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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선생님 5 세미콜론 코믹스
다케토미 겐지 지음, 이연주 옮김 / 세미콜론 / 2015년 12월
평점 :
절판


  

 

   #

     지금의 학교 교육은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손이 안 가는 아이들의 마모되는 마음으로 떠받치고 있다고요.

     그래요. 지금의 학교에서는 어떤 학생이 상대건 간에 손이 모자라는 상태지만, 그래도 눈에 띄는 문제아에게, 예를 들어 10만큼의 힘을 써야 한다면, 얼핏 봐서 딱히 문제가 없어 보이는 학생에게도 하다못해 5 정도는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건 챙길 필요 없는 아이가 뒷전으로 밀려나서 불쌍하다는 평등론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러는 편이 결과적으로는 문제아를 포함해 학교를 좋은 방향으로 개선할 수 있다는 노림수도 되지요.


     지난 주, 학원 일을 마무리하면서 아이들을 하나하나 돌아보니 특별히 더 눈에 밟히는 애들이 있다. 유난히 더 까불고 뺀질거리던 애들이 아니라 조용하고 성실한 애들이다. 그 중에서도 동그랗고 좁은 이마와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질끈 묶은 뒤통수 정도만 겨우 눈에 익은 이제 중학생이 된 여자아이가 있다.

     어느 날인가 테스트 내내 남자애들 몇몇이랑 여자애들 몇몇이 거의 길길이 날뛰다시피 떠들어서 애를 먹었다. 수업이 끝나고 혼자 남아 가방을 싸는 학생이 있어 가까이 다가가 괜히 말을 걸었다. 시끄러워서 어쨌냐, 미안하다 뭐 그런 내용의 두서없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 그런데 그 학생은 되려 내 어깨를 두어 번 톡톡 두드렸다. 위로하려는 것처럼.

     공교육에서뿐 아니라 성장기 학생들의 교육이라는 거대한 공간은 손 안 가는 아이들의 마모되는 마음으로 떠받쳐지고 있다. 스즈키의 말마따나 교사는 그런 아이들의 마음을 언제나 생각해야 한다. 스즈키는 문제아가 모범생을 시기하는 마음 속에 품고 있는 부러움을 지적하면서 반대로 모범생 역시 문제아를 미워하는 한 편 부러워하고 있음을 역설함으로서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청소 당번을 맡은 아이들 중 문제아와 모범생이 각각 섞여 있다고 하자. 모범생은 문제아가 청소를 안 하고 매번 도망가는 것에 대해서 민폐라고 생각하고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 편, 자기에게도 남들이 인정해줄 만 한 '도망 자격 요건'이 충족되기를 바란다. 나에게도 이런 문제들이 있는데. 나도 마음이 심란해서 오늘 청소를 할 기분이 아닌데. 그래 오늘은 나도 도망가는거야. 하고 속으로 생각한다.

     왜 어떤 아이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이런 다양한 물쌀들을 이겨내고 청소를 해야 하고 또 왜 어떤 아이는 그 물쌀들에 못 이기는 척 청소를 도망가도 되는가? 스즈키 선생님은 이 문제에 대해서 교사들이 충분히 오랫동안 고민해보기를 원한다.


     #

     둘 다 '평범'해. 둘 다 '훌륭'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지극히 당연한, '사람인데 어쩔 수 없지.'로 해결될 정도의 문제다. 이런 일로 하나하나 야단을 맞으면 답이 안 나올 거다. 그래서 나는 되려 지금 야단칠 생각은 없어. 다만, 한 가지 말해 주자면... 둘 다 오늘 같은 '평범'한 상태로는 다음에도 반드시 또 평범한 사람끼리 몇 번이고 싸우게 될 거다. 어른들도 지극히 평범하게, 그렇게 서로 싸우며 많은 사람들이 살아간다. 서로 기분을 해쳐 가며, 때로는 주변에 민폐를 끼치거나, 피까지 흘리기도 하면서. "어쩔 수 없어, 그런 게 사람이지." 하면서 자신을 바꾸지 않고 살아간다. 하지만 혹시, 말다툼이 싫다는 생각이 들거든, 예를 들면 방금 말한 것처럼 자신을 바꿀 수도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은 '평범' 이상이 된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조금 '훌륭'한 사람이 말이다.


     다케토미 겐지의 [스즈키 선생님]을 선물하고 싶은 데가 많다. 얼마 전 임용을 마치고 발령을 기다리고 있는 내 친구에게, 그리고 기간제 교사로 이미 교편을 잡고 있는 또 다른 내 친구에게 가장 먼저 선물하고 싶다. 뿐만 아니라 곧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는 친구에게도 선물하고 싶다. 한창 중학생이 될 기대에 부푼 사촌동생들에게도.

