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와 다른 아이들 1
앤드류 솔로몬 지음,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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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다른 아이들1, 다르다는 것


 

우리는 다르다는 것을 어떻게 표현할까? 보통 우리는 다르다는 것을 틀린 것이라고 오해하고 사용하거나, 알면서도 잘못 사용하고 있다. 부모와 다른 아이들의 저자인 앤드류 솔로몬도 말하자면 다른 사람이다. 성적 소수자이며, 자신이 어린 시절 겪었던 경험을 토대로, 이 책을 서술하고 있다.


 

우리에게 정체성이라는 것은 어떻게 형성될까? 저자는 두 개의 정체성이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하나는 수직적 정체성으로 동일한 가계 안에서 대물림되는 것이다. 수평적 정체성은 청각 장애나 왜소증, 다운증후군, 자폐증, 정신분열증 등 일반적으로 부모와 무관하게 나타나는 정체성을 말한다. 다른 하나는 수평적 정체성으로 가족이 아닌 동류 집단에서 배우는 것이다. 수평적 정체성은 성적소수자도 여기에 해당한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잘못 표현해오고 있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defective 결함이 있는>라는 형용사를 예를 들어 잘못하면 경멸적인 의미를 담을 수 있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저자는 첫 파트는 자신의 경험을 들어서, 성적소수자로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 왔는가에서 설명하고, 그 다음 장부터는 장애를 갖은 아이들에 대해서 설명한다. 청각 장애, 왜소증, 다운증후군, 자폐증, 정신분열증, 장애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아쉬운 점은, 지금 읽고 있는 내가 부모가 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남았기 때문이다.


 

부모의 입장에서 이 책을 읽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수직적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여성 참정권, 인종 차별 철폐 운동 등이 먼저 등장한 후에, 수평적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운동이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에도 수평적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운동에 대해서 자유롭지는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평적 정체성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질병이나,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평가하며, 정상적이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남들과 다른 것이 비정상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옳지 못한 것 같다.

 

어렸을 때 경험이, 평생 추억으로 간직될 수 있거나, 아니면 악몽으로 남을 수도 있다. 저자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어렸을 때 어려운 시기를 힘들게 보낸 것 같다.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장애 인권 법률 전문가인 알렌 메이슨은 역사를 통틀어 자선과 선의가 장애인들에게 최대의 적이었다고 주장한다. 건강한 신체를 가진 사람들은 어쩌면 너그러운 자기도취증 환자다. 그들은 자신의 호의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고려하지 않은 채 단순히 자기만족을 위해서 열정적으로 호의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결국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상대가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직 잘 모르겠다. 2권을 읽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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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주식회사
사이먼 리치 지음, 이윤진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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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주식회사, 운명이란?

 

 

우리는 흔히 운명의 상대가 나타나길 기다린다. 정말로, 운명이란 있는 것일까? 이 책에서는 숙맥인 두 남녀를 이어주기 위한 천사들의 대작전이 펼쳐지는데, 천사들의 노고가 만만치 않다. 이 책에서는, 하느님이 천국 주식회사의 CEO로 나오고, 그 산하에 많은 부서들에 천사들이 배치되어 있다. 하느님은 매일 사람들의 기도를 듣다가, 노하게 되고, 더 이상 인간들을 돌봐주기 싫어지게 된다.

 

 

변덕쟁이 하느님은, 세상이 멸망하기 전까지 30일이라는 시간을 주고, 크레이그와

일라이자는 하느님이 주는 미션을 완수하기 위해서 고군분투를 한다. 미션들이 하나같이 다 어이가 없었으나, 두 남녀의 기도에 눈길이 가서 두 남녀의 기도를 들어주기로 결심한다. 두 남녀의 기도는 서로를 사랑에 빠지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두 천사는 쉽게 미션을 완수하겠다고 생각하고, 둘을 사랑에 빠지도록 결심한다.

 

 

하지만, 쉽지 않은 여정이 계속되는데, 둘 다 완전 소심한 성격이고, 대외활동을 안하며, 집밖으로 나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 방콕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둘이 서로 호감이 있더라도, 만나게 되면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며, 서로 다가가려는 노력조차 시도하지 않았다. 이런 둘의 모습을 보면서, 두 천사는 지치게 되고, 억지로 인연이 닿도록 노력을 하여도, 단순히 만나고 헤어지길 반복한다.

