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도 기업인도 연예인도 '악플' 범벅을 피해갈 수 없는 인터넷 공간에서 그의 이름만은 유독 청정한 검색 결과를 자랑한다. 여대생의 롤 모델 1위이자 톱스타 이효리도 만나고 싶다는 한비야 씨. '닮고 싶은' 포인트는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 경력과 오지에서의 경험이겠지만, 모두가 그처럼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을 걸을 수야 없다.

다만 한비야처럼 '책'을 집어들 순 있다.

"독서라는 기적. 나는 기호들이 까맣게 적힌 종이뭉치 하나를 건네받는다. 나는 그 종이들을 들여다본다. 그런데 기막힌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프랑스의 소설가 미셸 투르니에가 이런 말도 하지 않았던가. 책 읽기가 기적이란다. 한비야 씨의 남다른 여행 경험 밑에도 독서라는 내공의 원천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1년에 책 100권 읽기 운동 본부가 생겼으면 좋겠다. 내가 본부장을 맡겠다"는 말을 달고 산다. 열일곱 고교 시절, 국어 선생님이 추천해 준 '100권 목록'을 마스터하며 현재까지 매해 그것을 실천해 왔다는 그에게 어울리는 직책이다.

금연도 다이어트도 좋지만 이번 새해, 책 100권 읽기 계획은 어떨지. 유명 인사를 '무작정' 따라 하기는 거부감이 든다면, '작정'하고 따져 보면 될 일이다. 일단 결코 손해 볼 일 없는 계획이다. 돈도 많이 들지 않으며, 공간은 내 방이면 족하다. 또 '인생 선배'들이 그토록 입 모아 추천하지 않던가. 책 좀 읽으라고.

그렇다면 100권이 적절한가. 글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내 순위를 그렇게나 신경 쓰는 나라에서 성인 연평균 독서량이 꼴찌 수준인 10.9권이라니, 100권은 과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자칫하다 독서가 아닌 흰 바탕에 검은 글씨 구경 된다. 그러나 한비야 씨는 "권수 세는 데 매몰돼도 좋으니 일단 시작해 보라"고 등을 떠민다.



▲ 한 해 책 100권 읽기를 적극 권장하는 한비야 씨. ⓒ뉴시스


책 담당 기자가 글쎄…

마침 서평 팀 3개월 차로 접어든 기자, 매주 밀려드는 수십 권의 신간 속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다. 처음에는 신간 종이 냄새만 맡아도 쪼르르 달려갔지만, 이제는 책상을 메운 책들한테 멱살이라도 잡힐 것 같아 현기증 난다.

지난해 10월 말 선물 받은 100칸짜리 독서 일기장을 열어 보니 문제는 더 심각했다. 2개월 간 얼추 4분의 1은 채웠지만 분야는 문학과 인문·사회과학 단 두 개였고, 그마저 내용이 제대로 떠오르는 건 서평을 쓴 책뿐이었다. 2년 전도 아니고 2개월 전인데!

앞장을 칼로 잘라내고 시작 일시를 2011년 1월로 고쳐 썼다. 계획이 아니라 망상에 가까웠던 다른 새해 계획은 싹 다 잊기로 했다. 일단 이 100칸이나 '제대로' 채워보자. 트위터 모임 '소셜 북-함께 읽어요(☞바로 가기)'에도 이름을 올렸다.

가입한 249명이 신앙 간증이라도 하듯 모두 "이번 해엔 꼭 읽고야 말겠다"며 2011년 처음 잡은 책 제목을 소개한다. 기자도 빌 헤이스의 <불면증과의 동침>(이지윤 옮김, 사이언스 북스 펴냄)을 마중물로 부으며 100권 읽기에 돌입했다.



ⓒ프레시안(최형락)


왜 '100권'인가?

파워 트위터러 '소셜홀릭'(@Social_Holic)은 지난해 12월 31일 "2011년에 책 100권 완독하실 분은 제게 답 글 주세요~"라는 글을 남기면서 이 모임을 개설했다. 소셜 홀릭도 100권 읽기 도전은 이번이 처음이란다. "왜 100권이냐"는 질문에 그는 "100권에 도전하면 1년 동안 최소 2~30권은 읽으리라고 본다"며 "함께 읽기를 통해 다독을 장려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올해 역점 사업으로 구내 독서 문화 정착을 추진하는 서울 서대문구의 운동 이름에도 '100권'이 붙었다. 문석진 서대문구청장의 선거 당시 공약이기도 했던 '북 스타트 100권 읽기 운동'이 그것이다. 도서관 추천 도서를 읽은 구민들이 도서관 스태프들과 책과 관련한 간단한 대화를 나누면 도장을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진해 '기적의 도서관'을 벤치마킹했다. 문화과 김민호 주무관은 "책 많이 읽자는 막연한 슬로건은 너무 소극적인 행정"이라며 "100권을 완벽하게 읽어야 한다는 건 아니고, 상징적인 의미"라고 설명했다.

새로운 도전을 위해 구랍 말 중국으로 떠난 한비야 씨에게 소식을 전했더니 "그 운동들, 더 부추겨야 한다"며 기뻐한다. 한 씨가 보는 '100권' 역시 상징적이지만 좀 더 구체적이다. 그는 "평생, 손에서 책을 놓지 않게 되는, 늘 책 주변에 둘러싸여있을 수 있는 숫자"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만만치 않은 것은 알지만, 목표를 세울 땐 약간 높게 잡는 것이 좋다"고 덧붙였다.

실제 경험자에게 물었더니 역시 '현실적인 목표'라는 답이 돌아왔다. 한 씨의 영향을 받아 목록 100칸이 담긴 독서 일기장 <보물상자>(샨티 펴냄)를 펴내기도 한 '도서관친구들' 여희숙 대표는 "매일 30분 이상 읽으면 충분히 읽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2007년 마음먹고 인문학 관련 책읽기에 도전했던 대학생 윤원장(26) 씨도 무난하게 102권을 독파했다. 대학생 홍명교(29) 씨는 20개월 군 생활 동안 자투리 시간을 아껴가며 목표했던 200권 가운데 192권을 읽었다.

물론 야근과 회식에서 자유롭지 못한 일반 직장인에게 대학생들과 같은 처방을 내놓긴 어렵다. 다만 이들 모두 "목표가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일단 세워 보고 나니 달성하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IT 업종 종사자 유현지(35·가명) 씨는 "아무리 느슨하더라도 계획이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대학생 박시열(26) 씨는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지인들에게 추천하고 싶다"고 당부했다.

"숫자? 집착해도 괜찮다"

그러나 계획 독서에 대한 거부 반응도 만만찮다. 고교 시절부터 다독가로, 아직 학생이라 독서에 여유만만인 지인 A는 기자의 계획에 코웃음을 친다. '즐거운 독서'를 강조하는 그는 "그러다 나중엔 리스트 채우느라 얇은 책만 울며 겨자 먹기로 보는 것 아니냐"며 90권이 넘어가는 만화책 <더 파이팅>부터 읽으라고 야단이다. 확실히 조바심 잘 타는 성격상 숫자에 매몰될 공산이 크다.



▲ 여희숙 도서관친구들 대표. ⓒ프레시안(최형락)

그러나 도서관친구들 여희숙 대표는 자신도 원래 숫자를 정해 놓고 하는 독서에 거부 반응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으나, 교사로 재직하던 당시 '100권 계획'으로 독서 지도를 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추천 도서를 하나씩 읽어 가는 과정에서 너무도 기뻐했기 때문이다. 여 대표는 한 마디로 정리한다.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한비야 씨는 아예 "권수에 집착해 봐도 괜찮다. 무조건 시작하라"고 말한다. 숫자에 매몰되는 것도 시행착오요, 사람에 따라선 최선의 방법이 될 수도 있다는 것. 그는 처음으로 100권 읽기에 도전했던 당시 "영양이 골고루 잡힌 전인적인 독서를 했다고 보긴 어렵다. 일단 100권을 읽는다는 목표를 생각했다"고 말했다. 한 씨의 얘기를 더 들어보자.

"조금도 나쁘지 않아요. '무조건 이번 해엔 100권을 읽겠다'고 결심하면 그렇게 하면 되는 거고, '숫자에만 집착해서 해 보니 안 좋았어'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하면 되는 겁니다. 다독도 하고 독서 내용도 좋으면 완벽하겠지만 일단 하나를 택하세요. 어떤 방법이 하고 난 뒤 가장 기분이 좋은지, 자신이 어떻게 해야 만족하나 연구하면서 일단 시도해 보는 거죠."

"수능 시험처럼 1년 하고 말 것이 아니지 않느냐"고 한 씨는 되묻는다. 그의 말대로 이 '실험'은 장기적인 관찰과 판단을 요구한다. 유현지 씨는 100권 읽기를 통해 자신에게 맞는 독서법을 찾은 경우다. 대학 시절 4년간 매해 100권을 읽은 그는 "달성하는 순간 뿌듯한 순간도 잠시, 단순히 숫자를 채우기 위해 읽은 것은 없었는지 점검해 보게 됐다"며 "지금은 절대적인 양이 줄더라도 한 권을 읽어도 더 천천히, 깊이 있게 읽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목록이 나를 자유롭게 하리니!

사전에 작성하는 '목록'도 중요하다. 지난해 경희대학교의 한 단과대학에서 교양 필독 도서 80권을 제시하고 일종의 독서 '인증제'를 도입했더니 학생회가 "강제적인 독서"라며 크게 반발해, 회장단의 단식 투쟁으로 이어졌다. 준비 덜 된 제도를 시행하는 탁상 행정도 '인증제'도 문제였지만 단과대학 학생 전체에게 일괄적인 목록을 적용한다는 데 저항이 컸다.

그러나 자신만의 목록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윤원장 씨는 오히려 자율적인 독서를 위해 "좋은 추천 도서 목록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경영학을 전공하면서 체계적인 인문학 독서에 대한 갈증이 생겼지만, 목록에 대한 공을 들이지 않고서는 '인문 경영' 유의 책밖에 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홍명교 씨도 "어떤 경로를 밟아나가겠다는 계획이 있다는 건 좋다"고 말했다. 그는 "(군대에서 200권을 읽을 때) 정신분석학, 정치철학, 건축학, 미술사 등의 지점을 정하고 지도를 찾으며 길을 찾아 나가듯이 읽을 순서를 정했다"고 설명했다. 중간 중간 '가지치기'도 하면서 목록의 강도도 조절했다.

노하우 1 : 시작을 위한 목록

어떻게 짜느냐에 따라 독서를 자유롭게도 지루하게도 만드는 '100권 목록', 완벽한 기준이 있을 수는 없다. 다만 무턱대고 시작했다간 매주 쏟아지는 신간 목차만 신나게 보다 2012년 강성대국이 도래할 것 같다. 여러 명으로부터 자신만의 목록을 만드는 노하우를 들어봤다.



▲ <중국의 내일을 묻다>(문정인 지음, 삼성경제연구소 펴냄). ⓒ삼성경제연구소

한비야 씨는 "완벽한 목록은 없다. 관심사를 파라"라고 말한다. 그는 "중국어를 배우는 지금은 중국을 다룬 도서 외에는 관심이 없다"면서 <중국의 내일을 묻다>(문정인 지음, 삼성경제연구소 펴냄),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마틴 자크 지음, 안세민 옮김, 부키 펴냄) 등의 제목을 줄줄이 읊었다.

그가 목록을 만드는 방법은 "네가 읽은 책 빨리 얘기해봐!"라는 협박(?)뿐이라고. 중국에 대한 책을 먼저 읽은 지인들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추천 도서를 받아낸다. 거기서 쌓인 신뢰에 따라 추천 요구는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러려면 누가 중국에 대한 책을 읽었는지 알아야 하는데, 여기서 그의 평소 습관이 나온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요즘 어떤 책 읽었어요?"를 인사처럼, 책 권하기를 화장실 가기처럼 하는 것이다.

관심사나 주제 의식이 있으면 목록 찾기는 수월하다. '인문학 책 읽기'라는 목적이 뚜렷했던 윤원장 씨는 <교수신문>의 '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 연재를 활용했다. 당장의 관심사가 없을 땐 매체의 서평, 그 분야 전문가의 글을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것조차 잘 안 될 때는 '저자로 줄타기'도 좋다. 유현지 씨는 "한두 권 읽었을 때 마음에 든다면 그 사람의 모든 책을 찾아 읽는 '수직적 독서'를 했다"면서 "그 다음 그 사람들이 참고했다고 밝힌 저자로 수평 범위를 넓혔다"고 말했다.

노하우 2 : 편식 예방과 호흡법

한편, 당장 뚜렷한 목적이 있어 의도적인 '편식'을 하는 게 아니라면 목록은 최대한 입체적으로 짜는 것이 좋다. 과학·환경을 담당해 온 <프레시안> 강양구 기자는 다양한 독서 노하우를 망라한 <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 2.0>(그린비 펴냄)에서 자신의 노하우를 전한다.



▲ <호모 부커스 2.0>(이권우 외 지음, 그린비 펴냄). ⓒ그린비
그는 싫든 좋든 가장 먼저야 할 책이 '밥벌이'인 과학·환경책이다. 그러나 이 분야의 문제들을 폭넓게 이해하고 저널리즘과 접목시키기 위해서 과학·환경책을 읽고 나서는 꼭 인문·사회과학 책을 집는다. 다음에는 어휘력, 문장력을 높이기 위해 소설, 에세이, 시와 같은 문학 작품을 읽는다.

