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어느 60대 노부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장례비와 영정 사진, "자식들에게 누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짤막한 유서만 남긴 채였다. 지난달에는 평소 '행복 전도사'로 불렸던 최윤희 씨마저 자살을 택했으니, 사람들은 더 이상 이런 뉴스에 놀라지 않을 수도 있겠다.

평생을 달려오다 겨우 숨고르기에 들어가는 60대. 사계절을 한평생으로 비유하자면 딱 지금 같은 때다. 가을 한 철 그 색을 폭발했다가 이제는 잔해처럼 도로 위에 눌러 붙은 은행잎처럼, 우리의 윗세대 60대도 지쳐 있는 것은 아닐까. 행복에 대해, 자신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시, 나이 듦에 대하여>(웅진지식하우스 펴냄·이하 <다시>)는 아무 준비 없이 겨울을 기다리는 이들을 위로하는 책이다. 저자인 여성학자 박혜란은 올해로 64세. 그는 60대에 접어들면서 자신 역시 "작은 일에도 서글프고, 미래가 불안하고, 사는 게 무거워 징징댔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지난달 펴낸 <다시>에서 박혜란은 "이제는 열렬하게 나이 듦을 껴안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나이 드는 거 생각보다 괜찮은 일"이라는데, 괜히 하는 말이 아닐까? 지난 10일 서울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그를 직접 만났다.


▲ 여성학자 박혜란 씨. ⓒ프레시안(최형락)

나이 얘기, 너무 하지 말자?

박혜란이 2001년 <여성신문>에 연재하던 에세이를 모아 <나이 듦에 대하여>(<나이 듦>)를 펴냈을 때만 해도 연상의 선배들로부터 "아직도 젊은 것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 그 나이의 사람들을 보니, 새파랗다"고 스스로도 말한다. 하지만 60대의 기록이라고, 50대의 기록에서 특별히 달라지거나 색이 바랜 건 아니다. 여전히 '박혜란'일 뿐이다.

"10년 사이에 자식들이 모두 결혼해 벌써 손자·손녀가 다섯이야. 공식 명칭이 할머니가 됐어. 그런데 정작 할머니가 되니까, 전에 막연하게 생각했던 할머니의 상 같은 게, 다 깨지는 거야. 오히려 할머니로 불리든 어머니로 불리든 나는 나구나 하는 생각이 강해지더라고."

할머니라지만, 웬만한 연하의 사람들보다 발이 부지런한 박혜란에게 "그 연세에 참 체력 좋으십니다" 이런 칭찬은 안 하느니만 못한 얘기다. 그는 젊은 TV 리포터가 50대 출연자에게 '어르신' 소리를 늘어놓는 것을 보고 실소를 터뜨린다.

"몇 살 덜 먹은 거, 몇 살 더 먹은 거, 너무 의식하지 말고 살자."

젊은 세대에 대한 '지질하다'는 식의 편견을 놓고도 박혜란은 고개를 젓는다.

"우리 또래도 모이면 요새 젊은 것들 생각이 없다, 뭐가 없다, 미래가 암울하다, 이렇게 욕하는데 말이야. 그런데 실제론 안 그래. 얼마나 훌륭한데. 집에서 젊은이 셋을 보면서 느낀 건데 나보다 훨씬 나아. 우리보다 많은 자극을 받으며 자랐잖아."

'모든 나이는 아름답다'는 말은 단지 듣기 좋은 수사가 아니다. 팩트다. 물론 사람마다 다를 터다. 얼굴이 다르듯이 생각이 다른 법이다. 젊은이만 나이 드는 것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다. 이미 나이 든 사람도 마찬가지다. (195쪽)


ⓒ프레시안(최형락)

나이를 잊자? 나이를 받아들이자!

박혜란의 <다시>는 '나이를 잊자'라든가 '젊게 살자'는 식의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다. 인생역전이나 남들이 우러러보는 삶을 조망한 에세이 속에서 그는 맨밥 같은 글을 선보였다.

"내가 사는 이야기, 특별한 게 없어. '나한테 배워라' 이런 의도로 책을 낸 게 아니야. 한창 강단에 섰던 10년 전만 해도 가르치는 게 익숙해선지 약간의 메시지를 주려는 생각이 있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비웠어. 그냥 내가 사는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넌 어떠니' 하고 말 거는 기분으로 썼어.

내 또래들이 책을 읽고서 이런 감상을 들려줬어. '어쩌면 넌 나랑 사는 게, 느끼는 게 그렇게 똑같니?'. 그 친구들이 그냥 마음에 담아둔 것을, 나는 이렇게 썼을 뿐이고."

새로 나온 글 모음은 전작보다 훨씬 편안하다. <나이 듦>을 쓰던 무렵인 쉰 초입엔 진통제 한 번 안 먹고 살던 체질이었던 그가 응급 환자로 전락한 상황이었다. 그때 펴낸 <나이 듦>에서는 "지금 기록하지 않으면 잊힐 것 같은 느낌"에서 "사명감"을 드러냈었다. 그러나 <다시>는 느긋하다.

"건강한 사람들 착각이 자신만은 죽을 때까지 안 아플 거라는 거야. 50대 초반에 나도 그랬어. 그런데 아프고 나니까 깜짝 놀랐지. '몸이 말을 걸어왔구나!' 지금은 이곳저곳 병이 생겨도 놀라지 않아. 몸이 나이 듦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거지."

새삼스런 속편, 그 배경은…


▲ <다시, 나이 듦에 대하여>(박혜란 지음, 웅진 지식하우스 펴냄). ⓒ웅진지식하우스
몸이 받아들이는 자연스러운 변화를 새삼스레 '다시' 꺼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이 듦>은 연재물이 누적됐었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이번엔 미발표 원고들이다. 게다가 평소엔 메모도 전혀 하지 않을 정도로 기록에 인색한 그다. 고로 <다시>는 기획에 따라서 백지에 써내려간 글이다.

"지난번 내 책은 나이 든 사람보다 젊은 사람한테 많이 읽혔다더라고. 독자의 70%가 3~40대 젊은 사람들이었대. 그 사람들이 내 책이 위로가 됐었다면서 다음 얘길 꼭 써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지금 60대 아니냐, 50대하고는 좀 다를 것 아니냐, 이러면서. 실제론 다른 거 없는데. (웃음) 한 사람의 후배에게라도 도움이 된다면 펜 굴려 봐도 괜찮다는 생각에서 쓰게 됐어.

이미 나이 든 사람들은 늙어가는 얘기 정말 싫어해. 나이 드는 게 공포잖아?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워낙 노인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이 세니까. 그래서인지 사람들도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동화 속 계모가 아니라, 공주하고 자신을 동일시하고. 사람들이 늙는 준비를 하나도 안 하고 살았어.

그런데 시대는 어느덧 100세 시대가 돼 버렸고, 이제 늙는 것은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주제가 된 거지. 요즘 강의를 하다 보면, 한 세대 아래 사람들이 점점 나이 듦에 대한 준비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게 눈에 보여."

한국 사회에서 늙는 준비가 없었던 건 아니다. 노년은 두려운 것이며, 그것을 해소할 유일한 방안은 역시 돈 밖에 없다는 생각 등.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노년의 불안을 주로 보험설계사나 펀드매니저 앞에서만 고백했다. 그런데 그들이 이제는 박혜란의 얘기에 귀를 기울인다.

"돈이 문제의 전부가 아니야. 일단 삶이 그냥 늙는 과정임을 받아들여야 해. 노후 대책, 노후 대책 이러는데 그럼 노전(前)은 어디 있나. (웃음) 나이 듦은 어떤 시점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지.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 그리고 앞으로 남은 날을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에 대한 '기획'을 해야 하고. 그러려면 내가 누구인지, 뭐가 즐거운지 알아야 해."

상사의 취미에 따라 자기 주말도 반납해야 하는 살벌한 사회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파악해 가며 '기획'을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도 한창 '달릴 때'는 모르고 외면했다가 어느 순간 "몸이 말을 걸어오면서" 알게 됐다. 노후는 통장에 가둬 둘 무엇이 아니라, 성찰을 통해 받아들여야 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말이다.

산다는 것은 늙어 간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린 늙음이란 젊음이 스타카토로 끝나는 어느 날 별개의 삶처럼 시작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기를 쓰고 늙음을 밀어내려고 애쓴다. 마지못해 늙음 이후의 생활을 예비하면서. 하지만 늙음 이후의 생활, 즉 노후생활이 어떻게 따로 있을 수 있는가. 우리는 그저 계속 늙어 가고 있을 뿐이다. (<나이 듦>, 22쪽)

나이 드는 거, 멋지다고!

"솔직히 어렸을 때는 이럴 줄 몰랐다. '나이 든 사람도 세상이 재밌을까? 죽을 날만 기다리면서 그저 할 수 없이 사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195쪽)

박혜란의 젊은 독자들 대부분은 여전히 나이 듦을 끔찍하게 생각한다. 또 자신만은 그런 나이 듦에서 벗어나 있을 거라고 착각할지 모른다. 기자도 그랬다.

하지만 <다시>를 읽으며 그들이 진심으로 부러워지는 순간이 있었다. 저자가 나이 들어 조직한 대학 동기들과의 친목 모임을 언급하는 글에서다. "이때쯤이면 성공과 실패의 경계가 애매해진다. 철없이 뻐기지 않고 또 공연히 주눅 들지 않을 만큼 모두가 꽤 익은 시기다". 그래서 시기질투 없이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레시안(최형락)
"다들 성공을 향해서 달려온 친구들인데…. 예전엔 누가 샘난다고 못 보겠고, 마음에 안 든다고 못 보겠고, 성향이 다르다고 못 보겠고 그랬는데 그건 다 껍질이더라고.

나이 드니까 그 껍질이 눈 녹듯 사라져. 사람이 사실 못나고 잘나봤자 거기서 거기 아니야? 한때 부나 명성을 누렸더라도 당시 역할에 따른 것일 뿐이고. 나이가 들면서 사람이 껍질이 아니라 사람으로 보인다는 거 멋진 경험이야. 동창들 얼굴을 보면, 그 나이부터 20대 청년의 얼굴까지 그 사람 인생이 다 보여. 정말로.

우리끼리 '하나도 안 늙었다' 이러는 게 젊은 애들이 보기엔 우습겠지만 당사자들은 정말이라니까." (웃음)

"나이 든다는 거, 생각했던 것보다 참 괜찮은 일이다. 좀처럼 나를 놓아주지 않을 것 같던 그 끈질긴 욕심, 회한, 미움, 불안이 어느새 슬그머니 다 녹아 버렸다. 그 자리에 넉넉함, 연민, 고마움이 밀고 들어오는 중이다" (194쪽)

"노인 복지, 세대 간 접점 늘리는 방향으로…"

인터뷰 도중, 박혜란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한 여성이 등장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명함을 건네려는 그의 손이 바쁘다. 워낙 여러 종류가 있어서다.

'공동 육아와 공동체 교육' 이사장, <여성신문> 편집위원장, 얼마 전에 4회를 끝으로 물러났지만, 꼬박 4년간은 서울국제가족영화제(SIFFF) 이사장도 지냈다. 명함은 없지만(!) '65씨네클럽'이라는 대학 동기들의 영화 소모임 회장도 맡고 있다. "감투만 많다"고 쑥스러워하지만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여전히 하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일도 많아서일 게다. "늙으니 분노하는 일이 줄어들고, 미움도 연민으로 화한다"고 하지만 그의 눈에는 아직도 사회의 부조리들이 눈에 밟힌다. 특히 여성 문제에 대해서 말할 때는 저절로 목소리가 높아진다. 천상 20대 열혈청년의 모습이다.

