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문제는 점입가경이고, 남북 관계는 최악이다. 연평도에서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북한의 포탄이 날아드는 상황까지 왔다. 우발적 충돌에서 이제 계산된 제한 전쟁으로 사태는 악화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기다리는 전략도,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도 중대한 도전에 직면했다.

북한의 도발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고, 시간이 흐르면 북한의 핵능력만 강화된다. 이래도 무관심에 가까운 인내를 지속할 수 있을까? 이래도 시간은 우리 편인가?

이 난국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보복의 악순환을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아는가? 칼을 뽑으면 피를 본다. 군사적 대응은 마지막 수단이고, 스스로에게 피를 묻힐 각오를 해야 한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가?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도 있는데, 굳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담보로 최악의 순간으로 돌진할 필요가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떻게 상황이 여기까지 와버렸을까? 북한의 도발은 개입(engagement)이 사라진 상황의 반영이다. 과연 이명박 정부는 '한반도 정세의 안정적 관리'라는 대한민국 정부의 전통적 안보 책임을 다했을까?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전략적 관점에 심각한 오류가 있다. 어떤 생각이 현재의 결과에 영향을 미쳤을까? 최근 나온 이용준의 <게임의 종말>(한울 펴냄)에 해답이 있다. 그는 누구인가? 노무현 정부 말기 북핵기획단장을 역임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는 외교부의 실세 차관보를 지낸 인물이다.


▲ <게임의 종말 : 북핵 협상 20년의 허상과 진실, 그리고 그 이후>(이용준 지음, 한울 펴냄). ⓒ한울
2008년 7월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문제가 된 "'망신 외교'의 실무 책임자"(<노컷뉴스> 2008년 7월 28일자)이기도 하다. 당시 차관보였던 이용준은 금강산 관광객 총격 사건을 비판하는 내용을 의장성명에 넣으려고 했다. 그러나 다른 국가들이 '남북 정상 회담과 10·4 선언 환영' 문구를 동시에 삽입하려 하자, 두 가지 모두 삭제했다.

결과적으로 이명박 정부가 10·4 선언을 국제적으로 부정하는 모양새가 되었고, 금강산 관광객 총격 사건에 대한 국제사회의 공감을 얻는데도 실패했다. 그리고 그는 "세종연구소를 전국경제인연합의 한국경제연구원과 통·폐합시켜 한국판 보수 재단으로 만들려는 시도에 개입한"(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 발언) 장본인이기도 하다. 현재는 말레이시아 대사로 있다.

이 책은 이명박 정부의 북핵 문제와 남북 관계를 바라보는 기본 시각을 잘 정리하고 있다. 요약하면 "북한은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그래서 모든 협상은 불필요하고, 북한의 도발에 신경 쓰지 말아야 하며, 오로지 제재를 통해 굴복 혹은 붕괴시키는 것이 근본적 해결"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은 기다리는 전략의 핵심 교본이다. 왜 이명박 정부가 북한이 핵개발을 해도 '의연'한지, 평화가 사라진 현재의 한반도 정세를 예방하지 못했는지, 이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협상이 공허한 희망이라고?

나는 현직 외교관이 협상을 이토록 혐오하고, 나아가 증오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지난 북핵 협상 20년의 역사를 이용준은 "북한에 기만당해 온 세월"로 평가한다. 이 책에는 협상을 추구했던 모든 정권들이 비판의 대상이다.

노태우 정부는 남북 관계 때문에 북한 핵문제를 외면한 정부고(37쪽), 클린턴 행정부는 "제네바 합의를 통해 46억 달러짜리 경수로 발전소를 북한에 덥석 안겨준 산타클로스"(220쪽)로 조롱한다. 당연히 1994년 전쟁 위기까지 갔던 한반도 정세를 일거에 반전 시킨 카터는 저자의 눈에는 "불청객"이며, "북한에 동정적인" 사람으로 묘사된다.

심지어 부시 행정부조차 비판의 대상이다. 저자는 2007년 부시 행정부가 6년 동안의 '실패한 외교'를 접고, 대화에 나선 것을 못마땅해 한다. 2008년 10월 부시 행정부가 북한을 테러 지원국에서 해제한 것을 "임기 말 시간에 쫓겨 서두른 결과'라고 평가하며, 국무장관 라이스가 북한에 당했다고 비판한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북핵 해결 노력이야, 말할 것도 없다. 6자 회담을 추진했던 노무현 정부는 "북한을 압박하여 조속한 핵 포기를 종용하기보다 미국을 압박하여 북한의 입장을 수용토록 하는 역할"을 했다고 비판한다(155쪽). 압권은 노무현 정부가 '평화적 해결 원칙'을 강조한 것을 비판한 대목이다. 저자 같은 시각으로 보면, 그것은 순진하고 막연한 희망일 따름이다. 세상에, 참으로 특이한 철학이다.

그러면 저자의 주장은 무엇인가? 이 책에는 "북핵 문제의 원천적 해결"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예를 들어 1994년 초 전쟁 위기 직전까지 갔던 상황을 모범적인 한미 공조의 시기로 평가하는 대목이나, 부시 행정부 초기 네오콘의 정세 인식, 또는 9·19 공동 성명을 장기간 교착에 빠트린 북한에 대한 금융 제재를 높이 평가한다.

과연 협상은 순진한 희망일까? 지난 20년 북핵의 역사는 '위기-협상-교착-위기'의 과정을 반복해 왔다. 왜 협상 국면이 장기 지속되지 못했을까? 이 책은 애초에 북한은 핵보유가 목적이고, 협상은 핵개발에 필요한 시간을 버는 것이며, 그래서 한미 양국이 북한의 기만전술에 당해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난 20년의 역사는 그렇지 않다. 언제나 협상의 위기는 상호작용의 결과이고, 북한의 벼랑 끝 전술은 교착 국면의 결과로 나타났다.

벼랑 끝 전술을 쓰고, 위기를 조성한 것은 북한이 맞다. 그것을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협상 국면에서 교착 국면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한미 양국의 국내 정치 변화도 작용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1994년 제네바 합의는 클린턴 행정부가 중간선거에 패배하고, 공화당이 의회를 장악하면서 동력이 약화된 측면이 있고, 2000년 북미 관계와 남북 관계의 선순환이 이루어졌던 짧은 1년은 결국 부시 행정부의 등장으로 무산되었으며, 2005년 9·19 공동 성명의 채택은 곧 바로 추진된 대북 금융 제재로 상황이 돌변했다. 겨우 부시 행정부의 대북 정책 전환으로 2007년 1년 동안의 협상 국면이 조성되었지만, 이 책에서 자랑하듯이 2008년 이명박 정부의 등장으로 지속되지 못했다.

그래서 묻는다. 지난 20년 동안 제대로 협상을 한 적이 있는가? 최소한 2~3년 불신의 늪에 빠지지 않고, 협상 국면을 조성하기 위해 진지한 노력이 지속된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협상의 틀을 깬다면, 그 때 가서 협상의 효과에 대해 진지한 성찰을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부시 행정부의 타협을 막았다고?

이 책은 방관 정책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다리는 전략'의 핵심 논리를 잘 정리하고 있다. 이른바 이명박 정부의 '비핵 개방 3000' 정책의 이론서다.

