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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420자 인문학 - 페이스북 논객 최준영 교수의
최준영 지음 / 이룸나무 / 2011년 6월
평점 :
#45.
상념의 구두점을 찍으며 걸었다. 아픈 다리가 저려왔지만 무거운 마음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반값 등록금 집회 현장. 2008년 촛불 때와 사뭇 다른 반응들이 쏟아졌다. "등록금이 문제가 아니라 대학 개혁이 우선이고, 등록금은 더 올려야 해." 이런 말도 있다. "그들 만나면 말하세요, 그깟 대학 왜 다니느냐고. 때려치우고 일을 하든가, 시간 있으면 한 자라도 더 공부하던가..." 인파를 헤치며 겨우 걷다가 브레히트 희곡의 한 대목을 떠올렸다. 이솝우화이기도 한 그 말을 떠올리는 순간 거짓말처럼 <유주얼 서스펙트>의 캐빈 스페이시처럼 똑바로 걷기 시작했다. "힉 로두스, 힉 살투스!(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 '지금, 여기'의 문제를 도외시하면서 무슨 '놈'의 사설들이 그리 많을까?
SNS에 올린 짤막한 글들을 모아 출판한 이 책은 우선 빨리 읽혀서 좋다. 빨리 읽히는 이유는 쉽게 썼기 때문이다. 쉽게 썼다는 것은 읽는 사람이 쉽게 읽히게 썼다는 것이고, 쓴 본인은 고민하며 썼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 빨리 읽히는 글은 세련된 글이기도 하다. 그런 모든 지점들이 [유쾌한 420자 인문학]을 정말 유쾌하게 만들었던 게 아닌가 싶었다.
얼마 전에 중학교 교사로 일하는 친구 체를 만났다. 체는 내게 갱지 한 뭉탱이를 내밀며 A가 될 시와 B가 될 시를 추려달라고 부탁했다. 수행평가로 중학생들이 쓴 시 뭉치였던 것이다. 체는 커피를 주문하러 가고, 혼자 앉아 중학생이 쓴 시를 읽다가 나는 눈물이 찔끔 났다. 창피해서 얼른 닦아버렸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했다. 이 유치하기 짝이 없는 시를 읽고 울다니! 하고.
그러고 보니 또 한 번 이랬던 적이 있는데, 대학 다닐 때 현대시 시간이었다. 교수님이 무작위로 학생 대여섯 명을 불러내고는 각자에게 똑같은 시를 한 편씩 나눠주었다. 그러고서는 각자 마음에 드는 구절을 소리내어 읽으라고 했다. 반복해서 읽어도 되고, 다른 부분으로 넘어가도 된다고. 다른 낭독자들을 상관하지 말고 혼자 있다고 생각하고 읽으라고. 그 낭독은 매우 엉망이어서, 방송용으로 하면 오디오가 물리고, 한꺼번에 조용해지고, 순서가 뒤틀리고, 전혀 낭독되지 않는 구절이 있는가 하면 계속해서 낭독되는 구절이 있는 등,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였다.
나는 그때 왜 그렇게 울었을까.
#106.
정치경제학적으로 빈곤은 기회의 문제이며, 분배의 문제이다. 그러나 인문학적 관점에서 볼 때 빈곤은 분배나 기회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이다. 따라서 양극화 시대, 지식인의 역할은 사회 시스템과 빈곤 계층 간의 관계를 연구해야 한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사회적 배제 이론에서는 "기존의 화폐 중심적인 빈곤 개념에 반하여 빈곤을 초래하는 원인의 다차원성과 동태적인 프로세스에 주목하면서 빈곤을 분배적 문제로부터 관계적 문제로 바라볼 것"을 강조한다.
매사에 지나치게 전투적이다보니 스트레스를 받는다. 지하철을 타고 가던 중 메모거리가 생겨서 무심코 수첩을 꺼내 적고 있는데 옆에 앉은 할아버지 왈, "자고로 바른 손을 써야지 말이야. 짐승도 아니고." 나는 너무 놀라 토끼눈을 뜨고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을 쳐다보고, 다시 할아버지를 쳐다보고. 뭐라고요? 바른 손이요? 하고 되묻고 싶었다. 할아버지 어디서 오셨어요? 여기는 이천십육 년인데요. 하고.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 뭐하나. 그 할아버지는 '들으려고' 말했거나 '대화하려고' 말을 붙인 게 아닌 것을. 나는 초등학교 졸업 이후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왼손잡이를 향한 지적질'을 당하고 불쾌해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내내 할아버지에게 했어야 했을 말들을 얼마나 읊고 또 읊었던지.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이렇게 말해야지. 저렇게 말해야지. 하며.
