 참가자 한 사람 한 사람 내부의 공평한 관찰자에 의해 감시되고 규제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 경제가 구축될 수 있을지 여부는, 그 사회를 구성하는 각 개인이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의 목소리에 얼마나 귀를 기울일 줄 아느냐, 다시 말해 그 사회가 얼마나 도덕적으로 성숙한 사회이냐는 점에 달려 있는 것이다." (251~252쪽)

여기에서 몇 개의 질문을 던짐으로써, 도메 다쿠오의 스미스에 대한 해석이 얼마나 견고한가를 검토해 보자. 도덕적으로 성숙한 사회라면, 곧 사회의 구성원이 모두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규제를 철폐하여 경쟁을 촉진하기만 하면' 경제 성장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성립된다면, 도메 다쿠오가 제시한 스미스의 이미지와 종래의 이미지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이기적 인간들도 최소한의 법만 있으면 시장 경제의 원리에 따라 완전 경쟁 하에서 공정한 거래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이기적 인간들과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회 구성원 사이에는 경제 행위에서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시장 경제 자체가 독점과 특권을 낳을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면, 부패할 수도 있는 정부가 사라지기만 하면 시장 경제는 저절로 돌아갈 것이다.

심지어 일부 시장주의자들은 거대 경제 권력이나 독점체조차도 교환의 일반법칙을 제대로 따르고 있으며 따라서 그런 상황에서도 정부의 간섭이 없다면 시장 경제의 효율성이 보장된다고 주장한다. 불안정과 위기는 경제적 효율성에 따르는 불가피한 대가일 뿐이다. 도메 다쿠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종래의 애덤 스미스 이미지는 그다지 크게 손상되지 않았다.

논의를 약간 다른 식으로 전개해 보면, 도메 다쿠오는 역설적으로 애덤 스미스의 사상 체계로부터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 경제 체제'가 결국에는 도출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기적 인간을 상정한다면, 정부의 감시와 법의 규제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만 공적 기관의 도덕적 부패도 배제할 수 없다.

다른 한편,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개인들로 구성된 사회라면, 그러한 사회 속에는 부와 지위를 추구하는 헛된 야심을 가진 사람들, '자연의 기만'에 속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도덕의 세계와 경제의 세계를 분리한다면, 그 둘을 이어줄 다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도덕의 원리에 따르는 사회 구성원들을 상정한다면, 경제의 세계는 위축되고 결국 도덕의 세계 속으로 흡수되고 만다. 결국 애덤 스미스의 사상 체계는 훨씬 복잡하게 해석되어야 한다.

근대 사회·경제 사상가로서 애덤 스미스가 갖는 사상사적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도메 다쿠오가 주장하듯이, 동감의 원리라는 인간 본성의 도덕 원리로부터 사회 질서를, 특히 시장 경제가 지배하는 근대 경제 질서를 설명해 내는 데에 있는가? 아니면, 많은 자유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 비판자들이 주장하듯이, 도덕의 원리로부터 경제의 원리를 완전히 분리해 내고, 또 이기심의 원리가 작동하는 경제 세계가 동감의 원리가 작동하는 도덕 세계조차는 장차 지배하게 될 수밖에 없는 근대 세계의 운명을 미리 보여준 데에 있는가?

스미스 사상 체계의 특성에 대한 질문은 근대 세계 자체의 본질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근대 세계에서 도덕과 경제는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근대인들은 도덕과 경제 둘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과연 우리는 두 세계 중 어느 하나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두 세계를 끊임없이 오가며 살아가고 있는가?

과연 근대 세계는 두 개로 나뉘어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하나의 세계일뿐인가? 아니면 우리는 도덕과 경제 두 개의 세계만이 아니라 더 많은 세계, 정치와 예술, 종교, 환상 등이 각각 지배하는 세계들 사이에 걸쳐있는 다리 위에서 여전히 서성이면서 불안하게 살아가는 존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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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는 식물성이다. 유교의 사유 구조는 근본과 말절, 즉 '본말론'으로 구성된다. 여기 본(本)은 뿌리요, 말(末)은 잎사귀를 뜻한다.

나무나 벼가 생장하기 위해선 잎도 중요하지만, 아무래도 그 생명의 핵심은 뿌리에 있다. 본말론 구조를 사람으로 가져오면 내 몸의 뿌리는 부모와 조상으로 은유된다. 여기서 효도와 제사를 중시하는 유교의 틀을 이해할 수 있다. 또 맹자 사상의 핵심인 성선설의 성(性)이 씨앗 또는 싹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점도 그렇고, 본성을 기르는 방법으로서 농사꾼이 작물을 키우듯 억지로 북돋지도 말고(勿助長), 그렇다고 씨 뿌린 것을 잊어버리지도 말기(勿忘)를 권한 것도 그렇다. 곧 유교는 '농경의 시대'를 바탕으로 건설된 사상이다.

그러고 보면 지난 세기 서구화·근대화라는 이름으로 휘몰아친 '상공업의 시대'에 유교가 핍박을 당한 까닭도 짐작이 간다. 동시에 오늘날 자연과 생태가 중시되는 '포스트모던' 시대를 맞아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시금 유교 사상이 재조명되는 내막도 수긍이 간다.

그러나 10년 전 이 땅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 제목이 우리들 속마음을 잘 드러내주었듯, 지금도 유교는 우리들에게 마뜩치 않다. 근대화를 가로막는 전근대성, 남녀평등을 가로막는 가부장제, 그리고 민주주의와 과학, 진보의 소매를 붙잡는 수구꼴통의 아성이 유교다.

1

중국 쪽 사정은 더 극적이다. 40년 전, 문화혁명기만 해도 유교는 전통, 봉건, 미신의 온상으로 파괴의 대상이었다. 어느 순간 그것이 급변하여 초등학생들이 의무적으로 <논어>를 암송하고, 베이징의 천안문 안에는 마오쩌둥 초상화 크기보다 더 큰 공자 동상이 만들어지는가 하면, '공자 평화상'이 제정되기도 한다.


▲ <맹자 교양 강의>(푸페이룽 지음, 정광훈 옮김, 돌베개 펴냄). ⓒ돌베개
최근 번역된 <맹자 교양 강의>(정광훈 옮김, 돌베개 펴냄)는 이런 유교의 재인식 바람에 편승한 중국 쪽 텍스트다. 중국 중앙방송(CCTV)의 <백가강단> 프로그램에서 방영된 10차에 걸친 '맹자 강연'을 책으로 묶은 것이다. 강연자(저자)는 푸페이룽. 미국에서 공부한 적이 있는 대만대학 철학과 교수다.

한국이든 중국에서든 겹겹이 애증이 교차하는 유교 사상에 대해, 특히 2300년 전 전국 시대의 고전인 <맹자>를 오늘날로 초청하여 대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설하는 일은 쉽지 않다. <맹자>를 강의하기가 어려운 까닭은, 현대 동아시아인들의 반(反)유교적 눈길이 가장 큰 장애이긴 하지만, <맹자> 자체의 고유한 난점들 탓도 크다.

<논어>와는 달리 이 책은 이른바 백가쟁명의 전국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즉 수더분한 대화가 아니라, 치열한 논쟁이 <맹자>를 구성하고 있다. <논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문장이 길고 또 단어 하나하나에 여러 겹의 뜻이 서려있다. 그러니 피상으로 죽 훑어 읽어서는 맥을 잃거나 그 속뜻을 오해하기 십상이다.

또 다양한 전거들을 인용해서 논쟁의 밑천으로 삼기 때문에 끊임없이 출현하는 경전들인 <시경>, <서경>, <논어> 그리고 당시의 속담들에 대한 사전 지식도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맹자와 논전을 벌이는 맞잡이 사상들, 예컨대 묵가, 종횡가, 법가, 농가 등에 대한 이해도 갖춰야만 균형 잡힌 해설이 가능하다. 요컨대 <맹자>는 그 자체로 참뜻을 제대로 헤아리기가 어려운 난삽한 텍스트다.

저자 푸페이룽은 이런 여러 가지 난점을 헤치고 오늘날 대중들의 가슴에 와 닿도록 해설에 성공한 드문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중국 철학 분야에 누구보다 해박한 지식을 가진 저자가 간략한 언어와 적절한 사례로, <맹자>의 정수를 독자에게 풀이해주어 전문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훌륭한 강의라 할 만하다"는 번역자의 장담이 헛된 말이 아니다.

2

책의 구성은 특정한 구절을 뽑아 읽고 해설하는 강독식이 아니라 10가지 주제를 선별하여, 이를테면 맹자 사상을 10면체로 깎아서 독자(청중)들에게 제시하는 입체적 방식이다. 이 중에서도 저자는 "맹자 사상에서는 특히 인성론, 수양론, 교육관, 생명의 경지에 대한 내용이 핵심"이라며, 이 4가지 면에 더욱 주목하기를 요구한다.

