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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 사계절 / 2018년 6월
평점 :
그들은 앞이 보이지 않고, 신체 일부가 존재하지 않으며, 기관을 통한 의사소통의 영역에서 살아가는데 불리한 조건을 지녔지만 끝없는 노력과 훈련을 통해 결국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고 마는 이 시대의 위대한 사람들이다. 사회는 그런 사람들에게 어떠한 고난과 역경이 닥친다하더라도 견디고 우뚝 일어설 수 있음을 증명하는 희망의 아이콘으로써 묘사한다. 또한 그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는 고위직 관료들이 4년에 한 번씩 방문해 불편한 부분을 도와주고 보살펴주는 태도의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방문객들은 ‘천사같다’라는 수식어로 그들의 이미지를 만들어놓는다. 이 모습은 우리 사회에서 묘사되어지는 장애인들에 대한 이미지이다.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그들의 태도를 보고, 그런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신의 모습에 안주하며 희망찬 내일을 다짐한다. 그리고 안쓰러움과 존경이 반반씩 섞인 눈빛을 보내며 그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단지 한 발자국 너머에서. 그 단어가 묘사하는 물리적인 거리감은 분명 한 발자국에 불과할 테지만, 정서적으로 묘사되는 거리감에는 저 편 너머에서 그들을 바라보려는 ‘관조적인 시선’이 배어있다. 그 ‘관조’는 개인의 관계 속에서 내 삶과 구분 짓고 싶은 짙은 거리감이 포함된다. 이런 개인의 시각 속에서 그들은 현실적인 불편함에 맞서 투쟁하고 있다. 무심코 희망적인 눈빛을 건네고, 그들의 삶에 대한 응원과 존경이 어떤 감정에서 비롯되었는지 파헤쳐본다면 자조적인 시선을 감출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세상에 대항하여 그들은 ‘최선을 다해 노련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외친다. 이 책은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이미지에 부합하지 못한 사람들, 그 중에서도 가장 끝단에 위치해있는 ‘실격당한 자들’이라는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장애인들에 대해 그들이 투쟁하고 있는 사회에 대하여, 그리고 그들이 받고 있는 유리된 시선들에 대해 변론하기 위한 책이다.
세상에 태어난 모든 생명체는 고귀하고 존엄하며 합리적인 평등 속에 차별받아야할 이유가 없음을 인지하는 것은 민주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나와 타인을 고민하고 성장해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견지한 태도일 것이다. 그리고 같은 의식으로 우리는 장애인에 대해서도 그들의 삶을 존중하며 숭고하게 여긴다. 그렇지만 그런 의식이 내 삶에 직접적으로 다가왔을 때도 우리는 같은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만약 나의 아이가 장애인으로 태어나게 될 운명이라면 그 장애를 제거할 수 있는 시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장애에 대해서 축복으로 여기고 출산할 수 있을까? 그런 상황 속 장애를 제거하고 아이를 낳게 된다면 장애는 숭고하지만 결핍된 것이라는 자가당착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그 선택으로 인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장애인의 존재를 부정하게 되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 책은 끊임없이 그런 우리의 내면으로 다가와 가슴을 쿡쿡 찌르며 생각해보게 만든다.
그들은 미(美)와 좋은 것을 추구하는 현대 사회 속에서 결코 아름답지 못한 존재로 자라난다. 사랑과 희망, 아름다움이라는 말은 통제되지 않는 신체를 움직이고, 장애인 전용 화장실이 없는 공간에서 소변을 애써 참아야하는 그들의 처절한 현실 앞에 예쁘게 포장된 허영에 불과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아름다움에 대한 정의를 더 깊이 내리게 된다. 그것은 결국 한사람의 생을 통해, 스스로가 주체적인 작가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서술해나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 최종적으로 추구하는 존엄함이며 아름다움이지 않을까? 개별적인 서술자들 앞에 저마다의 아름다움이 있을 뿐, 획일적인 아름다움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있다하여도 그 찬란함은 한시적일 뿐이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존엄한 인간 앞에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서술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지를 시사한다. 품격 있는 국가는 보기에 안 좋은 것들을 배제하고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만을 갖추었을 때 탄생한다기보다, 다소 거칠고 울퉁불퉁한 것들, 그리고 무언가 부족하거나 다른 것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형태 속에서 비로소 탄생되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런 장애인들이 살아가야할 현실적인 세상 앞에 이 책은 비장애인들의 시각을 확장시켜나가고 모든 인간의 저마다의 존엄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다. 책은 결코 장애인에 대한 내용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 주류가 되지 못한 소수자들, 약자들의 목소리까지 대변하며 주류의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관용의 시야를 제공해주는 역할이 되어준다. 장애인이 아닌, 비주류가 아니었던 입장에서 바라보았던 사회는 너무나도 편리하고 아름다운 세계였지만, 또 다른 이들의 시선에서는 결코 그렇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고로 이 책은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권장되었으면 하는 바이다.
