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타임 여행자
반수연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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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집 #반수연 #소설 #문학동네



​제목 : 파트타임 여행자

자 : 반수연

출판 : 문학동네

발행 : 2025-9-30

띠지 :

반수연의 소설에는 논픽션의 우직한 근육이 있다.

그 힘을 신뢰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 하성란(소설가)

2024 김승옥문학상 수상 작가 반수연 신작 소설집

"애나는 미국에도 없고 한국에도 없는 사람이 되었다."

뒷표지 :

"집을 남겨두고 떠나온 사람은 아무리 오래 여행해도

파트타임 여행자라 부른다."

영영 떠나온 한국, 여전히 이방인일 뿐인 이국

그 사이에서 떠도는 파트타임 존재들의 생생한 로드 트립

2020년대가 요청하는 이민자 서사의 뉴노멀

반수연 소설집 <파트타임 여행자>에는 7개의 단편이 수록되어있다. 각각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설탕 공장이 있던 자리>

애나는 빛의 입자를 피워올리며 반짝이는 이스트강을 바라보고 있다.

(...)

애나는 찰리에게 커피 주문서를 내민다.

<조각들>

금요일 저녁 혼자 족발에 소주를 한 잔 하고 있을 때 벽에 붙여둔 종이의 한쪽 모서리가 떨어진 걸 발견했다.

(...)

출입문의 나사를 조일 때 손으로 전해지던 그 맞춤한 느낌이 되살아나는 것 같아 주먹을 쥐었다 폈다.

<파트타임 여행자>

사막의 평원은 풀도 땅도 연갈색으로 바짝 말라 있었다.

(...)

오늘은 부서진 것이 부서진 채로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 이 해안에 차를 세우고 밤새 파도 소리를 들어볼까 했다.

<춤을 춰도 될까요>

깜빡 잠이 드는 순간이면 정신이 외투처럼 몸에서 분리된다.

(...)

정목수가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려 애쓰는 사이 죽그릇을 든 은주는 이미 방으로 들어와 있다.

<프레살레>

이른 아침이었지만 공항은 번잡했다.

(...)

풀을 뜯는 한 무리의 양들이 초원에 내려앉은 구름처럼 몽글몽글해 보였다.

<빅터 아일랜드>

빅터 브리지를 건너 첫번째 출구로 빠져나오니 납작한 상자를 여러 개 엎어놓은 모양의 공단이 보였다.

(...)

피곤해서인지 규는 그것이 오로라의 빛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긴 하루였다.

<화분의 시간>

정희는 동쪽 바다가 보이는 호텔에서 혼자 나흘을 보냈다.

(...)

옷장 안에는 화려한 것을 좋아하던 엄마의 취향대로 울긋불긋한 옷이 빈틈없이 빼곡했다. 베란다를 가득 메운 꽃의 색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단편을 읽을 때 첫 문장은 인상, 마지막 문장은 분위기(정서)를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첫 문장보다는 마지막 문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마지막 문장이 전체적인 감정의 흐름을 납득할만하게 정리하고 있는가'로 마음 속에 남는지 아닌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중년(적어도 50대 중반 이상)이고 가족(특히 자녀)과의 사이가 좋지 않고 낯선 어딘가에 있다. 양로원이든 산속이든, 여행지든. 주된 공간에서 벗어난, 던져진, 낯선 공간에 주인공들은 놓여 있다. 마치 이민자의 처지가 이러하다는 듯.

반수연 작가는 "통영에서 태어나 캐나다로 이주"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대체로 원하지 않는 이주였지만 작가가 과연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정착의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으리라.) 작가의 말을 보면 "책으로 묶기 위해 지난 사 년 동안 쓴 소설들을 모아보니 길 위의 여행자 이야기가 유난히 많다. 어는 순간부터 이국의 이방인이라는 이름이 너무 서글퍼서 나를 여행자라고 생각하기로 한 것 같다."(272쪽)라고 소회를 밝히고 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상황과 외모는 제각각이지만 아마도 작가의 분신들일 것이다. 소설들 전반에는 고립감, 억울함과 같은 감정들이 묻어있다. 도망치거나 내쳐진 외로운 존재, 주변으로부터의 부당한 공격들은 "어떤 적의의 세계"에 빠져있는 주인공은 고단하다. 원하는 것들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간 그곳에서 발견하는 것은 희망이 아닌 지독한 현실 뿐이다. 젊었을 때는 불안, 늙어서는 애환. 원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 그래도 견디며 살아냈다. 하지만 그들에게 남은 건 부당한 평판 위에 서있다. 있을 곳을 찾지 못한 주변인의 서사는 작가 자신의 모습과 닮아있는지도...

