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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 - 스웨덴의 한가운데서 우리가 꿈꾸는 대한민국을 만나다
최연혁 지음 / 쌤앤파커스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마감은 언제나 술을 부른다. 때로는 한창 바쁜 중에도 주신이 찾아오기도 하는데, 며칠 전 그날이 그랬다. 무언가 뒤숭숭하고 풀리지 않는 그런 상황, 망망대해에 외로이 떠 있는 작은 섬처럼 존재가 미소함을, 별처럼 빛나지 않음을 피부로 느끼는 그런 날.

 

도로를 가득 메운 차, 그 도로 한가운데로 버스가 달리고, 그 옆으로 늘어선 승용차, 그 틈바구니에 택시들이 거북이처럼 기어간다. 빨간불이냐 파란불이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버스는 주로 달리고, 택시는 늘 기어간다. 사실 그들이 운전대를 잡은 까닭은 자기네 인생에 빨간불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잘 다니던 직장에서 어느 날 갑자기 정리해고 당한 아버지들, 숱하게 많은 자소서를 제출했지만 낙방하기만 수백 번한 친구들, 그들 모두 막막한 인생 앞에서 특별한 기술 없이 하나만 있으면 밝힐 수 있다는 을 선택한 것이다. 운전대는 그들에게 유일한 구원이었다.

 

그날 사당까지 가는 택시, 남산터널을 지날쯤 말문이 트인 기사 아저씨는 연신 이게 우리 택시 기사네 현실이요했다. 쌓인 게 많은 모양이었다. 6일 하루 12시간 2교대, 허리 빠지게 운전석에 앉아 있어도 월 200을 벌기 힘들다 했다. 회사 택시는 사납금에, 개인택시는 LPG값에 살 길이 막막하다는 내용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날은 우리네 현실이요그 말이 유독 절절하게 다가왔다.

 

12시가 넘은 늦은 밤, 중앙차선에는 간혹 심야 버스가 달렸다. 곧 내가 갈아탈 버스도 스쳤다. 지금 대통령이 시에 있을 때 빨강파랑초록 옷을 입힌 그 버스 기사 아저씨의 연봉이 3,000만원이라고 아저씨가 일러 주었다. 좋은 대학 나와서 대기업 들어가는 신입사원의 초봉과는 견 줄 액수가 아니지만, 그 말을 하고 있는 우리에겐 꽤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지금도 택시 운전대를 놓고 대형면허를 따려는 이들이 많다고 했다. 그를 위해서도 헤치고 나갈 관문이 많았다. 대형면허야 쉽게 따는 것이고, 그 뒤로 마을버스 경력을 쌓아야 시내버스에 원서라도 들이밀 수 있다고 했다. 그마저도 시청 과장 빽을 써서도 들어가기 힘들다 목소리 높인다.

 

그날 우리가 한 잔 들이킨 장소는 동교동삼거리였는데, EJ는 동교동삼거리에서 연신내 방면로 가는 택시는 없다고 했다. 조금 더 걸어 홍대까지 나와 택시를 잡았다. 그렇게 나는 머리가 반쯤 벗겨지고 깡마른 아저씨의 택시를 잡아타고 사당으로 출발했고, EJ는 길게 늘어선 택시 중의 한 대에 올랐다. 둘이 탄 택시는 시속 90km로 시내를 달리다가, 110km까지 속도를 내더니, 급기야 사고까지 날 뻔했다고 한다. 심지어 코너를 돌 때도 속도를 완전히 줄이지 않아, 한 블록 앞에 집을 두고 티 안 나게내렸다고 했다.

 

우리 기사네 현실이요를 입에서 내리지 않던 그래도 순하게 생긴 아저씨는 연신내정릉은평뉴타운미아리는 택시 기사들에겐 무덤과 같은 곳이라고 했다. EJ는 죽음 문턱에 간 듯했지만, 아저씨는 이미 무덤 안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공차로 서울시내를 도는 게 가장 무섭다고 했다. 심야할증이 붙은 그 시간 전후로 손님을 태우고 빠르게 왔다 갔다 해야 하는데, 그 먼 곳까지 갔다가 다시 공차로 돌아오는 날은 장사를 망친 날이라고 했다. 손님을 태우고 광화문에서 종로3~5가까지 가면, 동대문을 기어이 거쳐야 하는데, 그 길을 지나기가 가장 무섭다고 했다. 길게 꼬리를 물고 택시를 잡는 행렬 대부분이 서울 동북부 외곽 주택 밀집 지역으로 가려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란다. 일진이 안 좋아 그쪽 방향 손님을 태운 날은 시간 단축을 위해 난폭 운전을 하는 사람이 많고, 그러니 한 달에 1~2명씩은 꼭 인생을 서둘러 간다고 했다.

