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언수의 <설계자들>(문학동네 펴냄)은 건축사나 건축에 대한 소설이 아니다. 행여 오해하고 덤빌지도 모르는 독자를 위해 작가는 소설의 첫머리를 충분히 관습화되고 약호화된 장면으로 시작한다.

노인이 마당으로 나왔다.
래생(來生)은 망원렌즈의 초점을 다시 맞추고 노리쇠를 뒤로 당겼다. 실탄이 장전되는 소리가 아주 컸다. (7쪽)

견고한 모든 장르는 자본과 상품이라는 대기 속에 녹아버린다. 순수한 추리 소설, 순수한 과학 소설, 순수한 역사 소설……순수한 판타지 소설은 물론이고, 시대가 바뀐 사실도 모른 채 동정과 처녀성을 고집하는 순수(?) 문학가들의 '순수(본격) 소설'마저도, 이제는 순수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꽤 또렷이 자신의 장르를 호명한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예를 들어, 한국전쟁이 나오거나 형사가 주인공이 아니면서, 총이 나오는 한국 영화를 진지하게 취급하지 못한다. 대중 오락물이라고 한 수 접고 들어가는 영화도 그럴진대, 소설이 그렇다면 더욱 '개무시'하는 편이다. 이런 사람은, 꽉 막힌 상상력의 소유자가 아닐까?

총이 보편적이지 않기 때문에 범죄나 추리 소설이 환영받지 못하다니, 작가들에겐 답답한 노릇이다. 그런데 태도를 약간 고쳐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는 아직껏 전쟁을 잠시 멈춘 상태일 뿐인 최장기 휴전 국가이고, 군대를 갔다 온 한국 남자들은 예비군 훈련장에서 1년에 한 두 번씩 총을 만진다. 예상과 달리 총은 우리 사회의 신물(神物)이 아닌 것이다.


▲ <설계자들>(김언수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그런데다가 문학은 자신의 사실성을 외부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자족적인 세계이기도 하다. 쥘 베른은 핵 잠수함이 없던 시절에 <해저 2만리>(1869년)를 썼고, 카렐 차페크는 로봇이 없을 때 <로봇>(1920년)을 썼지만 거기에 리얼리티 유무로 토를 단 사란은 없었다. 게다가 로봇과 핵 잠수함은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지 않았나? 첨언하자면, 핵 잠수함이나 로봇은 아니지만, 김언수는 등단작인 <캐비닛>(문학동네 펴냄)에서 현실에 있음직하지 않은 무수한 '심토머(symptomer)'를 창조했다.

영화든 소설에서든 총기류의 사용은 현실의 승인이 필요한 게 아니고, 작품 내적 핍진성으로 판단되어야 한다. <설계자들>의 경우, 직업적인 킬러(당연히 총을 애용한다)의 등장은 이렇게 설명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독재 시절과 군부 시절이 끝나면서 암살 사업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군부 시절의 암살 사업은 소수의 설계자들, 기관과 군대에서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암살자들, 그리고 경험 많고 신뢰할 만한 청부업자가 은밀하게 움직이는 비밀공작 같은 것이었다. 사실 그것은 사업이라고 부를 만한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 군인들은 대체로 설계자에게 관심이 없었다. 눈엣가시 같은 사람들을 온 가족이 보는 가운데 지프차에 실어간 뒤, 남산 지하실에 가둬놓고 반병신이 될 때까지 두들겨서 돌려보내도 아무도 찍소리 못했던 무탈하고도 무지한 시절이었다. 그들에게 고급 설계자들이 필요할 리 없었다.

암살 사업의 팽창을 가속화시킨 것은 자신의 정부를 도덕적으로 포장하고 싶은 새로운 권력의 등장 때문이었다. 아마 그들은 "여러분, 안심하세요. 우리는 군인이 아닙니다"라는 표어를 이마에 붙임으로써 국민들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 도덕적 포장을 하고 싶은 이 권력이 맞닥뜨린 한 가지 문제는 예전 시대처럼 입바른 소리를 해대는 얄미운 놈들을 두들겨 패기 위해 남산 지하실을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국민과 언론의 시선으로부터, 기관의 복잡한 명령 체계와 집행 흔적으로부터, 그리고 훗날 자신들에게 닥칠 책임으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청부업자와 거래를 시작했다. 이른바 암살의 아웃소싱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80~81쪽)

긴 인용이었던 만큼, 작가가 왜 하필 '킬러 이야기'를 쓰게 되었는지와 <설계자들>에 총이 사용되는 이유는 밝혀졌다. 인용된 대목에 약간의 근거를 보태자면, 정치 이론이나 사회학에서 익히 말해지는 '사회계약설'은 영주(領主)·씨족·개인이 행사해 왔던 사적(私的) 폭력의 권리를 국가에게 헌납한다는 뜻이다. 그 계약에 따라 '인간은 인간에 대해 늑대'라는 상시적 불안이 폭력을 독점한 국가 이성(법이라도 좋다)에 의해 종식되고, 사회는 안정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국가가 시장에 권력을 넘겨주는 이 시대에 이르러, 국가가 배타적으로 독점했던 폭력 또한 시장으로 넘어간다. 구소련의 전직 KGB 요원들과 특수 부대원들이 마피아와 결탁하여 각종 범죄와 암살을 저지르는 러시아나, 일개의 민간 용역 회사가 이라크 전쟁의 많은 부분을 떠맡고 있는 오늘의 미국은 위의 사정을 뒷받침 하고 있다.

<설계자들>의 무대는 남한 전체를 가리키는 지명도 서울도 아닌, 서울의 위성 도시로 보이는 '푸주'라는 가상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시간적 배경만큼은 가상 공간에 맞춤한 먼 미래가 아닌 현재다. 그렇게 읽어주기를 바라는 작가의 희망은 주물 공장에 취직하고자 이력서를 낸 래생에게 관리계장이 "인문계 고등학교 다녔으면서 대학은 왜 안 갔어? 운동권이나 뭐 그런 거 아냐?"(160쪽)라고 묻는 장면에 노골적이다.

재미삼아 작중에 찔끔찔끔 제공된 정보를 끌어 모아 보면, 작가는 이 책이 출간된 2010년을 작중의 시간적 배경으로 잡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 근거는 "아이러니하게도 독재 시절과 군부 시절이 끝나면서 암살 사업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는 저 위의 인용이 실마리인데, 박정희 이후 전두환에 이르는 긴 군부 독재가 마침표를 찍은 때는 1987년이다. 거기에 "모자에 두 개의 번쩍이는 별을 단 장군은 빙긋 웃으면서 래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20년도 넘은 일이다."(48쪽)의 "20년도 더 전"을 제대로 가늠하기 힘들긴 하지만, 그 시기를 최대한 미루든 당기든 오차 범위는 수 년 밖에 되지 않는 2010년 어름이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작중 설정처럼 살인 청부업이 활개를 치고 있진 않다. 하지만 2008년 용산 사태 때 일개 민간 철거 용역 회사가 경찰과 나란히 진압 작전에 한몫했던 사례가 보여주듯이, '공권력의 민영화'랄지 '폭력의 시장 자유화'가 공공연히 이루어지는 중이다. 작가가 꽈배기처럼 꼬아 놓은 가상 공간과 현실 시간 사이의 불일치가 작품과 현실 간의 유비를 방해하지만 <설계자들>에 번성하는 살인 청부업이 그렇게 낯설지는 않다.

문제는 작가의 과욕이다. "개들의 도서관이 지난 90년 동안 벌여놓은 참담한 역사"라는 121쪽과 "경성제국대학을 나온 인재들과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제국주의 관료들 틈바구니에서 절름발이에다 초등학교도 채 마치지 않은 너구리 영감이 어떻게 주임이 되고 또 도서관장이 되었는지 잘 모른다"는 135쪽을 보면, 래생이 킬러로 소속되어 있는 '개들의 도서관'이 만들어 진 때는 1920년 부근이다(2010-90=1920).