(돌아갈 곳이 있는) 파트타임 여행자이기를 꿈꾸지만 이민자는 어쩌면 (있어야할 곳을 찾지 못한) 풀타임 여행자일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밑줄 그은 문장 하나를 소개한다.

"민은 아름답고 강한 혼자가 되고 싶었다는 걸 기억했다. 그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도 알았다. 늙는다는 건 두려운 일이었고, 죽는다는 건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산다는 건 애가 타는 일이었다. 민은 그 길을 살아남아 여기에 이르렀다."(106쪽)


민은 아름답고 강한 혼자가 되고 싶었다는 걸 기억했다. 그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도 알았다. 늙는다는 건 두려운 일이었고, 죽는다는 건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산다는 건 애가 타는 일이었다. 민은 그 길을 살아남아 여기에 이르렀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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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 어둠
조승리 지음 / 다산책방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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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리는 수필가이자 소설가이다. 30대 후반이고, 후천적 시각장애인이고, 안마사라는 직업을 거쳤다. 앞서 나온 에세이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달, 2024)를 먼저 읽었고 팬이 되었다.

그녀의 순도 높은 분노는 기분을 나쁘게 하기 보다는 뭐랄까, 공감되는 슬픔을 일으킨다. 나는 겪어보지 못한 사건들이지만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저 밑의 감정을 흔든다. 이번 연작소설은 에세이인 듯, 에세이 아닌, 에세이 같은 소설이다. 현실적인 타협안 말고는 미래를 꿈꿀 수 없었던 아이가 수필가, 소설가가 되었다.

눈이 먼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작가는 "궤도를 이탈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의심하지 않았던 삶이 산산히 부서진다는 것, 그래서 작가에게 세상은 부조리가 만연한 부당하고 불합리한 곳이다. 그래도 이건 에세이가 아닌데. 에세이가 아니니까 좀 행복한 모습을 그려주면 안되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 책의 첫 번째 단편 <네가 없는 시작>은 그래도 좀 달달하고 가슴 뛰고, 그러다 다시 가슴 저리고, 안타깝고 그런 소설이다. '너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구나' 하고 어떤 안심이 들었다. 하지만 여지없이 현실로 돌아오기는 하지만...

"거리는 길었지만 우리의 시간은 항상 짧았다."(14쪽)

감정을 나눌 시간도, 서로를 더 알아갈 시간도 부족했던 어린 연인은 그의 아버지의 죽음과 나의 실명으로 끝을 맺는다. '나'는 잠시동안 그의 '연인'이라는 역할에 몰두하지만... 자신이 도달하지 못할 미래를 직감하고 이내 다 버려버린다. 나(독자)는 그 절망과 결심을 헤아릴 수가 없다.

"도망친 건 나인데 쫓겨난 것처럼 기분이 처참했다."(30쪽)

다시 말하지만 <나의 어린 어둠>은 소설이다. 그런데 마냥 소설로만 보기 어렵다. (그건 아마 내가 작가의 에세이를 읽어서일 것이다) 추천의 글에서 윤성희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작가를 둘러싼 외부 세계와 작가 안에 웅크리고 있는 내부 세계가 합쳐지는 순간 이야기는 만들어진다. 현실 세계의 무 엇이 내 마음을 건드린다. 그러면 파장이 생기고 그 파장을 나 의 내부로 가지고 와서 지켜본다. 작가는 밖과 안이 끈끈하게 이어질 때까지 섬세하게 지켜보고 유연하게 대화를 한다. 그리고 정확한 문장으로 써나간다.

이런 과정을 거칠 때 소설은 '자전'이 된다. 쓰는 동안은 인물이 곧 내가 되니까. 그러니 '자전적 소설'이란 명칭은 사실 필요 없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독자들이 책을 읽는 동안 모두 '자전'이 되는 매직을 경험하는 일이다.

나는 이 글을 오감으로 읽었다. 열여섯 중학생이 되어 옆 집 할머니가 내어준 수박을 먹으며 울었다. 먹지 않았는데도, 달콤한 수박 맛과 짠 눈물 맛이 동시에 느껴졌다.

호박 부침개를 게걸스럽게 먹으며 속없는 농담을 하다 보면 어둠은 영원히 '어린' 상태로 남을 것만 같았다."

