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을 만들다 - 특별한 기회에 쓴 글들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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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만들다. <특별한 기회에 쓴 글들>

 

적은 만들다는 다양한 칼럼들의 집합이다. 각각의 소주제들을 합쳐 14개의 칼럼들을 수록해 놓은 이 책은 작가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나 보여준다. 현존하는 최고의 지성으로 불리는 에코의 진면모를 보여준다.

 

각 주제별로 철학, 역사, 기호학, 미학, 천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해 에코가 평해놓은 글들을 읽다보면 놀라 수밖에 없다. 한 분야에 대해서 해박하기도 힘든데, 전 분야에 대해서 자세히 안 다는 것은, 저자가 모든 분야에 대해서 끊임없이 공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든 칼럼이 다 흥미로우나, 내용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가장 재밌게 읽은 5개의 칼럼을 골라서 리뷰를 쓰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지리학과 천문학의 발전을 다룬 <상상 천문학>과 속담을 행복의 최고의 원칙으로 규정한 유토피아에 대해 고찰한 <속담따라 살기>도 재미있었으나, <적을 만들다>, <절대와 상대>, <불꽃의 아름다움>, <천국의 아름다움>, <오, 빅토르 위고! 과잉의 시학>이라는 주제들에 대해 쓰게 되었다.

 

■적을 만들다.

적을 만들다라는 칼럼에서는 우리가 다름의 차이를 차이로 인정하지 않고, 차별해 온 역사에 대해 서술한다. 단순히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외국인, 흑인, 유대인, 여성, 나병환자, 이주민들에 대해 적으로 규정해 온 역사들을 보여준다. 우리는 왜 적을 만들까? 나와 타인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적으로 규정해야 하는가에 대해 물음을 던지게 된다. 자신도 모르게, 타인을 적으로 만들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와는 다르다는 이유로, 타인이 자신에게 해를 가한다는 확신도 없이 단순히 적을 만들어 왔다면 이러한 문제에 대해 한번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적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치 체계를 측정하고 그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그것에 맞서는 장애물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따라서 적이 없다면 장애물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따라서 적이 없다면 만들어 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p13)

 

적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문명화의 과정을 거치면서도 적의 형상을 지워 버리지 못했다. 평화를 사랑하는 온순한 사람에게도 적의 필요성은 본능적이다. 이 경우 적의 이미지는 인간이라는 대상에서 자본주의 착취나 환경 오염, 제3세계의 빈곤 문제 등을 비롯한, 어떻게 해서든 우리를 위협하고 망가뜨리는 자연적인 힘으로 단순하게 이동된다. (p35)

 

른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다름을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않는 것이자 우리의 고정 관념을 파괴하는 것이다. (p36)

 

이와 관련해 장 폴 사르트르는 희곡 「닫힌 방」에서 가장 비관적인 시각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의 현존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 자신을 인식할 수 있으며, 여기에 근거하여 공존과 순응의 규율들이 세워진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서 못마땅한 구석을 더 쉽게 발견한다. 그들은 우리와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적으로 만들고 지상에다 산 자들의 지옥을 건설한다. 사르트르의 작품에서 3명의 남녀는 죽은 뒤에 출구가 없는 한 방에 갇히게 된다. 바로 가장 끔찍한 지옥은 그들 서로라는 것, 즉 타인이 지옥이라는 것이다. (p40)

 

■절대와 상대

절대와 상대라는 칼럼에서는 저자가 절대적 진리에 대한 인식과 상대주의자들의 대립에 대해 서술한다. 과연 에코가 모르는 분야가 어디까지일까 의심되어 진다. 절대와 상대에 대한 철학적 개념과 문화상대주의와 윤리상대주의에 대한 사조와 ‘사실이란 없고 해석만 있다‘라는 니체 사상에 대한 비판까지, 괜히 최고의 지성이라 불리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철학 사전에 따르면, 절대라는 말은 연결이나 경계에서 자유로운, 얽매이지 않는 모든 것을 뜻한다. 즉 다른 것에 종속하지 않고 그 자체로 이유와 근거를 가지며 설명되는 무엇이다. 따라서 신이 <나는 존재하는 자다>라고 밝힌 의미에서 볼 때, 절대는 신과 매우 유사한 무엇이다. 그 외의 나머지는 모두 우연적이며 그 자체로 존재의 필연성, 이유와 근거를 가지지 못한다. (p42)