그러면서 목표에 짓눌리지 않는 목록을 짜기 위해 두 가지 팁을 더 전한다. 하나, "꼭 읽어야 할 책이지만 선뜻 읽기 어려운 책은 앞뒤로 읽고 싶은 책을 배치해 이런 책을 해치울 것." 그래서 그는 굵직한 고전, 두꺼운 사회과학 책 앞뒤로 좋아하는 판타지, SF, 추리소설과 같은 이른바 장르 소설을 배치해 효과를 보았다.

둘, "책 사이의 일촌 관계를 추적하라". 어떤 책이 다른 책을 직접 인용하거나, 다루는 소재가 겹칠 때 그는 이를 '일촌 관계'라고 부른다.

한국 아파트 문화의 형성 과정을 추적한 발레리 줄레조의 <아파트 공화국>(길혜연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과 일본의 버블 붕괴를 상징하는 대형 주상복합 아파트 내의 미스터리를 다룬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이유>(이규원 옮김, 청어람미디어 펴냄)는 일촌 관계다. 이렇게 100권 읽기를 채우다 보면 트위터의 팔로우 관계 못지않은 재미있는 지(知)도를 그릴 수 있다.

노하우 3 : 시간 내기

목록의 얼개를 잡았다면 자신의 스케줄을 파악해야 한다. 지금부터 1주일에 2권, 3권의 페이스를 지켜야 안전하다. 책벌레들은 △직장 혹은 학교까지의 이동 시간, △하루 30분 이상의 혼자 있는 시간, △1주일에 한 번 정도 온전히 책에만 집중할 수 있는 5~6시간가량의 '통 시간'을 확보하라고 조언한다.

- '자투리 시간'엔 싫든 좋든 책을 편다.

강양구 기자는 버스 출퇴근길은 물론이요 음주 후 택시를 타고 귀가할 때도 일단 책을 잡는다. 한비야 씨는 지하철 책읽기의 고수라 이동할 땐 무거운 책을, 차를 기다릴 때는 가벼운 책을 든다. 그에겐 음식을 주문해 놓고 기다릴 때도 좋은 독서 시간이다. 홍명교 씨는 군대에서 "분대장이 됐을 땐 위병소 위병조장 근무 때, 평일 아침 간부들이 회의하러 갈 때 몰래 몰래 책을 봤다"고 하니, 이제 시간 나면 거울 보는 건 그만둬야겠다.

- 하루에 단 30분이라도 책과 시간을 보낼 것!

약간의 강제성도 필요하다. 매일 의무적으로 30분 이상은 내야 한다. 한비야 씨는 "책을 애인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시간이 있으면 만나고, 없으면 안 만나는 애인 관계는 멀어진다"고 강조했다. 이 부분에서 이른바 '아침형 인간'이 장점을 갖는다. 새벽에는 업무 후 몰려드는 피곤이나, 잡다한 술 약속과 같은 책 읽기의 방해 요소가 없기 때문이다.

- 일주일에 한 번 5~6시간의 '통 시간'을 확보하라!

주말이나 약속 없는 평일 밤은 묵직한 배를 두드리며 누워있기보다, 묵직한 책을 음미할 '통 시간'으로 활용한다. 아예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는 가능한 한 약속을 잡지 않는 것도 한 방법이다. 굳이 애인과 데이트를 해야 한다면, 애인의 손에도 책을 쥐어 준다. (추천 데이트 장소는 동네 도서관!)



▲ 한 여성이 북카페에서 독서 삼매경에 빠져있다. ⓒ프레시안(최형락)

노하우 4 : 노트와 스마트폰, 배낭을 활용하자

여희숙 씨는 "독서 후 리스트 작성, 좋은 글귀 옮겨 적어두기"를 100권 계획의 백미로 꼽는다. 기록은 책 한 권을 두세 번 다시 읽는 효과를 준다는 것이다.

앞서 설명한 <보물상자>는 읽은 책 기록 칸 100개와 함께 넉넉한 '밑줄 노트'를 갖추고 있어 활용하기 편하다. 유현지 씨의 100권 읽기도 읽은 책을 기록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그는 "읽은 책을 날짜와 함께 적어 두면 달마다 숫자를 결산해 하반기에 좀 더 힘을 낼 수도 있고, 예전 리스트를 보며 당시 관심사를 살펴보는 것도 즐거운 행사다"라고 말했다.

윤원장 씨는 "'책을 본다'와 '책을 읽는다'를 구별한다"면서 "먼저 주요 서적을 정하고, 참고할 만한 다른 서적을 정한 다음 필요한 부분은 발췌·요약하고, 서평 내지 인상들을 적는 행위를 합쳐 '읽는다'고 표현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런 작업 없이는 독서가 그저 누군가의 관점으로 세계를 해석하는 데에 그친다"면서 "독서의 궁극적인 목표는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 읽은 책 관리에 유용한 아이폰 무료 어플리케이션 'iReadItNow'. ⓒitunes.apple.com/app/ireaditnow
공책을 갖고 다니기 어렵다면, 독서 시간 단축의 '애물단지'인 스마트폰과 트위터를 거꾸로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무료 어플리케이션 'iReadItNow'는 제목·저자·ISBN의 검색이나 직접 등록을 통해 자신이 읽은 책은 물론 읽을 예정인 책까지 관리할 수 있다. 앞서 설명한 트위터 모임은 독서 모임을 운영할 여력이 없는 이들에게도 함께 읽기의 기회를 제공한다. 특정한 태그(#socialbook)를 붙여 읽은 책을 적어두면, 기록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 '중계'도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엉뚱한 얘기지만 패션도 바꿔보자. <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 2.0>에서 교사 안광복 씨는 "뭐가 오늘의 관심사가 될지 몰라 늘 여러 권의 책을 챙겼고, 가방이 묵직했다"면서 "어느 날부터 '뉴요커 스타일'을 자부하며 정장 슈트에 학생 배낭을 멨다"고 말한다.

언젠가 단거리 마라톤에 도전하겠다는 내게 러닝 화를 사주며 "목적이 생겼을 때 동기 부여가 될 만한 물건을 사는 것도 좋다"고 말한 이가 있었다. 그의 말을 핑계 삼아, 그동안 미뤘던 배낭 딱 하나만 지를 생각이다.

한 스푼의 독서, 한 인생의 변화

10여 년 동안 어림잡아 3500여 권의 책을 읽은 장석주 시인은 자신이 읽은 책을 "바다에서 티스푼 분량의 물을 떠낸 것"에 비유한 적이 있다. 1년에 100권씩 읽어도, 50년을 살아도 5000권 읽기도 어렵다. 평생 열심히 퍼내도 바닷물은 티스푼에서 밥숟가락으로 업그레이드될까 말까다.

그러나 그 막막함에 짓눌릴 필요는 전혀 없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김병욱 옮김, 여름언덕 펴냄)을 쓴 프랑스 문학 교수 피에르 바야르는 "아무리 다독가라 해도 세상에 존재하는 책의 극히 일부를 읽을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즉, 독서는 장서 사이를 헤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헤매는 행위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얘기다.

100권 읽기를 권하는 이들도 이 사실을 잊지 않는다. '100권 읽기'엔 숫자가 들어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 숫자가 계획의 성공 여부를 좌우하지 않는다고 경험자들은 조언한다. 박시열 씨는 "'나 100권 읽었어'라고 자랑할 것도 아니지 않나. 하지만 분명 그만큼 성장한 나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올해 목표는 부끄럽지 않은 기자 되기다. 고백하자면 고교 시절부터 원소 기호만 봐도 거품을 물었고 세계사 책 위에는 필기 대신 각종 삽화를 헌정했다. 수면으로 일관했던 시간은 기사 쓸 때마다 기초 지식 부족으로 뒤통수를 쳤다. 국제팀 시절 천안함 사건, 키르기스스탄 사태 등을 쓸 때마다 쩔쩔 맸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정도면 직업 윤리 위반이었다.

도전기는 달마다 프레시안 books에서, 날마다 트위터 모임에서 중계할 예정이다. 함께 할 여러분에게 보내는 응원은 한비야 씨의 메시지로 갈음한다.

"사람에겐 뜨거웠던 순간만 남는다. 올해 100권 읽기에 도전하는 모두에게 한 권 한 권이 뜨거운 순간이 되길 바란다!"


콘셉트에 따라 읽어보자, 2011년 '100권 계획' 도움닫기

본문에서 말했듯 최선의 목록은 없다. 다만 막막한 도전자들을 위해 시식용으로 8개의 메뉴를 준비했다. 뷔페에서 음식 골라 담는 느낌으로 자유롭게 더하고 빼라.

1. "관심 있는 것부터 종횡무진" 한비야가 추천하는 중국 관련서 10권

"현재 관심사는 오로지 OO뿐!"인 사람이라면 한비야처럼 열쇳말을 갖고 시도해보자. 그는 중국 소설가나 중국 전문가로 이름 높은 이들, 중국에서 특파원을 지낸 기자들의 책을 두루 추천했다. 분야는 하나지만 장르는 역사, 경제, 소설 등으로 다양하다. 여기서 팁 하나는 20% 정도는 관심사로부터 숨 통 트일 여유를 주는 것. 그는 소설가 김연수 씨의 광팬이라며 그의 산문집을 바람 쐬듯 어디서든 펴 든다고 말했다.

문정인의 <중국의 내일을 묻다>(삼성경제연구소 펴냄) / 마틴 자크의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부키 펴냄) / 이상수의 <아큐를 위한 변명>(웅진지식하우스 펴냄) / 양비의 <그림으로 읽는 중국 고전>(천지인 펴냄) / 니엔쳉의 <상하이의 삶과 죽음>(금토 펴냄) / 장융의 <대륙의 딸들>(금토 펴냄) /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푸른숲 펴냄) / 위화의 <살아간다는 것>(푸른숲 펴냄) / 김연수의 <우리가 보낸 순간>(마음산책 펴냄) / 김연수의 <내 청춘의 문장들>(마음산책 펴냄)

2. "동서고금의 만찬을 두루 맛보자" 이권우가 추천하는 다양한 10권

도서평론가 이권우 씨의 추천 도서는 고전부터 고전 해설서, 철학부터 최근의 국제 이슈를 다룬 책까지 너른 스펙트럼을 자랑한다. 당장의 관심사는 없지만 검증된 책들을 두루 맛보면서 제대로 팔 우물을 찾고 싶다면 이 알록달록한 리스트를 추천한다. 1주일에 2권 읽기를 이 리스트를 참고해 무거운 것 하나, 가벼운 것 하나로 진행하면 좋을 듯하다.

고병권의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그린비 펴냄) /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을유문화사 펴냄) / 노자의 <현암사 동양 고전 : 도덕경>(현암사 펴냄) /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까치글방 펴냄) / 안광복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진리를 위해 죽다>(사계절 펴냄) / 앤 패디먼의 <리아의 나라>(윌북 펴냄) / 조엘 안드레아스의 <전쟁 중독>(창해 펴냄) /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글논그림밭 펴냄) / 강풀의 <26년>(문학세계사 펴냄) / 커트 보네거트의 <마더 나이트>(문학동네 펴냄)

3. "고수에게 초보의 길을 묻다" 이명현이 추천하는 과학책 10권

이명현 한국천문연구원 책임연구원에게 물었다. "과학 낙제생이 과학에 흥미를 붙일 만한 재밌는 책들을 골라 달라"고. 전혀 모르는 분야에 대한 책 읽기는, 연구자·교수 등 해당 분야 전문가들을 붙잡고 일단 여러 권을 추천받는 게 최고다. 아는 전문가가 없다면? 매체를 열심히 관찰해 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마음에 드는 전문가 칼럼·서평을 스크랩하고, 적극적으로 스토킹해 보는 것! 메일을 보낸다면 친절히 답해 줄 것이다.

장대익의 <다윈의 식탁>(김영사 펴냄) / 전중환의 <오래된 연장통>(사이언스북스 펴냄) /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동아시아 펴냄) / 이석영의 <모든 사람을 위한 빅뱅 우주론 강의>(사이언스북스 펴냄) / 이종필의 <신의 입자를 찾아서>(마티 펴냄) /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사이언스북스 펴냄) /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 : 그림으로 보는>(까치글방 펴냄) /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을유문화사 펴냄) / 마이클 셔머의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바다출판사 펴냄) / 수전 그린필드의 <브레인 스토리>(지호 펴냄)

4. "독자로서 받은 자극, 필자로서 돌려준다" 선대인이 추천하는 경제·경영서 10권

"모든 독서는 각자의 자서전 집필을 위한 것"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책이 기적을 주었다면, 그것을 인용·비판·재해석하는 것이 모든 독자의 의무다. 선대인 김광수경제연구소 부소장은 주로 자신이 연구 분야인 경제 관련 서적을 읽으며 참고할 내용과 영감, 자극을 얻는다. 그는 자신이 몰랐던 부분의 통찰을 보여준 책들과 함께 그것들의 소화 결과물인 자신의 근간, <프리라이더>(더팩트 펴냄)도 살짝 추천했다.

폴 크루그먼의 <미래를 말하다>(현대경제연구원 펴냄) / 누리엘 루비니의 <위기경제학>(청림출판 펴냄) / 케네스 로고프의 <이번엔 다르다>(다른세상 펴냄) / 라스 트비드의 <비즈니스 사이클>(위즈덤하우스 펴냄) / 버나드 보몰의 <세계 경제 지표의 비밀>(럭스미디어 펴냄) / 오마에 겐이치의 <부의 위기>(국일증권경제연구소 펴냄) / 에릭 바인하커의 <부의 기원>(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 / 리처드 플로리다의 <Creative Class : 창조적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들>(전자신문사 펴냄) / 김광수경제연구소의 <현실과 이론의 한국경제>(프라임 펴냄) / 선대인의 <프리라이더>(더팩트 펴냄)

5. "내 아이에게도 독서 습관을" 여희숙이 추천하는 어른을 위한 동화 10권

교사로서 독서 지도 경험이 있는 여희숙 도서관친구들 대표는 "어른들에게도 꼭 필요하다"며 아동·청소년 도서 10권의 제목을 보내왔다. 당신이 부모라면 100권 읽기 계획에 아이들을 참여시켜 함께 책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바쁜 일을 핑계로 소홀해지기 쉬운 자신의 독서와 아이 교육 두 가지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다.