"다 똑같은 그림자였다."(112쪽)

그렇다. 오브제가 아무리 화려하고 찬란하여도 그림자는 그렇지 않은 것들과 같다. 검다. 그 안에 화려함과 찬란함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은 누구나 그늘진 모습이 있다는 뜻이 될 수도, 존재의 본질은 모두 같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모든 사람은 행복할 권리가 있고 행복은 착취당할 수 없다. 자신의 행복만이 먼저이고 우월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행복을 무기로 휘두르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을 보지 않는 사람은 입으로는 행복을 말한다고 할지라도 행복이 무엇인지는 생각해본적은 없을 것이다.

<브라자는 왜 해야 해?>에 나오는 중증장애를 가진 부희 언니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은 부당하지만 부희 언니 역시 다른 사람들에 의해 부당한 일을 겪는다. 결국 그 사람의 사정은 잘 들여다보지 않은 채 내 사정만을 앞에다가 잔뜩 늘어놓을 뿐이다. 나라고 다를까...

이것이 소설이라면 완전 말도 안되는 판타지 같은 행복을 자신에게 선사해도 될텐데... 허구의 세상에서조차 작가의 소설은 지독하게 현실적이다. 현실적이라는 말도 모자람이 있다. 현실이 오히려 소설 같다는 말이 있다. <나의 어린 어둠>은 모두 에세이처럼 읽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이 가지는 소설 같은 상황이 작가의 에세이 같은 소설에 '소설의 위상'을 갖게 만들어준다.

"상처가 있는 사람이라서, 오히려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는 거 아닐까."(111쪽)

<나의 어린 어둠>은 소설이라 주인공은 누나(내 안의 검은 새)가 되기도 하고 부장(브라자는 왜 해야 해?)이 되기도 하고 성희(나의 어린 어둠)가 되기도 한다. 모두 1인칭이다. <나의 어린 어둠>에서 주인공이 '성희'라는 이름으로 호명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소설에서 주인공은 역할적 명칭이나 대명사로 지칭된다. 이름을 불러주는 존재는 엄마, 혹은 그녀를 사람하는 아주 일부의 사람들이다. 달달하고 애틋한 첫사랑 이야기를 담은 <네가 없는 시작>에서조차 주인공은 이름으로 불려지지 않았다.

여기에 나오는 모든 일들이 작가가 겪었거나, 보았거나, 들었던 일이라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먹먹하다. 나(독자)는 모든 소설에서 주인공이 절망에 빠지는 시점(눈이 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을 늘 함께 통과해야한다. 이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마음 한 편으로 그 때를 내(독자)가 함께 하고 있음이 위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할 뿐.

쓰겠다고 하는 작가에게 힘이 되는 말만 하고 싶다.

당신은 써라. 나는 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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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일기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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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딱히 상식의 편도 아니었는데, 이 사회 상식의 수 준이 무너져가는 걸 지켜보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103쪽)

<작은 일기>는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의 계엄 발표부터 2025년 4월 4일 탄핵 선고일까지 작가가 경험한 사건과 감정들을 기록한 일기 형식의 에세이이다. 대한민국을 마음대로 하고 싶었던 윤석열이 가장 쉬운 방법으로 택한 '계엄'때문에 발생한 불안과 혼란, 분노와 박탈감 같은 것들은 많은 국민들에게 '내란성 위염'을 선사했다. 힘들지만 살아낼 수 있었던 일상이 망가질 수 있고, 그것이 회복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위기감을 전국민이 공감했고, 일상을 지키기 위해 행동했던 지난 날. 윤석렬이 탄핵된지 이제 4개월이 넘게 지났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아직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성난 표정으로 돌아보는 앞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평화롭게 하자고 거듭 소리 지르는 그에게 소리 지르지 말라고 외치다가 뒤쪽을 향한 말로 들릴까 싶어 입을 다물었다. 왜 그런 말투로 평화를 요구할까. 수많은 시민을 담은 이 자리가 왜 저 정도 입장과 말을 담지 못할까."(12쪽)

"페미당당 심미섭 활동가가 페미니즘과 성소수자를 주제로 발언하는 동안엔 사람들 호응이 거의 없었다. (...) 내게 망고를 나눠준 여성이 혀를 찼다. 여기서 저런 얘기를 왜 하느냐고 중얼거리더니 점점 목소리를 높였다. 어느 순간 참지 못하고 그의 무릎에 손을 올렸다. 그러지 마시라고, 여기 다양한 사람이 모여 있고 무슨 얘기든 할 수 있는 자리라고 말했다. 주변이 조용해 이 정도 말을 하는데 용기가 필요했다. 용기씩이나 필요할 일인가. 겁인지 분노인지 심장이 너무 뛰어서 외롭고 서러웠다. 내 자리가 아닌 곳에 않았다는 감각, 그보다는 김보리와 내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20쪽)