이들은 왜, 기다리는가? 이들은 협상을 과정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핵 폐기를 단번에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단계적 해결 전략의 유혹'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차피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용준 같은 사람에게 협상은 불필요한 것이다. 그런 눈으로 보면 당연히 북한의 핵 동결을 추진한 제네바 합의는 실패한 협상이고, 2008년 신고와 검증을 단계적으로 추진하고자 했던 부시 행정부 역시 비판의 대상이다.

협상을 혐오하는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 그러나 협상은 주고받는 것이다. 협상의 결과를 이용준처럼 북한의 외교적 승리로 해석하는 것이 맞는가? 1994년 제네바 합의에서 핵 동결을 추구한 것은 부족하지만 의미가 있었다. 최소한 제네바 합의가 작동하는 시기에 북한은 플루토늄을 추가적으로 생산하지 못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초기에 이용준처럼 생각했다. 동결이 아니라, 폐기를 추진했다. 그래서 제네바 합의로는 미흡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정책을 추구한 결과는 무엇인가? 제네바 합의가 깨지자, 북한은 동결을 해제하고, 영변의 원자로를 가동하며, 연료봉을 재처리해서 최소 40㎏에 달하는 플루토늄을 손에 넣었다. 핵무기 6개에서 8개를 만들 양이다. 단계적 협상의 의미를 무시하고, 근본적 해결을 추구한 '의도하지 않은 결과'이다. 그래서 미국의 전문가들은 그것을 '부시의 폭탄(Bush's Bomb)'이라고 부른다. 실패한 외교의 참혹한 결과다.

우리는 현재 또 한 번의 '실패한 외교'가 가져온 재앙을 목격하고 있다. 이번에는 '이명박 폭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를 이 책이 제공하고 있다. 이 책은 왜 이명박 정부 출범이후 북핵 협상의 동력이 사라졌는지를 스스로 고백한다. 이용준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한국 정부의 입장은 오히려 미국의 지나치게 유화적인 입장을 견제하는 위치에 있었다"고 평가한다. 2007년의 협상 국면이 왜 2008년의 교착 국면으로 갔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저자는 이명박 정부가 부시 행정부의 타협을 막았다고 자랑한다. 참으로 자랑스럽겠다.

문제는 근본적 해결의 방법이다. 어떻게 해야 단계적 협상이 아니라, 핵 폐기라는 원천적 해결의 국면으로 진입할 수 있는가? 정말이지 알고 싶다.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저자는 그 방법으로 "북한의 위협을 철저히 무시하면서, 제재 조치의 철저한 이행을 위한 외교적 결속을 다졌"고(229쪽), "한국 정부가 더 이상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 굴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230쪽)"는 점을 제시한다.

그래서 남북 관계가 악화되고,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이 높아졌고, 동북아의 신 냉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상황이 도래했구나. 국민들의 불안감이 높아지고, 1994년 6월 이후 처음으로 전쟁에 대한 공포를 떠올리는 상황이 되었구나. 방관 정책의 고백을 보며, 한반도의 현실이 참으로 슬프다.

제재가 해법이라고, 중국 문이 열려있는데?

기다리는 전략의 핵심은 바로 제재다. 저자는 "핵 협상에서 조기에 진전을 이루려는 조바심에서 벗어나야 하며, 반대급부를 통한 북한의 비핵화라는 고정관념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한 제재 조치인 1718호(2006)와 1874호(2009)를 제재의 모델로 강조한다.

동시에 일본의 양자 제재와 더불어, 이명박 정부의 강력한 대북 제재의 논리를 설명한다. 이용준은 "한국 정부의 대북 경제 협력 중단(2008)과 무역 및 북한 관광 중단(2010)으로 북한은 연간 7~9억 달러를 상회하는 외화 수입이 불가능해졌고, 이 액수는 중국과의 무역에서 만회하기 어려운 치명적 손실"로 평가한다.

이렇게 제재하면, 그는 "북한이 핵과 미사일 전력의 증강은 물론 정상적 무역 결제마저 불가능한 상황이 도래할 것"이라고 믿는다. 나아가 "거액의 현금을 공급할 수 있는 독보적 위치에 있는 한국이 중국을 능가하는 가장 강력한 대북한 견제와 압박 수단을 보유"하고 있음을 선언한다. 그는 자랑스럽게 "그동안 남북한 당국이 이를 모르고 있었거나 혹은 알면서도 모르는 체 해 왔다"고 비판한다.

나는 금강산 관광이 관광객 총격 사건 때문에 중단된 것으로 알았다. 또 남북 교역과 위탁 가공을 비롯한 남북 경제 협력이 천안함 사건 때문에 중단된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아니다. 이 책은 그런 우발적 계기들이 없었어도 어쩌면 다른 명분으로 교류 협력을 중단했을 것이라는 강한 의지를 고백하고 있다.

이제야 알겠다. 이명박 정부가 왜 금강산 관광 재개 의지가 없는지, 이산가족 상봉을 안 해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그것이 강력한 제재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가정은 이미 실패했다. 바로 북한의 입장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문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중국과의 무역이 별거 아니라고 저자는 주장하지만, 그것은 현실을 모르는 얘기다. 중국을 국제 사회의 제재에 끌어 들일 수 있다는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중국의 대북 정책이 질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2009년 하반기다. 총리 원자바오가 10월 북한을 방문하고, 올해 벌써 김정일이 두 번이나 중국을 방문했다. 중국의 대북 정책은 2009년 중반기에 접촉을 활성화해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으로 변했다. 이 책에 나오는 중국에 관한 어이없는 판단을 보면, 왜 이명박 정부 들어 한중 관계가 악화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경제적으로 북중 무역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이명박 정부 사람들의 공통된 인식이지만, 그것은 '희망적 사고'지 현실이 아니다. 이용준은 북한의 대중 수출에서 광물이나 수산물 거래를 별거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과거의 시각이다. 북중 경제 관계는 변하고 있다. 북한의 광물 수출 잠재력은 이미 누구나 알고 있다.

동시에 남북 경제 협력이 중단되면서, 대부분의 위탁 가공 사업이 중국으로 넘어갔다. 앞으로 신의주나, 북중 접경 지역에 위탁 가공 단지 등이 만들어지면, 북한의 외화 수입은 결코 만만치 않다. 남북 경제 협력 중단으로 한국이 주도권을 잡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왜냐하면 이미 북중 경제 협력은 남북 경제 협력을 대체하고 있으며, 앞으로 그 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이다. 이용준과 같은 무지한 용기로 결국 이명박 정부는 '북한을 잃어버린' 정부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평화 체제가 북한의 전술이라고? 문제는 냉전 구조 해체!

왜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 평화라는 단어가 사라졌는지, 이 책을 읽으며 알았다. 우리는 북핵 문제를 한반도 냉전 체제의 산물로 이해한다.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반도에서 냉전 구조를 해체해야 가능하다.