p 39 우리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이고, 그 도움이 타인에게 일정한 이득이 될 수 있다면 때로 ‘공연‘에 동원될 수도 있다.
p 44 장애, 질병, 빈곤 등으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을 자신의 목적을 실현할 수단으로 삼아 철저히 익명화하는 방식으로 연출하는 공연은 결국 이들을 실격당한 존재로 만든다.
p 45 그는 정신질환으로 의식이 혼미하거나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누구보다 명징하게 자신이 하는 일을 알았고, 그 일을 계획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는 ‘성찰적인‘ 인간이었다. ... 즉 ‘뇌의 생리적, 기질적 문제‘로만 돌리면 우리에게 자유의지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된다.
p 50 삶이 일종의 연극이라는 사실이 그 자체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더 큰 진실을 위해 거짓을 연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로지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을 빛내는 데만 몰입하는 사람들은 작은 진실을 위해 큰 거짓을 연기한다. 나는 이를 ‘품격주의적 태도‘라고 부르고자 한다.
p 56 칸트는 인간은 모두 ‘자기 자신과 다른 모든 이를 결코 한낱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항상 동시에 목적 그 자체로서 대해야만 한다‘라고 전제한 후 ‘목적들의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가격 도는 존엄성을 가지며, 가격은 ‘같은 가격을 갖는 다른 것으로 대치될 수‘ 있는 반면 존엄성은 그 무엇으로도 대치될 수 없다고 말한다.
p 67 서로를 인격체로 존중하는 상호작용은 실재를 공유하면서 그 존중을 강화한다. 모르는 척해주는 익명의 대학생이 고마워서 그를 존중하며, 자신을 존중하려 애쓰는 자폐아 부모의 노력을 아는 대학생은 더더욱 무심한 척 책으로 눈길을 돌린다. 타인이 나의 반응에 다시 반응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타인을 존중하게 되며, 나를 존중하는 타인을 통해 나 자신을 다시 존중하게 된다.
p 99 당신은 장애인을 공동체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에 대한 어떠한 차별에도 반대하며, 그들의 삶이 어려움이 따르기는 하겠지만 그럼에도 반드시 불행하거나 가치 없는 건 아니라고 믿는가? 그런 당신은 장애아가 태어나는 순간도 비장애아의 탄생과 마찬가지로 축복과 기대, 희망과 사랑으로 가득한 경이로운 시간으로 기억할 자신이 있는가? ‘잘못된 삶‘도 존엄하고 매력적이고 풍성한 삶이라는 것을 ‘변론‘하려는 나는, 간단한 시술로 내 장애를 고칠 수 있고 나와 같은 장애아를 출산하지 않을 수 있는 경우에도 거리낌 없이 그 시술을 거부할 자신이 있는가?
p 115 유전자진단기술을 통해 장애아를 ‘걸러낼‘ 수 있는 사회는 해당 장애에 대한 의료, 사회복지 지출에 둔감해지기 쉽다. 그냥 ‘걸러내면‘ 될 것을 굳이 낳아서 치료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기술을 사용하지 않은 개인은 사회에 어떤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죄책감은 타당할까? 위 프로그램의 의미를 소개하면서 연구자 황지성은 첨단기술을 활용할지 말지는 개인의 선택이라고 하지만, 그 기술을 사용하지 않기로 선택한 사람은 사회적 차별과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 모순을 지적한다. 유전자 진단이나 임신중절은 일정 범위 안에서는 당신의 자유로운 선택이다. 다만 그 자유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해 장애아가 태어나면, 그 책임은 당신에게 있다. 결국 모든 기술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가 된다.
p 129 잘못된 삶을 정체성의 일부로 ‘수용‘하는 일과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정신승리‘가 구별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 타인의 삶을 잘못되었다고 규정하고, 그로부터 위안을 얻는 사람들이야말로 어쩌면 이런 ‘정신승리‘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p 144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장애가 있는 몸, 미적 기준에서 벗어난다고 여겨지는 신체를 수용했다고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혐오나 피해의식에 기초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이 세상이 구축해놓은 외모의 위계질서에 종속되지 않으며, 앞으로의 삶을 외모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나 억압, 혹은 피억압자로서의 의식과 트라우마에 짓눌리지 않은 채 살아가겠다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를 수용한 것이다.
