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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한입 더 - 철학자 편
데이비드 에드먼즈 & 나이절 워버턴 지음, 노승영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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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철학 한입 더, <맛보고 싶은 철학>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철학이라는 학문은 딱딱하고, 접근하기 힘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철학이라는 학문을 접근하게 해주는 책들이 철학입문서인데, 철학 한입 더 라는 책은 철학입문서로 아주 적합한 것 같다. 우리가 철학을 접근하기 어려운 이유는 철학 용어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고, 과거 고대철학부터 현대철학까지, 철학자들의 철학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철학을 입문하기에, 무리가 있다면, 입문서를 읽고 도전하면 좋을 것이다.

 

 

우선, <철학 한입 더>의 장점으로는, 질문과 대답 형식으로 책이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지금 현재 철학을 가르치고 있거나, 연구자인 분들을 모시고 팟캐스트를 진행한 내용을 가지고 편집해서 책을 출간하였다. 문체가 문답체로 되어 있어서 이해하기가 쉽고, 팟캐스트를 진행하면서 청취자들이 궁금해 하는 점에 대해서 적절한 질문을 했기에 더 유익한 것 같다. 내가 읽은 서양철학사에 대한 입문 책으로는 <소피의 세계>가 있는데 이 책은 소설을 기반으로 한 철학 입문서이다.

 

 

<소피의 세계>에서는 아버지가 딸에게 철학사에 대해서 고대철학부터 현대철학까지,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데, <철학 한입 더>에서도 마찬가지로, 청취자를 고려해서, 최대한 눈높이를 맞추었다는 것에 의의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철학입문서는 현대철학에서 약간 아쉬운 점이 많다. 현대철학에 오면, 서술이 조금 빈약하고, 현대철학은 배제되고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학 한입 더>에서는 실용주의와 실존주의 그리고 분석철학과 포스트구조주의 학자까지 기술되어 있어서 유익했다. 기존의 입문서는 사실, 실존주의까지 기술되어 있는 책들이 많지만, 그 이후에는 빈약한 것이 사실이다.

 

 

철학사 2500년을 한 눈에 알아보기 쉽게 책으로 구성한 것이 마음에 든다. 저자가 그 이전에 책을 출간했던 <철학 한입>도 관심이 가는데, 한 번 읽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철학 한입에서는 철학사를 서술하기 보다는 윤리학, 정치학, 미학, 인생론에 대해서 다루는 것 같은데, 이 모든 학문이 사실 철학을 기반으로 다져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오히려, <철학 한입 더>가 먼저 출간되고, <철학 한입>이 그 이후에 출간 되어야 순서가 맞는 것 같은데, 어쨌든 두 책 모두 좋은 책인 것은 확실하다.

 

 

<서평단으로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리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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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의 가장자리에서 -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 세계문학을 둘러싼 대논쟁 우리 시대의 주변 횡단 총서 6
김경연.김용규 엮음 / 현암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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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의 가장자리에서

 

세계문학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세계문학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는 이유 중에 하나는, 세계시장에 대한 확대도 있겠지만, 출판시장에서 모두가 앞 다투어 세계문학전집을 출간하기 때문인 것 같다. 세계문학 전집 시장을 보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성공으로 인해, 다른 출판사들도 뒤늦게 시장에 뛰어들기 시작하는 형국이다. 세계문학 전집의 대표주자로 민음사가 있지만, 그 뒤로 문학동네, 열린책들, 을유문화사, 웅진(펭귄클래식), 문예출판사, 시공사, 창비, 대산세계문학총서 등, 내가 아는 출판사를 제외하고도 수십 종에 달할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문학전집을 왜 이렇게 출판시장에서 서로 출간하려고 하는지에 생각해보니, 우선 작가에 대한 인세가 들지 않고, 좋은 번역자만 있으면, 출간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작가 사후 50년이 지나면, 저작권이 말소되기 때문에, 출판사 재량으로 책을 번역해서 출간할 수 있다. 이러한 이점을 활용하여, 많은 출판사들이, 국내외의 새로운 작가들을 발굴하는 노력을 하기보다는, 우리가 고전이라고 알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다시 출간하는데 집중하는 것 같다.