 

일부 철학 사전은 우리에게 인식 상대주의의 존재를 알려 준다. 인식 상대주의에 따르면 사물들을 인간의 능력이 미치는 조건 아래에서만 인식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에서는 칸트 역시 상대론자 였을 것이다. 분명히 그는 보편적 가치의 법규들을 설계하는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그는 도덕적인 이유에서 신을 믿었다. 반면 다른 철학 사전을 보면, 상대주의는 <지식과 행동의 영역에서 절대적인 원리를 거부하는 것>은 각기 다른 문제다. (p56)

 

<사실이란 없고 해석만 있다>라는 이론은 프리드리히 니체가 주장한 것으로, 그의 소논문 「비 도덕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거짓에 관하여」에서 아주 명료하게 설명되었다. 자연은 열쇠를 버렸기 때문에 사고는 진리라고 부르는 개념상의 허구 위에서 작용한다. 우리는 나무와 색깔 눈과 꽃에 대해 말한다고 믿지만, 그것들은 본래의 실체가 아닌 은유들이다. 가지각색의 나뭇잎들을 생각해 볼 때, <우리가 서투른 손으로 엮고, 묘사하고, 측정하고, 물들이고, 둥글게 말고, 색칠하는 모든 나뭇잎의 전형이 되는> 최초의 나뭇잎은 존재하지 않는다. 새나 곤충은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지각한다. 그리고 어떤 지각이 더 적절한지 가리는 일은 의미가 없다. <정확한 지각>의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자연은 <그 어떤 형태나 개념도 인식하지 않는다. 따라서 어떤 부류에도 속하지 않으며 다만 우리가 도달할 수 없고 정의할 수 없는 X일 뿐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공허한 자연이 잊어버린 환영들>이 지식으로 정착된 시적 창작물들의 <은유와 환유, 의인화의 떠다니는 무리>가된다. (p65)

 

■불꽃의 아름다움

불꽃의 아름다움에서는, 불에 대한 신학적, 철학적, 미학적, 연금술, 문학적인 해석으로 불에 대해 고찰한다. 한 가지 형태에 대해서 많은 분야에 대해서 고찰하므로 불에 대해 여러 가지를 느낄 수 있다. 불은 우리에게 천국의 환희를, 지옥의 불꽃으로 죄의 형벌을, 문학에서는 아름다움을 현대문명에서는 이로움을 상징한다. 저자는 마지막에 불은 신들의 권한으로 남겨 뒀어야 했을지도 모른다며 현 시대에 대해 비판한다. 우리 인류는 불이 주는 이로움을 누리며, 생태계를 파괴했으며, 인간의 현존뿐만 아니라 지구의 실존마저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문명의 시발점으로 시작되는 불을 마구잡이로 사용한 대가는 언제가 치르게 될 것이다...

 

드높은 빛의 깊고 투명한 실체 안에서

빛깔은 셋, 부피는 하나인

세 개의 둘레가 내 눈에 보였는데

 

마치 무지개에서 무지개처럼

하나가 다른 하나에서 반사되는 듯 보였고

셋째 것은 그 둘이 골고루 발산하는 불꽃 같았다. (「신곡」 천국편, 제33곡, 115~120) (p80)

 

하지만 인류는 냄새와 맛, 소리에 대한 애착과 감촉이 주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을 것이며, 마찰을 통한 불의 생산도 단념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불은 아주 가끔 번갯불의 형태로만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신들의 권한으로 남겨 뒀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p102)

 

■천국 밖의 배아들

이 주제에서는, 저자가 낙태와 줄기세포 배아를 비롯한 생명 보호 문제에 대해서, 스콜라 철학의 대부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적 해석을 논한다. 태아가 인간의 존재로 인정받는데 어떠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보여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성의 영혼을 가진 존재만이 인간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태아는 단지 감성적인 영혼만을 가진다고 한다. 태아는 인간으로 인정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토마스 아퀴나스적인 해석에 따르면, 낙태와 줄기세포 배아에 대해 허용해도 되는 것인가에 대해 저자는 고찰하고 있다. 가톨릭에서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추앙하면서도, 태아의 문제에 대해서는 멀리한다는 것에 대해서 흥미로운 소재가 아닐 수 없다.