     아마 이 만화는 교육자와 학습자를 따로 정해두지 않은 교육 만화일 것이다. 교육자가 꼭 선생님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가 이 만화를 바로 읽은 게 맞다면 나는 언제든 어느 상황에서든 스즈키일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나는 언제든 어느 상황에서든 스즈키의 학생들 중 하나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깊게 감명받은 지점은 바로 이런 점이다. 나는 요 근래 바른 관계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어느 한 쪽이 '정치적 폭력'을 사용해 다른 한 쪽을 교화시키는 것에 대해서 생각했다. 내가 아는 누구는 그것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라고 이야기했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사람 둘 이상이 모인 곳은 정치적인 공간이 된다고도 했다. 교사가 학생에 대해서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는 어디서 나오는가 생각해보면 그것은 둘 사이에 존재하게 된 정치적 폭력의 힘이 교사에게 더 기움으로서 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학생에게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하는 대신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냥 그가 담배를 피우도록 두어야 할까? 왜 미성년자에게 담배가 불법인지를 스스로 깨닫도록? 다케토미 겐지의 [스즈키 선생님] 5~8권에는 교사로서의 스즈키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모습은 볼 수가 없다. 물론 1~4권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번 5~8권에서는 뭐랄까, 학생들이 좀 더 업그레이드 된 듯한 인상을 받았다. 중구난방으로 소리지르고 자기 의견에 대해서 고집하는 모습을 보고는 스스로 부끄러워 할 줄 알고, 이전의 가르침을 기억해 내 현재 안건에 새로이 적용시킬 줄도 알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스즈키의 교육 철학은 교사가 나서서 '담배를 피우지 마라'하고 지시하는 게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

     제가 스즈키 선생님의 학급 토론은 허가하면서 다루코 선생님의 파업 대결이라는 지도를 부정하는 것은 파업이 근본적으로 폭력적인 해결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폭력성을 가진 행위를 전부 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는, 폭력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망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그것을 '악'이라 단언할 수 있는가는, 한층 어렵습니다. 세상에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끝내 폭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가 어떤 말도 듣지 않고 폭력적으로 자기 쪽 의지를 관철하려고 하는 경우입니다.


     폭력이라는 것은 물리적으로 가해지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마찬가지로 교육이라는 것은 교사가 해당 학생에게 한시적으로 주입할 수 있는 이야기만을 한정적으로 의미하지는 않는다. 스즈키가 늘 생각하는 지점이기도 하고, 내가 감명받은 지점이기도 한, '진짜 교육'은 교사가 해당 학생과 그 주변의 학생들에게 한시적으로 그러나 그 시점 이후로는 계속해서 영향을 끼치는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가 시간과 장소를 달리하여 계속 떠올려지고 되새겨지고 변용되고 응용되면서 체화되는 것. 그렇게 보통을 넘어서 조금쯤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

     평소에 책 읽기가 조금 힘든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다. 혹은 오랜 고시준비가 끝나고 시간의 여유가 생긴 사람에게. 혹은 늘어날 가족이 있는 사람에게. 혹은, 잘 모르겠다. 누구라도 선뜻 읽어봤으면 좋겠다. 읽을수록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 만화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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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혐오가 어쨌다구? - 벌거벗은 말들의 세계 우리 시대의 질문 2
윤보라 외 지음 / 현실문화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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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43.

     여성이 성적 욕망을 실현하려면 기꺼이 자기 자신이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이중성은, 여성에 대한 사회의 이중 규범을 통해 여성의 주체적 의지는 지우고 여성의 성적 대상화만 남길 위험에 언제든지 노출시킨다. 또다시 여성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한 후 내린 결론은, 굳이 짧은 치마를 입고 계단에서 가방으로 다리를 가리는 한국 여자들의 이중성에 대한 강도 높은 비아냥이다.

     이토록 오랫동안 여성 혐오 담론을 적재하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이었을까. 여기서 오는 긴장과 피로함은 없었을까. 여성 혐오 담론의 강박성과 병리성이 가장 잘 드러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유머'와 '드립'이라는 가장 막강하고도 안전한 방패 덕분이다. 여성 혐오 담론에 대한 우려와 조작 자료에 대한 문제 제기는 유머에 대한 과잉 반응으로 차단당한다. 일베 현상에서 사회가 몸살을 앓았던 당시, 많은 사람이 일베의 논리를 '루저들의 배설'로만 치부했다. 그러나 일베가 정확하게 뒤집은 명제가 이것이다. 그들의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는 바로 배설을 통한 유머와 드립이며, 이는 비단 일베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드립이라는 말이 애드리브에서 왔음을 생각해보면, 혐오문화 혹은 배제의 문화는 어릴 때 놀이와 많이 닮아 있다. 어릴 때 내가 주로 어울려 놀던 친구는 나까지 세 명이었다. 우리는 교회에서 만난 동갑내기였는데 같은 동네에 살기도 했고 형제들도 다 같은 또래라 금방 친해졌다. 그 때 했던 놀이들을 생각해보면 주로 얼음땡, 공기놀이, 혹은 이름 짓기도 불가능한 짝짓기류 놀이들이었다.