 

물론 개인이 외국어 능력이 출중하면, 프로젝트 구텐베르크라는 사이트에서 영문 원본을 구해서 볼 수 있다. 하지만, 외국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많지 않기에, 좋은 번역본을 보고 싶은 열망이 강하다. 이 책은 3부작으로 되어있다. 세계문학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1부,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이라는 주제의 2부, 아시아문학과 세계문학이라는 3부로 이루어져 있다. 세계문학론을 최초로 제시한 인물은 괴테인데, 그러한 세계문학론을 발전시킨 내용이 이 책에 담겨져 있다. 우선 1부에서는 세계문학이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실 19세기~20세기에만 해도, 세계라는 지역이 사실, 서구유럽과 미국에 한정되어 있던 것 같다. 제국주의적 패권다툼과 식민지 개척으로 인해, 많은 나라들이(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 식민지였고, 세계의 주권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서구유렵과 미국밖에 없었다.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난민이란, 국민의 권리뿐만 아니라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누릴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런 난민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식민지 국가에서, 세계문학적 헤게모니를 장악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서양에 대한 동양에 잘못된 인식, 오리엔탈리즘적인 인식을 깨부수기엔 아직 부족한 것일까? 세계문학전집이라고 만든 출간작품들 중에 한국문학작품이 안 들어간 출판사들이 많다. 한국문학을 세계문학에 넣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세계문학전집의 개념을 외국문학전집이라고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한국에서 한국문학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데, 세계문학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사실 1부에서 제시하는 문제점은, 시간이 흐르면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한다. 서구 유럽의 문학의 기득권은, 남미 문학, 아시아 문학, 아프리카 문학의 발전으로 인해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 책에서도, 세계문학의 가치를 인정하게 해준 작가를 루쉰으로 꼽는다. 유럽에서 루쉰의 책들이 번역되고 읽히게 되자, 유럽중심의 오리엔탈리즘적인 사고를 버리자고 하는 목소리가 나왔다고 한다. 현재, 노벨문학상도 서구유럽 뿐만 아니라, 아시아, 남미 지역 등에서 나오고 있으니, 세계문학의 시대를 열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2부에서 제시하는 문제점은 해결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많이 든다. 한국문학이 더욱 더 발전하려면, 외국에서도 읽어야 하는데, 한국의 베스트셀러 목록에서도 한국작품이 외국문학에 밀리는 것이 사실이다. 일부 스타 작가들의 선전이 보이긴 하나, 무라카미 하루키, 파울로 코엘료, 알랭 드 보통 등, 한국에서 잘나가는 작가들이 책을 출간하면, 여지없이 베스트셀러 1위의 자리를 내준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한국 시장을 비판해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아니면, 한국 문학을 이끌어가는 작가님들이 비판받아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 책의 2부에서 보면, 한국문학과 무라카미 하루키와 세계문학이라는 주제의 글이 나온다. 이 주제에서 보면 우리나라 대부분의 작가들이 하루키를 언급하는 것을 꺼린다고 한다. 기존의 한국의 작가들이 하루키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아서, 신인 작가들조차 하루키에 대한 언급을 꺼리는 것이다. 하지만, 하루키적 문학세계를 비판하기에는, 하루키가 이루어낸 것이 너무 많다. 노벨문학상을 받기 직전에 상인, 카프카상, 예루살렘상을 수상했고, 작품을 내면, 세계문학시장의 대부분을 휩쓴다.