나 역시 광장에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노동자의 이야기, 성적 소수자의 이야기,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 세월호 이야기, 이태원 이야기... 광장에 있는 동안에도 사건은 계속 발생했다. 무안공항 비행기 추락 사고, 싱크홀 사망 사고, 산불 피해 등등. 다수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그래서 사라지는 수많은 소수들이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었다. 다수들은 소수들의 발언으로 다수가 원하는 중심 주제가 흐트러질까 두려웠고 그래서 그들의 발언을 불편해했다. 소수들은 다수들에게 '우리도 있다'고 연대를 요청했다. 소외는 서럽다.

전과는 다르게 이번 광장의 주역으로 떠오른 젊은 여성층의 조명 한 편에는 묵묵하게 자리를 지킨 중장년 여성들이 '우리도 있는데...'라고 쓸쓸하게 읖조린 부분을 보며 우리는 우리 안에서도 계속된 소외를 만드는구나 싶었다. 그러면서도 모두를 이야기하지 못한다면 아무도 말하지 않아야 하는가, 라는 생각이 들어 머리가 복잡해졌다.

"초반 몇 차례 집회에서 일어난 문제를 되짚고 개선하려는 노력도 분명 있는 것 같다. 광장에 앉아 타인의 말을 듣는 사람들 태도에 변화가 있다. 부당과 불편과 불쾌를 말하는 용기를 내준 누군가가 있었을 것이다. 내 마음의 불편이 맥락 있는 불편이며 모두의 고민이어야 한다고 말 꺼낸 사람들이 있어 이뤄낸 변화."(36쪽)

사회의 인정은, 입법으로 공인된다. 법은 다수를 대상으로 만들어지며, 선고 역시 이전의 심판의 궤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해왔고, 그렇게 굴러왔다는 그 단단한 무책임의 영역은 외침을 무음으로 만들어버린다. 우리는 우리의 인지범위 바깥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내 앞에 있는 것 먼저, 내 주변에 있는 것은 그 다음'으로 관리한다. 일상은 특별하게 되짚지 않아도 향유되고 영위된다. 윤석열의 오판은 어쩌면 계엄이 그렇게 다수에게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 거라는 나이브한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추운 밤을 그 자리에서 보낸 사람들도 놀랍고, 그들 에게 난방 버스며 음식이며, 바람 넘는 고개에서 버티는 데 도움이 되는 물품들을 즉시 보낸 사람들도 놀랍다. 그건 나 라에서 받은 것이 없어도 위기가 닥치면 들불같이 일어난 다는 어느 민족의 성격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남의 곤경과 고립을 모르는 척 내버려두거나 차마 두고 갈 수는 없는 마음들 아닐까. 남의 고통을 돌아보고, 서로 돌볼 줄 아는 마음들."(58쪽)

일상의 언어가, 추운 날씨에 서로 모여 나눈 온기가 내란성 위염에 시달리던 우리를 보듬었다. 우리는 일상으로의 복귀를 방해하는 무수히 많은 오염된 것들을 목도했고 말(언어)까지 오염시키려는 그들의 행태에 몸서리쳤다. 다양성이라는 말 뒤에 숨어 폭력은 저항의 다른 모습이라고 말하는 뻔뻔한 자들의 감수성을 보며 과연 우리가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인지 의심했다. 악은 우리에게도 있다. 하지만 누구나 악을 표출하지 않는다. 발화하려는 악을 누르거나 발화한 악을 통제하면서 살아간다. 누구에게나 있다며 자신이 정당하다는 듯 말하는 것은 악에 자신이 굴복했다는 고백이나 다름없다.

"지난 두달은 아름답고 좋은 것 들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지만 그보다 내 게는 오염의 시간이었다. 뭐가 오염되었느냐면. 매일 갱신되는 새로운 사건과 경악과 한계가 없는 것 같은 질 낮음으로, 어제의 경악이 오늘의 경악으로 무던 해지는 일이 반복되어서, 그런 식으로 세상을 향한 감귤이 오염."(106쪽)

삶은 한 번이기 때문에 가급적 이 번 삶에서 좋은 것들을 누리고 마치고 싶다. 그럴 때면 나는 5.18 때 한 청년이 남긴 말을 곱씹아본다.

