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거창한 책에 맞춰서, 우스꽝스럽지만, 나 역시 덩달아 거창하게 말한다면 '21세기의 첫 10년을 보내는 연말과 새로 맞이한 연초'를 나는 니얼 퍼거슨의 책을 보면서 보냈다.
퍼거슨이 누구인가? 1964년생이라니 나는 그를 내 나이를 기준으로 '젊은 학자'라고 이해한다. 퍼거슨은 영국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교 모들린 칼리지에 장학생으로 입학해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머리가 좋은데다 입학 때부터 졸업 때까지 공부를 잘했다니 성실한 사람이었던 게 틀림없다.
지금은 하버드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이자 비즈니스스쿨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영국의 한 정치평론지는 저자를 '최고 지성 100인'으로 뽑기도 한 모양이고, 역사학자로서는 이채롭게도 '금융'에 관심을 가져서 <금융의 지배>, <현금의 지배> 같은 책도 저술했다. 이런 그의 폭넓은 학문적 관심은 20세기에 유독 대규모로 거듭 일어난 전쟁과 '인종 청소'라 불리는 끔찍한 학살의 원인을 외골수 역사학자와 다르게 살피는 데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 대단한 학자가 실로 여러 기관과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자그마치 10년에 걸쳐 쓴 책은 <증오의 세기>(민음사), 원제는 <The War Of The World : History's Age Of Hatred>이다. 원제를 밝히는 까닭은 번역물의 경우, 붙여진 제목이 때로 원제와 너무 동떨어진 예도 많기 때문이다. 이 책의 한글 제목은 원제를 외면하지 않았다.
|
▲ <증오의 세기 : 20세기는 왜 피로 물들었는가>(니얼 퍼거슨 지음, 이현주 옮김, 민음사). ⓒ민음사 |
문제는 책의 분량이다. 무지막지하게 두꺼운 책이다. 영문으로 된 '자료와 참고 문헌', 그리고 저자의 '감사의 말'까지 합쳐 자그마치 914쪽의 분량이다. 본문만 840쪽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꼭 이 책을 지목해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서적에 어김없이 붙곤 하는 방대한 분량의 '자료와 참고 문헌'은 종이 낭비가 아닌가 싶다.
번역서에 붙여져 있는 영문 참고 문헌과 자료를 참고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라면 원서를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의견은 한글로 된 책에 수록되어 있는 영문 자료까지 챙겨볼 필요를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평범한 독자의 무식한 소견쯤으로 치부해 주기 바랄 뿐이다.
1억8800만 개의 비극
지난 연말과 이번 연초 내내 나는 이 세상에서 두 사람에게 매우 야속했다. 우선 이 서평을 내게 부탁한 '프레시안 books'의 K 기자가 야속했다. 그리고 이 책의 서평을 선뜻 수락한 내 자신이 너무나 야속했다.
나는 담배를 즐겨 피우던 다른 이들처럼 새해 들어 휴연(休煙)을 할 작정이었다. 금연(禁煙)은 너무 높은 산이라 휴연의 언덕쯤은 기어이 오르려고 12월 하순이 되자 굳게 작심하고 있던 터였다. 이 책의 내용이 만약 건강이나 사랑에 관한 책이었다면 어쩌면 휴연에 성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지난 100년간 이 행성에서 일어났던 인간 종끼리 벌였던 끔찍하고 처절하고 지독하고 무서운 살육사가 그 내용이다. 지난 100년의 전쟁사, 혹은 인간이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극한의 잔혹사가 책의 내용이다. 또 책을 덮고 나면 이 책은 일종의 서양인에 시각에 의해 쓰인 '제국론'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어쨌거나 이 골 때리는 책 때문에 휴연하려는 내 새해 결심은 서평을 수락하는 순간 깨져버렸다.