"성폭력 문제, 특히 아동 성폭력 문제에 대해선, (범죄자를 보면) 그냥 끓어올라. 창간 때부터 <여성신문>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이 문제 때문에 여전히 신문을 떠나지 못하는 거야. 여성 문제를 정공법으로 다루려면 전문 매체가 꼭 필요하니까. 대학 졸업 후 매체(<동아일보>)에서 기자로 일한 경험 덕분에, 그 힘을 익히 알고 있어."

노인 빈곤 문제, 홀로 사는 노인의 외롭게 죽음을 맞이하는 문제 등 고령화에 따른 사회적 불행을 얘기할 때도 그의 심각한 고민이 전해진다. 그의 책에서도 앞서 고령화 사회를 맞은 일본을 둘러보고 난 뒤 "암담해진 기분"을 고백하는 '동경 유람단'이라는 글이 인상적이었다.

일본의 여러 공동 주택과 노인 복지 시설을 체험한 뒤 적은 글에서 그는 "일본의 대응은 늙어 가는 속도에 비해 턱없이 더디다"며 "잃어버린 것은 지난 10년이 아니라 앞으로의 100년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고 말한다. 이런 지적은 한국 사회라고 예외가 아니다.

그는 전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사회적 관계망 구축을 강조한다.

"아무리 호화로운 노인 복지 시설이라도 또래 얼굴만 보고 산다면 하루하루가 참 지루하고 답답하지 않을까? 일본에서 다양한 연령대의 입주자들이 모여 사는 공동 주택을 견학했는데 신선했어. 핀란드에서는 노인종합복지센터 바로 옆에 유아원을 짓더라고. 같은 공간에서 앞 세대와 다음 세대가 자연스럽게 소통하는 거지.

노인들이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종이 접기를 가르쳐주면서 자연스럽게 세대가 섞이고, 엄마아빠 세대도 아이들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곳을 찾는 거야. 결국 그 공간에서 이뤄지는 모든 소통, 나눔 하나하나가 노인 복지, 아동 복지이면서 전체적으로는 세대를 섞는 하드웨어가 되는 거고."


ⓒ프레시안(최형락)

평소 기록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그이지만, 나이 듦에 대한 개인적·사회적 차원의 관심은 앞으로 계속될 터이니 10년 후 또 새로운 책이 나올 지도 모르겠다. "글을 쓸 때 제목만 정해 놓으면 그에 해당하는 머릿속 서랍이 열린다. 백 가지고 천 가지고 말할 거리가 흘러나온다"니까 기대해 봄직하다. 서랍의 풍성함과 서랍을 열어줄 열정도 계속되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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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넘어가는 겨울방학부터 나는 책방 출입을 시작했다. 이모가 <어린왕자>, <꽃들에게 희망을> 같은 예쁜 책을 선물한 게 계기였다.

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 24㎞ 떨어진 서점까지 시외버스를 타고 가서 내가 살 수 있던 책은 <삼중당 문고>가 전부였다. 시간은 많고 수중의 책은 적었던 시절에는 'V(구입)<<V(독서)'이었기 때문에 같은 책을 읽고 또 읽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텅 비어 있는 책장 보기가 안타까웠지만, 지금 생각하면 좋은 면도 분명히 많았다.

그 사이에 책과 관련한 모든 상황이 변했다. 책을 구입하고자 24㎞를 '여행'해야 하기는커녕 엉덩이 한 번 뗄 필요가 없다. 책 가격은 거의 고려 대상이 아니다. 보고 싶거나 궁금한 책이 있으면 그냥 산다. 게다가 가끔은 친절하게도 출판사가 책을 보내주기도 한다. 하여 서가는 부족하고 아직 읽지 못한 책은 책장에 꽂히지 못하고 바닥이나 책상 위에 뉘어진 채로 쌓여 간다. 이제는 'V(구입)>>V(독서)'인지라, 연초에 바닥에 깔려 있던 책이 연말까지도 그 자리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이런 지경이니 읽은 책을 또 읽는 일이란 없으며, 일부만 슬쩍 보는 책도 많고, 정독을 하더라도 2~3일간 내 손에 머물다 서가로 옮겨진다. 그런데 여기에도 예외는 있다. 한 달 내내 손에서 놓지 않는 책이 있다. 아내에게는 <성서>가 그것이고 내게는 <좋은 생각>이라는 잡지가 그것이다. <좋은 생각>에서 지식을 얻으려는 사람은 없다. 다만 잡지를 읽다보면 '아름다운 사람들의 밝은 이야기'를 통해 뇌와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그 얇은 잡지를 한 몫에 읽지 않고, 매일 매일 정해진 날짜에 맞추어서 아껴 읽는다.


▲ <예수님도 부처님도 기뻐하는 과학>(강상욱 지음, 동아시아 펴냄). ⓒ동아시아
내게 갑자기 딱 <좋은 생각> 같은 과학책이 한 권 다가왔다. <예수님도 부처님도 기뻐하는 과학>(강상욱 지음, 동아시아 펴냄)이 그것이다. 처음 책 제목을 들었을 때는 "왜 공자님은 뺐어?" 이렇게 약간 빈정대기도 했지만 책을 들자 곧 빠져들어 한숨에 다 읽었다. 빈정댈 때는 '과학'에 방점을 두었기 때문이고, 빠져들었을 때는 전혀 다른 곳에 방점이 '찍혔기' 때문이다.

20개 장 가운데 몇 장의 제목만 뽑아 보면 이렇다. '슬플 때 같이 슬퍼하고 기쁠 때 같이 기뻐하라', '연꽃의 연잎처럼 살자', '해탈의 경지', '자연과의 조화',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긍정은 긍정을 부른다.' 제목만 보면 생활 철학을 다루는 책이다.

그런데 같은 장들의 부제는 이렇다. '전자의 이동 원리', '친수성과 소수성', '원자에서 분자로', '르샤틀리에의 원리', '반데르발스 힘', '산화와 광분해', '나노 입자는 나노 입자끼리, 고분자는 고분자끼리' (부제는 모두 화학과 관련이 있는데, 이것으로 저자가 화학자, 그것도 나노 기술에 관심이 많은 화학자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구성은 간단하다. 각 장의 서두에 (몇 개의 장은 초반에) 예수님과 부처님의 말씀이 나온다. 이어서 그 말씀이 전하는 가르침이 과학이 자연에서 관찰하는 현상과 관련되어 있다는 설명을 한다. 그리고 거의 매번 '긍정정인 생각'의 자신과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을 강조하는 식이다.

예를 들어, 제2장 '연꽃의 연잎처럼 살자-친수성과 소수성'은 "애욕을 끊고 연연해하지 말며 고운 연꽃처럼 더러운 것을 받아들이지 말라" 하는 법구경의 말씀으로 시작한다. 몇 천 년 동안 불교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는 연꽃의 연잎은 더러워지지 않는다. 심지어 물에 젖지도 않는다.

그 이유를 저자는 독일 본 대학의 식물학자 빌헬름 바르트로트가 2001년 <International Textile Bulletin>에 발표한 'The lotus-effect : nature's model for self cleaning surfaces'라는 논문을 토대로 설명한다. "앗! 어렵겠는데!" 이런 생각이 드시는가? 걱정 놓으시라. 여기서 저자의 미덕이 발휘된다. 그는 복잡한 물리·화학적인 내용을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한다.

먼저 용어를 정리해 준다.

"물을 좋아하는 성질을 친수성이라고 부르고, 물을 싫어하는 성질을 소수성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현상을 설명한다.

"어떤 물질이 친수성인지 소수성인지를 구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법이 쓰인다. 어떤 표면에 물방울을 올려놓고 접촉각이 90도 이하면 친수성, 90도 이상이면 소수성이라고 한다. 연잎이 물에 젖지 않는 이유는 바로 표면이 소수성이기 때문이다. 만약 친수성이었다면 물에 흠뻑 젖어 나중에는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해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없다."

이어서 원리를 알려준다.

"그러면 왜 연잎은 소수성일까? 그 이유는 연잎에 돋은 나노 돌기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물방울이 자기보다 훨씬 작은 크기의 나노 돌기와 닿을 때, 그 닿는 면적이 작게 되고 접촉각이 100도보다 커서 연잎은 소수성을 갖게 된다. 연잎은 소수성이 아주 강해서 '초소수성' 물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는 이 현상이 우리 삶과 밀접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예를 제시한다.

"연잎이 항상 깨끗한 것을 '연잎 효과'라고 부르는데, 이 연잎 효과를 이용한 페인트가 나오기도 했다. 로터산 페인트라는 상표로 나온 제품인데 이 페인트를 바르면 연잎 효과에 의해 집 표면이 항상 깨끗하게 유지된다."

위 내용에는 6장의 컬러 사진이 첨부되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다른 과학책과의 차이는 지금부터 드러난다.

"연잎은 누군가 닦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항상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다. 부처님이 (…) 하필 연잎을 예로 든 것은 스스로의 자정 작용 때문이 아니었을까? (…) 어떤 악의 유혹이 마음 한 구석에 솟구칠 때 우리는 스스로 어떠한가를 돌이켜봐야 한다. 그럴 때 스스로 더럽혀지도록 내버려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 유혹으로 더럽혀질 가능성이 있을 때마다 연잎처럼 스스로 정화할 수 있는 기능을 마음속에 담고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 연잎처럼 살자."

이 책은 과학책일까, 아닐까? 그것은 독자가 어떻게 읽느냐에 달렸다. 어떤 신문의 서평 기자는 "140쪽에 불과한 이 책이 왜 양장본인지 모르겠다"고 불평했다. 난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내게 있는 독일어판 <어린왕자>가 양장본인 이유와 같다. <예수님도 부처님도 기뻐하는 과학>은 과학적 정보를 얻는 책이 아니라, 삶을 성찰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읽을 책이기 때문이다. 얇다고 120분 만에 후딱 읽어치울 책이 아니라, 하루에 한 꼭지씩 일주일에 5번, 4주 동안 나누어서 읽으면서 삶을 성찰하고 가슴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부어 넣을 일이다. (서평을 쓰느라 한 번에 다 읽어버렸다. 아까운 생각이 든다. 다시 읽고 싶다. 아마도 이 책은 올해 내가 두 번 읽는 유일한 책이 될 것 같다.)

결론이다. 이 책은 <좋은 생각>의 과학 버전이다. 연말에 목사님, 신부님, 스님께, 그리고 장로님, 집사님, 보살님께 선물하기에 '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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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4일 대한민국 노무현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상회담이 끝난 직후의 일이다. 정상회담 특별수행원으로 평양을 다녀온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을 <프레시안>의 황준호 기자가 그날 밤 자정 무렵 만나 인터뷰를 했다. 정 전 장관은 설렁탕으로 늦은 저녁 끼니를 해결하면서 특유의 입담으로 '평양 이야기'를 풀어놨다.

이 인터뷰는 다음날 이른 새벽 <프레시안>에 실렸다. 대박이 터졌다. 정상회담 2박 3일간 <프레시안>이 봇물 터진 듯 쏟아낸 모든 정상회담 기사의 클릭수(방문자 수)보다 이 인터뷰 한 건의 클릭수가 많았다. 헤겔이었던가. 필연은 우연을 가장해서 자기 모습을 드러낸다고 말한 사람이.