평자로서 이 책에서 가장 설득력이 강한 부분은 제3장, 효도의 중요성에 대한 설명이었다. 우리에게 유교는 충효(忠孝)라는 언어로 치환된다. 여기 효는 부모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을 뜻하고, 충은 가정에서 길러진 복종의 습관을 국가(군주)에게 바치는, 유교의 '노예성'을 대표하는 규범이다. 그러나 저자는 충효로 인식되는 유교는, 한(漢) 제국 체제 이후 삼강오상(三綱五常)의 틀 속에서 "변질"된 것임을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우리에게 유교의 효도는) 부모의 말은 무조건 옳으니 자녀는 부모의 말을 잘 들어야 하며, 그것이 효도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지요. 현실에서는 올바른 생각이나 행동과 거리가 먼 부모가 무척 많습니다. 유교에서도 이를 잘 알았습니다. 부모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자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문제를 고려하지 않은 채 무조건 효도하라고 주장한다면 결국 '예교(禮敎)가 사람을 잡아먹는 지경'(루쉰)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62쪽)

그러면 효도란 무엇인가? 저자는 자신과 반신불수가 된 어머니와의 구체적인 사례를 예로 들면서 효도는 부모와의 대화와 소통이 핵심이라는 점을 부각한다. 요컨대 사랑의 뿌리인 효도는 상대방을 이해하는 소통이 본질이다. 이 부모 자식 간의 소통을 통해 획득한 사랑의 힘(이해력)은 점차 가정의 문턱을 넘어 마을과 학교, 그리고 사회와 국가로 펼쳐나가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당신이 나에게 잘해주기 때문에 내가 당신에게 잘해주는 것이 아니고, 내가 당신에게 잘해주는 건 당신이 내게 잘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며, 그저 나의 책임을 다하는 것일 뿐"(71쪽)임을 체득하는 것이 효도다. 이렇게 조건 없는 사랑의 힘을 효도를 통해 배우는 것이지, 결코 부모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서 그 힘에 짓눌려 내 욕망을 억제하는 따위는 효도라고 할 수 없다는 것.

3

둘째, 이 책에는 학술적 가치도 있다. 맹자 사상의 핵심으로 누구나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성선설을 들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푸페이룽은 성선(性善)이 자칫 '태어나면서 본래 선하다', 즉 성본선(性本善)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력하게, 또 설득력 있게 개진한다.

그는 맹자의 성선설은 '사람은 본래부터 선하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은 선을 지향하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성향선(性向善)이 성선설의 본래 뜻이라는 것. 마치 씨앗이 성장하면서 태양을 향하는 속성이 있는 것처럼, 사람도 선을 '향하는' 속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성본선과 성향선의 차이는 앞의 것이 노력하지 않아도 본래 선하다고 오해될 수 있다면, 뒤의 것은 노력을 하지 않거나 외부의 장애가 있을 때는 선을 이룰 수 없다는 점, 즉 '실천적이고 동태적인 특성'을 담을 수 있는 데 있다. 이 땅의 지성사에 비춰보면, 다산 정약용이 성기호설(性嗜好說)이라, 사람은 선을 '좋아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고 논한 바 있는데, 막상 푸페이룽이 주장한 바, "성선이란 선을 '지향하는' 특성을 뜻한다"는 성향설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저자의 친절한 인도를 따라 <맹자>를 읽으면서 문외한인 독자라도, 맹자 사상의 큰 맥락을 헤아릴 수 있고, 또 구체적인 개념들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소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보다 더 큰 소득은 이 책을 통해, 사상가 맹자의 깊은 안목을 맛볼 수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된다.

저자는 "맹자를 배울 때 그의 표면적인 언사만 봐선 안 됩니다. 그렇게 말을 하게 된 배경과 근거를 묻고, 그가 왜 자신의 말에 그토록 자신이 있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라고 우리에게 '맹자 독법'의 신중성을 권한다. 그런데 이런 신중성은 도리어 맹자 본인이 당대의 사건과 사태를 대할 때 견지한 태도로 여겨진다.

나는 신중성을 '겹눈'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거죽의 아래 깔려있는 진실의 여러 겹을 헤아릴 줄 아는 눈이라는 뜻에서다. 세상의 일들과 사람을 만날 때, 겉에 드러난 거죽을 진실로 보는 피상적 이해(육안)를 넘어서, 그 속살을 헤아리는 깊이 있는 안목(심안)이야말로 인문학과 고전 공부의 핵심이다. 또 이점이야말로 <맹자>를 통해 획득하는 참된 가치라는 것.

4

끝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을 지적하고 싶다.

저자와 맹자 사이가 너무 밀착되어 있다는 점이 그 첫째다. 저자가 "맹자의 눈이 이처럼 깊고도 정확했다"(64쪽)는 점에 감탄한 나머지 마땅히 지켜야할 대상과의 선을 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다. 대상(맹자·유교)과의 적절한 거리를 잃어버리고 맹자를 변호하기를 넘어서 옹호하고 또 유교를 강조하기를 넘어서 '호교'하기에 이르는 '감동적' 대목이 여러 곳이다.

"맹자 사상은 완벽한 하나의 체계이기 때문에 더 깊이 배울수록 삶이 발전해 가는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다"(33쪽)라든지, "서양 사상이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을 유심히 관찰했다면, 유교에서는 인성과 관련된 온전한 관점을 갖고 있다"(193쪽)는 식의 표현이 거듭 나타난다. 그런데 이런 표현들은 그 맥락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한, 독자들로 하여금 맹자나 유교의 이해를 북돋우기보다는, 저자의 자기만족에 의구심을 표하게 만드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또 하나는, 맹자 사상의 핵심이 인의(仁義), 특히 정의(義)에 방점이 찍힌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사랑(인)과 정의(의)는 맹자가 제시하는 새 시대의 정치적 비전, 즉 왕도(王道) 정치의 핵심이다. 그런데 저자는 "유교의 의(義)는 어떤 해석을 가져와도 명확하게 설명하기가 힘듭니다"(91쪽)라고 언급할 뿐, 맹자 사상의 고갱이인 '정의'의 가치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 맹자 사상의 핵심을 재해석하지 않는다는 것은 맹자 사상을 현재로 되살리고, 또 오늘날 우리 삶에 기여할 수 있는 맹자 '강의'의 역사적 의미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오늘날 유교 사상은 많은 오해에 싸여있다. 그러므로 대중들에게 맹자 사상, 그리고 본래 유교의 진면목을 이해할 수 있도록 과거를 올바로 해석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유교가 오늘날 살아있는 사상이 되기 위해서는, '맹자가 이렇게 저렇게 훌륭한 사상이다'라는 계몽만으로는 부족하다. 맹자를 현대의 관점으로 재해석하여 그 비전을 드러내 주는 작업까지 나아가야 한다. (이런 점에서 텔레비전을 통한 '대중 강의'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역사적 공간이 된다.)

즉 오해된 맹자를 이해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맹자를 오늘날 관점에서 해석하는 일은 더욱 중요하다. 그 열쇠가 의(義)에 있다고 평자는 생각한다. 맹자의 정의론, 유교의 정의관에 비춰 현대 중국의 정치는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는지, 또 우리에게 그리고 정치가들에게 어떤 윤리와 실천을 요구하는지가 '강의'를 통해 제시될 수 있었다면 더욱 좋을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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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이후 우리의 학문과 생활은 이미 서양적인 것에 의해 점령당했다. 선(善)의 반대가 불선(不善)이 아니라 악(惡)이라고 생각하고 공정한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라고 여기는 것을 상식으로 알고 있는 우리에게 서양적인 것은 이미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렇게 우리는 동양 속의 서양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그 서양적인 것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각종 학문 영역에 두루 쓰이는 'substance'라는 말이 어떤 유래로 만들어졌고 역사적 변천 과정에서 어떤 의미들을 가지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될까? 존재를 선으로 보는 서양의 전통을 눈치 채고 그것이 서양의 학문, 예술에 어떻게 스며들어있는지 느끼는 한국인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서양 사람들이 쓴 서양의 문명에 대한 각종 소개서들은 그들의 입장과 시각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번역된 서양 문명의 소개서들에 충분히 공감할 수 없다. 우리에게 맞는 서양 문명의 안내서가 절실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그런데 김용규의 <서양 문명을 읽는 코드 신>(휴머니스트 펴냄)은 서양 문명의 가장 핵심에 있는 것들이지만 아직 한국인에게 제대로 소개되지 못한 것들을 들추어내는 과감한 시도를 하고 있다.


▲ <서양 문명을 읽는 코드 신>(김용규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휴머니스트
서양의 학문과 예술에 대해 안다고 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신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만일 수밖에 없다. 종교 여부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성서는 필독의 고전이라는 점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경우에는 성서가 고전의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성서가 가지는 강한 종교성 때문일 것이다.

