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서 77
마이클 콜린스 외 지음, 서미석 옮김 / 그림씨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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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욕구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서라도 있는 욕구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구가 아닐까. 우리는 끊임없이 역사 속에서 질문을 던져왔고 기록을 해왔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생각을 뒤집어 놓았다.


텍스트가 무수하게 생겨나고 있는 시대이다. 만 텍스트화 시대 속에서 각각의 인간들은 모두 책인 셈이다. 그 공간에서 자신만의 생각을 가진 하나의 책으로서, 자신의 기록을 세계 속에 써내려간다. 


이 책은 그런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당대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뒤집어 놓았던 역사적인 책들을 선별해 설명해 놓았다. 흥미롭게 읽히긴 하지만 이미 지금 우리의 머릿속에 당연하게 여겨지는 일들이기때문에 생각보다 위대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저 역사적이고 위대한 가치를 칭송하기 위한 기념비적인 서적이라고 일컬을 수 있을 것 같다.

책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헤어지지 않을 친구를 사귀는 것과 같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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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의 시대 - 일, 사람, 언어의 기록
김민섭 지음 / 와이즈베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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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사회의 효율을 위해 도입되었던 푸코의 권력 계보학은 우리 사회의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권력을 쥔 소수가 다수의 인원을 손쉽게 통치하기 위해 구축된 체제는 감옥과 군대에서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까지 작용되어진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배우고 주입되었던 가치와 사상들은 어느덧 당연한 교육 속에서 상식으로 머릿속에 자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국가의 미래를 책임지게 될 학교라는 공간에서마저도 판옵티콘의 권력이 작용되었다. 전근대적인 교육들은 전통이라는 미명 하에 순종적인 국민들을 양성해내기에 이르렀고, 우리나라도 특정 시대에 맞물려 국가적인 주도 하에 근면성실을 강조 받는 노동자 혹은 일꾼이 되어졌다. 그 제도를 바탕으로 자라난 세대는 세월이 흘러 민주사회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우리 사회의 전통을 지키기 위한 수호자로서 근대적 전통을 고수한다

 

민주사회의 내면에 침잠해있는 답습된 체제,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려는 타율적 권력, 그리고 시대가 기록해낸 욕망의 언어들을 저자는 이라고 일컫는다. 그 속에 깃든 전체주의적 폭력성은 우리를 통치 가능한 인간으로 만들어 놓는다. 당연한 것에 균열을 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저자는 그 시대상의 폐단에 대하여 차분하게 제안을 가한다. 그리고 <김민섭씨 찾기 프로젝트>처럼 작은 친절이 소중한 가치를 만들어 내듯이 자기만의 올바른 을 지켜나가려고 노력한다. 우리들 또한 각자만이 지키고 있는 이 존재할 것이다. 욕망에 이끌리기보다는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을 위해 각자의 을 형성해나가는 것이 어떨까.

 

북미회담의 결과가 비틀리고 국가의 정세는 더욱 불안한 기운을 띠고 있다. 그 흔들림 앞에 사람들은 지난날의 철인통치적인 체제를 요구하는 듯 보인다. 국가의 미래는 교육의 방향에 달려 있다. 개혁이 혼란만을 가중시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답습된 체제의 변화를 어떻게 타협하고 개선해나갈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그럼과 동시에 개인으로서도 물음표를 확장시키는 활동을 이어나가야한다. 국가는 끊임없이 갈등하고 있다. 갈등은 해결을 향한 몸부림이라고 믿고 우리들은 새로운 시대의 언어들을 배울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고백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었다.
...
몇 년의 기간 동안 내가 내린 결론은, 자신을 고백한 개인은 자연스럽게 그에 따른 선언에 이르고, 물음표를 확장시켜 나간 극히 일부는 필연적으로 ‘제안‘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한 개인은 고백의 힘을 그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사용할 수 있다. - P009

학교의 여성들이 여고라는 이름을 지운 것만으로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슬픈 일이다. 공부하는 여성이 아닌 공부하는 몸으로 그들을 규정해야 한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모든 것들에, 이제는 정말로 작별을 고할 때가 되었다. - P077

팔순이 넘은 초기 졸업생들은 착한 딸로서, 어진 어머니로서, 참된 일꾼으로서 자신의 삶과 삶의 태도를 형성해 왔을 것이다. 모교의 이전 소식에 찾아와 교정을 거닐며 눈물 지을 만큼, 그들은 공간과 자신을, 특히 그 공간의 언어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었다. 그 언어에 익숙해진 몸은, 그것을 쉽게 ‘전통‘이라고 부르게 된다. 외부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우선 무엇이든 비판적으로 사유할 수 있지만, 내부자가 되고 나면, 그 언어를 부정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 되기에, 개인은 그 수호자가 되기 쉽다. 그 훈을 만든 사람은 이미 그 공간에 없지만 그것을 지켜내기 위한 역할을 자임하는 것이다.