 

이틀 후, 구로에서 안양까지 가기 위해 잡은 안양 택시젊은 아저씨는 택시 판 강남 스타일을 알려줬다. 강남에는 수도권 서남부 지역에서 올라온 택시들이 모인다. 대략 성남안양(과천, 의왕, 군포) 차들인데, 이들에게 쪽박은 자신의 지역으로 가는 승객들이었다. 소싯적 여자에게 인기 좀 있었겠다 싶게 잘생겼던 젊은 아저씨는 돈 벌려면 용인 가는 손님을 태워야 한다고 점잖게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거리는 훨씬 멀지만 고속도로로 달려 시간은 단축되고, 돌아올 때는 용인으로 갔던 대리 기사를 명당 3000원에 태워 올라올 수 있다 했다. 공차로 돌아오더라도 안양 손님 태우는 것보다는 훨씬 이문이 남는다 했다. “평촌이요하고 당당하게 외친 중장거리 손님인 나는 순간 쫄아 오늘 장사 쫑쳤네요?” 하고 물었다. 다행이 구로에선 안양으로 돌아가는 게 낫다는 위로의 대답을 듣고 안도했다.

 

다시 그날로 돌아가자. 깡마른 아저씨는 택시 기사네 밥줄만 걱정하진 않으셨다. 하루 세끼 걱정에 목소리 톤을 조금 더 높일 법도 한데, “대중교통 확장을 지향하는 서울시의 현 정책은 바른 길로 가고 있다했다. 택시 수는 줄여야 한다는 말에는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체념이 묻어 있었다. 택시 수를 줄이고, 사납금 비율을 낮추어 택시 기사들이 먹고 살 길을 열어주면 좋겠다는 아저씨의 마지막 기대가 자판을 두드리게 한다.

 

인생의 불을 환하게 밝히겠다며 운전대를 잡는 이는 드물다. 켜졌다 꺼졌다 하는 택시 등처럼, 인생을 빈 차가 아닌 그래도 무언가 하며 살아보겠다며 마지막 선택을 한 이들이다. 스웨덴과 나미비아를 한국 복지국가의 모델로 스웨덴을 모델로, 나미비아를 복지국가 반면교사로 상정한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최연혁, 쌤앤파커스)를 읽으며 가장 부러웠던 스웨덴의 모습은 사회안전망이었다. 빨간불이 켜진 사람들을 1차적으로 직장이 책임지고, 다음엔 국가가 감당한다. 그 뒤에는 가정이라는 뒷배가 있다. 가정이 뒷배 역할을 할 수 있는 이유도 역시 사회안전망덕분이다. 한국에선 택시가 그 역할을 하진 않았을까, 이젠 그 안전망마저 부실해진 마당에 그 다음 대책은 무엇일지, 우리가 쓸 수 있는 카드가 딱히 손에 잡히지 않아 갑갑하다. 별처럼 빛나지 않더라도, 미소한 먼지일지라도, 너 거기 있고, 나 여기 있네, 서로 보듬어 안고 살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는 그런 날들이 계속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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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인의 말을 귀담아 들으라


오랜만에 일을 시작하면서 포스팅이 늦었다. 달랑 1달에 2주를 나가는 것뿐인데, 글을 쓸 여유를 내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건 그래도 일하러 나가는데 남은 2주는 쉬어야지 하는 안락한 마음 때문이었다.


다행이 2주 간의 빡빡한 마감, 2주간의 굴러먹는 시간의 반복 속에 1장의 사진과 마주쳤다. 마이클 안토니우스 우리(MU)가 페이스북에 남긴 몇 장의 사진 중 하나였다. MU는 동티모르의 그리움과 애정을 담아 '보고싶다'는 글을 남겼다. 덕분에 푹푹 찌는 여름 한가운데서도 잠시 웃을 수 있었다.