또 서양인들이 소개하는 그리스도교와 서양 문명은 유불도(儒彿道)의 유전자를 가진 우리에게 소화되지 못하는 음식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교와 서양의 신에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이 책은 서양 문명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교를 그 문명 곳곳에 박혀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서양의 그리스도교와 신에 대해, 그리고 그와 관련한 서양의 문화적 전통에 대해 진지한 궁금증을 가진 사람들의 지적 갈증을 해소해준다. 신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어 하는 사람, 그러나 특정 종교에 대한 알레르기 때문에 망설였던 사람들에게 창조와 삼위일체, 유일신, 신의 여러 속성에 대해서 부담 없는 여행을 안내한다.

그리스도교의 신 개념이 히브리 사람들의 종교적 신 개념과 그리스인들의 존재론적 신 개념이 종합된 것이라는, 그래서 신앙과 이성이라는 상극(相剋)을 조화시킨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게 해준다. 그 과정에서 서양의 존재와 선(善) 개념, 존재의 대연쇄, 예정설, 섭리, 공간, 시간 개념을 공감하게 만든다. 그리스도교의 형성 과정을 추적해서 창조, 신, 존재, 예정, 유일신 등 여러 개념으로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유대교와 다른지를 이처럼 친절하고 정확하게 설명해주는 책은 드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이 책은 개신교 신자들에게 보수주의적 성경 해석이라는 편향성과 기독교 근본주의의 위험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믿고 있는 신앙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전통에 의거하는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해준다. 종교 지도자의 권위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용기를 제공해준다.

특히 신앙이 과학이나 철학을 배제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깨닫고 더욱 강한 믿음이 생길 수 있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의 창조론이 현대 과학과 양립할 수 있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창조론과 관련되는 시간, 물질 등 여러 개념들이 현대 물리학의 이론과 양립할 수 있다는 점을 언어 놀이나 패러다임 이론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 진화론이 어떻게 창조론과 충돌하지 않을 수 있었고, 현대에 있어서도 양립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역사적이고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신학, 철학, 문학, 예술, 자연과학 등 다양한 분야를 넘다드는 해박함에 있다. 저자는 '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존재, 창조주, 인격, 유일자라는 네 열쇳말로 조곤조곤 설명한다. 그 안에서 신의 존재 증명,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그리스도교적 창조의 함의, 신의 섭리와 인간의 운명, 유일신 개념의 진정한 의미 등 다양하고 어려운 문제들을 하나씩 풀어가고 있다.

이렇게 복잡한 논의를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라는 작품을 모티프로 시작해 여러 철학, 문학, 예술 작품의 씨실로 묶고 나서 다시 그 <천지창조>로 끝을 맺는 수미일관한 구성은 분량과 내용의 방대함이 주는 위압감을 위로하고 있다. 또 시종일관 원전에 근거해서 분석하고 있는 점도 돋보인다. 원전에 담가보지도 않은 채로 철학사라는 묵은지를 상에 올리는 얄팍한 소개서들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꼼꼼하게 고대, 중세와 근현대의 원전을 인용하는 진지함과 고대의 플라톤부터 중세의 교부들과 스콜라 철학자, 그리고 근대와 현대 철학의 흐름을 꿰고 있는 스케일에 입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쉬운 점은 있다. 저자의 입장과 논의가 개신교적 관점에 편중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사실 서양 철학과 신학, 문화 전반에 있어 목적론적 세계관과 존재와 선의 일치, 역동적 존재 개념인 에세(esse)를 한 차원 높이 발전시키고 자연법 개념과 전통을 정립한 아퀴나스의 업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책에서는 플라톤적 전통은 아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스콜라 철학,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의 전통에 대한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다. 개신교에서는 자연신학으로 폄하되지만 가톨릭의 공식적 신학으로 자리매김한 토마스의 전통에 대한 소개가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점이 혹시 저자의 신앙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이와 관련해서 '하나님'이라는 호칭을 고집하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요즘같이 개신교에 대한 무신론자들의 적대감이 심한 때에 굳이 '신'이나 '하느님' 대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저자의 개인적인 종교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일까?

이외에도 아쉬운 점들이 또 있다. 분량이 너무 많다는 점도 참을성 없는 독자들을 쉽게 지치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선함, 전능, 전지, 무소부재와 같은 신의 다른 속성에 대한 언급이 없는 점이 아쉽다. 비록 다른 주제들을 다루면서 간접적으로 언급되고 있지만 그러기에는 비중이 큰 주제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참고 문헌이 따로 없는 점도 아쉽다. 812쪽부터 참고 문헌이라고 되어있는 부분은 미주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좀 더 자세한 공부를 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친절한 참고 문헌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 좀처럼 찾을 수 없지만 옥의 티가 없는 것은 아니다. 393쪽의 "구분되는 창조의 행동"은 "창조로부터 구분되는 행위"로 번역해야 하지 않을까? 또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이는 표현들이 오해를 불러일으키지나 않을까 염려되는 대목도 있다. 146쪽에서 "그리스인들에게 존재란 영원불변한 것이었습니다"라는 표현이 그 예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던지고 있는 강한 메시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그리스도교 신이 가지는 유일성이라는 속성이 포괄성의 의미이지 배타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강하게 입증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배타성과 폭력성은 교회 내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것이 현재 그리스도교가 가지는 반(反)신앙적 유산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624쪽에서 "유일신 개념이 타 종교에 대한 배타성과 폭력성의 근거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오해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누구의 오해인지 밝히고 있지 않다. 무신론자들의 오해인가 아니면 유일신교의 몇몇 종교 지도자들의 오해인가? 물론 5부 전체, 특히 9장을 읽으면 무신론자들의 오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의 오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책의 목적이 어디에 있을까 하는 궁금증은 끝내 풀리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의 신을 통해 서양 문명을 읽는 것일까? 아니면 서양 문명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신을 이해하는 것일까? 책 전체를 존재, 창조주, 인격, 유일자로서의 신으로 나누고 설명하는 것으로 봐서는 신을 통해 서양 문명을 이해하는 것이 저자의 의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맺음말에서 저자가 리오타르를 인용하면서 작은 이야기에 빠져 큰 이야기를 놓치고 있는 20세기 후반의 지성적 흐름을 비판하고 있는 것도 이를 뒷받침해준다. 그러나 신의 속성을 통해 서양 문명이라는 고장 곳곳을 헤집고 다니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미 서양의 신에 대해 깊이 이해하게 될 수밖에 없다. 이점 또한 목적이라는 것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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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은 에누리의 달인이다. 그에게 소비는 전투다. 상품에 붙어있는 가격은 장식이다. 탐색전은 짧다. 처음부터 숫자를 반 토막 낸다. 경우에 따라 고성이 오간다. 이것저것 안 해본 장사가 없었던 당신은 같은 상공인의 영업 메커니즘에 익숙하다. 절반 가까이 값을 깎고도 아쉬워하는 당신이나 그 가격에도 마진을 남기는 주인장. 모두 기자에겐 경외의 대상이다.

정반대로 주인이 달라는 대로 주는 기자의 소심함에 '전투'는 무리다. 고작해야 인터넷 최저가를 뒤적이는 게 전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에누리의 시대는 점점 사라져 간다. 전통 상가 한 편의 떠들썩함은 대형 할인점의 할인 경쟁으로 대체된다. 경쟁에 의한 최저가라니. 뭔가 합리적이고 믿음직하다. 시장 경제에 대한 순박한 믿음.

사실, 한국의 대형 할인점은 그리 싸지 않다. 명절이 다가오면 으레 나오는 전통 시장과 대형 할인점 물가 비교 기사를 떠올려 보라. 몇몇 기획 상품과 생필품 할인 행사를 보면 혹할 수도 있지만, 나머지 수만 가지 상품을 천천히 둘러보면 동네 구멍가게와 별반 차이가 없다. 한 번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할 수 있다는 편의성이 오히려 고객을 끄는 요인이리라.


▲ <월마트 이펙트>(찰스 피시먼 지음, 이미정 옮김, 이상 펴냄). ⓒ이상
아이러니컬하게도 '상시 최저가'를 표방하며 세계 유통업계를 장악한 미국의 월마트가 국내토종 할인점에 밀려 손을 털고 나간 게 지난 2006년이다. 이즈음 미국에서는 <워싱턴 포스트>를 거쳐 경제 전문 잡지 <패스트 컴퍼니>의 수석기자로 활동하는 찰스 피시먼의 <월마트 이펙트>(이미정 옮김, 이상 펴냄)가 베스트셀러에 등극했다.

뒤늦게 국내에 소개된 이 책의 부제 '시장 경제를 파괴하는 거대 자본의 습격'이란 말을 단순이 받아들이지 말자. 국내 대형 할인점이 '최저가'의 허상을 입고 유통 시장을 장악했다면, 월마트가 표방한 '상시 최저가'는 말 그대로 '리얼'이었다. 소비자가 갈구하는 최저가에 대한 욕망을 월마트는 실제로 구현해냈다.