정 전 장관한테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프레시안> 쪽에는 그 뒤 '정세현의 정세 토크'라는 아이디어를 낸 것은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속된 비유를 하자면, 장사꾼이 '대박 상품'을 포기할 이유가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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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세현의 정세 토크 : 60년 편견을 걷어내고 상식의 한반도로>(정세현 지음, 황준호 정리, 서해문집 펴냄). ⓒ서해문집
정세현 전 장관은 비유의 달인이다. 그는 통일부 차관 시절, 1998년 11월 첫 배를 띄운 금강산 관광 사업을 '햇볕 정책의 옥동자'라고 불렀다. 이 작명은 그 뒤 언론과 전문가들 사이에 널리 회자됐다. 그는 한학과 역사에 조예가 깊다. 첫 애를 본 통일부 출입기자가 아이 이름을 지어달라고 정 전 장관한테 부탁한 일도 있다.

그런데 정 전 장관은 언론 기고를 좀처럼 하지 않는다. 언젠가 기고를 부탁했더니 돌아온 답변은 이랬다. "원고지 10매를 쓰려면 10시간 이상 걸려." 쓰고 싶지 않다는 말씀인데, 글을 쓸 재주가 없어서라기보다는 효과적이지 않다는 판단이 깔린 것으로 느껴졌다.

언론 기고를 거의 하지 않는 것과는 달리 신문과 방송 좌담이나 인터뷰는 마다하는 일이 별로 없다. 그때마다 오랜 연륜과 전문가적 소양에 받침된 정세 분석과 전망이 특유의 입담에 실려 작렬한다. 가독성이나 시청률이 높지 않기로 악명 높은 좌담과 인터뷰이지만, 등장인물이 정 전 장관일 때는 대박이 터질 때도 적지 않다. 정 전 장관의 분석과 전망은 깊고 넓지만, 무엇보다도 큰 힘은 시민의 상식과 흐름을 같이 한다는 데 있다는 게 일반적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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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현 전 장관은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에서 <모택동의 대외관 연구>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니 그는 관료이기 이전에 공산주의 연구와 국제정치학에 능통한 학자다. 그가 관료의 길에 들어선 때는 박정희 정부 말기인 1977년. 그 뒤 김영삼 정부 때 청와대 통일비서관으로 일했고, 김대중 정부에서 통일부 차관과 통일부 장관을, 노무현 정부에서 첫 통일부 장관을 지냈다.

그 뒤론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의 대표상임의장으로 4년간 일했고, 지금은 김대중평화센터 부이사장으로 있다. 왜 이런 이력을 언급하느냐면, 그의 정세 분석과 전망에는 학자의 엄정함과 오랜 관료 생활로 터득한 현실감이 화학적으로 녹아들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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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에 장기 연재되어온 '정세현의 정세 토크'는 이런 여러 사정이 행복하게 만난 경우에 해당한다. 글쓰기보다는 말로 하기를 즐기는 정세현 전 장관, 그리고 독자들이 마치 현장에서 듣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정도로 정 전 장관 특유의 말투를 글로 정갈하게 재현해낸 <프레시안> 황준호 기자의 존재는 축복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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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현의 정세 토크'는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 씨 피격 사망 사건이 남북 관계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2008년 7월 15일 첫 회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총 60차례 진행됐다. 애초 1년만 할 계획이었지만, 열화와 같은 반응 덕에 '토크'는 계속됐다.

외교·안보·통일 분야 담당 기자들 사이엔 '이명박 정부의 정책을 제대로 비판하는 하나의 가이드라인' 구실을 하고 있다는 얘기가 회자된다. 정 전 장관도 "강의 시간에 '정세 토크'의 내용을 인용하기도 한다는 몇몇 교수들을 만나면서 책임감 비슷한 것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황 기자가 정 전 장관한테 연재를 계속하자고 설득하면서 했다는 말이 걸작이다.

"장관님과 프레시안이 공동 출자를 해서 사설(私設) 등대를 하나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그 등대 불빛을 보고 항로를 찾고 있네요. 우리 마음대로 만들었는데, 하다 보니까 공공성이 커져버렸습니다. 그래서 등대를 끄는 건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계속 하시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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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으로 나온 <정세현의 정세 토크>는 프레시안에 60회 연재된 글을 33개로 압축한 것이다. 책은 3부로 구성돼 있다. 1부 '남북의 망령들'에 묶인 9편의 글은 '퍼주기론' '대북 지원 핵·미사일 개발 전용론' '통일 비용 망국론' 등 남쪽의 이른바 '보수 세력'(보수주의자들은 민족을 중시한다는 게 정치학의 정설인데, 한국의 이른바 보수주의자들은 왜 '반북·친미'를 성경처럼 모시는지 모르겠다)에 뿌리 깊은 이데올로기적 편견의 허울을 벗겨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북쪽의 자기 중심적 정세 판단 등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한다. 이 책의 정수가 되는 부분으로 거듭 숙독하시기를 권한다. 술자리 토론에서 의견이 다른 지인과 사이에 '마음의 다리'를 놓을 수 있는 길을 발견하실 수 있으리라 믿는다.

2부 '우공이산(愚公移山)'에는 남북 관계사의 이면을 깊게 들여다볼 기회를 제공한다. 이 가운데 '일흔여덟의 DJ, 젖 먹던 힘을 다했다'는 정세 토크 때 최고 히트작의 하나였다. 3부 '요동치는 21세기 동북아'에선 대한민국의 유일한 동맹국이자 초강대국 미국과 무섭게 떠오르고 있는 대국 중국 사이에서 한국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구차해진 대중 외교, '유소작위(有所作爲)'를 자초하다-북중 관계는 한미 관계와 같은가?"는 중국 전문가인 정 전 장관의 회심의 역설로 꼭 챙겨 읽는 게 좋겠다.

결론을 당겨 말하자면, 단행본 <정세현의 정세 토크>는 전문 서적 10권 이상을 읽은 뒤에 느낄 지적 희열과 개안을 독자들에게 안겨줄 것이라 믿는다. 정 전 장관 특유의 입담과 촌철살인의 비유는 복잡하고 어려운 내용에 상대적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 강력한 촉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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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너무도 중요한 내용이 많아 간단한 요약과 논평이 어렵다. 다만 맛보기 차원에서 몇 가지만 언급한다. 정 전 장관이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북한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관련해 꼭 전하고 싶은 말씀은 아마도 이 대목이리라.

"경제 공동체다 뭐다 여러 가지 거창한 개념을 쓰지만 결국은 민심입니다. 남북의 민심이 연결되도록 하는 것만 한 통일의 왕도는 없어요. 민심이 연결돼서 북쪽이 남쪽 때문에 어려운 시기를 넘기게 되면 북쪽도 남쪽 중심의 통일이 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겁니다." (91쪽)

'퍼주기론'에 대한 정 전 장관의 지적은 잠자던 양심을 뒤흔든다.

"1999년 통계를 보니까 버려지는 곡물 쓰레기가 174만 톤입디다. (…) 174만 톤이면 북한 식량 부족분의 70~80%입니다. 그러면서 북에 쌀 지원하는 걸 퍼주기라고 욕하면 벌 받습니다. 벌 받는다고요. 특히 '퍼주기'라면서 대북 지원에 인색한 사람들일수록 윤택한 사람들이 많고, 음식물 쓰레기를 그렇게 많이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음식물 쓰레기도 못 만들어요. 비싼 음식점에서 비싼 음식 시켜놓고 손도 안 대고 나오는 그런 음식들이 결국 쓰레기가 되는 건데…." (15쪽)

몸무게가 자꾸 는다고 시켜놓은 음식 남기는 분들, 찔리지 않습니까?

'통일 비용론'에 논평은 상식의 핵심을 찌른다.

"1990년대 중반에 통일 비용론이 왜 국민들로 하여금 차라리 분단 상태에 있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느냐? 통일되면 분단 비용이 더 이상 안 들어가는 얘기는 안 하고 투자 비용만 계산해서 내놨기 때문입니다. 생돈 들어가는 얘기만 하고 그 돈이 새끼를 치는 얘기는 안 하니까 '아이고, 돈 엄청 드는구나.' 이렇게 생각한 거죠. 그래서 통일 비용론은 분단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했습니다. (…) 우리 속담에 '쌀독에서 인심 난다'고 했습니다. 북쪽도 그 말을 잘 써요. 지원을 통해서 민심의 흐름이 바뀌는 겁니다."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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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전 장관이 단행본을 출간하며 밝힌 '바람'을 전하는 것으로 난삽한 글을 맺는다.

"책을 내면서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면, 스스로 보수층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인터넷 매체에 접근하기가 귀찮았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다소 거부감이 있던 분들이 오프라인으로 나온 '정세 토크'를 통해 내 이야기를 듣고 생각을 달리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설령 거기까지는 어렵다면, 남북 관계에 대한 편견을 일단 내려놓고 흉금을 터놓고 토론할 수 있는 기회가 이 책을 통해 마련됐으면 한다."

정 전 장관의 '꿈'은 이뤄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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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있었다. 사기꾼에 바람둥이인 아버지와 독실한 어머니 사이에서 1839년에 태어났다. 균형 잡힌 교육을 받지는 못했으나 타고난 인내심과 금욕주의적 생활, 치밀한 계산 능력으로 스무 살에 이미 전도유망한 사업가가 됐다. 치밀한 계산 끝에 1867년 정유 산업에 뛰어들고, 20년도 안 돼 미국에서 생산되는 석유의 95%를 손에 쥔다.

같은 시대, 이 남자보다 18년 연하인 한 여자가 있었다. 성실한 아버지와 교육을 잘 받은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고, 유전 지역에서 뛰놀며 성장했다. 지적 호기심이 넘쳤으며 당시 여성으로선 드물게 대학 교육을 받았고 파리에서 유학했다. 아내로서의 삶을 거부하고 저널리스트의 길을 걷던 중, '한 남자'의 부도덕한 기업 경영을 폭로한 기사로 사회를 뒤흔든다.

남자의 이름을 대면 누구나 무릎을 칠 것이다. 최초의 석유 재벌이자 사후 한 세기가 지난 현재까지도 위용을 떨치는, 전설적 인물 존 데이비드 록펠러다. 그 자체로 한 시대와 부(富)의 상징이 된 남자다. 그러나 여자의 이름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에는 대부분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그는 록펠러를 쓰러뜨린 유일한 저널리스트다.

그녀의 삶을 다룬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스티브 와인버그 지음, 신윤주·이호은 옮김, 생각비행 펴냄·이하 <아이다>)이 나왔다. 책은 석유가 가치관의 판도마저 바꿔가기 시작한 격변의 시대, 한 여성이 펜대 한 자루로 거대 기업과 맞서 싸우는 과정을 숨 가쁘게 다룬다. 씨실(타벨)과 날실(록펠러)로 엮어진 서사는 촘촘하면서도 웅장하다.

재미 1 : 뛰어난 저널리스트가 주는 교훈


▲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스티브 와인버그 지음, 신윤주·이호은 옮김, 생각비행 펴냄). ⓒ생각비행
타벨은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을 끈질기게 취재해, 그 독점의 고리를 상세히 밝혔다. 기사는 그가 소속돼 있던 <매클루어 매거진>에 1902년 11월부터 약 2년간 실렸으며 이후 <스탠더드 오일의 역사>로 출간된다. 이 책은 오늘날 탐사 보도라 불리는 형태의 저널리즘을 확립하는 계기가 됐으며, 수많은 저널리스트들의 본보기가 됐다.