"우리는 오늘 패배하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윤상원 열사(1950~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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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모든 새벽의 앞
마미야 가이 지음, 최고은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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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모든 새벽의 앞>은 SF 소설이다. 더이상살 수 없게 되어버린 지구를 사람들이 떠나나기 직전을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는다. 그의 이름이 호출되는 곳에는 언제나 "( )"로 대체된다. 내가 유추했을 때는 주인공과 떠나기 직전의 주민의 대화가 데이터로 남았으나 어떤 이유로 그 부분만 망실되어 버린 게 아닌가 싶다. 아니면 의도적으로 지웠거나... 호의로, 혹은 동정으로... 대화는 남았으나 누구(특정할 수 있는 개체)의 이야기인지는 남지 않았으므로 누구나의 이야기가 될 수도, 누구의 이야기도 아닐 수도 있게 되어버린...

"네. ( ) 씨의 뇌 속 메모리에서 기억을 추출해서 필요한 부분을 조정한 다음 새로운 뇌에 반영하고, 새로운 몸과 함께 ( ) 씨에게 제공하는 방법입니다. 이를테면 아라타 씨가 히마리 씨와 결혼해 ( ) 씨와는 어디까지나 이모와 조카로서 좋은 관계를 이어갔다는 식으로요. 원하신다면 어머니의 죽음도, 아버지의 학대도, 형제들과의 불화도 적절하게 조정하겠습니다. 가족의 기억을 모두 소거하고 싶다면 전혀 다른 기억을 생성할 수도 있고요. 어떠한 방향으로도 모순이나 혼란이 발생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조정할 테니 안심하셔도 됩니다."(130쪽)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우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주인공이 주저하자 주민은 '조정'을 제안한다. 주인공은 기능 정지가 머지 않은 구형 융합로봇이며 자신과 관계된 모든 사람들이 죽고 난 후 누군가와 대화하기위해 사람을 찾아 나섰고 대화 끝에 주민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 기억은 이미 우리의 머릿 속에서 왜곡되고, 소거되고, 새롭게 생성되는 등의 조정을 거치지만 그것은 의도대로 되지 않는다. 하지만 미래에는 그런 기술이 있다고 했을 때, 그것은 "좋은 일일까?"

"누군가에게 진실된 사랑을 받고 싶은 이 마음은 왜 사라지지 않을까요?"(표4)라고 가졌던 의문은 "직접 확인해보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것보다 멋진 일이 있다는 것을 분명 어딘가에서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요."(146쪽)는 결론에 이르르며 그동안 부정된 자기와의 화해를 시도한다. 역자는 후기에서 이렇게 적는다.

"자신과 타자를 향한 이중적인 갈망은 결말에 이르러 하나로 수렴된다. '나'는 괴로운 기억을 소거하는 걸 거부하고 멸망해 가는 지구에 남아 살아가는 길을 선택한다. 죽고 싶었던 사람에게 '살기'를 선택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가족과도, 신인류와도 불화하며 '쓸모없는'존재로 여겨졌던 '나'는, 마침내 '나' 자신으로서 행복해지고 싶다는 소망을 품는다. 언제가 만날 친구를 꿈꾸지만, 그보다 먼저 자기 자신과 친구가 되고 싶다고. 이는 효율과 합리성, 능력주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배제된 이들이 그럼에도 자신과 마주해 나가겠다는 선언이다. 폭력과 소외의 연쇄 속에서도 나를, 타인과의 연결을 포기하지 않는 이 쓸모없고 불완전한 존재를 통해, 작품은 진정한 인간적 가치란 무엇인지를 묻는다. AI가 모든 효율을 대신하는 시대 '쓸모없음'이 새로운 조건이 된 우리는 어떻게 '나'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만나는 연결의 가능성은 어떤 의미일까? 동시대의 절실한 물음과 공명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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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의에 대하여 - 무엇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가
문형배 지음 / 김영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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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의에대하여 #문형배 #에세이 #헌법재판소

호의

[명사] 친절한 마음씨. 또는 좋게 생각하여 주는 마음

누군가가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 혹은 그러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위를 우리는 '호의'라고 부른다. 양보하는 마음, 배려하는 마음은 자신을 향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상대의 성공이나 이익으로 반드시 연결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해가 되거나,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엄마, 아빠의 잔소리도 넓게 보자면 호의지만 그 호의가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는 별로 없지 않은가. 사실 이 호의라는 것이 애매한 것이, 권장되는 미덕이지만, 일회성 호의와 지속적 호의 중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서 평가가 달라진다. 이를테면 일회성 호의는 종종 선심성 행위나 마지못한 면피성 행위로 호도되기도 하고 처음에는 호의로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그렇지 않은 것들은 그 시작과 정체가 인정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착하면 호구된다'는 말은 이제 너무 공공연하게 퍼져있어서 언급하고 싶지도 않다. 착함, 친절과 같은 미덕은 언제나 공격받으며 행하는 사람들은 마치 약자로 전락하고 만다는 일종의 공포같은 게 퍼져있는 거 같다. 지난 12월 착하게 살아왔던 국민들을 호구로 본 내란 세력이 계엄 선포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국민들은 스스로 호구가 아님을, 그리고 약하지 않음을 온몸으로 보여줬다. 그리고 4월, 내란을 일으킨 대통령은 기어이 탄핵되었다. 그 탄핵의 가운데 문형배 전 재판관이 있었다. <호의에 대하여>라는 그의 에세이가 나온다는 소식에 지지 구매를 했다.