파사베로 가기 위해 트럭에 오르자마자 찍은 사진이다. 소가 보이고, 브라더 송의 뒷모습, 모자에 스카프로 칭칭 감아 자외선 완전 차단에 도전한 도라와 아직은 하얀 연정이, 이제 막 살이 빠지기 시작한 내모습과, 이런 여행일 거라 예상했다는 표정의 윤애 누나가 보인다. 그리고 그 주변에 우린 한국인 아닌 현지인이오 하는 표정으로 있는 분들이 서 있다.


피부 하얀 무리가 사람들 눈에 띄긴 했나 보다. 유엔 경찰 1명이 우리에게 접근했다. 경찰이 맞나 의문이 들 정도로 뱃살이 많던 그는 우리 중 한국에서 온 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2003년 3월 오에쿠시 에까뜨 강에서 숨진 상록수 부대원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공원에 추모비가 있으니 꼭 들러 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동티모르 주재 한국 대사관은 이날의 사건을 이렇게 짧게 소개한다. "2003.3.6 오꾸시 소재 에까뜨강 도하중 집중호우로 불어난 강물에 휩쓸려 4명 순직, 1명 실종되었으며, 그 추모비가 오꾸시 공원에 건립됨"(동티모르 주재 한국대사관', 동티모르 개황', 2009.6)


그 죽음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는 그 죽음이 거룩하고 성스럽다고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현지 주민들의 이야기는 180도 달랐다. 집중호우로 불어난 물은 절대 건널 수 없다고 수없이 말렸지만, 제 정신이 아니었던 그들이 이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다리를 넘었다는 것이다. 마른 강을 달리는 트럭 위에서 윤애 누나는 우기만 되면 강을 건널 수 없다고, 우기 동안에 건너 마을은 고립된다고 거듭 말했다. 이런 안내와 충고는 이후 1년간의 일정을 정할 때 많은 도움이 됐다. 우기를 피해 건기에만 오에쿠시를 드나들었다.


무슨 일을 하는지 통 이해되지 않는 유엔 경찰을 뒤로 하고 우린 소와 함께 쩍쩍 갈라진 강바닥을 건넜다. 사실 2000년 동티모르 사태 때, 인도네시아 군이 다시 밀고 들어올 때도 유엔군은 가장 먼저 자국 또는 주변국으로 도망가기 바쁘지 않았던가. 우리가 그 죽음을 통해 교훈삼을 수 있는 건 단 하나였다. "현지인의 말을 귀담아 들으라"


우리가 올라 탄 노란 트럭엔 우리만 타는 게 아니었다. 3마리의 소, 그 등에 올라 탄 새카만 쇠파리, 뚜민, 퀴비셀로, 우시타케노, 파사베로 가는 사람들이 무리지어 하나하나 타기 시작했다. 마른 강을 걸어 가던 이들도 차를 세우곤 합승하기도 했다. 난간에 걸터 앉고 여기저기 쪼그려 앉으니 족히 30명이 넘는 이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팔 힘이 좋은 남자들은 천막을 덮도록 해 놓은 쇠 위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덜컹덜컹 하는 차 위에서.


먼지 폴폴, 꾸불꾸불 산을 넘어, 퀴비셀로에 소들을 내리고, 파사베에 도착했다. 알고 지내던 집에 가방을 던져 놓고는 말레랏으로 향했다. 오에쿠시에서 가장 높다는 마을, 그래서 건기가 한창인 중에도 긴팔을 챙겨가야 초저녁을 날 수 있다는 곳이었다. 평화캠프에 참가했다는 파사베 마을 청년의 뒤를 따라 지름길로 올랐다. 모든 지름길은 험하다. 거의 수직으로 오르는 길이었다.


말레랏의 노을을 뒤로 하고 우리는 한 무덤 앞에 섰다. 길을 가던 청년을 불러 세웠다. 물을 길러 집에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양 손에 들고 있는 물통이 꽤나 무거워 보였다. 그에게 무덤에 관해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어려운 부탁은 아닌 듯했는데 그는 주저했다. 영어를 못한다, 말을 잘 못한다 하던 그에게 현지어로 말해도 된다고 사정했다. 그가 망설인 이유는 언어에 있지 않았다. 그 자리는 그의 형이 묻힌 곳이었다. 독립을 지지했던 그의 형은 인도네시아 독립군에게 죽었다고 했다. 그 뒤로 붉게 타던 노을이 어둠으로 사라졌다.


