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키 선생님 1 세미콜론 코믹스
다케토미 겐지 지음, 홍성필 옮김 / 세미콜론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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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1.

     어떻게라는 게 뭔가요? 그건, 편식을 고칠 수 없으면서도 탕수육 폐지 반대에 손을 드는 학생과 같지 않나요? 강제력이 없는 지금의 우리는 매우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 한 가지 메뉴가 이렇게 사라지는 허무함을 그나마 학생들이 느끼도록 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뭔가를 싫어한다는 이유가 다른 사람이나 사회를 마음 아프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네요!

     하지만 싫어하는 쪽도 마음 편하진 않을 거에요. 뭔가를 싫어하는 것도 나약함의 일부죠. 그런 나약함을 들켜버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견디지 못하고 폭발해버릴 거예요.


     내가 아는 어떤 선생님의 이야기다.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을 배웅하는데 한 남자애가 선생님을 불러 세웠단다. 잠깐 얘기 좀 하자고.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수업 시간에 개인적인 의견을 너무 적극적으로 주장하지는 말아달라고 했다고. 그 얘기를 들은 선생님은 "그래, 내가 조금 좌편향 되어 있긴 하지?" 하며 털레털레 웃었다는데.

     선생님이란 게 그런 직업이다. 원래부터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시대에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그렇다. 개인적인 가치관을 아이들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 교육의 범위가 매우 매우 좁아졌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이제는 교과서에 들어있는 지식만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살아보니 어떤 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더라, 이럴 땐 이렇게 하면 좀 쉽게 터널을 통과하게 되더라, 하는 둥의 이야기들은 먹히지도 않고 먹여서도 안 되는 것이다.


     민음사에서 다케토미 겐지의 만화 [스즈키 선생님]을 보내줄테니 리뷰를 해달라고 해서 슬쩍 검색을 해보았다. 솔직히 내 구미에 당기는 그림체도 아니었고 내용도 '병맛'일 것 같았다. 그래서 택배가 왔다고 받아놓고도 한 이틀인가 뜯지 않고 쇼파 위에 던져 놓았었다. 그러다가 어제 새벽 가까워 잠도 안 오고 슬렁슬렁 시간이나 죽이고 싶어서 1권을 펼친다는 게 보내준 4권을 모두 읽고 말았다.


     # 2.

     새로운 세대에서 유행하는 나쁜 풍조는 대부분 전 세대 나쁜 풍조에 대한 안이한 극복이다.


     내 주변의 선생님들이 떠올랐다. 가장 먼저는 고등학교때 문학 선생님. 방송국에서 피디 생활을 하다가 늦게 임용을 보고 교사가 되었다던 그 선생님과 나는 방송부 활동을 하면서 가까워졌다. 문예창작학과 애들을 앉혀놓고 소설이나 시를 가르치면서도 전혀 감수성 풍부한 모습은 보여주지 못했던 그 선생님이 아직까지도 내 맘에 남아 있는 이유는 우리가 함께 보냈던 수업 외 시간들 때문이었다. 문학쌤은 수업이 모두 끝나면 다른 선생님들을 모아 운동장에서 발야구를 하곤 했다.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켜고 그 불빛을 조명 삼아. 야구가 끝날 즈음에는 배달시킨 치킨과 생맥주가 왔다. 나는 그 때만을 기다리며 방송실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선생님들이 발야구를 하는 걸 구경하곤 했다.

     후라이드 치킨과 생맥주를 가운데 두고 둘러앉은 방송부 애들 몇몇과 나와 선생님들. 학생도 아니고 선생도 아니었지만 분명히 배움이 있었던 시간. 그런 시간들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였기 때문에 나는 그분을 진짜 선생님으로 기억하고 있는게 아닐까 생각한다.


     # 3.

     근육의 발달은 그 조직이 적절히 파괴될 만큼 부하를 거는 것과 휴식을 취하는 것의 반복으로 촉진되지. 정신도 마찬가지.


     [스즈키 선생님]에서 스즈키는 대안을 제시한다. 교육의 범위를 고민하고 어떤 식으로 어디를 '가리킬지' 고민한다. 제일은 학생과 상호작용하는 것. 그의 생각에 동의하지 못하는 학생들과도 계속해서 소통하는 것. 만화를 읽는 내내 학생이나 스즈키 양쪽 모두 서로에게 집중하고 반응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교사는 학생의 한 모습만 보고 전체를 판단해서는 안 되는데, 스즈키가 그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매우 노력하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스즈키 선생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여타 만화들이 선택하는 패러디나 개그와는 다르다. 오히려 문제상황에 정면으로 들어가 인물의 갈등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때문에 만화를 본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읽는다는 느낌이 든다. 인물들의 표정이 다소 우중충하고 우울하게 그려져 있는 것도 그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껄끄러운 문제를 만나도 고개를 돌리지 않는 것. 교사가 가져야 할 진짜 태도가 아닐까.