구로야나기 테츠코의 <창가의 토토>(프로메테우스 펴냄) / 배유안의 <초정리 편지>(창비 펴냄) /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민음사 펴냄) / 조정육의 <조선의 글씨를 천하에 세운 김정희>(아이세움 펴냄) / 비벌리 클리어리의 <헨쇼 선생님께>(보림 펴냄) / 레오 톨스토이의 <세 가지 질문>(달리 펴냄) / 이세 히데코의 <나의 를리외르 아저씨>(청어람미디 펴냄) / 권정생의 <사과나무밭 달님>(창비 펴냄) / 야누슈 코르착의 <천사들의 행진>(양철북 펴냄) / 포리스터 카터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아름드리미디어 펴냄) / 안소영의 <책만 보는 바보>(보림 펴냄)

6. "읽는 즐거움과 '차도남'의 필수조건" <GQ>가 추천하는 아름다운 책 10권

소설가 김언수는 자신이 책을 읽을 때는 오로지 심심할 때라고 말했다. 그렇다. 아무리 거창한 목적이 있다 한들 독서는 기본적으로 심심함을 해결하기 위한, 즐겁기 위한 행위다. 마침 남성 잡지 <GQ>가 지난해 10월호에 활자를 향한 쾌락을 충실히 만족시켜 주는, '지난 10년간 한국말로 쓴 가장 아름다운 책 100권'의 리스트를 올렸다. 그 가운데 10권을 소개한다. 자신에게 상주고 싶은 날엔 커피 한 잔과 함께 이들 문장의 향미를 느껴보시라.

신영복의 <강의>(돌베개 펴냄) / 고종석의 <말들의 풍경>(개마고원 펴냄) / 황교익의 <미각의 제국>(따비 펴냄) / 전우용의 <서울은 깊다>(돌베개 펴냄) / 이문구의 <이문구 전집>(랜덤하우스 펴냄) / 박완서의 <호미>(열림원 펴냄) / 서동욱의 <일상의 모험>(민음사 펴냄) / 정성일의 <필사의 탐독>(바다출판사 펴냄) / 신현준의 <한국 팝의 고고학 1970>(한길아트 펴냄) / 김두식의 <헌법의 풍경>(교양인 펴냄)

7. "변치 않는 향기, 평생 독서 계획" 클리프턴 패디먼이 추천하는 고전 20권

책이 그냥 커피라면, 고전은 'T.*.P'다. 누구나 제목은 알아도 읽지 않는 그것, 그러나 읽으면 사람이 달라진다는 그것. 혹 'OO대 필독 도서' 목록에 질렸다면 라디오 퀴즈 쇼 '인포메이션 플리스' 진행자이자 <뉴요커>의 도서 편집자였던 재주꾼 클리프턴 패디먼의 목록을 엿보자.

그의 <평생 독서 계획>(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펴냄)은 "학부 시절 여기에 제시된 책들을 많이 만났으나 정작 읽지는 못한 대학 졸업자들을 위한" 친절한 고전 안내서다. 100여 권 가운데 20권을 골랐다. 빠진 고전들은 2012년 이후에 추가하자. 그야말로 '평생 독서 계획'이니까.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숲 펴냄) / 소포클레스의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숲 펴냄) /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문예출판사 펴냄) / 사마천의 <사기>(까치 펴냄) / <천일야화>(열린책들 펴냄) / 오승은(추정)의 <서유기>(문학과지성사 펴냄) /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서해문집 펴냄) / 몽테뉴의 <몽테뉴 수상록>(문예출판사 펴냄) / 장 자크 루소의 <참회록>(동서문화사 펴냄) / 조설근의 <홍루몽>(나남 펴냄) /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나남 펴냄) / 르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 정신 지도를 위한 규칙들>(문예출판사 펴냄) /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파우스트>(민음사 펴냄) /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글자>(민음사 펴냄) /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이레 펴냄) /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이론과실천 펴냄) /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의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민음사 펴냄) /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열린책들 펴냄) /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국일미디어 펴냄)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의 고독>(민음사 펴냄)

8. "시대를 읽자" <프레시안> books가 추천하는 2010년 출간 도서 20권

독서는 '지금 내가 사는 세상'을 해석하기 위한 것이므로 동시대 저작물에도 부단히 신경을 써야 한다. 언젠가는 반박될, 가장 최신의 진리들인 신간을 펴보자. '프레시안 books'는 아직 먼지가 내려앉지 않은 2010년의 책들을 20권 꼽아봤다. 지난해 '올해의 책'부터 그 후보들까지, 충분한 검증을 마친 양서들이다. 2011년에도 '매의 눈'으로 좋은 책을 골라 금요일 밤마다 대접하겠다.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펴냄) /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부키 펴냄) / 엄기호의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푸른숲 펴냄) / 오항녕의 <조선의 힘>(역사비평사 펴냄) / 김기협의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돌베개 펴냄) / 정세현의 <정세현의 정세 토크>(서해문집 펴냄) / 김재영의 <하우스 푸어>(더팩트 펴냄) / <좌우파 사전>(위즈덤하우스 펴냄) / 김두식의 <불편해도 괜찮아>(창비 펴냄) / 강유원의 <인문 고전 강의>(라티오 펴냄) / 앨버트 허시먼의 <보수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는가>(웅진지식하우스 펴냄) / 세라 블래퍼 하디의 <어머니의 탄생>(사이언스북스 펴냄) / 아서 쾨슬러의 <한낮의 어둠>(후마니타스 펴냄) / 조너선 코졸의 <야만적 불평등>(문예출판사 펴냄) / 존 그레이의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이후 펴냄) /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한겨레출판 펴냄) / 앨리 러셀 훅실드의 <감정 노동>(이매진 펴냄) / 더글러스 러미스의 <에콜로지와 평화의 교차점>(녹색평론사 펴냄) / 조안 러프 가든의 <진화의 무지개>(뿌리와이파리 펴냄) / 로베르토 볼라뇨의 <칠레의 밤>(열린책들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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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직한 부담. <선생님들에게 드리는 100가지 제안>(수호믈린스키 지음, 수호믈린스키 교육사상연구회 옮김, 고인돌 펴냄)이 내게 던져졌을 때 같이 따라온 느낌이었다. 직업 때문이기도 하지만 만만치 않은 분량 탓이었다. 이 모든 제안을 다 곱씹을 수 있을까?

그러나 차례를 전부 다 넘기기도 전에 이 책이 내게로 왔어야 할 책임을 알았다. 이렇게 문장을 색색으로 물들이고, 여기저기 포스트잇을 붙이고, 낙서를 해가며 책을 읽었던 게 마지막으로 언제였더라? 단정적으로 말하자. 한국 교육의 근본적인 대안을 꿈꾸는 교사라면, 아니 교사라면 이 책을 꼭 읽어야 한다.


▲ <선생님들에게 드리는 100가지 제안>(수호믈린스키 지음, 수호믈린스키 교육사상위원회 편역, 고인돌 펴냄). ⓒ고인돌
2011년 대한민국 교육 현장의 풍경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학 교수 박노자는 이 책의 추천사에서 그것을 '외화내빈(外華內貧)'이라고 표현했다. 세계 수학 경시 대회가 열릴 때마다 구미 출신들을 기죽이는 것이 한국 학생이지만, 정작 그들에겐 독립적, 비판적 사고 능력이 없다. 학습되는 지식의 양은 많아도 그것을 왜 학습해야 하는지에 대한 비판 의식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시험 제도를 조금씩 바꾸거나 사교육을 금지시키는 것으로 상황의 반전을 꾀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지금 학교의 위기는 세 '근원'에서 유래해 복잡하고 역동적인 다층 구조로 나타나고 있다. 근원은 개인주의에 근거한 학부모와 학생의 욕망, 탐욕적인 신자유주의 교육 정책, 그리고 교육 철학의 부재다. 신분 상승을 위해 내달리는 개인들은 정부의 '줄 세우기' 교육 정책에 합류한다. 거기에 교육 활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해 줄 철학은 없다.

수호믈린스키의 교육론은 이러한 경쟁 위주의 교육 현장과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온다. 휴머니즘 원칙, 아동 인격의 높은 가치를 인정하는 원칙에 바탕을 둔 그만의 독창적 교육 체계는 제2차 세계 대전 후 소련에서 '추상적 휴머니즘'이라는 비판을 들었을 정도였다. 그는 공산주의 교육에 대해, 당의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들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고하는 인격들'을 형성하는 과정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선생님들에게 드리는 100가지 제안>은 그의 전인 교육론의 총체다. 시대 상황은 다르지만, 반세기를 건너 온 그의 통찰은 어두운 우리 교육 현실 속에서도 반짝반짝 빛난다. 대안을 찾기 위해 고민하는 선생님들이라면, 이 100가지 제안을 하나씩 꼭 거쳐 보자.

수호믈린스키는 교수법 전문가들이나 교육학 이론가들이 학교 미래의 성패와 관련해 가장 많이 언급하는 것이 "교과서가 어떻게 만들어지며 각 학과목들을 어떻게 가르치는가와 연계시키는 것"이라는 데에 놀란다. 그러면서 '오멜코 할아버지'의 일화를 예로 들어 이러한 흐름에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나는 대대로 전해온 우리의 고향 사람이며 불우한 농사꾼인 오멜코 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생각하게 된다. 오멜코 할아버지께는 땅이 한 마지기 있었다. 이 할아버지는 알뜰하게 골라낸 봄밀 종자를 그 땅에 심으려고 했다. 이 할아버지는 할머니 마리아와 함께 겨울 내내 페치카 곁에 앉아서 맨손으로 종자를 한 알씩 정성들여 골랐다.

그러나 파종할 때가 되었을 때, 오멜코 할아버지는 종자만 생각하다가 그만 밭갈이 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리하여 파종하러 가기는 하였지만 밭을 갈지 않고 종자를 뿌렸던 것이다."

이 일화는 '밭갈이'가 없는 우리 교육계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도 읽힌다. 교육 철학의 근간에는 밭갈이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은 공교육 과정 12년 동안 학생들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단순한 교수법을 뛰어 넘는 무엇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저자는 "학생이 교육자를 능가하도록 만드는 사람이 훌륭한 교육자"라고 말한다. 이 책의 대부분의 조언은 바로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 크게 보면 학생과의 관계와 교원의 자기 계발로 나뉜다.

그의 조언은 숙제 검사와 학습장 검사와 같은 소소한 것에서부터 문화적 기억력, 의도적 주의력 등 비고츠키의 교육 이론에 나오는 고등 정신 기능까지 아우른다. 또 저학년 아이들과 고학년 아이들에게 사용할 낱말에 대해서도 각각의 전략을 달리 해 제시하고 있다.

1학년 산수에서 사고력을 훈련하는 방법, 학습 속도가 더딘 학생과 빠른 학생을 지도하는 방법, 스스로 공부하게 하는 방법까지 자신의 깨달음을 자세히 들려준다. 또 교원 자신의 계발에 해당하는 계획서 작성, 교육 일기 쓰기, 수업 지도안 작성에 대해서도 성실하게 조언한다.

나아가 수호믈린스키는 자신의 교장 경험을 반성하며, "교장은 무엇보다도 학교 교육 과정을 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이에 대한 세세한 방안도 제시하고 있다. 또 국가의 교육 과정을 구성하는 데 참고할 내용도 담겨있다. 이 책을 선생님들뿐 아니라 한국교육과정평가원 담당자들도 읽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책에서는 지금까지 '좋은' 예로 제시돼 온 교육 이론, 사례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얻을 수 있다. 가령 한국에서 종종 제시되는 핀란드의 교육에는 어두운 면이 없을까? 정서적 측면의 교육이 인지적 측면의 교육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더 깊은 통찰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는 <핀란드 교육 혁명>(한국교육연구네트워크 지음, 살림터 펴냄)에서 성열관과 송순재가 말했던 핀란드 교육의 어두운 면이 무엇이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가 담겨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성과주의 정책에 휘말려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기보다는 반의 시험 평균 점수를 높이는 데, 'OO대'에 몇 명을 보내는지에 집착하는 작금의 교사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그들에게 묵직하지만 즐거운 부담인 <선생님들에게 드리는 100가지 제안>을 권한다.

누군가는 이 책과 현재 우리의 현실 간의 괴리가 크다고 고개를 저을 수도 있겠지만, 어떤 변화든 읽고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조금씩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들을 수 있었던 "교사가 먼저 줄서기를 그만둬야 한다"는 전남대학교 교수 김상봉의 주장이 약간의 희망을 갖게 한다.

"교사는 정치 체제를 떠나 언제나 아이들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자이어야 한다"는, "평가에 구애받지 말고 교육자의 능력을 기르는데 충실해야 한다"는 수호믈란스키의 말은 시대를 떠나, 사회 체제를 떠나 어디에서나 큰 울림을 일으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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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기에, 이 책의 제목 '프리라이더'는 그리 듣기 좋은 말이 아니다. 무임승차라는 뜻인데, 이 말은 시장주의자들(경제적 자유주의, 신자유주의)이 복지를 확충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복지 국가 옹호자들을 비판할 때 즐겨 사용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왜 하필이면, 온 국민의 공적 관심사인 세금 문제에, 그것도 장차 우리가 만들고 싶어 하는 보편주의 복지 국가의 재정적 원천으로 매우 중요한 '세금 문제'를 다루는 책에 이런 불경스러운 제목을 달았을까?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는 이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이 책은 "정부가 공공 자금인 세금을 얼마나 불공평하게 거둬 가는지, 그렇게 거둔 돈을 얼마나 멋대로 쓰는지, 그 비밀을 누설"하고 있다. 특히, 자본과 자산 등 특권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과 이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정부, 부자 감세를 단행하고 4대강과 토건 사업에 국민의 혈세를 쏟아 넣는 이명박 정부의 실패한 조세 재정 정책을 꼼꼼하게 분석하고, 신랄하게 질타하고 있다.