나는 정치학자도 역사가도 아닌 잡글이나 써대는 사람이기에 쓸데없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나 더 보태야겠다. 후다닥 읽어치우기에는 버거운 책이었지만 책을 완독하고도 나는 송고하기로 한 마감일을 못 지킴으로써 K 기자의 마음속에 있었을지도 모를 나에 대한 얼마간의 신용마저 잃어버렸다. 마감을 지키지 못한 데에는 여러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이 나를 너무나 침울하게 만들어 쉽게 원고 작업에 달려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 꼼꼼하고 방대한 살육의 기록은 지난 100년간 두 차례 세계 대전(제1차 세계 대전은 '유럽 전쟁'이라 해야 옳겠지만)과 그 이후에도 끝없이 진행된 '인종 청소' 등으로 죽은 이들을 자그마치 1억6700만 내지 1억880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수치는 저자도 '부록('역사적 관점에서 본 세계 전쟁')에서 밝히고 있듯이 단지 추정치일 뿐이며, 그 이전 전쟁의 사망자 수치는 더욱 믿기 어렵기에 '논란의 여지없이 확실치는 않'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역사가들이 계산한 사망자 수는 대개 뺄셈으로 얻어진다. 즉 인구 조사 수치나 믿을 만한 추정치를 이용할 수 있는 경우, 전쟁이나 다른 폭력 사건 이전의 인구에서 이후의 인구를 빼서 계산한 것이다. 그리고 왕왕, 태어날 수도 있었을 텐데 학살로 인해 태어나지 못한 '사람들'까지 포함하기 때문에 사망자 수가 부풀려지는 경향도 있다(831~832쪽). 설사 부풀려졌다고 해도 이런 추정치가 아주 무책임하다고 비난 받을 수 없을 것이다. 20세기 100년 동안의 폭력의 정도가 그 이전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대량 살상이었다는 사실을 많은 이들이 공감할 것이기 때문이다.
책을 넘길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는 수치가 나오곤 했다. 이 책에 동원된 거의 모든 아라비아 숫자는 책의 쪽수를 제외하고는 사망자를 지칭하는 숫자와 그 연도였다. 책의 어느 쪽을 펼쳐도 쉬지 않고 죽은 이들의 숫자가 박혀 있어 다른 사람을 죽이는 인간의 놀랍고도 무서운 에너지에 전율하게 된다.
나중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여러 곳에서 너무나 잔인하게 서로 죽이고 죽었다는 사실에 대해 무감각해져버려 최초의 놀라움이 퇴색해진 데 대한 색다른 비애감에 젖게 된다. 아우슈비츠에서도 처음에는 사람을 죽이는 일이 너무나 끔찍해 토하고 형장에서 뛰쳐나가는 절멸 부대 나치 병사가 있었다고 하지만, 나중에는 모두 학살에 익숙해져서 농담을 하고 음악을 들으면서도 사람을 죽였다고 하던데, 독자들 역시 100년 동안의 거듭되는 학살의 참극에 익숙해지다 보니 나중에는 몇 만 명의 사람이 죽었다는데도 무덤덤하게 책장을 넘기는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이상한 일은 이 책이 워낙 차분하고 담담한 어조로 학살의 내용을 전달하고 있어서인지 피 냄새가 진동하는 책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책에서 피 냄새가 나지 않는 까닭은 얼핏 보이는 것처럼 저자의 감정 개입이 극도로 억제되어 있기 때문일까? 아니다, 틀린 말이다. 이 세상에 저자의 편견과 감정 개입이 완벽하게 억제된 책이 어디 있을까?
저자는 영국, 미국 등 이른바 연합국 측을 기술할 때와는 달리 추축국(樞軸國) 측인 독일의 히틀러,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를 다룰 때에는 적대감과 혐오감을 감추지 못한다. 사이비과학으로 판명된 우생학이나 인종위생학 따위에 빠져 유대인 절멸 사업을 감행한 광기어린 히틀러를 묘사할 때 특히 그랬다. 그뿐인가. 극동의 황인종인데도 불구하고 세계열강의 각축에 뛰어든 놀라운 일본인에 대한 같잖다는 어조를 딱히 그 표현에서가 아니라 분위기에서 어렵잖게 느낄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영국이나 미국이 지난 세기에 자행한 대단히 못된 짓에 대해 저자는 다루기는 다루되 표가 나도록 관대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분량에서도 그렇고 내용에서도 그랬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 미친 학살극에서 희생되었다는 인간에 대한 절망감도 그것이었지만 책을 읽는 내내, 그리고 마침내 900쪽이 넘는 책을 덮는 순간 내게 엄습한 감정은 영미 제국에 속해 있는 저자의 편견에 대한 불쾌감 같은 것이었다. 학자든 정서적 글을 쓰는 문인이든 이 세상에 누가 편견이 완전히 배제된 글을 쓸 수 있을까? 냉정하고 침착한 기술 속에서도 나는 저자에게서 끝없이 '백인'을 느껴야 했다. 이를테면 에릭 홉스봄이나 하워드 진에게서는 백인을 느끼지 못했지만 니얼 퍼거슨에게서는 그랬다.
