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학기 밀리언셀러 클럽 63
기리노 나쓰오 지음, 김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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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제 17회 <시바타 렌자부로 상> 수상작이기도 한 <잔학기>는 어린이 납치사건을 주 소재로 하고 있으며, 실제로 벌어진 사건인 '니가타 소녀 납치 감금 사건'과 여러모로 유사하여 대단한 화제를 불러일으킨 작품이라고 한다. 참고로 니가타 소녀 납치 감금 사건은 30대 남성이 10대 어린이를 납치하여 9년간 감금한 섬뜩한 사건이며, <잔학기>에서는 납치된 소녀이자 이 소설의 주인공인 게이코는 1년동안 공장에서 일하는 납치범인 겐지와 함께 생활하게 된다. 언제나 최신의 사회 병리와 인간의 욕망을 해부하는 작가는 납치라는 소재를 통하여 한 소녀를 둘러싼 복잡다단한 사회의 모습과 비뚤어진 인간의 이상심리와 그 속에 숨겨진 인간의 처절하면서도 끔찍한 과거 또한 예리하게 분석해낸다. 납치된 소녀인 '게이코'의 공포스러우면서도 호기심을 느끼는 이중, 삼중의 심리가 전지적 시점과 주인공 시점이 어우러져 묘사되고, 게이코를 납치한 '교활하고, 영리한' 정신이상자인 겐지와의 동거 생활이 시작된다. 다양한 범죄 사건들, 특히 납치 사건들이 끊이지 않는 우리 사회에서도 한번쯤 필히 생각해보아야할 문제에 대하여 이 책은 수많은 화두를 던져 주고 있다.

이 작품 또한 본격적인 추리소설이라고 볼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작가는 결말에 몇 가지 함정을 파두었고, 주인공이 보낸 소설이자 수기의 형식인 이 작품은 본격 추리소설 이상의 다채로운 암시와 사회 병리를 고발하고 풍자하는 작가의 숙련된 솜씨와 사려가 돋보이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먼저 납치되기 직전 아버지와 어머니의 불화로 상징되는 가정의 균열과 가난, 따돌림 등에 진절머리를 느낀 주인공은 일상을 탈피하여 공장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마중나가려 한다. 이 지루한 일상을 잠시나마 벗어나고자 하는 주인공은 그 후 1년여간 일상에서 완전히 벗어나, 기묘하면서도 끔찍한 생활을 납치범과 함께 하게 되지만, 납치되기전의 도입 부분에서 조차 섬세한 복선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또한 주목해서 보아야 할 점은 납치범인 겐지의 이상심리다. 공장에서 갖은 욕과 폭행등을 당해가며 공장에서 일하는 납치범인 겐지, 그는 파탄한 가정에서 고아원 등을 전전하며 초등학교를 중퇴한 비정상적인 현대 사회의 병리와 이상심리를 암시하는 인물일지도 모른다. 그는 아침과 낮에는 어른으로서 게이코를 어르고, 위협하고, 성적으로 농락한다. 그러나 공장에서 일을 마치고 온 후에는 초등학생의 정신상태로 머리가 바뀌어 게이코의 다정한 친구가 되어준다. 놀라운 것은 납치당한 게이코도 그와의 생활을 어느정도 즐기고 그 생활에도 어느정도 익숙해져 간다는 것이다. '스톡홀름 증후군'도 아닌 두 사람의 기묘한 동거는 실은 고독과 고립이라는 현대인들의 일상사를 슬며시 비추어 주는 것만 같다. 여주인공인 게이코의 생활환경도 그리 유복한 것이라고도 할 수 없는 약간은 불행한 가정이라 할 수 있으며, 남주인공인 겐지의 환경은 충격과 공포, 비탄과 고독 그 자체이다. 그 두 사람이 만나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생활을 하였는가. 소설은 그야말로 흥미진진하다. 마치 독자는 두 사람의 행동을 지켜보는 관음증 환자가 된 듯한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 작품에서는 겐지와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또 다른 인물이 인간의 관음증 심리와 침묵과 구경꾼의 심리를 암시하는 역할을 맡는다.

겐지에게 납치된지 1년여가 지나 게이코는 마침내 겐지로부터 해방된다. 그러나 그 후 게이코의 평범한 생활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주민들이나 친구들의 달라진 시선, 어머니와 아버지의 불륜으로 인한 이혼, 끝없이 찾아오는 기자들과 경찰, 정신과 의사와 검사에 이르기까지, 사회는 상처받은 게이코의 마음을 보듬어주지 않고 상처를 칼로 도려내고 까발리는 데 힘쓰는 것 처럼 보인다. 즉 지금의 사회는 한 개인의 마음을 보기보다는 한 개인을 한 개인이 당한 기묘한 일을 통한 호기심과 궁금중의 충족대상으로써 밖에 보아주지 않는다. 게이코와 계속해서 대화를 시도하려는 검사와, 훗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소설을 써서 이름을 날리는 게이코.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되고, 그녀의 남편은 그녀가 남긴 마지막 원고인 <잔학기>를 통하여 25년 전 범죄의 충격적 진실을 알게 된다. 결말 부분에서는 게이코의 진실한 마음을 통한 사소한 반전들이 이루어지게 된다. 물론 한 인간의 마음이 이렇다는 점에서는 독자로서는 상당한 충격을 받을 지도 모르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 모두의 반성과 성찰을 촉구하는 작가의 섬세하고 예리한 의식이 살아숨쉬는 사소한 반전이자, 작가의 인간에 대한 성찰이라 할 수 있겠다. 결론적으로 이 작품은 우리가 생각해왔던 추리소설이나 범죄소설과는 그 차이가 확연히 느껴지는 문제작이며, 우리 사회의 병리와 인간의 심리를 차갑고 예리하고 분석해내는 걸출한 심리소설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기리노 나쓰오가 그려내는 현실은 언제나 충격적이고 얼얼한 '맛'을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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