 

 

인류 멸망하는 당일 두 천사는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일라이자는 두 남녀 중에 여자(로라)의 꿈속으로 들어가며, 먼저 다가가라고 하면서 계시를 준다. 하지만, 이 기회조차 로라는 놓치게 되고, 천사들은 절망에 빠진다. 인류를 구원하려고 했던 천사들은 자포자기 했지만, 남녀의 노력 끝에 결실을 맺는다. 우리는 인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한 순간이라도 어긋났다면, 평생을 모르고 지나칠 사람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거대한 톱니바퀴가 맞물려서 돌아가는 기계론적 세계관에 맞추어져서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이 이미 정해져 있다면, 우리는 노력을 해도 소용이 없다고 여기고 살아가야 하는가? 삶이 정해져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사는 것이 재미가 없을까? 사실 나는 신이 존재하는지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겠다.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인생의 여정 속에서 우연이라는 요소와 운명이라는 요소는 한끝차이이다. 결과가 좋으면 인연이고, 결과가 나쁘면 우연일까? 결국 우연이 인연이 되는 것이며, 개인이 하기에 따라서 인연이 될 수도, 우연일 수도, 악연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단순히, 내가 노력하지 않고 저 사람과는 어차피 이럴 운명이었다고 단정 짓기에는 너무나 이른 것이 아니었을까?

 

 

삶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지나쳐갈 지 모르겠지만,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주변에서 관계를 이어주려고 노력하여도, 본인들이 노력하지 않으면 소용없는 짓이다. 천국주식회사에서 보았듯이, 천사의 능력발휘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인연은 결국 스스로 만들어갔다. 나는 인연이라는 것은 자기가 하기 나름이라는 것을, 그리고 인연의 결과가 좋지 않으면, 사람들이 인연을 악연이라고 단정 짓는다는 것을, 결과가 좋으면 운명이라고 여긴다는 것을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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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국사 교과서가 가르쳐주지 않는 우리 역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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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역사란 무엇인가? 조선상고사를 저술한 신채호는 역사를 아와 비아와의 투쟁이라고 한다.주관적인 ‘아’가 있으면, 대립적인 ‘비아’가 있기 마련이다. ‘아’에 대한 ‘비아’의 접근이 빈번해질수록 ‘비아’에 대한 ‘아’의 분투도 더욱 더 맹렬해진다. 아와 비아의 투쟁이 시간적으로 전개되고 공간적으로 펼쳐지는 정신적 활동 상태를 따라서 역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아’가 역사적인 ‘아’가 되려면 두 개의 속성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첫째는 시간성으로 ‘아’의 존재는 시간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둘째는 공간성으로, ‘아’의 영향력이 공간적으로 파급되어야 한다.

 

 

같은 행위일지라도, 어느 것은 ‘아’가 되고 어느 것은 ‘아’가 되지 못하는 것일까? 김석문이 지동설을 지오다노 부르노 보다 300년 먼저 주장했다고 해서, 그러한 사실이 ‘아’가 될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아니다. 브루노의 학설은 유럽 각국의 탐험 열기를 이끌고 신대륙의 발견을 앞장서게 만들었지만, 김석문의 학설은 그렇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아’의 성립 요건은 시간성과 공간성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며, 인류의 것이라 할지라도 사회적 행위일 때만 역사적 행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행위가 역사적인 기록이 될 수 없듯이, ‘아’ 역시도 ‘비아’가 되지 않으려면, 시간과 공간에서 파급력을 갖추어야 한다. ‘아’는 주관적 입장에 선 쪽이라고 신채호 선생은 서술하는데, ‘아’를 단순히 계급, 국가, 민족에 한정해서는 안 된다. ‘아’는 배타성(계급, 국가, 민족)을 갖춘 것 뿐만 아니라 인류의 공존까지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는 주관적 입장에 선 쪽 이기 때문에, 이것은 ‘아’의 입장은 어디까지나 주관적 입장에 그칠 뿐 객관적 입장이 될 수 없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신채호 선생은 ‘아’ 속에 ‘아’와 ‘비아’가 있으면, ‘비아’ 속에서도 ‘아’와 ‘비아’가 있음을 강조했다. 이것은, ‘아’와 ‘비아’와의 공존을 인정한 것이다. 조선상고사는 민족주의적 사관에 입각해서 쓴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라는 ‘아’를 설정해서 쓴 저술이므로, 신채호 선생을 단순히 민족주의자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그는 민족주의라기보다는 무정부주의자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조선상고사는 우리민족인 ‘아’에 대해서 어떻게 서술하였는가? 신채호 선생은 과거 고대사에 대해 사라진 사료에 대해 아쉬워했다. 역사란 승자의 역사라는 말이 있듯이, 승자들이 ‘아’가 되어버리면, ‘비아’에 대한 기록들을 날조 및 생략하거나,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생긴다. 이러한 세태에 대해서 비판하면서, 신채호 선생은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사대파 김부식이 자주파 묘청을 숙청하고, <삼국사기>를 편찬한 것은 고대사를 정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고대사를 청소하기 위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이 책에서는 과거 고조선 시대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려, 백제, 신라라는 삼국시대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까지의 역사가 서술되며 미완성으로 종료된다. 이 책은 ‘아’가 되어 서술하지 않은 것과 그에 따라서 ‘비아’로 남게 된 역사를 재조명하고 있다. 또한 신채호 선생의 개인적인 평가와 역사에 대한 총론을 담고 있다.