     규칙은 즉석에서 만들어졌다. 같은 얼음땡이더라도 우리가 모인 장소에 따라서 규칙이 조금씩 바뀌었다. 공터에서 놀 때는 눈 가리고 얼음땡, 학교 운동장에서 놀 때는 정글짐 위에서 내려오면 안 되는 얼음땡, 교회 안에서 할 때는 소리 내면 안 되는 얼음땡이 되었다. 그런 규칙들은 입 밖으로 꺼내지기도 했지만(땅 밟으면 안 됨 퉤퉤퉤! 라는 식으로) 보통은 암묵적으로 정해졌다. 집중하지 않으면 규칙을 어기개 되는 셈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키가 컸다. 덩치도 컸고 손도 발도 컸다. 햄버거 하나를 혼자 다 못 먹던 내 친구 둘에 비해서 나는 식성도 매우 좋았다. 그런데다가 민첩한 편도 아니었고, 유행에 민감하지도 못했다. 레이스 양말을 갖춰 신는 천상 기지배들 둘 사이에서 나는 굳이 치자면 왈가닥 선머슴아였던 것이다.

     정글짐 위에서 얼음땡을 할 때, 몸이 여리여리하고 작아서 쉽게 구조물 사이를 오갈 수 있었던 그 애들과 나는 달랐다. 그래서 나는 정글짐 위에서 하는 얼음땡이 세상에서 제일 싫었다. 아직도 정말 싫다. 그 놀이를 할 때 나는 영원히 술래일 수밖에 없었고 애들은 그런 나를 놀리며, 내 주변에서 나를 건드리고 도망가고, 도발하며, 낄낄거리며, 좋아했다.


     #107.

     조물주 외에는 누구에게나 억울한 일이 있다. 기존의 언어가 어느 측면에서든 기득권자의 입장에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아닌 이상, 아니 대통령조차도 억울하다. 말은 경합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경합의 현장은 평평한 땅이 아니다. 논쟁은 언제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벌어진다. 한쪽은 견고한 바닥에서 운동화를 신고 있으며, 한쪽은 흔들리는 땅에서 하이힐을 신고 있다(신을 것을 요구받는다).

     여성들이 흔히 경험하는 바, 익숙하게 들리므로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뭔가 불쾌하고 분한 감정이 드는 말을 들으면 이에 대해 당황하고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자신을 스스로 탓하게 된다. 이것이 정치이며, 이 느낌이 바로 정치의식이다. 물론, 이는 논리나 지식과 같은 개인적인 역량 문제가 아니다. 내가 사회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따로 공부해야 하는 문제다.


     집단에서 어떤 놀이를 할 때 가장 핵심이 되는 에너지가 바로 이 드립력이 아닐까. '병맛'이면서, 아니 '병맛'이라서 진짜 웃긴 드립들은 그 놀이의 규칙으로, 그리고 집단의 문화로 자리잡기가 쉽다.

     언어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언어는 실제가 아니고 실제하는 것을 지시하는 수단이므로 이미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는 발화되는 순간 그가 지시하지 않은 다른 것들까지도 지시하게 된다. 가령 초음파를 통해 태아의 성별을 식별할 때 의사는 1에서 3밀리미터 정도의 '튀어나온(?)' 부분을 가지고 남성과 비남성을 구별한다고 한다. 이 때 의사는 남성을 지시하면서 비남성을 함께 지시한다. 즉 남성은 비남성을 통해서 정체화되는 것이다.

     혐오나 배제의 문화는 지시되는 것과 지시되지 않는 것이 매우 정치적으로 선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마치 놀이 속의 우연한 속성 탓인 것처럼 위장하면서 짜여진다. '드립'과 '유머'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달려들지 좀 말자?" 하는 표현에서도 확인할 수가 있다.

     이 경우 여성은 남성과의 놀이 속에서 웃잔 말에 죽자고 달려드는 쪽이 된다. 놀이는 그렇게 정색하고서는 할 수 없다. 놀이는 즐겨야 하는 것이고 가벼워야 하는 것이다. 그게 싫으면 애초에 놀이를 할 수가 없다. 왜냐면 놀이가 원래 그런거니까. 놀이는 재밌자고 하는거니까. 혐오와 배제의 문화가 한 번 형성되면 혐오당하고 배제당하는 쪽에는 그 어떤 선택지도 허락되지 않는다. 나를 조롱하고 혐오하고 배제하는 쪽을 향해 분노할 수도, 울어버릴 수도, 웃을 수도 없다. 분노하면 열폭이 되고 울면 찌질해지고 웃으면 속만 쓰리기 때문이다.

  

     #176.

     따라서 아흐메드는 감정의 사회성을 제안하며, 감정이 대상 및 타자와의 접촉을 통해 어떻게 몸의 표면과 경계를 형상하는지를 질문한다. 이 작업을 위해 아흐메드는 감정을 논의하는 질문의 구조 자체를 바꾸는데, "감정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감정은 무엇을 하는가"라고 질문한다. 감정이 몸과 사회에 작용하는 방식, 그리고 감정의 작용을 통해 형상되는 모습을 살피고자 하는 것이 아흐메드의 문제의식이다.