개인은 계속해서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간에 물음표를 보내지 않으면 누구나 보수화될 수밖에 없다. 나를 비롯해 모두가 그런 나약한 몸을 가지고 살아간다. - P090

내 아버지가 나에게 "이 세상 모든 책이 있는 곳"이라는 잊혀지지 않을 감각을 전해 준 것처럼, 나도 아이가 열 살이 되면 함께 교보문고에 가서 "이 세상 모든 책이 있는 곳이야."하고 말해 주고 싶다. 그러면 그 훈이 아이의 몸에 새겨지고, 그때부터 그는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서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 P146

그에 더해, 스스로를 특별한 개인이라고 믿는 데서 많은 비극이 시작되곤 한다. 우리 모두는 서로 닮아 있는 존재들이다. 내가 특별하다면 너 역시 특별하고 우리 역시 특별하다는 사실을 모두 인식해야 한다. 타인을 존중하고 그의 격을 자신의 자리까지 끌어올리는 데서 진정한 주인으로 설 수 있게 된다. 손님을 존중할 수 잇는 여유도 그 공간의 주인에게만 허락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특별하다고 믿는 개인일수록 부단히 타인을 초대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공간의 주인이 되는 일은 별로 어렵지 않다. - P190

모든 공간에는 그 공간만의 문법이 존재한다. 개인은 살아남기 위해 거기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 작업이 완료되고 나면 그에게 타인의 문법은 잘 들어오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생활양식이나 문화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어느 공간의 구성원들이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여길 때, 그 공간의 문법은 더욱 힘을 가지게 된다. - P194

그 주인이 공을 들여 만들어둔 서가가 있다면 일부러 "여기 좀 봐도 될까요?" 하고 가서 한참을 보기도 하고, 책상에 어지럽게 책이 흩어져 있다고 하면 어떤 책들이 있는지를 잠시 살핀다. 그러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 수 있다. 전시된 책들은 그가 품고 있는 욕망을 그대로 내보이기 때문이다. - P225

전화를 받고 있는 여행사 직원도 나를 닮은 을이고 그들에게 분노한다고 해서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 몇만 원을 더 돌려받는다고 해도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고 내가 약간의 구제를 받는 것일 뿐, 이 사회의 문화와 제도가 근본적으로 변화하지는 않는다. - P234

자신의 학교에는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많아서 다른 부분의 여비 때문에 여행을 쉽게 가지 못할 것이라고 덧붙였는데,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이라고 하는 그의 정중함과 다정함이 놀라웠다. 우리는 타인에게 무언가를 주려고 할 때 쉽게 거만해진다. 미리부터 생색을 내고 대가를 바라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김민섭 씨에게서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을 이미 발견하고 그들의 처지에서 사유하고 있었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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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페미니즘은 틀렸다 - 혐오에서 연대로
오세라비 지음 / 좁쌀한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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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인가 아닌가 생각하기 이전에 사람이라면 누구든 기분 나쁜 말을 들으면 불쾌해지고, 상처를 입기 마련이다. 혐오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가 혹은 그것을 하나의 현상으로 치부하는가. 이 지점에서 현대 페미니즘의 시선은 서로 엇갈린다. 


하지만 그 현상을 옹호하는 학자들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담은 이 책 또한 그 견해에 대한 비판밖에 되지 않는다. 이 말은 '분열'을 나타낸다. 어떠한 현상에 대해 과연 '틀렸다'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비판할 부분은 비판하고, 이해하고 진일보할 부분에 대해서는 양보하고 협력을 논해야 한다. 휴머니즘을 논한다고 하는 저자마저 현대 페미니즘 광풍에 대해서 오로지 비판만을 하고 있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로부터 혐오의 대상이 되고 조롱 당하는 불쌍한 남성들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하지만 그 보호막은 남성 중심 문화에서 주로 옹호되고 있는 일방적인 모습이었다. 저자의 주장이 틀렸다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진정 휴머니즘을 위한다면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현상을 이해하고 합치된 주장으로 나아가는 것이 더 생산적이지 않았을까. 그 점을 독자들의 몫이라고 남겨놓았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이 책을 읽는 독자들 또한, 그리고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 또한 반대의 의견을 수용하고 비판할 지점을 비판하되 성에 따른 갈등구도 양분을 그만두고 저자가 말하는 협력으로 나아가야 한다. 