하지만 이들이 '이상'에 도달했을 때 보았던 광경은 낙원이 아니었다. 줄어든 비용은 누군가에게 전가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게 꼭 '당신'이 아니라는 법은 없다.

모두에게 '독'이 된 월마트의 '최저가'

최근 '통큰 치킨' 파동 등을 겪으며 국내에서 유통업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 하지만 비난만 들끓는 건 아니다. 구제역이 창궐한 와중에 미국산 LA갈비 할인 행사를 한 롯데마트를 꼬집는 기사를 쓰자 한 독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평소에 한우는 비싸서 먹지도 못하는데, 쇠고기 싸게 판다는 게 뭐가 어때서요?"

이렇게 '저가'를 지지하는 소비자는 유통업체의 가장 든든한 아군이다. 장기적으로 구멍가게와 같은 영세 자영업은 자본주의 경제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이른바 유통 선진화 논리다. 그렇다면 그 다음 단계, 선진 유통 기법을 갖춘 업체들이 경쟁을 벌여 더욱 낮아질 '최저가'를 향유하는 세상은 행복한 곳이 될까? 알고 싶다면, 월마트를 보자.

월마트는 싸다. 소비자의 체감이 아니다. 월마트에 납품하는 기업의 공급가를 주무르고 미국 전체 물가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싸다. 규모의 힘이다. '상시 최저가'의 기치를 내걸고 1962년 아칸소, 미주리 주에 들어선 월마트는 21세기에 세계 1위 소매점으로 성장했다. 2005년 한해 월마트를 이용한 이는 72억 명. 전 인구가 이용하고도 5억 명이 더 들렀다.

경제학 교과서는 공급과 수요가 균형을 이루는 지점에서 가격이 결정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수요자는 소비자가 아니다. 가격을 결정하는 건 공급자와 유통업체다. 처음엔 동등한 관계일지 몰라도, 경쟁자가 하나 둘 사라지면서 거대해진 할인점은 스스로 가격을 결정한다. 균형 가격이 아니라 유통업체 제시 가격에 맞춰 공급업체가 생산을 관리한다.

월마트의 방식이 그런 식이었다. 공급업체로서는 최대 고객인 월마트의 가격 정책을 울며 겨자 먹기로 따를 수밖에 없다. 베이컨 접시를 만드는 1인 기업이 월마트 덕에 성공했다는 미담도 있지만 무리한 가격에 맞추려다 기업 가치를 상실한 곳이 더 '훨씬' 더 많다. 이 책에는 그런 예가 수두룩하다.

자전거 생산업체 '허피'는 월마트에 공급하는 저가 자전거 물량을 맞추기 위해 경쟁사에 사업을 넘겨야 했다. 청바지로 유명한 '리바이스'는 월마트에 저가 청바지를 공급하고자 독창성을 버렸다. 이 정도는 양반이다. 가격을 낮춰 많이 팔고도 수익이 나지 않아 사업을 접은 업체도 부지기수다. 통계로도 확인된다. 월마트와의 거래량이 10%를 넘지 않는 기업의 이윤율은 평균 12.7%였고, 25%가 넘는 기업의 이윤율은 7.3%였다.

경쟁사보다 1센트라도 더 저렴하게 파는 월마트의 정책은 정작 자기 자신에게도 부작용을 낳았다. 저가를 추구할수록 이윤율은 떨어진다. 이 기업은 비용을 맞추고자 철저하게 조직을 쥐어짰다. 당연히 수많은 부작용이 생겼다. 2000년 수당도 없이 시간외 근무를 하던 직원 6만9000명이 집단으로 소송을 제기했다. 2003년에는 연방정부가 월마트에서 야간 청소를 하던 불법 체류자 245명을 적발했다. 이 기업은 2004년 캐다나 퀘벡 점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되자 비용 상승을 우려해 매장을 폐쇄했다.

'월마트 이펙트', 세상을 후려치다

이랜드 비정규직 파업, 해마다 공정거래위원회에 적발되는 유통업체의 납품업체 쥐어짜기 실상을 겪어온 한국에서 이런 이야기가 크게 흥미롭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수의 소비자에게 혜택을 주는 과정에서 생긴 부작용 정도로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월마트의 최저가를 향한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월마트의 행보는 소비자, 더 나아가 지역 경제에도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책에서 인용한 복수의 보고서를 보면, 월마트와 경쟁한 슈퍼마켓은 매출이 약 17% 감소했다. 식료품점, 의류점 등의 타격은 더욱 심하다. 경쟁사와 공급업체의 파산은 실직으로 이어졌다. 1997년에서 2004년 사이 소매업 일자리는 67만 개가 늘었고 이 중 월마트에서만 48만 개가 생겨났다. 같은 기간 미국 제조업 일자리는 310만 개 줄었다. 값싼 상품을 만들기 위해 미국 내 노동자를 해고하고 중국 등 노임이 싼 지역으로 공장을 옮겼기 때문이다. 1989년부터 1999년 사이 월마트 매장이 들어선 카운티의 빈곤율이 더 높았다. 다른 변수를 제외한 계산이다.

'월마트 효과'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도 폐해를 낳았다. 2000년 들어 미국의 연어 소비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월마트는 연어 소비를 이끌며 연어 1파운드를 4달러 84센트에 팔았다. 월마트 연어 전량을 납품하는 칠레는 십 수 년 전까지 연어 서식지가 아니었다. 지금은 양식 사업이 칠레 남부 경제를 장악했다. 양식장에서 배출되는 연어 먹이와 배설물, 가공 과정에서 버려지는 내장이 칠레 인근 해저에 쏟아지고 있다. 이 오염을 관리하는 몫은 칠레 정부와 국민이 부담한다.

또 다른 사례도 있다. 월마트에서 파는 5달러74센트짜리 티셔츠는 방글라데시에서 시급 13센트를 받고 일하는 미성년자 소녀가 만든다. 작업량을 못 채우면 감독관이 소녀가 만들던 바지로 얼굴을 후려친다.

이외에도 책에서 언급하는 수많은 사례들이 의미하는 것은 뭘까?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더 싼 가격'의 맹목적인 추종은 결국 자신들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사실이다. 월마트를 만든 이들은 사무실 의자마저 납품업체 샘플로 대신할 정도로 엄격한 관리를 통해 '최저가'에 대한 진정성을 보인다. 하지만 '최저가'가 왜 옳은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아울러 최저가에 열광하는 소비자 역시 자신이 집어든 물건의 이력을 추적하면 그 안에는 시장 경제의 황폐함이 자리 잡고 있음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을 쓰면서 입고 있는, 인근 대형 할인점에서 산 1만9800원짜리 트레이닝 바지의 내력이 궁금해진다. 어디선가 '루시드 폴'의 노랫말이 들려오는 것 같다.

"난 사람이었네 공장 속에서 이 옷이 되어 팔려왔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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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창한 책에 맞춰서, 우스꽝스럽지만, 나 역시 덩달아 거창하게 말한다면 '21세기의 첫 10년을 보내는 연말과 새로 맞이한 연초'를 나는 니얼 퍼거슨의 책을 보면서 보냈다.

퍼거슨이 누구인가? 1964년생이라니 나는 그를 내 나이를 기준으로 '젊은 학자'라고 이해한다. 퍼거슨은 영국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교 모들린 칼리지에 장학생으로 입학해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머리가 좋은데다 입학 때부터 졸업 때까지 공부를 잘했다니 성실한 사람이었던 게 틀림없다.

지금은 하버드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이자 비즈니스스쿨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영국의 한 정치평론지는 저자를 '최고 지성 100인'으로 뽑기도 한 모양이고, 역사학자로서는 이채롭게도 '금융'에 관심을 가져서 <금융의 지배>, <현금의 지배> 같은 책도 저술했다. 이런 그의 폭넓은 학문적 관심은 20세기에 유독 대규모로 거듭 일어난 전쟁과 '인종 청소'라 불리는 끔찍한 학살의 원인을 외골수 역사학자와 다르게 살피는 데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 대단한 학자가 실로 여러 기관과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자그마치 10년에 걸쳐 쓴 책은 <증오의 세기>(민음사), 원제는 <The War Of The World : History's Age Of Hatred>이다. 원제를 밝히는 까닭은 번역물의 경우, 붙여진 제목이 때로 원제와 너무 동떨어진 예도 많기 때문이다. 이 책의 한글 제목은 원제를 외면하지 않았다.


▲ <증오의 세기 : 20세기는 왜 피로 물들었는가>(니얼 퍼거슨 지음, 이현주 옮김, 민음사). ⓒ민음사
문제는 책의 분량이다. 무지막지하게 두꺼운 책이다. 영문으로 된 '자료와 참고 문헌', 그리고 저자의 '감사의 말'까지 합쳐 자그마치 914쪽의 분량이다. 본문만 840쪽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꼭 이 책을 지목해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서적에 어김없이 붙곤 하는 방대한 분량의 '자료와 참고 문헌'은 종이 낭비가 아닌가 싶다.