     # 4.

     자신들에게 귀찮은 일이 닥치는 게 싫은 걸 은폐하는 것처럼 보이는 '교육적 지도'를 설득력 없이,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강요하는데다 그걸 멋지게 일도양단해 주는 것 같은 말까지 함부로 늘어놓다간 아이들은 얼마든지 어른들이 이끄는 길에서 벗어납니다!

     사람은 다양한 '체험'을 통해 육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성장한다. 이건 뭘 먹느냐에 따라 육체가 성장해가는 것과 굉장히 비슷하다. 아니, 마찬가지다. 인간이 입에 넣은 먹을거리의 양, 그것이 체험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인간의 몸은 입에 넣은 것의 영양을 전부 섭취할 수는 없단다. 영양은 컨디션과 음식과의 궁합, 또는 먹을거리의 종류와 조리방법 등 다양한 조건 아래 육체에 흡수되어 몸의 일부가 되는 비율은 아주 크게 바뀐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물론 먹은 양이 아니라 섭취한 양이겠지? 이 섭취한 영양의 양, 그것이 경험이다.


     다케토미 겐지의 이 만화를 읽고 나서 교사나 교육에 대한 생각이 많아진다. 국정교과서로 교육의 관점이 단일화되고 입시위주 커리큘럼으로 교육의 범위가 좁아지는 우리 한국에서 더더욱 만화 [스즈키 선생님]이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기 때문이다. 스즈키는 듣는 학생의 정서가 얼마나 불안한지는 따져보지도 않고 '정론'만을 준비해 쏟아놓는 교육은 죽은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상명하달식으로 전달되는 '교육적 지도'가 귀찮은 일이 닥치는 게 싫은 꼰대들의 교육방식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100% 동의는 할 수가 없다. 교사로서의 한 개인이 완벽한 인격을 가질 수가 없는 마당에 개인적 가치관을 가지고 교육하게 되면 어떤 위험부담에 빠질지 모르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다케토미 겐지의 [스즈키 선생님]이 문제적 작품으로 거론된 것은 아마도 오늘날의 교육에 대해 많은 학생들이 아쉬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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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고백한다 - 존재에 대한 자문을 이끌어내는 논리적이고 사적인 고백 패러독스 13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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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

     이 집단 순응주의는 밀그램의 실험 이전에 이루어진 한 실험, 즉 솔로몬 애시의 실험1에서 자명하게 밝혀진 바 있다. 이 실험은 명백히 하나로 결속된 집단 내부에서 스스로 뭔가 다른 것-어느 모로 보나 그것이 옳은데도-을 생각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었다.

     이처럼 단순히 남들 눈에 띄는 행동을 하는 데 따르는 노력이 범죄적 행동에 가담한다는 확신-양심이 일러주는-보다 우위에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나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확신하기가 어려워지는 총체적 가치 전도 상황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최근 친한 친구가 호주로 워홀을 떠나는 것을 환영(?)하는 자리에서 친일 문인에 대한 이야기가 잠깐 오갔다.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일제 때 문인은 어떠해야 할까? 친일을 한 시인과 그의 작품은 어떻게 관계되어야 할까? 그런 질문들에 이어서 '나라면' 그 당시에 어떻게 행동했을까? 이런 질문들이 머릿속에 마구잡이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피에르 바야르는 그의 책 [나를 고백한다]를 마찬가지 질문 상황에 스스로를 내던짐으로서 시작한다. 즉 인간이 본질적으로 어떻게 존재하며, 그 존재가 각각의 삶에서 어떻게 발휘되는지에 대한 질문인 것이다.

     만일 내가 1900년대에 태어났고 청년기에 한일합병을 맞았다고 가정해 본다면. 창씨개명을 하고 조선인에게 국어(일본어)를 가르칠 것인지 아니면 조선을 떠나 망명해 독립운동을 할 것인지 선택해야만 한다면. 나는 어느 모로 보나 옳은 일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일제에 대해 분명한 거부감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쉽게 독립운동에 참여하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체제에 순응할 수는 없는 성격이면서 동시에 엄살이 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분명 신체적 위협에 대해 큰 두려움을 느낄 것이고 그 걱정 때문에 독립운동에 선뜻 뛰어들 수 없을 것이다.


     #96.

     이념적 대립이 일차적인 조건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정치적 차원의 참여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특히 자기 자신의 삶이 개입될 때는 더욱더 그렇다. 프랑스나 외국에서 이 세계는 매일같이 나에게 내가 완전히 반대한다고 느끼는 많은 상황을 제공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직접 참여해야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실제로 참여가 이루어질 수 있으려면 반대의 수위가 어떤 문턱을 넘어서야 한다. 내가 목도하거나 연루된 상황이 정신적으로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어 참여가 하나의 내적 필연성으로 부과되어야 한다.