 

로쟈 이현우님은 세계문학을 네 가지 범주로 정의했다. 나 역시도 이 범주가 어느정도 맞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첫째, 세계 각국의 문학을 한국문학에 상대하여 이르는 의미, 즉 ‘해외 문학’ ‘외국문학’으로서의 세계문학, 둘째, 오랜 시간에 걸쳐 인류에게 읽히는 문학으로서의 세계명작 혹은 고전을 뜻하는 세계문학, 셋째, 개별 국가의 국민문학(민족문학) 속에서 보편적인 인간성을 추구한 문학, 곧 괴테가 정의한 ‘세계문학’, 마지막으로는 새로운 유형의 세계문학, 즉 세계 시장에서 통하는 문학,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를 가리키는 세계문학이다. 하루키가 인정받은 부분은 셋째와 넷째의 범주라고 본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에 이르고 많은 독자에게 읽히고 있으며, 그러한 보편적인 문학적 가치를 세계 여러 문학상을 수상하여 인정받았다. 이런데도 단순히 하루키를 비판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지 않나 싶다. 한국문학이 발전하려면, 어떠한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지는 독자로서는 잘 모르겠지만, 앞으로의 한국문학이 발전하기를 기원한다.

 

3부에서 나오는 동아시아와 세계문학에 대해서는 식민지 국가의 비참함을 들어낸다. 서발턴이라 불리는 여성들의 비참한 참상과 식민지배 시절에 받았던 고통에 대해서 문학적으로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단순히 문학이란 작품을 읽고 즐거움을 느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있는 문제에 대해서 사유하고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에도 의의가 있는 것 같다. 이 책의 3부에 나오는 제3세계 페미니즘과 서발턴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변영주 감독이 만든 나눔의집이라는 영화에 대해서 나온다. 이 영화는 강제 종군위안부에 대한 실상과 할머니들이 평생 고통받아온 역사에 대해 그린다. 이 영화를 만든 변영주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할머니’들의 아픔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는 있다. 이해할 수 있는지 없는지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3부에서 세계문학의 의의는 전 지구적 공동체 세계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세계문학의 자본주의적 시장 확대뿐만 아니라 인류애의 가치도 확산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서평단으로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리뷰임>

 

http://blog.naver.com/young92022/220182050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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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만들다 - 특별한 기회에 쓴 글들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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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만들다. <특별한 기회에 쓴 글들>

 

적은 만들다는 다양한 칼럼들의 집합이다. 각각의 소주제들을 합쳐 14개의 칼럼들을 수록해 놓은 이 책은 작가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나 보여준다. 현존하는 최고의 지성으로 불리는 에코의 진면모를 보여준다.

 

각 주제별로 철학, 역사, 기호학, 미학, 천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해 에코가 평해놓은 글들을 읽다보면 놀라 수밖에 없다. 한 분야에 대해서 해박하기도 힘든데, 전 분야에 대해서 자세히 안 다는 것은, 저자가 모든 분야에 대해서 끊임없이 공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든 칼럼이 다 흥미로우나, 내용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가장 재밌게 읽은 5개의 칼럼을 골라서 리뷰를 쓰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지리학과 천문학의 발전을 다룬 <상상 천문학>과 속담을 행복의 최고의 원칙으로 규정한 유토피아에 대해 고찰한 <속담따라 살기>도 재미있었으나, <적을 만들다>, <절대와 상대>, <불꽃의 아름다움>, <천국의 아름다움>, <오, 빅토르 위고! 과잉의 시학>이라는 주제들에 대해 쓰게 되었다.

 

■적을 만들다.

적을 만들다라는 칼럼에서는 우리가 다름의 차이를 차이로 인정하지 않고, 차별해 온 역사에 대해 서술한다. 단순히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외국인, 흑인, 유대인, 여성, 나병환자, 이주민들에 대해 적으로 규정해 온 역사들을 보여준다. 우리는 왜 적을 만들까? 나와 타인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적으로 규정해야 하는가에 대해 물음을 던지게 된다. 자신도 모르게, 타인을 적으로 만들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와는 다르다는 이유로, 타인이 자신에게 해를 가한다는 확신도 없이 단순히 적을 만들어 왔다면 이러한 문제에 대해 한번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적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치 체계를 측정하고 그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그것에 맞서는 장애물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따라서 적이 없다면 장애물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따라서 적이 없다면 만들어 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p13)