그렇다. 이 책은 정상적으로 내야 할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거나 탈세를 일삼는 한국 사회의 특권층, 이를 묵인하고 방조하는 조세 관련 행정 당국, 이와 더불어 무책임하고 불공정하고 실패한 조세 재정 정책을 편 이명박 정부와 여당, 그리고 한국 사회의 지배 엘리트들에게는 매우 불경스러운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나는 저자의 용기 있는 치밀함과 이 책에 박수를 보낸다.


▲ <프리라이더>(선대인 지음, 더팩트 펴냄). ⓒ더팩트
그러면서도 나는 이 책에 대해 여전히 불만스럽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조세 정책, 즉 세금을 둘러싼 모든 이야기를 거의 다 망라하고 있다. 분석적이면서도 이해하기 쉽다는 장점도 지녔다. 이는 아마도 저자가 수년 동안 기자 생활을 한 경험과도 무관치 않은 것 같다. 세금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우리나라에서 무엇이 잘못이며,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래서 우리나라의 조세 체계를 어떻게 구조적으로 개혁해야 하는지를 알기 쉽고 설득력 있게 잘 기술하고 있다.

가령 부동산 등의 자산에서 나오는 불로소득에 대한 과세를 강화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논파하고, 탈세를 막고 세원을 확대하는 등의 조세 정의를 바로 세우는 문제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조세를 통해 이렇게 마련된 정부 재정이 얼마나 황당하게 낭비되고 있는지, 특히 토건 사업에 돈줄 역할을 하고 있는 낭비적 정부 재정의 실태를 고발함으로써 재정 지출의 건전성 확보와 토건 재정의 복지 재정으로의 지출 구조 조정 등을 역설하고 있다. 이 책은 신자유주의 양극화 성장 체제인 대한민국 경제 사회에서 조세 및 재정 지출의 문제와 관련하여 현상적으로 드러나고 주어진 모든 것을 다 다룬 셈이다. 그런데 이 책은 이것으로 끝이다. 더 나아가지 않고 있다.

중산층에게까지 걸친 광범위하고 만성적인 민생 불안을 야기하고, 그러면서도 기존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의 경제 성장을 불가능하게 하는 신자유주의 양극화 성장 체제를 넘어 역동적인 보편주의 복지 국가로 나아가자는 국민의 열망을 조세 재정 체계와 관련하여 증세와 적극적 재정 정책으로 담아내는 데까지는 시야가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조세 형평성과 조세 정의 문제의 개선과 현행 조세부담률 수준에서의 세목 간 부담 조정, 즉 불로소득에 대한 과세 강화와 근로소득에 대한 감세 고려 등의 '현상 유지' 관점에 머무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는 국민부담률이 세계적으로 낮기 때문에 일반정부(중앙 정부 및 지방 정부의 재정과 비시장적 공공 기관의 재정을 합한 것으로 국제 비교의 기준으로 사용됨)의 규모가 2010년 현재 국내총생산(GDP)의 약 31% 정도다. 북유럽 국가들 평균은 55%이고, 유럽연합 국가들 평균은 51%, OECD 국가들 평균은 45%이므로 우리나라의 조세 재정 규모는 형편없이 낮은 것이다. 우리나라의 재정 규모가 유럽 선진국 수준은 아니라 OECD 평균 수준에라도 도달하려면 14% 포인트가 더해져야 한다. 즉, 우리나라의 2010년 GDP를 약 1100조 원으로 보면, 2010년 일반정부 재정은 약 340조 원이 되고, OECD 평균에 도달하려면 약 150조 원이 추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우리 국민이 원하는 보편적 복지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 지금 민주당과 진보 진영이 주장하고 있는 '보편적 복지'를 제도적으로 추진하고 생애 주기에 따른 '적극적 복지'를 위한 사회투자를 강화하려면, 이뿐만이 아니라 '공정한 경제'를 위해 적극적 산업 정책을 펴려면, 노동 시장의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 적극적 노동 시장 정책을 펴려면 올해 기준으로 최소 연간 100조 원 이상의 재정이 추가로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이러한 복지 국가 전망에 따른 재원 조달이란 측면에서의 '세금' 이야기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자산 시장에서 발생한 개인들의 불로소득에 대한 과세를 강화하면 생산 경제 영역의 근로소득에 대해서는 세금을 줄여줄 수도 있다는 태도를 보여준다. 저자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선진 조세 체계를 구축하려면 세원에 대한 조정이 꼭 필요하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부동산 등 자산에 대한 과세를 강화할 수밖에 없다. 물론 향후 부동산 가격이 장기간에 걸쳐 하락할 공산이 커 보유세와 양도세, 임대소득세 세수 또한 앞서 설명한 대로 모두 걷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최소 20조 원 정도의 추가 세수는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같은 개혁은 국민적 공감대를 충분히 쌓아가며 10년 정도에 걸쳐 점진적으로 정착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법인세나 소득세 등 생산 경제의 세금을 경감하거나 최소한 더 올리지 않아도 되는 세수구조를 만들 수 있게 된다." (109쪽)

내가 밑줄 친 부분을 언급하자면, 증세 없이 세원을 조정하는 방식을 통해 연간 20조 원 정도를 추가 확보할 수 있는데, 이것을 하기가 그리 용이하지 않으므로 10년에 걸쳐 이를 추진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많은 사람들이 불로소득에 대한 과세 등 '조세 정의 바로 세우기' 등을 통해서도 복지 국가를 위한 재원을 금방 마련할 수 있을 것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귀결은 복지 국가를 위한 '증세를 말하지 않고' 어물쩍 넘어가는 것이다. 조세 정의는 매우 중요한 우리의 과제임에는 틀림이 없고, 그래서 확고하게 추진해야 하겠으나, 짧은 기간 내에 이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므로 이를 빌미로 증세를 반대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다행스럽게도 저자가 이 책의 제2권을 출간할 계획을 밝히고 있으므로, 이후의 책에서는 이 문제를 다루어주길 기대한다.

우리 진보·개혁 진영 내부에서 소득세(법인세와 근로소득세) 중심의 누진적 증세를 반대하는 데는 대체로 다음 두 가지의 이유를 드는데, 대부분은 증세가 올바른 길이지만 정치적으로 부담이 되므로 선거 승리를 위해 증세 주장을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생산 경제 영역의 세목인 소득세에 대한 증세가 경제에 해로우므로 논리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다. 저자의 이야기를 하나 더 들어보자.

"지금의 잘못된 세수 구조의 틀을 유지하면서 생산 경제 영역에 부과되는 세금 부담을 늘린다면 국가 경제 전체적으로 재앙이 될 수밖에 없다. 앞으로 경제 활력이 떨어질 개연성이 높은데, 생산 경제에 대한 세금 부담까지 계속 늘려간다고 생각해보라. 가뜩이나 위축되는 경제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 될 것이다." (110쪽)

저자가 앞에서 말했듯이, 잘못된 세수 구조를 고치는 데는 10년 넘게 걸릴 것인데, 저자의 주장대로, 현 상태에서 소득세 중심의 증세를 추진하는 것이 우리나라 경제 전체에 재앙이 된다면, 범야권이 복지 국가의 재원을 마련하는 일은 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내가 알고 있는 복지 국가의 논리와는 많이 다른 것이다. 미국식 주류경제학이 제시하는 신자유주의 양극화 경제 사회 체제를 넘어서려는 보편적 복지 국가에서는 잘못된 세수 구조를 고치려는 지속적 노력과 함께 소득세 중심의 증세를 추진해야 한다.

즉, 직접세의 세율을 누진적으로 높여야 하는데, 발생한 모든 소득은 궁극적으로는 개인에게로 귀착되기 마련이므로 소득세에 관심을 집중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GDP 대비 소득세의 비중이 4.4%에 불과한데, OECD 국가들의 평균 비중은 9.4%다. GDP 대비 5% 포인트의 차이를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소득세 비중을 OECD 평균 수준으로 높일 경우, 2010년 우리나라의 GDP를 약 1100조 원으로 보면, 소득세에서만 약 55조 원의 추가 세수가 발생한다.

추가로 늘린 세수의 대부분은 보편적 복지와 적극적 복지에 사용할 것이므로 누진적 직접세인 소득세에 일정세율을 누진적으로 부가하는 방식의 '사회복지 목적세'를 도입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또, 보편적 복지 국가라는 한 배를 타고 정정당당하게 보편적 복지를 요구하기 위해서는 어떤 소득이든 간에 '소득이 있는' 누구나 세금을 내야한다. 그러므로 각종 공제 제도는 폐기하고 세수 기반을 넓히려는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우리가 당장 북유럽 복지 국가 수준으로 소득세의 비중을 높이자는 것도 아니고, 겨우 OECD 국가들 평균 수준에 도달하자는 것인데, 이것이 경제를 망친다면 도대체 이게 말이 되는가? 복지 수준이 높은 나라가 경제 성장도 더 잘 한다는 사실을 각국의 역사적 경험이 말해주고 있음을 우리는 충분히 목격하고 있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가 1월 10일 2011년 신년 기자 회견을 통해 '사람 중심의 함께 가는 복지 국가'를 제시했다. 손 대표는 "복지는 인격의 동등함, 인간의 존엄성에 기반을 둔 가장 격이 높은 사회 제도"이며 "시대적 요구"로써 "민주당은 무상 급식에 이어 무상 의료, 무상 보육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더불어 정동영 의원은 일찌감치 '역동적 복지 국가'를 제안하였고, 천정배 의원도 <정의로운 복지 국가>라는 저서를 발표했고, 박근혜 의원은 '한국형 복지 국가' 구상을 내놓았다. 바야흐로 한국 정계에 복지 국가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듯하다. 복지 국가가 시대정신이라는 정치적 정황 증거이므로 이 모두를 환영해야 할 일이지만, 복지 국가를 만들겠다는 약속이 국민적 신뢰를 받으려면 반드시 재원 마련 방안에 대한 구상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봤을 때 후한 점수를 줄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민주당의 손 대표가 2015년까지는 세금을 올리지 않고, 조세 정의를 바로 세우고 기존의 예산을 잘 운용해서 복지 예산을 마련하겠다는 식의 발표를 하였는데, 이는 나중에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올 공산이 크다. 이는 손 대표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민주당의 많은 정치 지도자들, 심지어는 진보정당에도 이런 식의 안이한 생각을 하는 분들이 더러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러한 태도에 대해 진보신당의 조승수 대표가 신년 기자 회견에서 직격탄을 날린 바 있다. 그는 "진보신당은 복지 재원 마련 방안으로 사회복지세 도입을 추진하고 있으며, 복지 재원 마련을 위한 정책 방안은 진짜 복지냐 가짜 복지를 가늠하는 기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신자유주의 양극화 성장 체제의 고통과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고 싶고, 우리 경제 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싶다면 조세 재정에서 현상적 치밀함만으로는 안 된다. 복지 국가를 향한 시민사회와 국민의 열망을 믿고 용기 있게 "깨어있는 시민들"과의 담화에 나서야 한다. 누진적, 사회 연대적 증세는 얼마든지 가능하며, 이것이 '밥 먹여주는 진보' 담론을 통해, "깨어있는 시민들"의 역동적 복지 국가 혁명을 통해 우리나라 정치를 얼마든지 바꿀 수 있고, 이것만이 2012년의 정치적 승리를 보장함을 제대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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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도 평양도 도쿄도, 동경(東經) 135도 표준시간선을 쓴다. 따라서 시차가 날 리 없지만, 한반도와 일본 사이에는 엄연한 시간 감각의 차이가 존재한다. <냉전 문화론>(장세진 옮김, 너머북스 펴냄)의 저자 마루카와 데쓰시라면 이렇게 표현할 것이다. 한반도는 여전히 진행 중인 냉전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일본은 문자 그대로 종결된 '전후(戰後)'를 살아가고 있다고.

마루카와는 2008년 국내 소개된 <리저널리즘>(백지윤·윤여일 옮김, 그린비 펴냄)을 포함한 여러 저작물에서, 반복적으로 '동아시아'라는 사고틀의 필요성을 주장해 온 학자다. 그의 눈에 비친 동아시아의 모든 국가들은 성립 조건 그 자체에 냉전이 개입해 있는, 냉전에 의해 만들어진 시스템이다. 따라서 모든 국가들은 불완전한 국민국가이며, 그 체제를 상대화하기 위해 동아시아 전체라는 사고틀을 필요로 한다.