     [나를 고백한다]는 어떻게 해서 양자택일의 비율이 어느 한쪽으로 심하게 기우는지 궁금해한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 '어느 모로 보나 옳음이 틀림 없는' 쪽을 선택하는 비율이 이토록 적은지를 역시 궁금해한다. 대답을 얻기 위해서 본인이 30년 일찍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의 상황에 놓여있다고 가정한다. 당시 많은 청년들이 그랬던 것처럼 작가 역시도 상황이 그렇게까지 심각해질 줄은 몰랐다. 물론 불안한 전조가 충분히 두툼하게 공기중에 퍼져 있었지만 그 분위기만으로는 옳고 그름을 주장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점차 일이 돌아가는 것을 뚜렷히 볼 수 있게 된 뒤에도 작가는 참여 진영에 쉽게 나설 수가 없었다. 이념적으로 내가 어느 쪽인지에 대한 답을 내리기는 쉽다. 나도 일제 시대에 청년기를 보낸다고 가정해보면 분명 일제에 대한 거부감을 마음 깊이 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다만 이념적으로 대립된 상황이 곧 참여를 유도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 '분노'가 더해져야 한다. 정신적으로 이 상황을 견딜 수 없다고 판단될 만한 분노.


     내가 1900년대에 태어나 20년 한일합병이 있던 해에 청년기를 맞았다면 나는 분명히 일제에 대한 이념적 적대감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동시에 일어를 국어로 가르치고 언론을 통제하는 상황에 대해 분노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지인들을 잡아다가 죽이고 정치범으로 끌고가 갖은 고문을 일삼는 행태에 대해서도 치를 떨며 분노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나는 참여 진영에 나설 수 있었을까?

     그렇지 못했을 것 같다. 나는 적극적으로 일제에 순응하지 않는 '소극적 저항'정도로 청년기를 다 보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것은 왜 그런가? 피에르 바야르는 그 점에 대해서 대답을 얻고자 자신의 앞에 연거푸 두 갈래 길을 놓는다. 작가는 결정을 유예할 수는 있지만 영영 포기할 수는 없다. 꼭 두 길 중 하나를 결정해야만 한다.


     #140.

     우리는 랍비 크뤼거의 도움을 받아 놀라운 상상력을 발휘한 소자 멘데스의 역량을 칭송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어떤 있음직한 픽션의 맥락 속에 있는 것이지 실제 위험의 맥락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소자 멘데스는 어떤 분기점이 제기하는 선택에 응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는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분기점을 그 자신이 창조한다. 당시 그와 같은 상황에 처했던 다른 외교관들이 생각해내지 못한 분기점을 말이다.

    

     각각의 개인에게 수정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잠재된 인격이라고 한다면 [나를 고백한다]에서 우리는 자기 수정을 깨는 인물을 몇명 소개받게 된다. 그리고 그들과 작가 본인이 비슷한 상황에서 다른 결정을 내리게 된 원인이 '수정 깨기'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선택의 기로 앞에 놓여서 YES or NO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 아님을 역설하게 된다. 위대한 개인은 어떤 분기점이 제기하는 선택에 응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지 않는 분기점을 당사자가 창조해내는 것이다.

     나치의 검열을 피해 유대인을 집에 숨겨주기로 한 사람은 '유대인을 숨겨준 댓가로 목숨을 내놓는다 or 유대인을 고발하고 목숨을 유지한다'라는 실제적인 분기점 위에 놓이는 것이 아니다. 그는 '나치 독재정부가 제시한 틀에 순응한다'는 현실로부터 '나치 독재정부가 제시한 틀 바깥'을 창조해낸다. 그러고나서야 '유대인을 숨겨준 댓가로 목숨을 내놓을 위기에 처한다 or 유대인을 고발하고 자신의 목숨 뿐 아니라 가족의 입장까지 지킨다'는 선택의 기로를 지나간 셈이 되는 것이다. 피에르 바야르는 이를 위대한 개인에게 발휘된 창조성으로 해석한다.

     위대한 개인은 사유의 틀을 창조하고 본인 스스로를 창조한다.

     그렇다면 피에르 바야르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은 우리를 굳이 일제로 끌고 올라갈 필요가 없어진다. 사유의 틀을 창조하고 그 결과로 스스로를 창조하는 행위는 개인 삶의 외부 환경이 어떻든 크게 관계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서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피에르의 질문을 받게 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어떻게 존재하는가, 그 존재가 각각의 삶에서 어떻게 발휘되는가. 하는.





  1. 1951년 이루어진 솔로몬 애시의 실험: 학생 집단을 모아 테스트 대상이 된 한 사람만 빼고 모두 공모를 한다. 학생들이 앉아있는 방에서 그들에게 여러 개의 수직선, 즉 기준이 되는 선 하나와 다른 세 개의 선을 보여주는데, 학생들은 이 선들을 기준 선과 비교해 기준 선과 길이가 같은 것을 찾아야 한다. 이 때 앞에 공모한 학생들이 모두 틀린 대답을 한다면, 테스트 대상자 역시 그들과 보조를 맞추어 눈에 보이는 분명한 차이를 부정하면서 틀린 대답을 하려는 성향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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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동물원 - 제1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강태식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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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고 싶은 날은 마늘을 깐다.