p 147 정체성이란 객관적인 대상처럼 존재하는 어떤 산물이 아니다. 정체성이 귀중한 이유는 우리가 각자의 인간적 상황에 맞서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수행적 가치‘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수행적 가치가 무엇인지는 예술품을 예로 들면 이해하기 쉽다. .. "위대한 예술품에 가치를 두는 궁극적인 이유는 예술품이 우리의 삶을 증진시켜서가 아니라 예술적 도전에 맞선 수행을 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p 149 그러나 장애라는 정체성이 어떤 산물이라기보다는 장애라는 경험에 맞서 한 개인이 작성해나가는 ‘이야기‘ 그 자체라면, 우리가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일은 하나의 국면이 아니라 긴 삶의 시간 동안 그것을 ‘써나가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장애의 수용이란 결국 우리가 철저히 자발적으로 장애라는 정체성을 작성해나가는 일을 의미하게 된다.
p 204 사회에서 소외된 채 돌봄 노동을 전담한 가족들의 이야기가 공유되지 않는 이상 장애인은 그저 사회와 가족의 짐으로만 여겨지고, 그 가족들은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사람들로만 인식될 것이다. 이들이 경험한 공생을 위한 갈등가 협력, 때때로 찾아오는 경이로운 순간들, 장애인을 한 사람의 자녀로, 또래로 온전히 받아들인 시간은 그 자체로 고유할 뿐 아니라, 중증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개별자로서의 이야기를 이전과는 다른 관점에서 드러내줄 것이다.
p 227 마찬가지로 장애인이 버스와 지하철에 탑승하지 못하는 이유가 단지 복지 정책이 미흡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장애인의 탑승을 고려해 버스를 설계하고 도입하는 일이 경제적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도시의 속도를 지체시키기 때문이라면, 이는 사실상 장애인의 신체 또는 일반적인 행동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과 같지않은가? 이동권은 꼭 사회권의 맥락에서만 고려될 문제인가? 이동권이 자유권의 성격을 갖는다고 상상할 수 있다면, 국가의 최우선적 ‘배려‘ 안에 반드시 포함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p 233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더는 가진 자들의 은혜적 배려가 아닌 전 국민이 함께 고민하며 풀어가야 할 사회적 책무로서 막연히 예산상의 이유만을 들어 그러한 의무를 계속적으로 회피할 수는 없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방법으로 일상생활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발전시켜왔다. 그런데 일상생활에 있어 아무런 제약이 없어 비장애인에게는 그 존재의 가치조차 논의하지 아니하는 이동권이 단순히 예산상의 이유만으로 제약을 받는 것은 이 시대의 모순일 수밖에 없는 바, 이러한 모순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해결할 문제로서 조그마한 노력과 비용의 부담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것이므로 더는 비장애인을 기준으로 판단하여 그 시기를 늦출 수는 없다고 할 것이고, 인간에게 있어 가장 기초적인 이동권마저 비장애인과의 형평성 및 예산상의 문제 등을 거론하며 그 시기를 늦추려고 하는 것은 비장애인들의 편의적인 발상에 불과하다고 할 것이다
p 240 우리 개인이 가진 구체적인 삶의 이야기, 몸의 특성, 복잡다단한 고유성을 주류 집단이 간단히 무시해버리지 않아야 하며, 만약 그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왜 그러한지 그들이 직접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는 원칙이 곧 합리적/정당한 편의 제공의 전제다. 장애인에게 편의를 제공할 의무를 진다는 것은 그저 장애인을 배려하라는 말이 아니라, 장애인이 그 신체적, 정신적 특성을 가지고 오랜 기간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존중하라는 요구와도 같다.
p 261 닉 부이치치의 이야기에 감동하고, 아이들에게 그의 이야기를 마치 위인전을 읽히듯 전하는 사람들도 장애 아동을 위한 특수학교 설립에는 반대한다. 교회에서 단체로 봉사활동을 가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후원금을 내는 사람들도 자기 윗집에 장애인이 이사 오는 것은 반대한다. 이들이 장애인의 신체에서 어떤 아름다움을 느낀다면, 그런 종류의 미적 경험은 그 대상이 전적으로 ‘타자‘일 때에만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p 266 사람들은 자주 ‘장애는 현실‘이라고 말한다. 엄밀히 말하면, 장애가 현실이 아니라 장애가 있는 사람의 몸이 현실이다. 장애를 둘러싼 현실이라는 ‘관념‘은 너무나 많은 입장, 태도, 관행, 오래된 습속, 누적된 혐오, 부족한 상호작용의 경험, 변화 가능한 사회 시스템에 대한 몰이해, 의료적으로 재단되고 분류된 병명들로 가득 차 있다.
p 308 그것들은 분명 얼마간은 객관적으로도 산물적인 가치를 갖지만, 설령 이러한 질병과 장애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부정적인 경험에 불과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수용하기 위해 애쓸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애쓰는 모습이야말로 나 자신에게, 나의 부모에게, 이 사회에게 내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음을 보이는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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