'메갈리아'의 역할은 그저 그대로 우리 사회의 '일베'처럼 존재하고 혐오가 이어진다고 받아들인다면, 이제 그 다음 문제는 그것들로 인해 불편한 우리의 감정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현상이 좋지 않다고 해서 비판하는 것은, 현상의 발생을 생각하고 근본점이 무엇인지 짚어내는 사고의 과정과 동반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것을 생각해보자면 결국 원인점은 하나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동일 임금, 동일 노동, 유리 천장, 여성 배려 등 사회적 평등에 관한 이야기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사회적으로, 점진적으로 해결해 나아가야 할 방향이고 그 이전에는 여성의 인권으로 이어지는 불안한 삶에 관해 다가가야 한다. 인간의 존엄만이 가장 우선적으로 평등에 대하여 논의될 사항이다. 존엄적 측면에서 봤을 때, 과연 여성은 차별 없이 평등한가에 대해 묻고 싶다. 이에 대한 나 개인의 의견은 '평등하지 않다'라고 확신할 수 있다.


여성의 생물학적 특성이 '미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한다해도 그것은 여성 개인의 주체성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지 미를 관망하는 남성의 욕구에 의해 객체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남성에게도 미에 대한 욕망이 있다.) 사회에 아무리 가부장제 관습이 사라졌다 하더라도 여성을 오로지 성적 대상으로 치부하고 논하게 되는 썩은 문화에서는 여성은 결코 안심하거나 평등한 위치에서 존재할 수 없다. 여기서 항상 '여자들도 남자들 외모 평가하고 희롱하지 않는가' 라며 반문한다. 하지만 여성은 남성을 성적 대상화하며 희롱적인 발언을 일삼는다기보다 인간으로 존엄해주며 아껴주고 귀여워해주는 것이 대부분이다. 성욕은 성별을 막론하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있다. 남성이 더 성욕이 강한 생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또 다른 존엄을 가진 인간을 오로지 성의 욕망을 해소할 도구로만 치부해버리는 왜곡된 문화로 정당화 시킬 수 있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잘못된 욕망의 발현이다. 그리고 또한 이런 일부 인원들 때문에 남성 전체가 일반화로 매도 되어 비난 받고 있다면, 비난하는 자들에게 비난을 돌려주기보다 이런 인원들을 꼬집고 바로잡는 것이 더 상식적일 것이다.


사회의 문화가 너무나 잘못 형성되어 있었고 우리는 그것들을 비판적 사고 없이 본능이 끌리는 대로 만들어오고 묵인해왔다. 성이란 가치를 계속 감추어 들려했던 유교 문화의 폐단이다. 이렇게 혼란스러워진 성의 불균형 속에서 성의 가치에 대해 맘 편히 드러내는 것 또한 더더욱 어려워졌다. 지금을 살아오고 있는 우리가 지속되어지는 잘못된 남성 문화를 깨뜨리지 않는 한, 성의 개방화는 더욱 늦어질 것이고, 성 갈등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잘못된 인식은 명쾌하다. 성 경험을 남성성으로 여기고 칭송하는 문화, 남성성과 여성성을 주입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비난하는 성 고정관념, 남성들의 왜곡된 성인식, 성적대상화 등 하나같이 한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 형태로 존재한다. 할 말이 있고 하면 안되는 말은 이성적으로 판단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런 남성이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도구화하는 소위 '강간 문화'에 너무나 친숙해진 나머지, 그것이 나와는 다른 생물학적 특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불안을 안겨주고 존엄에 해를 가하는 인식을 만든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로 그들만의 네트워크를 구축시키게 만들어 놓았다. 