 

적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문명화의 과정을 거치면서도 적의 형상을 지워 버리지 못했다. 평화를 사랑하는 온순한 사람에게도 적의 필요성은 본능적이다. 이 경우 적의 이미지는 인간이라는 대상에서 자본주의 착취나 환경 오염, 제3세계의 빈곤 문제 등을 비롯한, 어떻게 해서든 우리를 위협하고 망가뜨리는 자연적인 힘으로 단순하게 이동된다. (p35)

 

른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다름을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않는 것이자 우리의 고정 관념을 파괴하는 것이다. (p36)

 

이와 관련해 장 폴 사르트르는 희곡 「닫힌 방」에서 가장 비관적인 시각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의 현존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 자신을 인식할 수 있으며, 여기에 근거하여 공존과 순응의 규율들이 세워진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서 못마땅한 구석을 더 쉽게 발견한다. 그들은 우리와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적으로 만들고 지상에다 산 자들의 지옥을 건설한다. 사르트르의 작품에서 3명의 남녀는 죽은 뒤에 출구가 없는 한 방에 갇히게 된다. 바로 가장 끔찍한 지옥은 그들 서로라는 것, 즉 타인이 지옥이라는 것이다. (p40)

 

■절대와 상대

절대와 상대라는 칼럼에서는 저자가 절대적 진리에 대한 인식과 상대주의자들의 대립에 대해 서술한다. 과연 에코가 모르는 분야가 어디까지일까 의심되어 진다. 절대와 상대에 대한 철학적 개념과 문화상대주의와 윤리상대주의에 대한 사조와 ‘사실이란 없고 해석만 있다‘라는 니체 사상에 대한 비판까지, 괜히 최고의 지성이라 불리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철학 사전에 따르면, 절대라는 말은 연결이나 경계에서 자유로운, 얽매이지 않는 모든 것을 뜻한다. 즉 다른 것에 종속하지 않고 그 자체로 이유와 근거를 가지며 설명되는 무엇이다. 따라서 신이 <나는 존재하는 자다>라고 밝힌 의미에서 볼 때, 절대는 신과 매우 유사한 무엇이다. 그 외의 나머지는 모두 우연적이며 그 자체로 존재의 필연성, 이유와 근거를 가지지 못한다. (p42)

 

일부 철학 사전은 우리에게 인식 상대주의의 존재를 알려 준다. 인식 상대주의에 따르면 사물들을 인간의 능력이 미치는 조건 아래에서만 인식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에서는 칸트 역시 상대론자 였을 것이다. 분명히 그는 보편적 가치의 법규들을 설계하는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그는 도덕적인 이유에서 신을 믿었다. 반면 다른 철학 사전을 보면, 상대주의는 <지식과 행동의 영역에서 절대적인 원리를 거부하는 것>은 각기 다른 문제다. (p56)

 

<사실이란 없고 해석만 있다>라는 이론은 프리드리히 니체가 주장한 것으로, 그의 소논문 「비 도덕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거짓에 관하여」에서 아주 명료하게 설명되었다. 자연은 열쇠를 버렸기 때문에 사고는 진리라고 부르는 개념상의 허구 위에서 작용한다. 우리는 나무와 색깔 눈과 꽃에 대해 말한다고 믿지만, 그것들은 본래의 실체가 아닌 은유들이다. 가지각색의 나뭇잎들을 생각해 볼 때, <우리가 서투른 손으로 엮고, 묘사하고, 측정하고, 물들이고, 둥글게 말고, 색칠하는 모든 나뭇잎의 전형이 되는> 최초의 나뭇잎은 존재하지 않는다. 새나 곤충은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지각한다. 그리고 어떤 지각이 더 적절한지 가리는 일은 의미가 없다. <정확한 지각>의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자연은 <그 어떤 형태나 개념도 인식하지 않는다. 따라서 어떤 부류에도 속하지 않으며 다만 우리가 도달할 수 없고 정의할 수 없는 X일 뿐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공허한 자연이 잊어버린 환영들>이 지식으로 정착된 시적 창작물들의 <은유와 환유, 의인화의 떠다니는 무리>가된다. (p65)