모르긴 해도 암살의 역사는 인류가 시작되면서부터 있었을 것이고, 일제 강점기라고 해서 암살을 도맡는 청부업자가 없었을 리 없다. 실제로 명성황후 살해에 동원된 것은, 일본 군인들도 있었지만 작중의 '개들의 도서관'과 같은 일본 우익 낭인 단체가 합세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수상쩍은 비밀 결사에 90년 전통을 부여함으로써 역사에서 비밀 결사가 차지하는 비중을 기형적으로 극대화한 반면, 그 외의 역사적 동력을 죄다 축소시키고 단순화 시키게 된다. 저 대목엔 세계를 음모론적으로 해석해보고자 하는 작가 나름의 시도도 투여되어 있지만, 내가 보기엔 오히려 '90년 전통'이라는 실없는 과장으로, 작가는 군사 독재 이후 '시장에 의해 사회계약이 허물어져가고 있다'는 예민한 주제를 스스로 무화시켜버렸다. 작가의 의도가 살려면 '개들의 도서관'은 최근에 만들어진 거라야 더 효과적이다.

킬러들이 나오는 범죄 소설은 세 싸움을 피해갈 수 없고, 그 업계의 큰 손은 신흥 세력에 잠식된다. 유구한 전통을 가졌지만 정도를 지키고자 하는 '개들의 도서관'은 무자비한 기업형 조직인 한자의 도전에 무기력하다. 또 이런 장르에서는 15~20년씩 근속했던 추나 래생같은 킬러들은 상부의 견제를 받거나 스스로 회의를 느끼고 조직을 들이받게 된다. 이런 사항들은 <설계자들>만의 것이 아니라, 이 장르의 공식이다.

약간 다른 게 있다면, 래생이 속한 살인 청부 회사가 도서관으로 위장되어 있다는 점이다. 도서관은 물론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그랬던 것처럼 음모가 벌어지는 장소로 곧잘 애용되기에 딱히 독창적이진 않지만, <설계자들>의 작가인 김언수에겐 어쩔 수 없이 도서관을 무대로 삼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그 점은 후술키로 하고, 우선 용법이 같지 않다는 걸 지적하자.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책이나 도서관은 신의 위치마저 위협하는 드높은 권력(가치)으로 나타나지만, 하릴없이 백과사전에 코를 박고 사는 래생의 고용인이자 '개들의 도서관' 관장인 너구리 영감은 기업형 살인 청부업자인 한자에게 속수무책이다. 과부하(過負荷) 해석일지 모르겠지만, <장미의 이름>과의 이런 차이는 문자 문화의 몰락을 상징한다(그런데 백과사전을 읽는 게 취미인 너구리 영감에게서 사르트르의 <구토>에 나오는 '도서관의 독학자'를 연상한 독자는 혹 없었는지?)

또한 범죄물 속의 주인공들은 권태의 해결책이나 회심의 계기를 요부(femme fatale)로부터 얻는다. 추의 파멸도 그랬고, 래생 역시 그러하다. 하지만 여기서도 차이점이 있다. 남자를 유혹하고 파멸시키는 요부는 거의가 신비를 간직한 명품녀들이다. 그런데 래생을 유혹하는 미토는 수다꾼에다가, 시장통에서 순대와 소주를 즐기는 굉장히 서민적(?)인 요부다. 그런데 내 생각으로는 이 서민적 요부는 서양의 범죄물에 기원이 있는 요부가 아니라, 1980년대를 지나온 맹렬 운동권 여성을 모사한 것이다. 실제로 미토가 나오면서 이 소설은 '후일담 소설'을 닮는다. (그런데 또, 미토에게서 배두나가 연기했던 <복수는 나의 것>의 여주인공을 떠올린 사람은 나뿐일까?)

<설계자들>은 작가의 야망을 세부가 따르지 못한다. 작가가 제시한 애초의 문제의식은 더 이상 드러내 놓고 폭력을 행사하거나 비밀 기관을 이용할 수 없는 정치 권력이 공권력 대신 살인 청부업자의 손을 더럽힌다는 것인데, 그런 용도에 맞는 청탁 살인은 첫 장면에 나온 권 노인의 경우에만 해당한다. 나머지 두 경우는 국회의원 K의 청탁으로 그와 함께 잤던 콜걸을 죽이는 거였고, 또 다른 경우도 국회의원 B가 아들의 성기를 물어뜯은 여자를 죽여 달라는 사주였다. 두 사례 모두 극히 사적인 주간지적 사건이었지, 권력 암투나 공권력이 연루된 게 아니다.

래생보다 먼저 환멸을 느끼고 조직을 들이받기로 결심한 추에게 래생은 "설계자들도 우리 같은 하수인들일 뿐이야. 의뢰가 들어오면 설계를 하지. 그 위에는 설계자를 설계하는 놈이 있겠지. 그 위에는 그놈을 설계하는 또 다른 설계자가 있을 거고. 그렇게 끝까지 올라가면 결국 뭐가 남을까? 아무 것도 없어. 맨 위에 있는 것은 그냥 텅 빈 의자뿐이야"(93쪽)라고 충고한다. 그런데 이런 깨달음은 선험적으로 공표되기보다, 청문회에 나온 고위 공직자 후보들의 결격 사유가 양파 껍질이 까지듯 한 꺼풀씩 벗겨지는 것처럼, 서사 속에 드러나야 했다. 소설은 아직 300여 쪽도 더 넘었는데, 래생은 세계의 비밀을 일찌감치 발설해 놓고, 더 이상 진도를 내지 않는다.

그건 권력의 비밀을 선험적으로 알아채버린 작가 김언수가 "자넨 칼을 들고 올라가서 맨 꼭대기에 있는 놈을 찌르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어. 그곳에 있는 것은 텅 빈 의자뿐이니까"(94쪽)라며, 래생을 세뇌해 놓은 결과다. 거기에 비하면 오히려 작가의 또 다른 목소리이면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의자 같은 소리하고 있네"(299쪽)라고 래생을 타박하는, 씩씩한 운동권 여장부인 미토가 더 소설의 주인공답다. "괴물을 잡으러 갔다가 자신도 괴물이 되어버리는 슬픈 이야기"(323쪽)라는 한계로부터 자력으로 벗어날 공력이 없는, 구시대적이고 상투적인 인물이긴 하지만, 그녀가 얼핏 본 자유와 거부야말로 진지한 독자들이 진지한 소설로부터 기대하는 것이다.

"래생은 쓰레기통에서 발견되었다. 아니라면, 쓰레기통에서 태어났거나"(35쪽)라는 설명에서 보듯이, 이 소설은 부모 없는 소설이다. 부모 없는 주인공 또는 부모 없는 소설은, 가상의 부모를 만들고 부모 부재를 메울 무의식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도서관은 그래서 필요했다. 도서관은 부모 없이 자라난 래생에게 부모를 대신하는 콤플렉스이자 무의식이고 현실이다. 도서관이 래생의 부모라는 것은, 불성실한 양부였던 너구리 영감이 래생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글을 깨우친 일로 증명된다. 아홉 살 생일을 맞은 래생이 혼자서 <호머 이야기>를 읽고 있는 것을 발견한 너구리 영감은 성난 얼굴로 다그쳤다. "누가 너에게 글을 가르쳤지?"(36쪽)

마치 래생에게 글을 가르쳐준 사람을 잡아서 어떻게 하기라도 할 것처럼 너구리 영감의 목소리는 단호하고 무서웠다. 래생은 작고 떨리는 목소리로 아무도 나에게 글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 래생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가까스로 참으면서, 정말로 그림책을 보며 혼자서 글을 배웠다고 말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37쪽)

젖을 먹는 게 어린아이의 본능이듯, 래생에게 글은 부재한 어머니의 젖이었고, 도서관은 그의 아버지였다. 래생이 읽는 산더미 같은 책은 부모가 선사하지 못한 그의 무의식이 되었고, 더불어 책과 문자는 그의 콤플렉스가 되었다. 당신은 <매독의 역사>·<푸른 늑대>·<만물의 유래사>·<불임의 정복>·<결혼, 여름>·<페스트>·<자살>·<나무 위의 남자>·<한낮의 우울>·<악령>·<의아한 북극곰>……을 쉬지 않고 읽어 댈 뿐더러, 자신이 키우는 두 마리의 고양이에게 '독서대'와 '스탠드'라는 이름을 붙인 킬러가 상상되는가? (이 소설 속에 나오는 도서명은 창작되었거나, 변형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인터넷에서 검색하지 마시오!)