19세기 말 스탠더드 오일은 일찍이 트러스트 형태를 확립해, 문어발식 사업 확장으로 다른 석유 기업 경쟁자를 탐욕스럽게 제압했다. 일부 석유 생산자들이 조합을 만들어 인수·합병에 저항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같은 업종의 기업이 경쟁을 피하고 더 많은 이익을 얻고자 결합한 트러스트는 "산업 너머의 산업", "법 테두리 바깥의 산업"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집단과의 무모한 싸움을 앞두고 타벨이 걱정한 것은 록펠러로부터 날아 올 공소장이 아니었다. 그에게 포기를 권유하거나 반대로 응원을 던지는 이들을 향해, 그는 이렇게 되뇐다.

"우리는 정당한 역사적 작업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한 일을 시작했다. 우리는 옹호자가 아닐뿐더러 비판자도 아니었다. 우리는 모든 독점 기업 중에서 가장 완벽한 기업이 과연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탐구하려는 저널리스트였을 뿐이었다.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런 타벨의 용기는 신문방송학과 학부생들에게 소개되는 '바람직한 기자'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런 기자상이 완전히 붕괴된 지금, "언론의 본령을 깨닫고, 타벨과 같은 영웅적 저널리스트를 본받도록 하자!"는 결론으로 글을 마무리한다면 좋겠지만, 불행히도(!) 그게 다가 아니다.

책 표지엔 <아이다>가 "언론의 자유가 중요하다는 교훈을 일깨워"주고, "언론학 수업에서 다뤄도 좋을 매력적인 책"이라고 소개돼 있다. 사실이지만, '겉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Don't judge a book by its cover)'는 속담을 상기시킨다. 이 책은 저널리즘이라는 열쇳말로만 재단할 수 없는, 대단히 입체적인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재미 2. '기록의 연쇄'라는 구조

금전에 맞선 '펜'의 완승을 기대했다면 이 실화는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타벨의 기사는 어마어마한 사회적 반향을 불러와 결국 스탠더드 오일이 기업 해체 명령을 받게 만들었지만, 거기까지였다. 록펠러와 그의 동료들은 각 자회사의 이름만 바꾸되 정체성은 그대로 유지하는 방법으로 독점을 계속했다. 판결 뒤 주식은 급등했고, 록펠러의 자산은 5배나 불어났다.

그렇다면 타벨은 헛일을 한 것인가? 언론의 힘이란 결국 여기까지인가? 저자 스티브 와인버그는 물론 역자도 이 질문을 놓고 고민한 흔적을 엿보인다. 이들의 결론은 돈 문제만으로 타벨의 역할을 평가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타벨은 평생, 그리고 후대까지 록펠러 일가를 '신경 쓰게' 만들었다. 자신들이 역사 속에 어떻게 '기록될지'에 대해서 말이다.

고발 기사로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 신화를 해체한 타벨은 이제 록펠러 그 자체에 대한 인물 연구를 시작한다. 록펠러의 후광을 끄는 작업이었다. 덕분에 록펠러는 자신과 자신이 돈을 번 과정을 정당화하고자 죽을 때까지 자선 활동과 기부에 열을 올렸다. 그렇다고 해도 이미 산산조각난 명성이 회복되는 건 아니었다.

'기록과 평가', 인간 행동에 커다란 변인이 되는 두 활동이 이 책을 풀어나가는 또 다른 열쇠다. <아이다>는 록펠러를 추적하는 타벨 위로 그의 뒤를 쫓는 와인버그(저자)가 겹쳐지는 독특한 구조다. 타벨이 록펠러에 대한 글을 써내려가는 과정을 훑으면서, 와인버그 본인도 타벨에 대한 평가를 내린다.

저자는 반론을 할 수 없는 역사 속 인물들이 선 혹은 악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균형에 공을 들여가며 방대한 자료들을 재조립한다. 이런 작업은 저자의 탐구 대상인 타벨이 매달렸던 일과 같다. (타벨은 전 세대 인물인 나폴레옹과 링컨에 대한 전기 기사를 쓰기도 했다.)

타벨과 록펠러가 기록하고 기록되는 과정은 저자 자신의 '전기 쓰기 투쟁'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타벨은 록펠러의 삶을 조사하면서 한 개인 안에 선과 악이 공존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록펠러를 오직 선한 존재나 혹은 악하기만 한 존재로 한정하는 일은 전기적인 죄악 그 자체였다"는 저자의 말은 그래서 자신에 대한 다짐, 독자들에 대한 당부로 읽힌다.

재미 3. 개인이 사회를 바꾸는가?

타벨과 록펠러 바로 "한 사람의 개인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실제로 둘 모두, 개인이 세상을 움직인 좋은 예다. '아담과 이브가 매일 500달러씩 저축해 왔어도 못 쌓았을 부'를 거머쥔 자와, 그 골리앗의 신화를 무너뜨린 자이니까. 저자도 두 인물이 당대에 어떤 파장을 미쳤는가를 부각시켜 서술하고 있다.

전기의 특성상 스포트라이트가 한 곳에 집중되는 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저자와 타벨, 록펠러의 믿음이 아주 강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들의 태도는 영웅도 거물도 좀처럼 도래하지 않는 시대에 사는 독자에게 한 가지 커다란 질문을 안긴다. 위대한 개인이 사회를 바꾸는가, 사회적 조건에 의해서 위대한 개인이 탄생하는가?

사업가로서 록펠러는 확실히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꼼꼼함과 숫자 감각, 돈에 대한 집착도 남달랐다고 한다. 그러나 '전설적인' 대부호가 되었던 건 그 시대에 석유와 석유 활용 기술이 발견·개발되었다는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또 정부의 적절한 규제가 있었더라면 석유 산업 독점도 일찍이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타벨도 기사에서 "(록펠러는) 1860년대 말까지 클리블랜드에서 경쟁하는 사람들보다 특별히 나은 점이 없었다"고 서술한다. 또 록펠러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부추긴 신문을 비판하면서 이 같이 말하기도 한다. 영웅의 소환도 결국 시대의 욕망에 불과한 것임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것이다.

"록펠러가 중요한 이유는 그가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 록펠러가 중요한 이유는 사람들이 그의 엄청난 재산과 권력을 흠모하기 때문이고, 또한 사람들에게 가장 보편적이고 강력한 열정, 즉 '돈을 향한 열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타벨도 마찬가지다. 그가 '전설' 반열에 오른 데엔 열정과 능력 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었다. 수개월에서 2년 가까이의 취재 시간을 허락받았기에 누구보다 깊이 있는 기사를 생산할 수 있었고, 식자층의 폭발과 함께 매체 영향력이 높아져 있었다. 스탠더드 오일을 무너뜨린 업적 역시, 당시 완숙 단계였던 반트러스트 운동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

찬사만 따른 것도 아니었다. 타벨이 스탠더드 오일 비판 기사에 이어 연재한 록펠러 인물 탐구 기사는 공정성보다는 공격성이 두드러졌다. 애초부터 그의 평판을 무너뜨리려는 악의적 시도이기도 했다. "타벨은 처음부터 총을 쏘았다. 사람을 죽이려고 총을 쏜 것이다. 잉크로 싸우는 전투방식은 매우 비윤리적이다"라는 비난도 받아야 했다.

어느 시대나 '위대한 개인'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위대한 개인이 반드시 록펠러나 타벨이 되어야 할 필연적 상관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이 사회를 변혁하는가, 사회가 사람을 길러내는가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이긴 하지만, <아이다>는 관점을 정리할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재미 4. 불편한 진실

"스탠더드 오일의 간부 아치볼드는 스탠더드 오일이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는 태도로 일관했죠. 그는 스탠더드 오일이 미국 산업에서 거대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비판을 받을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삼성 주요 계열사 사장과 구조본 팀장들 중에는 자신들이 실제로 국가를 운영하고 있다고 믿는 이들이 많았다." (<삼성을 생각한다>(김용철 지음, 사회평론 펴냄), 131쪽)

<아이다>는 가학적이다. 자꾸 '지금, 여기'의 문제를 찌르기 때문이다.

역자 후기에서 재인용한 <아이다>와 <삼성을 생각한다>의 문장 속에서 '그'들의 사고방식은 너무도 닮았다. 자신들은 '국부'를 책임지므로 비판이나 법의 제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입장이다. 역자처럼, 기자도 <아이다>를 읽는 내내 삼성을 생각했다. 정경유착, 부정부패 등의 모습이 굳이 100년 전 스탠더드 오일의 사례를 꼼꼼히 읽지 않아도 익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때와 지금의 가장 큰 차이점은 타벨처럼 용기 있는 저널리스트가 없다는 것이다. "21세기에 들어 월마트나 마이크로소프트를 해체하거나 샘 월튼 혹은 빌 게이츠에게 덧씌워진 신화적인 명예를 실추시킨 폭로 기사는 아직 없다"는 저자의 지적처럼 이는 21세기의 보편적인 현상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이제 또 다른 타벨의 도래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가? 이 질문에서도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삼성의 경우 내부 고발자라는 다윗이 있었음에도 오히려 주류 언론이 그를 외면하는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간혹 삼성과 관련한 의혹 제기 기사가 나오기는 하지만, 대중의 관심을 오래 잡아 놓지 못한다.

107년 전 타벨의 기사를 실은 <매클루어 매거진>은 서문을 통해, "법을 지켜낼 이는 과연 누구인가? (…) 이제 남은 사람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밖에 없다. 대중이 바로 그 사람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많은 이들, 특히 언론인이 <아이다>를 읽고서 배울 것은 무엇인가?

앞서 언급한 '개인이 사회를 변화시키느냐, 사회가 개인을 길러내는가' 하는 논쟁점이 다시 한 번 제기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대가를 치르자'는 말은 두 관점에 모두 해당될 수 있다. 어쨌든 많은 '한 사람'들이 움직인다면 사회가 조금씩 바뀌든. 위대한 개인이 등장해 타벨과 같은 글을 발표하든 선순환을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는 것이다.

오늘날 공정하지 못한 사회를 폭로하고 들추어낼 '한 사람'은 과연 누가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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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수(경제학)의 신간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김희정·안세민 옮김, 부키 펴냄)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폭발적이다. 국내외에서 이 책에 대한 찬사가 이어지는 가운데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이 이 책의 논리를 정면 비판하는 서평을 보냈다.

김대호 소장의 글은 '프레시안 books' 15호(11월 12일자)에 실린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 대한 호의적인 서평(집권하고 싶다면, '노무현 시대정신'을 버려라!)에 대한 반론이다. '프레시안 books'는 진보·개혁 진영의 길 찾기의 취지에서 이 책을 둘러싼 논쟁을 계속 소개할 예정이다. <편집자>

이 글은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이 쓴 "집권하고 싶다면, '노무현 시대정신'을 버려라!"에 대한 답 글이다.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 대한 서평이 아니라, 정승일·장하준의 오래된 착각과 궤변에 대한 촌평이다. 이들의 주요 주장을 제대로 비평하려면 책 한 권 분량의 지면이 필요한데, 이번 글은 정승일의 서평에 나오는 두 사람의 공통된 착각과 궤변에 국한해서 비평하려고 한다.