 

■불꽃의 아름다움

불꽃의 아름다움에서는, 불에 대한 신학적, 철학적, 미학적, 연금술, 문학적인 해석으로 불에 대해 고찰한다. 한 가지 형태에 대해서 많은 분야에 대해서 고찰하므로 불에 대해 여러 가지를 느낄 수 있다. 불은 우리에게 천국의 환희를, 지옥의 불꽃으로 죄의 형벌을, 문학에서는 아름다움을 현대문명에서는 이로움을 상징한다. 저자는 마지막에 불은 신들의 권한으로 남겨 뒀어야 했을지도 모른다며 현 시대에 대해 비판한다. 우리 인류는 불이 주는 이로움을 누리며, 생태계를 파괴했으며, 인간의 현존뿐만 아니라 지구의 실존마저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문명의 시발점으로 시작되는 불을 마구잡이로 사용한 대가는 언제가 치르게 될 것이다...

 

드높은 빛의 깊고 투명한 실체 안에서

빛깔은 셋, 부피는 하나인

세 개의 둘레가 내 눈에 보였는데

 

마치 무지개에서 무지개처럼

하나가 다른 하나에서 반사되는 듯 보였고

셋째 것은 그 둘이 골고루 발산하는 불꽃 같았다. (「신곡」 천국편, 제33곡, 115~120) (p80)

 

하지만 인류는 냄새와 맛, 소리에 대한 애착과 감촉이 주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을 것이며, 마찰을 통한 불의 생산도 단념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불은 아주 가끔 번갯불의 형태로만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신들의 권한으로 남겨 뒀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p102)

 

■천국 밖의 배아들

이 주제에서는, 저자가 낙태와 줄기세포 배아를 비롯한 생명 보호 문제에 대해서, 스콜라 철학의 대부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적 해석을 논한다. 태아가 인간의 존재로 인정받는데 어떠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보여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성의 영혼을 가진 존재만이 인간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태아는 단지 감성적인 영혼만을 가진다고 한다. 태아는 인간으로 인정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토마스 아퀴나스적인 해석에 따르면, 낙태와 줄기세포 배아에 대해 허용해도 되는 것인가에 대해 저자는 고찰하고 있다. 가톨릭에서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추앙하면서도, 태아의 문제에 대해서는 멀리한다는 것에 대해서 흥미로운 소재가 아닐 수 없다.

 

 

아퀴나스는 태아의 형성을 아주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보았다. 신은 태아가 단계적으로 먼저 식물의 영혼을 흡수하고 이후 감성의 영혼을 획득했을 때 비로소 이성의 영혼을 전하기에, 육체가 이미 형성된 그 지점에서 이성을 갖춘 영혼이 생성된다. 따라서 태아는 단지 감성적인 영혼만 가진다. 철학자는 배아가 처음에는 동물이었다가 나중에 인간이 된다고 가르친다. 만약 감성적인 영혼의 본질과 이성적인 영혼의 본질이 같은 것이라면 그렇게 될 리가 없다. 감성의 영혼에 의해 동물이 되고 인간은 이성의 영혼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감성의 영혼과 이성의 영혼의 본질은 같은 것이 아니다. (p135)

 

그렇다면 태아 형성의 어느 단계에서 온전한 인간을 만드는 이성적인 영혼이 주입될까? 전통 교리는 이 점에 관해 아주 신중한 자세를 취했으며, 대체로 임신 40일 이후라고 전해졌다. 아퀴나스의 경우, 태아의 육체가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에 영혼이 깃든다고만 언급하였다. (p139)

 

