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70.

     하지만 내가 말하는 건 진짜 혁명 얘기야. 진짜로 세상을 바꾸고 사람들의 존경을 얻는 일에 대한 얘기. 진짜 영광스러운 일은 그런 일에 있지. 실패하더라도 칭찬을 듣는 일이라니까. 그런데 그런 일들은 이미 워싱턴이라든가 링컨이라든가 애덤스라든가 마틴 루터 킹 같은 사람들이 다 해버렸어. 동성연애자들이 결혼할 권리까지 이미 누가 먼저 주장해버렸다니까."

     "그래서, 너는 목표가 있어?"

     "있지."

     "뭔데?"

     "아직은 네가 들을 준비가 안 돼 있어."

     재키는 웃으며 말했다.

     "사실, 너는 내가 죽은 다음에나 준비가 될 거야."

     세연은 그 해 6월에 죽었다.


     세상은 나와 내 동기들을 여러가지로 부른다. C세대는 컨텐츠를 창조하는 소비자라는 의미에서, D세대는 디지털 네이티브라는 의미에서, E세대는 끝없이 교육받는다는 의미에서, G세대는 글로벌 마인드를 갖고 자랐다는 의미에서, I세대는 미래에 투자한다는 의미 혹은 아이팟을 능숙하게 사용한다는 의미에서, M세대는 휴대전화 중심, 나 중심 마인드를 갖고 있다는 의미에서, P세대는 적극적인 참여와 열정, 힘을 바탕으로 활동한다는 의미에서, U세대는 언제 어디서나 휴대전화로 소통하는 유비쿼터스 세대라는 의미에서 우리를 지칭하는 이름들이다.

     그러나 위의 무슨무슨 세대라는 것은 전부 기성세대가 우리에게 지어준 이름으로, 현상을 관찰하고 지은 이름이라기보다는 어떻게 살아라는 바람을 가지고 지은 이름에 더 가깝다. 따라서 저 이름들만 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짐짓 활기찬 것으로 미래지향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장강명은 [표백]을 통해 우리 스스로의 세대에 이름을 붙인다. 우리는 큰 꿈 없는 세대에, 표백세대에 산다는 것이다. 이미 사회의 큰 틀은 완성되었고 모순은 틀을 무너뜨릴 정도로는 누적되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를 마이크로 단위로 쪼개어 사회의 지극히 작은 알갱이를 자처한다. 모순적 구조를 수정할 수는 있어도(과연 그것도 가능한지?) 다른 사회의 판을 짤 수는 없는 것도 그 이유에서다.


     #120.

     한강보다 더 두려운 것은 문과대 뒤편의 시멘트 연못이었다. 재키는 거기서 죽을 예정이었다. 그녀는 가장 낮은 곳에서 죽을 예정이었다. 고개만 들면 살 수 있는 곳, 살고 싶다는 본능을 절대적으로 포기해야 겨우 죽을 수 있는 곳에서 자살하면서 자신이 약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한강변에서 재키는 당장 강물로 뛰어들고 싶다는 충동을 여러번 느꼈고, 자신이 여기서 어느 불량배나 연쇄살인범에게 납치당해 강간당하고 죽는 상상도 했다. 그녀의 인생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결말은 그런 개연성 없고 허무한 것이 아닐까?

     재키는 때로 자신의 계획이 과연 제대로 실행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과 터질 것 같은 긴장 속에서 차라리 그렇게 자신이 살해되기를 바랐다. 그럴 때 그녀는 계략가도 귀부인도 투사도 폭군도 아닌, 길을 잃고 우는 어린 아이, 가여운 영혼으로서의 자신을 보았다.


     언젠가 친구랑 무슨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내 입장이 친구에게 굉장히 선동적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 번도 그런 식으로는 스스로를 생각 해 본 적이 없어서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분명히 우리는 같은 날들을 살아가고 있고 같이 힘든데 왜 내 얘기가 선동적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걸까? 하고 나는 자문해보았다.

     장강명의 [표백]은 마침 그런 이야기이다. 재키를 시작으로 한 잇따른 자살 선언을 두고 관계자인 적그리스도와 소크라테스가 다시 만났다. 소크라테스는 재키의 자살 선언에 동참하겠다고 약속한 인물이고 적그리스도는 재키가 자살 선언에 끌어들이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었다. 소설은 두 개의 파랗고 빨간 기운의 대치 상황으로 전개된다. 재키의 감각적이고 직관적인 논리가 불의 상징인 빨간 기운이라면 적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한 발짝 비켜 선 시선은 물의 파란 기운인 셈이다.