동아시아 냉전 구도의 결절점은 바로 한국전쟁이다. 마루카와에 따르면 한국전쟁은 "한국 독립이 좌절되는 과정으로서의 내전"이자 "미소 동서 진영이 첨예하게 맞섰던 최전선"이며, "중일전쟁의 당사자였던 중국과 일본이 참가한 전쟁"이라는 세 층이 중첩된 전쟁이었다. 또한 대만의 사회주의자들에게도 생멸과 직결되는 사건이었다. 따라서 그는 한국전쟁을 정점으로 고착화된 냉전을 1945년 일본의 종전과 그 전의 전쟁 과정과 함께 다루는 얼개를 마련해야 하며, 이런 얼개를 바탕으로 한 대화가 그 전쟁들의 자장이 미친 '동아시아' 차원에서 벌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 <냉전 문화론>(마루카와 데쓰시 지음, 장세진 옮김, 너머북스 펴냄). ⓒ너머북스
그러나 일본은 이 전쟁에 직접적으로 관계되지 않은 양 태연하게 전후의 종결을 선언(1956년 일본 <경제백서>)하고, 동아시아에 등을 돌려왔다. 그리고 저자가 자주 인용하는 칼 슈미트의 "적이 누구인지를 선택·결정하는 것이야말로 주체의 행위"라는 말에 비추었을 때, 이때 아시아에 대한 적대는 '가짜'이며 따라서 주체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과 북한 등 공산권 국가들에 대한 적대성은 미소 대립에 따라 '부과된' 것일 뿐 실제 일본이 '초래한' 것은 과거 침략자-식민지 적대 관계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사(擬似) 적대성 속에서 일본이 누린 것은 상당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으로 얼떨결에 독립을 이루었고 불완전한 전범 처리로 침략 전쟁에 대한 책임을 방기했으며, 한국전쟁 후방의 병참기지로서 전후 부흥기를 맞이했다. 덧붙여 '히로시마적 기억 방식'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 원자폭탄 투하 피해국으로서의 상상도 가능하게 했다. 마루카와는 일본의 이 기형적 탄생과 아시아 제국(諸國)과 끊임없이 불화를 겪는 역사의식을 냉전이라는 '고향'으로 돌아가 재고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치 체제의 구별에 따라 나눠진 국제 정치의 공간 편성을 가리켜 온 냉전 구조는 1990년을 전후로 하여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틀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그 구도가 이어지고 있다는 증거는 최근의 연평도 포격 사태 등 한반도의 긴장과 대만 주변의 해역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갈등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앞서 지적한 서울(평양)과 도쿄 사이의 '시간 감각'은 이 지점에서 어긋난다.

그러나 입 아프게 반복돼 온 이러한 사실은 일반적인 일본인들은 물론 지식계에서조차 제대로 공유되고 있지 않다.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일본은 이 냉전 구조 속에서 '의식적인 방관자'의 역할을 해왔다. 객관적으로는 한국전쟁과 전쟁의 자장 속에서 타국의 고통에 영향을 미쳐 왔지만 그것을 망각해 온 셈이다. 전후의 미국식 민주주의와 고도 경제 성장은 달콤했으며, 그렇기에 실제로는 선혈이 낭자한 쇼와(昭和·1926~1989년) 시대가 '노스탤지어'란 말로 둔갑해 자라올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냉전 문화론>이 쓰인 문제의식에 해당한다. 이 책은 여기에서 출발한 저자가 일본인들의 의식 속에서 일본의 탄생 비화가 소거되고 아름다운 전후 풍경만 남게 된 과정을 문화 속에서 분석한 작업물이다. 표지에 쓰여 있는 대로 '1945년 이후 일본의 영화와 문학은 냉전을 어떻게 기억하는가'가 그 주제다.

기자는 책을 집어 들면서부터 내용을 예감했다. 일본 유학 시절 쇼와 시대를 향수로 점철한 영화나 8월이면 브라운관을 들썩였던 '일본' 전몰자들을 다룬 비장한 진혼 프로그램에 위화감을 느낀 바 있었기 때문이다. <원폭의 아이>(1952)부터 <팔월의 광시곡>(1991)까지 나르시시즘적인 피해자 의식을 강조한 원폭 소재 영화 속에서도, 반전 구호는 공허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책의 주된 작업은 전후를 노스탤지어로 포장할 수 있게 한 '내셔널리즘 작품'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었다. 저자는 그보다 나아가 있었다. 그는 평화로운 전후 풍경에 균열을 일으켰던 아주 작은 순간들을 발굴하고 의미를 복원해 내는 작업에 집중한다. 번역자 역시 이러한 '비주류 계열'에 해당하는 작업들을 고찰하는 것이 이 책의 진정한 야심이었다고 설명한다.

가령 구로다 기오라는 시인은 전후 GHQ에 의해 행해진 일본의 토지 개혁과 일본 혁명 운동의 좌절을 중국이 겪은 전쟁의 파동 속에서 파악할 수 있었던 드문 경우였다. 구로다는 30년대 일본인들의 만주 이주로 중국 극빈자들이 중국공산당 부대로 전신(轉身)한 것과, 항일 전쟁에서 승리한 중국의 토지 개혁이 1950년대 일본 사회와 혁명 운동을 동요시킨 접점을 포착해 낸다. 이렇듯 항일 전쟁에서부터 국공내전, 한국전쟁까지 22년 간 중국이 겪은 전쟁은 일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중국과 관련해 이 세 개 가운데 주로 첫 번째 전쟁만을 기억한다.

전후 시베리아 전범 수용소에서 혹독한 포로 생활을 겪었던 시인 이시하라 요시로의 감각도 예민했다. 많은 포로들은 일본에 귀환해 스스로를 '억류자'라 부르며 반 스탈린주의, 반소·반공 의식의 기수가 됐지만 이시하라만은 자신의 '억류' 생활을 무매개적으로 '전쟁 책임'과 결부시키고 있었다. 1953년 이후 냉전 구조가 점차 현실화됨에 따라 '연합국 대 추축국'이라는 기존 구도가 희미해지고, 일본의 식민지 지배 책임을 물을 조건이 약화되었는데도 그는 '누군가는 전쟁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문제의식' 때문에 고뇌한다.

"이러한 생활 가운데서 어찌되었든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것은, 나는 결코 '범죄자'가 아니라는 것, 결국 누군가는 책임질 차례가 되어 있던 '전쟁 책임'을 어찌되었든 자신이 짊어지고 있다는 의식이었다." (<1959년부터 1961년까지의 노트> 중)

그러나 불행히도 사례로 제시된 텍스트들은 거의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것들이라 그 맥락을 판단하기 대단히 어렵다. 마루카와와 비슷한 고민을 갖고 있던 지식인들의 논쟁들도 일본 비평계에 대한 얄팍한 지식만으론 따라가기가 버겁다. 저자는 <냉전 문화론>이 '커다란 구도'의 일부분을 형성할 뿐이라면서 한국·북한 등 다른 시점에서의 냉전 문화론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커다란 구도'는 꿈꾸기 어려운 기획임을 절감하게 된다. 만약 같은 작업이 한반도(혹은 중국·타이완·오키나와) 판 냉전 문화론에서 반복된다 하더라도, 먼저 분석된 작품들이 다소는 읽힐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냉전 문화론>은 정말이지 고독하다. 마루카와는 왜 태반이 번역은커녕 간단히 소개조차 되지 않은 비주류 계열 작품들을 끌어올리는 작업에 매달려야 했을까. 책장을 덮으며 그가 쓸쓸한 분투를 왜 시작해야만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마루카와는 후기에서 그에게 영향을 미친 중국 연구가 다케우치 요시미의 일기를 언급한다. 일기는 중일전쟁이 벌어지던 1937년, 일본 점령 하에 있던 베이징에서 쓰인 것으로 시기는 이미 열렬한 중국 항일 운동가들은 이미 남방 전선으로 떠나고 난 뒤였다.

"고립된 학문의 권위가 통쾌하게 실추당하는 것은 이런 종류의 시대다. 인간적인 능력, 혹은 기본적인 인식이라는 것이 결여되었을 때의 쓸쓸함이란 참으로 견디기 힘든 것이다."

마루카와는 이 일기가 "마치 역사의 에어포켓에 들어가 있는 듯한 감각"을 갖고 쓰인 것이라 말한다. 그에 따르면 당시 점령 하 베이징에서는 때때로 피를 볼 정도의 치열한 교섭이 행해지고 있었지만 다케우치는 그러한 중국 사회를 헤치고 들어가기 위한 방법(인식)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이 지식인은 자신이 역사에 참가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 결여와 무력감에 '쓸쓸함'이란 단어를 내뱉게 된 것이다.

저자는 지금의 일본이 다케우치가 말한 의미에서 쓸쓸한 사회로 전락하고 있다고 덧붙인다. 숨 막히는 전쟁에서 한 발 물러나 있을 수밖에 없었던 한 지식인의 고뇌를, 냉전마저도 식은 일본 사회에서 저자 홀로 붙들고 있는 셈이다. 이 거대한 고독 속에서 역사적 '주체'가 되기 위해 자료들을 붙들고 해석하고 쓴 것이 아닐까. 칼 슈미트의 '주체의 행위'에 대한 정의를 다시 떠올려 볼 때 일본은 진짜 적대성을 은폐한 이상, 늘 불완전한 지반 위에 흔들리는 열도인 것이다. 그리고 아주 예민한 지식인이 이 흔들림을 포착한 것이다.

<냉전 문화론>을 힘겹게 따라가는 동안 머릿속엔 문득 예전에 본 하라 가즈오의 <가자, 가자, 신군>(1987)이라는 다큐멘터리가 떠올랐다. 이 영화는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남태평양의 뉴기니아에 파병됐던 한 남자가 군국주의에 대한 피해에 사로잡혀 당시의 상관들을 집요하게 쫓아다니는 내용이다. 오쿠자키라는 이름의 이 남자는 천황의 '인간 선언'에 충격을 받은 뒤 자신을 전쟁에 내몰고 관념적으로도 배신을 해 버린 그 신(神)에게 전쟁 책임을 묻는 데 온 인생을 건다. 그는 당시 궁지에 몰린 전선에서 상관의 명령에 의해 전우 두 명이 사살됐으며, 자신과 동료들은 강요에 의해 그 인육을 먹었다고 주장한다.

오쿠자키는 진실의 아주 작은 조각이라도 찾기 위해 광적으로 헤맨다. 그러나 그가 찾아갔을 때, 전 상관들은 한 가정의 인자한 할아버지이거나 불쌍한 환자일 뿐이다. 전쟁 기억은 까마득하다. 그 간극엔 결코 환원할 수 없는 개인들의 평범한 희로애락이 있을 것이다. 그 평범한 감정들만 갖고 저 세상으로 가고 싶은 상관들은 오쿠자키에게 호통을 친다. 왜 나를 이렇게 괴롭게 하느냐고. 남은 인생이라도 행복하게 살면 안 되냐고.

안 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평범한 삶을 응원하기에, 천황에게 파친코 알을 던져가며 책임을 묻는 이 오쿠자키라는 남자의 생애가 너무 쓸쓸했다. 광기에 기댔던 그는 자신에게 인육을 먹으라고 강요한 상관의 동생에게 총을 쏘고, 영화가 개봉한 시점에 실형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1963년생으로 종전 한참 후에 태어났으며, 냉철한 분석과 아찔한 열정으로 불편한 진실을 상기시키는 마루카와 데쓰시를 오쿠자키와 비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망각에 맞서는 사투가 얼마나 고독한지 말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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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親북 冊파!'

한 출판인이 '프레시안 books'의 '親북' 꼭지를 염두에 두고 '책을 사랑하는 사람'의 새로운 이름으로 제안한 조어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저자, 독자…. 그리고 그 사이를 매개하는 사람들. 흔히 출판사에 일하는 이들 편집자, 영업자, 디자이너 등이 있기에 저자와 독자는 책을 매개로 행복한 만남을 갖는다.

그런데 지금 이 저자와 독자를 매개하는 사람들이 불안하다. 애플, 구글과 같은 거대 정보통신 기업은 더 많은 대가를 약속하며 저자에게 콘텐츠를 맡기라고 유혹하고, 독자에게는 값싸고 편리한 전자책을 약속한다. 이에 질세라 대형 서점도 나름의 모바일 단말기를 만들고 콘텐츠 확보에 경쟁적으로 나선다. 이런 상황에서 출판이 설 자리는 협소해 보인다.

이뿐만이 아니다. 한국 출판의 덩치가 크든 작든 불안하다. 덩치가 큰 출판사는 갈수록 쪼그라드는 출판 시장에서 점유율을 지키기 위해서 출혈 경쟁을 마다하지 않는다. 작은 출판사는 끊임없이 쌓아가는 빚을 감수하며 언제 올지 모르는 틈새시장의 '대박'을 꿈꾼다. 이런 구조를 턱없이 적은 편집자 등의 임금이 뒷받침한다. 이들의 잦은 이직은 그 증거다.

이런 불안이 책에 반영되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다. 내용과 형식 양쪽에서 책의 질이 떨어진다는 독자의 불만이 많아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온갖 문제가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진 이런 구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親북 冊파의 든든한 보루로서 출판이 바로 서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지난 22호에서 책과 사람들이 빚어내는 상호작용이 한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의견을 나눴던 책 동네 '고수' 4인이 나름의 고민과 해법을 털어놓았다. 지난 4일 프레시안 회의실에서 도서평론가 이권우 씨의 사회로 김학원 휴머니스트 대표, 장은수 민음사 대표, 이홍 웅진씽크빅 리더스북 대표가 만나 네 시간에 걸쳐서 얘기를 나눴다.

그들의 '격정 대화'의 주요 내용을 22호에 이어서 소개한다.


책을 통해서 2011년 한국 사회를 전망해보는 4인 좌담은 이미 7일 발행되는 '프레시안 books' 22호에 일부가 실렸습니다. (☞관련 기사 : 2011년 '親북 冊파'가 대한민국을 접수하나?)


▲ 오른쪽부터 도서평론가 이권우 씨, 장은수 민음사 대표, 김학원 휴머니스트 대표, 이홍 웅진씽크빅 리더스북 대표. ⓒ프레시안(손문상)

위기를 자초한 한국 출판

이권우 : 앞에서 '책의 위기'라는 화두를 놓고 여러 가지 쟁점을 점검해 보았다. 이런 위기 상황을 타개하는 일차적인 주체는 출판인일 텐데, 지금 우리의 준비 상태는 어느 정도인가?