책과 문자가 래생의 부모이긴 하지만,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부모였을 뿐이므로, 래생은 제대로 된 거세 위기를 거쳐, 아동의 세계로부터 성인의 세계로 넘어갈 수 없었다. 너구리 영감이 고아인 래생에게 문자를 배워주지 않으려 했던 이유도 그가 부모 대신 책에 물성애를 느끼게 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한 것으로, 젖을 떼지 못한 아이처럼 서른두 살이 되기까지 문자를 게걸스럽게 탐닉해 온 래생이 문약한 회의주의자가 된 것은 그러므로 자연스러운 일이다. 바로 그런 까닭으로 실전시의 래생의 능력은 이발사와의 진검(眞實) 승부에서 보았듯이 변변치 못하며(고수가 못되며), 권력과 부딪쳐 피 흘려 본 일이 없으면서도 함부로 '맨 위에 있는 것은 텅 빈 의자'라고 체념하고 단언하는 것이다.

1인 혁명가가 된 래생이 너구리 영감 아래서 형제처럼 같이 자랐던 한자와 한바탕 격전을 벌이고 파멸하는 설정 역시, 생사의 고비를 함께 넘긴 무수한 거리의 의형제들이 반목과 대결 끝에 공멸로 이어지는 범죄물의 공식을 보여준다. 범죄물의 서두가 독자를 흡입하기 위한 긴장된 '액션'으로 시작한다면, 안티 히어로들의 경연장인 이 장르의 대미는 항상 이완된 '가오'로 막을 내린다.

래생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오랜 전매특허처럼 허공을 향해 피식 웃었다. (417 쪽)

서평은 해당 도서를 소개하고 분석하는 일에 그치는 게 아니라, 누가 "<설계자들> 어때? 읽을 만해?"라고 물을 때, 거기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글의 운을 떼며 나는 '총이 나오는 장르는 질색'이라고 솔직히 밝혔다. 먼저 그걸 감안하고 들어 주시기 바란다. 이 소설은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인 오락물이다. 주제는 1964년 최희준이 불렀던 <회전의자>의 가사에 머물렀고, 그나마 어디서 본 듯한 인물과 일화가 짜깁기 되어 재미도 없다. 그런 대목 가운데 특히 M 우시장에 있는 희수 영감의 반짝 등장은, 어쩌면 앞으로 이 작가의 고질이 될지도 모르겠다.

래생은 자신에게 킬러 기술을 배워준 훈련관과 친구 정안 그리고 추를 죽인 이발사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먼저 M 우시장에 있는 희수 영감을 찾아 간다. 명목은 이발사의 거처를 알기 위해서인데, 굳이 그 때문에 새로운 인물을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정인이 죽으면서 남겨 놓은 메모 정도로도 가능했다고 본다. 소설이 집필 단계부터 자원을 절약해야 하는 희곡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물을 남발할 것도 아니다. 게다가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이발사의 거처를 알고 있는 이 인물이 일회용으로 기용되고 말기에는 너무 어마어마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기이한 영감"으로 소개된 희수 영감은 마약상, 갱들, 장기 밀매업자, 사기꾼, 청부 브로커, 장물애비, 포주 등 "푸주에 일하는 모든 업자들은 희수 영감에게 한 달에 한 번씩 돈" 바쳐야 할 뿐 아니라 "한자와 너구리 영감" 조차도 세금(?)을 바쳐야 하는 "푸주의 왕"(313쪽)이다. 소설의 전체 구도를 뒤흔들 정도가 되고도 남는 희수 영감이 이발사의 거처를 수소문하기 위해 래생이 그를 찾아가기 전까지는 한 번도 언급 되지 않은데다가, 이후로도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 이런 부실한 구성은 어떻게 설명된다는 말인가?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에 나오는 삼선교 도축장의 오무성(이기영)에게 바치는 오마주(hommage)였던가?

김언수의 등단작이자 전작(前作)이었던 장편소설 <캐비닛>은 더도 덜도 아닌 이상한 사람들의 일화 모음집이다. 이를테면 셔우드 앤더슨의 <와인즈버그, 오하이오>와 같은 소설집이 되었어야 할 <캐비닛>을 전체적인 플롯이 유지되는 무리한 장편소설로 만들었다면, 이번의 장편소설은 그와 반대로 작가가 <캐비닛>의 방법론을 잊지 못하고 전체적인 플롯에 기여하지 못하고 튀는 인물들을 버릇처럼 삽입하는 폐단을 보인다. 푸주의 왕 희수 영감이 대표적인 예였고, 입안에 넣고 사탕처럼 굴리며 돌의 맛을 구별하는 게 취미여서 지질학과를 지망했다는 래생의 친구 정안의 일화도 이번 소설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설계자들>은 또 한 권의 '심토머 백과'가 아니어야 한다.

이 소설이 품격 있다고 믿거나 이 소설에 사로잡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한 번도 문학의 진수를 맛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나는 이 소설이 품격 있다거나, 나를 사로잡았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킬러도 설계자도 푸주도 작가의 입담이나 유머도, 모두 그랬다. 이 작품에서 내가 발견한 가치가 있다면 그런 드러난 주제나 스타일보다는, 이 소설의 제1장에 붙은 '환대에 대하여'란 소제목과 거기 따른 은유일 것이다.

소설의 서두는 이 글의 앞머리에 나오는 최초의 인용대로다. 그런데 래생은 노인을 쏘지 못하고 회의하다가, 매복 중에 잠이 들었다. 그러다 잠이 깼을 때, 암살자가 온 것을 간파한 노인에게 발각된다. 그날 저녁, 노인은 래생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식사와 술과 잠자리를 제공한다. 다음날 아침 래생은 노인에게 아침을 대접받고, 집을 나설 때는 삶은 감자까지 선물로 받는다. 그는 뜻하지 않게 노인의 환대를 받았지만, 숲으로 돌아간 래생은 그날 낮에 노인을 저격한다.

이 소설에서 환대는 숨어있는 중요한 동기다. 래생은 미토의 여동생인 미사에게 턱없는 환대를 받으며, 푸주의 왕 희수 영감도 술과 안주로 래생을 환대한다. 그 뿐 아니다. 놀랍게도 래생은 대결을 하기 위해 처음 찾아간 이발사에게조차 환대 받았다! 동서양의 모든 신화나 민담은 환대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손님을 제대로 환대하지 않거나 환대한 주인의 선의를 악으로 갚은 자는 큰 벌을 받았고, <구약성서>에서는 거의 율법 외의 율법에 해당했다. 그런데 래생은 자신을 따뜻하게 환대해준 노인과 이발사를 죽인다.

'환대를 악으로 갚는 현상'이 비록 <설계자들>의 주제는 아니지만, 나는 이것이 작가가 피상적으로 제시하고 더는 세심하게 천착하지 못했던 '시장에 의해 사회계약이 허물'어져 가고 있는 현상보다, 가슴 아프다. 운 좋게도 '환대를 악으로 갚았다'는 비난을 들을 수 있을 만큼, 신화 시대에 허다하고 융숭했던 환대가 이 시대에도 존재하는 거냐고 따진다면, 너나없이 말문이 막히고 부끄럽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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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들>(창비 펴냄)은 등단 11년차에 접어든 김중혁의 첫 번째 장편 소설이다. 작가의 문학적 야심은 마지막 쪽, 작가의 말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는 이렇게 쓴다.

"이것은 좀비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놀랄 만한 말은 아니다. 좀비 이야기는 언제나 좀비 이야기가 아니었으니까. 그것은 불가해한 타자에 대한 공포이거나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은유였다. 그렇다면 김중혁이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일까. 대답은 바로 다음 문장에 있다.

"잊고 있던 기억에 대한 이야기다. 기억하고 싶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비록 <좀비들>이라는 제목을 쓰고 있지만 장르의 공식을 따르지는 않겠다는 말이다. 신실한 독자의 입장으로 작가의 말을 따라 읽는다면 <좀비들>의 되살아난 시체는 잊히지 않는, 잊어서는 안 되는 기억이고 사람이며 그들의 죽음일 것이다.