"너무 사랑해서 강간하고 학살했다"
인간의 진보가 확실시되던 20세기 초반에 어떻게 인류 역사상 이토록 끔찍한 최악의 폭력과 살육이 자행될 수 있었는가, 그 원인은 무엇인가?
퍼거슨은 20세기 초반 이 행성에서 벌어진 인간의 인간에 대한 극단적인 잔혹사를 인종과 민족 갈등, 경제적 변동, 제국의 쇠퇴라는 세 가지 원인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실제로 20세기는 인간이 벌인 최대의 야만적 학살이 자행된 양차 세계 대전, 나치와 소련의 대량 인종 청소,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비롯해 멕시코 혁명 전쟁, 중일 전쟁, 난징 대학살, 중동 전쟁, 이란-이라크 전쟁, 아프리카의 내전들, 캄보디아 킬링필드, 미국의 조정에 의한 라틴아메리카의 양민 학살과 역시 미국의 묵시적 허락에 의해 자행된 동티모르 대학살,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앙골라와 보스니아의 폭력 사태, 중국의 문화대혁명 그리고 어김없이 모든 학살 장소에서 자행된 강간 살해와 생체 실험 등으로 얼룩졌다.
그런 점에서 문명의 발달과 진보가 인간의 잔혹성과 야만성을 약화시키리라고 기대했다면 그런 기대에서 비롯된 20세기 전쟁과 학살에 대한 의문은 지나치게 순진하거나 공허한 말장난이 된다. 진보가 곧 '평화의 진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뛰어난 서구 문명은 널리 알려져 있듯이 식민지 착취와 끝 모를 탐욕의 부산물이었기 때문이다. 제국의 역사학자기이 때문일까? 퍼거슨의 경우에는 이른바 좌파 역사학자와 비교했을 때 이런 인식이 매우 미약하다.
그러나 저자는 인종주의의 뿌리, 즉 다른 인종에 대한 증오가 근거 없는 우생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을 풍부한 자료를 동원해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특히 그는 유대인 혐오의 경우, 나치만 어이없고 도착적인 인종 우월주의에 빠져 있었던 게 아니었다는 것을 역설한다. 실제로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한결같이 중증의 유대인 혐오증을 앓고 있었다. 그는 유럽의 보통사람들이 드러내준 유대인 혐오라는 협조가 없었다면 히틀러의 기반이 무너졌을 것이라고 여러 군데에서 강조한다. 다수의 협력자들은 언제나 제국(帝國)의 불가결한 요소였던 것이다. 중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혐오 역시 근거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나치나 유럽의 제국(諸國)들이 유대인을 병균으로 간주했듯이, 일본인은 중국인을 열등한 인간쓰레기로 취급했다.
극동국제군사재판부는 1938년 12월에 일본군이 난징에 입성한 이래 5주 반 동안 계속된 난징 대학살로 26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일본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고 추정했는데, 이는 전체 전쟁 기간에 죽은 영국 민간인의 네 배가 넘는 수치였다(630쪽). 8000~2만 명이 강간을 당했고, 하룻밤에 평균 1000여 건의 강간 학살이 일어났다. 강간 직후 곧바로 학살로 이어진 '성적 살인(lust murder)'은 기실 일본군만의 특성은 아니었다. 유럽에서도 소련에서도 남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저자는 난징 대학살을 에도 말기(메이지 이전)의 토착 문화와 빌려온 독일의 인종 이론이 뒤섞여 일어났다(632쪽)고 보고 있다. 경악할 일은 전쟁이 끝난 뒤, 난징의 강간과 학살로 교수형을 선고 받은 전범 마쓰이가 재판정에서 한 말이다.