번역서에 붙여져 있는 영문 참고 문헌과 자료를 참고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라면 원서를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의견은 한글로 된 책에 수록되어 있는 영문 자료까지 챙겨볼 필요를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평범한 독자의 무식한 소견쯤으로 치부해 주기 바랄 뿐이다.

1억8800만 개의 비극

지난 연말과 이번 연초 내내 나는 이 세상에서 두 사람에게 매우 야속했다. 우선 이 서평을 내게 부탁한 '프레시안 books'의 K 기자가 야속했다. 그리고 이 책의 서평을 선뜻 수락한 내 자신이 너무나 야속했다.

나는 담배를 즐겨 피우던 다른 이들처럼 새해 들어 휴연(休煙)을 할 작정이었다. 금연(禁煙)은 너무 높은 산이라 휴연의 언덕쯤은 기어이 오르려고 12월 하순이 되자 굳게 작심하고 있던 터였다. 이 책의 내용이 만약 건강이나 사랑에 관한 책이었다면 어쩌면 휴연에 성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지난 100년간 이 행성에서 일어났던 인간 종끼리 벌였던 끔찍하고 처절하고 지독하고 무서운 살육사가 그 내용이다. 지난 100년의 전쟁사, 혹은 인간이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극한의 잔혹사가 책의 내용이다. 또 책을 덮고 나면 이 책은 일종의 서양인에 시각에 의해 쓰인 '제국론'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어쨌거나 이 골 때리는 책 때문에 휴연하려는 내 새해 결심은 서평을 수락하는 순간 깨져버렸다.

나는 정치학자도 역사가도 아닌 잡글이나 써대는 사람이기에 쓸데없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나 더 보태야겠다. 후다닥 읽어치우기에는 버거운 책이었지만 책을 완독하고도 나는 송고하기로 한 마감일을 못 지킴으로써 K 기자의 마음속에 있었을지도 모를 나에 대한 얼마간의 신용마저 잃어버렸다. 마감을 지키지 못한 데에는 여러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이 나를 너무나 침울하게 만들어 쉽게 원고 작업에 달려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 꼼꼼하고 방대한 살육의 기록은 지난 100년간 두 차례 세계 대전(제1차 세계 대전은 '유럽 전쟁'이라 해야 옳겠지만)과 그 이후에도 끝없이 진행된 '인종 청소' 등으로 죽은 이들을 자그마치 1억6700만 내지 1억880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수치는 저자도 '부록('역사적 관점에서 본 세계 전쟁')에서 밝히고 있듯이 단지 추정치일 뿐이며, 그 이전 전쟁의 사망자 수치는 더욱 믿기 어렵기에 '논란의 여지없이 확실치는 않'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역사가들이 계산한 사망자 수는 대개 뺄셈으로 얻어진다. 즉 인구 조사 수치나 믿을 만한 추정치를 이용할 수 있는 경우, 전쟁이나 다른 폭력 사건 이전의 인구에서 이후의 인구를 빼서 계산한 것이다. 그리고 왕왕, 태어날 수도 있었을 텐데 학살로 인해 태어나지 못한 '사람들'까지 포함하기 때문에 사망자 수가 부풀려지는 경향도 있다(831~832쪽). 설사 부풀려졌다고 해도 이런 추정치가 아주 무책임하다고 비난 받을 수 없을 것이다. 20세기 100년 동안의 폭력의 정도가 그 이전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대량 살상이었다는 사실을 많은 이들이 공감할 것이기 때문이다.

책을 넘길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는 수치가 나오곤 했다. 이 책에 동원된 거의 모든 아라비아 숫자는 책의 쪽수를 제외하고는 사망자를 지칭하는 숫자와 그 연도였다. 책의 어느 쪽을 펼쳐도 쉬지 않고 죽은 이들의 숫자가 박혀 있어 다른 사람을 죽이는 인간의 놀랍고도 무서운 에너지에 전율하게 된다.

나중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여러 곳에서 너무나 잔인하게 서로 죽이고 죽었다는 사실에 대해 무감각해져버려 최초의 놀라움이 퇴색해진 데 대한 색다른 비애감에 젖게 된다. 아우슈비츠에서도 처음에는 사람을 죽이는 일이 너무나 끔찍해 토하고 형장에서 뛰쳐나가는 절멸 부대 나치 병사가 있었다고 하지만, 나중에는 모두 학살에 익숙해져서 농담을 하고 음악을 들으면서도 사람을 죽였다고 하던데, 독자들 역시 100년 동안의 거듭되는 학살의 참극에 익숙해지다 보니 나중에는 몇 만 명의 사람이 죽었다는데도 무덤덤하게 책장을 넘기는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이상한 일은 이 책이 워낙 차분하고 담담한 어조로 학살의 내용을 전달하고 있어서인지 피 냄새가 진동하는 책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책에서 피 냄새가 나지 않는 까닭은 얼핏 보이는 것처럼 저자의 감정 개입이 극도로 억제되어 있기 때문일까? 아니다, 틀린 말이다. 이 세상에 저자의 편견과 감정 개입이 완벽하게 억제된 책이 어디 있을까?

저자는 영국, 미국 등 이른바 연합국 측을 기술할 때와는 달리 추축국(樞軸國) 측인 독일의 히틀러,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를 다룰 때에는 적대감과 혐오감을 감추지 못한다. 사이비과학으로 판명된 우생학이나 인종위생학 따위에 빠져 유대인 절멸 사업을 감행한 광기어린 히틀러를 묘사할 때 특히 그랬다. 그뿐인가. 극동의 황인종인데도 불구하고 세계열강의 각축에 뛰어든 놀라운 일본인에 대한 같잖다는 어조를 딱히 그 표현에서가 아니라 분위기에서 어렵잖게 느낄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영국이나 미국이 지난 세기에 자행한 대단히 못된 짓에 대해 저자는 다루기는 다루되 표가 나도록 관대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분량에서도 그렇고 내용에서도 그랬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 미친 학살극에서 희생되었다는 인간에 대한 절망감도 그것이었지만 책을 읽는 내내, 그리고 마침내 900쪽이 넘는 책을 덮는 순간 내게 엄습한 감정은 영미 제국에 속해 있는 저자의 편견에 대한 불쾌감 같은 것이었다. 학자든 정서적 글을 쓰는 문인이든 이 세상에 누가 편견이 완전히 배제된 글을 쓸 수 있을까? 냉정하고 침착한 기술 속에서도 나는 저자에게서 끝없이 '백인'을 느껴야 했다. 이를테면 에릭 홉스봄이나 하워드 진에게서는 백인을 느끼지 못했지만 니얼 퍼거슨에게서는 그랬다.

"너무 사랑해서 강간하고 학살했다"

인간의 진보가 확실시되던 20세기 초반에 어떻게 인류 역사상 이토록 끔찍한 최악의 폭력과 살육이 자행될 수 있었는가, 그 원인은 무엇인가?

퍼거슨은 20세기 초반 이 행성에서 벌어진 인간의 인간에 대한 극단적인 잔혹사를 인종과 민족 갈등, 경제적 변동, 제국의 쇠퇴라는 세 가지 원인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실제로 20세기는 인간이 벌인 최대의 야만적 학살이 자행된 양차 세계 대전, 나치와 소련의 대량 인종 청소,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비롯해 멕시코 혁명 전쟁, 중일 전쟁, 난징 대학살, 중동 전쟁, 이란-이라크 전쟁, 아프리카의 내전들, 캄보디아 킬링필드, 미국의 조정에 의한 라틴아메리카의 양민 학살과 역시 미국의 묵시적 허락에 의해 자행된 동티모르 대학살,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앙골라와 보스니아의 폭력 사태, 중국의 문화대혁명 그리고 어김없이 모든 학살 장소에서 자행된 강간 살해와 생체 실험 등으로 얼룩졌다.

그런 점에서 문명의 발달과 진보가 인간의 잔혹성과 야만성을 약화시키리라고 기대했다면 그런 기대에서 비롯된 20세기 전쟁과 학살에 대한 의문은 지나치게 순진하거나 공허한 말장난이 된다. 진보가 곧 '평화의 진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뛰어난 서구 문명은 널리 알려져 있듯이 식민지 착취와 끝 모를 탐욕의 부산물이었기 때문이다. 제국의 역사학자기이 때문일까? 퍼거슨의 경우에는 이른바 좌파 역사학자와 비교했을 때 이런 인식이 매우 미약하다.