공정과 공평이라는 안경


▲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부키 펴냄). ⓒ부키
먼저 나는 정승일·장하준과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한국 사회의 모순을 선명하게 보게 해주는 안경 하나를 제시할까 한다. 그것은 사회적 상벌 체계 혹은 공평이라는 안경이다. 좋은 개념은 사회의 모순을 선명하게 보게 해주는 안경 역할을 한다. 뒤에 설명하겠지만 신자유주의와 양극화라는 개념은 진보의 통찰력을 많이 떨어뜨리는 '불량 안경'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 사회의 지속적인 성장과 통합을 담보하는 사회 운영의 원리가 곧 '정의'다. 이 핵심은 유한한 자원을 둘러싼 인간과 인간 간의 경쟁과 협력을 합리적으로 처리하는 경쟁(게임) 규칙이다. 단순화 하면 정의는 승자도 패자도 억울함 없이 그 결과에 승복하는 '사회적 상벌(incentive-penalty)' 체계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이것이 바르게 서야 사회가 가진 자원, 에너지가 적재적소로 흘러가서 지속적인 발전이 가능하다.

정의(합리적 경쟁 규칙)의 양대 지주는 공정과 공평이다. 영어에서는 이를 거의 구분하지 않고 다 "fairness"로 표현한다. 하지만 중국과 일본은 이를 명백히 구분할 뿐 아니라, 중국 공산당과 일본 민주당은 최상위의 정치적 가치로 취급한다. 한국은 미국, 영국의 영향 때문인지 공정과 공평이라는 개념이 좀 모호하다. 혼용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두 개념의 통상적 용법을 면밀히 분석해 보면, 공정은 '경쟁 기회·조건·출발선의 평등'과 '반칙 없음'과 '결과에 대한 승복'을 의미한다.

한편, 공평은 '결과의 합리적인 불평등', '합리적인 평가 보상 체계=상벌 체계'를 의미한다. 차별할 이유가 없을 때는 평등이 곧 공평이기에, 일상에서는 공평과 평등이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나는 이런 언어 습관에 근거하여 공정은 경쟁의 입구, 즉 출발선(starting line) 관리 원칙으로, 공평은 경쟁의 출구(finish line) 관리 원칙으로 단순화 하면 어떨까 한다. 물론 공정은 경쟁 과정의 반칙 없음과 결과에 대한 승복도 포함한다. 이명박이 8·15 경축사에서 "공정한 사회는 출발과 과정에서 공평한 기회를 주되, 결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지는 사회"라고 한 것은 나름대로 한국인의 언어 습관을 잘 감안한 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명박은 왜 평등한 기회라고 하지 않고 공평한 기회라고 했을까? 평등과 공평을 혼동했을까? 물론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소 뒷걸음치다 쥐 잡았는지 모르지만, 공평한 기회라는 표현은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이는 한국의 '기회(지역) 균형 선발 제도'나 미국의 '적극적 기회 보장 제도=소수 집단 우대 제도(affirmative action)'. 영국의 '아동 발달 계좌(Child Development Account)'에서 보이듯이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주어진 불우한 조건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정책적 배려(약자 보호=강자 차별) 의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격차의 수준과 사회적 최소한의 문제

한편, 합리적인 평가 보상 체계=상벌 체계로 등치 되는 공평은 승자·강자의 이익 수준과 패자·약자에 대한 배려 수준을 정하는 어렵고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다.

공평은 흔히 '고위험 고수익, 저위험 저수익'으로 말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의미를 파고들면 많이 기여한 존재는 많이 먹고, 전혀 기여하지 못한 존재는 굶어 죽으라는 비정한 자원 배분 원칙이 아니다. 이는 지속 가능한 사회 발전을 위한 자원 배분 원칙이기에 경쟁 결과 나타나는 격차(차별이나 특권)의 수준과 사회적 최소한의 수준을 정하는 원칙이다.

상식적으로 기계적 평등이나 승자와 패자 간의 너무 적은 격차는 사회적 상벌 체계를 무력화하여 가치(부)의 총량을 늘리지 못한다.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패자·약자에게조차도 불행한 사회를 만든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사회주의 몰락으로 또 1970년대 영국이 앓은 복지병으로 증명되었다.

반면에 사회적 최소한이 너무 낮은, 승자독식·과식의 매몰찬 상벌 체계는 인간의 본능의 하나인 도덕 감정(측은지심, 동정심)에 위배되기도 하지만, 전쟁과 다를 바 없는 격렬한 투쟁과 재기불능의 나락에 빠진 패자의 승복 거부를 초래하여 승자가 누릴 이익과 혜택을 무색하게 만든다.

사실 모든 경쟁의 출구는 또 다른 경쟁의 입구이기에 승자의 독식·과식은 출발선의 평등을 훼손하고, 결과적으로 패자로 하여금 억울함에 치를 떨게 하여 승복 거부 사태를 초래한다. 결과적으로 경쟁(경제 활동) 참여자의 저변을 좁혀 사회적 활력을 떨어뜨린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지금 한국과 미국의 경제 사회 발전의 족쇄로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공평성을 구현하는 것이 어렵고 중요한 것이다.


▲ 장하준 교수 ⓒ프레시안

不患貧 患不均

중국 공산당은 공평의 원류로 공자 계씨(季氏)편의 통찰을 들고 있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후와 사대부는 토지가) 적은 것을 걱정하지 않고 고르지 못함(불공평)을 근심하며, 가난함을 근심하지 않고 안정되지 않은 것을 걱정한다.' (不患寡而患不均 不患貧而患不安)

모자람(寡)이나 가난(貧)보다 불공평(不均)과 불안(不安)을 먼저 걱정한다는 것은 일찍이 상과 벌의 중요성을 강조한 법가(한비자) 사상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경상남도 도지사 김두관의 오래된 좌우명이기도 한 "不患貧 患不均(가난이 아니라 불공평을 걱정한다)"사상은 2000년 이상 사상적 상극으로 알려진 유가와 법가가 일치하는 지점이다. 그러나 한국의 보수와 진보는 자신들의 핵심 가치를 성장과 복지로 설정하는데서 보듯이, 아직도 모자람(寡)과 가난(貧)을 핵심 화두로 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답답한 일이다.

어쨌든 승자와 패자 간 격차의 수준과 사회적 최소한의 수준, 한마디로 사회적 상벌 체계는 나라에 따라 다르고, 시대에 따라 다르고, 정치 세력의 역관계에 따라 다르다. 또한 지정학적 조건에 따라서도 다르다. 예컨대 주변 나라들이 빼어난 인재나 기업에 대해 아낌없이 보상한다면, 이들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할 수 없이 보상을 좀 더 해줘야 한다. 그래서 한 때는 국가들 간에 법인세 인하 경쟁이 벌어진 것이다. 어쨌든 북유럽 국가에서 유지되는 사회적 상벌 체계(고율의 세금, 보편적 복지, 작은 사회적 격차=높은 평등도)가 영국, 미국, 한국, 중국의 발전을 담보하라는 법은 없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공정과 공평 이전의 문제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공정과 공평 이전의 기본 문제가 몇 개 있다. 대표적인 것이 합의된 규칙을 경쟁 참여자들이 준수(승복)하는 것이다. 이는 주권자(국민)나 권력자의 입장에서 보면 반칙 혹은 범법을 처벌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역사적으로 사회적 강자들이 법 위에 군림하면서 숱한 반칙을 저질러왔기에-정의 사회 구현이라는 미명하에 삼청교육대와 정치활동규제법을 만든 전두환이 대표적이다-선진국에서는 거의 거론되지 않는 반칙과 특권 철폐, 권력자나 강자의 전횡을 견제하는 "진짜 법치주의"와 3권 분립, 비대하고 자의적인 검찰 권력 견제하기 등이 강조되는 것이다.

또 하나의 기본 문제는 경쟁의 출구와 입구를 연결하는 경쟁 방식이나 경쟁 장(場)의 문제이다. 이는 곧 유한한 자원과 가치를 배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현재 한국에서 공직자 선출·임용제도(고시, 공시, 선거)와 입시제도 개혁이 큰 정치·사회적 현안으로 부상해 있는 것은 그만큼 이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경쟁 방식의 문제는 선진국에서는 그리 큰 정치·사회적 이슈로 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합법적 제도적 불의의 온상으로, 성장과 통합의 발목을 잡고 있는 중차대한 모순이다. 이 문제를 건너뛰고 공평한 기회나 적극적 기회 보장을 얘기할 수 없고, 복지도 얘기할 수 없다.

경쟁 방식의 문제는 경쟁의 출구에서의 불합리한 격차(불평등), 곧 불공평 문제로 귀결된다. 경쟁 방식을 바꿔서 경쟁자를 배제하든, 부정 출발을 하든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의 실력이나 사회적 기여에 비해 훨씬 많은 권리, 이익을 회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경쟁 방식이 중요한 것은 주된 경쟁 방식=자원 배분 방식이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인지, 정치가 키를 쥐고 있는 국가인지, 아니면 시장, 국가, 역사·문화, 집단 간의 역관계 등이 얽히고설킨 어떤 것인지에 따라서 지나친 격차(일명 양극화)에 대처하는 방식이 달라야 하고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장이 만든 격차

예컨대, 오피스 밀집 지역의 점심시간에 손님이 줄서는 식당과 손님이 없어서 파리 날리는 식당의 격차는 패자들조차 감히 억울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격차다.

물론 이 정도로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은 한국에서 그리 많지 않겠지만, 어쨌든 자유로운 선택권이 작동하여 만들어낸 수많은 격차(교회 간 양극화, 인터넷 유통이 만들어낸 양극화 등)와 그에 대한 대처 방식은 미국, 영국, 독일, 스웨덴, 일본, 한국 등 문명국들이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적정한 사회 안전망 제공, 후유증 적은 산업 구조 조정과 적절한 변화 감속·완충(규제) 장치, 금융 지원, 경영 노하우(컨설팅) 지원 등이 그 정책 기조일 것이다. 물론 한국은 시장이 자유롭지도 공정하지도 않는 경우가 많기에 특별히 독·과점 방지, 공정 거래, 소비자 보호 관련된 정책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세계화, 지식정보화, 자유화의 흐름이 거세진 1990년대 이후에는 주된 자원 배분 방식이 자유로운 소비자 선택권이 작동하는 시장인 경우는 신자유주의-양극화 시비가 나올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등지에서는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이 정치·사회 현상을 분석하는 개념으로 종종 사용되지만) 미국, 일본, 중국의 정치권이나 지식사회에서 신자유주의 시비나 양극화 시비를 찾아보기 힘든 것은 왜 일까?

추측컨대 양극화라는 개념이 격차의 크기만 주목할 뿐 격차의 다양한 성격을 묻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또한 신자유주의 시비를 하는 자들이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시장 근본주의)는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신자유주의 개념을 확대해 버리면 세계화, 지식정보화 시대의 현대 자본주의 그 자체라서, 한국, 중국, 브라질의 경제·사회 정책도 몽땅 신자유주의로 뭉뚱그려져 버리기 때문이 아닐까?

국가가 만든 격차

그런데 한국 사회는 시장이 아닌, 국가의 규제(법, 제도)나 재정에 의해 배분되는 자원의 비중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너무나 크다. 토지 주택 관련 거대한 규모의 불로 소득이 대표적이다. 이는 국가가 쥐고 있는 소유권·담보권 제도, 토지 이용 규제 등에 의해 생성되고 분배된다.