■ 오, 빅토르 위고! 과잉의 시학

저자가 빅토르 위고의 작품세계를 설명해주는 칼럼이다. 빅토르 위고의 대표적인 작품<노트르담 드 파리, 93년, 웃는남자, 레미제라블>들을 가지고, 위고의 작품들을 접해보지 못한 독자들에게 흥미롭게 설명해준다. 기존의 문학에서는 추함이란 전형적인 악인의 형태였다. 하지만 위고는 추함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다. 노르트담 드 파리에서 역겨운 외모의 콰지모드를 섬세한 영혼과 위대한 사랑의 감성의 인물로 바꾸어 놓는다. 웃는 남자의 그윈플레인은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정치적 보복으로 인해 평생 웃기만 하는 불행한 얼굴을 가지게 된다. 추함으로 인해 불행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위고는 순수한 영혼과 무한한 사랑의 소유자로 바꾸어 놓는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은 웃는남자의 결말이 스포일러 된다는 것이지만, 웃는 남자를 당장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빅토르 위고의 문학세계의 빠져들게 하는 에코의 평론은, 에코가 평론에도 굉장한 실력가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책에서 들려주는 이야기, 위고의 문체상의 선택, 그리고 읽기와 해석(우리의, 그리고 다른것들의)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떠올리는가? 역사가들이 이 책에서 시대착오적인 발상과 용납할 수 없는 방종을 발견했다는 것?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위고는 역사를 쓰려고 했던 게 아니라, 역사의 숨 가쁜 호흡과 악취가 진동하는 포효를 우리가 느끼길 바랐다. 그가 계급 투쟁에 대한 이해보다 개개인의 도덕적인 투쟁에 더 관심을 뒀다고 생각했던 마르크스처럼 위고는 우리를 속이려고 했을까? 오히려 그 반대고, 그도 그렇게 말했다. 위고는 우리에게 투쟁의 위력을 전하기 위해 도끼날을 가지고 그의 심리적인 초상화들을 조각하였다. 그가 계급 투쟁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면, 헝가리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카치가 인식한 것처럼, <미래의 길을 여는 혁명적 민주주의>의 이상들을 분명히 추구했을 것이다. (p180)

 

<서평단으로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리뷰임>

 

http://blog.naver.com/young92022/220146947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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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히스토리 - 한 권으로 읽는 모든 것의 역사
데이비드 크리스천 & 밥 베인 지음, 조지형 옮김 / 해나무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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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히스토리를 읽게 되었다. 이 책에서는 모든 것에 대한 역사를 한 권의 책으로 조망한다.

우주가 어떻게 탄생했으며, 지구의 탄생, 그리고 인류의 탄생까지, 거대한 흐름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동시에 이 광활한 우주에서 나란 존재가 얼마나 작은 것인지, 137억년의 빅 히스토리에서 인류의 역사는 얼마나 조금 차지하는지를..

 

책에서는 8가지 임계국면을 설정하여, 빅 히스토리의 주요 흐름을 알려준다.

1. 빅뱅(137억 년 전)

2. 별의출현(135억 년 전)

3. 새로운 원소의 출현(135억 년 전)

4. 태양계와 지구(45억 년 전)

5. 지구 상의 생명(38억 년 전)

6. 집단학습(20만 년 전)

7. 농경(11000년 전)

8. 근대 혁명(250년 전)

 

임계국면이란?

어떤 현상이 다르게 나타나기 시작하는 지점 혹은 경계. 빅 히스토리에서는 새로운 현상이나 물질이 나타나는 지점 혹은 시기를 의미한다.

 

이 책의 서술은 독특하다. 데이비드 크리스천, 밥 베인 교수가 직접 강의를 하듯이 서술되어 있다. 독자에게 직접 물음을 던지거나, 아니면 그에 따른 답을 해주거나.

 

우리는 주장에 대한 신뢰도를 어떻게 파악할까?

 

빅 히스토리는 직관, 권위, 논리, 증거라고 말한다.