     마늘 까는 일에도 엄연한 정신적 스트레스가 존재한다. 악몽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정체성의 혼란이다. 나란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끊임없이 하게 된다. 손에 밴 마늘 냄새처럼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다.

     마늘도 맵지만 사는 건 더 맵다. 지난 몇 달을 돌아보면 코끝이 찡해진다. 화장실 같은 곳에 숨어서 남몰래 울고 싶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떻게 참았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사람들은 동물원에 가서 무엇을 볼까. 동물원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사람들은 '동물을 본다'고 대답할 것이다. 동물원에 가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 나라면 '인간에 의해 야생을 거세당한 동물을 본다'고 했을까? 그렇다면 거기에서 더 나아가서, 동물원을 좀 더 자주 가고 그 안에서 영감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떻게 대답할까. 강태식이 쓴 소설 [굿바이 동물원]은 그 단순한 질문에서부터 시작한다.

     남자는 회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하고 부업으로 마늘을 깐다. 부업 브로커인 '돼지엄마'가 소개시켜준 덕이다. 며칠 마늘을 까다가 봉제인형 눈 붙이기로, 인형 눈에서 바비인형 속눈썹 붙이기로, 그리고 거기서 다시 종이학과 공룡알 접기로 업종을 바꾸어가며 부업을 하던 남자가 비로소 동물원 일을 소개받는다. 출근 첫 날, 남자는 동물원에서 자기가 하게 될 일이 '고릴라'임을 알게 된다. 고릴라 탈을 쓰고 고릴라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12미터 높이의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이 있다. 이 빌딩을 타고 올라가면 부저가 있다. 부저를 누르면 5천원. 갑근세 3.3%을 제한 4,835원을 버는 셈이다.


     #

     "우후우후"

     세상이 밉다. 사람들이 밉다. 울분에 찬 가슴을 두 주먹으로 두드린다. 성격 따위 삐뚤어질 테면 삐뚤어져라. 어차피 이 나라에서 가난하게 살면 성격 같은 건 그냥 삐뚤어지는 거니까. 역시 세상이 밉다. 사람들이 밉다.

     "정말 잘 지내는 거지?"

     옆에 누운 아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아, 나는 과연 잘 지내고 있는 걸까?


     남자는 동물원의 고릴라로 출근을 하고, 아내는 캐셔를 그만두고 부업을 시작했다. 아내가 마늘을 까다가, 봉제인형 눈을 붙이다가, 바비 인형 속눈썹을 붙이고, 그리고 종이학과 공룡알을 접기 시작한다. 마늘을 깔 때는 알몸의 마늘에 짓눌리는 악몽을 꾸고, 인형에 본드칠을 할 때는 본드에 취해 눈이 풀린다. 남자가 겪은 그대로다. 남자는 아내가 본드에 취해 눈이 풀려 침을 흘리며 실실 웃는 장면을 목격한다. 자기가 겪은 그대로다.

     '행복한 인생 통장'은 사람으로 태어나면 누구에게나 다 개설되는 계좌다. 문제는 그 통장에 차곡차곡 무언가를 채울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럴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행복한 인생 통장'의 잔고를 보며 비참하다. 강태식의 [굿바이 동물원]에 나오는 사람들 역시 비참하다. 자신의 통장이 보잘것 없이 초라하기 때문이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나를 지키기 위해서 살기에도 너무나 빠듯한 삶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원하면?

     깐 마늘의 악몽으로부터 벗어나면 다음은 봉제인형과의 사투다. 이 사투로부터 지켜내야 할 것은 지구도 아니고 사랑하는 아내도 아니다. 돈이다. 남자는 봉제인형이 돈을 씹어 삼키는 것을 막아야 한다. 본드량을 한 큰술에서 다섯 큰술로 늘려도 봉제인형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낙법 훈련을 하고 외제차에 뛰어들어도 봉제인형을 막기는 역부족이다.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에 올라 자기 몫으로 주어진 버저를 눌러도 마찬가지다. 버저를 누르다 떨어져 크게 다쳐도 그렇다.


     #

     "마늘이 맵네."

     아내는 거짓말을 하면서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나는 안다. 매운 건 마늘이 아니다. 눈물을 흘리는 것도 마늘 때문이 아니다. 사는 게 맵다. 매우니까 눈물이 난다. 한때는 나도 마늘을 까면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그래서 안다. 마늘보다 사는 게 백배쯤 맵다는 걸. 그리고 마늘을 깐다는 게 사람을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게 만드는지도.