이런 식이다보니 누가 봐도 억울하거나 폭력적인 상황에서뿐만 아니라 긴가민가한 상황에서도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게 된다.
잠깐! 올스톱! 이 상황이 폭력적인지 아닌지 생각좀 하고 넘어가실게요!
그렇게 살면 속 시원하고 좋을 것 같았는데, 막상 살아보니 건건마다 폭력을 운운하는 게 여간 피곤한 게 아니더라는 거다. 상대도 불편하고 나도 지치고. 그렇다고 다시는 같은 상황이 반복되지 않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서도 지난 몇 년간, 나는 바뀌었다. 나는 이제 이런 방식 외에 다른 방식으로는 세상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불편해도 이 방식이 옳다고 믿으면서.
#203.
한편 똘레랑스라는 개념이 형성되기까지의 역사적, 철학사적 과정을 짚어보면 철학자 김용석의 "사랑은 생물학적 차원의 문제이며, 이해는 철학적 차원, 용서는 종교적 차원의 문제"라는 말이 실감난다. 똘레랑스는 지긋지긋했던 종교전쟁의 산물이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의미를 확장해 온 살아있는 교과서이자 교훈이다. "진보는 불편하고 귀찮은 것이다. 똘레랑스는 앵똘레랑스와 맞서는 부담을 감수해야 하고 듣기 싫은 목소리도 들어야 하는 것이다. 대중은 그런 진보적인 삶이 불편하고 귀찮아 피하려고 하고, 지식인은 그것이 옳다며 강요하려 하니 둘 사이에 틈이 벌어진다. 그 틈을 단단히 밀착시키는 힘은 웃음이다."
아마도 그 때 내가 울었던 것은 내 삶이 아름답지 못하다고 느껴서가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불편한 쪽은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파라는 말마따나 불편하다고 말하고 상황을 썰렁하게 만들거나, 그마저도 참고 넘어가거나. 피차 아름다움이 결여된 두 선택지에 대해서 스스로 각오를 하고 책임을 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 나를 짜증나 눈물나게 만들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렇게 살기 싫으니 이젠 술에 술 탄듯 물에 물 탄듯 보고도 못 본 척 지나가고 싶어도 나는 이미 바뀌어 버렸다. 주위에 물으니 어떤 사람은 해서 알아들을 만한 말만 하란다. 그렇지 못할 것 같으면 그냥 말하지 말라고. 어떤 사람은 아니다, 계속 말해라, 한다. '이 구역의 미친년은 나야' 태세로.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쟤 앞에선 이런 말 하면 안 돼. 미친년처럼 물어 뜯길걸. 하고 단념하게 될 거라고. 그러고나면 내 귀에 듣기 싫은 소리는 듣지 않아도 될 거라고.
호주에 간 내 친구가 개중 가장 '아름다운' 말을 해 주었다. 세련돼지자고. 세련된 것이 옳은 것보다 강력하고, 자기 신념을 설득하고 싶으면 세련돼야 한다고. 촌스러워지지 말자고. 정말 맞는 말 같았다.
최준영은 [유쾌한 420자 인문학]에서 이 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지식은 관용이다. 옳은 것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고 그렇게 배운 옳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옳지 않은 것(내 기준에)을 이야기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지식이라는 것은 바퀴 달린 울타리로 정한 마당과도 같은 것이다. 언제든 울타리는 움직인다. 마당은 더 좁아질 수도 있고 더 넓어질 수도 있다. 지식이라는 것은 울타리 안과 밖에서 끝없이 말하고 끝없이 듣는 것이다. 나만 말하는 게 아니고 남만 말하는 게 아니고 서로서로 듣고 말하는 것. 똘레랑스가 앵똘레랑스에 맞서는 부담을 감수하는 점임을 지적한 대목은, 그러므로 내게 얼마나 감사한 대목인지.
나는 전과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타자를 정의하고 내 성을 더 굳건하게 지켜오는 방식으로밖에 세상을 보지 않는 셈이었다. 촌스럽고, 아름답지 못하게. 앞으로, 글쎄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