김학원 : 현재 이런 위기 상황은 한국의 출판인만 직면한 게 아니다. 미국, 유럽, 일본 등 전 세계가 모두 비슷한 문제를 놓고 고심하고 있다. 앞으로 10년 안에 미국, 유럽, 일본, 한국이 세계 시장에서 그간 나름대로 준비한 것을 바탕으로 경쟁을 하게 될 텐데, 그런 상황을 생각하면 걱정이 되어서 잠을 못 잔다.

이런 근본적인 위기 상황에서 미국, 유럽, 일본 등 각각의 언어 권 출판인이 준비하는 모습과 한국의 출판인이 대응을 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는 사실상 아무 것도 안 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준비해서 과연 미국, 유럽, 일본 등과 경쟁을 하는 게 가당키나 하겠나,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더 참담한 것은 지난 10년간 한국의 출판계가 보인 모습이다. 지난 10년간 한국 출판계의 가장 큰 변화는 일정한 목록과 상당한 자산을 갖춘 출판사들이 상위 그룹을 가시적으로 형성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위 그룹의 출판사들과 두 세 명의 편집자들뿐인 소규모 출판사가 새로운 시장 환경, 기술 환경에 대응하는 것을 비교해 보면 어떤 차이가 있는가?

사실 근본적으로 보면 아무런 차이가 없다. 출판의 질적 측면에서도 그러하다. 새로운 기획, 새로운 편집, 새로운 시도와 도전, 그리고 당장의 상업적 성공과는 관계없지만 남다른 문제의식을 담은 문제작들이 경험, 자본, 기술력 등에서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출판사들이 보여준 눈에 띠는 샘플과 모델들이 있는가?

소형 출판사와 비교했을 때 대형 출판사가 보이는 차별적인 다른 모습은 더 많은 로열티를 지급하고, 더 많은 마케팅을 보장해 서점의 평대와 저자를 빼앗는 것이다. 지난 10년간 줄어드는 출판 시장을 놓고 누가 더 점유율을 높여 우위를 점할 것인가에만 신경을 써온 것이 바로 한국 출판의 모습이었다. 한결같다. 상위 그룹을 형성하는 이른바 '100억대' 이상의 출판사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어떤 자극, 어떤 문제의식, 어떤 도전을 받았는가? 이해의 확장 이상의 것이 있었는가? 미국 출판의 가장 쓰레기 같은 모습만 답습한 것이다.

유럽은 출판사가 저자, 독자, 사회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단적인 예로, 최근에 독일 출판의 한 줄기를 형성해온 주어캄프(Suhrkamp)가 프랑크푸르트에서 베를린으로 옮기자 프랑크푸르트뿐만 아니라 독일 전체가 난리가 났다. 주어캄프는 독일 지성의 한 상장이자 프랑크푸르트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미국도 독립 출판사일수록 지역에 수백, 수천, 수만 명의 네트워크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렇게 사회에 뿌리를 내린 유럽의 출판사는 세계화, 전자책과 같은 시장 환경, 기술 환경 변화를 놓고서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반면에 책의 사회적 역할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응답하지 않은 채, 책 내고 팔기에 급급한 한국의 출판사는 이런 근본적 전환기에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지금 한국 출판의 위기 상황은 자초한 면이 크다.

전자책만 놓고 봐도 마찬가지다. 지난 10년간 전 세계 곳곳에서 3000건 이상의 전자책을 화두로 한 컨퍼런스가 있었다. 이런 컨퍼런스를 통해서 이미 출판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가 다 나왔다. 이렇게 전 세계 출판계가 공동의 대응을 모색할 때, 한국의 출판사는 철저하게 자기 회사의 이익 확장과 점유율 상승에만 목매온 것이다.

책의 위기를 말하는 지금 출판계는 한국 사회를 탓하기 전에 자신에 대한 반성부터 시작해야 한다.

좀비의 습격? 출판의 위기!


▲ 김학원 휴머니스트 대표. ⓒ프레시안(손문상)
이권우 : 방금 김학원 대표도 잠깐 언급했듯이 지금 책과 관련한 가장 핫이슈는 전자책이다. 전자책을 놓고는 '열광', '불안', '침묵'이 섞여있는 혼란스러운 상황인데….

장은수 : 사실 한국은 (문제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자책과 관련한 법적 준비는 비교적 잘한 편이다. 외국에서 놀랄 정도다. 출판사와 저자가 출판권 계약을 할 때 전자책 판권을 동시에 확보한 예는 세계적으로 많지 않다. 전자책을 도서정가제의 대상으로 한 경우는 외국엔 거의 없기까지 하다.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최근에 한 전자책 서점이 몇몇 중견 출판사에 책 한 종당 50만 원을 줄 터이니 10년 동안 전자책 판매권을 넘기라는 제안을 했다고 들었다. 만약 그 출판사가 책을 500종 정도 보유하고 있다면, 곧바로 현금 수입 2억 5000만 원이 생기는 것이다. 경영이 어려운 출판사에서는 귀가 솔깃할 만한 제안이다.

그런데 이것은 출판사나 저자를 위한 제안은 아니다. 아마 전자책 서점은 그렇게 확보한 전자책 판매권을 이용해 음반 시장에서처럼 저가 판매, 무한 대여, 정액제, 쪼개 팔기 등을 시도하면서 유통 구조를 혼탁하게 만들 것이다. 이런 예가 많아지면 출판 시장은 음반 시장처럼 몰락할 것이고, 결국 '달빛요정' 이진원 씨의 경우처럼 대다수 저자들을 죽음에 몰아넣을 것이다.

전자책 시장을 이런 식으로 몰고 가려는 게 바로 (유통) 자본의 요구다. 책을 독서의 대상이 아니라 납품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점에 대한 성찰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지금 전자책 관련 쟁점들을 하나하나 따져보고 생산-유통-소비 규칙을 바로 세우지 않으면 나중엔 파멸적 결과를 피하기 어렵다.

인터넷 서점 등장 초기에 순진하게 대응하다가, 현재 미국보다 심한 가격 경쟁에 출판계 전체가 노출되면서 도서 시장 전체가 왜곡되는 상황을 겪은 적이 있다. 유통 자본은 전자책에서도 그런 식의 구조를 도입하려 할 게 뻔하다. 이에 대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대응이 없다면 출판계는 인터넷 서점 등장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상황에 직면할 것이다. 전자책의 확산 속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를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만 하더라도 전국에 서점이 약 2만 군데가 있었다. 지금은 약 2000군데 수준이다. 서점이 10분의 1로 줄어드는 데 20년이 걸렸다. 아까 김학원 대표가 유럽 출판사 얘기를 했는데, 유럽이나 미국은 서점 역시 지역 공동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얼마 전 미국 제2의 서점 체인인 보더스 그룹이 지불 유예를 선언했듯이, 서적 판매량의 꾸준한 증가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오프라인 서점은 줄어드는 추세이다. 하지만 유럽과 미국의 서점들은 지역 공동체 속에 뿌리박고 오랫동안 문화적 소통의 중심 공간으로 존재해 왔기에 지역 주민들의 애정이 대단하다. 거의 문 닫을 뻔한 서점을 지역 공동체가 합심해서 살려내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그러나 한국의 서점들은 지역의 문화 중심이라기보다는 '책 가게'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동네 서점 매출의 상당량을 차지하는 참고서의 20%만 전자책으로 유통되더라도, 서점을 유지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종이)책을 판매할 공간 자체가 통째로 사라지는 것이다.

물론 책의 전자화를 피하긴 어렵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뻔히 예상되는데도, 대한출판문화협회 등 출판 관련 단체들은 전자책 시대의 출판에 대한 커다란 밑그림을 고민하기보다는 "전자책 시대가 열렸으니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함께 모여 전자책을 만들자"라는 수준의 대응에 머물러 있다.

전자책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는 궁극적으로 각 출판사에서 해결할 문제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출판사들이 모여서 공동으로 전자책을 만들자는 식의 논의가 아니라 어떻게 전자책을 유통시키는 것이 저자, 독자, 출판사에게 장기적으로 이득이 될까와 같은 성찰이다.


▲ 장은수 민음사 대표. ⓒ프레시안(손문상)
김학원 : 전 세계에서 전자책이 논의가 되면서 1990년대 이후에 태어난 세대가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세대가 바로 스마트폰 등과 같은 모바일 기기를 통해서 디지털 콘텐츠로 책을 주로 접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세계출판협회(IPA)가 1990년대 이후 세대의 75%가 10년 안에 종이책에서 전자책의 독자(e-reader)로 전환하리라고 전망한 것도 이런 사정을 반영한다.

이런 전망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1990년대 이후 세대가 전자책으로 무엇을 읽고, 그에 따라서 시장이 어떻게 변화할지가 앞으로 10년간 전 세계 출판계의 가장 큰 관심사가 될 것이다. 한국의 출판인이 이 세대와 어떻게 소통할지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1990년대 세대를 상대로 스펙(specification) 쌓기를 핑계로 고전 읽기 등을 강요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미지수다. 이런 식의 독서에 대해서 1990년대 세대가 피로감 혹은 거부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한 결과다. 텍스트도 어렵고, 커리큘럼·프로그램도 부실하기 짝이 없으니까.

더 늦기 전에 한국의 출판인이 1990년대 세대를 위한 새로운 형태의 독서 문화를 기획하는 데 나서야 한다. 그들이 자신의 문제를 독서를 통해서 곱씹을 수 있는 텍스트를 저자와 함께 만들어내고, 더 나아가 그런 텍스트를 체계적으로 접할 수 있는 커리큘럼을 만들어서 공급해야 한다.

또 그들이 처한 새로운 매체 환경에 독서를 어떻게 접목시킬 수 있을지 연구해야 한다. 잘 알다시피, 1990년대 세대는 굳이 스마트폰 같은 모바일 기기를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인터넷 강의 등에 아주 익숙한 세대다. 이 세대에 걸맞는 효과적인 전달 방식을 찾아야 한다. 이 세대를 놓치면 한국 출판의 미래는 어둡다.

1990년대 세대와 함께 눈여겨봐야 할 또 다른 세대는 바로 2000년대에 대학을 다닌 지금의 20대들이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1970~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독서 1세대'의 아이들인 이들은 어린이, 청소년 때부터 부모가 권한 책을 읽고 자란 '독서 2세대'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생들과 마찬가지로 이 20대를 어떻게 독서 세대로 안착시키는지에 따라서 향후 한국 사회의 독서 인구가 재생산될지가 결정될 것이다. 당연히 전자책이 출판이나 책의 몰락으로 이어지지 않고 새로운 기회를 열어 줄지도 바로 이들이 책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지와 깊은 관계가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지금 10~20대에 책의 미래가 달렸다.

이홍 : 장은수, 김학원 두 대표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몇 가지 의견을 추가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디지털 콘텐츠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전문 인력의 확보가 절실하다. 출판사가 주도적으로 대응하고 환경을 만들어가려고 해도 종이책을 만들고 파는 인력 외는 사람이 없다.

부지런한 몇몇 에디터들의 얼리어답터 정신만으로는 안 된다. 기존 에디터십 이상의 복합적인 프로듀싱 능력을 요구받고 있지만 교육을 하는 곳도 없고 개념도 없다. 매체의 특성과 환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다 기술적 종속이나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에디터들 사이에서 자괴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새로운 시장에서 돈만 벌자고 할 게 아니라 인력 구조를 바꾸든지 제대로 교육을 시키든지 각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전자책이라는 표현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지만 대표적인 명칭으로 불리고 있으니 그대로 인용하여 말하겠다. 머뭇거림 없이 출판계가 상황을 장악하고 논의를 주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세 가지 과제를 극복해야 하는데 첫째는 유통의 장악이다. 재고를 쌓고 디스플레이를 해야 하는 오프라인 환경은 이미 어쩔 수 없게 되었지만 전자책마저 대형 유통사에게 기득권을 넘겨준다면 장은수 대표가 지적했듯이 이후에는 수습이 불가능하다. 제작과 유통이 분리되지 않고 일원화되는 스마트 과정은 필수고 다수의 소비자를 회원으로 확보하고 있는 서점은 절대 유리한 위치다.

둘째는 저자와의 관계를 완전히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종이책의 연장으로 인식하고 관성에 의한 관계를 고집한다면 저자들이 떠날 것이다. 지금의 저자는 옛날과 다르다. 책의 제작이나 유통 구조를 꿰뚫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매체 환경의 변화에도 영리하게 사고한다. 단순히 텍스트를 집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출판사는 저자에게 가는 인세 10% 정도가 합리적이라고 믿지만, 저자는 출판사, 유통사가 자기한테 돌아가야 할 몫의 상당 부분을 가져간다고 믿는다. 지금 아마존이나 애플은 저자에게 65~70%의 인세를 약속하고 있다. 저자와 직거래를 해야 가능한 구조다. 고유한 콘텐츠를 확보하는 게 무엇보다도 시급한 상황에서, 저자와 새로운 관계를 맺고 신뢰를 쌓지 않으면 그들이 남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세 번째는 그러므로 저자-출판사-독자가 종횡으로 연결되는 실질적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책이라는 제품을 만들어 파는 회사가 아니라 지식과 가치가 교류하는 광장을 만들어야 한다. 이게 출판사가 가진 거의 유일한 장점이지만 지금까지 출판사들은 이걸 지하실에 처박아두고 있었다. 지금처럼 모든 네트워크를 출판사가 주도하는 경직된 방식으로는 저자의 욕구도, 독자의 욕구도 만족할 수 없다.