"아름다운 사람이 너무 많다. 절망하기엔 아직 이르다"

희망과 절망을 오가며 하루를 살아내는 사람들

그 보통의 삶을 관찰하고 성찰한 기록

표지 제목 아래에 이와 같은 카피 문구가 쓰여있다. 내용과는 좀 거리가 있는 거 같지만, 그렇다고 아주 아닌 건 아니어서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있다.

이 책은 문형배 재판관의 일상과 생각이 담겨있는 <일상은 소중하다>와 읽은 책의 내용과 생각을 기록한 <일독을 권한다>, 그리고 법 집행에 있어 어떤 부분이 보완되면 좋을지 제안하는 <사회에 바란다> 이렇게 3부로 구성되어있다.

그는 첫번 째 장에서부터 이렇게 말한다.

"과연 착한 사람에게 법은 필요 없는 것일까?" 그러면서 그는 "착한 사람일수록 법을 알아야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힌다. 법관의 역할은 약한 자를 구제하는 것이 아니다. 법이 정한 바대로 적용하는 것, 그것이 법관의 역할이다. 여기에 정의와 도덕은 개입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착한 사람일 수록, 양한 자일 수록 법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재판은 예방을 위한 게 아니다. 결과에 대해 판단하고 공권력으로 심판하는 것이다. 법은 권력자들이 만들고 그들이 사용자가 되므로 법의 심판을 받더라도 피해가거나 양형이 낮아질 수 있다. 법은 권력자를 위해 만들어져있기 때문이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은 대개 법 앞에서 초라해진다. 그러니 미리 알고 그런 상황이 되지 않도록 하거나 최대한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야한다는 게 문형배 재판관의 생각인 거 같다.

"과연 아침 네 개, 저녁 세 개가 아침 세 개 저녁 네 개와 같을까? 대부분의 분쟁은 저녁이 아니라 아침에 네 개를 차지하겠다는 데서 생기는 것은 아닐까?" (80쪽)

"우리 사회의 개혁이 지지부진한 이유가 개혁을 반대해 서라기보다는 과도기의 손실을 누가 감수할 것인가에 대 한 합의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83쪽)

"결론적으로 역사의 진보를 믿는 자가 이를 감수해야 한다 고 본다. 역사의 진보를 믿는다는 것은, 변화해야 하며 그 변화가 내일은 될 거라고 믿는 사람이므로 오늘 당장 보상받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84쪽

문형배 재판관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장의 보상이 없음을 '감수'할 수 있다는 태도를 가질 뿐이다. 이때엔 더 고차원의 보상이 필요한거다. 될 거라는 믿음, 나의 감수가 헛되이 되지 않을 거라는 신념 같은 것들 말이다.

"같이 간 아이들 중에는 어릴 적 청력을 잃었다가 원장님의 노력으로 3년 전에 인공와우 수술을 두 차례 받고 언어 치료를 하는 이가 있었다. 아직 말이 아주 서툴렀다. 어릴 때 말을 들을 수 없어서 지금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하 였다. 아! 대화란 듣는 게 먼저이고 말하는 게 뒤구나. 나는 말을 먼저 하고 남의 말은 나중에 듣는데···" (95쪽)

"일상의 대화에서 소통이 잘되려면 상대방의 입장에 공감을 먼저 표하고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을 말하는 게 바람직하다. 상대방의 잘못만 부각하는 방법은 효과적이지 못한 것 같다. 즉 "Yes, But"이 "Yes, Not, Because" 보다 낫다." (123쪽)

"과거의 일이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사람들이 기억할 때 그것은 역사가 된다." (129쪽)

"세상에 돌려주는 게 마땅할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두려 운 것은 소멸이 아니라 의미 없는 소멸이 아닐까?(안상헌,

(생산적인 삶을 위한 자기발전 노트 50》)" (131쪽)