그러나 저자는 인종주의의 뿌리, 즉 다른 인종에 대한 증오가 근거 없는 우생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을 풍부한 자료를 동원해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특히 그는 유대인 혐오의 경우, 나치만 어이없고 도착적인 인종 우월주의에 빠져 있었던 게 아니었다는 것을 역설한다. 실제로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한결같이 중증의 유대인 혐오증을 앓고 있었다. 그는 유럽의 보통사람들이 드러내준 유대인 혐오라는 협조가 없었다면 히틀러의 기반이 무너졌을 것이라고 여러 군데에서 강조한다. 다수의 협력자들은 언제나 제국(帝國)의 불가결한 요소였던 것이다. 중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혐오 역시 근거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나치나 유럽의 제국(諸國)들이 유대인을 병균으로 간주했듯이, 일본인은 중국인을 열등한 인간쓰레기로 취급했다.

극동국제군사재판부는 1938년 12월에 일본군이 난징에 입성한 이래 5주 반 동안 계속된 난징 대학살로 26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일본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고 추정했는데, 이는 전체 전쟁 기간에 죽은 영국 민간인의 네 배가 넘는 수치였다(630쪽). 8000~2만 명이 강간을 당했고, 하룻밤에 평균 1000여 건의 강간 학살이 일어났다. 강간 직후 곧바로 학살로 이어진 '성적 살인(lust murder)'은 기실 일본군만의 특성은 아니었다. 유럽에서도 소련에서도 남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저자는 난징 대학살을 에도 말기(메이지 이전)의 토착 문화와 빌려온 독일의 인종 이론이 뒤섞여 일어났다(632쪽)고 보고 있다. 경악할 일은 전쟁이 끝난 뒤, 난징의 강간과 학살로 교수형을 선고 받은 전범 마쓰이가 재판정에서 한 말이다.

"일본과 중국의 투쟁은 언제나 '아시아계 가문' 내 형제들의 다툼이었다. (…) 긴 세월 동안 나는 이 전쟁을 중국인들이 자기반성을 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그들을 증오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다." (633~634쪽)

사랑하기 때문에 2만여 명의 중국인을 강간하고 학살하고, 더러는 일본도(日本刀)만으로 누가 먼저 더 많은 한족들의 머리를 벨 수 있는지 장교들이 경기도 벌였다. 100명의 비무장 중국인의 목을 치는 경기에서 어떤 장교가 이겼는지 쉽게 합의가 안 되자 죽일 희생자들의 숫자를 다시 150명으로 늘렸고, 총 500명의 목숨이 필요했던 이 참살 경기는 일본 언론에 의해 마치 스포츠 중계하듯 보도되었다. ("중국인 100명 죽이기 시합에 나선 중위들이 호각지세의 실력을 보여주다", <도쿄니치니치신문(東京日日新聞)> 1938년 12월 7일자), 이 모두가 일본인이 중국인을 오래된 형제로서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저지른 사랑의 행위였단 말인가? 이 도착적인 자기변명은 인간이란 불가사의한 존재에 대해 절망하게 만든다. 저자는 풍성한 자료를 동원해 거듭 강조한다.

"다른 인간을 열등하고 유해한 종, 즉 단순한 해충으로 간주하는 심리는 20세기의 전쟁이 그토록 폭력적이었던 결정적인 이유였다." (633쪽)

제국이 평화를 보장한다?

퍼거슨은 전쟁과 학살이 자행되는 또 하나의 원인으로 경제적 변동을 든다. 소련, 독일, 일본 등 제국주의자들이 전쟁을 일으킨 한결같은 명분이 '생활공간의 확장'이었으므로, 어렵게 말할 것 없이 이는 열강의 자원 착취 욕구를 에둘러 한 표현이다.

그가 말하는 경제적 변동은 경제성장률, 가격, 금리, 고용 변화의 빈도와 진폭 그리고 그와 관련된 모든 사회적 압력과 긴장을 의미한다. 경제 변동이 곧 사회적 갈등을 악화시킨다는 이야기다. 빈부 격차가 커지면 소수 민족 집단을 적대적으로 바라볼 가능성이 커진다는 이야기(829쪽)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영토 확장이든 시장 개척이든 경제적인 이유는 모든 전쟁의 오래된 동인(動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은 금발의 독일 혈통만이 누릴 생활공간 확장이 필요했고,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이름의 영토 확장 욕구를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진작부터 충분히 넓은 땅을 지니고 있었던 스탈린의 경우에는 땅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이미 타민족을 침공해 정복할 만큼 강대하지만, 바로 그 강대함으로 인해 생활공간이 협소해졌으므로 너희 영토를 침공했노라고 선포하는 것보다 더 격렬한 아전인수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억울하면 너희도 힘을 갖추라"는 힘의 논리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전쟁의 기원을 설파하는 이 책의 중요한 특징은 무엇보다도 저자가 집요하게 펼치고 있는 제국론이다. 국제정치학에서는 '패권 안정론'이라는 이론이 있는 모양인데, 즉 강력한 패권 국가가 존재했을 때 오히려 평화가 유지되었다는 이론이 그것이다. 전쟁과 내전 그리고 동족 학살은 제국의 지배로 인해 억제될 수 있다는 것이 제국 안정론이다. 우리 사회는 "핵우산", 그런 말로 이미 제국 안정론에 정서적으로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운 이론이 아니다. 어쨌거나 저자는 양차 대전 중 특히 제2차 세계 대전은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 등 식민지 시대의 제국들이 쇠퇴하고 독일, 일본, 소련 등의 새 제국들이 등장하면서 권력의 공백지대가 만들어졌고, 그곳에서 피가 분출했다고 보았다.

니체는 일찍부터 "민족주의와 민족국가가 초월적 가치와 목적을 부여받고는 보편적 형제애와 민주주의, 사회주의의 깃발 아래 경쟁자 살육과 영토의 정복을 향해 나아갈 것이라고 예언"(<열정적 고전 읽기 : 철학/과학>(조중걸 지음, 프로네시스 펴냄), 113쪽)한 적이 있었다. 그의 불길한 예언을 히틀러는 여과없이 접수했다.

히틀러는 흔히 '초인(超人, overman/superman)'이라 널리 알려져 있지만 기실은 진의(眞意)의 번역 불가능성으로 '위버멘슈(Übermensch)'라 부를 수밖에 없는, 자기 초극이 완료된 니체의 이상주의적 인간을 자신과 동일시했다. 히틀러는 위버멘슈 사상을 아리안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로 결합해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극한의 악을 저질렀다. 한국에서는 널리 읽히지 않은 오스발트 슈펭글러라는 고독한 철학자가 있었는데, 그는 니체와 인종주의자였던 바그너에 의존했으며, 그 역시 니체처럼 나치에 미친 영향력이 심대했다.

슈펭글러는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문화의 흥망성쇠에 대한 특이한 이론을 담은 <서구의 몰락>을 통해 1914년 이전에 서구가 성취한 모든 것을 뒤집은 양차 대전의 격변을 정확하게 예언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 세기는 서양 세계의 쇠퇴기였다. 물질주의와 무신론, 사회주의, 의회주의 그리고 돈의 승리를 거둔 세기였다. 그러나 이번 세기엔 피와 본능이 돈과 지성을 상대로 자신의 권리를 되찾을 것이다.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민주주의 시대, 인도주의와 자유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 대중은 체념하고 강자인 시저의 승리를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복종할 것이다." (829쪽)

슈펭글러는 자신이 예측한 반발이 쇠퇴기에 접어든 문명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대도시에서 전쟁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퍼거슨은 그러나 서구가 슈펭글러가 생각했던 대로 몰락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그보다는 슈펭글러가 등장을 예측했던 '새로운 시저들'의 피 묻은 권력이 되살아나고 그들이 '거대 도시의 이성주의'를 공격하면서, 서양의 물질적,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도덕적 몰락이 가속화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일견 그럴 듯해 보이지만, 패권 안정론은 착한 백인들(제2차 세계 대전 때의 연합국)이 사악한 제3제국의 파시스트들을 격퇴하고, 종전 이후 길고도 음습했던 냉전을 거치고 나서, 소련마저 몰락시킨 뒤 러시아라는 2등 국가를 출현시켰으므로 작금의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가 필연적이라는 위험한 이론으로 전개될 수도 있어 불안하고 불길한 구석도 있다. 제국의 안녕이 평화를 보장한다고? 이런 해괴한 궤변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제국의 속성 자체가 폭력과 수탈에 의해서만 지탱되는 반(反) 평화적 체제가 아닌가?