     다시 어릴 때를 생각해 보면, 혐오와 배제의 문화가 우리 사이에서 나름(?) 공평하게 진행되어 왔음을 인정해야만 하겠다. 얼마나 공평했으면 우리는 왕따도 돌아가면서 시켰다. 나를 왕따시키던 친구 둘이 서로 수틀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둘 중 하나가 내게 와서 나머지를 도마 위에 올렸다. 그러면 나도 못 이기는 척 도마 위에 올라온 생선 토막을 내려다보곤 했다. 다음 순서가 다시 내가 될 수도 있다는 건 생각도 안하고.

     그러나 그건 그 세계에 우리 셋 뿐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한다. 혐오와 배제의 문화는 어떻든 일방향적인 것이고, 정희진이 지적하듯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벌어지는 놀이다. 한 쪽은 견고한 바닥에서 운동화를 신고, 한 쪽은 흔들리는 바닥에서 하이힐을 신고 얼음땡을 한다. 이 불공평한 정치적 관계를 전복시키고자 하는 비남성들은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같이 낄낄거리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미러링을 하면서 어느 정도 실천한 것 같기도 하다. 또 웃자고 한 말에 끝까지 죽자고 달려들 수도 있다. 정말 재미 없어. 너넨 이게 웃기니? 하고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들면서 놀이에 깽판을 놓는 것이다. 나는 그 중에서 뭘 할 수 있을까. 요즘 그런 고민을 정말 많이 한다. 말이 쉽지 이도 저도 하이힐 신은 쪽만 불편하다. 그 불편을 감수하고 한 번 말하고도 같은 일은 능청스럽게 다시 벌어진다. 그러면 또 한 번 더 말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꾸만 웃음기 싹 빼고 두 주먹 쥐고 걷게 된다. 아름답지 못하게. 촌스럽게. 더불어 '유머'와 '드립'이 얼마나 탁월한 에너지인지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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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420자 인문학 - 페이스북 논객 최준영 교수의
최준영 지음 / 이룸나무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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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

     상념의 구두점을 찍으며 걸었다. 아픈 다리가 저려왔지만 무거운 마음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반값 등록금 집회 현장. 2008년 촛불 때와 사뭇 다른 반응들이 쏟아졌다. "등록금이 문제가 아니라 대학 개혁이 우선이고, 등록금은 더 올려야 해." 이런 말도 있다. "그들 만나면 말하세요, 그깟 대학 왜 다니느냐고. 때려치우고 일을 하든가, 시간 있으면 한 자라도 더 공부하던가..." 인파를 헤치며 겨우 걷다가 브레히트 희곡의 한 대목을 떠올렸다. 이솝우화이기도 한 그 말을 떠올리는 순간 거짓말처럼 <유주얼 서스펙트>의 캐빈 스페이시처럼 똑바로 걷기 시작했다. "힉 로두스, 힉 살투스!(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 '지금, 여기'의 문제를 도외시하면서 무슨 '놈'의 사설들이 그리 많을까?


     SNS에 올린 짤막한 글들을 모아 출판한 이 책은 우선 빨리 읽혀서 좋다. 빨리 읽히는 이유는 쉽게 썼기 때문이다. 쉽게 썼다는 것은 읽는 사람이 쉽게 읽히게 썼다는 것이고, 쓴 본인은 고민하며 썼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 빨리 읽히는 글은 세련된 글이기도 하다. 그런 모든 지점들이 [유쾌한 420자 인문학]을 정말 유쾌하게 만들었던 게 아닌가 싶었다.

     얼마 전에 중학교 교사로 일하는 친구 체를 만났다. 체는 내게 갱지 한 뭉탱이를 내밀며 A가 될 시와 B가 될 시를 추려달라고 부탁했다. 수행평가로 중학생들이 쓴 시 뭉치였던 것이다. 체는 커피를 주문하러 가고, 혼자 앉아 중학생이 쓴 시를 읽다가 나는 눈물이 찔끔 났다. 창피해서 얼른 닦아버렸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했다. 이 유치하기 짝이 없는 시를 읽고 울다니! 하고.

     그러고 보니 또 한 번 이랬던 적이 있는데, 대학 다닐 때 현대시 시간이었다. 교수님이 무작위로 학생 대여섯 명을 불러내고는 각자에게 똑같은 시를 한 편씩 나눠주었다. 그러고서는 각자 마음에 드는 구절을 소리내어 읽으라고 했다. 반복해서 읽어도 되고, 다른 부분으로 넘어가도 된다고. 다른 낭독자들을 상관하지 말고 혼자 있다고 생각하고 읽으라고. 그 낭독은 매우 엉망이어서, 방송용으로 하면 오디오가 물리고, 한꺼번에 조용해지고, 순서가 뒤틀리고, 전혀 낭독되지 않는 구절이 있는가 하면 계속해서 낭독되는 구절이 있는 등,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였다.

     나는 그때 왜 그렇게 울었을까.  


     #106.

     정치경제학적으로 빈곤은 기회의 문제이며, 분배의 문제이다. 그러나 인문학적 관점에서 볼 때 빈곤은 분배나 기회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이다. 따라서 양극화 시대, 지식인의 역할은 사회 시스템과 빈곤 계층 간의 관계를 연구해야 한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사회적 배제 이론에서는 "기존의 화폐 중심적인 빈곤 개념에 반하여 빈곤을 초래하는 원인의 다차원성과 동태적인 프로세스에 주목하면서 빈곤을 분배적 문제로부터 관계적 문제로 바라볼 것"을 강조한다.