1999년 대북정책조정관 월리엄 페리가 김대중 정부와의 협의 과정을 통해 만든 <페리 보고서>의 핵심 요지 역시 한반도 냉전 구조 해체를 위한 과정에서 북핵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종전 선언을 추구하고, 한미 양국 사이에 한반도 평화 체제 문제를 논의하고자 했던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책을 보면서, 이용준의 한반도 평화 체제에 대한 이해의 저급성에 또 한 번의 충격을 받았다. 저자는 2005년 9·19 공동 성명에 한반도 평화 체제 관련 조항이 들어간 것이 "북한이 평화 협정을 통해 대남 정책의 오랜 걸림돌이었던 한미 동맹과 주한 미군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해석하고 있다. 아주 오래된 낡은 이해다. 2000년 남북 정상 회담 당시 김정일 위원장이 "주한 미군의 위상과 역할만 변화한다면, 통일되어도 주한 미군이 주둔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이용준이 "노무현 정부가 평화 체제 수립과 종전 선언의 필요성을 주장한 것이 NLL 문제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대목도 놀랍다. 저자는 "노무현 정부는 NLL 문제에 대한 북한의 지대한 관심을 감안하여 그해 10월 남북 정상 회담에서 NLL 문제를 전향적으로 논의하고자 했고, 그 일환으로 종전 선언 채택을 통해 평화 체제 수립을 기정사실화하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국내 여론의 강력한 반발로 이를 백지화했다"고 썼다.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구나, 신기할 따름이다.

재야에서 뉴 라이트 운동을 하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면, 잘 몰라서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이용준은 당시에 노무현 정부의 외교 관료였다. NLL 문제는 서해 평화 정착과 관련된 문제고, 종전 선언은 전반적인 한반도 평화 체제와 관련된 문제라는 것을 정부 안에 있으면서 몰랐던 말인가? 종전 선언이 한미 양국의 외교적 협의를 통해 거론되고, 논의된 것을 진정으로 몰랐단 말인가? 평화 체제는 라이스가 먼저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 반기문에게 말했음을 알고 있지 않은가? 이해의 방법은 조금 달랐지만 말이다.

그리고 묻는다. 현재의 연평도 사태를 보며, 해법은 무엇인가? 서해 평화 정착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정책이 있는가? 저자처럼 '의연하고 결연한 대응'은 결국 보복의 악순환으로 나타나고 있다. 냉전의 바다 서해를 평화의 바다로 만들고자 했던 노무현 정부의 의지와 노력이 그렇게 싫은가? 그러면 대안을 제시해라.

그리고 아무리 평화 체제에 관심이 없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인 지식은 필요하다. 저자는 "평화 체제 수립을 통해 NLL이 폐지될 경우, 수도권 인근 서해안과 서해 5도의 안보에 치명적 위험이 예상 된다"고 경고한다. 평화 체제가 무엇인가? 그것은 군축까지도 포함하는 군사적 신뢰 구축 과정이 핵심이다.

군사적 신뢰 구축의 핵심은 저자가 좋아하는 검증의 과정을 포함한다. 평화 체제가 수립되면, 적대적 안보 관계가 해소되는데, 그런데도 그 상황에서 과거의 잣대로 안보를 걱정하다니, 근본주의자답다. 평화 협정과 평화 체제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이명박 정부의 고위 외교 관료였다는 사실이 참으로 서글플 뿐이다.

걱정이다. 이렇게 평화 체제를 무시하는데 어떻게 북핵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냉전 체제를 유지한 채,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망상일 따름이다.

협상의 종말이 아니라, 방관의 종말이다

이용준은 협상의 종말을 선언했다. 그러나 현실은 방관의 종말을 보여준다. 저자는 제재의 효과를 강조한다. 그러나 현실은 한국이 북한을 잃고 중국의 발언권만 강화시켰다. 저자는 북한의 도발을 무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번 사태로 북한의 핵능력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을 넘었다.

전쟁으로 치닫는 현재의 남북 관계를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전례 없는 '무지한 용기'가 한반도 정세를 재앙으로 몰고 있다. 현직 외교관의 신분으로 외교적 해결의 공허함을 주장하며, 외교적 갈등을 불러 올 수 있는 주장을 이렇게 공개적으로 해도 상관없는 정부가 걱정스러울 뿐이다.

외교는 어디에 있는가? 이명박 정부나 혹은 외교통상부가 저자와 같은 생각이라면, 한반도의 미래는 없다. 당신들도 이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어 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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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으로는 진보 세력이 훨씬 더 맞는 말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우리는 왜 보수 세력의 통치를 받으며 살고 있을까? 왜 국민의 다수는 노동자인데 노동자 당의 지지자는 소수일까? 누구나 한 번쯤 해보았을 법한 이런 질문을 정면으로 다룬 책이 나왔다. 엘버트 허시먼의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이근영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이 책은 제목처럼 '보수'가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를 탐구하고자 쓰인 책이다. 허시먼은 책의 집필 의도를 이렇게 밝혔다.

"내게는 대칭에 대한 타고난 욕구가 있는 것 같다. 마셜이 말한 세 가지의 연속되는 진보적 추진력을 비판하고 공격하고 조롱하는 근본적인 방법들을 살펴보면서 나는 또 다른 세 가지 대칭 명제들을 발견했다. 내가 찾아낸 것은 세 가지 근본적인 반동적/반작용적 명제들인데, 나는 이것을 역효과 명제(perversity thesis : 엉뚱한 결과를 낳는 명제), 무용 명제(futility thesis), 위험 명제(jeopardy thesis)라고 부른다." (27쪽)

이런 허시먼의 의도에 따라서 이 책의 구성도 역효과(perversity), 무용(futility), 위험 (jeopardy) 이 3가지 명제를 설명하는 구조로 되어있다. 이 책의 원제는 "Rhetoric of Reaction : perversity, futility, jeopardy"인데, 부제가 책의 내용 전체를 잘 요약하고 있는 셈이다.

허시먼은 1915년 독일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가르친 경제학자다. 그는 프랑스에서 대학을 다니던 젊은 시절에는 프랑스 군대에 자원입대하여 스페인 내전에 참가하기도 했던 열혈 실천가였다. 청년 시절 전쟁터를 쫓아다닐 정도로 열정적이었기 때문이었을까?


▲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 세상을 조종해 온 세 가지 논리>(앨버트 허시먼 지음, 이근영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웅진지식하우스
허시먼은 경제학자임에도 보수가 득세하는 이유를 경제학적으로 분석하기보다는 정치적 레토릭 같은 언어 현상에 주목해서 설명한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책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이다. 장하준이 한 수 배웠다고 인정한 경제학자 허시먼은 '세상을 지배하는 가장 기본은 결국 논리적 지배'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제 허시먼이 요약한 세 가지 반동의 수사를 살펴보자. 첫째, 역효과 명제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빚을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허시먼은 시민권의 예를 든다. 시민권의 성립과 관련해 중요한 진전이 있었던 프랑스 혁명에 대해 아담 뮐러는 이렇게 의미를 깎아내린다.

"프랑스 혁명의 역사는, 종교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은 더욱더 깊은 노예 상태로 빠져들지 않고는 자신을 억압하는 어떤 구속에서도 벗어날 수 없다는 증거를 지난 30년간 지속적으로 보여주었다." (38~39쪽)

간단한 말을 빙 돌려 적었지만, 결국 프랑스 혁명 덕분에 독자적 인간은 더 구속되었다는 얘기다.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바쳐 추구했던 구체제의 전복과 혁명이 결국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는 주장이다. 보수는 늘 이런 식의 논리를 내세워 변화의 의미를 평가 절하하고 변화를 위한 시도를 무색하게 한다.