단적으로 1960~80년대 서울 강남과 수도권 신도시를 개발할 때 대부분의 토지를 국·공유지로 확보했더라면(이 때는 충분히 가능했다), 1980년대부터 공공 임대·전세 주택을 대량으로 공급했다면, 노무현 정부 초기부터 담보권을 제한하는 LTV(주택 담보 인정 비율) 규제나 DTI(총부채 상환 비율) 규제 등을 도입했더라면, '기업 도시'나 '혁신도시' 지정을 더 신중하게 했더라면 부동산으로 인한 비효율과 절망과 고통은 지금의 10분의 1 수준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나는 부동산 관련 각종 규제는 한국 관료를 비롯한 노블레스의 근로 소득 약탈, 불로 소득 수취 공작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국가에 압도적으로 책임이 있는 불합리한 격차는 이 뿐 아니다. 한국의 청소년 인재-이는 수백조 원의 금융 자산 이상으로 중요한 자원이다-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몇 개의 '士'자 직업의 이면에는 국가가 관리하는 면허증의 숫자 규제와 지나친 독점권 보장(변호사법, 의료법 등)이 버티고 있다.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자랑하는 한국 공공 부문(공무원, 공기업)의 매력과 공공 부문-민간 부문의 격차도 마찬가지다. 행여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의 격차가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로 인해) 민간 부문이 세계화, 자유화된 시장의 파도에 휩쓸려서라거나, 민간 부문이 못나서 생긴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논박할 가치조차 없는 한심한 소리다.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오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각종 복지 혜택을 무더기로 제공하여, 복지 재정 수준에 어울리지 않게 복지병을 만들어내는 기초생활보장제도(혹은 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권자와 차상위 계층의 불합리한 격차)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국가의 산물이다. 한편, 식당 아줌마와 건설 노가다(일용 잡부)로 상징되는 하층 근로자의 처우가 15~20년 동안 거의 답보 상태인 것은 중국(조선족)과 동남아시아의 단순 근로자의 대량 수입(방치)과 이들의 노동권에 대한 과소 보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마피아 전설이 떠도는 이유

세간에 관료와 기업과 이익집단이 결탁한 마피아-재정경제부, 국토해양부(도로), 교육부, 보건복지부, 국세청, 검찰 등-에 대한 전설이 떠도는 것은 관료가 쥐고 있는 유·무형의 규제권(토지 이용 규제권, 처벌권 포함)과 재정 할당권이 지역, 산업, 기업, 개인의 명운을 결정적으로 좌지우지하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의 정치 갈등이 격렬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는 주식회사 한국의 신화를 만든 발전국가의 유산이자, 분단과 냉전의 유산이다. 1997년을 전후하여 확 풀어버린 것은 산업, 무역, 금융 관련 규제일 뿐이다. 노동 관련 규제는 풀었다고 할 것까지 없다. 정리 해고제는 거의 수사 이상이 아니었으니까! 관련 노동법 때문에 정리 해고 사태가 난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분명한 것은 관료로 하여금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유·무형의 권능을 순순히 놓게 할 만큼 한국 정치가 유능하지도 않았고, 관료가 스스로 자신의 권능을 내 놓을 정도로 공공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감안하면 관료나 국가에 대한 관심이 민영화, 규제 완화, 감세, 복지 축소 여부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는 항시 선진국의 문제의식과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식민지 지식인(이념정책의 오퍼상)의 오랜 관성 아니면, 대·공기업 조직 노동의 사상·이념적 영향력 때문이 아닐까?

나는 한국 정부를 두고 GDP 대비 정부 재정 규모나 인구 대비 공무원 숫자를 기준으로 큰 정부냐 작은 정부냐를 따지는 것은 저울로 달 것을 자로 측정하려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문제의 본질을 놓치는 접근이라는 얘기다. 복지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던 이승만 정부 시절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한국 정부는 시장과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크고 강한 정부였다. 거칠게 말하면 공공성과는 담쌓은 일종의 마피아들이 장악한 정부였다. 적어도 거기에 크게 휘둘리는 정부였다.

지금은 재벌 대기업과 이익집단이 정부를 쌈 싸먹는 과정이라고 보아야 한다. 마피아라고 표현하니 매우 사악하게 느껴지지만 실은 이들의 도덕성과 공공성은 모든 것에 앞서서 재선을 생각하는 정치인이나, 검찰 공화국을 꿈꾸는 정의의 사도(?) 검찰이나, 법이 허용하는 한 최대한의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인과 노동조합 간부 정도는 된다고 보아야 한다. 처지와 조건에 따라 우리만큼 선하고, 우리만큼 악하다는 것이다. 요컨대 치밀하고 정교한 견제 감시 장치가 없기에 평범한 관료가 마피아의 일원으로 된다는 것이다. 물론 민주정부 시절에 관료의 행태를 바꾸려고 노력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검찰의 현주소는 그 실패의 기념비다.

앞에서 길게 국가에 압도적 책임이 있거나 주요한 책임이 있는 모순을 이야기 한 것은 오로지 시장화, 민영화, 규제 완화, 복지, 세금에 관심이 집중된 반신자유주의 프레임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다.

시장, 국가, 사회가 합작한 격차

모든 일이 그렇듯이 한국의 고질적인 모순도 오직 하나의 요인에서만 발원하는 것이 아니다.

전임 교수와 시간 강사의 부당하고도 극심한 처우 격차를 생각해 보라. 한국의 시간 강사는 전임에 비해 실력이나 노력이 많이 부족해서 처우가 낮은 것은 아니다. 대학의 가혹한 이윤추구 탓도, 대학 간 과도한 경쟁 탓도 아니다. 오히려 대학의 서열 구조로 인해 대학 간 경쟁이 구조적으로 어려워서 문제다. 하여간 신자유주의의 산물은 아니다. 국가가 사용자라면(몽땅 국립대학이라면) 공기업에서 비정규직 문제 해결하듯이 재정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돈 낼 사람이 학위의 효용을 의심하는 학생과 학부모인 한 그렇게 해결할 수도 없다. 복지로 시간 강사 문제를 완화 할 수는 있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가 아닐까?

그 외에도 원청 대기업과 하청 중소기업의 극심한 격차, 대기업·공기업 생산직의 급격한 노령화(노동시장의 수준에 비해 너무 높은 고용 임금 수준), 수도권 집중과 지방의 총체적 피폐화 등도 기본적으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시장과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국가와 힘 있으면 전후좌우 보지 않고 단기적이고 협소한 이익을 몰염치하게 추구하는 뿌리 깊은 문화, 관행이 얽히고설켜서 만들어 낸 것들이다. 이 문제들은 복지로 고통을 약간은 완화할 수는 있겠지만 핵심적인 문제는 해결할 수가 없다.

선진국에서 보기 힘든 현상

사실 좋은 학과 및 학벌을 따기 위한 사교육 열풍, 해외 유학 열풍, 고시·공시 열풍, 과도한 스펙 쌓기, 시간 강사 문제, 최악의 자살률과 저출산 고령화, 낮은 고용률과 너무 낮은 청년 고용률, 좀체 줄지 않는 비정규직과 영세 자영업 문제 등은 선진국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현상이다. 그런데 이는 한국의 개방화, 자율화, 민영화, 규제 완화 수준이 유달리 높아서 생긴 문제가 아니다. 복지 수준이 낮아서 악화되는 측면도 분명히 있지만 그것이 핵심 원인이 아니다.

핵심 원인은 선망하는 일자리의 절대 부족에 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생산력 수준에 비해 선망하는 일자리와 그 생활수준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이는 절대 다수의 일자리가 사회 통념에 비해 너무 열악하고 불안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지국가를 시대정신인양 강조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몽땅 1997년을 계기로 한국 사회에 상륙한 신자유주의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를 획기적으로 해결할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고작 대안으로 내 놓은 것이 획기적인 복지 확대이다. 당연히 복지가 거의 모든 것을 해결한다고 과장한다.

이들의 실천적인 귀결은 1987년 이후 진보 동네의 부동의 전통으로 자리 잡은 "노동권 옹호, 자본권 억압"이다. 당연히 노동이 아닌 자영업자와 공식 실업자와 사실상 실업자와 청년층에 대한 대책이 없다. 자본이 노동을 매우 무서워하고, 고용을 엄청난 부담으로 느끼는 한 고용 확대는 쉽지 않기에, 비정규직에 대한 대책도 사실상 없다. 복지국가론에서 오직 유효한 것은 세금을 통한 공공 부문 확대와 보건-의료-복지 스펙을 강화하여 사회 서비스 일자리를 확대하는 것이다.

결국 "노동권 강화, 자본권 억압"을 중심에 놓는 한 청년 세대와 미래 세대를 포함한 사회적 약자의 인권은 온데간데없다. 물론 복지는 이 문제를 약간은 완화하는 측면은 있다. 그런데 보수는 이 정도 수준의 대책도 없다. 그래서 비극인 것이다.

벽을 등지고 얻어맞는 주먹

세계화, 지식정보화, 중국의 비상 등으로 인해 강력한 구조 조정 압력은 어느 나라나 동일한데 한국 사회가 유달리 고통스러운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벽을 등지고 얻어맞는 주먹의 충격이 큰 것처럼, 한쪽이 꽉 막혀있는 상태에서-경쟁, 유연화, 구조 조정 등 시장 원리가 전혀 통하지 않는 영역이 많다-주로 힘없는 존재들만 거친 글로벌 시장의 파도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단적으로 한국은 공공 부문, 자격증 부문, 대기업 조직 노동 등 힘 있는 쪽은 너무 과잉 보호되고, 힘없는 쪽은 너무 과소 보호되고 있다. 전자 쪽으로는 시장 원리가 너무 통하지 않고 후자 쪽으로는 규제 완충 장치 없이 시장 원리가 너무 거침없이 통한다.

그래서 국부적으로 노동권의 과보호가 나타나고, 국부적으로 자본권의 과보호가 나타난다. 국부적으로는 복지 과잉병이 전반적으로는 복지 과소병이 나타난다. 그 결과 한국의 제대로 된(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직업, 직장의 처우는 우리의 생산력 수준이나 경제 구조에 비해 너무 높고 안정적이다. 하지만 나머지는 그 반대다.

이는 한국 자본의 노동과 고용 확대에 대한 무서움 증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나는 선진국 중에 2만 달러대에 한국만큼 자본이 노동을 무서워 한 나라가 또 있었는지 의문이다. 그래서 노동이 백기 투항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해서도 안 된다. 새로운 균형을 찾아야 한다는 얘기다.

한국의 이중 왜곡으로 인한 패악은 우리의 소득 수준에 어울리지 않는 낮은 복지 수준과 지나친 장시간 노동과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토지 주택 관련 제도 등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기 마련이다. 이는 이익집단에 밀리고 마피아 집단에 휘둘리는 공공(정치, 행정, 사법, 언론, 대학, 종교, 시민단체)이 있다.

나는 복지국가를 시대정신인양 강조하는 사람들이 GDP 대비 복지 재정 수준과 공무원 숫자와 국민건강보험 보장률 등을 수없이 강조하는 것을 본다. 하지만 복지국가의 경제·사회적 인프라에 해당하는 상벌(평가 보상) 체계, 경쟁 방식, 정치 행태, 1인당 GDP 대비 부문, 직업, 직능별 처우 수준, 노조와 이익집단의 행태, 의료 공급 기관의 성격(한국처럼 민간 의료 공급기관의 비중이 높은 나라는 별로 없다), 사회 투명성 등은 모르는지 애써 외면하는지는 몰라도 하여간 얘기하지 않는다.

왜 1차 분배 구조가 문제인가, 왜 정의가 먼저인가?