그를 다시 만나 건 다음 해 4월 부활절 즈음 오에실로에서였다. 그새 초등학교 선생님이 됐고, 우리가 진행하는 평화학교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특히 저녁 시간 그의 처소에서 같이 마시던 커피, 그 달콤함이 계속 입가에 남아 있다. 선한 눈망울 그렁그렁 맺힌 눈물 방울을 애써 참으며 그의 형 이야기를 해 주던 착하디 착한 그가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을 만나며 어떤 미래를 이야기할지, 어떤 과거를 들려줄지 기대하고 있다.


MU는 그날 그 말레랏의 밤, 선생님에게 "인도네시아인으로서 깊이 사과한다"고 말했다. 직접 가해자는 아니었지만, 책임을 기꺼이 지겠다는 이들에게서 평화의 싹은 트기 시작한다. 그러나 말보다 행동이다. 그게 늘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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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테테(Gutete, 이 마을의 이름이 G로 시작하는지 K로 시작하는진 정확하지 않다)에서의 하룻밤은 열정적이었다. 마을 분들은 우리를 성심껏 환영했다. 나빤-오에실로(Napan-Oesilo) 국경을 넘자 왜건 한 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짐칸에 움직일 틈도 없이 철썩 붙어 앉아 두세 시간을 달려 마을에 도착했다. 엉덩이는 딱딱해 지고 다리엔 쥐가 났지만 이런 여행은 호사였다. (우리 여행의 목적 중 하나는 현장의 교통 수탄을 익힌다도 있었는데, 그 점에서 이번 여행은 사치스럽기도 했다. 바로 다음 글에서 언급할 말레랏(Malelat)까지의 이동 수단을 보면 얼마나 호사였는지 짐작하고 남을 것이다.) 우리에겐 호사였으나 작은 왜건은 버티기 힘들었는지 마을을 바로 앞에 두고 퍼져 버리고 말았다.

 

구테테는 산악마을이다. 높은 길을 구불구불 돌아 마을 어귀에 도착했다. 이미 그곳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곧 춤판이 벌어졌다. 동티모르 전통춤, 떼베떼베였다. 10여 명의 여자들이 북소리에 맞춰 발을 구르는 군무다. 동티모르에서는 마을에 큰 행사가 있거나 귀한 손님이 방문할 때 꼭 이 춤을 춘다. 마을은 축제 분위기였다. 떼베떼베를 춘 여성 중에 한 명이 나와 윤애 누나의 목에 타이(tai)를 걸어 주었다. 동티모르를 대표하는 상품이었다. 마을 어른이 손으로 직접 짠 것이었다.


마을은 잘 정돈돼 있었다. 이랑과 고랑이 잘 정리된 밭과 저장을 위해 말리고 있는 작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구테테를 이렇게 가꾼 이는 서양에서 온 신부였다. 우리가 갔을 때 그는 본국으로 출장 중이었기에 직접 보진 못했다. 그의 이름이 리치몬드였는지 레이몬드였는지도 호주 출신인지 영국에서 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윤애 누나의 설명은 이렇다. 인도네시아의 폭정이 그에 달하던 때 오에쿠시 지역의 부모를 잃은 아이들, 집을 잃은 사람들, 위태한 삶을 사는 이들을 불러 마을을 꾸렸다. 그는 그들의 보호자(Fadre)가 되기를 자칭한 이였다.



 

간단한 식사로 파티가 시작됐다. 카사바와 고구마 등을 이용한 간식거리가 나오고, 염소 고기와 각종 채소로 배를 채웠다. 마을에서 직접 재배해 로스팅까지 했다는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이장님 댁 뒷마당으로 나갔다. 염소 머리 하나가 내 살점이 네 뱃속에 있다며 원망하듯 쳐다보고 있었다. 놀람도 잠시 해맑은 호기심으로 타국의 청년들을 바라보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였다. 꾸밈 하나 없는 아이들과 함께 신나게 한 판 놀았다. ‘얼음(es)’, ‘을 외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마당을 채웠다.