 

직관 : 본능적인 느낌, 우리가 그냥 그녀가 우리에게 옳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느꼈을 때의 느낌. 감정에 근거한 빠른 판단과 관련된 느낌

 

권위 : 우리가 신뢰할 만한 출처에서 정보를 얻게 되었을 때

 

논리 : 어떤 것에 대해 사고함으로써 주장을 테스트해보고 그것이 납득이 되는지를 파악하는 것

 

증거 : 이 세상에 대한 가능한 정보를 수집할 때, 어떤 것의 진위를 파악할 수 있는, ‘분명한것으로부터 유래하는 것. 빅 히스토리 카페 이야기에서, 우리는 각자 다른 출처에 근거하여 증거를 파악했고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신뢰했다.

 

이러한 방법을 이용하여, 빅 히스토리를 읽어보도록 하자.

 

이 책은 우주에 역사에 비하면, 우리의 역사가 얼마나 하찮은지를 깨닫게 해준다. 그리고 우리에게 계속 물음을 던진다. 그에 대한 답은 나와 있지는 않고 스스로 찾도록 한다.

우리나라의 교육은 이미 정해진 답을 찾는 것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입시까지, 객관식 문항에서 정해진 답을 골라내는 것이다.

 

하지만, 빅 히스토리는 그렇지가 않다. 역사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새로운 증거가 나타나거나 혁신이 일어나면 우리는 기존의 역사를 깨고 새로운 역사를 인정해야만 한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천동설에서, 지구가 태양계를 공전하는 일계 행성에 불과하다는 지동설을 믿게 되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는지를 안다.

 

이렇게 정해진 답만을 고르는 풍토 속에서, 새로운 것을 인정하지 않는 병폐속에서, 빅 히스토리와 같은 학문이 정착된다면, 기존의 교육의 틀도 바뀌지 않을까?

 


 

<책에 있는 사진과 그림들은 빅 히스토리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돕는다.>

 


 

<한 챕터가 끊날 때마다,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물론 답은 없지만,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연습을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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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 - 출간 50주년 기념판
에리히 프롬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ing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은 단순히 이성을 유혹하기 위한 Skill을 담고 있는 책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단순히 사랑이라면, 남녀간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랑이란 이성과의 사랑 뿐만 아니라, 부모애, 자기애, 형제애, 성애, 신앙심도 포함되어야 한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에 대한 세 가지 오류를 말한다.

 

첫째,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곧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받는문제로 생각한다. 사랑의 문제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고 여기는 것이다. 자신이 사랑할 줄 아는 능력보다는, 사랑받길 원하는 대상이 되길 원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말하면, 사랑을 할 줄 모르는데, 사랑받길 원한다는 것이다.

 

 

둘째, 사랑을 교환가치로 평가한다. 진열장에 올려져 있는 물건처럼 자신의 외적인 가치를 높이면, 사랑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자신을 매력적으로 포장하고, 사교적이고 관대해지면 더 교환가치가 높은 대상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자기 자신의 교환가치의 한계를 고려하면서 서로 시장에서 살 수 있는 최상의 대상을 찾아내어, 오로지 조건만을 보고 사랑에 이른다는 것이다.

 

 

셋째, 사랑을 하게 되는최초의 경험과 사랑하고 있는지속적 상태, 혹은 좀 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사랑에 머물러있는 상태를 혼동한다는 것이다. 남남으로 지내오던 두사람이 갑자기 벽을 허물고 일체라고 느낄 때, 가장 격앙된 경험일 수 있으나, 이러한 성적매력과 성적 결합에 의해 시작되는 사랑은 본질적으로 지속될 수 없다. 이러한 강렬한 열중은, 곧 서로 미쳐버리는것을 열정적인 사랑의 증거로 생각하지만, 그들이 서로 만나기 전에 얼마나 스스로가 외로웠는가를 입증할 뿐이다.

 

 

그럼 우리에게 해답은 무엇인가

 

첫째,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란, 본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준다고 하는 영역은 물질적인 영역이 아니라, 인간적인 영역에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주는 것은 자기 자신이 갖고 있는 것 중 소중한 것을 준다는 것이다. 자신의 기쁨, 자신의 관심, 자신의 이해, 자신의 지식, 자신의 유며, 자신의 슬픔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모든 표현과 현시를 주는 것이다. 받으려고 주는 것이 아니다. 주는 것 자체가 절묘한 기쁨이기 때문이다.