오해를 촉발할 위험한 발언이 될지 모르겠지만 대승적 차원에서 출판계 전체의 구조 조정도 생각해 봐야 한다. 앞서 말한 내용들은 솔직히 어느 정도 규모의 경제를 구사할 수 없다면 불가능하다. 이게 현실이다. 개성과 전문성을 무기로 하는 강소 출판사의 존재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현실은 약소 출판사의 난립이다. 이것 또한 현실이다. 지금의 환경은 한 사람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분발한다고 해서 대응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각 출판사의 독립성과 지위는 유지하면서 집단화할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이 필요하다. 앞으로 10년은 규모화를 전제로 한 구조 조정이 필요한 단계라고 생각한다. 이런 구조 조정이야말로 전자책과 같은 매체 환경의 변화가 던지는 질문에 대항할 조건을 만들어줄 것이다.

이권우 : 개인적으로는 전자책은 좀비 같다. 10년 주기로 죽었다 살아나는…. (웃음) 이번에도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이홍 : 이번에는 다르다. 완전히 부활한 건지도 모른다. (웃음)


▲ 이홍 웅진씽크빅 리더스북 대표. ⓒ프레시안(손문상)

출판사 초임, 불편한 진실

이권우 : 얘기를 듣고 보니, 자연스럽게 출판계의 인력 문제로 이어진다. 종이책이든, 전자책이든 결국에는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새해에는 어떻게 출판계의 역량을 강화할 수 있을까?

김학원 : 재작년 하반기에 경영에 복귀해서 올해까지 총 18명을 선발했다. 휴머니스트를 창업하고 나서, 지난 9년간 선발한 것보다 더 많은 인원을 1년간 선발했다. 그 과정에서 5~7년차 편집자 60~70명을 만났다. 사실상 지금 출판사에서 실무를 담당하는 한국 출판계의 허리 같은 친구들이다.

그런데 이들과 만나서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면서 한국 출판계의 심각한 문제를 확인했다. 우선 가장 큰 문제는 전문성의 부재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한국에서는 국내 역사 관련 책의 흐름을 꿰뚫고 있는 역사 전문 편집자가 없다. 현재 역사 전문 필자가 적게는 40~50명, 잠재적으로는 약 100명 정도가 있는 상황인데도 이렇다.

과학도 마찬가지다. 과학 출판의 독자 기반이 꾸준히 형성되어 온 반면 사이언스북스, 승산 등과 같은 몇몇 출판사를 제외하고는 과학 전문 편집자 층이 그 수요와 필요성에 비해 너무도 취약하다. 단행본 출판계 전체에서 채 10명도 안 된다. 출판사들이 장기적인 전략과 투자보다 당장 책 내기에 급급하다 보니 역사, 과학과 같은 전문성을 요구하는 영역에서 전문 편집자가 없는 것이다.

'편집자는 멀티플레이어가 되어야 해' 이런 요구 속에서 아무 것이나 다 하는 편집자가 너무나 많았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바로 비슷한 책의 양산이다. 같은 분야의 책이 대개는 비슷한 내용이라는 걸 독자들이 느낄 것이다. 종수는 많은데 정작 읽을 책은 별로 없다. 이런 전문성의 부재를 해결하는 것, 출판계의 큰 과제다.

두 번째 심각한 문제는 실무를 담당하는 핵심 인력이 느끼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다. 5~7년차, 7~12년차가 오히려 사장보다 더 현실에 두려움을 느낀다. 이렇게 된 데는 경영자의 책임이 크다. 출판사에서 발행인과 편집자의 소통은 매우 중요하다. 발행인 즉, 출판사의 최고 경영자가 편집자들과의 소통을 외면하면서 그들을 이런 상황으로 몰고 있는 것이다.

지난 10년간 매출이 늘고, 규모가 커진 출판사 사장들이 공통적으로 경제·경영서를 탐독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출판사다운, 지식을 다루는 문화 기업의 모델을 만들기보다는, 국내 출판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큰 세계적 기업의 경영 모델을 고작 직원 수십 명 되는 출판사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웃음)

몇몇 출판사에서 성과주의를 도입한 것도 이때부터다. 그 결과는 어땠나? 지난 10년간 편집자가 기능인으로 전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들에게 책과 출판의 비전을 이야기하게 할 것인가? 앞으로 한국의 출판사가 그들을 차세대 출판인다운 주체로 다시 자리매김하는데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 과정에서 당장 고쳐야 하는 게 바로 대졸 초임이다. 최소한 대한민국에서 대학교를 졸업해서 출판사에서 일하겠다고 하는 이들의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켜야 한다. 이것은 출판사 규모, 매출 액수와는 별 상관이 없는 얘기다. 최소한 출판사라고 문패를 걸려면 대졸 초임은 얼마 이상은 줘야 한다, 이런 합의가 있어야 한다.

큰 출판사든, 작은 출판사든 지금은 대졸 초임이 고작 1800~2200만 원 정도다. 외환 위기 이후 10년간 아무도 대졸 초임을 얘기하지 않으면서, 다른 산업군의 대졸 초임과 비교하기조차 민망한 액수가 고착화된 것이다. 성과에 따른 연봉제 하에서 스태프와 후배들을 파트너로 안고 가야하는 편집장들이 자기 연봉만 신경 쓰면서 이런 상황을 부추긴 측면도 크다.

이 세 가지 문제를 출판계가 꼭 해결해야 한국 출판의 미래가 있다.

생산-소비 공동체의 복원


ⓒ프레시안(손문상)
장은수 : 최근 한국 출판의 모델 중 하나인 <세계의문학>, <창작과비평>, <문학과사회> 등과 같은 문예지 모델을 연구하는 중이다. 세계적으로 드문 경우에 해당하는 한국의 문예지 중심 문학 출판이 미래 출판의 중요한 모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문학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대개 고등학교 때쯤 문예지를 처음으로 접한다. 그들은 문예지를 읽으면서 한국 문학에 대한 애정을 늘려나가고 스스로 저자가 되기를 꿈꾼다. 그러다 보니 대학에서 관련 전공을 택하는 경우도 많고, 수업을 들으면서 문학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쌓거나 좋아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꾸준히 읽고 모방하면서 스스로 시나 소설이나 비평 등을 써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일정 수준의 작품을 쓰게 되면 문예지나 문학상에 작품을 보내서 작가로서 세상에 나온다. 또 작가가 되지 않더라도 그들은 문학에 대해 깊은 애정을 품은 독자가 되고, 좀 더 적극적인 사람은 편집자가 되기도 한다. 또 편집자로 있다가 작가가 되는 경우도 많고, 작가이면서 직업을 편집자로 하는 경우도 많다.

요컨대 문예지는 작가, 독자, 편집자를 한 곳에 모아주는 생산-소비 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 서점이 점점 사라지는 상황 탓인지 출판은 서점이 아니라 독자에게 직접 마케팅을 하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물론 유통이 사라지진 않겠지만) 이런 상황에선 출판을 둘러싼 생산-소비 공동체를 만드는 게 출판의 미래를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하다.

다른 공부를 하다가 갑자기 편집자가 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작가나 편집자를 꿈꾸는 사람들은 먼저 좋은 독자이기도 하다. 문예지 모델을 통해 생겨난 한국 문학 편집자는 대부분 그 이전에 한국 문학의 작가이기도 하고 독자이기도 하다. 그들은 이전에 창작 동인과 같은 생산 공동체에서 활동하기도 하고 민음북클럽과 같은 독자 공동체에서 활약한다.

좋은 독자였기 때문에 직접 책을 쓰는 작가도, 책을 만드는 편집자도, 작가나 편집자가 된 이후에도 자발적으로 책을 읽는 독자도 될 수 있다. 이런 생산-소비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출판계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첫걸음이다.

한국 문학 편집자가 한국 문학의 흐름을 파악하고 미래의 작가들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을 얻으려면, 최소한 3년 정도는 한국에서 나온 모든 작품을 읽고 머릿속에서 정리할 기회를 얻어야 한다. 입사 전에 한국 문학 작품을 꾸준히 읽어온 경우에도 그렇다. 독자로 읽기와 편집자로 읽기는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 정도는 읽고 훈련을 받아야 그 편집자가 작가 공동체에서 선생님과 직원의 관계가 아니라 함께 한국 문학을 이끌어가는 일원이 될 수 있다.

영화 회사에서는 영화 마니아를 뽑고, 게임 회사에서는 게임 마니아를 뽑는다. 그런데 출판은 학교를 비롯한 여기저기서 책 읽기를 시킨다는 것을 핑계로 생산-소비 공동체에 대한 투자가 거의 없다. 앞으로 미래의 독자고, 필자고 또 동료가 될 생산-소비 공동체를 형성하고, 또 그 안에서 출판에 남다른 열정과 비전을 가진 이들을 받아들여서 어떻게 성장시킬지를 한국 출판계가 고민해야 한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최근에 편집자들이 책의 육체에 대한 이해가 갈수록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교열은 고사하고 교정 상태가 엉망인 책들도 많은 데다 오른쪽 페이지를 공백으로 두는 것과 같은 꼭 챙겨야 할 책의 규칙들조차도 잘 지키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심지어 사실 관계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아서 오류가 책을 통해 더욱더 확산되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런 것들은 정말로 반성해야 한다.

기획과 편집의 분리, 성과주의 시스템 등과 같은 흐름 속에서 책의 육체에 대한 관심이 계속 떨어지고 있다. 그러나 정보의 고급화(이것이 편집이다!)는 오직 책의 견고한 육체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책의 육체성에 대한 무시는 책으로써 전달되는 정보와 인터넷이나 신문으로써 전달되는 정보 사이의 차이를 없앨 것이고, 그 결과는 책의 소멸이다. 편집자가 대체 가능한 인력, 기능인으로 전락하는 구조가 되어버린 것은 이런 관행 탓도 크다.


ⓒ프레시안(손문상)

신구 세대의 단절, 그 해법은?

이홍 : 단기 속성 모델로 출판사가 성장하던 시기는 끝났다. 큰 출판사든, 작은 출판사든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는 고급 인력의 확보가 필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제대로 된 성과 측정과 그에 따른 파격적인 보상 지급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과주의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단순한 결과주의로 전락해버린다는 데 문제가 있다.

대한민국 출판사들은 성과주의나 보상 체계를 무슨 역병처럼 불순한 것이라 생각하는데 책을 만드는 일이 신성하다고 월급이나 보상 따지지 말고 열심히 일해라는 것은 난센스다. 지금 출판계로 들어오는 후배들은 DNA 자체가 이전과 많이 다르다. 그들에게는 선명한 미션과 비전이 더 중요하다.

과연 선배들의 DNA로 그런 후배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성장 과정, 대학 생활 등 그들은 역사 자체가 다르다. 당연히 책을 읽고, 사회를 보는 관점도 많이 다르다. 그런데 선배들은 여전히 88년도식 자질이나 덕목을 이야기하고 있다.

방금 장은수 대표가 요즘 편집자들이 책의 육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했다. 책을 바라보는 관점 혹은 편집자의 역할에 대한 생각의 차이가 만들어낸 굴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출판이 종이책이 아닌 복합적인 콘텐츠 산업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겪어야 할 변화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새로운 DNA를 가진 이들을 품을 수 있는 새로운 구조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출판의 미래를 염두에 둘 때 꼭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장은수 : 최근에 회사 후배들과 두 가지 스터디를 한다. 하나는 마케팅 스터디다. 하도 마케팅을 강조하니까 요즘 직원들은 마케팅은 잘 알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것도 약하다. (웃음) 자기가 만든 책을 어떻게 팔아야 하는가, 혹은 어떻게 만들어야 팔리는가 등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다른 하나는 이슈 스터디이다. 역시 1980년대와 같이 정치·사회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이홍 대표가 지적한 대로, 1980년대와 같은 그런 식의 사고 구조 혹은 DNA를 그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시대에 대한 문제의식 자체가 통째로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들은 우리와 다르게 고민하고 성찰한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 상태에서 계속해서 같이 읽고 토론하면서 장기적으로 편집자를 키워야 한다. 삼성이 자질이 좋은 사람을 뽑기 때문에 강할까? 반드시 그렇다고 생각지 않는다. 삼성 안에 직원을 삼성에 필요한 인력으로 키우는 시스템이 존재하기 때문에 강하다고 생각한다. 능력이 닿는 출판사는 이런 시스템을 자체로 갖추어야 하고 그렇지 않은 출판사는 함께 모여 이런 시스템을 설계해야 한다.

책은 저탄소 녹색 성장의 '적'?


ⓒ프레시안(손문상)
이권우 : 화제를 좀 바꿔서 정부의 출판 정책을 살펴보자. 이명박 정부의 출판 정책에 대해서 할 말이 많을 것 같은데….

김학원 : 한 외국 언론의 기사를 봤더니, 대통령이 그 나라 출판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0~15%라고 한다. 아주 단순한 예를 들자면, 대통령이 책에 관심을 가지면 아주 많은 공무원이 따라서 책에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의 대통령은 정치적 노선을 떠나서 최악이다.

이전 대통령은 어쨌든 베스트셀러도 만들어내지 않았었나. 또 대통령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책이라는 사실이 끊임없이 환기된 측면도 있었다. 책을 인용하는 일도 빈번했고. 이런 점에서 이명박 정부는 명백한 후퇴다. 그나마 이 정부의 유일한 기여가 2008년 국방부에서 불온도서를 선정한 일이니까.

이홍 : 리더스북은 사실 큰 도움을 받았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2009년 휴가 때 <넛지>를 읽고 청와대 직원들에게 선물을 했다는 기사 덕에 곧바로 단체 주문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했고 주춤하던 판매 사이클이 완전히 우상향되었었다. 대통령이 책에 관심을 가지는 게 공무원 사회를 움직이는데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알 수 있었다. <넛지> 생각만 하면 대통령 비판하기가 미안해진다.