▲ <좀비들>(김중혁 지음, 창비 펴냄). ⓒ창비
통신 회사 '에볼(EVOL)-LOVE를 거꾸로 쓴 것? 혹은 '소닉유스'의 세 번째 앨범 제목?-감식반에서 일하는 '나', 채지훈은 외로운 남자다. 업무용 밴을 타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내비게이션에 표시되는 안테나 수신 감도를 측정하는 그에게는 돌아갈 집과 가족이 없다. 해가 있는 동안엔 차를 달리며 일을 하고 해가 지면 차에서 잠을 잔다. 그는 돌아보지 않기 위해 고립을 자처하는 사람이다.

친구들과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친구들을 만나면 옛날 이야기를 해야 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옛날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어제를 지워버려야만, 어제 이전의 모든 일들을 깊은 땅속에 묻어버려야만 오늘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25쪽)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과거와 절연된 삶을 살고 있는 그가 유일하게 깊은 땅속에 묻어버리지 않은 것은 형이 남긴 50장의 엘피판(LP)뿐이다. 그것은 박제된 기억이다. 더 이상 노래하지 않는 과거의 기념품. 하지만 체호프가 이야기했듯 "작품에 총이 나온다면 그 총은 발사되어야만" 하고 엘피판이 나온다면 그것은 플레이되어야만 한다. 김중혁은 여러 단편들에서 선보인 바 있는 기발한 상상력을 다시 한 번 펼친다. 차량용 턴테이블인 '허그 쇼크(Hug Shock)'가 바로 그것. 우연히 광고를 보고 찾아간 '나'에게 대리점의 판매원은 설명한다.

"충격 완화의 신기원을 이룬 제품이라고 설명하면 어떨까요. (…) 이런 말씀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충격을 온몸으로 끌어안는 거예요. 충격이란 건 말이죠, 받아들이는 쪽에서 마음만 먹으면 아무 일도 아닌 게 될 수 있는 겁니다. (…) 우리는 새로운 물건을 발명한 게 아니라 충격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개발한 겁니다." (12쪽)

<좀비들>의 이야기는 바로 그 순간 시작된다. '허그 쇼크'를 장착한 순간. '스톤 플라워'의 엘피판을 플레이하는 순간. 스피커에서 터져 나오는 것은 어제로부터의 노래, 죽음과 이어진 오르페우스의 노래에 다름 아니다. 오르페우스가 누구인가. 사랑하는 에우리디케의 죽음을 받아들이고자 지옥까지 쫓아가 기어이 뒤를 돌아보는 존재다. 따라서 형이 사랑하던 스톤 플라워의 음악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가사를 모두 외울 지경"이 된 순간 시작되는 '나'의 모험은 애써 외면해왔던 기억, 형의 죽음이라는 충격을 온몸으로 마주보고 끌어안기 위해 떠나는 오르페우스의 여정이 될 것이다.

허그 쇼크는 내 삶도 바꾸었다. 형이 없었다면 LP가 없었을 것이다. LP가 없었다면 허그 쇼크도 필요 없었을 것이고 허그 쇼크가 없었다면 홍혜정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홍혜정이 없었더라면 그녀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삶은 일직선이었다. 하나의 사건은 이전 사건의 결과이자 다음 사건의 원인이었다. 도미노가 다음 도미노를 넘어뜨리듯 모든 사건은 연결돼 있었다. (14쪽)

'나'의 말처럼 도미노는 계속해서 쓰러진다. 스톤 플라워는 역사 도서관으로, 사서인 뚱보130에게로, 스톤 플라워 리더의 자서전을 번역한 홍혜정에게로, 그녀가 사는 곳이자 어떤 통신도 잡히지 않는 '무통신 지역' 고리오 마을로, 의문의 노인인 케겔과 제로에게로, 마을 사람들이 죽는 순서를 맞추는 '다이토 게임'으로, 홍혜정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그녀의 딸 홍이안에게로 쉼 없이 이어진다.

그리고 딸깍, 마침내 좀비가 등장한다. 103쪽. 홍혜정을 추억하며 홍이안과 함께 밤새 술을 마신 다음 날 아침, 뚱보130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 '나'는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2층을 향한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조용히 "죽음 이후의 냄새"를 풍기며 앉아 있는 좀비를 마주한다. 그는 말한다.

혹시 좀비의 눈을 들여다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그건 엄청난 경험이다. 좀비와 대면한다는 건 허공을 들여다보는 일이고, 깊은 구멍을 들여다보는 일이고, 죽음과 마주하는 일이다. (105쪽)

작가가 좀비의 등장을 최대한 늦추며 그려왔던 '나'의 입장에서 이 상황을 생각해보자. 비록 뚱보130과 홍혜정, 홍이안을 만나며 고립된 생활에서 벗어났지만, 그는 여전히 "죽음이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죽음과 삶은 동전의 양면 같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 "죽음을 생각하면 숨이 막힌다"(67쪽)고 고백하는 사람이다. 죽음을 장난감처럼 다루는 다이토 게임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고 엄마처럼 따르던 홍혜정까지 만나지 않기로 결심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좀비를, 죽음을 처음으로 마주하는 장면이다.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떨리는 소설적 순간. 그것은 독자에게 잠시 책장을 덮고 호흡을 가다듬을 것을 요구하는 마주침이다. 하지만 다시 펼친 책장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오히려 뚱보130을 독려하며 좀비와 맞서는 '나'의 모습이다.

"모르겠어. 침착해야 돼. 우선 해치우고 보자. 네가 몸 위쪽을 맡아. 내가 다리 쪽을 공격할 테니까." (106쪽)

"야, 찌르지 말고 머리를 후려쳐." (107쪽)

침착하게 머리를 후려침으로써 비교적 간단하게 좀비를 막아낸 '나'는 좀비를 죽였다는 죄책감과 정당방위였다는 자기 합리화 사이에서 갈등한다. 하지만 생각만 해도 숨을 막히게 했던 죽음은 더 이상 그의 관심사가 되지 못한다. 그는 방망이 끝에서 전해지는 찌릿한 쾌감을 느끼며, 마을을 떠나 자신의 집으로 가자는 뚱보130의 제안을 거절한다.

"일단 여기서 상황을 좀 지켜볼게. 저게 좀비인지 뭔지는 알아야지. 저게 어째서 우리 집에 들어왔는지, 그건 알아야지. 짐을 싸도 그때 싸야 할 것 같아." (114쪽)

바로 이 지점부터 소설은 길을 잃는다. 아니, 전혀 다른 소설이 된다. 초반 100쪽 동안 우리가 만난 주인공은 분명 죽음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해 고통 받는 인물이었다. 그것이 그를 그답게 하고 공감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앞에 있는 것은 흔한 할리우드 영화의 주인공이 아닌가.

물론 인물은 변한다. 문제는 변화의 근거가 제시되지 않는다는 것. 우리는 그가 어느 순간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을 그만두었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마치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경구를 패러디라도 하는 것처럼. ("사는 대로 생각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적절한 대처법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도미노는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빨라진다. 좀비들이 떼를 지어 나타난다. 군인들이 마을을 봉쇄한다. 고립된 상황에서 홍이안과의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다. 음모의 냄새를 풀풀 풍기는 장군(정 장군)이 등장하고 좀비와 고리오 마을을 둘러싼 비밀이 차츰 윤곽을 드러낸다.

불가해한 실재의 침입이었던 돌아온 시체들의 존재는, 이제 진부한 군사적 음모의 희생양으로 설명된다. 좀비들이 (작가의 말에서처럼) 마을 사람들이 잊고 있던, 하지만 기억하고 싶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그런데 궁금한 점. 군부대에서 좀비를 구해내 지하실에 가두고 특수 제작한 리모컨을 통해 그들의 공격성을 제어하는 사람들의 행동은 과연 윤리적인가?)