     마음이 아팠다. '행복한 인생 통장' 따위가 뭐라고. 그런 통장 없이도 잘살 수 있다고, 그러니까 마늘 같은 거 까지 말라고 탕탕 큰소리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럴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미안하고 초라하고, 마늘을 까고 있는 아내만큼이나 외롭고 쓸쓸했다.

    

     내 옆에도 '행복한 인생 통장'을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사람이 있다. 엄마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 엄마는 나한테 말했다. 앞으로 너는 월급을 이만큼 벌어야 하고, 그 첫 단계를 위해 지금 학교에 가는 중이라고. 처음 사귄 남자친구에 대해서 얘기할 때도 그랬다. 니가 앞으로 벌어올 돈이 이만큼이라는 것을 알아야 남자친구를 보는 눈이 달라질 거라고. 나는 그 때마다 엄마의 상처가 돈에 의해 난 것이라고 알았다. 그 얇은 한 장의 종이가 사람을 저렇게 깊이 벨 수도 있구나 했다. 나는 차라리 '행복한 인생 통장'의 계좌를 포기함으로서 그 상처에서 자유롭고 싶었다.

     그 땐 그런 생각이 쉬웠지만 지금은 또 다르다. 지금 나는 '행복한 인생 통장' 안에 돈이 아닌 다른 것을 채울 수는 없는지 고민 중이다. 그건 의자를 책상이라고 부르겠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 혹은 '행복한 인생 통장'이 오로지 돈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는 결과를 낳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개인이 정말 행복해지고 싶을 때, 그것이 왜 하필 돈이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의심은 언제나 한다. 혹은 한 개인이 정말 돈을 벌고 싶을 때, 왜 그 일이 비참의 긴 통로를 헤매는 일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심도.


     사람들은 동물원에 가서 무엇을 볼까. 아프리카 초원을 맹렬히 달리는 꿈같은 사자는 이제 없다. 대신 달리기에 지치고 서열 싸움에서 밀린 사자들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배를 타고 건너와 구직을 하고 돈을 버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동물원은 그 자체로 인간상의 구조를 여실히 보여준다. 구획을 나누는 것도, 구획을 통제하는 것도, 돈을 지불한 사람들과 그 돈을 월급으로 받을 동물들 사이에 있는 확실한 경계도 지금 우리들이 놓인 공간에 완벽히 치환된다. 동물들에게 그 울타리는 넘봐서는 안 될 울타리이지만 구경 온 사람들에게 울타리는 재밌게 넘볼 수 있는 울타리다. 이 아이러니가 비참한 감정을 낳고 그 감정이 돈으로부터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동력을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았다고 마무리하는 것은 조금 촌스러운 시대가 됐다. 그래서 전부 다 포기해버렸다고 마무리하는 것은 작가적 직업유니에 어긋난다는 생각을 한다. 소설 [굿바이 동물원]에는 그 사이에서의 긴장감을 느낄 수가 있다. 물론 고민은 여전히 남는다. 그것은 작가의 몫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몫이기도 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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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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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70.

     하지만 내가 말하는 건 진짜 혁명 얘기야. 진짜로 세상을 바꾸고 사람들의 존경을 얻는 일에 대한 얘기. 진짜 영광스러운 일은 그런 일에 있지. 실패하더라도 칭찬을 듣는 일이라니까. 그런데 그런 일들은 이미 워싱턴이라든가 링컨이라든가 애덤스라든가 마틴 루터 킹 같은 사람들이 다 해버렸어. 동성연애자들이 결혼할 권리까지 이미 누가 먼저 주장해버렸다니까."

     "그래서, 너는 목표가 있어?"

     "있지."

     "뭔데?"

     "아직은 네가 들을 준비가 안 돼 있어."

     재키는 웃으며 말했다.

     "사실, 너는 내가 죽은 다음에나 준비가 될 거야."

     세연은 그 해 6월에 죽었다.


     세상은 나와 내 동기들을 여러가지로 부른다. C세대는 컨텐츠를 창조하는 소비자라는 의미에서, D세대는 디지털 네이티브라는 의미에서, E세대는 끝없이 교육받는다는 의미에서, G세대는 글로벌 마인드를 갖고 자랐다는 의미에서, I세대는 미래에 투자한다는 의미 혹은 아이팟을 능숙하게 사용한다는 의미에서, M세대는 휴대전화 중심, 나 중심 마인드를 갖고 있다는 의미에서, P세대는 적극적인 참여와 열정, 힘을 바탕으로 활동한다는 의미에서, U세대는 언제 어디서나 휴대전화로 소통하는 유비쿼터스 세대라는 의미에서 우리를 지칭하는 이름들이다.