     매사에 지나치게 전투적이다보니 스트레스를 받는다. 지하철을 타고 가던 중 메모거리가 생겨서 무심코 수첩을 꺼내 적고 있는데 옆에 앉은 할아버지 왈, "자고로 바른 손을 써야지 말이야. 짐승도 아니고." 나는 너무 놀라 토끼눈을 뜨고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을 쳐다보고, 다시 할아버지를 쳐다보고. 뭐라고요? 바른 손이요? 하고 되묻고 싶었다. 할아버지 어디서 오셨어요? 여기는 이천십육 년인데요. 하고.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 뭐하나. 그 할아버지는 '들으려고' 말했거나 '대화하려고' 말을 붙인 게 아닌 것을. 나는 초등학교 졸업 이후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왼손잡이를 향한 지적질'을 당하고 불쾌해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내내 할아버지에게 했어야 했을 말들을 얼마나 읊고 또 읊었던지.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이렇게 말해야지. 저렇게 말해야지. 하며.

     이런 식이다보니 누가 봐도 억울하거나 폭력적인 상황에서뿐만 아니라 긴가민가한 상황에서도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게 된다.

     잠깐! 올스톱! 이 상황이 폭력적인지 아닌지 생각좀 하고 넘어가실게요!

    

     그렇게 살면 속 시원하고 좋을 것 같았는데, 막상 살아보니 건건마다 폭력을 운운하는 게 여간 피곤한 게 아니더라는 거다. 상대도 불편하고 나도 지치고. 그렇다고 다시는 같은 상황이 반복되지 않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서도 지난 몇 년간, 나는 바뀌었다. 나는 이제 이런 방식 외에 다른 방식으로는 세상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불편해도 이 방식이 옳다고 믿으면서.

 

     #203.

     한편 똘레랑스라는 개념이 형성되기까지의 역사적, 철학사적 과정을 짚어보면 철학자 김용석의 "사랑은 생물학적 차원의 문제이며, 이해는 철학적 차원, 용서는 종교적 차원의 문제"라는 말이 실감난다. 똘레랑스는 지긋지긋했던 종교전쟁의 산물이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의미를 확장해 온 살아있는 교과서이자 교훈이다. "진보는 불편하고 귀찮은 것이다. 똘레랑스는 앵똘레랑스와 맞서는 부담을 감수해야 하고 듣기 싫은 목소리도 들어야 하는 것이다. 대중은 그런 진보적인 삶이 불편하고 귀찮아 피하려고 하고, 지식인은 그것이 옳다며 강요하려 하니 둘 사이에 틈이 벌어진다. 그 틈을 단단히 밀착시키는 힘은 웃음이다."


     아마도 그 때 내가 울었던 것은 내 삶이 아름답지 못하다고 느껴서가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불편한 쪽은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파라는 말마따나 불편하다고 말하고 상황을 썰렁하게 만들거나, 그마저도 참고 넘어가거나. 피차 아름다움이 결여된 두 선택지에 대해서 스스로 각오를 하고 책임을 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 나를 짜증나 눈물나게 만들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렇게 살기 싫으니 이젠 술에 술 탄듯 물에 물 탄듯 보고도 못 본 척 지나가고 싶어도 나는 이미 바뀌어 버렸다. 주위에 물으니 어떤 사람은 해서 알아들을 만한 말만 하란다. 그렇지 못할 것 같으면 그냥 말하지 말라고. 어떤 사람은 아니다, 계속 말해라, 한다. '이 구역의 미친년은 나야' 태세로.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쟤 앞에선 이런 말 하면 안 돼. 미친년처럼 물어 뜯길걸. 하고 단념하게 될 거라고. 그러고나면 내 귀에 듣기 싫은 소리는 듣지 않아도 될 거라고.

     호주에 간 내 친구가 개중 가장 '아름다운' 말을 해 주었다. 세련돼지자고. 세련된 것이 옳은 것보다 강력하고, 자기 신념을 설득하고 싶으면 세련돼야 한다고. 촌스러워지지 말자고. 정말 맞는 말 같았다.

     최준영은 [유쾌한 420자 인문학]에서 이 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지식은 관용이다. 옳은 것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고 그렇게 배운 옳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옳지 않은 것(내 기준에)을 이야기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지식이라는 것은 바퀴 달린 울타리로 정한 마당과도 같은 것이다. 언제든 울타리는 움직인다. 마당은 더 좁아질 수도 있고 더 넓어질 수도 있다. 지식이라는 것은 울타리 안과 밖에서 끝없이 말하고 끝없이 듣는 것이다. 나만 말하는 게 아니고 남만 말하는 게 아니고 서로서로 듣고 말하는 것. 똘레랑스가 앵똘레랑스에 맞서는 부담을 감수하는 점임을 지적한 대목은, 그러므로 내게 얼마나 감사한 대목인지.