원래 승자와 패자의 이익 수준을 정하는 주된 장(場)이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이라면, 국가의 조세, 재정, 복지 정책을 통하여 승자와 패자의 격차와 사회적 최소한의 수준을 합리적으로 조정하면 된다. 출발선의 평등을 의미하는 적극적(공평한) 기회 보장 정책으로 말한다면 '적극성(공평성)'의 수준을 때론 전진, 때론 후진시키면 된다. 사회적 최소한 수준도 때론 상향, 때론 하향시키면 된다.

이는 한국, 영국, 미국, 스웨덴 등 모든 문명국 정치 세력들의 공통 과제이다. 물론 진보와 보수 정치 세력 간에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기준선이 달라 정권 교체가 일어난다. 요컨대 선진국은 세금과 복지라는 2차 분배 구조를 통해서 사회적 최소한의 수준을 높이고, 출발선의 평등 정책만 실현하면, 글로벌화된 시장의 폭력을 완충하고, 경제·사회적 활력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국은 그 정도로는 약과다.

왜냐하면 한국은 전쟁과 분단(휴전)으로 인해 원래 국가가 비대하고,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만큼 그리 공공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부 아래서는 수출 기업(재벌 대기업), 전문 지식인, 공공 부문 등에 대한 특권, 특혜(지대) 할당을 통하여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원래 성공한 변칙, 편법은 오래 가는 법이다.

한편, 토지, 주택 관련 제도는 관련 규제를 쥐고 있거나 개발 정보가 빠른 존재들의 불로소득 흡입 장치였다. 요컨대 한국은 시장 자체도 그리 자유롭지도 공정하지도 않지만, 설사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더라도 국가의 손아귀에, 그것도 그리 공공적이지도 않는 국가의 손아귀에 너무 많은 것이 쥐어져 있어왔던 것이다.

한편, 1987년 이후 등장한 노동운동, 민중운동은 '단결하면 힘 생기고 투쟁하면 쟁취한다'는 신념으로 자신이 사는 곳에서 시장 원리(소비자 선택권)를 몰아내고, 오로지 더 많은 경제적 잉여를 끌어오려고 해왔다. 사회적 기여, 부담, 의무와 권리, 이익, 혜택의 균형이나 건강한 가치생산 생태계를 만드는 쪽으로 노력한 것이 아니라, 보수 지배층이 그랬듯이 더 많은 불로소득을 추구하였다.

그 결과 한국 사회는 오른쪽으로도 확 굽어지고 왼쪽으로도 꽤 굽어진 이중 왜곡 사회가 되어 버렸다. 우파적 가치(과잉 시장=과소 보호/규제)의 과잉과 좌파적 가치(과소 시장=과잉 보호/규제)의 과잉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관점을 달리하면 진정한 우파적 가치의 과소와 진정한 좌파적 가치의 과소가 일어나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한국은 세금과 복지라는 2차 분배 구조로는 결코 풀 수 없는 문제가 너무나 많다. 1차 분배 구조의 하나인 시장의 정상화(독과점과 불공정 거래 해소와 소비자 보호 등)도 엄청나게 어려운 문제지만, 설령 그것을 푼다고 하더라도 그 한계가 명백하다. 한국은 선진국이 오래 전에 끝낸 정치, 행정, 사법, 언론의 민주화 문제와 선진국이 결코 경험한 적이 없는 과잉 시장(과소 보호)과 과소 시장(과잉 보호)의 상호 의존 문제를 풀어야 한다. 진보와 보수 가릴 것 없이 힘 있는 존재들의 양반화, 귀족화 문제를 풀어야 한다.

나는 진보 동네에서 '잘 작동하는 시장'의 의미와 효과를 그 누구 못지않게 강조하는 사람이지만, 실은 한국에서 시장 원리가 구조적으로 통할 수 없는 분야가 너무나 크고 중요하다는 것을 가장 강조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공평은 국가와 시장과 사회의 핵심적인 모순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해결하는 핵심 개념이다. 모든 불의는 결국 사회적 상벌 체계의 왜곡으로, 억울함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평의 눈으로 보면 이명박과 제3의 길이 강조하는 공평한 기회의 의미와 한계가 보인다. 복지국가론자들이 강조하는 너무 낮은 사회적 최소한의 문제도 보인다. 노무현 정부의 좌절과 2007~8년의 진보 참패의 원인도 다 보인다. 노무현 정부는 한국 사회의 수많은 불공정과 불공평 중에서 주로 지역 간 균형 발전 문제와 조·중·동과 재벌의 반칙을 주로 문제 삼았기 때문이다. 민생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수많은 합법적 제도적 불의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가난에 대해서도, 불공평(不均)에 대해서도 미온적으로 대처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의 오래된 통찰

지금 민주노동당은 슬그머니 사회민주주의와 복지국가를 대표 상품처럼 팔고는 있지만, 오랫동안 사회민주주의와 복지국가를 백안시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복지국가 이전에 자주국가(미국에 덜 빼앗기는 국가) 내지 통일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 아닌가?

이 생각은 분명히 틀린 생각이지만 한국 사회는 복지 이전에 뭔가 중차대한 모순이 있다는 통찰 하나는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런 통찰이 1980년대는 식민지반봉건사회론으로 나타났다. 그런 점에서 나의 통찰은 민주노동당의 아주 오래된 흐릿한 통찰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공평국가를 부르짖는 것은 한국 사회는 전쟁, 분단과 발전국가의 유산으로 인해 정치, 경제, 사회 전 분야에서 민주주의, 공화주의, 시장 경제의 외상값(화전민과 도적 행태)이 너무나 많이 남아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명박, '제3의 길'과 정승일, 장하준의 착각

이제 이명박, 정승일, 장하준, '제3의 길'의 주장의 의의와 한계를 살펴보자.

이명박은 "공정한 사회는 출발과 과정에서 공평한 기회를 주되, 결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지는 사회"라고 하였다. 노무현이 강조한 반칙, 특권 문제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ABR(Anything But Roh)'이 정체성이니까 봐 주자. 하지만 경쟁 방식의 문제와 경쟁 결과의 합리적 불평등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서 이를 건너뛰고 바로 결과에 대한 승복으로 비약한 것은 그냥 봐 줄 수 없는 맹점이다.

한편, '제3의 길'은 경쟁의 입구 관리 정책, 즉 기회, 조건, 출발선의 평등 정책(공평한 기회 보장=적극적 기회 보장)을 특별히 중시하였다. 이것의 핵심은 '소득 재분배보다는 기회의 재분배'에 주력하는 것으로, 인적 자본과 사회적 자본에 대한 투자를 통해 노동자들 내부의 지식(숙련) 격차를 줄이고(연대 지식 정책), 고용 가능성을 높여 일을 통한 복지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분명히 의미가 있다. 하지만 한계도 명백하다. 무엇보다도 한국은 경쟁 방식의 문제도 심각하고, 경쟁 결과의 합리적 불평등 문제도 심각하기 때문이다. 출발선의 평등(적극적 기회 보장)을 이루더라도 승자독식·과식이 문제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한국은 승자도 아닌 사람의 독식·과식도 심각한 문제다. 부동산 불로소득, 부모 잘 만난 사람, 공공 부문, 국가의 규제(자격증) 부문, 대공기업 조직노동의 처우는 승자의 과다 이익으로도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승일, 장하준도 '제3의 길'의 공평한 기회 보장 정책을 비판했다.

"설령 가난한 집 아이들이 무료 교육을 받을 수 있다 하더라도 만약 그들이 집에서 다른 아이들처럼 배불리 먹을 수 없다면, 그리고 집에 공부할 책도, 책상도 없다면, 그들은 수업 시간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을 것"이라면서 "학교에서 무상 급식을 제공하여 이들이 굶지 않도록 하고, 동시에 공립도서관을 통해 가난한 아이들에게도 무상으로 책을 대여하는 서비스를 제공하여야 한다"고 역설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들의 비판 역시 복지를 강화해서 '적극적 기회 보장'을 내실화하자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내 얘기는 그렇게 적극적 기회 보장을 내실화 한다 하더라도, 한국 청소년 중에서 가장 우수한 아이들 대부분이 공무원이 되려고 하고, 국가의 규제 산업이자 내수 산업 영역으로 집중되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글로벌 경쟁이 일어나는 부문, 민간 부문으로 우수한 아이들이 훨씬 많이 달려가도록 사회적 상벌 체계를 짜야 한다는 얘기다.

정승일은 "복지국가라는 큰 정부가 있을 경우 사람들은 자기가 일하는 기업과 산업이 시장 비효율성 문제로 인해 문을 닫는다 하더라도 정부로부터 실업수당을 받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고, 새 직장을 구하는데 필요한 직업 재교육까지 무료로 받을 수 있는 까닭에 기업과 산업의 구조 조정에 크게 저항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요컨대 한국도 사회 안전망이 튼실하면 2009년의 쌍용자동차 사태나 2001년의 대우자동차 사태가 터지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이는 정작 중요한 것을 모르거나 감추고 있다. 북유럽은 부문(공공-민간), 산업, 직업, 직능 별 고용 임금 격차가 매우 작다. 대충 그 나라 1인당 GDP의 0.8~1.5배 수준에서 오락가락한다. 한국 같으면 승자, 강자가 억울해 할 정도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교육 지표나 보건 의료 데이터(Health Data)를 통해서도, 직접 가 본 사람들의 목격담을 통해서 확인된다.

단적으로 북유럽의 교사들의 임금, 공무원들의 임금, 사회 서비스 노동자들의 임금, 전임 교수와 시간 강사의 임금 등을 보면 안다. 북유럽은 격차가 전반적으로 적긴 하지만, 노동의 양과 질에 따른 처우가 관철되고 있다. 처우가 성과, 직무와 연동 되어 있다. 예외적으로 소득이 높은 사람도 있긴 있겠지만, 높은 세금과 튼실한 복지를 통해서 재분배 기능이 잘 작동해서 그렇다고 한다면 이는 과장이다.

북유럽 같은 상벌 체계를 가지고 있는 나라에서는 본질적으로 지대(rent)를 추구하는 사교육 열풍, 고시·공시 열풍이 있을 리 없다. 또 복지 부담자와 복지 수혜자가 거의 일치하게 되어 있다. 정도의 차이는 좀 있겠지만 대부분은 자기가 낸 만큼 돌려받는다. 따라서 세금에 대한 저항도 적다. 공공 부문이 특권적 지위를 갖고 있지 않기에 규모 확대도 쉽고 축소도 쉽다. 노동시간까지 짧으니 고용률도 매우 높다. 은퇴자나 실업자에게 1인당 GDP의 0.7배 수준의 연금이나 실업 수당을 장기간 지급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당연히 구조 조정에 대한 저항도 약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국은 제대로 된 직업 직장의 평균적 처우는 GDP의 2.5~5배다. 생산력 수준을 감안하면 세계 최고 수준이다. 노동의 양과 질에 따른 처우(직무 직능급)? 그런 개념 없다. 수익 많이 올리고 교섭력 있으면 얼마든지 올리는 것이 상식과 관행으로 되어 있다. 이는 사실 전 세계 노동계급 운동의 전통에 완전히 위배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의 직장이 속출하는 것이다. 당연히 그런 곳으로 들어가기 위한 살인적 경쟁이 일어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루저(loser)'가 된다. 루저 의식을 가지면 결혼도 출산도 미루게 되어 있다.