사이사이 주인공은 엄마와 형의 죽음에 대한 기억을 늘어놓으며 초반에 등장했던 '나'와의 연속성을 회복하려 들지만 그럴수록 이야기의 균열은 도드라져 보일 뿐이다.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과 대면하기 위한 '나'의 오르페우스적 여정은, 어느 순간 '악의 축'인 '정 장군'과의 대결로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나'의 내면에 공감하지 못한다. 단지 복잡하게(동시에 익숙하게) 꼬인 상황이 어떻게 해결될 것인지가 궁금할 뿐이다. 그것은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학습된 관습적인 궁금함이다. <좀비들>에서 그 궁금증이 해소되는 과정 또한 그런 매체들이 제시하는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쨌거나 소설의 막바지에 다다른 '나'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배우는 동시에 삶이라는 이야기를 바라보는 용기를 배운다. 그간의 깨달음을 정리하는 마지막은, 그것이 그리고 있는 장면 자체로 꽤나 감동적이다. 결국 이것은 다 큰 남자의 성장담이고(어디까지나 영화 <다이하드>를 존 매클레인의 성장담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와 함께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삶(그리고 등가로서의 죽음)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오래된 교훈이다. 피할 수 없다면 마주보아야만 한다. 깨달음의 계기는 여전히 모호하지만, 아무려나, 채지훈에게는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다시 한 번 말한다.

나에게 삶은 일직선이었다.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하나로 연결돼 있었다. 하나의 사건은 이전 사건의 결과이자 다음 사건의 원인이었다. 형이 없었다면 LP가 없었을 것이다. LP가 없었다면 허그 쇼크도 없었을 것이고, 허그 쇼크가 없었다면 홍혜정과 홍이안과 뚱보130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도미노가 다음 도미노를 넘어뜨리듯 모든 사건은 연결돼 있었다. 처음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처음이란 중요한 게 아닐 수도 있다. 마지막 도미노는 무엇일까. 마지막 도미노란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의 도미노를 쓰러뜨리는 사건이 될 것이다. (375쪽)

그러고 보니 이 소설은 도미노를 닮았다. 고만고만한 사건들이 일직선으로 늘어선. 하지만 우리가 도미노를 보며 기대하는 것은 블록이 넘어지며 만들어내는 독특한 형태지 376쪽만큼의 직선이 아니다. 흔한 음모론을 향해 달려가는 일직선의 이야기 속에서 장르의 쾌감은 물론, 잊고 있던 기억과 기억하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까지도 증발해 버리고 말았다.

김중혁이 <펭귄 뉴스>(문학과지성사 펴냄)와 <악기들의 도서관>(문학동네 펴냄)에서 보여주었던 솜씨를 생각하면 그저 애석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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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런샹의 <중국 음식 문화사>(민음사 펴냄)에 달린 주석은 모두 번역자인 주영하 교수가 단 역주이다. 주석이 하나도 없었던 원저에 옮긴이가 600여 개의 상세한 주석을 단 이유는 중국의 대중서가 한국에서는 대중이 읽기에는 어렵고 그만큼 알지 못하는 내용이 많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 역사에 관한 대중서를 중국어로 옮길 때에도 마찬가지여서 한국 역사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중국의 독자들을 위해서는 필연적인 일이다. 이 주석들이 옮긴이의 이 책에 대한 애정과 번역의 진실성을 입증해주는 훈장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이 중국에서 대중서라는 사실이 내용이 가볍거나 엄밀하지 못함을 뜻하지 않는다. 대중서라는 의미는 많은 사람들이 중국의 음식 문화가 지닌 함의들을 손쉽게 이해하도록 하고, 지루한 학문적 논증들을 생략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책은 학문적 논증의 굴레를 과감하게 벗어버림으로써 정치, 경제, 사회, 예절과 풍속, 문학, 음악, 철학 등에서 중국의 음식이 어떻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마치 가을비가 내리고 맑게 갠 날 앞산이 문득 앞에 다가와 있는 것과 같다.


▲ <중국 음식 문화사>(왕런샹 지음, 주영하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이 책의 원제는 "백성은 밥을 하늘로 여긴다(民以食爲天)"이며, 부제가 "중국 음식 문화"이다. 백성이 밥을 하늘로 여긴다 함은 고금동서에 모두 해당하는 말이지만 실제로는 백성들의 밥상 문화를 밝히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대개 고고학의 발굴 자료나 문헌의 기록들은 평범한 백성들의 몫이 아니라 지배 계층이었던 까닭이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대부분의 음식 역시 높은 사람들의 것이다. 하기는 기장밥이나 조밥에다 절인 채소나 채소를 끓인 국을 놓고 먹는 것이 서민들의 음식이니 그 음식 문화를 기록하기도 논할 것도 없는 셈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높으신 분들의 음식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것이다.

지금도 중국인들은 먹는 것에서라면 결코 지지 않으려 한다. 삶에 있어서 즐거움의 가치를 집이나 옷에 두기보다는 음식에 두는 경향이 많다. 이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은주 시대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의 지배층의 음식들을 보면 중국인들이 왜 지금도 이렇게 음식을 중요시 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결국은 지배층의 문화는 아래로 내려가 일반인들의 밥상까지도 화려하게 변모시키는 것이다.

주대의 연회에 있었던 솥에 담긴 고기 종류만 해도 입이 벌어지고, 그 이후로 내려가도 음식은 더욱 더 화려해지기만 하지 결코 쇠락하는 경향은 없다. 이런 중국의 음식 전통이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지고 살 수 있는 지금의 중국 백성들의 밥상을 중시하는 전통을 만들어낸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이 황제와 귀족들의 음식 문화에 대해서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맛있는 음식은 오로지 황제와 대신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문화적 자산이며, 아울러 중화 민족의 것이며, 동시에 백성들의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시대가 지니고 있는 문화의 정도를 살피기 위해서는 황제의 식탁을 언급해야 할 뿐만 아니라 사대부들이 행한 행동과 말도 함께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음식 문화를 이야기할 때 어디서나 부딪치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백성들의 음식들은 보잘 것 없었으며, 가진 자들만이 먹고 마시고 즐겼다. 하물며 사회주의 국가에서 황제와 귀족의 음식 문화를 논하면서 이렇게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황제와 귀족들은 말로는 백성을 위하면서 실제로는 자신들의 입맛을 즐겼던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황정견이나 소식 같은 소수의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전체로 보면 그런 문화의 흐름이 5000년이나 지속되고서야 일부의 대중들이나마 그 음식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위치에 이른 것이다. 어쨌거나 이 책의 원제가 주는 의미는 실제로는 이루지 못했던 과거의 명제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책이 황제와 대신들의 밥상 문화를 중심으로 이야기한대도 그 음식 문화의 흐름은 마치 커다란 양자강의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내며 흐르듯이 도도한 흐름이 아닐 수 없다. 은나라의 음주와 주나라의 음식을 먹는 자리에 부과한 수많은 예절과 형식들, 춘추 전국 시대의 음식과 관련된 원한과 정변, 한나라의 서역과 교류를 통해 풍부해진 음식 재료, 위진 남북조의 사치스러운 풍조, 당나라의 황제가 내리는 음식과 신하가 황제에게 바치는 음식, 북송과 남송의 북쪽 사람들이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풍부해진 음식 문화, 명·청 시기의 번성함과 서로 융합되는 음식 문화 등은 이런 도도한 문화와 풍습의 흐름을 적절하게 드러내주거니와 음식이란 것이 얼마나 정치와 풍속에 귀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알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수많은 예화와 음식과 관련된 문학 작품들이 적절하게 인용되어 지루하지 않게 음식의 세계를 더욱 다채롭게 만든다. 마치 한 상의 거나한 만한전석(滿漢全席·18세기 초 청나라에서 기원한 만주족, 한족의 음식을 총망라한 황제의 상차림)을 차려놓고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저자의 이야기는 두툼한 분량에도 손쉽게 책장을 넘기게 하는 재미로 가득 차 있다.

전반적으로는 이 책은 흥미로운 중국 음식, 더군다나 호화롭기 짝이 없는 중국 음식으로 풀어쓴 중국의 역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저자의 시각을 따라가다 보면 눈에 거슬리는 부분도 많이 있다. 특히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선사 시대인 신화 시대의 고대인에 대한 피상적인 설명과 고대인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는 자신을 중국의 문명인으로 자처하는 오만함을 느끼게 한다.