 

 

앞서서 신채호 선생이 인정했듯이, ‘아’가 되더라도 ‘비아’와 함께 공존해야지, ‘비아’에 대해 날조하거나, 생략해서는 안 된다. 그런 고대사의 모습을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신채호 선생은 고구려 및 백제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소서노를 최초의 여왕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이 흥미롭다. 소서노가 죽은 뒤 두 아들인 비류와 온조가 미추홀과 위례성을 도읍으로 정하고 새롭게 백성들과 살아간다. 우리는 소서노가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의 부인 인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주몽의 친자식인 유리왕의 어머니인 예씨가 나타나게 되자, 비류와 온조는 소서노와 함께 떠나게 된다. 신채호 선생은 소서노를 단순히 두 자식의 어머니로만 여기지 않고 왕으로 본 여러 가지 이유를 설명한다.

 

 

첫째로, 소서노의 지위가 단순히 왕의 어머니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둘째로, 소서노의 죽음이 정치적인 죽음이었고 그것이 도읍 천도의 원인이었다는 점이다. 셋째로 소서노가 죽을 당시에 소서노와 온조의 관계가 안 좋았다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자기 거처보다는 부모의 사당을 먼저 세우는 것이 상식이었다. 이런 상식을 위반한 인물은 통치자의 정당성을 얻기 힘들었다. 하지만, 온조는 이러한 상식을 위반한 채 소서노가 죽자마자 도읍을 옮기고 새로운 궁궐을 지었다. 이러한 종합적인 요소를 볼 때, 신채호 선생은 소서노가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또 다른 부분을 들면서 이 독후감을 막을 내리려 한다. 신채호 선생의 연개소문이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이다. 신채호 선생은 혁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과 연개소문이라는 개인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서술한다.

 

 

P464

연개소문의 공적에 대한 평가

기존 역사가들은 ‘성공했나 실패했나’ 또는 ‘흥했나 망했나’라는 기준으로 사람의 우열을 판단하거나 유교적 윤리관으로 사람의 시시비비를 판단했다. 연개소문의 경우에는, 본인은 성공했지만, 불초한 자식들이 유업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그래서 춘추필법을 흉내 내는 사람들은 연개소문을 배척하고 연개소문을 흉적으로 몰며 모독과 치욕을 가했다.

 

 

혁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역사적 진보의 의의를 가진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다. 역사란 것은 어느 날 때고 변화하지 않는 경우가 없으니, 어느 날 어느 때고 간에 혁명 없는 순간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체 역사를 다 혁명의 역사라고 해야 하지만, 역사가들은 혁명이란 어휘를 특히 중시하여 문화적, 정치적으로 시대를 구획할 만한 진보적 의의를 가진 인위적 대변혁을 혁명이라고 정의한다. 이런 의미의 정치적 혁명가를 찾자면, 우리 조선 수천 년 역사에서 이런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을 것이다. 한양의 이씨가 송도의 왕씨를 대체한 것과, 이씨 조선의 이시애, 이괄 등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외형상의 성과 다르지만 두 가지 다 정권찬탈을 위한 행위에 불과하다. 이런 것들은 내란이나 역성이라고 부를 수 는 있어도 혁명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다르다. 그는 봉건 세습적인 호족 공화제를 타파하고 정권을 한 곳에 집중함으로써 분권적인 국면을 통일적인 상태로 바꾸었다. 또 반대파는 군주든 호족이든 불문하고 죄다 소탕했다. 그는 영류왕을 비롯해서 수백 명의 관료들을 주살했다. 또한 침략해온 당태종을 격파했을 뿐 아니라, 이를 추격하여 중국 전역을 진동시켰다. 그는 혁명가의 기백을 가지는 데 그치지 않고, 혁명의 능력과 지략까지 갖추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그는 죽기 전에 지혜롭고 유능한 사람을 자기의 후계자로 만들지 못했다. 그래서 조선 만대의 행복을 유지하지 못했다. 불초한 자식들에게 대권을 맡기는 바람에 결국 성과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그는 야심은 많았지만 덕은 부족했던 것 같다. 하지만 역사 기록이 없는 탓에 오로지 적국의 붓으로 전해지는 기록만을 갖고 연개소문을 논평해야 하기 때문에, 그에 관한 사실의 전말을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 점 하나로 전모를 논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노예적인 사대주의 역사가들은 좁쌀과 팥알처럼 작은 자기 눈알에 보이는 대로 연개소문을 수백 년간 혹평해왔다. 그들은 ‘신하는 충성으로써 군주를 섬겨야 한다’는 불완전한 도덕률로 그의 행위를 탄핵하고 ‘대국을 섬기는 소국은 하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노예적 심리로 그의 공적을 부인했다. 이런 식으로 역사 인물의 시체를 한 점 살도 남지 않도록 씹어버린 것에 대해 나는 통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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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씨앗 - 제인 구달의 꽃과 나무, 지구 식물 이야기
제인 구달 외 지음, 홍승효 외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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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씨앗, 우리는 지구를 빌린 것이 아니라 훔쳤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제인 구달이라는 인물을 떠올리면, 침팬지 연구가, 환경운동가 정도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제인 구달이 새롭게 선보인 희망의 씨앗에서는, 지구의 식물이야기를 들려준다. 할머니가 정답게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아낌없이 주는 나무, 아니 아낌없이 주는 지구의 식물에 대해서 들어보도록 하자.