 

 

둘째,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에게 그대가 필요하다. 어린아이의 사랑은 나는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원칙에 따르고, 성숙한 사랑은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받는다는 원칙에 따른다. 성숙하지 못한 사랑은 그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는 원칙에 따른다. 이기적인 사랑은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을 따르고, 타인에 대한 욕구와 흥미는 관심은 없고, 오로지 받기만을 원한다. 우리는 사랑을 주는 법도 알아야한다. Take And Give가 아닌, Give And Take가 되어야 한다.

- 요약-

 

 


 

 

흥미로운점. 

 

사랑의 책임에 대한 예로 구약성서 요나서를 들은 부분이다. 하느님이 요나에게, 니느웨의 주민들에게 가서 악행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전도하라고 명령했지만, 요나는 니느웨의 주민들이 뉘우치고 하느님에게 용서를 받을 것을 두려워 전도하지 않은 것이다. 강력한 처벌과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랐던 요나는 니느웨의 주민들에 대한 자비와 용서를 원치 않아, 책임을 지지 않고 전도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성경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이러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물론 요나는 결국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만, 오로지 하느님의 성령을 받은 자들은, 전부다 말을 듣고 행하는 줄 알았는데, 정의가 행해지지 않을까, 두려워서 행하지 않은 것을 보고, 정의의 실현과, 용서와 자비에 대한 갈등이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도 계속 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감상평.

 

 

사랑을 단순히 값싼 보상심리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당신에게, 무엇인가 해주었으니, 당신도 나를 위해 그 무엇을 달라.” 이렇게 사랑을 하기 시작하면 사람은 피곤해질 수밖에 없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어떤 무엇을 했다면, 무엇을 한 행위는 나 자신을 위해서 혹은 원해서 한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엇을 했다는 것에 대한 전제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이벤트를 준비하거나 혹은, 선물을 준다고 해서, 그 대상이, 다시 나에게 돌려주길 바라지 말자.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해하는 모습,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내가 느끼는 만족감 자체가 나를 위해서 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통해 이익을 얻기 원한다면, 단순히 물건을 사고 파는 상행위와 사랑이 다를 바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주는 것을 전제로 하는 사랑을 하기가 쉽지가 않다.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일까, 아니면 아직 성숙하질 못해서 일까 아니면 내가 진심으로 다가가지 못해서 인가 모르겠다. 현재 사랑을 하고 있다면, 내가 현재를 사랑하는 건지, 과거를 사랑하는 것인지, 미래를 사랑하는 것인지, 한번 쯤 고민해봤으면 하는 문제이다. 과거에 대한 좋은 추억만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현재 관계가 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 과거에서만 살아가는 것이다. 또한 미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과의 현재의 관계가 최악이라도, 더 나은 미래가 있을 것이라며, 미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물론 관계의 개선을 위한 노력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현재에만 충실하고 살기에도 힘이 든다. 그러기에 현재의 사랑에 가장 충실한 삶을 살고 싶다.

 

 

또 다른 문제는 내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인지, 사랑을 사랑하는 것인지, 가끔 혼동할 때가 있다. 호감을 갖고 있는 상대에게, 느끼는 설레임을 사랑하는 것인지 정말로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에게 그대가 필요한지를 모르겠다. 사랑을 단순히 내가 외롭기 때문에,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인지, 정말로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지 모르겠다.

 

 

사랑의 기술은, 최고에 지침서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랑은 활동이기에 이론만 가지고 이룰 수 없다. 물고기를 낚는 방법을 많이 안다고 해서, 물고기를 실제로 낚아보지 않으면, 낚시를 잘 할 수 없듯이 사랑하는데 있어서도 개인의 사랑의 실천이 적극적으로 요구되겠지만, 적당한 분량과 버릴 부분이 없는 지침서라고 생각한다.

 

http://blog.naver.com/young92022/220070633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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