"일본과 중국의 투쟁은 언제나 '아시아계 가문' 내 형제들의 다툼이었다. (…) 긴 세월 동안 나는 이 전쟁을 중국인들이 자기반성을 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그들을 증오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다." (633~634쪽)
사랑하기 때문에 2만여 명의 중국인을 강간하고 학살하고, 더러는 일본도(日本刀)만으로 누가 먼저 더 많은 한족들의 머리를 벨 수 있는지 장교들이 경기도 벌였다. 100명의 비무장 중국인의 목을 치는 경기에서 어떤 장교가 이겼는지 쉽게 합의가 안 되자 죽일 희생자들의 숫자를 다시 150명으로 늘렸고, 총 500명의 목숨이 필요했던 이 참살 경기는 일본 언론에 의해 마치 스포츠 중계하듯 보도되었다. ("중국인 100명 죽이기 시합에 나선 중위들이 호각지세의 실력을 보여주다", <도쿄니치니치신문(東京日日新聞)> 1938년 12월 7일자), 이 모두가 일본인이 중국인을 오래된 형제로서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저지른 사랑의 행위였단 말인가? 이 도착적인 자기변명은 인간이란 불가사의한 존재에 대해 절망하게 만든다. 저자는 풍성한 자료를 동원해 거듭 강조한다.
"다른 인간을 열등하고 유해한 종, 즉 단순한 해충으로 간주하는 심리는 20세기의 전쟁이 그토록 폭력적이었던 결정적인 이유였다." (633쪽)
제국이 평화를 보장한다?
퍼거슨은 전쟁과 학살이 자행되는 또 하나의 원인으로 경제적 변동을 든다. 소련, 독일, 일본 등 제국주의자들이 전쟁을 일으킨 한결같은 명분이 '생활공간의 확장'이었으므로, 어렵게 말할 것 없이 이는 열강의 자원 착취 욕구를 에둘러 한 표현이다.
그가 말하는 경제적 변동은 경제성장률, 가격, 금리, 고용 변화의 빈도와 진폭 그리고 그와 관련된 모든 사회적 압력과 긴장을 의미한다. 경제 변동이 곧 사회적 갈등을 악화시킨다는 이야기다. 빈부 격차가 커지면 소수 민족 집단을 적대적으로 바라볼 가능성이 커진다는 이야기(829쪽)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영토 확장이든 시장 개척이든 경제적인 이유는 모든 전쟁의 오래된 동인(動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은 금발의 독일 혈통만이 누릴 생활공간 확장이 필요했고,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이름의 영토 확장 욕구를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진작부터 충분히 넓은 땅을 지니고 있었던 스탈린의 경우에는 땅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이미 타민족을 침공해 정복할 만큼 강대하지만, 바로 그 강대함으로 인해 생활공간이 협소해졌으므로 너희 영토를 침공했노라고 선포하는 것보다 더 격렬한 아전인수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억울하면 너희도 힘을 갖추라"는 힘의 논리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전쟁의 기원을 설파하는 이 책의 중요한 특징은 무엇보다도 저자가 집요하게 펼치고 있는 제국론이다. 국제정치학에서는 '패권 안정론'이라는 이론이 있는 모양인데, 즉 강력한 패권 국가가 존재했을 때 오히려 평화가 유지되었다는 이론이 그것이다. 전쟁과 내전 그리고 동족 학살은 제국의 지배로 인해 억제될 수 있다는 것이 제국 안정론이다. 우리 사회는 "핵우산", 그런 말로 이미 제국 안정론에 정서적으로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운 이론이 아니다. 어쨌거나 저자는 양차 대전 중 특히 제2차 세계 대전은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 등 식민지 시대의 제국들이 쇠퇴하고 독일, 일본, 소련 등의 새 제국들이 등장하면서 권력의 공백지대가 만들어졌고, 그곳에서 피가 분출했다고 보았다.
