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고백한다 - 존재에 대한 자문을 이끌어내는 논리적이고 사적인 고백 패러독스 13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14년 6월
평점 :
품절


     #70.

     이 집단 순응주의는 밀그램의 실험 이전에 이루어진 한 실험, 즉 솔로몬 애시의 실험1에서 자명하게 밝혀진 바 있다. 이 실험은 명백히 하나로 결속된 집단 내부에서 스스로 뭔가 다른 것-어느 모로 보나 그것이 옳은데도-을 생각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었다.

     이처럼 단순히 남들 눈에 띄는 행동을 하는 데 따르는 노력이 범죄적 행동에 가담한다는 확신-양심이 일러주는-보다 우위에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나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확신하기가 어려워지는 총체적 가치 전도 상황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최근 친한 친구가 호주로 워홀을 떠나는 것을 환영(?)하는 자리에서 친일 문인에 대한 이야기가 잠깐 오갔다.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일제 때 문인은 어떠해야 할까? 친일을 한 시인과 그의 작품은 어떻게 관계되어야 할까? 그런 질문들에 이어서 '나라면' 그 당시에 어떻게 행동했을까? 이런 질문들이 머릿속에 마구잡이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피에르 바야르는 그의 책 [나를 고백한다]를 마찬가지 질문 상황에 스스로를 내던짐으로서 시작한다. 즉 인간이 본질적으로 어떻게 존재하며, 그 존재가 각각의 삶에서 어떻게 발휘되는지에 대한 질문인 것이다.

     만일 내가 1900년대에 태어났고 청년기에 한일합병을 맞았다고 가정해 본다면. 창씨개명을 하고 조선인에게 국어(일본어)를 가르칠 것인지 아니면 조선을 떠나 망명해 독립운동을 할 것인지 선택해야만 한다면. 나는 어느 모로 보나 옳은 일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일제에 대해 분명한 거부감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쉽게 독립운동에 참여하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체제에 순응할 수는 없는 성격이면서 동시에 엄살이 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분명 신체적 위협에 대해 큰 두려움을 느낄 것이고 그 걱정 때문에 독립운동에 선뜻 뛰어들 수 없을 것이다.


     #96.

     이념적 대립이 일차적인 조건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정치적 차원의 참여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특히 자기 자신의 삶이 개입될 때는 더욱더 그렇다. 프랑스나 외국에서 이 세계는 매일같이 나에게 내가 완전히 반대한다고 느끼는 많은 상황을 제공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직접 참여해야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실제로 참여가 이루어질 수 있으려면 반대의 수위가 어떤 문턱을 넘어서야 한다. 내가 목도하거나 연루된 상황이 정신적으로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어 참여가 하나의 내적 필연성으로 부과되어야 한다.


     [나를 고백한다]는 어떻게 해서 양자택일의 비율이 어느 한쪽으로 심하게 기우는지 궁금해한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 '어느 모로 보나 옳음이 틀림 없는' 쪽을 선택하는 비율이 이토록 적은지를 역시 궁금해한다. 대답을 얻기 위해서 본인이 30년 일찍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의 상황에 놓여있다고 가정한다. 당시 많은 청년들이 그랬던 것처럼 작가 역시도 상황이 그렇게까지 심각해질 줄은 몰랐다. 물론 불안한 전조가 충분히 두툼하게 공기중에 퍼져 있었지만 그 분위기만으로는 옳고 그름을 주장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점차 일이 돌아가는 것을 뚜렷히 볼 수 있게 된 뒤에도 작가는 참여 진영에 쉽게 나설 수가 없었다. 이념적으로 내가 어느 쪽인지에 대한 답을 내리기는 쉽다. 나도 일제 시대에 청년기를 보낸다고 가정해보면 분명 일제에 대한 거부감을 마음 깊이 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다만 이념적으로 대립된 상황이 곧 참여를 유도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 '분노'가 더해져야 한다. 정신적으로 이 상황을 견딜 수 없다고 판단될 만한 분노.