예를 들어, 예상치 못한 산업 재해에서 노동자를 보호하고자 마련한 '산재 보험'을 보는 보수의 시각에서 이런 논리를 발견할 수 있다. 보수는 '산재 보험이 도입되면 노동자들은 일부러 자신의 손발을 자를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렇듯 역효과 명제는 '사회를 어떤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이려는 시도는 늘 의도한 것을 이뤄내지 못한다'고 선언한다.

이런 반동의 논리에 의하면 사람들이 혁명적인 기획을 추구할 때마다 애당초 의도했던 것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예상치 못한 일들이 수도 없이 일어난다. 결국 새로운 것에 대한 추구는 정반대 방향의 흐름을 동시에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둘째, 무용 명제를 한 문장으로 쓰면 이렇다. "그래봐야 아무 소용없을 것이다!" 즉, 실용성이 없다는 얘기인데 이 명제는 어디선가 자주 들어본 것 같다. 군사 독재 시절 데모하고 집에 들어온 운동권 학생에게 부모님이 많이 하시는 말씀이랑 비슷하다. '니들이 암만 그래봐야 아무 소용없다. 이놈들아!'

허시먼은 무용 명제의 한 예로 토크빌의 반동적 수사학을 제시한다.

"토크빌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 고문서 연구에 기초해, 행정의 중앙 집권화로부터 소규모 자작농의 확산에까지 이르는 떠들썩한 평가를 받은 프랑스 혁명의 성과들이 실제로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부터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심지어 토크빌은 그 유명한 <프랑스 인권 선언>이라는 것조차도, 그것이 1789년 8월에 엄숙하게 선언되기 훨씬 전에 구체제 하에서 이미 부분적으로 제도화된 것임을 입증하려 했다." (81~82쪽)

토크빌의 주장대로라면, 프랑스 혁명의 성과라는 것은 어차피 구체제에서 내려온 산물이다. 이 논리에 힘입은 반동은 '구체제 전체를 부정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 옮겨 갈 수 있는 논리적 동력을 얻게 된다. 그들의 논리 속에서 프랑스 혁명은 굳이 일어나지 않았어도 될 사건이었던 것이다.

보수파들은 '프랑스 혁명'과 '보통선거권'과 '복지 국가' 등 주요한 정치사적 변화들이 모두 '소용 없었다'라고 평가 절하해 버리는 것을 좋아한다. 예컨대, 프랑스 혁명이 도대체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토크빌) 보통선거권으로 과연 세상이 달라졌는가?(파레토) 복지 국가는 '약속한 것'을 얼마나 가져다 줄 수 있는가?

지금 상황에서 얼핏 들으면 이런 역사적 상과들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 매우 얼토당토하지 않게 들릴 수 있겠지만, 사실 보수의 논리는 상당히 정교하고 세련되었다. '파레토 최적'이니, '과두제의 철칙'이니 하는 유명한 개념도 따지고 보면 보수의 논리에서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선거권 확립을 통해 사회 권력을 민주화 하겠다는 야망은 파레토의 눈에 가소로운 것이었다. 파레토는 소득과 부의 분배를 연구한 결과 그 분배가 언제 어디서나, '파레토의 법칙'으로 알려지게 되는 매우 불평등한 고정불변의 패턴을 따르고 있음을 발견해냈다. (…) 파레토에게는 현대 사회가 사실상 금권정치임이 분명했다. 허풍선이 민주주의는 금권정치의 실상을 숨기고 있는 가면에 불과했다. 미헬스가 주장한 과두정치의 철칙 역시 모스카와 파레토의 생각을 빼닮게 모방했다." (111쪽)

셋째, 위험 명제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위험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자유를 위협할 것이며 복지 국가는 자유와 민주주의 모두를 위협할 것'이라는 요즘도 보수 언론의 칼럼에서 볼 수 있는 주장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인식을 심기 위해 반동은 정교한 논리를 추구한다. 허시먼이 대표적인 사례로 뽑은 것은 하이에크다.

하이에크는 <노예의 길> 서문에서 "우리가 민주적 시스템을 위해 치러야할 대가는 국가의 활동을 동의할 수 있는 영역으로 제한하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그는 "자유에 해로운 영양을 미치는 사회 보장 계획 같은 것"을 비판하며 "사회 보장을 위한 노력이 자유에 대한 사랑보다 더 강해지는 경향"에 대해 펄쩍 뛴다. 그는 <자유의 본질>에서도 다음과 같이 복지국가에 대한 상세하고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한다.

"자유는 정부가 특정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독점적 권한을 가지게 될 때 치명적으로 위협받는다. 그 권한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개인에 대해 임의적으로 강제력을 사용할 것이다." (162쪽)

반동의 수사학은 이렇게 진보의 길이 우리의 자유를 위협하는 위험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는 아직 자유와 복지 논쟁이 전면화되고 있지는 않지만, 허시먼이 파악한 보수의 논리대로라면 아마도 머지않아 우리나라에서도 '복지'에 대한 '자유'의 공격이 현실화 될 가능성이 크다.

저자는 이렇게 세 가지 기본 명제를 통해 반동이 지배력을 키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확인하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책이 제목을 통해 언급하고 있는 '보수'를 현재 한국적인 정치 지형 속에서 진보파와 대립되는 보수파로 인식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사실 앞에서 언급된 세 가지 명제는 그 의미를 일반화시켜서 생각해 볼 때, 굳이 보수층만의 논리라고 보기는 힘들다. 책이 강조하고 있는 반동의 레토릭 세 가지는 비단 보수층만의 무기라기보다는 논리적인 장애물을 설치하고 싶은 누구나에게 적용되는 것들이다.

최근 "모든 의료비를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이 개시되었을 때, 같은 진보 세력 안에서도 '그것을 하면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역효과 명제), '해봤자 소용없다'(무용 명제), '오히려 무상 의료를 방해할 위험이 있다'(위험 명제) 등의 논리로 이를 거부했다. 허시먼이 언급한 세 가지 명제는 어떤 주장, 행동 요청이 제기될 때, 이를 거부하는 논리적 수법이다.

따라서 책의 본문에서도 보수라는 용어보다는 '반동(reaction)'이라는 개념을 주로 쓰고 있다. 허시먼이 정리한 세 가지 명제는 보수의 논리라기보다는 주로 변화와 행동을 촉구하는 시도에 대해서 반론을 제시하거나 장애물을 설치할 때 쓰는 세 가지 기본 수법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사실 세상에는 객관적으로 역효과가 나오는 일도 있고, 객관적으로 효용이 없는 것도 있고, 객관적으로 위험한 것도 있기 때문에 역효과, 무용, 위험 같은 세 가지 명제 자체를 모두 보수의 논리라고 부정해 버릴 수는 없다. 우리가 이 책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은 결국 '보수의 논리'라기보다는 '논리가 세상을 지배한다'는 사실 그 자체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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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사태로 해직됐던 국어 교사가 복직했다. 오랜만에 만난 아이들 앞에서 열정적으로 수업을 하던 어느 날, 교과서에 나온 몇몇 작가들의 친일 이력이 화제가 됐다.