 

 

아퀴나스는 태아의 형성을 아주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보았다. 신은 태아가 단계적으로 먼저 식물의 영혼을 흡수하고 이후 감성의 영혼을 획득했을 때 비로소 이성의 영혼을 전하기에, 육체가 이미 형성된 그 지점에서 이성을 갖춘 영혼이 생성된다. 따라서 태아는 단지 감성적인 영혼만 가진다. 철학자는 배아가 처음에는 동물이었다가 나중에 인간이 된다고 가르친다. 만약 감성적인 영혼의 본질과 이성적인 영혼의 본질이 같은 것이라면 그렇게 될 리가 없다. 감성의 영혼에 의해 동물이 되고 인간은 이성의 영혼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감성의 영혼과 이성의 영혼의 본질은 같은 것이 아니다. (p135)

 

그렇다면 태아 형성의 어느 단계에서 온전한 인간을 만드는 이성적인 영혼이 주입될까? 전통 교리는 이 점에 관해 아주 신중한 자세를 취했으며, 대체로 임신 40일 이후라고 전해졌다. 아퀴나스의 경우, 태아의 육체가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에 영혼이 깃든다고만 언급하였다. (p139)

 

■ 오, 빅토르 위고! 과잉의 시학

저자가 빅토르 위고의 작품세계를 설명해주는 칼럼이다. 빅토르 위고의 대표적인 작품<노트르담 드 파리, 93년, 웃는남자, 레미제라블>들을 가지고, 위고의 작품들을 접해보지 못한 독자들에게 흥미롭게 설명해준다. 기존의 문학에서는 추함이란 전형적인 악인의 형태였다. 하지만 위고는 추함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다. 노르트담 드 파리에서 역겨운 외모의 콰지모드를 섬세한 영혼과 위대한 사랑의 감성의 인물로 바꾸어 놓는다. 웃는 남자의 그윈플레인은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정치적 보복으로 인해 평생 웃기만 하는 불행한 얼굴을 가지게 된다. 추함으로 인해 불행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위고는 순수한 영혼과 무한한 사랑의 소유자로 바꾸어 놓는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은 웃는남자의 결말이 스포일러 된다는 것이지만, 웃는 남자를 당장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빅토르 위고의 문학세계의 빠져들게 하는 에코의 평론은, 에코가 평론에도 굉장한 실력가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책에서 들려주는 이야기, 위고의 문체상의 선택, 그리고 읽기와 해석(우리의, 그리고 다른것들의)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떠올리는가? 역사가들이 이 책에서 시대착오적인 발상과 용납할 수 없는 방종을 발견했다는 것?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위고는 역사를 쓰려고 했던 게 아니라, 역사의 숨 가쁜 호흡과 악취가 진동하는 포효를 우리가 느끼길 바랐다. 그가 계급 투쟁에 대한 이해보다 개개인의 도덕적인 투쟁에 더 관심을 뒀다고 생각했던 마르크스처럼 위고는 우리를 속이려고 했을까? 오히려 그 반대고, 그도 그렇게 말했다. 위고는 우리에게 투쟁의 위력을 전하기 위해 도끼날을 가지고 그의 심리적인 초상화들을 조각하였다. 그가 계급 투쟁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면, 헝가리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카치가 인식한 것처럼, <미래의 길을 여는 혁명적 민주주의>의 이상들을 분명히 추구했을 것이다. (p180)

 

<서평단으로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리뷰임>

 

http://blog.naver.com/young92022/220146947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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