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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국사 교과서가 가르쳐주지 않는 우리 역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조선상고사
역사란 무엇인가? 조선상고사를 저술한 신채호는 역사를 아와 비아와의 투쟁이라고 한다.주관적인 ‘아’가 있으면, 대립적인 ‘비아’가 있기 마련이다. ‘아’에 대한 ‘비아’의 접근이 빈번해질수록 ‘비아’에 대한 ‘아’의 분투도 더욱 더 맹렬해진다. 아와 비아의 투쟁이 시간적으로 전개되고 공간적으로 펼쳐지는 정신적 활동 상태를 따라서 역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아’가 역사적인 ‘아’가 되려면 두 개의 속성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첫째는 시간성으로 ‘아’의 존재는 시간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둘째는 공간성으로, ‘아’의 영향력이 공간적으로 파급되어야 한다.
같은 행위일지라도, 어느 것은 ‘아’가 되고 어느 것은 ‘아’가 되지 못하는 것일까? 김석문이 지동설을 지오다노 부르노 보다 300년 먼저 주장했다고 해서, 그러한 사실이 ‘아’가 될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아니다. 브루노의 학설은 유럽 각국의 탐험 열기를 이끌고 신대륙의 발견을 앞장서게 만들었지만, 김석문의 학설은 그렇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아’의 성립 요건은 시간성과 공간성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며, 인류의 것이라 할지라도 사회적 행위일 때만 역사적 행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행위가 역사적인 기록이 될 수 없듯이, ‘아’ 역시도 ‘비아’가 되지 않으려면, 시간과 공간에서 파급력을 갖추어야 한다. ‘아’는 주관적 입장에 선 쪽이라고 신채호 선생은 서술하는데, ‘아’를 단순히 계급, 국가, 민족에 한정해서는 안 된다. ‘아’는 배타성(계급, 국가, 민족)을 갖춘 것 뿐만 아니라 인류의 공존까지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는 주관적 입장에 선 쪽 이기 때문에, 이것은 ‘아’의 입장은 어디까지나 주관적 입장에 그칠 뿐 객관적 입장이 될 수 없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신채호 선생은 ‘아’ 속에 ‘아’와 ‘비아’가 있으면, ‘비아’ 속에서도 ‘아’와 ‘비아’가 있음을 강조했다. 이것은, ‘아’와 ‘비아’와의 공존을 인정한 것이다. 조선상고사는 민족주의적 사관에 입각해서 쓴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라는 ‘아’를 설정해서 쓴 저술이므로, 신채호 선생을 단순히 민족주의자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그는 민족주의라기보다는 무정부주의자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조선상고사는 우리민족인 ‘아’에 대해서 어떻게 서술하였는가? 신채호 선생은 과거 고대사에 대해 사라진 사료에 대해 아쉬워했다. 역사란 승자의 역사라는 말이 있듯이, 승자들이 ‘아’가 되어버리면, ‘비아’에 대한 기록들을 날조 및 생략하거나,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생긴다. 이러한 세태에 대해서 비판하면서, 신채호 선생은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사대파 김부식이 자주파 묘청을 숙청하고, <삼국사기>를 편찬한 것은 고대사를 정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고대사를 청소하기 위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이 책에서는 과거 고조선 시대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려, 백제, 신라라는 삼국시대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까지의 역사가 서술되며 미완성으로 종료된다. 이 책은 ‘아’가 되어 서술하지 않은 것과 그에 따라서 ‘비아’로 남게 된 역사를 재조명하고 있다. 또한 신채호 선생의 개인적인 평가와 역사에 대한 총론을 담고 있다.
앞서서 신채호 선생이 인정했듯이, ‘아’가 되더라도 ‘비아’와 함께 공존해야지, ‘비아’에 대해 날조하거나, 생략해서는 안 된다. 그런 고대사의 모습을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신채호 선생은 고구려 및 백제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소서노를 최초의 여왕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이 흥미롭다. 소서노가 죽은 뒤 두 아들인 비류와 온조가 미추홀과 위례성을 도읍으로 정하고 새롭게 백성들과 살아간다. 우리는 소서노가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의 부인 인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주몽의 친자식인 유리왕의 어머니인 예씨가 나타나게 되자, 비류와 온조는 소서노와 함께 떠나게 된다. 신채호 선생은 소서노를 단순히 두 자식의 어머니로만 여기지 않고 왕으로 본 여러 가지 이유를 설명한다.