근 며칠간 그런 잘못된 남성 문화가 사회로 까발려졌다. 그것을 통해 일부 남성들은 뭐가 문제인지 스스로 인식할 수 있는 단계까지 이르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태까지 벌어졌는데 그 속에서 성찰하지 않는 사람은 반성적 사고가 결여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혐오에 혐오로 대항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리고 혐오에 혐오를 혐오로 대항하는 것 또한 옳지 않다. 이제 우리는 문제 의식을 확고히 하고 잘못된 가치에 대해 저항하는 형태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그것이 진정 모두가 원하는 페미니즘이자 휴머니즘이 되지 않을까.

그런데 언어 습관은 행동양식을 나타내고 사고를 지배하게 된다. ‘말‘은 정신 상태를 나타내기 때문에 중요하다. 이런 양태는 하나의 문화를 형성한다. 문화가 한번 몸에 배면 벗어나기가 상당히 어려워진다. 변질된 페미니즘 문화와 워마드식 ‘말‘을 받아들인 청소년들을 우려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 P36

사회적으로 전개되는 문제에 유일한 해결책이란 없다. 사회는 그만큼 다원적이며 복잡하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라 할지라도 사회 전체를 조망하는 관점으로 사안을 풀어나가야 한다. - P62

성 간의 고정관념이나 성차별, 성불평등, 성별 편견은 우리가 지속해서 진전시켜나갈 과제다. 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이 평등해지도록 하는 사회운동이다. 여성과 남성의 지위를 동일하게 하는 정치적 실천운동이다. - P97

페미니즘의 은밀한 진실 한 가지는 ‘여성들의 권리 향상을 위해 투쟁해왔던 페미니즘이 오히려 성차별을 야기했다‘는 것이다. 이것 한 가지만큼은 분명하다. 급진적 페미니즘이 기승을 부리면 부릴수록 우리의 삶은 각박해지고 시시해진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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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미러링 - 혐오의 시대와 메갈리아 신드롬 바로보기
박가분 지음 / 바다출판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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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두 형태가 공격하는 논향점이 서로 어긋나 있는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인터넷의 모습은 이도저도 아닌 무언가, 그냥 하나의 현상으로만 존재하는 느낌이다. 그것에 더해 쌓여가는 학문들의 영역은 그 현상에 집중한다기보다는 하나의 메세지로 치부하고 시위나 실질적인 문화 비평에 포커스가 맞춰지는 반면, 그 집단에 반향적인 집단 혹은 학문들의 영역은 그 현상에 대해서만 유독 집중적인 비판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보면 서로 초점이 다른 대화 혹은 투쟁이 아닌가처럼 느껴진다. 그 두 집단의 미묘한 삐걱임 사이에 급진 성향의 인터넷 단체는 그저 존재하는 것일 뿐. 자신들의 정당화된 사연들과 함께. 그것은 무엇을 보느냐에 관해 비판 받을 수도 지지 받을 수도 있겠지만 정작 그 안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스스로가 느끼고 있지 않을까. 이 책은 충분히 정당하고 논리적으로 그 모순들을 짚어냈다. 어떻게 보면 반대 진영에서 가장 현실적인 처방을 내린 게 아닌가 싶다.


그저 존재론적으로 봤을 때 극우 성향 집합소처럼 그런 성향의 개인들이 모여 존재하는 것이고 사회의 의의적으로 보았을 땐 연구 가치가 서로 다른 상태인 것. 완벽한 주관이지만 또 다른 해석 속에는 정치적 프로파간다가 분열을 더욱 악화시키기 위해 집단을 진두지휘한다던지... 공상이라 믿고 싶다. 사실 상당히 모호하기에 뭐라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결론은 대충 간단하지 않을까. 그 문화를 차치하고서라도 그게 어떤 식으로 쌓아올려진 학문일지 모르겠지만 그 학문은 실질적인 주장을 하며 문화의 병폐를 지적한다. 그렇다면 악순환을 끊어내는 방법은 이론 상 간단해진다. 한 명이라도 더 잘못된 남성 문화, 일반화, 성고정관념의 굴레를 부수는 것이 해결 방안이 되지 않을까.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을 어느덧 알아가지만 그것의 고통을 외면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재미만을 위해서 저 문화를 포장하고 받침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그 사이에 놓인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비판적 견해들을 수용하면서 정립을 해나가야한다. 더 이상 순간의 쾌락으로 두고 볼 수는 없는 일. 분명한 지향점을 놓고 성숙한 토론을 진행하다보면 어느덧 그들은 자신만의 영역에 고립되게 되지 않을까. 낙관적인 미래를 그리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지젝의 사상을 공부해야겠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불확실한 주관을 서술한 것이기에 일부러 모호하게 글을 적었다.