장은수 : 이명박 정부 들어서 가장 아쉬운 것은 대화 부족이다. 이전 정부에선 출판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채널이 존재했다는 느낌이었는데, 이 정부에서는 그런 대화 채널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또 이 정부와 이전 정부의 가장 큰 차이는 시민들이나 학생들에게 책을 읽히려는 제도적 고민이 약해졌다는 것이다. 독서이력제와 같은 엄청난 제도를 도입했지만, 중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보면 알아서 읽고 보고하라는 것일 뿐, 체계적으로 독서 프로그램을 짜서 실행하려는 것 같지는 않다. 독서는 학생들을 성찰적인 이성을 갖춘 성숙한 시민으로 키우는 교육 과정에서 아주 오랫동안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이에 대한 특별한 배려가 없는 것은 정말 아쉬운 일이다.

반면에 'CEO 정부'라서 그런지 산업의 요구에는 발 빠르게 대응한다. 전자 교과서 도입 문제 같은 게 한 예이다. 미국에서는 전자 교과서를 도입하면 어떤 문제가 있을지를 놓고 치열한 토론이 오랫동안 진행 중이다. 인터넷으로 얻은 분산적인 지식이 아이들을 산만하게 만들고 깊이 있는 사고를 방해하는 것은 아닌가 등…….

이건 아이들의 책가방을 가볍게 만드는 수준의, 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녹색 성장의 한 지표를 만드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그쪽 용어를 빌리자면 후대를 지혜롭게 만드는 게 '경쟁력'을 가장 높게 끌어올리는 것이다. 전자 교과서로 공부해서 혹시나 후대가 더 멍청해진다면 이런 건 도입하지 말아야 한다.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따져보고 또 따져본 후에 신중하게 추진할 과제가 관련 산업의 경박한 요구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김학원 : 전자 교과서에 대한 연구는 이미 20년 전에 끝났다. 미국에서 10년, 20년 단위로 비교 연구를 해본 끝에 전자책과 종이책을 겸비한 환경이 가장 탁월한 교육 효과를 발휘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미국의 교과서 출판사 피어슨에서는 이미 이런 연구 결과를 토대로 교과서를 개발 중이다.

그런데 이렇게 선진국의 축적된 연구 결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KT는 '책가방을 없애겠다' 유의 빌 게이츠와 같은 디지털 전도사의 말만 되뇌는 상황이다. 이명박 정부는 생각 없이 그런 산업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고. 이런 상황 자체가 출판에 강요되는 것 같아서 씁쓸하다.

이홍 : 난 새로운 이슈나 신기발랄한 묘안을 제시하는 것은 의미 없다고 생각한다. 이미 제기된 문제들이라도 진정성을 가지고 해결한다면 더 바랄 게 없다. 그게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비단 현 정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전 정부부터 출판과 관련해서 누적되어온 문제들이 많았다. 굳이 새로운 일을 안 하더라도 누적된 문제만 해결해도 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부산 시립도서관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편성 예산중에서 최하위가 도서 구매비라는 말을 들었다. 책이 중심인 도서관에서 책이 예산의 꼴찌다. 우리나라 대학 도서관의 도서 보유 비율은 아프리카 대학 수준이다. 선거 때마다 공약으로 내건 도서관 건립 공약이 실천되었다면 대한민국은 이미 '도서관 강산'이 되었을 것이다. 출판계가 오래 전부터 요구하고 있는 저작권법 개정은 언제 하려는지…. 이게 늦어지면 전송권 문제에 심각한 혼란이 오게 된다.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언젠가 정부에서 내놓은 저탄소 녹색 성장 정책에 관한 보고서를 본 적이 있다. 그 보고서를 보면, 저탄소 녹색 성장 정책에 장애가 되는 대표적인 탄소 배출 산업으로 '출판'이 올라와 있다. (웃음)


ⓒ프레시안(손문상)

실용서, 출판의 꽃!

이권우 :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얘기해 보자. 지난 10년간 자기 계발서, 실용서가 굉장한 붐을 이뤘다. 그런데 2010년에는 이런 자기 계발서, 실용서가 주춤한 듯이 보인다. 이홍 대표는 어떻게 보는가?

이홍 : 독자들은 장르에 따라서 책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자기 관심사에 따라서 책을 선택한다. 그런 점에서 자기 계발서, 실용서가 죽었다는 지적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장르가 고착화되어 있는 아니라 서로 크로스오버 되고 있고, 실제로 많은 책들이 실용서의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실용서 시장은 세상의 흐름에 아주 민감하다. 책이 시장의 흐름을 주도하기보다는, 불쑥불쑥 나타나는 흐름에 어떻게 편승하느냐가 성공과 실패를 좌우한다. 그런 흐름이라는 게 너무 뻔해 잘 보이는 것 같지만 보이는 것과 숨어 있는 욕구 사이의 간격은 만만치 않게 넓기도 하다. 기획도, 편집도 정말 어려운 분야다.

실용서 시장의 또 다른 특징은 심한 부침이다. 어느 한 쪽이 쪼그라들면 다른 쪽이 부풀어 오르는 모습을 띄곤 한다. 암이나 파스요법 같은 건강서들은 부진하지만 뷰티, 요가, 라이프 관련 책은 인기가 있다. 암에 안 걸렸으면 좋겠어, 이런 단순한 욕구만 있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좋은 피부를 어떻게 유지할까, 생활공간을 어떻게 멋있게 꾸밀까 이런 고민을 한다. 독자의 세대 교체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이다.

실용서의 소멸-부흥과 같은 일회적인 분석의 접근은 부질없다. 대중의 욕구에 맞춰 발 빠르게 대응하면서 시장을 만들어내느냐에 따라서 수요는 꾸준히 있을 것이다. 더구나 맞춤법은 틀리되 아이디어 하나는 귀신같이 내놓는 잘 훈련된 편집자들이 대한민국에는 넘쳐난다. (웃음)

2011년에도 부침은 있겠지만, 또 다른 열쇳말이 대세를 이루는 실용서 시장은 계속될 것이다.

이권우 : 2011년의 트렌드는 뭐가 될까? 열쇳말을 제시한다면?

이홍 : 그걸 안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나. (웃음) 최근 재테크 책들이 부진했는데 부동산의 침체가 크게 영향을 끼치기도 했고, 독자들이 그동안 이런 책들에 속았다는 반성도 있고, 주식은 역시 개미들이 이길 수 없다는 비관론도 있고 그런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생각이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주식 시장이 2000을 오래도록 지지한다면 선진국형 금융 투자나 종잣돈 관리와 연관된 책이 반응을 얻을 가능성이 있다. 부동산 쪽은 쳐다보지 않는 게 건강에 좋다.

장은수 : 데이터만 놓고 봐도 실용서 시장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출판 시장 전체의 매출에서 실용서 시장은 늘 같은 비율을 유지한다. 아까 이홍 대표가 지적했듯이 이 분야 책이 안 나가면 저 분야 책이 나가는 식으로 시장이 거의 그대로 유지된 것이다.

다만 매년 실용서 쪽에서 슈퍼 베스트셀러가 나왔는데, 2010년에는 그렇게 눈에 띈 책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는 실용서가 쇠퇴한 게 아닐까, 이런 인상을 받을 수도 있겠다. 또 2010년에는 트렌드가 <정의란 무엇인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같은 책으로 이동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고.


▲ 도서평론가 이권우 씨. ⓒ프레시안(손문상)

이권우 : 그렇게 인문·사회과학 책이 나가면 실용서 시장을 대체하는 효과가 생길 수도 있을 텐데….

이홍 : 그런 측면이 분명히 있다. 경제·경영서나 자기 계발서만 놓고 보면 독자의 다수가 김학원 대표가 '독서 1세대'라고 이름을 붙였던 30, 40대다. 최근 이들이 경제·경영서나 자기 계발서에 실망한 것은 사실이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새로운 저자, 뾰족한 담론이 안 나오고 있고, 자기 복제 과정만 반복하고 있다.

오리지널 경제·경영서를 개발하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다. 한국은 후발 자본주의 국가이고 경제든 경영이든 자체 담론이나 이론 체계는 극히 빈약하다. 다수의 경제·경영 분야 교수나 전문가를 만나봤는데, 다들 선뜻 책을 쓰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세상과 대화하는 책 쓰기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새로운 이야기를 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외국 책에 실린 내용을 짜깁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렵게 쓴 책들도 독자들의 외면이 서럽기만 하다. 오피니언 지식인들이 1차 독자인데 이들의 눈높이는 쉽지 않다.

경제·경영서를 펴내는 출판사는 계속 늘어나고 있는데 독자의 눈높이를 만족시킬 만한 저자의 수는 절대부족이다. 장하준 교수나 시골 의사(박경철)가 모든 출판사에 원고를 줄 수는 없지 않나. (웃음) 외서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당연히 경쟁이 심화되고, 그 과정에서 선인세 뻥튀기와 같은 일도 발생한다.

어지간한 경제·경영 분야 외서의 경우에는 1만~2만 달러는 내밀지도 못한다. 고작 한두 쪽짜리 제안서를 보고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을 선인세로 걸어야 하는 건 현실이다.


ⓒ프레시안(손문상)
문제는 이렇게 선보인 책들마저 2007~2008년의 금융 위기를 설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후 영미 권에서는 20세기 초반의 대공황을 분석하는 책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파생상품으로 거미줄처럼 얽힌 자본 시장과 그 구조를 속 시원하게 풀어주기는커녕 대공황 공포증에서 진땀만 흘린 꼴이다. 행동경제학과 같은 새로운 이슈들이 던져지기도 했지만 이른바 담론을 생산하는 대가들의 신작이 주춤한 상황이고 그래서 독자들의 갈증을 속 시원하게 풀어주는 시간은 좀 더 필요하리라는 생각이다.

김학원 : 사실 본격적인 실용서라고 하면 취미, 여행, 요리 이런 분야를 다루는 것인데, 선진국에서는 이 분야의 책들이 굉장히 팽창하고 있다. 또 이런 분야를 다루는 책이야말로 책과 커뮤니티가 결합된 형태이기 때문이다. 요리, 낚시, 여행 등의 분야를 다루는 실용서는 사회에 뿌리를 내려야 반향을 얻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 실용서 편집을 보면 그 나라 출판의 수준이 보인다. 그 사회에 뿌리를 내린 깊이 있는 편집이 실용서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 한국에서도 사회에 뿌리를 내린 한국의 실용서 출판사들이 나와야 한다. 의식주와 같은 기본적인 것부터 바람직한 라이프스타일까지 실용서를 통해서 그 사회를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실용서가 일종의 패션으로 소비되는 경향이 있다. 올해의 트렌드, 내년의 트렌드…. 이런 식으로 트렌드만 좇다가는 사회에 뿌리를 내린 깊이 있는 실용서가 등장할 수 없다. 지금 상당수 30~40대가 라이프스타일의 근본적인 변화를 꾀하고 있는데, 실용서가 이른 욕망을 포착하고 그들의 갈증을 해소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프레시안 books'를 응원한다!

이권우 : '프레시안 books'가 제대로 된 서평 매체를 표방하며 시작한 지 1월이면 만 6개월이 된다. 비교적 짧은 시간에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는 평가도 있지만, 여전히 아쉬운 점도 많이 보인다. 마지막으로 프레시안 books의 그간의 모습을 보면서 조언할 게 있다면 한 마디씩 부탁한다.

김학원 : 프레시안 books는 시대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에 탄생했다. 리뷰 문화에 대한 잠재적 요구와 필요성이 높아졌지만 가시적으로는 대다수의 방송, 언론 등 대중 매체들이 오히려 책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정보화 시대에서 지식기반 사회로 이동하고 오피니언 리더 층이 소수가 아닌 광범위한 중산층을 형성해서 시민사회의 기반과 주체들을 두텁게 해야 하는 시기에 독서 문화와 리뷰 문화의 깊이와 넓이는 사회적 담론 형성의 두터운 기반으로 작용한다.

그런 점에서 프레시안 books의 탄생은 반갑고 주목할 만 했다. '프리뷰'의 성격이 강한 신간 리뷰만이 아니라 시대적으로 주목해야 하는 주제나 관련 책들을 묶어 담론의 폭넓은 기반을 마련해주는 것도 필요하다. 아울러 시대적 흐름에 걸맞게 단순한 리뷰 매체가 아니라 이를 통한 북 커뮤니티로 확장할 수 있도록 독자 지형에서 성장한 리뷰어들을 생동감 있게 조직해갔으면 좋겠다. 늦게나마 프레시안 books의 탄생과 빠른 성장에 박수를 보낸다. 휴머니스트도 적극적으로 함께 하겠다.


ⓒ프레시안(손문상)
장은수 : 책과 온라인이 어떻게 만날 것인가 하는 것은 출판계의 오랜 과제였다. '프레시안 Books'가 처음 생겨났을 때 이제야 비로소 책과 온라인의 만남이 새로운 장을 열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누리꾼 독자들의 참여가 조금 더 활발했으면 하는 점은 있지만 지금까지만으로도 대단한 성과를 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더욱 발전하길 바란다.

이홍 : 올바른 서평의 핵심은 이해관계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다. 한국에 제대로 된 서평문화가 자리 잡지 못하는 것은 짬짜미 때문이다. 서로 밀어주고 실어주고 뭐 그런 관계 속에서는 제대로 된 분석이 어렵다. 출판사가 광고주인데 광고주를 섭섭하게 만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프레시안 books는 그런 한계의 틀에 갇히지 말았으면 한다. (출판사 보기에) 좋은 서평을 실어주기보다는 제대로 된 서평을 올리겠다는 초심을 잃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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