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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의 시대 - 일, 사람, 언어의 기록
김민섭 지음 / 와이즈베리 / 2018년 12월
평점 :
근대사회의 효율을 위해 도입되었던 푸코의 권력 계보학은 우리 사회의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권력을 쥔 소수가 다수의 인원을 손쉽게 통치하기 위해 구축된 체제는 감옥과 군대에서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까지 작용되어진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배우고 주입되었던 가치와 사상들은 어느덧 당연한 교육 속에서 상식으로 머릿속에 자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국가의 미래를 책임지게 될 학교라는 공간에서마저도 판옵티콘의 권력이 작용되었다. 전근대적인 교육들은 전통이라는 미명 하에 순종적인 국민들을 양성해내기에 이르렀고, 우리나라도 특정 시대에 맞물려 국가적인 주도 하에 ‘근면’과 ‘성실’을 강조 받는 노동자 혹은 일꾼이 되어졌다. 그 제도를 바탕으로 자라난 세대는 세월이 흘러 민주사회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우리 사회의 전통을 지키기 위한 수호자로서 근대적 ‘전통’을 고수한다.
민주사회의 내면에 침잠해있는 답습된 체제,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려는 타율적 권력, 그리고 시대가 기록해낸 욕망의 언어들을 저자는 ‘훈’이라고 일컫는다. 그 속에 깃든 전체주의적 폭력성은 우리를 통치 가능한 인간으로 만들어 놓는다. 당연한 것에 균열을 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저자는 그 시대상의 폐단에 대하여 차분하게 제안을 가한다. 그리고 <김민섭씨 찾기 프로젝트>처럼 작은 친절이 소중한 가치를 만들어 내듯이 자기만의 올바른 ‘훈’을 지켜나가려고 노력한다. 우리들 또한 각자만이 지키고 있는 ‘훈’이 존재할 것이다. 욕망에 이끌리기보다는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을 위해 각자의 ‘훈’을 형성해나가는 것이 어떨까.
북미회담의 결과가 비틀리고 국가의 정세는 더욱 불안한 기운을 띠고 있다. 그 흔들림 앞에 사람들은 지난날의 철인통치적인 체제를 요구하는 듯 보인다. 국가의 미래는 교육의 방향에 달려 있다. 개혁이 혼란만을 가중시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답습된 체제의 변화를 어떻게 타협하고 개선해나갈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그럼과 동시에 개인으로서도 물음표를 확장시키는 활동을 이어나가야한다. 국가는 끊임없이 갈등하고 있다. 갈등은 해결을 향한 몸부림이라고 믿고 우리들은 새로운 시대의 언어들을 배울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고백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었다. ... 몇 년의 기간 동안 내가 내린 결론은, 자신을 고백한 개인은 자연스럽게 그에 따른 선언에 이르고, 물음표를 확장시켜 나간 극히 일부는 필연적으로 ‘제안‘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한 개인은 고백의 힘을 그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사용할 수 있다. - P009
학교의 여성들이 여고라는 이름을 지운 것만으로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슬픈 일이다. 공부하는 여성이 아닌 공부하는 몸으로 그들을 규정해야 한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모든 것들에, 이제는 정말로 작별을 고할 때가 되었다. - P077
팔순이 넘은 초기 졸업생들은 착한 딸로서, 어진 어머니로서, 참된 일꾼으로서 자신의 삶과 삶의 태도를 형성해 왔을 것이다. 모교의 이전 소식에 찾아와 교정을 거닐며 눈물 지을 만큼, 그들은 공간과 자신을, 특히 그 공간의 언어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었다. 그 언어에 익숙해진 몸은, 그것을 쉽게 ‘전통‘이라고 부르게 된다. 외부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우선 무엇이든 비판적으로 사유할 수 있지만, 내부자가 되고 나면, 그 언어를 부정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 되기에, 개인은 그 수호자가 되기 쉽다. 그 훈을 만든 사람은 이미 그 공간에 없지만 그것을 지켜내기 위한 역할을 자임하는 것이다.
개인은 계속해서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간에 물음표를 보내지 않으면 누구나 보수화될 수밖에 없다. 나를 비롯해 모두가 그런 나약한 몸을 가지고 살아간다. - P090
내 아버지가 나에게 "이 세상 모든 책이 있는 곳"이라는 잊혀지지 않을 감각을 전해 준 것처럼, 나도 아이가 열 살이 되면 함께 교보문고에 가서 "이 세상 모든 책이 있는 곳이야."하고 말해 주고 싶다. 그러면 그 훈이 아이의 몸에 새겨지고, 그때부터 그는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서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 P146
그에 더해, 스스로를 특별한 개인이라고 믿는 데서 많은 비극이 시작되곤 한다. 우리 모두는 서로 닮아 있는 존재들이다. 내가 특별하다면 너 역시 특별하고 우리 역시 특별하다는 사실을 모두 인식해야 한다. 타인을 존중하고 그의 격을 자신의 자리까지 끌어올리는 데서 진정한 주인으로 설 수 있게 된다. 손님을 존중할 수 잇는 여유도 그 공간의 주인에게만 허락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특별하다고 믿는 개인일수록 부단히 타인을 초대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공간의 주인이 되는 일은 별로 어렵지 않다. - P190
모든 공간에는 그 공간만의 문법이 존재한다. 개인은 살아남기 위해 거기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 작업이 완료되고 나면 그에게 타인의 문법은 잘 들어오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생활양식이나 문화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어느 공간의 구성원들이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여길 때, 그 공간의 문법은 더욱 힘을 가지게 된다. - P194
그 주인이 공을 들여 만들어둔 서가가 있다면 일부러 "여기 좀 봐도 될까요?" 하고 가서 한참을 보기도 하고, 책상에 어지럽게 책이 흩어져 있다고 하면 어떤 책들이 있는지를 잠시 살핀다. 그러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 수 있다. 전시된 책들은 그가 품고 있는 욕망을 그대로 내보이기 때문이다. - P225
전화를 받고 있는 여행사 직원도 나를 닮은 을이고 그들에게 분노한다고 해서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 몇만 원을 더 돌려받는다고 해도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고 내가 약간의 구제를 받는 것일 뿐, 이 사회의 문화와 제도가 근본적으로 변화하지는 않는다. - P234
자신의 학교에는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많아서 다른 부분의 여비 때문에 여행을 쉽게 가지 못할 것이라고 덧붙였는데,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이라고 하는 그의 정중함과 다정함이 놀라웠다. 우리는 타인에게 무언가를 주려고 할 때 쉽게 거만해진다. 미리부터 생색을 내고 대가를 바라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김민섭 씨에게서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을 이미 발견하고 그들의 처지에서 사유하고 있었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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