     그러나 위의 무슨무슨 세대라는 것은 전부 기성세대가 우리에게 지어준 이름으로, 현상을 관찰하고 지은 이름이라기보다는 어떻게 살아라는 바람을 가지고 지은 이름에 더 가깝다. 따라서 저 이름들만 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짐짓 활기찬 것으로 미래지향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장강명은 [표백]을 통해 우리 스스로의 세대에 이름을 붙인다. 우리는 큰 꿈 없는 세대에, 표백세대에 산다는 것이다. 이미 사회의 큰 틀은 완성되었고 모순은 틀을 무너뜨릴 정도로는 누적되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를 마이크로 단위로 쪼개어 사회의 지극히 작은 알갱이를 자처한다. 모순적 구조를 수정할 수는 있어도(과연 그것도 가능한지?) 다른 사회의 판을 짤 수는 없는 것도 그 이유에서다.


     #120.

     한강보다 더 두려운 것은 문과대 뒤편의 시멘트 연못이었다. 재키는 거기서 죽을 예정이었다. 그녀는 가장 낮은 곳에서 죽을 예정이었다. 고개만 들면 살 수 있는 곳, 살고 싶다는 본능을 절대적으로 포기해야 겨우 죽을 수 있는 곳에서 자살하면서 자신이 약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한강변에서 재키는 당장 강물로 뛰어들고 싶다는 충동을 여러번 느꼈고, 자신이 여기서 어느 불량배나 연쇄살인범에게 납치당해 강간당하고 죽는 상상도 했다. 그녀의 인생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결말은 그런 개연성 없고 허무한 것이 아닐까?

     재키는 때로 자신의 계획이 과연 제대로 실행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과 터질 것 같은 긴장 속에서 차라리 그렇게 자신이 살해되기를 바랐다. 그럴 때 그녀는 계략가도 귀부인도 투사도 폭군도 아닌, 길을 잃고 우는 어린 아이, 가여운 영혼으로서의 자신을 보았다.


     언젠가 친구랑 무슨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내 입장이 친구에게 굉장히 선동적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 번도 그런 식으로는 스스로를 생각 해 본 적이 없어서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분명히 우리는 같은 날들을 살아가고 있고 같이 힘든데 왜 내 얘기가 선동적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걸까? 하고 나는 자문해보았다.

     장강명의 [표백]은 마침 그런 이야기이다. 재키를 시작으로 한 잇따른 자살 선언을 두고 관계자인 적그리스도와 소크라테스가 다시 만났다. 소크라테스는 재키의 자살 선언에 동참하겠다고 약속한 인물이고 적그리스도는 재키가 자살 선언에 끌어들이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었다. 소설은 두 개의 파랗고 빨간 기운의 대치 상황으로 전개된다. 재키의 감각적이고 직관적인 논리가 불의 상징인 빨간 기운이라면 적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한 발짝 비켜 선 시선은 물의 파란 기운인 셈이다.

     재키는 21세기에 예수처럼 등장해 자기의 제자들을 모았다. 표백 세대에 대한 내세는 말하자면 재키를 따르는 데에서 출발하는 셈이었다. 재키가 죽고 5년 뒤 재키는 웹사이트 '와이두유리브닷컴'을 통해 부활했고 제자들은 그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차례로 순교했다. 적그리스도의 할 일은 단 하나였다. 그들의 죽음을 막고 이 세상에 내세는 없다고 선언하는 것.


     #302.

     세연이 강물에서 봤던 절망과 우울은 여전히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강 건너 여의도의 야경은 아름다워 보이기만 했고, 사실 점점 더 호화로워지고 있었다. 상하이나 홍콩의 야경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한강은 여전히 수은처럼 반짝반짝 빛을 내며 부드럽게 흘렀다.

     별로 두렵진 않았다.

     나는 아무도 모르는 먼 바다에서 공기가 태양에너지를 듬뿍 받아 힘을 키우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열대성 저기압은 갑자기 태풍으로 발달해 육지를 향하고 강한 비바람으로 그 존재를 과시한다. 어떤 해에는 한 해에 태풍이 30개 이상 만들어지기도 하고, 어떤 태풍은 수명이 보름을 넘기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 모순이 쌓이지 않는다는 세연의 주장에 나는 찬성하지 않는다. 세상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힘은 이제 없을 수도 있지만 우리 시대에 태풍은 곧 몇 번 들이치리라 생각한다. 그 때 그 에너지를 이용하면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많은 일을. 그건 그 에너지를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표백]을 읽고 나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을까. 이 책을 읽고 그의 생각이 조금 바뀔까. 나는 여전히 새하얀 식탁보에 떨어진 떡볶이 얼룩이고 싶을까. 그는 여전히 그 얼룩을 기어코 비벼 지우고 싶을까. 세상에 더 이상 건강한 꿈은 없을까. 그렇다면 건강한 꿈이라곤 없는 사람들은 여전히 나쁜가.