 

신대륙 발견에 의해서, 지구의 생활 반경이 넓어진 만큼,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물론 서구열강들이, 우선적으로 노린 것은 보물, 문화재, 노동력 등의 다양한 것이 있겠지만, 식물의 종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가 섭취하고 있는 옥수수, 밀 등 다양한 작물들이 신대륙에서 온 것들이며, 우리의 식탁 앞에서 이런 작물들이 없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자연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준다. 이 책에서 보면, 의, 식, 주에 대한 기본적인 영역부터, 우리에게 치유와 위안을 주는 정신적인 영역까지, 식물은 우리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로운 식물이란 무엇인가? 일용할 양식을 주는 식물 혹은 따뜻한 옷을 만들 수 있는 면화 아니면 가구 혹은 집을 만들 수 있는 자재로 쓸 수 있는 나무? 그 어떤 식물도 우리가 이로운 작물인지 혹은 해로운 작물인지 경제적인 가치로만 판단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자연이 주는 풍요로움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효율성을 위해서, 작물에 가격을 정하고, 생물다양성을 없애고, 단일작물만을 심어내고 있다. 경제성이 있느냐 혹은 없느냐에 따라서, 식물을 심어야하는지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지구에게 빚을 지고 살고 있다. 그것에 모자라서, 종자를 유전자변형을 하고, 숲을 개간하고, 나무들을 벌목하고 있으며, 숲에 사는 생물들을 쫓아내고 있다.


 

지구의 주인은 인간인가? 지구의 주인은 지구이다. 우리는 지구라는 행성에서 다른 생명들과 함께 거주하는 존재에 불과하다. 하지만, 인간들은 모든 생물들의 우두머리를 자처하며, 자연을 훼손하고 있다. 우리는 먹기 위해, 살기 위해, 치유를 위해, 기호를 위해 식물들을 이용하고 있다. 자연을 훼손한 대가는 언젠가 치루고 말 것이다. 유전자 변형을 이용한 옥수수, 콩, 다양한 작물들을 먹은 동식물들을 섭취하는 인간들은, 언젠가 큰 대가를 치루고 말 것이다.

 

우리가 꽃이나 혹은 나무를 바라볼 때, 우리는 아름다움과 정신적인 안정까지 얻는다. 그것에 모자라, 풍요로운 열매와 건축물의 자재, 옷을 만들 때 필요한 면직물까지 의, 식, 주에 필요한 모든 것까지 받기만 한다. 최소한 자연에게 다시 되돌려 주지 못할망정, 훼손하지 않도록 노력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책의 마지막 장인, 삶의 의지라는 챕터에서는, 원폭 피해에서도 살아나는 나무와, 911테러를 겪고도 살아남은 감동적인 나무에 대해서 나온다. 인간은 끊임없는 전쟁과 테러 그리고 개발을 통하여 자연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살아남기 위해서 계속해서 발버둥치고 있다. 우리의 삶은 유한하지만, 자연도 유한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자연을 바라볼 때 의, 식, 주, 약물, 기호식품들의 경제적인 가치로만 판단하지 말자. 지금도 우리의 자연은, 끊임없이 이산화탄소를 빨아드리며 산소를 만들어내고 있고,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풍요로움을 주고 있다.