이처럼 공익으로 포장된 마녀사냥이 더 심각한 문제인 이유는 그것이 대외적으로는 차별 반대, 혐오 반대를 내세우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차별과 혐오를 재생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 P93

이러한 문화적 성비 불균형까지 고려하면 결혼 연애 시장에서 성비 문제는 더욱 악화된다. 천관율 기자는 이들 ‘잉여 남성‘ 인구가 여성혐오의 진앙지라고 지목하고 있다. 일단 이들 "여성혐오 집단에서 사례가 수집되면 축적되고, 공유되고, 증폭되며, 결국 일반화된 혐오 서사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혐오는 자기 강화의 경로에 올라탄다. - P172

이처럼 우리는 언제부턴가 타인이나 낯선 상황과의 원치 않는 조우 자체를 개인을 무력화하고 질식시키는 심각한 폭력으로 체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제든 거기에 대해 분노를 표출할 준비가 되어 있다. 외국인 이민자에 대한 점증하는 혐오 정서와 SNS의 여성주의 담론도 이와 원리적으로 다르지 않다. - P201

그러한 정치적 관계 외에, 서로가 원치 않거나 예기치 못한 관계와 상황에 휘말리는 것에서 ‘완충 지대‘ 역할을 해온 것은 본래 ‘계약‘이 아니라 ‘문화‘였다. 예컨대 남녀 관계에서의 사교술과 에티켓, 문학 등의 예술 그리고 종교가 대표적이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외상적인 폭력을 승화시키는 방편이자 완충재였고, 프로이트가 ‘문명‘이라고 불렀던 것이기도 하다. 지금은 그러한 문화가 파산을 맞았고, 일상의 관게에서 그 빈약한 대체물에 불과한 인권 담론이 인터넷 상에 범람하고 있다. - P203

다시 단톡방 성폭력 사건으로 돌아가면, 단톡방에서 성희롱의 대상이 되었던 피해자의 구제를 넘어서서 이것을 인권의식의 개선이나 계몽주의적 캠페인으로 끌고 가려는 시도는 항상 실패한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오히려 인권 교육 끝에 타인의 인권은 소중하기 때문에 절대로 그와 같은 대화를 유출하지 말아야겠다는 냉소적인 결론으로 이어진다면 어찌할 것인가? ... 이처럼 또래문화의 결핍을 인권 담론으로 채울 수는 없다. 그보다 더 시급한 것은 남자 아이들이 섹드립이나 게임 이야기 외에도 또래집단과 놀고 향유할 수 있는 문화적 교류의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다. - P206

공감이라는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을 ‘절대화‘할수록 그 잣대에 들어맞지 않는 사람이라면 심지어 유가족이라고 해도 원색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 이러한 ‘공감의 정치적 도구화‘에서 비롯된 또 다른 문제는 이것이 다른 사건사고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방식의 ‘공감의 도구화‘현상을 연쇄적으로 낳는다는 점이다. ... 피해자에 대한 공감이 인터넷 판 성정치의 날 선 흉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이러한 조롱 조의 태도는 상호간의 부정적인 피드백의 악순환을 통해 자기 강화의 길로 진입한다. 이를 통해 다수의 성인 남녀가 아동기의 도덕으로 퇴행해버리는 것이다. - P227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피해자에 대한 공감이 아니라, (이제 더 이상 발언할 수 없는) 피해자에게 제멋대로 투사한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일 뿐이다. 공감의 절대화가 역으로 타자에 대한 공감의 마비로 이어지는 슬픈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P229