고대인의 날것을 먹는 생식에서 불을 쓰는 화식으로 변화하는 과정이나 농업과 목축의 발달은 저자가 인식하듯이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고대인들도 지식의 축적이 오늘날처럼 풍부하지 않았을 뿐이지, 지혜가 모자란 것은 아니었다. 그 지혜들이 모이고 쌓여서 지금의 문명을 만든 것이다. 수렵민이라 하더라도 자연에 대한 오랜 관찰과 지혜를 바탕으로 농업과 목축을 발전시킨 것이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고대인을 무시하는 태도는 현대에 사는 문명을 갖추지 못한 원주민을 미개인이라 폄훼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또한 옮긴이가 주석에서 지적했듯이 중화주의에 매몰된 역사관은 이 책을 읽는 우리 독자들에게 무척이나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 중화주의는 중국의 것은 모두 무척이나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고, 자신들의 것이 최고라는 자부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일이다. 이를테면 중국이 모든 문명의 발상지이며 외부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그것들은 중화 문화에 흡수되었다는 인식이다.

장건이 서역에서 가져온 종자들은 원래 있던 식물들의 개량종을 가져온 것뿐이지 그 모든 식물들이 중국에도 있었다 하는 서술 같은 것이 그 사례이다. 하지만 그 영역이란 것이 그 당시 중원의 중국과는 관계없는 변방의 지역들에 있었다는 것이다. 역사적 시점에서 지리는 지금의 강역을 중국으로 삼고, 그 적용 시대는 무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지극히 자기 중심적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얼마 전 일본과의 마찰에서 보여주듯이, 그리고 동북공정으로 우리와 마찰을 빚었듯이, 중국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는 중국과의 관계에서 이 중화주의가 수많은 불협화음을 빚을 중국인들의 보편적인 생각이란 사실을 마음속에 새겨야 할 것이다. 중화주의가 이전의 제국주의보다 훨씬 더 무서운 이념으로 주변과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런 점은 이 책이 다수의 중국 독자를 위해서만 쓰였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매우 크다. 비록 이웃한 나라의 음식 문화사이기는 하나 우리에게도 문화사 서술에 많은 시사점들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는 이 책에 필적할 일관된 <한국 음식 문화사>가 없다.

이 책을 번역한 주영하 교수는 <한국 음식 문화사>를 쓸 수 있는 저자로 첫 손가락에 꼽히는 인물이다.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고 풀무원 김치박물관의 학예연구사를 지냈으며, 문화인류학을 공부하고, 중국에서 민속학을 전공했으며, 일본에서 연구교수를 지내 동양 삼국의 음식 문화에 대한 천착이 남다르다.

벌써 여러 권의 음식 문화에 관한 저서들이 그의 내공이 무르익어가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기도 하다. 이제 여기에서 젊은 날 공부의 한 매듭을 맺었으니 그의 다음 과제는 <한국 음식 문화사>가 되어야 한다. 그의 다음 작업을 고대하는 이유가 바로 이 책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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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한다. 기자는 다운족(down族)이었다. 전화선을 꼽는 모뎀부터 초고속 인터넷까지 인터넷 사용 시간 대부분을 0%에서 100%까지 올라가는 '상태 바'를 바라보며 쾌감을 느끼곤 했다. 보고 듣고 즐기기 위해서가 아닌, 검색하고 찾아내 실행시켰다는 만족감을 추구하던 중증에 시달린 적도 있었다.

다운족에게 2000년대 초반까지 인터넷은 천국이었다. 와레즈(warez) 사이트에서 수백 달러씩 한다는 고가의 프로그램을 공짜로 내려 받아도 별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어차피 구입할만한 여유도 없었고, 누군가가 불법 복제라고 호통 치지도 않았다. 저작권의 개념도 모호했던 시절, 눈에 불을 켜고 승냥이처럼 탐욕스럽게 하드디스크 용량을 채워나갔다.

'소리바다'를 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MP3 플레이어 하나씩은 다 들고 다니는 요즘은 그다지 신기한 게 아닐지 몰라도 당시엔 큰 충격이었다. 매장에서 찾기도 힘든 곡을 몇 분이면 공짜로 구할 수 있었고, 더구나 그렇게 찾은 CD 한 장에 수백 곡씩 집어넣을 수 있었다. 소리바다의 채팅창은 언제나 선호하는 장르의 MP3를 교환하려는 이용자로 북적였다.

그때 내려 받았던 명곡은 지금도 가슴을 울릴 때가 있지만, 당시 소리바다는 더 이상 없다. 들을 틈도 없이 쌓여가는 파일에 질려 소리바다를 찾던 발길이 줄어들 즈음 소리바다가 저작권 분쟁에 휘말렸고, 다른 여타 음원 업체와 마찬가지로 유료화를 선언했다는 이야기만 어쩌다 접했을 뿐이다. '무료 다운로드'는 비도덕적이라는 가치관이 점차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 <소리바다는 왜? 대한민국 IT는 왜 세계적인 스타를 만들지 못하는가>(김태훈·양정환 지음, 현실문화 펴냄). ⓒ현실문화
"대한민국 IT는 왜 세계적인 스타를 만들지 못하는가"라는 부제를 단 <소리바다는 왜?>(김태훈·양정환 지음, 현실문화 펴냄)를 접했을 때도 처음엔 크게 흥미가 돋지 않았다. 요새 극장에서 영화가 시작되기 전 나오는 불법 다운로드 근절 캠페인 광고를 보면서 괜스레 마음 한편이 켕기듯이, 소리바다에 대한 추억에는 곧 '송 라이터'의 고민과 노력이 밴 결과물을 너무 쉽게 향유했었다는 일종의 '죄책감'이 똬리를 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소리바다에 대한 단순한 '변명'이 아니다. 음원을 내려 받는 데 있어서 정당한 수익이 이해당사자 사이에 골고루 분배되어야 한다는 명제는 틀리지 않다. 하지만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소리바다에 그 명제가 적용됐던 과정은 '최악'이었다. 어쩌면 소리바다는 음악 자체에 대한 애정과 관심보다는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생각했던 일부 제작자와 대기업에 희생된 중소 정보통신(IT) 기업의 운명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예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런 과정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다.

차단과 배척 그리고 추종

소리바다의 과거를 되짚기 전에 먼저 '스마트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지난해 아이폰이 한국에 상륙해 돌풍을 일으켰을 때 한국은 동아시아의 'IT 강국'에서 국내 제조사와 통신사만을 싸고 돈 'IT 쇄국'으로 전락했다. 일부 '얼리어답터'를 제외하고 대리점에서 추천하는 '공짜 폰'에 익숙했던 소비자에게 아이폰은 '전혀 새로운 무엇'이었고, 그 동안 새로움을 거부하고 국산 표준 플랫폼만을 고수하던 정부에 배신감을 느꼈다.

재미있는 건 아이폰의 상륙 전과 상륙 후 제조사들과 통신사들이 보여준 정반대의 행보다. 아이폰이라는 비교 대상이 없었던 시절에는 글로벌 시장에서도 통하는 국내 제조사들의 시대에 앞서가는 단말기와 어디든 터지지 않는 곳이 없었던 통신망을 자랑해 왔다. 아이폰 도입이 초읽기에 들어갔을 때도 한국 소비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DMB 기능 등이 없다는 점을 들며 현지화에 실패할 거라는 관측도 제기됐다.

하지만 아이폰의 등장 이후엔 달랐다. 앞서 출시됐던 삼성전자의 옴니아 모델이 새삼스레 '스마트폰'이라는 콘셉트로 다시 홍보되기 시작했다. 아이폰 이용자들이 그동안 국산 모바일 기기에서 이용할 수 없었던 와이파이의 유용성을 깨닫게 되자 그동안 국내 단말기에서만 제외되어 왔던 무선랜 기능이 앞 다투어 탑재됐다.