니체는 일찍부터 "민족주의와 민족국가가 초월적 가치와 목적을 부여받고는 보편적 형제애와 민주주의, 사회주의의 깃발 아래 경쟁자 살육과 영토의 정복을 향해 나아갈 것이라고 예언"(<열정적 고전 읽기 : 철학/과학>(조중걸 지음, 프로네시스 펴냄), 113쪽)한 적이 있었다. 그의 불길한 예언을 히틀러는 여과없이 접수했다.
히틀러는 흔히 '초인(超人, overman/superman)'이라 널리 알려져 있지만 기실은 진의(眞意)의 번역 불가능성으로 '위버멘슈(Übermensch)'라 부를 수밖에 없는, 자기 초극이 완료된 니체의 이상주의적 인간을 자신과 동일시했다. 히틀러는 위버멘슈 사상을 아리안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로 결합해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극한의 악을 저질렀다. 한국에서는 널리 읽히지 않은 오스발트 슈펭글러라는 고독한 철학자가 있었는데, 그는 니체와 인종주의자였던 바그너에 의존했으며, 그 역시 니체처럼 나치에 미친 영향력이 심대했다.
슈펭글러는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문화의 흥망성쇠에 대한 특이한 이론을 담은 <서구의 몰락>을 통해 1914년 이전에 서구가 성취한 모든 것을 뒤집은 양차 대전의 격변을 정확하게 예언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 세기는 서양 세계의 쇠퇴기였다. 물질주의와 무신론, 사회주의, 의회주의 그리고 돈의 승리를 거둔 세기였다. 그러나 이번 세기엔 피와 본능이 돈과 지성을 상대로 자신의 권리를 되찾을 것이다.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민주주의 시대, 인도주의와 자유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 대중은 체념하고 강자인 시저의 승리를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복종할 것이다." (829쪽)
슈펭글러는 자신이 예측한 반발이 쇠퇴기에 접어든 문명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대도시에서 전쟁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퍼거슨은 그러나 서구가 슈펭글러가 생각했던 대로 몰락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그보다는 슈펭글러가 등장을 예측했던 '새로운 시저들'의 피 묻은 권력이 되살아나고 그들이 '거대 도시의 이성주의'를 공격하면서, 서양의 물질적,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도덕적 몰락이 가속화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일견 그럴 듯해 보이지만, 패권 안정론은 착한 백인들(제2차 세계 대전 때의 연합국)이 사악한 제3제국의 파시스트들을 격퇴하고, 종전 이후 길고도 음습했던 냉전을 거치고 나서, 소련마저 몰락시킨 뒤 러시아라는 2등 국가를 출현시켰으므로 작금의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가 필연적이라는 위험한 이론으로 전개될 수도 있어 불안하고 불길한 구석도 있다. 제국의 안녕이 평화를 보장한다고? 이런 해괴한 궤변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제국의 속성 자체가 폭력과 수탈에 의해서만 지탱되는 반(反) 평화적 체제가 아닌가?
그러나 21세기에 접어든 오늘, 건국 이래 쉼 없이 전쟁에 개입하거나 전쟁을 일으키는 것으로 존속했던 강대국 미국 제국의 쇠퇴설이 이제는 여러 부문에서 공공연하게 예측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출판사가 공들여 작성한 이 책에 대한 성실한 보도 자료는 새로운 제국으로 급하게 부상한 중국과 쇠퇴의 징후를 드러내고 있는 미국 제국의 예상되는 충돌, 그 피치 못할 역학관계에 지정학적으로 끼어 있는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우려를 담고 있다. 그 불안은 두말할 것 없이 제국 쇠퇴론에 의거한 불안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도 소개되고 있고, 볼셰비키 정권에 의해 포시예트 근처에 고려인 자치주를 설립하는 허가를 받았다는 등 한반도(한민족)에 대한 언급도 흔치 않게 보인다. 그러나 (기대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만) 퍼거슨은 일제 36년 동안 한반도의 조선 사람들이 겪었던 고통에 대해서는 무심하다. 하기는 '제국의 일원'인 그가 대영제국이 동인도회사를 통해 300여 년간 인도를 수탈한 데 대해서도 무심한 것을 염두에 두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한반도에 관한 퍼거슨의 논평 중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분단이 이승만과 김일성의 야심 때문이라는 구절이다. 1947년 미국은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싶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의 치명적 결함인 소련이 승전국의 수혜를 받게 된 게 배가 아파 마지못해 주둔하게 되었고, 분단은 오로지 남북의 두 야심가로 인해 고착되었다는 것이다.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역사학자의 이런 무책임한 이해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그러니 역사는 언제나 역사 서술자의 아전인수로 해석될 수밖에 없고, 역사책은 설사 사마천이라 하더라도 언제나 한계를 안고 있는 미완의 작업일 수밖에 없다.