그러나 21세기에 접어든 오늘, 건국 이래 쉼 없이 전쟁에 개입하거나 전쟁을 일으키는 것으로 존속했던 강대국 미국 제국의 쇠퇴설이 이제는 여러 부문에서 공공연하게 예측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출판사가 공들여 작성한 이 책에 대한 성실한 보도 자료는 새로운 제국으로 급하게 부상한 중국과 쇠퇴의 징후를 드러내고 있는 미국 제국의 예상되는 충돌, 그 피치 못할 역학관계에 지정학적으로 끼어 있는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우려를 담고 있다. 그 불안은 두말할 것 없이 제국 쇠퇴론에 의거한 불안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도 소개되고 있고, 볼셰비키 정권에 의해 포시예트 근처에 고려인 자치주를 설립하는 허가를 받았다는 등 한반도(한민족)에 대한 언급도 흔치 않게 보인다. 그러나 (기대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만) 퍼거슨은 일제 36년 동안 한반도의 조선 사람들이 겪었던 고통에 대해서는 무심하다. 하기는 '제국의 일원'인 그가 대영제국이 동인도회사를 통해 300여 년간 인도를 수탈한 데 대해서도 무심한 것을 염두에 두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한반도에 관한 퍼거슨의 논평 중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분단이 이승만과 김일성의 야심 때문이라는 구절이다. 1947년 미국은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싶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의 치명적 결함인 소련이 승전국의 수혜를 받게 된 게 배가 아파 마지못해 주둔하게 되었고, 분단은 오로지 남북의 두 야심가로 인해 고착되었다는 것이다.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역사학자의 이런 무책임한 이해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그러니 역사는 언제나 역사 서술자의 아전인수로 해석될 수밖에 없고, 역사책은 설사 사마천이라 하더라도 언제나 한계를 안고 있는 미완의 작업일 수밖에 없다.

'학살'은 인간 본성인가?

1931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에게 반전 투쟁의 일환으로 세계적 지식인 단체를 함께 세워 종교 집단의 도움을 받아보자는 제안을 한다. 유명한 '아인슈타인-프로이트 편지 대담'이다. 이때 프로이트는 인간에는 보존하고 통합하려는 '성애 본능'에 반대되는 파괴하고 죽이는 인간의 영원한 본능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회의적인 답변을 보낸다.

"성애 본능은 살아가려는 노력을 증명합니다. 죽음 본능은 특정 기관의 도움으로 외부 물체를 향해 행동하면 파괴 충동이 됩니다. 즉, 살아 있는 존재는 이질적인 집단을 파괴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지켜내는 것입니다. (…) 요컨대 우리가 인간의 공격적인 성향을 억누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 왜 당신과 나, 그리고 다른 많은 이들이 전쟁을 단순히 인생의 가증스러운 요구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에 격렬하게 반대해야 합니까? 전쟁은 충분히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생물학적으로 건전하고 실제로 피할 수 없습니다." (816쪽)

앞서 인용했던 난징 대학살의 주범인 마쓰이도 사랑과 학살이 서로 충돌하는 심리 상태라는 것을 내면 깊숙이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에리히 프롬식으로 말하자면 바이오필리아와 네크로필리아가 인간의 피할 수 없는 본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의 평화 제안에 노골적인 짜증을 냈다. (세기의 편지 토론은 몇 차례 더 오고갔는데, <핵전쟁, 우리의 미래는 사라지는가>(아이디오 펴냄)라는 책을 참고하기 바란다.)

퍼거슨은 프로이트의 분석이 비과학적이고 명백히 사색적인 특징을 갖고 있음에도, 에로스(Eros)와 타나토스(Thana)라는 증오심의 본질적인 양면성, 즉 성적인 면과 병적인 면의 결합을 포착해 냄으로써 증오심 자체의 교묘한 성질을 짚어내고 있다고 보고 있다. 레오 톨스토이도 한때 전쟁의 필연성에 대해 슬퍼하면서 말하기를, 이는 "꿀벌이 가을에 서로를 모두 죽이고, 수컷 동물들이 서로를 죽임으로써 그 소명을 다하는 것처럼 기본적인 동물학적 법칙이라 할 수 있다"(<영화 속의 국제 정치>(로버트 그레그 지음, 한울 펴냄), 238쪽)라고 한 적이 있다. 동물행동학자 콘라트 로렌츠와 진화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 또한 전쟁을 야기하는 공격적인 성향이 인간의 본능이라는 논리를 뒷받침한 적이 있다(위의 책, 238쪽).

하지만 우리는 90세의 나이에 반전 시위를 한 버트런드 러셀에 대해서도 기억하고 있고, 핵무기를 지니고 있는 나라의 권력자에게 "차나 한 잔 들면서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자"며 인도산 차 봉지 하나를 배낭에 메고 1만㎞를 걸었던 사티시 쿠마르 같은 평화주의자의 꿈과 실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새만금 간척 사업 이후 한국 사회에 출현한 '생명평화결사'의 도법이나 황대권 같은 이는 "세상의 평화를 위해 내가 먼저 평화가 되겠습니다"라는 메시지를 표하고 있다. 생명평화결사의 부드럽지만 강력한 평화 의지는 지난 번 연평도 포격 사건 때 확전불사의 기염을 토하던 군 당국이나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라틴 속담보다도 피를 흘릴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노력에 값하지 않을까. (생명평화결사 사람들은 2011년 1월 22일 인천 연안 부두에 집결해 연평도 평화 순례를 나설 준비를 하고 있다.)

버나드 쇼, 막심 고리키…얼간이들의 세계사

이 방대한 책이 동원하고 있는 자료의 양은 실로 엄청나다. 퍼거슨은 대체로 2차 자료에 의존했지만 때로는 1차 자료까지 찾아보았다고 하는데, 영국 윈저 성의 왕립문서보관소 자료들은 "여왕 폐하의 자비로운 허락" 덕택에 인용할 수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 외에도 런던의 제국전쟁박물관, 로스차일드 문서 보관소, 워싱턴 DC 조지 워싱턴 대학의 국가안보기록보관소, 위성턴 DC의 미국 홀로코스트 박물관 도서관 및 문서 보관소 등 저자는 서방의 엄청난 기관으로부터 자료 협조를 받았다. 우리는 별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한 출판사의 노력에 힘입어 결국은 '영국 여왕 폐하의 자비'까지 간접적으로 수혜 받는 특별한 체험을 가지게 된다.

전쟁에 관한 책, 인류의 잔혹성에 관한 책은 넘치도록 많다. 하지만, 저자가 10여 년의 긴 세월 동안 열심히 모으고 여러 사람의 각별한 협조 아래 펴낸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가한 끔찍한 폭력을 몸서리치게 추체험하게 된다. 책은 감정이 억제되어 있고 극도의 객관성을 표방하고 있으므로 비록 피비린내로 진동하지는 않지만, 책을 덮은 뒤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인간 학살의 양태들로 인해 꿈자리마저 뒤숭숭해지는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놀랍다면 놀라운 책이다.

그러나 불필요한 개입으로 끝내 패하고 만 미국의 베트남 전쟁 이야기나 미국 CIA가 라틴아메리카에서 군부 독재자를 앞세워 벌인 참혹한 암살과 고문, 또 걸프전, 동티모르 학살, 미국 내 인종 차별로 인한 백인들의 만행 등에 대해서는 언급을 기피하거나, 언급했다고 하더라도 히틀러와 스탈린, 일본군의 폭력에 할애한 방대한 양에 비해 소략하기 그지없다. (이를 놓고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모든 역사책의 한계라 하면, 할 말이 없어지기는 한다.)

저자는 왕립문서보관소의 희귀 자료만 인용한 것은 아니다. 이 책에는 유난히 작가 시인들, 철학자들이 많이 등장한다. 스탈린의 동족 학살을 외면한 채 소련에서 받은 후한 대접에 흥분한 버나드 쇼는 스탈린을 예수에 비견했다(304쪽). 저자는 버나드 쇼를 "얼간이"라고 표현한다. 1980년대까지도 "제3제국을 스탈린의 소련과 비교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던"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에 대한 이야기(328쪽)도 나온다. 참고로 밝히자면, 스탈린 치하에서 숙청당한 희생자는 700만 명에 이른다.

저자는 1929년 강제수용소를 방문한 막심 고리키는 "건강한 수감자들과 쾌적한 감방을 들먹이며 수용소가 마치 목가적인 곳인 양 미화했다"(315쪽)는 사실도 전한다. 스탈린 치하에서 굴락(GULAG : 소련의 강제노동수용소. 앤 애플바움이 쓴 <굴락>(전2권, 드림박스 펴냄)이 있다.)을 거쳐 간 소련인은 1800만 명에 이르렀는데 수용자들은 하루 14~16시간씩 강제 노동을 했으며 탈출자들은 개처럼 쏴 죽였고, 영하 22도에서 알몸으로 한데 세워놓기가 일쑤였고, 때로는 간수들이 자신의 배설물까지 먹였다(315쪽). 고리키와 솔제니친의 차이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어떤 작품도 두려움이 주는 불쾌한 속성을 이보다 더 훌륭하게 그려 내지는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쓴 미하일 볼가코프도 소개되고 있다. 앙리 바르뷔스나 독일 병사로서의 체험을 그린 <서부 전선 이상 없다>의 레마르크는 물론, 단치히(그단스크)를 이야기할 때에는 어김없이 귄터 그라스가 등장했고, 드리나 강 다리에서의 학살을 이야기할 때에는 이보 안드리치가 인용되고 있다. 마르탱 뒤가르, 하이데거와 한나 아렌트, 미하일 숄로호프, 스콧 피츠제럴드, 조지 오웰, 노먼 메일러도 중요하게 언급되고 있다. 너무나 유명한 <역사란 무엇인가>의 에드워드 핼릿 카가 강대국 숭배자라는 사실, 너무나 노골적이어서 구토증이 이는 제국주의자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도 이 책 어디에선가 출현한다. "전체주의가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담을 수 있으며 전체주의 덕분에 그러한 용어들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한 이는 놀랍게도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이었다(341쪽).