     내가 1900년대에 태어나 20년 한일합병이 있던 해에 청년기를 맞았다면 나는 분명히 일제에 대한 이념적 적대감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동시에 일어를 국어로 가르치고 언론을 통제하는 상황에 대해 분노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지인들을 잡아다가 죽이고 정치범으로 끌고가 갖은 고문을 일삼는 행태에 대해서도 치를 떨며 분노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나는 참여 진영에 나설 수 있었을까?

     그렇지 못했을 것 같다. 나는 적극적으로 일제에 순응하지 않는 '소극적 저항'정도로 청년기를 다 보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것은 왜 그런가? 피에르 바야르는 그 점에 대해서 대답을 얻고자 자신의 앞에 연거푸 두 갈래 길을 놓는다. 작가는 결정을 유예할 수는 있지만 영영 포기할 수는 없다. 꼭 두 길 중 하나를 결정해야만 한다.


     #140.

     우리는 랍비 크뤼거의 도움을 받아 놀라운 상상력을 발휘한 소자 멘데스의 역량을 칭송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어떤 있음직한 픽션의 맥락 속에 있는 것이지 실제 위험의 맥락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소자 멘데스는 어떤 분기점이 제기하는 선택에 응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는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분기점을 그 자신이 창조한다. 당시 그와 같은 상황에 처했던 다른 외교관들이 생각해내지 못한 분기점을 말이다.

    

     각각의 개인에게 수정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잠재된 인격이라고 한다면 [나를 고백한다]에서 우리는 자기 수정을 깨는 인물을 몇명 소개받게 된다. 그리고 그들과 작가 본인이 비슷한 상황에서 다른 결정을 내리게 된 원인이 '수정 깨기'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선택의 기로 앞에 놓여서 YES or NO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 아님을 역설하게 된다. 위대한 개인은 어떤 분기점이 제기하는 선택에 응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지 않는 분기점을 당사자가 창조해내는 것이다.

     나치의 검열을 피해 유대인을 집에 숨겨주기로 한 사람은 '유대인을 숨겨준 댓가로 목숨을 내놓는다 or 유대인을 고발하고 목숨을 유지한다'라는 실제적인 분기점 위에 놓이는 것이 아니다. 그는 '나치 독재정부가 제시한 틀에 순응한다'는 현실로부터 '나치 독재정부가 제시한 틀 바깥'을 창조해낸다. 그러고나서야 '유대인을 숨겨준 댓가로 목숨을 내놓을 위기에 처한다 or 유대인을 고발하고 자신의 목숨 뿐 아니라 가족의 입장까지 지킨다'는 선택의 기로를 지나간 셈이 되는 것이다. 피에르 바야르는 이를 위대한 개인에게 발휘된 창조성으로 해석한다.

     위대한 개인은 사유의 틀을 창조하고 본인 스스로를 창조한다.

     그렇다면 피에르 바야르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은 우리를 굳이 일제로 끌고 올라갈 필요가 없어진다. 사유의 틀을 창조하고 그 결과로 스스로를 창조하는 행위는 개인 삶의 외부 환경이 어떻든 크게 관계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서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피에르의 질문을 받게 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어떻게 존재하는가, 그 존재가 각각의 삶에서 어떻게 발휘되는가. 하는.





  1. 1951년 이루어진 솔로몬 애시의 실험: 학생 집단을 모아 테스트 대상이 된 한 사람만 빼고 모두 공모를 한다. 학생들이 앉아있는 방에서 그들에게 여러 개의 수직선, 즉 기준이 되는 선 하나와 다른 세 개의 선을 보여주는데, 학생들은 이 선들을 기준 선과 비교해 기준 선과 길이가 같은 것을 찾아야 한다. 이 때 앞에 공모한 학생들이 모두 틀린 대답을 한다면, 테스트 대상자 역시 그들과 보조를 맞추어 눈에 보이는 분명한 차이를 부정하면서 틀린 대답을 하려는 성향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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