'학살'은 인간 본성인가?
1931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에게 반전 투쟁의 일환으로 세계적 지식인 단체를 함께 세워 종교 집단의 도움을 받아보자는 제안을 한다. 유명한 '아인슈타인-프로이트 편지 대담'이다. 이때 프로이트는 인간에는 보존하고 통합하려는 '성애 본능'에 반대되는 파괴하고 죽이는 인간의 영원한 본능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회의적인 답변을 보낸다.
"성애 본능은 살아가려는 노력을 증명합니다. 죽음 본능은 특정 기관의 도움으로 외부 물체를 향해 행동하면 파괴 충동이 됩니다. 즉, 살아 있는 존재는 이질적인 집단을 파괴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지켜내는 것입니다. (…) 요컨대 우리가 인간의 공격적인 성향을 억누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 왜 당신과 나, 그리고 다른 많은 이들이 전쟁을 단순히 인생의 가증스러운 요구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에 격렬하게 반대해야 합니까? 전쟁은 충분히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생물학적으로 건전하고 실제로 피할 수 없습니다." (816쪽)
앞서 인용했던 난징 대학살의 주범인 마쓰이도 사랑과 학살이 서로 충돌하는 심리 상태라는 것을 내면 깊숙이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에리히 프롬식으로 말하자면 바이오필리아와 네크로필리아가 인간의 피할 수 없는 본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의 평화 제안에 노골적인 짜증을 냈다. (세기의 편지 토론은 몇 차례 더 오고갔는데, <핵전쟁, 우리의 미래는 사라지는가>(아이디오 펴냄)라는 책을 참고하기 바란다.)
퍼거슨은 프로이트의 분석이 비과학적이고 명백히 사색적인 특징을 갖고 있음에도, 에로스(Eros)와 타나토스(Thana)라는 증오심의 본질적인 양면성, 즉 성적인 면과 병적인 면의 결합을 포착해 냄으로써 증오심 자체의 교묘한 성질을 짚어내고 있다고 보고 있다. 레오 톨스토이도 한때 전쟁의 필연성에 대해 슬퍼하면서 말하기를, 이는 "꿀벌이 가을에 서로를 모두 죽이고, 수컷 동물들이 서로를 죽임으로써 그 소명을 다하는 것처럼 기본적인 동물학적 법칙이라 할 수 있다"(<영화 속의 국제 정치>(로버트 그레그 지음, 한울 펴냄), 238쪽)라고 한 적이 있다. 동물행동학자 콘라트 로렌츠와 진화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 또한 전쟁을 야기하는 공격적인 성향이 인간의 본능이라는 논리를 뒷받침한 적이 있다(위의 책, 238쪽).
하지만 우리는 90세의 나이에 반전 시위를 한 버트런드 러셀에 대해서도 기억하고 있고, 핵무기를 지니고 있는 나라의 권력자에게 "차나 한 잔 들면서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자"며 인도산 차 봉지 하나를 배낭에 메고 1만㎞를 걸었던 사티시 쿠마르 같은 평화주의자의 꿈과 실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새만금 간척 사업 이후 한국 사회에 출현한 '생명평화결사'의 도법이나 황대권 같은 이는 "세상의 평화를 위해 내가 먼저 평화가 되겠습니다"라는 메시지를 표하고 있다. 생명평화결사의 부드럽지만 강력한 평화 의지는 지난 번 연평도 포격 사건 때 확전불사의 기염을 토하던 군 당국이나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라틴 속담보다도 피를 흘릴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노력에 값하지 않을까. (생명평화결사 사람들은 2011년 1월 22일 인천 연안 부두에 집결해 연평도 평화 순례를 나설 준비를 하고 있다.)