한국은 무역 의존도가 높은 경제 산업 구조에다 세계 경제 지각 변동의 진원지인 중국에 인접한 관계로 엄청난 구조 조정 압력은 피할 수 없는데, 구조 조정을 무슨 악인양 결사 저지하려 하고 시장 임금 수준보다 월등한 처우를 누리려고 한다면, 그 곳의 고용 확대는 지극히 어렵다. 급속한 고령화는 필연이다. 나는 국민연금이나 실업보험을 어떻게 설계하든 1인당 GDP의 1.5~2배를 장기간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1인당 GDP의 2.5~3배를 받았던-이는 현대기아자동차 노동자들에 비해 좀 낮은 것이다-쌍용차와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구조 조정에 대한 극렬한 저항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잘 나가는 부문의 생산도, 부유층의 소비도 다 세계화되어 있는 현실을 되돌릴 수 없다면 '트리클다운 효과'(trickle down effect)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세금을 통한 소득 재분배(복지국가 펌프 작동)는 절실히 필요하다. 하지만 나는 그 전에 사회적 상벌 체계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복지가 획기적으로 강화되면 한국 사회의 수많은 고질병들이 거의 해결될 것이라는 주장은 사기라고 생각한다. 정치, 경제, 사회 전 영역에서 불공정과 불공평이 만연해 있는 한, 그리고 그 격차가 지극히 불공평한 한, 특히 세금을 주도적으로 사용할 공공 부문이 무슨 양반처럼 인식되는 한 증세 자체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격차를 노동의 양과 질에 따라, 즉 사회적 기여와 부담에 따라 공평하게(정의롭게) 만들고, 더 나아가 그 격차를 가능한 줄이고, 출발선의 평등을 이루는 것을 중심에 놓고 모든 조세, 재정, 사회 정책을 구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지정학적 조건상, 경제·산업 구조상 우리가 북유럽처럼 격차가 적은 사회로 가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한국의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에 맞는 경쟁 방식(자원 분배 방식)과 사회적 상벌 체계는 많은 것을 투명하게 하고(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 딸의 특채 시비나 신의 직장 시비는 주요한 정보가 국회와 언론에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해당 직업 및 직능이 선진국에서는 1인당 GDP 대비 어느 정도의 처우를 누리는지를 따져보면 된다. 사실 공정과 공평은 본질적으로 계량을 하는 것이기에 투명하지 않고, 평가 잣대가 없고, 평가 계량 시스템이 부실하면 절대로 작동할 수 없는 가치다. 일본 민주당이 자신들의 핵심 가치로 투명, 공정, 공평한 사회를 표방한 것은 분명히 일리가 있다.

폼만 좋은 헛스윙

이 외에도 정승일·장하준의 얘기는 너무 많은 허점이 있다. 기회가 닿으면 세세하게 비판할 것이다. 다만 한 가지만 지적한다면, 타석에 들어선 타자가 아무리 타격 폼이 힘차고 멋있어도 공을 맞추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이론의 양대 조건인 이론적 정합성과 현실적 정합성 중에서 현실적 정합성이 없으면 사회적으로 종이 낭비요, 독자들에게 시간 낭비라는 것이다.

정승일·장하준은 정치인들이 정치적 수사로 떠벌이는 자유 무역론과 세계화 예찬론과 시장 중시론(신자유주의)이라는 가설(모델)에 대해서 해박한 역사 지식과 경제학 지식을 동원하여 멋지게 비판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한국 사회의 핵심적인 고민은 그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장하준이 멋있게 두들겨 팬 가설들은 보수의 가설도, 중도의 가설도, 진보 우파의 가설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두 분은 멋진 헛스윙을 했을 뿐이다. 멋진 헛발질을 했을 뿐이다. 이론적 정합성은 있어도 현실적 정합성은 없기 때문이다. 정승일, 장하준은 한국 사회의 이념 정책적 고민의 현주소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양극화, 신자유주의는 불량 안경

나는 신자유주의가 만악의 근원이라면, 아니 핵심적인 모순만 되어도 정말 좋겠다. 보편적 복지가 만병통치약은 아닐 지라도 한국 사회의 핵심 모순 몇 개라도 해결해 준다면 정말 좋겠다. 박정희식 중상주의 정책을 좀 더 도덕적이고 민주적이고 유능한 제2의 박정희를 모셔서 펼칠 수 있도록 세계 경제 무역 환경이 허용하면 정말 좋겠다. 정말 마음 편하겠다. 하지만 현실을 뜯어보면 고개를 설레설레 젓지 않을 수 없다.

단적으로 한국 대학의 문제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다. 한국 대학의 서열 구조는 악명이 높다. 이는 그 이면에 대학(학과, 학벌)을 통해서 생산되는 특권, 특혜가 크고, 배제, 차별이 심하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 사회의 고질 중의 고질이기에 결코 만만한 문제가 아니다. 한편 대학 교수 요원에 관한 한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가 심각하다. 교수 노동권의 과보호(이른바 중고품 시장의 미형성)와 생산력 수준 대비 너무 높은 처우의 문제도 심각하다.

대학 지배 구조(재단)의 불투명성과 전횡으로 인해 평가 보상 체계에 대한 신뢰 확보도 어렵다. 무엇보다도 인구 구조로 보나 한계에 이른 대학 진학률로 보나 수업료를 낼 학생 숫자가 태부족하다. 대학 수학 능력이 의미가 없는 학생들이 3~4년간의 시간과 수천만 원의 돈을 허비하고 있지만 다 함구하고 있다.

그런데 대학의 문제는 과잉 생산된 교회 및 목회자 지망생들의 문제이기도 하고, 예술대학과 그 졸업생 문제이기도 하고, 이공계 문제이기도 하고, 좋은 일자리를 찾아 헤메는 청년 전반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는 한국이 1960년대 이후 고속 성장하면서 끊임없이 좋은 기회(일자리)를 양산하던 낙관적 전망이, (1987년과 1997년을 계기로 완전히 국면이 바뀐 상황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면서 생긴 문제이다.

그런데 이 심각한 문제들 중에서 복지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다. 양극화라는 모호한 개념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은 세상을 단순 명쾌하게 보게 해서 속은 편할지 모르지만 진보의 통찰력을 몹시 떨어뜨리는 불량 안경임이 분명하다.

19세기 조선의 개화 노선

1987년 6월 항쟁, 7~8월 투쟁, 직선제로 상징되는 1987년의 정신과 관성을 혁신하려는 시도가 몇 차례 있었다. 1990년 전후해서는 주사파와 사노맹으로 상징되는 극좌파 운동이 있었다. 곧이어 한국노동당과 민중당으로 상징되는 합법 정치 운동이 있었다. 가장 최근의 진보 혁신 시도는 노무현 정부와 노무현의 유연한 진보론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혹자는 뉴라이트 운동도 그런 범주에 속한다고 하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보수 혁신 운동과 진보에 무차별 빨간 물감 뿌리기 행동-네가 청년 시절에 한 짓을 내가 알고 있으니 공개적으로 반성, 전향하라-을 결합한 것이었다. 매우 고약한 행동이자 서글픈 운동이었다. 어쨌든 노무현은 정부를 책임지고 운영하면서 진보의 짙은 그늘을 보고, 거칠지만 과감한 진보 혁신 시도를 하였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유연한 진보론이 그 기념비가 아닐까 한다. 물론 노무현은 좌절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노무현이 좌절한 지점에서 진보가 지적으로 훨씬 후퇴해버렸다는데 있다. 노무현의 경험, 통찰을 거의 흡수하지 못했고, 오류와 한계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노무현의 정신 내지 사회 정책의 총 노선은 '제3의 길'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칙, 특권 해소, 원칙과 신뢰, 공정과 투명이라는 가치를 중시한데서 보듯이 한국 사회의 기형성을 적어도 그 좌측의 비판자들보다는 훨씬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남아있는 민주주의, 공화주의, 시장 경제의 외상값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특히 다양한 층위의 不均(불공평)의 문제를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어쨌든 담대한 진보론은 단순화하면 노무현 정부가 너무 소심해서(사회투자국가론이나 수용하고), 복지 재정을 폭발적으로 늘리지 못해서, 양극화에 대한 반발로 민심의 이반이 일어났다는 생각을 깔고 있다. 나는 단견이라고 생각한다. 보편적 복지와 적극적 복지를 대표 상품으로 하는 역동적 복지국가론은 사회적 약자와 빈자의 그늘은 그런대로 보지만, 진보가 만든 그늘은 거의 보지 못하고 있다.

단적으로 이들은 복지 부족으로 인한 고통은 잘 보지만, 不均(불균)으로 인한 고통, 즉 힘 있는 자들과 노블레스들이 자신들의 기여와 부담에 비해, 또 우리의 경제 산업 구조에 비해 너무 높고 안정적인 처우를 누림으로써 생겨나는 고통은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한편, 역동적 복지국가론은 공정한 경제도 언급하지만 문제 제기의 빈도, 강도는 복지와 비교할 수가 없다. 혁신적 경제는 복지의 부산물 정도일 뿐이다.

이렇듯 진보 동네에서 나오는 그 어떤 복지국가 담론을 뜯어 봐도 1987년의 짙은 그늘을 문제 삼는 담론을 찾을 수 없다. 신자유주의 때려잡고, 비정규직 엄격히 제한하고, 최저 임금 확 높이고, 복지 펌프를 잘 가동해도 (청년들의 로망인) 공무원 수준의 직업 직장 수백만 개를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한 상황에서, 복지로라도 고통과 절망을 좀 완화하겠다니 갸륵한 생각이라고 볼 수도 있다. 보수는 복지병이나 떠들고 삽질이나 하고 있으니…. 하지만 청년 세대와 일천 수백만 3비(비정규직, 비임금 근로자, 비경제 활동 인구에 숨어있는 실업자)층 입장에서 복지국가론은 미봉책이라는 것이 명백하다.

국지적으로는 보수 가치와 진보 가치가 과잉이지만, 전반적으로 진정한 보수 가치와 진보 가치가 과소한, 한마디로 사회의 상벌 체계라는 척추 자체가 좌로 우로 구부러진 기형 사회라는 내 주장은 1987년적 패러다임을 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뉴라이트의 그림자와 노무현의 그림자와 생태주의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도 당연하다. 나는 분단 건국의 그늘, 산업화의 그늘 뿐 아니라 민주화의 그늘, 노동권 강화의 그늘도 더 이상 견디기 힘들 정도로 짙게 드리워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아직까지 진보의 주력군은 1987년 거리에서 공장에서 농촌에서 이룩한 신화가 자부심으로, 또는 부채감으로 남은 사람들이기에, 감히 1987년의 신화와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는 나의 진보 혁신론이 얼마나 폭넓은 공감대를 얻을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너무나 기회가 없는 청년 세대와 거대한 비기득권층을 생각하면, 또 압축적으로 성장한 만큼 압축적으로 조로하는 대한민국을 생각하면 외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보면 보수도 진보도 공공(정치, 행정, 사법, 언론, 종교 등)도 왜곡시켜 온 사회적 상벌 체계의 정상화를 중심에 놓아야 한다는 내 주장은 19세기 중반의 조선으로 치면 일종의 개화 노선이 아닐까 한다. 양반의 부당한 특권 철폐, 상공업 장려, 중상주의, 국방력 강화, 사농공상-남존여비 사상 등 전근대적 제도, 사상, 문화 개혁 노선과 닮은 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지국가론으로 대표되는 여타 진보 혁신 노선은 본질적으로 양반의 부당한 특권 철폐, 사농공상 등 전근대적 제도를 혁파하자는데는 미온적인 노선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주류적 당파로부터 주먹이 날아오지만, 한국을 살리는 길이자, 진보 재집권의 길은 이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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