     나는 전과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타자를 정의하고 내 성을 더 굳건하게 지켜오는 방식으로밖에 세상을 보지 않는 셈이었다. 촌스럽고, 아름답지 못하게. 앞으로, 글쎄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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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에 대한 찬양 - 개정판
버트란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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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2.

     '유용한' 지식이 '대단히' 쓸모 있다는 데 대해선 의심할 여지가 없다. 현대 세계를 만든 건 바로 그 '유용한' 지식이니까. 그것이 없었더라면 우리에겐 기계도, 자동차도, 철도도, 비행기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없었다면 현대의 광고나 선전도 없었을 거란 사실도 덧붙여야 마땅하다.


     버트런드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올 초 반디앤루니스 잠실 제2롯데월드점에서 일하던 중 사다 놓고서는 '게을러서' 읽지 않고 있다가 얼마 전에서야 펼쳐 보게 되었다. 본문 발췌를 끝내고 책을 책꽂이에 꽂으려는데 같은 책이 한 권 더 있는 것을 발견했다. 2003년 3월 도장이 찍혀 있었다.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무슨 생각으로 이 책을 샀던걸까?

     수학 시간에 책상 밑에서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읽고 있다가 선생님한테 걸리고 말았다. 딱 한 페이지를 남겨놓은 상태였다. 가지고 나오라는 선생님의 호통에 나는 무슨 '깡'이었는지 마저 다 읽고 나가겠다고 했다. 그 일로 나는 수학 선생님에게 된통 욕을 얻어먹었고 책은 압수를 당하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께 불려 가게 되었는데, 이유인즉슨 내 책 [오만과 편견]을 잃어버렸다는 거였다.

     얼마나 재밌으면 마지막 장까지 다 읽고 내겠다고 배짱을 부렸을까 싶어 압수한 책을 출퇴근 시간에 읽으시다가 그만 책을 잃어버리고 말았단다. 선생님은 미안하다며 잃어버린 책 대신 버트런드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사다가 내게 주셨다. 당시에는 책 잃어버린 사실에 분개하느라고 새로 받은 책은 읽어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책꽂이 한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모양이다. 결국 내 손으로 다시 같은 책을 살 줄은 모르고서.


     # 97.

     현대의 인간은 불행이 공격해 오면 스스로를 통계상 총계 속의 한 단위로 의식한다. 사소한 패배들의 서글픈 행렬 속에 과거와 미래가 그의 앞에 펼쳐진다. 인간 자체가 무한한 침묵 중간중간 짧은 막간을 이용해 고함치고 법석을 떨며 활보하는 우스꽝스런 동물로 보인다.

     "머물 곳이 없는 인간은 가엾게 벌거벗겨진 채 포크에 찍힌 동물에 다름아니다."고 말한 리어 왕의 생각은 그 당시 익숙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를 광기 쪽으로 내몰았다. 그러나 현대의 우리에겐 익숙하고 평범한 생각일 뿐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우리의 역사가 부지런함과 유용함을 숭배하는 쪽으로 편집되어 왔음을 지적한다. 유용한 지식을 발견한 과학자의 부지런한 삶이 위인전으로 편찬되고 그 공부법을 정리한 책이 다시 베스트셀러가 된다. 하루 네시간 수면법, 아침형 인간 되기, 여섯시간 공부법, 1만시간 법칙 등등 습관 훈련의 필요성을 담은 책들이 큰 인기몰이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세상에서는 나 같은 사람은 참 한심해지기 쉽다. 누가 깨우지만 않으면 이틀도 거뜬히 잘 수 있는 나는 하루 네시간 수면은 물론이거니와 아침형 인간도 못 되고 여섯시간을 주구장창 앉아서 공부만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부지런함을 강조하는 것이 왜 문제인가. 부지런한 것이 좋은 거라는 건 너무나 당연한데, 그것을 선전하고 장려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버트런드 러셀이 역설하는 바는 위의 제시문에서 강렬히 드러난다. 현대 인간은 불행이 공격해 오면 스스로를 통계상 층계 속의 한 단위로 인식한다. 자살률 OECD 국가 1위, 하루 40명 가까이 자살하는 나라, 청년 실업률이 껑충 뛰고 고령화 사회가 빠르게 진행된 나라. 정년퇴직한 노인이 생계유지를 할 길이 없어 자살하고, 서울의 쟁쟁한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이 취직을 하지 못해 자살하는 나라. 그리고 그 수치상의 나.

     부지런함이 장려되고 숭배되는 사회 안에서 한 개인은 노력하기를 멈출 수가 없다. 부지런하지 않음이 죄악이 되기 때문이 아니다. 부지런한 자아의 상실은 나라는 존재의 부정이 되기 때문이다. 부지런하지 않은 나는 사소한 패배들의 행렬에 나란히 서 있을 뿐 나로서 인정되지 않는다.


     # 231. 

     죽음에 대해 계속 생각하는 것 역시 해로운 방법이다. 어느 한 주제를 너무 배타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며, 특히 행동이 뒤따르지 않을 땐 더욱 그렇다. 물론, 자신의 죽음을 늦추기 위한 조치는 가능하며 정상인이라면 누구나 적당한 선에서 그렇게들 행동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죽음을 막을 순 없다. 그러므로 죽음이란 것은 무익한 명상 주제다. 게다가 그렇게 한 생각에만 빠져 있다 보면 다른 사람들 및 주변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기 쉽다. 사실, 정신 건강을 유지하는 길은 객관적 관심사에 달려 있다.