버나드 쇼, 막심 고리키…얼간이들의 세계사
이 방대한 책이 동원하고 있는 자료의 양은 실로 엄청나다. 퍼거슨은 대체로 2차 자료에 의존했지만 때로는 1차 자료까지 찾아보았다고 하는데, 영국 윈저 성의 왕립문서보관소 자료들은 "여왕 폐하의 자비로운 허락" 덕택에 인용할 수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 외에도 런던의 제국전쟁박물관, 로스차일드 문서 보관소, 워싱턴 DC 조지 워싱턴 대학의 국가안보기록보관소, 위성턴 DC의 미국 홀로코스트 박물관 도서관 및 문서 보관소 등 저자는 서방의 엄청난 기관으로부터 자료 협조를 받았다. 우리는 별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한 출판사의 노력에 힘입어 결국은 '영국 여왕 폐하의 자비'까지 간접적으로 수혜 받는 특별한 체험을 가지게 된다.
전쟁에 관한 책, 인류의 잔혹성에 관한 책은 넘치도록 많다. 하지만, 저자가 10여 년의 긴 세월 동안 열심히 모으고 여러 사람의 각별한 협조 아래 펴낸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가한 끔찍한 폭력을 몸서리치게 추체험하게 된다. 책은 감정이 억제되어 있고 극도의 객관성을 표방하고 있으므로 비록 피비린내로 진동하지는 않지만, 책을 덮은 뒤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인간 학살의 양태들로 인해 꿈자리마저 뒤숭숭해지는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놀랍다면 놀라운 책이다.
그러나 불필요한 개입으로 끝내 패하고 만 미국의 베트남 전쟁 이야기나 미국 CIA가 라틴아메리카에서 군부 독재자를 앞세워 벌인 참혹한 암살과 고문, 또 걸프전, 동티모르 학살, 미국 내 인종 차별로 인한 백인들의 만행 등에 대해서는 언급을 기피하거나, 언급했다고 하더라도 히틀러와 스탈린, 일본군의 폭력에 할애한 방대한 양에 비해 소략하기 그지없다. (이를 놓고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모든 역사책의 한계라 하면, 할 말이 없어지기는 한다.)
저자는 왕립문서보관소의 희귀 자료만 인용한 것은 아니다. 이 책에는 유난히 작가 시인들, 철학자들이 많이 등장한다. 스탈린의 동족 학살을 외면한 채 소련에서 받은 후한 대접에 흥분한 버나드 쇼는 스탈린을 예수에 비견했다(304쪽). 저자는 버나드 쇼를 "얼간이"라고 표현한다. 1980년대까지도 "제3제국을 스탈린의 소련과 비교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던"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에 대한 이야기(328쪽)도 나온다. 참고로 밝히자면, 스탈린 치하에서 숙청당한 희생자는 700만 명에 이른다.
저자는 1929년 강제수용소를 방문한 막심 고리키는 "건강한 수감자들과 쾌적한 감방을 들먹이며 수용소가 마치 목가적인 곳인 양 미화했다"(315쪽)는 사실도 전한다. 스탈린 치하에서 굴락(GULAG : 소련의 강제노동수용소. 앤 애플바움이 쓴 <굴락>(전2권, 드림박스 펴냄)이 있다.)을 거쳐 간 소련인은 1800만 명에 이르렀는데 수용자들은 하루 14~16시간씩 강제 노동을 했으며 탈출자들은 개처럼 쏴 죽였고, 영하 22도에서 알몸으로 한데 세워놓기가 일쑤였고, 때로는 간수들이 자신의 배설물까지 먹였다(315쪽). 고리키와 솔제니친의 차이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어떤 작품도 두려움이 주는 불쾌한 속성을 이보다 더 훌륭하게 그려 내지는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쓴 미하일 볼가코프도 소개되고 있다. 앙리 바르뷔스나 독일 병사로서의 체험을 그린 <서부 전선 이상 없다>의 레마르크는 물론, 단치히(그단스크)를 이야기할 때에는 어김없이 귄터 그라스가 등장했고, 드리나 강 다리에서의 학살을 이야기할 때에는 이보 안드리치가 인용되고 있다. 마르탱 뒤가르, 하이데거와 한나 아렌트, 미하일 숄로호프, 스콧 피츠제럴드, 조지 오웰, 노먼 메일러도 중요하게 언급되고 있다. 너무나 유명한 <역사란 무엇인가>의 에드워드 핼릿 카가 강대국 숭배자라는 사실, 너무나 노골적이어서 구토증이 이는 제국주의자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도 이 책 어디에선가 출현한다. "전체주의가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담을 수 있으며 전체주의 덕분에 그러한 용어들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한 이는 놀랍게도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이었다(341쪽).