일상 日常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

일상은 소중하다. 재판이 일상인 사람도 있겠지만(문형배 재판관과 같이) 대체로 재판은 많은 사람들의 일상을 망가뜨린다. 일상은 늘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이다. 해가 뜨면 일어나서 씻고 밥 먹고 학교에 가야할 사람은 학교로, 일터로 가야하는 사람은 일터로 가고, 집에 돌아와서는 씻고 TV를 보다가 노곤한 몸을 뉘여 편안한 잠을 청하는 것이다. 심심하고 재미없을지라도 그것은 절대적이고 부서져서는 안되는 소중한 것이다. 우리는 일상을 폄하하지만 그것이 소중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일상의 미세한 반짝임은 모르지만 그렇다고 일상이 주는 안정감과 힘까지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12월부터 4월까지 부단히 광장으로 나갔던 것이다.

재판의 본질은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죄추정주의도 있는 것이고. 하지만 재판은 끝나고 나면 죄에 비해 벌이 약하다는 소리가 따라붙는다. 사형을 실행한다고 해서, 양형이 무겁다고 해서 범죄율이 낮아지는 건 아니라는 연구는 알겠지만, 그렇다고 양형을 낮게 한다고 감화되는 것도 아닌 거 같다. 법이 법답지 않다는 것은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의 목소리로 드러나지만, 그건 아마도 법관의 유착, 도덕성, 그리고 법 조항의 모호함으로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는 문제, 적용할 수 있는 법 조항의 부재 같은 것들이 모두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미국의 양형(누적 100년을 넘어가는)을 보며 왜 저렇게 하지 못하는지 안타까워 한다.

"모스크바공국에서는 절도죄를 저지른 자는 사형에 처해졌다. 그래서 모스크바공국에서 절도죄를 저지른 사람은 피해자를 죽였다.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에 나오는 내용이다." (205쪽)

법이 너무 엄정하면 어차피 죽을 거 더 나쁜 짓을 하자는 식으로 빠질 수 있다는 사례가 존재한다. 이는 범죄 예방적 측면에서의 법 집행에 위반된다. 생각해보니 그럴 수 있겠다 싶다. 범죄는 언제나 일어나는데, 일어나는 모든 범죄가 잔혹한 강력 범죄라면 세상이 더욱 혼란하고 불안하겠다 싶다. 어떤 균형점을 찾아야한다는 소리인데 그 균형을 아직도 찾고 있는 인간이 당장 찾을 수 있을 거 같지는 않다.

"이성의 원리에 입각할 때 우리는 신이 있다고도 또 신이 없다고도 확언할 수 없으며, 이 점에서 유신론자와 무신론자는 피장파장이다. 그러나 '신이 있다'와 '신이 없다' 중에서 무엇이 우리에게 수지맞는가를 따져보자고 제안한다. 이것은 지극히 타산적인 계산 방법이며 파스칼은 내기의 확률론을 동원하여 '신이 있다'가 압도적으로 이롭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248쪽)

위 내용은 파스칼의 <팡세>를 읽고 정리한 내용이다. 나는 신의 존재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서 이 부분을 발췌해서 여기에 적어놓았다. 신이 존재한다고 가정 할 때 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다행, 아니면 허탈하고 좀 그럴테지만 손해를 볼 건 없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할 때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저 사실의 확인할 뿐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 알고보니 없다고 생각했던 신이 존재한다? 그럼 엄청난 불이익이다. 그래서 확률적으로 신을 믿는 것이 유리하다.

"남녀 평등을 주장하는 여성의 눈에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볼 만한 주장도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이 극복하면 될 것이다." (266쪽)

우리는 종종 이전 문헌(위의 내용은 루소의 <에밀>을 읽고 쓴 내용 중에서 발췌)을 볼 때 지금의 기준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당시의 상식이 지금의 기준으로는 미달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내용이 가치 없다고 할 필요까지는 없다. 왜 이렇게 이야기했고, 그래서 어떻게 바뀌었으며, 지금은 어떻게 평가되고 있는지를 살피고 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결정하면 될 일이다. '극복'이라는 단어가 좀 갸웃하지만 무슨 뜻인지는 알겠다.

"시민은 절대 복종, 아니면 피신, 아니면 투옥, 아니면 유형, 아니면 총살, 이 중 어느 하나를 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정부만 믿고 있다가 서울에서 후퇴도 하지 못하고 역도들 치하에 있는 이상 그들에게 순종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고 보니 조국에 대한 반역 행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289쪽)

국가의 혼란은 아무 행위도 하지 않은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 수 있다.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나치즘은 동조하지 않았던 모든 국민들조차 죄인으로 만들었다. 방조자로써 잔혹한 범죄를 묵인했다는 죄목으로. 우리나라도 한국전쟁 때 서울에 남아있다가 북한군에게 음식이나 옷을 제공했다고 부역자로 몰려 국군에게 처형당했던 역사도 이에 해당할 것이다.