결국 제조사들은 경쟁자가 없는 시장에서 비슷비슷한 성능의 단말기로 재미를 봤고, 통신사들은 터무니없이 비싼 무선 데이터 통신 요율처럼 폐쇄적인 이동통신 환경을 구축해 이들을 뒷받침 한 셈이다. 이동통신 시장은 진정한 의미의 '시장'이 아니었다. 외국에서 건너온 정체불명의 스마트폰이 등장하기 전까지 국내 기업들은 자신들이 구축한 견고한 카르텔을 깨서 시장의 '파이'를 불릴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배척과 차단, 그러다 견고한 성벽이 무너지면 곧바로 그 흐름을 추종하는 전략은 한국 경제에서 곧잘 먹혀들어갔다. 하지만 그러한 전략이 꼭 외부의 강력한 제품이나 서비스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 그들이 쌓아온 장벽은 참신한 아이디어 하나만을 가지고 시장에 뛰어든 중소기업에도 결코 관대하지 않았다. 그들의 '불친절함'을 뼈저리게 느낀 이들이 바로 소리바다의 개발자 양일환·양정환 형제였다.

소리바다의 화려한 등장과 유료화 선언까지

미국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형제는 2000년 5월 그동안 만들어왔던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한국에 없었던 새로운 MP3 서비스를 만들었다. 인터넷 이용자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파일을 전송할 수 있는 P2P 기능으로 '소리바다'를 선보인 것이다. 이미 미국의 음원 전송 프로그램인 '냅스터'가 저작권 문제로 소송에 들어간 상황에서 분쟁을 각오한 도전이었다.

소리바다가 처음에 각광을 받은 건 기자의 경우처럼 무료로 손쉽게 음원을 구할 수 있다는 특징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는 곧 음원을 만드는 장본인들, 제작자와 음반사의 권리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두 형제 역시 이 점을 염두에 두었고, 광고나 소정의 이용료를 통해 수익 모델을 만들어가려는 계획을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불쑥 등장한 경쟁자에 대한 반응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 책에서 설명하는 소리바다의 몰락 단계는 크게 3가지다. 2000년 음반산업협회의 음반 복제 금지 가처분 신청, 2004년 한국음원제작자협회와의 법적 분쟁, 그리고 마지막으로 음원 시장에 뛰어든 대기업 SK텔레콤과의 대결이다.

음반산업협회가 제기한 문제는 인터넷 음원에 대한 저작권 개념이 국내에서 아직 확립되지 않았던 시점에서 벌어졌기에 일견 타당했다. 소리바다 역시 무료 공유를 최종 목적으로 서비스를 운영한 것이 아니기에 타협점을 모색했다.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진 후 소리바다는 테스트 기간을 거쳐 부분적 유료화 기능이 더해진 업그레이드 버전을 선보였다.

하지만 그 이후 벌어진 분쟁은 그 성격을 조금 달리했다. 정부가 2003년 인터넷 음악 서비스의 유료화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면서 음원 시장이 본격화되자 많은 음반사들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소리바다는 오프라인 시장에서 자신들이 독점하던 영역에 침입한 이방인이었고, 이에 따라 당시 문화관광부로부터 방송 보상금 징수 단체 및 저작권 신탁관리단체의 권한을 부여받은 한국음원제작자협회의 손해 배상 소송으로 이어졌다. 정당한 보상보다는 소리바다의 퇴출을 목적으로 한 압박의 성격이 짙은 분쟁이었다.

소리바다에서 공유되는 음원 상당수의 저작권을 갖지 못했던 한국음원제작자협회와 소리바다의 싸움은 법원이 원고의 손을 들면서 소리바다가 거액의 합의금을 지불하는 결과로 끝난다. SM엔터테인먼트와 같은 대형 음반사들의 소송에 맞서 젊은제작자연대 등이 소리바다의 편에 섰지만 결과를 바꾸지 못했다.

미국의 유사한 소송에서도 P2P업체가 패소하면서 소리바다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게 돌아가 측면도 있었다. 결국 소리바다는 주요 음원의 검색을 차단하는 필터링 기능을 탑재한 새로운 버전을 선보이면서 정부의 가이드라인을 준수하는 전면 유료화를 선언하게 됐다.

SK텔레콤과의 DRM 논쟁

언뜻 보면 소리바다를 둘러싼 분쟁은 인터넷에서 공유되는 음원의 저작권에 대한 가치를 정립해가는 시행착오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소리바다에 대한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인터넷과 모바일 시장에서 거래되는 음원의 수익성에 통신사가 주목하기 시작했고, 소리바다가 분쟁을 겪는 틈을 타 급격히 외연을 불리면서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서울음반을 자회사로 둔 SK텔레콤은 '멜론'을 통해 음원 시장을 수성했고, 고초를 겪은 소리바다는 바로 뒤를 쫓는 상황이었다. 서울음반을 위시한 음반사들과 소리바다의 분쟁에서 핵심은 DRM(Digital Right Management, 디지털 콘텐츠의 불법 복제를 차단하는 기술과 서비스는 총칭하는 말)이었다. SK텔레콤이 일정 기간이 지나면 들을 수 없도록 설계된 DRM을 선보였다면, 소리바다는 더 저렴한 가격에 기간 제한이 없는 음원을 내려 받을 수 있는 서비스를 선보인 것이 다툼의 발단이 됐다.

책에 그려진 지난한 소송 과정 속에서 소리바다는 또다시 패했다. 거대 자본을 거스를 수 없는 음반사들의 외면과 유난히 대기업에 '친절'한 정부의 판단이 여기에 더해졌다. 하지만 패소에 따른 결과는 의외의 방향으로 전개되었는데, 이 시점에 즈음하여 정부가 소리바다의 '프리 DRM'을 공식적으로 허용했고, 그 동안 소리바다의 DRM을 비난해왔던 음원 업체들이 일제히 프리 DRM을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차단과 배척, 그 이후 급작스런 추종 전략이 이번에도 적용된 셈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장악한 인터넷 음원 시장의 모습을 어땠을까? 우연인지 아닌지 오프라인 음반 시장의 하락세는 온라인 시장의 성장으로 메울 수 없었다. 통신사의 막대한 수익에 비해 턱없이 적은 대가만이 제작자들에게 돌아왔고, 이들이 쏟아낸 한숨들이 지속적으로 언론을 통해 나왔지만 지금까지도 큰 변화는 없다. 거대 연예기획사에서 아이돌 그룹을 양산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음반 시장이 재편된 건 필연일지도 모른다.

혁신과 창의력에 대한 관용 없이 '스마트'도 없다

아이폰에는 '탈옥'이라는 편법이 있다. 앱스토어에서 돈을 지불하고 구입해야 하는 프로그램들을 공짜로 마음껏 설치할 수 있는 일종의 해킹이다. 애플은 탈옥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를 제공해 탈옥을 막아오지만, 탈옥 툴을 개발한 이들이나 탈옥에 성공한 이용자들을 고소했다는 뉴스를 접한 적은 없다.

소비자는 일률적이지 않다. 한 재화와 서비스에 대해 얼마 정도의 지출을 감당할 수 있는 지도 각각 다르다. 그것이 경제학에서 말하는 수요 곡선의 정의다. 하지만 온라인 콘텐츠 시장에서 종종 기업들이 울타리를 두르고, 그 울타리를 넘어올 수 없는 이들에게 '불법'이나 '부도덕'이라는 딱지를 붙이곤 한다. 합리적인 가격 조정 과정을 거쳐 더 많은 소비자들을 끌어들이기보다는 경쟁을 피하고 현실의 독과점에 만족한다.

