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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는 필요없다 - 진보의 가부장제에 도전한 여자들 이야기 ㅣ 이매진 컨텍스트 15
전희경 지음 / 이매진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47.
주류 사회운동에 참여하면서 기존의 수동적인 '착한 딸'의 여성성을 부정하고 무성적인(남성적인) '운동가'가 된 여성 활동가들은, 다양한 소외와 차별을 겪으면서 '내부의 외부인'으로 자신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잊고 있었고 잊어야 했던 어떤 기억들을 다시 불러냈다.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이, 잊어야 하고 지워야 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고 억압과 지배의 좀더 세밀한 그물들을 포착해낼 수 있는 인식론적 위치로 자리매김되는 순간, 여성이기 때문에 겪어온 많은 차별과 폭력은 단순히 고통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가부장적 세계를 비판할 수 있는 정치적 자원이 된다. 새로운 정치적 자원에 기반을 두고 과거 경험들을 다시 기억하고 재해석하자, 여성 활동가들이 매료되던 '진보운동'은 전혀 다른 각도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 여성학 스터디를 제안받았을 때 여자이기 때문에 선뜻 그러자고 대답은 했지만, 사실 속으론 "차별받은 경험이 없는데" 하고 생각했다. 오히려 나는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문득문득 깨닫고 놀라고는 했었다. 가령 쇼핑몰 사이트에 가입하기 위해서 이름과 성별을 입력할 때 나는 내가 여자라는 것을 실감했다. 여자처럼 입고 여자처럼 말하고 여자처럼 앉고 걷고 여자처럼 으레 머리를 길러 묶으면서도 나는 나의 소우주를 무성적인 곳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희경의 [오빠는 필요없다]를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한 차례 몸살을 앓는 것처럼 힘들었다. 주위에서 오바스럽다고 할 정도로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다. 어떤 문장은 차라리 안 읽는 게 나았겠다 싶었다. 몇 번이고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참았다. 사실은 그냥 펑펑 울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 됐다. 이 책을 읽기 전에도 지난 내 삶은 이미 나에게 과거였고, 이 책을 읽은 뒤에도 지난 내 삶은 이미 나에게 과거이기 때문이었다. 이러나 저러나 과거인 내 지난 삶을 나는 다시 찬찬히 읽은 셈이었다. 소란스러울 필요 없이 다만 천천히 꼭꼭 씹어가며.
#102.
아무리 노력해도 남성은 그 사람을 '여성'으로 보며, 여성에게 요구되는 별도의 성별화된 '미덕'과 규범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에게 주어지는 이중 메시지다. 섹시하면서 동시에 순결할 것을 요구하는 것, '주부' 역할을 충실히 할 것을 요구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노동시장에서 좋은 노동력이 아니라고 간주하는 것, '외모에만 신경 쓰는 골빈 여자'라고 비난하면서 동시에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매력적인 성적 대상이길 바라는 것 등,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듣게 되는 이중 메시지는 수도 없이 많다. 이중 메시지 속에서 여성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일정한 비난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분열적인데, 중요한 것은 이것이 여성에게만 있는 딜레마라는 점이다.
70년대에서 90년대에 이르는 운동학 계보는 일명 '공순이'라고 불리던 비숙련 여성 노동자에서 중공업 계열의 숙련 남성 노동자로의 전환을 시작으로 한다. 남성 노동자 중심의 노동 운동은 폭력적으로, 정치적으로, 상명하달식으로 구성되면서 여성 노동자들을 철저히 배제시켜 나갔다. '이중 메시지' 부과는 그런 맥락에서 여성 개개인을 분열시키기 좋은 메카니즘이었다. 여성 노동자들은 여전히 사적 영역에서의 가사노동에 시달렸고 여성의 '사회 진출'은 잘 해야 본전 찾기였다. 운동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집회에 나가면 여성은 치어리더 군단 그 이외의 역할은 수행할 수가 없었다. 사회적 젠더로서의 남성적 가치관에 의해 결정지어진 치어리더 역할 때문에 여성은 운동하기 좋은 노동력이 아니게 되었다. 여성은 '섹시하면서도 청순하게', '글래머러스한데 멍청해보이진 않은' 여성상을 끊임없이 요구받았다. 여성은 분열을 겪어야 했다. 스스로에게서 여자 냄새를 지우기 위해서, '명예 남성'이 되기 위해서 여성은 괴로웠다.
전희경의 [오빠는 필요없다]는 진보를 자처하는 운동 사회 내에서의 남성과 여성 사이 관계를 문제제기한다. 하지만 읽기는 훨씬 확대되어 당장 나와 나 아닌 모든 사람들과의 사이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나와 아빠, 나와 엄마, 나와 동생, 나와 동기들, 나와 교수, 나와 후배 사이를. 그러자 미안한 사람이 많아졌고 사과 받고 싶은 사람도 많아졌다.
#218.
이제 여성활동가들은 여성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진보는 필요없다고 단호하게 말하기에 이르렀다. 그동안 진보와 보수의 패권적 이분법에 침묵당해온 거대한 여백들을 폭로하면서 기존의 '진보'가 사실은 부분적이고 역사적인 것임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또 단일한 중심으로 대표되거나 수렴될 수 있다고 가정돼오던 '진보'가 실제로는 전체주의적일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기존 '진보'의 단일성을 해체하고 탈중심화된 새로운 연대의 방식을 상상할 것을 제안했다.
'탈진보', '진보의 쇄신', '진보의 해체', '진보의 (여성주의적) 재구성' 등 여러 가지로 표현되던 이 변화들은, 진보는 "진보하고자 하는 에토스 그 자체"이며 어떤 하나의 주제나 이슈로 고정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런 에토스를 상실하고 특정한 문제나 집단을 중심으로 고정된 '진보'는 이내 '진부'해질 수밖에 없다. 진보는 다전선적이며, 역사적, 맥락적 상황에 따라 재구성되는 것이기에 누가, 어떤 관점에서 정의하는, 무엇에 대한 진보인가를 항상 새롭게 질문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 단문으로 말하기에는 조금 억울하다. 세상은 주류 아닌 쪽이 주류의 안방 문을 깨부수며 움직였다. 너무 지난한 과정이라 멈춰버린 게 아닌가, 거꾸로 가는 게 아닌가 싶다. 고전문학에는 패배한 전쟁사를 성공한 것으로 바꾸어 카타르시스를 주는 장르가 있다. 이 책이 차라리 그런 식이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전희경의 [오빠는 필요없다]는 좌절당하고 좌절당하고 좌절당하고 좌절당한다. 진보의 최전선에서 여성 노동자의 자리를 만들어보려던 시도는 '이중 메시지'를 통해 좌절당하고 독립 노선을 만들어 움직이려는 시도는 '왜 굳이 여총인가' 하는 의문으로 좌절당한다. 본문에서도 지적하고 있듯이 질문하는 남성과 대답하는 여성의 관계는 매우 종속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더 이상 남성들의 그 어떤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자칭 진보적이라고 하는 남성 노동 운동가들에게 여성 스스로를 재정의하기로 했다. 여성주의에서의 진보란 진보하고자 하는 에토스 그 자체이고 다전선적이며 역사적, 맥락적 상황에 따라 재구성되는 것이라고. 진보는 언제나 영역을 달리하며 운동해나가는 것이라고. 거창하고 희망차게 들리지만 여성주의의 실상은 그렇게까지 밝지만은 않다. 게다가 다른 공부와는 다르게 감각적이고 실천적이기까지 한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은 뒤 눈 뜨고 눈 감을 때까지의 모든 순간이 고민스러워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