 

<밑줄 긋기>

p448

나는 행운아다. 필요한 만큼만 주변 땅으로부터 얻어 사람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는, 야생 그대로의 장소에서 시간을 보냈다. 식물들은 그것들이 제공하는 음식, 약, 의류로만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 자체의 가치를 평가받는 곳이었다.


식물들이 아름답고 완전한 그들의 모습을 보여 주며 자유롭게 자라는 그런 장소였다. 또한 인간에게 이끌려 나뭇가지가 잘려 나가고 비틀린 채 자라며, 작은 사무실용 화분에서 홀대받고, 농약이 뿌려져 병들고, 차가 내뿜는 모든 오염 물질에 노출된 채 복잡한 거리를 따라서 줄 선 것처럼 극심한 고통을 받는 식물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식물은 여전히 최선을 다해 오염도니 공기에서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먼지와 독성 물질에 덮인 잎으로 햇빛을 빨아들이며, 사람들을 위해 산소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꽃으로 너무나 자주 우리의 일상을 밝혀 준다.

 

 

 

<서평단으로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리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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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과학도에게 보내는 편지 -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과학자 <개미>, <통섭>의 저자 에드워드 윌슨이 안내하는 과학자의 삶, 과학의 길!
에드워드 O. 윌슨 지음, 김명남 옮김, 최재천 감수 / 쌤앤파커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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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과학도에게 보내는 편지, <과학도가 갖추어야할 마음가짐이란?>

 

 

에드워드 윌슨은 개미연구가이자 사회생물학의 창시자 그리고 통섭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젊은 과학도를 위해서 책을 출간한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과학을 하기위해서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할까? 뛰어난 두뇌와 명석함 혹은 많은 연구자본과 우수한 인재들 아니면 넓은 백그라운드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것들을 무시한 채, 기본적인 것을 강조하고 있다. 에드워드 윌슨은 기본적으로 수학실력을 강조하고 있다. 에드워드 윌슨도 하버드대학교 교수가 되기 직전까지도 수학 때문에 골치를 썩었다고 한다. 하지만, 기본적인 수학적인 마인드 없이는, 훌륭한 과학자가 되기 어렵다고 한다.

 

 

그 다음으로 강조하는 것은 두뇌가 아니라, 열정이다. 에드워드 윌슨은 사실, 많은 과학 분야에서 뛰어난 인재들이, IQ가 생각보다 높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 IQ가 높은 인재들은 차라리 회계사가 어울리지 과학자에는 어울리는 인재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열정은 무엇인가? 에드워드 윌슨이 개미연구를 시작할 당시에는, 개미만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과학자가 세계적으로 1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런 분야에서 최고가 된 윌슨은 다른 분야에서도 더 많은 연구비용을 얻을 수 있었고, 우수한 인재들과 함께 연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남들이 모두 뛰어드는 분야에서 최고가 되려고 하지 말고, 남들이 하지 않는 분야에서 최고가 되라는 것이다.

 

 

실험이라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단순한 생각에서부터 시작해서, 그 실험을 확장해서 자신의 이론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당장 개미들을 보자. 개미들은 동료 개미가 죽은 지 어떻게 알까 라는 엉뚱한 생각에서 시작해서, 개미에 대해서 파고드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것을 왜 알아야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끊임없이 강조되고 있는 인문학과 과학 혹은 공학에서의 융합의 개념이 강조되는 만큼, 과학을 경시해서는 사회는 발전할 수 없다. 현재 우리나라는, 순수 과학 분야는 죽어가고 있고, 그나마 공학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더 이상 학문이 취업을 위한 도구로 여겨지기 않길 바라며, 자신만의 분야를 찾아갔으면 좋겠다.

 

<밑줄 긋기>


P82

독창적인 발견은 누구나 언제나 어디서에서나 수월하게 해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과학의 최전선이라고 불리는 과학지식의 변경에 도달하려면, 앞선 탐함가들이 그려둔 지도가 필요합니다. 루이스 파스퇴르가 1845년에 말했듯이 행운은 준비된 사람에게만 찾아오지요. 파스퇴르가 그렇게 말한 이래 최전선으로 가는 길은 훨씬 더 멀어졌고, 그곳에 가닿고자 그 길을 여행하는 과학자도 훨씬 더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여행에 더 유리해진 점도 있습니다. 요즘은 최전선 자체에 예전보다 훨씬 더 넓어졌고 지금도 계속 더 넓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리학에서 인류학까지 어떤 분야를 고르든, 기나긴 최전선에는 아직까지 사람들의 발길이 드문 지점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아직 아무도 탐사하지 않은 드넓은 영역의 어딘가에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서평단으로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리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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