작가, 시인 중에는 때로 세계적 명성에 값하는 뛰어난 문재(文才)에도 불구하고 정신 나간 생각과 행보를 밟았던 이들이 언제나 존재했었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양민 학살로 정권을 잡은 이에게 용비어천가를 바친 시인과 작가들이 여전히 베스트셀러 작가의 대접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당대에 그 '얼간이'들이 하늘을 찌를 듯한 명성을 휘날려도 이 세상의 한쪽에서는 생명과 평화에 속했던 문인이었던가, 반생명과 폭력을 방관하거나 지지함으로써 영달을 꾀한 작가였던가를 기억 속에 명토를 박아 놓곤 한다. 실로 이것은 등골 서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담배를 물다

책을 덮을 때, 나는 긴 여행을 마친 것 같은 해방감을 느꼈다. 21세기에도 20세기를 뒤덮던 증오의 기운은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았지만, 그 풍성한 분량이 아니라 처참한 내용 탓에 완독하는 일만으로도 고단했던 지난 세기 인간 잔혹사를 살피는 여정이 끝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만 마지막 쪽에서 나는 망치로 한 대 맞았고, 그 통증은 가히 아연실색할 만했다.

"20세기를 의문의 여지없이 독특한 세기로 만든 두 번째 특징은 겉으로 보기에 문명화된 사회의 지도자들이 이웃 나라 국민들에게 가장 원시적인 살해 본능을 폭발시켰다는 점이다. 이는 여전히 20세기의 역설로 남아 있다. 독일인들은 아마존의 인디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 밑에서 발전된 무기로 무장한 그들이 선사 시대의 동기에 자극 받은 것처럼 동유럽에서 전쟁을 일으켰다." (840쪽)

세상에 이럴 수가? 이 똑똑한 학자가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닐까? 아마존의 인디언들이 언제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여성을 강간하고, 사지를 하나씩 하나씩 자르고, 임신한 여성들의 장기를 꺼내고, 산 채로 해부당한 임신부들의 뱃속에 고양이를 넣고, 톱으로 신체를 양단하고, 어린아이들을 건물에 내던져 죽이거나 허공에 던진 뒤 총질을 해 죽이고, 자신이 살해당해 죽을 구덩이를 파게 한 뒤 목덜미에 총을 쏴죽이고, 사람을 발가벗긴 뒤 독가스실로 넣어 죽이거나 혹은 생체 실험을 했단 말인가?

아마존의 인디언들이 비록 그 잘난 문명 따위는 일으키지 않았지만, 언제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을 갑자기 나병이나 습진으로 여기고 지상에서 말끔히 절멸시켜버려야 한다고 인종 청소를 했단 말인가? 아마존 인디언들에 대한 이런 기막힌 오해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저자는 "유전적으로 인종 간 차이가 거의 없다"(41쪽)는 대전제 아래 히틀러 비판에 소매를 걷어붙이지 않았던가.

문명과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를 지나치게 과신하는 이 머리 좋고 성실한 백인학자가 '제국 쇠퇴 이후의 무정부주의'를 염려하는 제국 안정론을 펼치는 학자라는 것은 책을 통해 이미 느꼈다. 하지만 이 대목을 보면서, 한술 더 떠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인종주의자는 아닌지, 싶었다.

나는 너무나 놀라서 다시 담배를 한 대 빼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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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2013-04-02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비록 그 책을 읽어보진 않았습니다만, 제가 마치 끝까지 다읽고 독후감을 쓰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많은 걸 생각하게 해주시네요.
고맙습니다.

훌륭한 비평 2013-11-24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렇습니다. 직접적으로 읽지 않아도 얼마나 아직도 영국을 비롯해서 그 잘난 서구 선진 문명권의 주류에는 아직도 고치지 못한 타 민족과 사회에 대한 맹목적 오만함과 아전인수의 마인드가 깊게 깔려 있는 지를 짐작해볼 있습니다.

인종주의 문제의 측면에서 보면 우리나라도 알 게 모르게 심각한 한국판의 코리안 나치스 마인드가 깊게 깔려 있습니다. 주변국들에게 온갖 인종적 멸시를 다 당해봤다는 우리나라조차도 단지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것과 피부색이라는 빈약한 잣대만으로 다른 민족들을 깔보고 무시하고 핍박을 벌이고 있습니다.

정작 우리나라도 그 잘난 단일 민족 그 자체도 아니라 혼혈 민족인데도 말이지요. 우리는 일찍부터 인도와 동남아시아와 그 밖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타 민족들과 수천년간 피를 섞어온, 단지 시조를 단군왕검으로 섬기고, 세종대왕님이 창시한 한글로 글을 쓰며, 한국어를 공용어로 쓰는 공통적인 한국 전통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점일 뿐... 결국 우리 민족도 어쩔 수 없이 다민족 문화에 의해 형성되고 변화를 거듭해온 '단일' 민족입니다.

그런 걸 이해하지도 못하고 인종주의를 오히려 일으키고 있는 우리나라 자체도 개구리가 올챙이 적 시절을 기억 못하듯, 우리니라의 형성 과정은 물론, 우리가 주면의 다른 민족들에게 인종적 핍박을 당했던 것도 싸그리 까먹은 채 저 오만한 서구 제국주의의 인종론에 편승해 한 술 더 뜨고 있지요.

특히 미국과의 동맹을 맺으면서 미국의 장점만 골라서 배웠어야 했으나, 태생이 영국인지라 그 유럽제국주의의 오만불손한 인종차별을 답습해왔고, 그런 미국을 우리도 덩달아 답습한 게 된 건 아닌지....

이런 한 부분적인 측면만 하더라도 본 비평을 쓰신 분의 이 비평을 보면서 다시 한번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 보게 됩니다.

깔짝중 2023-07-24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독후감 수준이 단어와 표현에 꽂혀서 말꼬투리나 잡는 수준이 지성이란게 있는지 궁금해서 옛글인데도 댓글 남깁니다.

마지막 부분에서 아마존 부족으로 비유를 한거지 아마존 부족을 인종 차별적으로 본거라고 진심으로 생각하세요?? 글을 읽을때 맥락이라는게 뭔지는 개념이 있어요??

그러는 본인은 한국에 와있는 동남아 외국인노동자들을 볼때 백인들하고 똑같이 ˝외국인˝으로 보나요?
본인 입에 침이라도 바르고 말을 쓰던가 본인은 무슨 인종차별을 안하는 완전 무결한 인간인가봐요?? 혹시 세인트 정도 되시나요??

인종차별적으로 안보더라도 문명들과 그 문명들에 속한 민족간의 우와열은 염연히 존재하는 현실입니다. 유치원생들도 모이면 본능적으로 나누려고 하는 우열을 왜 부정하죠. 본인은 그러면 아마존 부족이 한국보다 발달한 사화라고 봅니까?? 진심이세요?? 제정신이세요????


본인의 거울을 먼저보고 이책을 읽어야지 무슨 제국론을 펴고 있다느니 그런 얄팍한 시각을.... 님이 입고 자고 배우고 살고있는 한국이라는 나라, 자식들에게 알려주는 내용, 아침에 가족들과 밥먹으면서 대화하는 내용, 사상 등등 어느 하나라도 과거 제국들의 영향이 아닌게 단한개라도 있어요??

전근대에는 중화제국 근대이후는 영제국과 미제국
왜 본인의 자화상을 본인이 아니라는거 처럼 부정하지?? 그게 바로 지금 시대에 퍼쟈있는 정신병입니다.

거울속 본인의 모습을 부정하고 저주하면서 사니까 세상 살기가 힘든거라고요.

본인이 누리는 자유는 하나도 포기 안하면서 그걸 부정하는 꼬락서니를 보면 얼마나 불쌍하고 하찮개 보이는지 아세요??

본인이 바로 저 야만적인 제국의 부산물인 자유에서 자라난 ‘자유의 아이‘면서 그 자유의 뿌리를 부정하는 꼴이라니....

캉디드좀 읽어보십시요.
본인같은 도덕주의자, 이상주의자들 읽으라고 쓴 책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