문득,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 ○○도, 그리고 △△도 친일 작가잖아요."

그 아이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교사는 문득 '이건 아닌데' 싶었다. 너무 쉽게 나온 정답이 조금 불편했던 게다.

적어도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는, 누가 친일 이력을 지닌 작가인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금기가 아니다. 예컨대 서정주가 친일파였다는 점을 이야기하면서 마음을 졸여야 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지금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누가 어떤 친일 행각을 했는지에 대한 지식 그 이상이다. 일제 강점기와 비슷한 상황이 또 닥쳤을 때, 친일파와 닮은 선택을 하면 더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지만, 그럼에도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있게끔 하는 힘, 그러면서도 당당한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을 키워주는 게 교육의 진짜 목적에 가까울 게다.

아무런 머뭇거림이 없는, 너무 쉬운 대답이 교사에게 불편했던 것은 바로 이 대목이었다. 지금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충분한 머뭇거림의 기회가 아닐까 싶었던 게다. 아이들이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지식인들의 처지에 깊이 감정이입을 해보고 나서, 충분히 망설인 끝에 '그래도 친일 행위는 옳지 않다'는 답을 끌어내게끔 했어야 했다는 게다.

너무 쉬운 정답의 위험

오래 전에 한 잡지에서 읽은 칼럼 줄거리다. 기자 노릇으로 밥벌이를 하면서, 문득문득 이 칼럼을 떠올린다. '나는 지금 충분히 머뭇거리고 있는가. 너무 쉬운 정답을 이야기하며,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건 아닌가.'

아무런 머뭇거림 없이 너무 쉽게 정답을 말하는 이들, 쉽게 이야기하는 만큼 책임도 가볍게 여기는 이들이 흔하다. 정답을 이야기했으므로, 그들은 늘 자신만만하다. 하지만 그들이 진짜 원하는 것은 '내가 옳다'는 확신, 혹은 '내 말이 맞다'는 자기만족 아닐까.

만약, 다른 방식으로 이런 종류의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면, 그들은 굳이 정답을 이야기할 필요를 못 느끼지 않을까. 그리고 어쩌면 나 역시 이런 '그들' 가운데 한 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의문이 들 때면, 종종 역사책을 펼친다. 역사에는 정답이 없다. 다만, 거친 시간의 모래바람 속에서 비틀거리며 걸어가다 결국 모래 속에 파묻힌 인간들의 발버둥이 있을 따름이다. 어떤 이들은 역사를 소송에 임하는 변호인처럼 이용한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료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쌓은 논리는 결국 무너지기 마련이다. 우주에 비하면 먼지처럼 미미한 게 인간의 역사지만, 개인의 독선으로 왜곡하기에는 바다처럼 넓은 게 인간의 역사다.

"태평양 전쟁에서 누가 이겼나요?"


▲ <쇼와사 : 일본이 말하는 일본 제국사>(전2권, 한도 가즈토시 지음, 박현미 옮김, 루비박스 펴냄). ⓒ루비박스
한도 가즈토시의 <쇼와사>(박현미 옮김, 루비박스 펴냄) 두 권을 읽고 난 소감도 비슷했다. '일본이 말하는 일본 제국사'라는 부제를 지닌 이 책은 '1926~1945 전전편'(戰前篇, 1권)과 '1945~1989 전후편'(戰後篇, 2권)으로 돼 있다. 제목에 있는 '쇼와'는 히로히토 일본 왕 시대의 연호다. <문예춘추> 편집장 출신으로 다양한 역사 소설을 썼던 저자가 1926년부터 1989년까지를 가리키는 쇼와 시대의 역사를 대중에게 강의한 내용을 정리해서 낸 책이다. 저자는 지난 2000년 초 한 젊은이로부터 "태평양 전쟁에서 누가 이겼나요"라는 질문을 받고 이 책을 낼 결심을 했다고 한다. 역사에 무관심한 세태에 충격을 받았던 것.

무모한 전쟁을 일으킨 끝에 패망했던 역사를 모른다면, 일본 국민이 과거의 잘못을 또 저지르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게다. 그래서 1945년 히로히토가 항복 선언을 하기 전을 다룬 1권의 주요 내용은 '다이쇼 시대(히로히토의 전임 일왕인 요시히토 일왕 시대)에는 제법 민주적이었던 일본이 어쩌다 극단적인 군국주의로 내몰렸고, 결국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하게 됐나'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맹렬한 자기 확신에 찬 육군 장교들, 목적이 옳으면 수단은 가리지 않아도 된다고 믿는 그들은 제멋대로 만주를 침략했고, 정치인들은 이들에게 끌려 다니기만 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을 지배했던 극단적인 군국주의는 하루아침에 생긴 게 아니었다.

독선에 휘둘리는 정치, 성찰 없는 지식인

복잡하고 피폐한 현실을 똑바로 볼 용기가 없었던 일부 군인들은 '국가의 영광' 따위의 추상적인 가치로 판단력을 마취시켰다. 그리고 당시 일본 사회는 차분한 논리로 군인들의 독선과 전횡을 바로잡을 힘이 없었다. 예컨대 '황도파'라 불리는 청년 장교들의 쿠데타 시도인 2·26 사태의 앞뒤를 묘사한 대목을 보면, 이런 문제가 단지 정치적 파워게임 차원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된다. 자아도취와 독선에서 벗어나 현실을 냉정하게 돌아보게끔 하는 성찰의 힘이 당시 여론을 주도하던 지식인들에게도 부족했다.

그 결과, 정신력으로 물질적 열세를 극복할 수 있다는 허무맹랑한 정신주의가 판을 치게 됐고, 일본 사회는 군국주의의 수렁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어차피 허무맹랑한 주장이 판치는 사회에선 비판이 설 자리가 없다. 누가 더 극단적인 목소리를 내는지를 놓고 경쟁할 따름이다.

여기에 제동을 걸어야 할 언론은 오히려 이런 경쟁을 부추겼다. 모든 사람이 속보에 민감해지게끔 하는 전쟁은 언론사들에게 거대한 돈벌이 기회였고, 당시 일본 언론은 선정적인 제목으로 독자를 선동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저자가 인용한 <아사히신문> 등 일본 신문의 전쟁 관련 보도를 보면, 말 그대로 가관이다. 병사가 총알이 몸을 뚫고 지나가는 것도 모르고 기관총 방아쇠를 당겼다는 이야기가 버젓이 기사로 실린다.