한국 음원서비스의 선구자였던 소리바다는 자신들이 생각했던 이상적인 인터넷 음악 서비스의 꿈을 펼쳐보기도 전에 음반 산업계, 음원 시장을 노리는 대기업에 휘말린 희생양이 됐다. 책 말미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초의 합법적인 P2P 음원 제공사가 된 소리바다의 '뚝심'을 소개하고 있지만, 이들의 자조가 던져주는 의미는 씁쓸하다. 무늬만 'IT 강국'인 한국에서 중소기업이 살아남기가 얼마나 힘들지를 보여주는 단초이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열풍 이후 정부가 IT 산업을 육성한다며 실효성이 의심되는 공허한 공약을 되풀이하는 광경을 본다. 정작 필요한 건 소리바다의 역사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혁신과 창의에 대한 관용이 없는 한 '스마트'를 외치는 구호는 공염불에 그칠 가능성이 높고, 소비자는 이들이 만든 장벽에 갇혀 불필요한 지출을 하게 될 거다. 소리바다의 비극이 있기 전, 그들이 열어젖혔던 '새로운 가능성'을 추억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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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배의 <정보 혁명과 권력 변환 : 네트워크 정치학의 시각>(한울 펴냄)은 그동안 저자가 오랫동안 고민하고 몰두하던 연구 주제를 한번 정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2000년대 초 저자가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연구자로서의 그를 기억할 수 있는 키워드는 '윈텔리즘(Wintelism)'이었다. 온라인 사회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마이크로소프트의 구성적인 권력을 '윈도우+인텔'이라는 윈텔리즘으로 정의했으니 현재의 변화하는 세상을 움직이는 권력에 대한 연구에 관심이 많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후, 그의 이러한 관심사는 '지식 국가', '소프트 파워(soft power, 연성 권력)'에 대한 소개로 이어졌으며, 이 책에 소개된 많은 글의 초고가 그 과정에서 조금씩 소개되어 왔다. 따라서 이 책은 지난 시간동안 그가 분절적으로 소개했던 개념과 이론을 아우르는, 김상배의 네트워크 사회 권력 연구의 '정리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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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보 혁명과 권력 변환 : 네트워크 정치학의 시각>(김상배 지음, 한울 펴냄). ⓒ한울
우선 이 책의 미덕은, 권력이라는 정치학의 오래된 고전적인 관심사를 최근의 정보 사회 분석에 효과적으로 적용해 잘 분석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권력=정치' 식의 무지막지한 등가관계의 분석이 아닌, '기술→정보 기술→표준 기술→권력→구조 형성'이라는 미시적 분석 경로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인터넷이나 정보통신(IT) 기기를 사용하면서 흔히 간과하기 쉬운 오퍼레이팅 시스템(OS, 윈도우 등), 브라우저(익스플로러 등), 검색 서비스에 대한 사례 분석을 포함하고 있어서 개념·사례·이론의 구성이 매우 꼼꼼히 이루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더구나 책의 곳곳에서 사회과학에서 가장 어려운 '개념 정의'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한 흔적이 보이기 때문에 흔히 우리가 접하는 문제에 대한 '열쇠'를 친절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 고민 없이 사용하는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보편(?)적인 서비스 안에 내재되어 있는 기술력이 단지 일개 기업의 기술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표준을 장악하여 권력으로 행사되는 것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러한 기술력 혹은 기술의 사용 정도를 정부의 힘으로 관리하려는 중국이나 쿠바와 같은 '규제 국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또 인터넷 커뮤니티, 온라인 사회운동, 온라인 재능 기부와 같은 자발적인 시민의 네트워크 효과가 나타나는 현실 온라인 공간의 모습은 어떤 가능성을 던지는가? 이런 문제들이 진지한 저자의 논술을 통해 중요한 화두로 제시되고 있다.

두 번째 미덕은 이 책의 구성이다. 이 책은 전체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1부가 개념, 2부가 권력 사례, 3부가 대항 권력 사례로 제시되어 있다. 그리고 각 부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해당 부분에서 소개한 내용에 대한 정치학 관점에서의 쟁점과 의미를 분석하고 있다.

따라서 차분히 책을 따라 읽게 되면, 기술이나 정보, 네트워크라는 개념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네트워크 사회에서의 권력의 실체에 대해 차근차근 계단을 올라가듯이 정말 재미있게 알 수 있다. 무릇, 사회과학의 과제가 사회의 주요 현상에 대한 개념·사례·이론을 체계적으로 소개하는 것이라면, 이 책은 그러한 사회과학의 본분에 매우 충실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미덕은 지배 권력뿐만 아니라 대항 권력의 의미를 살렸다는 것이다. 즉, 공급자 입장에서 표준을 결정하는 거대 권력만을 중요하게 부각시킨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일반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율과 협력의 문제 또한 중요한 가치라는 것도 비중 있게 주장하고 있다. 즉, 네트워크 정치 분야의 연구자들이 강조하는 '공급자만큼 중요한 수요자', '권력만큼 중요한 문화적 창의성', '지배만큼 중요한 동의와 협력'의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강조가 제시되어 있는 만큼 매우 민주적인 관점을 가진 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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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 정치 분야의 연구자로서 매번 느끼는 안타까움은 인터넷이 자판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정보 사회이기 때문에, 네트워크 사회로 발전하기 때문에 인터넷이나 스마트폰만 사용하면 사람이나 사회가 갑자기 나아지고 발전한다고 할 수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조차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에 대한 지루함이다. 아무리 좋은 도구라도 사람이 그 원리를 알고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세상에 널려있는 수많은 기술이나 정보와 넘쳐나는 서비스들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인가.

아는 만큼 이해하고 아는 만큼 사랑하게 된다는 당연한 원리를 차분히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언제까지 강조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 바로 그것이 네트워크 정치학에 성급한 결과물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사항이다. 이 책은 그러한 답답함의 상당 부분을 정말 시원하게 해소해주는 부분이 있다. 또 외국 사례의 무분별한 이입이 아닌 우리나라의 현실을 끌어안음으로써 진지하고 성실하게 네트워크 사회를 움직이는 힘에 대한 이해의 중요한 척도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로서 느낀 저자의 또 다른 과제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몇 가지 아쉬움을 제시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연구자인 나의 관점에서 보아도 책이 너무 어렵다. 동서양을 아우르는 개념 설명은 정말 정확하게 맞는 개념풀이인데, 좀 더 쉽게 쓸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아마도 이것은 학자와 일반인이 만나는 접점에서 항상 발생하는 현상일 수도 있는데, 철저한 설명의 완벽성을 좀 더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다소 이해하기 쉬운 일상적인 사례들도 좀 더 부드럽고 풍부하게 제시하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울러 저자의 풍부한 고민 덕에 새로운 용어들이 꽤나 많이 제시되어 있는데 이러한 신조어에 딱 맞아 떨어지는 사례가 풍부하게 제시되지 않고서는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머리에 쏙 들어오기 힘든 부분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둘째, 네트워크 사회의 주요 지배 권력과 대항 세력을 서술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사례에 대한 제시는 촛불 집회뿐이다. 즉, IT 강국으로서의 우리나라가 지배 권력과 대항 세력의 중요한 행위자나 의미 있는 구조를 만들지 못하는 것에 대한 비판도 한 번 생각해봄직 하다.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이 지배 전략을 짜는 동안, 리눅스와 위키피디아가 대안을 형성하는 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성찰, 바로 그것이다.

물론 일반론과 원론의 관점에서는 일단 저자가 제시하는 네트워크 사회의 구조에 대한 이해가 먼저 이루어지는 것이 필요하고 또한 맞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네트워크 사회에 대한 제도와 문화가 만들어내는 문제들 때문에 다양한 네트워크들이 서로 경합하는 이른바 '망제(網際·inter-network)' 구조에서 영영 멀어지고 있는 부분은 없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제시되었다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있다. 인터넷 혹은 네트워크의 문제 역시 '우리의 문제'가 되었을 때 더 와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부분은 우리나라에서 네트워크 사회를 연구하는 나를 포함한 다른 연구자들의 영원한 숙제이기도 하며 미룰 수 없는 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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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의 기능은 그 책을 모르는 사람에게 책의 가치를 최대한으로 깊이 있게 전달하는 것에 있다. 한편으로 섣부른 평가를 통해 선입견을 제공해서는 안 된다고도 생각한다. 어쩌면 책에 누를 끼치는 섣부른 스포일러가 될까봐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려고 하는데, 마무리하기 전에 꼭 정정해야 할 부분이 있다.

이 책은 저자의 네트워크 사회 권력 연구의 '최종 정리 버전'이 아니라 이후의 더 깊고 좋은 연구를 위한 '중간 정리 버전'이라는 것이다. 정치학의 핵심 명제는 권력뿐만 아니라 권력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이 책을 바탕으로 또 다른 주제의 깊이 있는 후속 연구가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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