     재키는 21세기에 예수처럼 등장해 자기의 제자들을 모았다. 표백 세대에 대한 내세는 말하자면 재키를 따르는 데에서 출발하는 셈이었다. 재키가 죽고 5년 뒤 재키는 웹사이트 '와이두유리브닷컴'을 통해 부활했고 제자들은 그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차례로 순교했다. 적그리스도의 할 일은 단 하나였다. 그들의 죽음을 막고 이 세상에 내세는 없다고 선언하는 것.


     #302.

     세연이 강물에서 봤던 절망과 우울은 여전히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강 건너 여의도의 야경은 아름다워 보이기만 했고, 사실 점점 더 호화로워지고 있었다. 상하이나 홍콩의 야경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한강은 여전히 수은처럼 반짝반짝 빛을 내며 부드럽게 흘렀다.

     별로 두렵진 않았다.

     나는 아무도 모르는 먼 바다에서 공기가 태양에너지를 듬뿍 받아 힘을 키우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열대성 저기압은 갑자기 태풍으로 발달해 육지를 향하고 강한 비바람으로 그 존재를 과시한다. 어떤 해에는 한 해에 태풍이 30개 이상 만들어지기도 하고, 어떤 태풍은 수명이 보름을 넘기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 모순이 쌓이지 않는다는 세연의 주장에 나는 찬성하지 않는다. 세상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힘은 이제 없을 수도 있지만 우리 시대에 태풍은 곧 몇 번 들이치리라 생각한다. 그 때 그 에너지를 이용하면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많은 일을. 그건 그 에너지를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표백]을 읽고 나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을까. 이 책을 읽고 그의 생각이 조금 바뀔까. 나는 여전히 새하얀 식탁보에 떨어진 떡볶이 얼룩이고 싶을까. 그는 여전히 그 얼룩을 기어코 비벼 지우고 싶을까. 세상에 더 이상 건강한 꿈은 없을까. 그렇다면 건강한 꿈이라곤 없는 사람들은 여전히 나쁜가.

     이미 완성된 공원을 걸을 때 발밑에 핀 꽃을 감상하는 것이 소소한 기쁨이라면, 완성된 세상을 살면서 하루하루 때마다 느낄 수 있는 작은 감상들로 삶의 동력을 찾는 것이 어떻게 나쁘다고 할 수 있냐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말이었다. 틀린 말 같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내 스스로 선택해서 살고 싶다는 욕망은 주체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내가, 오로지 나 스스로의 선택으로 삶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다시 남는다. 어떻게 해서 7급 공무원이 되겠다는 선택은 주체적인 선택이 아니고 어떻게 해서 자살 선언으로 내세를 꿈꾸겠다는 선택은 주체적인 선택이 되는지에 대한 의문.


     한 때 나는 죽는 순간이 두려워 죽고 싶었다. 죽는 순간에 대한 기대감과 공포가 서로 구분되지 않는 날들이었다. 한 개인에 대한 증명이 모두 끝나고 한 줄 공식이 도출되는 순간을 죽음이라고 본다면 나에게 그 식이 이미 나왔는가. 재키에게 그 식이 이미 나왔는가. [표백]을 읽으며 와이두유리브닷컴을 통해 재키가 도출한 공식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식도 거기서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끝끝내 이 책에 깊게 배어 있는 '선동적'인 입장이 주는 거북살스러운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결국 내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재키와 적그리스도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 존재를 장강명의 [표백] 속 인물들과 대입해 생각해보는 정도로 독서는 끝났다. 나는 아무도 모르는 먼 바다에서 공기가 태양에너지를 듬뿍 받아 힘을 키우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힘을 받은 공기가 거대한 태풍으로 성장해 길게는 보름 동안 육지를 휩쓰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별로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그 때 생겨난 그 에너지가 적그리스도의 바람대로 쓰일 것이라는 확신이 단 1도 들지 않았다.

     나는 마이크로 단위로 쪼개진 나라는 개인을 생각했다. 그리고 마이크로와 마이크로로 이어지는 자살 선언에 대해서 생각했다. 자살 선언에 대해서 찬성할 수도, 반대할 수도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적그리스도는 앞으로 3년 내로 내세는 없다는 것을, 자살 선언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했다. 나에게도 나대로의 증명이 필요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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