"국민적 열광은 위험하다"는 보수 지식인

우리로 치면, <월간조선>쯤 되는 잡지인 <문예춘추> 편집장을 지냈던 저자는 이런 일본의 과거에 대해 몹시 비판적이다. 이 책을 낸 이유 자체가 '태평양 전쟁 당시 같은 국민적 열광', '추상적인 관념론에 휘둘린 나머지 구체적이고 이성적인 논의를 거부하는 태도' 등에 대해 경고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문예춘추> 편집장이라는 이력에 비춰보면, 조금 의외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일본 보수 지식인 중에도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헌법을 수호하려는 이들이 꽤 있다. 이 책의 미덕은, 일본의 어리석은 역사를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는 데 있다. 일본 근·현대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 잡으면 놓기 힘들 만큼 흥미로운 책이다. 저널리스트 출신답게 '팩트'에 충실하면서도 묘사는 구체적이다. 예컨대 이런 대목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미군이 와서 점령한다면 남쪽 섬이나 어딘가로 끌려가 평생 노예가 될 거라고 배웠습니다. 정말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될 거라면 그 전에 빨리 이것저것 다 해보자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방공호에 들어가 담배를 피웠습니다. 무슨 맛인지 전혀 몰랐지만 불량스러운 동급생들과 뻐끔뻐끔 피워대면서 '맛있지?' '어, 진짜 맛있다'라고 (…) 바보 같은 이야기를 나눴던 것도 기억합니다."

'팩트'와 '진실' 사이…저자가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것들

그러나 이 책의 미덕은 딱 여기까지다. 저널리스트 출신의 장점은 다른 한편으로 역사적 진실을 가리는 데 사용된다. '팩트'에 안주하는 논리가 지닌 함정이다. 예컨대 이런 대목이 그렇다.

"남경에서 일본군에 의해 대량 학살과 각종의 비행 사건이 일어난 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이라 저는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중국 국민에게 마음속 깊이 사죄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중국이 도쿄 재판에서 말했던 것처럼 30만 명을 죽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남경 시민을 소개(疏開)한 상태라 시민이 30만 명이나 남아 있지 않았고, 군대도 그렇게 많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일본의 과거에 대해 사죄한다지만, 속마음은 다르다는 느낌이 드는 대목이다. 저자의 주장처럼, 남경 대학살의 피해자 수가 정확히 30만 명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게 "태평양 전쟁에서 누가 이겼는지도 모르는" 독자들에게 꼭 필요한 내용일까.

허무맹랑한 정신주의, 합리적 비판을 못 견디는 독선은 분명히 잘못이다. 하지만 사소한 숫자에 집착하면서 진실을 감추는 태도 역시 잘못 아닐까. 이런 의문이 들게끔 하는 대목은 이 책의 곳곳에 있다.

히로히토 일왕을 한편 비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묘하게 두둔하는 듯한 대목도 있다. 일본의 한국 침략, 그리고 그 이후 저지른 잘못들에 대한 서술이 거의 보이지 않는 대목 역시 명백한 한계다. 또 전쟁 이후 사망한 것과 다름없던 일본 경제가 한국전쟁을 거치며 살아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 너무 짧고 단편적이라는 느낌도 든다. 저자는 전쟁으로 패망했던 일본이 남의 나라 전쟁을 어떻게 이용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일본 독자들에게 불필요하다고 봤던 걸까.

"선동에 책임지지 않는 그들에게 속지 않으려면…"

<프레시안> 독자들에게 이 책을 소개하기가 망설여졌던 것은 그래서였다. 하지만 결국 소개하기로 했다. '비판적 독서'를 한다면, 충분히 배울 게 있는 책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일본 근현대사의 초보자라면 특히 그렇다.

오히려 의심하고 비판하면서 읽는 경험은, 허무맹랑한 선동 앞에서 정신을 잃지 않게 하는 힘을 키워줄 수 있다. 한국에도 요즘 전쟁을 선동하는 이들이 눈에 띈다. 우리 국민이 죽었으므로 보복해야 한다는 주장은 너무나 명료해다. 쉽게 반박하기 힘들어 보이는, 이런 '쉬운 정답'을 요란하게 떠들다 보면, 복잡한 현실도 잊을 수 있다. '자아 도취' 용으론 딱이다.

하지만 아무런 머뭇거림 없이 손쉬운 답을 떠드는 이들에게 역사가 남긴 교훈이 있다. 정신력만 튼튼하면 거대한 미국도 이길 수 있다며 숱한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군부 실력자 도조 히데키는 패전 이후에도 살아남았다. 형식적인 자살 시도를 했지만, 그가 정말 죽으려 했다고 믿는 이는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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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매니페스토다. 겉으로는 사회 물리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지지하고 설명하는 무해한 성명으로 보이지만, 내심의 의도는 좀 더 공격적이다. 이것은 기존의 사회학과 경제학 등 전통적인 사회과학의 방법론을 용도 폐기하겠다는 저의가 담긴 도전적인 매니페스토다.

사회 물리학(social physics)은 물리학의 방법론을 끌어들여 사회를 이해하려는 시도다. 관심의 대상이 되는 사회가 하나의 '계'라면 그 집단을 이루는 개인은 하나의 '원자'나 '분자'다. 사람을 '사회적 원자'로 간주하고 그 입자들 사이의 조직과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것이다. 이때 주로 동원되는 과학적 도구가 응집물질 물리학이니, 복잡계 과학이니, 네트워크 과학이니 하는 것들이다.


▲ <사회적 원자>(마크 뷰캐넌 지음, 김희봉 옮김, 사이언스 북스 펴냄). ⓒ사이언스 북스
재미는 있을 것 같지만, 바투 잡아 읽기도 전에 왠지 비판이 하고픈가? 무리가 아니다. 한 분야의 방법론을 전혀 다른 분야에 적용한 시도가 흥미로운 유비 이상을 낳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러나 섣불리 단정 짓지 말고 좀 더 들어보자. 이론 물리학을 전공했고 <네이처> 등에서 편집자로 일했던 저자는 물리학의 방법론을 사회에 적용하면 괜찮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사회 연구에 있어서도 유일하게 옳은 방법이라고 감히 주장한다. 어째서일까?

물리학은 입자들의 상호작용으로 모든 현상을 설명한다. 이때 전자면 다 같은 전자이지, 전자 A와 전자 B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전자가 같은 물리 법칙을 따르기 때문에 그들이 가령 금속에 있을 때나 자기장에 걸렸을 때 어떤 행동을 취할지 과학자들이 서술할 수 있다. 전자 A와 전자 B가 각자 취향에 따라 다른 물리 법칙을 따른다면 과학은 가망이 없다.

사회 물리학의 핵심 가정이 바로 이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같은 법칙을 따른다는 것. "나는 그렇지 않다"고 분개할 독자도 있겠으나, 안타깝게도 실제로 그렇다고 말하는 심리학적 관찰과 실험 증거들이 속속 쌓이고 있다. 집단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사회적 원자들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힘을 받느냐 하는 조직의 문제다. 사람이 아니라 패턴을 보라는 것이다.