"만족을 얻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욕망을 줄이는 방법과 욕망을 충족하는 기회를 늘리는 방법이다. 전자는 안정적이나 현실에 취약하다. 후자는 강하나 불안하다. 인생은 어쩌면 전자와 후자 사이를 헤매는 건지도 모른다." (297쪽)

위의 내용을 바탕으로 요즘 나오는 기사를 보면 젊은 세대들이 욕망을 줄이는 방법으로 만족을 얻으려고 하는 식으로 읽을 수 있겠다. 삼포, 오포 같은 말들이 계속 언급되고 있으니까. 하지만 욕망을 줄인다는 게 가능한가. 욕망은 포기가 되는 것인가. 욕망은 혹시 우울이나 불안, 분노 같은 것으로 변환되고 있는 게 아닐까. 충족되지 못한 욕망의 변환물들이 이 사회를, 이 세계를 어둡게 물들이고 있는 게 아닌가.

욕망은 허기와 같아서 늘 무언가를 원한다. 허기는 뭔가 먹는 것으로만 해결될 수 있으므로 욕망은 오직 원하는 것을 갖는 것으로 채워지고, 해결될 수 있다.

"판사들이 다 가난했던 경험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김훈의 <흑산>을 읽고 나면 가난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가령, 배고픔을 면하자면 오직 먹어야 하는데 많은 끼니 중에서도 지금 당장 먹는 밥만이 배를 채운다는 내용이 그렇다. 아침에 먹은 밥이 저녁의 허기를 달래줄 수 없으며, 오늘 먹는 밥이 내일의 요기가 될 수 없음은 사농공상과 금수축생이 다 마찬가지다." (305쪽)

오늘의 밥을 박탈당한 젊은 세대들의 허기는 과연 어떻게 해야할까?

"톨스토이는 헨리 조지의 토지 사유권 폐지 주장에 공감하면서 소설 곳곳에 헨리 조지의 사상을 소개한다. 예컨대 농민이 궁핍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말하는 대목이 그것이다. 그들은 땅을 가지지 못했다. 땅은 토지에 대한 특권을 이용하여 농부들의 노동으로 생활해나가는 지주들 수중에 있기 때문이었다."

예전 밈으로 초등학생에게 국회의원에게 바라는 점을 이야기해달라고 했더니 "출석이나 잘하세요"라고 했다는 것은 기본부터 충실하라는 말이다. 법관들의 기본은 무엇일까. 나는 "스스로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다"라고 인지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비단 법관들만 생각해야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자신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자신이 해야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잘 생각해야한다. 그리고 사건과의 별개의 문제로 심판이 잘못되었을 때, 스스로 책임을 져야하는 무거운 자리라고 생각해야한다. 법원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곳이 아니다.

오늘도 무거운 뉴스기사들을 본다. 피해자는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 앞에서 살려달라고 발버둥을 치고, 가해자는 (자신을) 죽일 수 없는 사람 앞에서 (내가 한 일은 모르겠고 어찌되었건)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을 친다. 이 부조리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법관들은 선례를 만드는 것을 매우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다. 예전 재판을 참고하면서 양형을 한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달라지고 있는 세태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거 같다. 법원의 시간은 매우 느리게 흐르는 거 같다. 하지만 뭐든 처음이 중요하다. 처음은 혼자서 모든 것과 부딪혀야 하는 부담이 있지만 동시에 처음이라서 허용되는 것들도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이 처음을 마치 무기처럼 휘둘러서는 나중이 곤욕스러울 수 있지만... 아무튼) 처음에 제도가 바로 서지 못한다면 오래가지 못하는 것들이 많음을 우리는 역사에서 많이 본다. 생각이 많아진다.

중언부언했지만... 김장하 선생의 선의가 문형배 재판관을 있게 했고 문형배 재판관의 선고가 있어 대한민국이 가능하게 되었다. 결국 선의가 대한민국이 가능하게 한 것인데 그렇기 때문에 나는 감히 선의가 이 세상을 지탱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선의가 평범해질 때 세상은 가능하다. 착함의 연대로 선의 힘을 키우자.

p.s. 문형배 재판관은 나무와 독서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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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 2025-09-15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족과 같은 말을 덜어낼 줄 알아야하는데... 아직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