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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채 1 ㅣ 현대문화센터 세계명작시리즈 34
생 텍쥐페리 지음, 배영란 옮김, 이림니키 그림 / 현대문화센터 / 2010년 9월
평점 :
옛날 번역본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움직이는책, 이상각 역)을 갖고 있다가 책이 변색되어 정리하면서 새로 출간된 책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해당 책은 들녘에서 <내 마음의 성채>로 재간되어 있었지만 현대문화센터 책이 삽화가 예뻐 이 책으로 다시 구입할까 하고 살펴봤다.
미리보기로 앞부분을 읽으니 말이 너무 이상한 게 이해가 안 갔다. 독자평에도 난해하다는 말이 빠지지 않고 있고. 그래서 갖고 있는 책의 앞부분을 읽어 봤는데 그보다는 훨씬 이해가 잘 갔다. 결국 책이 난해한 게 아니라 번역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한 번 비교해 본다.
[현대문화센터 판]
1장
나는 동정심이 길을 잃고 헤매는 걸 많이 봤다. 사람을 다스리는 우리는 마음을 헤아리는 법을 배웠다. 돌봐줄 만한 가치가 있는 대상만 배려하기 위해서다. 나는 죽어가는 사람이든 위독한 병자든 여자들의 마음에 고통을 안겨주는 노골적인 상처에 대해서는 동정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어렸을 때 걸인과 그들의 몸에 난 부스럼에 연민을 가졌던 때가 있었다. 나는 이들을 위해 치료사를 고용하고 치유 효능이 있는 허브를 사들였다. 대상들은 섬에서 금가루로 만들었다는 연고를 가져다주었다. 문드러진 피부를 회복시켜 주는 약이라면서.
저들이 자기 몸에서 나는 악취를 무슨 귀한 보석이라도 되는 듯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 나는 자신의 몸을 긁어대고 진물을 뿜어대는, 마치 땅에 퇴비를 주어 자색꽃 뿌리를 만들어내는 사람처럼 보이는 저들에게 놀라움을 안겨줬다. 저들은 자기가 동냥하여 얻은 것을 자랑하며 몸에서 나는 썩은 내를 서로 뽐내고 있었다. 가장 많이 동냥 얻은 자는 최고의 우상을 모시는 대사제와 자신을 동일시했다. 저들이 기꺼이 내 주치의를 만나겠다면, 그것은 냄새도 냄새이거니와 규모 또한 만만치 않은 부스럼으로써 그를 놀래주고 싶기 때문이다.
저들은 제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된 손과 발을 휘두르며 나름대로 세상에서 자리를 잡으려고 애를 썼다. 걸인들은 치료의 손길을 자신들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해석하고 정중히 치료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들의 더러움이 씻기자마자 걸인들은 스스로를 아무것도 내뿜지 못하는 쓸모없는 사람으로 여기더니, 다시 부스럼을 만들어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몸에서는 곧 부스럼이 생겨났다. 자랑스럽고 천박한 더러움에 다시 온몸을 내맡긴 걸인들은 쪽박을 차고 대상 행렬에 합류하더니만 그들이 모시는 추잡한 신의 뜻에 따라 행인의 돈을 갈취했다. (pp. 4-6)
[움직이는책 판 (이상각 역)]
1장 연민
나는 연민의 정이 인간의 정도를 그르치는 꼴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더군다나 지배자로서의 나는 동정을 받을 만한 대상에게만 어떤 관심을 베풀어야 하는 까닭에, 인간의 마음을 탐색하는 방법을 익혀야만 했다. 그렇지만 나는 대개의 여자들이 겪는 그런 가슴앓이에는 결코 연민의 정을 갖지 않는다. 빈사 지경에 빠졌거나 이미 죽은 사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나는 한때 부스럼투성이 거지들에게 관심을 기울인 적이 있었다. 젊음의 혈기로 나는 그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이들을 격려했고, 일부러 살갗을 재생시키는 향유와 약을 대상들에게서 구해주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동정이 무가치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고나서부터는 그 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거지들은 자신들의 몸을 인내심 없이 긁어대고는, 진흙이나 짐승의 똥으로 축여대곤 했다. 그들은 부자들이 사치에 매달리듯 자신들의 악취와 부스럼에 어떤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더러운 자신들의 상처를 내보이면서, 거지들은 동냥받은 돈을 서로에게 자랑하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적선받은 거지는 그들 세계에서 성당의 대사제와도 같은 존재로 군림하는 듯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그에 대한 연민으로 몸을 씻어주고 약을 발라줄 양이면, 스스로가 매우 중요한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나, 약의 효험이 나타나 부스럼이 없어지고 악취마저 희미해지기라도 할라치면 스스로 소외되어 애당초 자신의 가장 중요한 무기인 부스럼이 다시 돋아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았다. 그래서 그 험한 육체에 자줏빛 꽃이 찬란하게 피어나면, 마치 잃어버렸던 자신의 소중한 명예를 회복한 듯한 몸짓으로 거만하게 쪽박을 들고는, 너절한 신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구걸 행각에 나서는 것이었다. (pp. 13-14)
다시 말해 왕 입장에서 부스럼을 앓는 거지들에게 연민을 느껴 갖은 귀한 약들을 다 구해다 치료해줬더니 거지들이 그걸 고맙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부스럼을 동냥 받기 위한 밑천으로 여겨 다시 부스럼을 만들어내 구걸에 나서더라는 얘기다.
그런데 어디 정말 번역이 힘든 나라 말도 아니고 프랑스어 정도인데 이렇게 번역이 다를 수 있단 말인가.
원서대조를 해보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움직이는책 (이상각 역) 쪽이 훨씬 더 이해가 잘 갔다. 이쪽도 더 다듬었으면 하는 부분들도 있긴 하고 "이상각 엮음"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내용이 좀 축약된 것 같긴 하지만 내가 갖고 있는 건 1996년 판본이라 2005년 들녘에서 나온 개정판은 좀 더 수정돼 있을지도 모르겠다 (미리보기가 없어 비교 불가). 어쨌든 1996년본에 그해의 간행물 윤리위원회 청소년 권장도서 선정 도장도 박혀 있는 걸로 보아 적어도 "난해하다"는 평을 듣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밖에 범우사에서 나온 판본도 있는데 역시 미리보기가 없어 비교할 수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들녘이나 범우사의 판본은 표지가 예쁘지 못하다는 것이다. 소장하기 좋게 책이 예쁘게 나온 건 현대문화센터 쪽인데 번역이 이렇게 엉터리면 정말 자원낭비라는 생각이 든다. 이해하기 힘든 게 이미 기존에 나와 있는 번역본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시간이 갈수록 우리말 번역이 점점 더 나아지는 게 아니라 어떻게 이렇게 후퇴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들녘이나 범우사에서 책을 좀 더 예쁘게 내주든가 현대문화센터에서 역자를 바꿔서 (이 상태로는 고친다고 고쳐 질 것 같지 않다) 다시 내주든가 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