저자는 '기존의' 사회과학이 이런 방법론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단언한다. 기존의 사회과학은 사람을 헤아릴 수 없이 복잡한 존재로 생각했다. 무수한 욕망, 동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생각했다. 따라서 개인에 대한 모형을 먼저 구축하여 그로부터 집단의 행동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백날이 가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렇기에 서로 다른 현상들 사이의 상관관계를 밝히는 데에서 그쳤다. 그러나 저자가 보기에 그것은 인과의 메커니즘이 결여된 서술이므로 영원히 과학일 수 없다. 하물며 예측이 불가능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인간에 대한 모형으로부터 출발한 인간 과학이 하나 있기는 하다. 경제학이다. 그러나 고전 경제학이 가정한 합리적, 초이성적 인간이라는 모형은 틀렸다. 인간은 분명 계산 기계이지만 '오류 본능'이 있는 기계다. 수렵 채집 시절에 진화한 인간의 뇌는 그 시절의 생존에 도움이 되었던 방향으로 갖가지 편향들을 갖고 있다. 한편으로는 특정 종류의 패턴을 읽는 데 능하고, 무엇보다도 끊임없이 적응하는 데 능하다. 저자는 인간을 범용 컴퓨터로 가정한 고전 경제학의 실수를 요목조목 야멸치게 따진다. 선전포고라고 여기기에는 지나치게 차분한 태도이지만 그것은 저자가 사회과학의 실패를 기정사실로 여기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사회 물리학은 얼마나 더 나을까? 저자는 지난 수십 년간 심리학과 진화생물학이 눈부시게 발전함으로써 비로소 우리가 그럴싸한 인간 모형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사회적 원자 모형의 특징은 두 가지다. 첫째, 적응한다는 것. 둘째, 서로 모방한다는 것. 이 모형에 기반을 두고 집단의 패턴을 시뮬레이션함으로써 과학자들은 어째서 멀쩡한 청년들이 아부그라이브에서 고문자로 돌변했는지, 어째서 21세기에 보스니아와 르완다에서 인종 학살이 자행되었는지, 어째서 타임스스퀘어가 자생적으로 활력을 되찾았는지, 어째서 인종주의가 없어도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은 따로 몰려 사는 경향이 있는지, 어째서 영화관 비상구 앞에 탁자가 하나 놓여 있는 편이 대피를 매끄럽게 해주는지, 어째서 주가는 영원히 오르락내리락하고 간간이 급변을 겪는지 이해할 수 있다. 저자는 심지어 인간의 이타주의와 배타성이라는 동전의 양면도 이 모형으로 충분히 설명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복잡한 문제라면? <가디언>의 칼럼니스트 제임스 하킨은 <미래 시민 개념 사전>이라는 책에서 사회 물리학에 대해 이렇게 지적했다.

"축구 시합이나 교통 정체보다 더 골치 아픈 사태에 직면하면 (사회 물리학은) 곧바로 바람 빠진 풍선처럼 초라해진다."

이에 대해 뷰캐넌은 아마 번지수를 잘못 찾은 비판이라고 응수할 것이다. 문제는 사회 물리학의 방법론이 옳은 방향인가 하는 것이지, 그것이 현재 어느 범위의 문제들을 해결해주느냐가 아니다. 복잡한 상황을 핵심 요소들로 단순화한 뒤 그 모형을 실험과 관찰을 통해 실세계에서 확인하는 것이 올바른 접근법인 이상, 사회 물리학의 관점은 기존의 어떤 시도보다 우월하다는 게 뷰캐넌의 생각이다. 사회적 원자 모형도 단순하기는 하되 합리적 인간 모형보다는 낫고(후자는 아예 틀렸으므로), 인간 심리와 진화 역사에 대한 증거들에 부합하며, 성공적인 설명의 사례들을 볼 때 전도가 유망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축구 시합이나 교통 정체를 넘어선 현상들에 대해서도 언젠가는 '예측'이 가능하리라고 본다. 다만 이때의 예측이란 집단의 행위에 대한 통계적 이해다. 기체의 성질은 예측할 수 있어도 기체 분자 하나의 구체적 행태는 (불가능하지는 않을지라도) 사실상 예측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식의 예측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마침내 인간에 대한 과학도 물리학처럼 예측이 가능한 진짜 과학이 되지 않겠는가!

사회 물리학의 포부는 이렇듯 거창하지만, 책은 전혀 어렵지 않다. 이 짧은 서평에서는 다 언급하지도 못할 만큼 풍성하게 각종 사례 연구들이 소개되어 있으니, 그저 재미 삼아 읽을 만도 하다. 제3자 독자의 입장에서는 여러 분야의 연구자들이 이 글을 읽고 화끈한 논쟁을 벌여주었으면 하는 얄미운 바람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자기 조직화, 멱함수 법칙, 무작위 걷기, 두꺼운 꼬리 등의 개념을 다룬 책들이 많았다. 하지만 <사회적 원자>는 낱낱의 발전들을 하나의 틀로 묶는 데 주력하기에, 독창성이 부족하다 해도 의의가 충분하다. 다만 사례 연구들의 수학이나 모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으므로(한 마디로 수식이나 그래프는 없다는 말이다), 깊은 소개가 궁금한 독자는 <물리학으로 보는 사회>(필립 볼 지음, 이덕환 옮김, 까치 펴냄)의 후반부를 참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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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장정일은 이명박 대통령의 자서전 <신화는 없다>(김영사 펴냄)를 읽으며 두 가지를 유심히 봤다고 한다. 하나는 이 대통령이 어떤 책을 읽었느냐고, 둘은 학창 시절 그에게 영향을 준 스승의 유무다. 그러나 소설가는 책을 덮을 때까지 두 가지 질문에 대한 개운한 대답을 얻지 못한다.

이 대통령은 "틈나면 어디서나 책을 읽었고 사색에 잠겼다"고 하지만, "감질나게도 도서명은 (자서전)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다. 스승으로 여기고 따른 이에 대한 언급도 없다. 그의 상징이 된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입버릇처럼, 자신의 체험을 훨씬 더 중요시하기 때문일까. 하긴 홀로 모든 것을 해내는 '슈퍼맨'들도 더러 있긴 하다.

그렇지만 이렇게 '독고다이'로 고군분투하는, "쓰러뜨려 목을 밟고 있어도 항복하지 않을 사람"(고 정주영 회장의 인물평)은 어쩐지 매력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다가오지 않는다. 어린 시절 헬렌 켈러의 위인전을 읽고 설리번의 가르침에 감명을 받아 본 사람이라면, 우리가 어떤 사람을 이야기할 때 왜 스승이나 독서 경험에 주목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둑알처럼 홀로 있을 땐 아무 것도 아니지만, 다른 바둑알의 위치에 따라 맺어지는 관계 속에서 생동하는 것이 바로 사람이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대학교(버클리) 국제관계소에서 1982년부터 '역사와의 대화'라는 명사 초청 대담 프로그램을 진행해 온 해리 크라이슬러도 대화에 초청한 이들에게 '관계'에 대한 질문부터 던졌다. "부모님이 성격 형성에 어떤 영향을 끼쳤습니까?", "식사 시간엔 주로 정치 얘기를 했나요?", "책 중에서 두드러지게 영향을 준 책이 있나요?"…. 크라이슬러는 명사들이 원래 대단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갖가지 요소의 기묘한 뒤섞임"이 있었기에 지금처럼 존재하게 됐다는 것을 발견한다.