     건강한 한 개인의 영혼은 어떤 색깔일까.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나는 어떤 색깔일까. 우리는 어떤 사회에서 또 어떤 가정에서 성장하느냐에 따라서 건강한 개인에 대한 이상형을 갖게 된다. 부지런함에 대한 찬양과 숭배가 지나치면 되려 건강치 못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지런함을 추구하느라 게으름을 죄악의 편에 놓게 된다면 태양 뜨는 곳에 응당 있어야 할 그늘 자리를 배제하는 셈이 되고 그것은 입체적인 인간을 평면화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버트런드 러셀이 이야기하는 '부지런함'과 '게으름'에 대한 정의가 우리가 언뜻 생각하는 '부지런함'과 '게으름'은 아니다. 그가 생각한 '부지런함'은 내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마이크로 단위로 쪼개져 사회의 부품으로 쳇바퀴를 도는 것을 말한다. 노동하는 노동자의 열정을 임금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다음 노동력을 재생산할 비용을 미리 받는 형태의 임금제도에 순응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 '게으름'은 그 컨베이어벨트에서 내려와 재빠르게 회전하는 시간의 강가에 비켜 서서 사색하는 것을 뜻할 것이다. 먹고사는 문제뿐 아니라 좀 더 다양한 방면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 손가락 다섯 개가 고루 자라는 것처럼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고 느긋하게 철학하는 것.


     자아는 타자를 정의함으로서 정의된다. 때문에 부지런함에 대한 찬양은 게으름에 대한 정죄함으로서 시작된다. 러셀이 원하는 것은 타자로 정의된 인간의 본성 중 하나를 자꾸만 자꾸만 자아 쪽으로 흡수시키려는 실천이지 않을까. 그렇게 점점 더 바깥, 그보다 더 바깥까지도 자아로 인정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지 않을까. 물론 그는 깨우지 않으면 이틀도 잘 수 있는 나의 '게으름 실천'에 대해서는 달가워하지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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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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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7.

     나는 위대한 사상에 필요한 건 작은 사람이지, 결코 큰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념에 큰 사람은 쓸모없고 불편한 존재라는 것을. 큰 사람은 완성되는 데 손이 많이 간다. 나는 바로 그런 사람을 찾는다. 작으면서도 큰 사람. 그는 멸시당하고 짓밟히고 학대당했지만, 스탈린 수용소와 배반의 아픔을 겪었지만, 결국은 승리를 거뒀다. 그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전쟁의 역사를 승리의 역사로 몰래 바꿔치기해버렸다. 작으면서 큰 사람, 그가 직접 그 사실을 말해줄 것이다...


     내가 나를 여자라고 느낄 때 나는 그 감각을 신뢰할 수 있을까. 여성주의 스터디를 시작하고부터 내내 머릿속에 맴돌던 질문이었다. 기분이 꿀꿀한 날 손톱에 매니큐어를 칠하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것, 짧은 치마와 스틸레토 힐이 예쁘다고 느끼는 것, 새로 나온 섀도우에 관심을 갖는 것을 가지고 '나는 여자야'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이 학습받은 젠더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지?

     한껏 차려입고 지하철을 타면 나를 아래위로 훑는 응큼한 아저씨 꼭 한 명은 만나게 된다. 그럴 때 그 눈초리가 정말 기분이 나쁘면서도 내가 한껏 차려입은 이유가 타인의 시선을 즐기기 위한 것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인정하게 된다. 그럴 때 나는 이중적인 감정 속에서 혼란스럽다. 나는 지금 기분이 나쁜가, 아니면 좋은가? 내가 여자인 것은 나에게 만족을 주는가 아니면 타인에게 만족을 주는가? 하고.


     # 290.

     소녀병사들 시신을 많이 봤거든요. 진흙탕 속이고 물웅덩이 속이고 죽어 누워 있는데, 글쎄 뭐랄까, 정말이지 그렇게는 죽고 싶지 않더라고요. 그걸 보고 난 다음부터는 '어떡하면 죽지 않을까' 하고 몸을 피하는 게 아니라 얼굴부터 피하고 보는 거예요. 팔부터 숨기고. 모르긴 몰라도 다른 소녀병사들도 아마 다 나랑 비슷했을걸요. 남사병사들은 그런 우리를 보고 웃었어요. 남자들이 보기엔 우스웠던 거죠. 살아남을 걱정은 안 하고 쓸데없는 일에 신경쓴다며 핀잔을 줬어요. 어리석은 여자들 걱정거리라고.