첫째로, 소서노의 지위가 단순히 왕의 어머니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둘째로, 소서노의 죽음이 정치적인 죽음이었고 그것이 도읍 천도의 원인이었다는 점이다. 셋째로 소서노가 죽을 당시에 소서노와 온조의 관계가 안 좋았다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자기 거처보다는 부모의 사당을 먼저 세우는 것이 상식이었다. 이런 상식을 위반한 인물은 통치자의 정당성을 얻기 힘들었다. 하지만, 온조는 이러한 상식을 위반한 채 소서노가 죽자마자 도읍을 옮기고 새로운 궁궐을 지었다. 이러한 종합적인 요소를 볼 때, 신채호 선생은 소서노가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또 다른 부분을 들면서 이 독후감을 막을 내리려 한다. 신채호 선생의 연개소문이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이다. 신채호 선생은 혁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과 연개소문이라는 개인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서술한다.
P464
연개소문의 공적에 대한 평가
기존 역사가들은 ‘성공했나 실패했나’ 또는 ‘흥했나 망했나’라는 기준으로 사람의 우열을 판단하거나 유교적 윤리관으로 사람의 시시비비를 판단했다. 연개소문의 경우에는, 본인은 성공했지만, 불초한 자식들이 유업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그래서 춘추필법을 흉내 내는 사람들은 연개소문을 배척하고 연개소문을 흉적으로 몰며 모독과 치욕을 가했다.
혁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역사적 진보의 의의를 가진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다. 역사란 것은 어느 날 때고 변화하지 않는 경우가 없으니, 어느 날 어느 때고 간에 혁명 없는 순간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체 역사를 다 혁명의 역사라고 해야 하지만, 역사가들은 혁명이란 어휘를 특히 중시하여 문화적, 정치적으로 시대를 구획할 만한 진보적 의의를 가진 인위적 대변혁을 혁명이라고 정의한다. 이런 의미의 정치적 혁명가를 찾자면, 우리 조선 수천 년 역사에서 이런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을 것이다. 한양의 이씨가 송도의 왕씨를 대체한 것과, 이씨 조선의 이시애, 이괄 등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외형상의 성과 다르지만 두 가지 다 정권찬탈을 위한 행위에 불과하다. 이런 것들은 내란이나 역성이라고 부를 수 는 있어도 혁명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다르다. 그는 봉건 세습적인 호족 공화제를 타파하고 정권을 한 곳에 집중함으로써 분권적인 국면을 통일적인 상태로 바꾸었다. 또 반대파는 군주든 호족이든 불문하고 죄다 소탕했다. 그는 영류왕을 비롯해서 수백 명의 관료들을 주살했다. 또한 침략해온 당태종을 격파했을 뿐 아니라, 이를 추격하여 중국 전역을 진동시켰다. 그는 혁명가의 기백을 가지는 데 그치지 않고, 혁명의 능력과 지략까지 갖추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그는 죽기 전에 지혜롭고 유능한 사람을 자기의 후계자로 만들지 못했다. 그래서 조선 만대의 행복을 유지하지 못했다. 불초한 자식들에게 대권을 맡기는 바람에 결국 성과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그는 야심은 많았지만 덕은 부족했던 것 같다. 하지만 역사 기록이 없는 탓에 오로지 적국의 붓으로 전해지는 기록만을 갖고 연개소문을 논평해야 하기 때문에, 그에 관한 사실의 전말을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 점 하나로 전모를 논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노예적인 사대주의 역사가들은 좁쌀과 팥알처럼 작은 자기 눈알에 보이는 대로 연개소문을 수백 년간 혹평해왔다. 그들은 ‘신하는 충성으로써 군주를 섬겨야 한다’는 불완전한 도덕률로 그의 행위를 탄핵하고 ‘대국을 섬기는 소국은 하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노예적 심리로 그의 공적을 부인했다. 이런 식으로 역사 인물의 시체를 한 점 살도 남지 않도록 씹어버린 것에 대해 나는 통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