     이미 완성된 공원을 걸을 때 발밑에 핀 꽃을 감상하는 것이 소소한 기쁨이라면, 완성된 세상을 살면서 하루하루 때마다 느낄 수 있는 작은 감상들로 삶의 동력을 찾는 것이 어떻게 나쁘다고 할 수 있냐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말이었다. 틀린 말 같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내 스스로 선택해서 살고 싶다는 욕망은 주체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내가, 오로지 나 스스로의 선택으로 삶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다시 남는다. 어떻게 해서 7급 공무원이 되겠다는 선택은 주체적인 선택이 아니고 어떻게 해서 자살 선언으로 내세를 꿈꾸겠다는 선택은 주체적인 선택이 되는지에 대한 의문.


     한 때 나는 죽는 순간이 두려워 죽고 싶었다. 죽는 순간에 대한 기대감과 공포가 서로 구분되지 않는 날들이었다. 한 개인에 대한 증명이 모두 끝나고 한 줄 공식이 도출되는 순간을 죽음이라고 본다면 나에게 그 식이 이미 나왔는가. 재키에게 그 식이 이미 나왔는가. [표백]을 읽으며 와이두유리브닷컴을 통해 재키가 도출한 공식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식도 거기서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끝끝내 이 책에 깊게 배어 있는 '선동적'인 입장이 주는 거북살스러운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결국 내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재키와 적그리스도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 존재를 장강명의 [표백] 속 인물들과 대입해 생각해보는 정도로 독서는 끝났다. 나는 아무도 모르는 먼 바다에서 공기가 태양에너지를 듬뿍 받아 힘을 키우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힘을 받은 공기가 거대한 태풍으로 성장해 길게는 보름 동안 육지를 휩쓰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별로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그 때 생겨난 그 에너지가 적그리스도의 바람대로 쓰일 것이라는 확신이 단 1도 들지 않았다.

     나는 마이크로 단위로 쪼개진 나라는 개인을 생각했다. 그리고 마이크로와 마이크로로 이어지는 자살 선언에 대해서 생각했다. 자살 선언에 대해서 찬성할 수도, 반대할 수도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적그리스도는 앞으로 3년 내로 내세는 없다는 것을, 자살 선언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했다. 나에게도 나대로의 증명이 필요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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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는 필요없다 - 진보의 가부장제에 도전한 여자들 이야기 이매진 컨텍스트 15
전희경 지음 / 이매진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47.

     주류 사회운동에 참여하면서 기존의 수동적인 '착한 딸'의 여성성을 부정하고 무성적인(남성적인) '운동가'가 된 여성 활동가들은, 다양한 소외와 차별을 겪으면서 '내부의 외부인'으로 자신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잊고 있었고 잊어야 했던 어떤 기억들을 다시 불러냈다.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이, 잊어야 하고 지워야 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고 억압과 지배의 좀더 세밀한 그물들을 포착해낼 수 있는 인식론적 위치로 자리매김되는 순간, 여성이기 때문에 겪어온 많은 차별과 폭력은 단순히 고통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가부장적 세계를 비판할 수 있는 정치적 자원이 된다. 새로운 정치적 자원에 기반을 두고 과거 경험들을 다시 기억하고 재해석하자, 여성 활동가들이 매료되던 '진보운동'은 전혀 다른 각도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 여성학 스터디를 제안받았을 때 여자이기 때문에 선뜻 그러자고 대답은 했지만, 사실 속으론 "차별받은 경험이 없는데" 하고 생각했다. 오히려 나는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문득문득 깨닫고 놀라고는 했었다. 가령 쇼핑몰 사이트에 가입하기 위해서 이름과 성별을 입력할 때 나는 내가 여자라는 것을 실감했다. 여자처럼 입고 여자처럼 말하고 여자처럼 앉고 걷고 여자처럼 으레 머리를 길러 묶으면서도 나는 나의 소우주를 무성적인 곳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희경의 [오빠는 필요없다]를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한 차례 몸살을 앓는 것처럼 힘들었다. 주위에서 오바스럽다고 할 정도로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다. 어떤 문장은 차라리 안 읽는 게 나았겠다 싶었다. 몇 번이고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참았다. 사실은 그냥 펑펑 울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 됐다. 이 책을 읽기 전에도 지난 내 삶은 이미 나에게 과거였고, 이 책을 읽은 뒤에도 지난 내 삶은 이미 나에게 과거이기 때문이었다. 이러나 저러나 과거인 내 지난 삶을 나는 다시 찬찬히 읽은 셈이었다. 소란스러울 필요 없이 다만 천천히 꼭꼭 씹어가며.


     #102.

     아무리 노력해도 남성은 그 사람을 '여성'으로 보며, 여성에게 요구되는 별도의 성별화된 '미덕'과 규범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에게 주어지는 이중 메시지다. 섹시하면서 동시에 순결할 것을 요구하는 것, '주부' 역할을 충실히 할 것을 요구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노동시장에서 좋은 노동력이 아니라고 간주하는 것, '외모에만 신경 쓰는 골빈 여자'라고 비난하면서 동시에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매력적인 성적 대상이길 바라는 것 등,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듣게 되는 이중 메시지는 수도 없이 많다. 이중 메시지 속에서 여성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일정한 비난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분열적인데, 중요한 것은 이것이 여성에게만 있는 딜레마라는 점이다.