▲ <진실에 눈을 뜨다 : 우리 시대 대표적 리더와 사상가 20인의 인생을 바꾼 정치적 각성의 순간들>(해리 크라이슬러 지음, 이재원 옮김, 이마고 펴냄). ⓒ이마고
크라이슬러는 2009년까지 475명 이상과 나눈 이 '역사와의 대화' 가운데 20편을 엄선해 <진실에 눈을 뜨다>(이재원 옮김, 이마고 펴냄)라는 책으로 묶어냈다. 세계적인 언어학자 놈 촘스키, 미국의 제국주의를 비판해온 지식인 찰머스 존슨,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오에 겐자부로, 반전 메시지를 담은 영화를 만들어 온 영화감독 올리버 스톤 등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름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크라이슬러가 던지는 질문을 따라 매력적인 자신의 과거를 풀어내고, 1시간짜리 대화는 한 편의 자서전이 된다.

가령 <미국 민중사>를 통해 미국인들이 공유하던 승자독식의 역사관에 일격을 가한, 역사학자 하워드 진의 각성은 부모님이 푼돈을 모아 사 준 찰스 디킨스의 전집에서 시작됐다. 그는 디킨스를 읽으며 "근대 산업 체계가 얼마나 잔인한지, 그 체제가 사람들에게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그 체제 속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희생되는지, 정의가 가난한 이들을 어떻게 배반하는지"를 학습했다. 노동자 계급의 가정에서 태어나 10대 때 조선소에 취업한 그의 태생적인 배경이, 같은 계급의 모순을 다룬 디킨스의 책을 만나 화학 작용을 일으킨 것이다. 진은 "이미 얼마간 자리 잡고 있던 믿음을 디킨스가 정당화해 준 것"이라면서 이렇게 설명한다.

"책을 읽다보면 종종 얻게 되는 경험이죠. 그러니까 마음 깊숙이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비단 너 혼자만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겁니다."

베트남 전쟁 관련 비밀문서인 '국방부 문서(펜타곤 페이퍼)'를 <뉴욕타임스>에 넘김으로써, 관료로서의 경력을 말끔히 포기한 대니얼 엘스버그의 '독서 경험'은 더욱 흥미롭다. 어린 시절부터 대통령을 위해 일하는 것을 꿈꿔왔고 실제로 아이젠하워, 케네디, 존슨 밑에서 일했던 그는 1969년 국방부 문서를 읽는 순간 대통령을 위해서 일하겠다는 욕망이 완전히 소진됐다고 말한다.

7000쪽에 달하는 일급비밀 문서를 읽으며 그는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승전할 희망이 거의 없으며, 트루먼(33대)부터 닉슨(37대)까지 모든 대통령이 패배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조언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대통령들이 대중을 기만하고 확전을 외치는 모습을 보면서, 엘스버그는 "행정부 내부에서 대통령의 생각이 바뀔 희망은 거의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나아가 그런 '생각'을 폭로라는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던 것은 징병을 거부하고 감옥에 들어가기로 결심한 랜달 킬러라는 젊은이와의 만남 때문이었다. 킬러를 통해 엘스버그는 지적이고 헌신적인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행위가 '감옥행'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자신에게도 감옥행만큼의 각오를 촉구하게 된다.

때마침 그는 간디와 마틴 루터 킹의 책을 읽고 있었으며, 자신이 읽은 것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덧붙인다. 그 간의 경력을 송두리째 버릴 결심을 앞두고, 엘스버그는 하워드 진이 디킨스로부터 받은 것처럼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비단 너 혼자만은 아니다'라는 위로를 받은 것이다.

한편, 크라이슬러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대담에 초청된 이들은 "세상을 예전과 달라지도록 만든 인물들"이다. 따라서 자신이 정치적 각성의 순간을 얘기하는 지점에서 청중들의 정치적 각성을 유발하고 있다.

책에 등장한 명사들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현재까지 어떤 일들을 일으키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로 <위키리크스>를 들 수 있다. 찰머스 존슨은 타계하기 3개월 전인 지난 8월 쓴 칼럼에서 "국방부 문서를 유출한 대니얼 엘스버그는 분명 놀라고 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당시는 마침 <위키리크스>가 9만 2000건의 아프간 전쟁 관련 비밀문서를 터트린 때였고, 제보자로 지목된 건 '내부자'인 미국 육군의 일병 브래들리 매닝이었다.

존슨에 의하면 엘스버그는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자신과 같은 행동을 해야 한다고 요구해 왔는데 매닝 일병의 행동이 "거기에 대한 응답이 나오고 있는 셈"이었던 것이다. 병역거부자 랜달 킬러의 용기 있는 행동이 대니얼 엘스버그의 인생을 바꾸었고, 엘스버그는 매닝과 같은 폭로자들을 고무시키면서 영향력을 환원하고 있는 것이다.

명사들이나 명사들에게 영향을 준 사람 모두는 무언가를 알고 있다면 반드시 그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공통의 의식을 갖고 있다. 그래서 알고 있는 바를 여러 사람에게 나누는 것이 이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흑인 정치가 론 덜럼스는 "일단 불의를 보게 되면 책임으로부터 물러설 수 없다"는 말로 앎에 따른 책임을 강조했으며 전염병학의 권위자 에바 해리스는 "대학의 정문 앞에서 세계가 끝난다는 과학자들의 사고방식을 참을 수 없다"며 직설한다.

여전히 세상은 개인의 각성과 무관하게 흘러간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으며 모든 구호와 교육이 무용하단 입장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스라엘 일간지 <하레츠>의 통신원인 아미라 하스의 말만은 곱씹어 보자.

유대인이지만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불법 점령 정책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해 온 하스는 다른 명사들과 달리 자신이 무력하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글을 읽었고 공감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이스라엘인들에게는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이렇게 덧붙인다.

"글쟁이 한 명이 뭔가를 바꿀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러려면 운동이 필요합니다. 일종의 사회운동, 거리로 뛰쳐나가 분명히 외치는 사람들의 특정한 행동이 필요한 거죠. 그러면 대중매체의 목소리와 그 외부에 있는 거리의 목소리, 사회운동의 목소리가 서로 상호작용해 뭔가를 바꿀 수 있거나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정치'란 권력의 관계를 이해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정치적 각성'을 보여주고 이끈다는 <진실에 눈을 뜨다>의 대담은, 단순히 출연자들의 업적을 나열하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명확하게 보도록 해주는 경험을 추적하고자 한다. 국민 건강보다는 농산복합체의 이익에 복무하는 농업법, 평범한 중산층 가정을 몰락으로 이끄는 거대한 정치경제 시스템 등 페이지마다 미국이란 나라의 모순이 줄줄이 따라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정치가 권력 관계를 이해하는 작업임을 이해한다면, 'CEO' 이명박 대통령을 '역사와의 대화'에 모시기 어려운 이유가 명백해진다. "(경영 개념을 도입한 통치는) 국가를 위해 더 많이 벌고, 벌어들인 것을 국민이라는 고객에게 환원해야 한다"는 것이 <신화는 없다>에서 그가 밝힌 CEO 대통령 개념에 대한 청사진이다.

많이 벌어다 주는 경영자가 고객으로 모셔준다는데, 촌스럽게 권력 관계니 정치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다만 그는 의도치 않게 많은 '고객'들을 정치적으로 각성하게 했는데, 국가가 어떤 권력 관계 속에서 무엇을 벌어들이고, 나눠주는지 모르는 (혹은 나눠받지도 못한) 이들이 '제 돈 주고' 촛불을 사 든 것이 그 좋은 예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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