     전쟁중에 여자와 남자가 있었을까. 전쟁 중에는 산 사람과 한때는 살아 있었던 정물 덩어리가 있었다. 탱크가 아이들의 행렬을 그대로 밟고 지나가면 요즘 말로는 '로드 킬'이라고 하는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졌다. 적군 포로는 사지를 찢어 죽였고 그 과정에서 눈알이 튀어나왔다. 여자 포로는 강간당한 뒤 가슴이 도려져 살육당했다. 전쟁은 전선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었다. 민가에서도 벌어졌고, 최후방에서도 벌어졌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2차대전 후 소련의 여자 병사들을 찾아다니며 전쟁의 이야기들을 들어보는 방식으로 구성된 책이다. 허구가 전혀 가미되지 않은 논픽션이지만 이 책이 여타 소설보다도 더 소설다운 이유는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여자 병사들이 들려주는 전쟁의 기억은 남자 병사들이 들려주는 전쟁의 기억과 많이 다르다. 훨씬 입체적이다. 가령 전투에 참여하던 날 하늘이 어땠는지, 공기중의 냄새가 어땠는지, 누구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무엇을 만졌는지를 전부 이야기해주는 식이다.


     # 373.

     만남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가끔, 고통은 고독이라는 생각을 한다. 완전한 고립. 한편으로 고통은 앎의 특별한 형태는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인간의 삶에는, 특히나 우리네 삶에는 고통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전달할 수도 지켜낼 수도 없는 뭔가가 있다. 그건 이 세상이 그렇게 생겨먹었고, 또 우리가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남자에게 전쟁이 공적 영역의 연장이었다면 여자에게는 전쟁은 사적 영역에서의 공적 영역으로의 사회 진출이었다. 남자가 전쟁 임무를 수용하고 실행하는 일에 익숙했다면 여자에게는 전쟁 임무 하나하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남자가 받아들이는 전쟁이 평면적인 것일 때 여자가 받아들이는 전쟁이 입체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전쟁 상황에서 여자 병사들은 수를 놓았고 배낭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 남자들의 셔츠를 이용해서 속옷을 만들고 빨간 스카프를 장식처럼 둘러매고 다녔다. 빨간 스카프 때문에 적에게 노출되어 죽임을 당할지언정. 전쟁에서의 죽음은 삶을 훼손하는, 삶을 존중하지 않는 방식으로 겪어야 했지만 그 와중에도 여자 병사들은 살아있음을 확인해야 했다. 죽음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남자들이었고, 구석구석에서 삶을 발견하고 건져올리는 것은 여자들이었던 것이다.


     전쟁과 죽음을 대하는 서로 다른 두 태도에 대하여, 한쪽을 '사소하다'고 부를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 전에 이렇게 질문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사소하고 중요한 것은 누가 결정하는가? 하고.


     # 521.

     베를린에 입성하고, 한번은 길을 가는데 갑자기 맞은편에서 남자애 하나가 튀어나오더라고. 손에 기관단총을 들고서. 어린 독일시민군이었어. 이미 전쟁도 끝나가는 판인데. 그때가 전쟁 막바지였거든. 나는 손이 이미 기관단총에 가 있었어. 여차하면 발사할 준비가 돼 있었지. 아이가 나를 보고는 눈을 끔벅끔벅하더니 '앙'하고 울음을 터뜨렸어. 그러자 글쎄, 웃기지도 않게 나도 눈물이 나는 거 있지. 빌어먹을 기관단총을 들고 서 있는 그 아이가 어찌나 짠하던지. 나는 재빨리 아이를 무너진 건물의 개구멍으로 밀어 넣었어. 아이를 숨겨주고 싶었거든. 하지만 아이는 내가 자기를 죽이려는 줄 알고 기겁을 했어. 그때 내가 모자를 쓰고 있어서 내가 여자인지 몰랐을 텐데도 내 손을 덥썩 잡더라니까. 아, 그러고는 엉엉 흐느껴 우는데! 나도 모르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어. 아이가 너무 놀라 말을 못하더군. 어쨌든 전쟁은 전쟁이었으니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알까? 내가 어떤 여자인지.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치마를 좋아하는 여자와 바지를 좋아하는 여자 중에서 나는 어떤 여자인지. 그리고 그 각각의 색깔들이 '여자인' 나의 색깔인지 아닌지를.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읽으면서 그런 의문이 더욱 깊어졌다. 전쟁 중에 여자 병사들이 보여준 모습이 사회적으로 학습된 젠더의 발현이라면 우리 여자들은 죽음 앞에서까지 진짜 나를 발견하지 못한 샘이 아닐까? 그렇다면 아무에게도 학습되지 않은 나 그 자체는 어디서 어떻게 발견해야 하는 걸까?

     어찌 보면 여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고민일 수 있겠다. 무심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의 립스틱을 고르면서도 이게 진짜 내가 좋아하는 게 맞나? 학습된 거면 어쩌지? 하고 의심하게 되는 것은. 내가 느끼는 나에 대해서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은. 남자라면 그런 고민의 상황에 놓일 일 자체가 없을 수도 있겠다. 남자의 남자다움은 고무되고 숭배되기 때문이다. 남자는 스스로를 남자답게 꾸민 날 지하철에서 기분이 좋으면서 나쁜 이중적 감정 상태에 놓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좀 더 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깊이 더 오래. 그리고 결국 나는 나 스스로에 대해서 말하게 될 것이다. 매우 입체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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