     70년대에서 90년대에 이르는 운동학 계보는 일명 '공순이'라고 불리던 비숙련 여성 노동자에서 중공업 계열의 숙련 남성 노동자로의 전환을 시작으로 한다. 남성 노동자 중심의 노동 운동은 폭력적으로, 정치적으로, 상명하달식으로 구성되면서 여성 노동자들을 철저히 배제시켜 나갔다. '이중 메시지' 부과는 그런 맥락에서 여성 개개인을 분열시키기 좋은 메카니즘이었다. 여성 노동자들은 여전히 사적 영역에서의 가사노동에 시달렸고 여성의 '사회 진출'은 잘 해야 본전 찾기였다. 운동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집회에 나가면 여성은 치어리더 군단 그 이외의 역할은 수행할 수가 없었다. 사회적 젠더로서의 남성적 가치관에 의해 결정지어진 치어리더 역할 때문에 여성은 운동하기 좋은 노동력이 아니게 되었다. 여성은 '섹시하면서도 청순하게', '글래머러스한데 멍청해보이진 않은' 여성상을 끊임없이 요구받았다. 여성은 분열을 겪어야 했다. 스스로에게서 여자 냄새를 지우기 위해서, '명예 남성'이 되기 위해서 여성은 괴로웠다.

     전희경의 [오빠는 필요없다]는 진보를 자처하는 운동 사회 내에서의 남성과 여성 사이 관계를 문제제기한다. 하지만 읽기는 훨씬 확대되어 당장 나와 나 아닌 모든 사람들과의 사이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나와 아빠, 나와 엄마, 나와 동생, 나와 동기들, 나와 교수, 나와 후배 사이를. 그러자 미안한 사람이 많아졌고 사과 받고 싶은 사람도 많아졌다.


     #218.

     이제 여성활동가들은 여성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진보는 필요없다고 단호하게 말하기에 이르렀다. 그동안 진보와 보수의 패권적 이분법에 침묵당해온 거대한 여백들을 폭로하면서 기존의 '진보'가 사실은 부분적이고 역사적인 것임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또 단일한 중심으로 대표되거나 수렴될 수 있다고 가정돼오던 '진보'가 실제로는 전체주의적일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기존 '진보'의 단일성을 해체하고 탈중심화된 새로운 연대의 방식을 상상할 것을 제안했다.

     '탈진보', '진보의 쇄신', '진보의 해체', '진보의 (여성주의적) 재구성' 등 여러 가지로 표현되던 이 변화들은, 진보는 "진보하고자 하는 에토스 그 자체"이며 어떤 하나의 주제나 이슈로 고정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런 에토스를 상실하고 특정한 문제나 집단을 중심으로 고정된 '진보'는 이내 '진부'해질 수밖에 없다. 진보는 다전선적이며, 역사적, 맥락적 상황에 따라 재구성되는 것이기에 누가, 어떤 관점에서 정의하는, 무엇에 대한 진보인가를 항상 새롭게 질문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 단문으로 말하기에는 조금 억울하다. 세상은 주류 아닌 쪽이 주류의 안방 문을 깨부수며 움직였다. 너무 지난한 과정이라 멈춰버린 게 아닌가, 거꾸로 가는 게 아닌가 싶다. 고전문학에는 패배한 전쟁사를 성공한 것으로 바꾸어 카타르시스를 주는 장르가 있다. 이 책이 차라리 그런 식이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전희경의 [오빠는 필요없다]는 좌절당하고 좌절당하고 좌절당하고 좌절당한다. 진보의 최전선에서 여성 노동자의 자리를 만들어보려던 시도는 '이중 메시지'를 통해 좌절당하고 독립 노선을 만들어 움직이려는 시도는 '왜 굳이 여총인가' 하는 의문으로 좌절당한다. 본문에서도 지적하고 있듯이 질문하는 남성과 대답하는 여성의 관계는 매우 종속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더 이상 남성들의 그 어떤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자칭 진보적이라고 하는 남성 노동 운동가들에게 여성 스스로를 재정의하기로 했다. 여성주의에서의 진보란 진보하고자 하는 에토스 그 자체이고 다전선적이며 역사적, 맥락적 상황에 따라 재구성되는 것이라고. 진보는 언제나 영역을 달리하며 운동해나가는 것이라고. 거창하고 희망차게 들리지만 여성주의의 실상은 그렇게까지 밝지만은 않다. 게다가 다른 공부와는 다르게 감각적이고 실천적이기까지 한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은 뒤 눈 뜨고 눈 감을 때까지의 모든 순간이 고민스러워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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