인간이 개, 돼지 처럼 행동하도록 만드는 환경을 내버려두면서 인권 규범 혹은 ‘차이‘와 ‘정체성‘ 그리고 ‘욕망‘의 권리를 내세우는 담론들은 기본적으로 위선에 불과하다. 사실 인터넷 혐오 발언 신드롬은 ‘인간성‘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차이‘ ‘정체성‘ ‘욕망‘을 무한정 긍정하는 포스트모던 철학이 낳은 괴물이기도 하다. 여기서 인간성을 철학적으로 되묻는다는 것은, 다시 말해 인간성을 확보할 수 있는 조건을 되묻는 것이지, 그것을 부정하는 형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 -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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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페미니스트 - 불편하고 두려워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 사이행성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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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기울어진 사회에 분노하지 않는 사람들의 태도에 권력의 입장에 암묵적인 동의를 표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충분히 이해가 가능한 말이다. 분노 없이 온건한 투쟁은 관성에 젖은, 그리고 현실에 만족하는 이들에겐 결코 가닿지 않는다. 어느 하나가 아프고 찔려봐야 그 전보다 더욱 실감하게 되고 공감하게 된다는 것을 인간이라면 모두 잘 알고 있다. 그런 공간에서 페미니스트들이 그리는 이상적인 모습은 무척이나 완전한 모습이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계속 검열을 요구하며 불편투성이인 사회를 쉴틈없이 뒤집어 엎는다. 그 과정에서 일부는 두려운 마음도 클 것이다. 진정한 평화를 위해 일시적인 평화를 부수고 투쟁한다. 그런 현상이 마음 아프게 다가온다. 개인적으로도 급진적인 투쟁은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필요함을 느낀다. 그 시대에서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는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자신이 정말로 싸우지 않기를 원한다면 표면적인 '싸우지 마세요' 만을 읊조리는 것이 아니라 폭력적인 문화를 바로 잡아나가는데 힘써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완벽하지 않음을, 문화의 관성에 어쩔 수 없이 휩쓸리고 자신이 원하는 욕망에 솔직한 텍스트들은 그녀가 얼마나 인간적인지를 보여준다. 록산 게이의 에세이는 불완전한 자신의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두드려댄다. 완벽할 수 없음을 인정하기에 그녀의 외침은 더욱 인간적이고 친숙하게 느껴진다. 이렇듯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다. 그러니 두려움에 떨기보다는 그녀처럼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목소리를 내보자.

나를 따라다닐 나쁜 페미니스트라는 꼬리표를 환영한다. 왜냐하면 나는 인간이니까. 그래서 엉망진창이니까. 누군가의 본보기가 되려고 애써 노력하지 않는다. 완벽하려 하지 않는다. 내가 모든 해답을 갖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전부 옳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저 내가 믿고 있는 것을 지지하고, 이 세상에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내 글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면서도 온전히 나 자신만으로 남고 싶을 뿐이다. - P14

그의 사생활에도 불구하고 그의 탁월함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니 그렇다고 나에게 말해 왔으나, 그 여인이 받은 상처를 상상했고 그 상처에 대해서는 우리가 거의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떠올렸다. 어쩌면 그것이 가장 슬픈 일일지도 모른다. - P47

모든 종류의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에서 여성을 다루고 있지만 그중에서 우리가 정말 알 것 같은 여성이 나오는 건 몇 편이나 있는가? - P124

하지만 운동선수, 감독, 범죄, 침묵과 관련해서 아직도 분노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이 새긴다. 그런데 우리 문화에서는 운동선수들을 신처럼 떠받들고 있으며 그들이 설령 죄를 짓는다 해도 우리가 숭배한 대가이니 넘어가야 한다. 아멘. - P146

우리는 억압이나 처벌의 공포 없이 자신을 표현할 자유가 있다. 하지만 결과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표현할 자유는 없다. - P167

체면의 정치란 흑인이 (혹은 소수 인종이) ‘문화적으로 용인된‘ 방식만으로 행동하고 주류 사회 문화를 모방하기만 한다면 인종 편견에 시달리는 일이 적어질 것이라는 개념이다. 그러나 체면의 정치는 제도상의 인종 차별주의, 즉 현재의 교육 제도, 복지 제도, 사법 제도가 흑인 사회의 문제를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 P243

우리는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비크란 사람에 대해서 알아야 할 건 알고 있다. 그러나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삶에서 무엇을 원하고 있었을까. 어떻게 사랑하고 사랑 받았을까. 누가 그들을 어떻게 애도했을까. 죽기 바로 전 어떤 생각을 했을까. 우리는 그저 하루에 한 사람에 의해 77명의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만 알고 있다. 살인자는 살아 있다. 이런 현실은 잔인할 뿐이다. - P257

자신의 젠더를 잘못 수행하면 직간접적으로 그에 따른 대가를 받게 되고 사회가 입력한 대로 젠더를 잘 수행했을 때는 옳은 일을 했다는 확신을 얻게 된다. 마치 젠더 정체성의 본질이라는 것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 주디스 버틀러 - P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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