작가, 시인 중에는 때로 세계적 명성에 값하는 뛰어난 문재(文才)에도 불구하고 정신 나간 생각과 행보를 밟았던 이들이 언제나 존재했었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양민 학살로 정권을 잡은 이에게 용비어천가를 바친 시인과 작가들이 여전히 베스트셀러 작가의 대접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당대에 그 '얼간이'들이 하늘을 찌를 듯한 명성을 휘날려도 이 세상의 한쪽에서는 생명과 평화에 속했던 문인이었던가, 반생명과 폭력을 방관하거나 지지함으로써 영달을 꾀한 작가였던가를 기억 속에 명토를 박아 놓곤 한다. 실로 이것은 등골 서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담배를 물다
책을 덮을 때, 나는 긴 여행을 마친 것 같은 해방감을 느꼈다. 21세기에도 20세기를 뒤덮던 증오의 기운은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았지만, 그 풍성한 분량이 아니라 처참한 내용 탓에 완독하는 일만으로도 고단했던 지난 세기 인간 잔혹사를 살피는 여정이 끝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만 마지막 쪽에서 나는 망치로 한 대 맞았고, 그 통증은 가히 아연실색할 만했다.
"20세기를 의문의 여지없이 독특한 세기로 만든 두 번째 특징은 겉으로 보기에 문명화된 사회의 지도자들이 이웃 나라 국민들에게 가장 원시적인 살해 본능을 폭발시켰다는 점이다. 이는 여전히 20세기의 역설로 남아 있다. 독일인들은 아마존의 인디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 밑에서 발전된 무기로 무장한 그들이 선사 시대의 동기에 자극 받은 것처럼 동유럽에서 전쟁을 일으켰다." (840쪽)
세상에 이럴 수가? 이 똑똑한 학자가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닐까? 아마존의 인디언들이 언제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여성을 강간하고, 사지를 하나씩 하나씩 자르고, 임신한 여성들의 장기를 꺼내고, 산 채로 해부당한 임신부들의 뱃속에 고양이를 넣고, 톱으로 신체를 양단하고, 어린아이들을 건물에 내던져 죽이거나 허공에 던진 뒤 총질을 해 죽이고, 자신이 살해당해 죽을 구덩이를 파게 한 뒤 목덜미에 총을 쏴죽이고, 사람을 발가벗긴 뒤 독가스실로 넣어 죽이거나 혹은 생체 실험을 했단 말인가?
아마존의 인디언들이 비록 그 잘난 문명 따위는 일으키지 않았지만, 언제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을 갑자기 나병이나 습진으로 여기고 지상에서 말끔히 절멸시켜버려야 한다고 인종 청소를 했단 말인가? 아마존 인디언들에 대한 이런 기막힌 오해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저자는 "유전적으로 인종 간 차이가 거의 없다"(41쪽)는 대전제 아래 히틀러 비판에 소매를 걷어붙이지 않았던가.
문명과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를 지나치게 과신하는 이 머리 좋고 성실한 백인학자가 '제국 쇠퇴 이후의 무정부주의'를 염려하는 제국 안정론을 펼치는 학자라는 것은 책을 통해 이미 느꼈다. 하지만 이 대목을 보면서, 한술 더 떠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인종주의자는 아닌지, 싶었다.
나는 너무나 놀라서 다시 담배를 한 대 빼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