 

그렇게 해가 지고 이장님이 안내해 준 숙소에 둘러앉았다. 그런데 웬일인지 윤애 누나의 표정이 밝지 않다. 마을 분들이 우리를 투자자 내지 개발 원조자로 생각하는 듯하다고 말했다. 생각 이상의 환대가 부담이고, 그들의 기대와 우리의 목적이 다르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다고 했다. 동티모르에 있은 지 수 년, 다른 지역을 많이 돌아본 코디네이터의 감이었다. 근심이 짙어갈 때, 이장님이 다시 들어왔다. 이제 댄스파티가 준비됐으니 다들 나오라는 거였다.

 

몸치에 박치, 거기에 음치를 더한 내겐 오지 않았으면 하는 시간이었다. 무겁게 발걸음을 옮겼다. 동티모르에서 댄스파티가 차지하는 위치는 크다. 사람들은 춤과 음악을 좋아했다. 그런 그들의 초대에 응하지 않는 건 큰 결례였다. 이해는 달라도 관계는 소중했다. 그렇게 자리에 앉았지만 가시방석이었다. 그 맛있던 카사바와 고구마, 커피 모두 돌처럼 보였다.

 

그렇게 어려웠던 하루가 지나고 동이 트자마자 우리는 마을을 빠져나왔다. 예의 그 왜건에 올라 버스가 파사베로 가는 차들이 있는 삼거리 시장으로 향했다. 마땅한 교통편이 있는지 찾아야 했다. 30여 분 끝에 퀴비실로에 소를 배달하고 파사베로 간다는 트럭을 찾았다. 그렇게 소가 기다리고 있는 짐칸에 올랐다. 덩치 좋은 소들의 등 뒤에는 쇠파리들이 붙어 있었다. 소는 물론 사람의 피까지 빨아 먹는 무시무시한 녀석들이었다. 반바지를 입고 있던 우리 일행을 가장 반긴 것은 쇠파리가 아니었을까. 우리는 이제야 진짜 여행의 출발지에 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당장의 쇠파리보다는 오에쿠시의 넒은 대지, 뜨거운 태양, 트럭 위로 부는 바람에서 여행의 낭만을 느끼기도 했다.


*사진은 같이 여행한 명식이가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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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 대학살을 다룬 내일 우리 가족이 죽게 될 거라는 걸, 제발 전해주세요!(필립 고레비치, 강미경 역, 갈라파고스, 2011)를 읽고 있다. 편집자는 책의 부제를 아프리카의 슬픈 역사, 르완다 대학살이라고 붙였다. 르완다 인구의 85%인 후투족이 15% 정도에 불과한 투치족을 청소, 100일 동안 인구의 10분의 1100만 명이 학살당한 사건이다. 19944월이었다.

 


저자 필립 고레비치는 이 사건의 시작을 벨기에 식민 통치 시절까지 끌고 올라간다. 벨기에가 착취 지배 구조를 수월하게 완성하기 위해 소수민족인 투치족을 지도자 계급으로 다수민족인 후투족을 노예계급으로 나눈 게 피를 부른 원인이었다는 게 그의 해석이다. 이전까진 평화롭게 살던 이들이 서로의 피를 열망한 건 이때부터였다. 제국주의 인간 문명이 지닌 야만이 제노사이드를 부른 셈이다.

 

개척자들의 출발점은 르완다였다. 르완다의 슬픔은 동티모르의 비극과 닮았다. 티모르섬의 동서 분화는 제국주의 시대 역사로 올라간다. 500년 전 포르투갈 함대는 티모르섬을 점령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의 인도네시아 지역(당시는 수백 개의 소수민족이었다)에 진출한 네덜란드가 티모르섬까지 밀고 들어왔다. 밀리고 밀리던 포르투갈은 네덜란드와 티모르섬 절반을 놓고 협상했고, 양국은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포르투갈은 협정을 맺으며 서티모르 지역의 오에쿠시 지방을 달라고 요구한다. 포르투갈 군인이 처음 정착한 상징적인 장소였다. 이 지역은 인도네시아 점령이 끝나가던 1990년대 후반 가장 잔인한 학살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2008년 한 달간의 평화캠프가 끝나고 현지 역사 기행이 시작됐다. 우리들이 처음 밟은 땅이 오에쿠시였다. 동티모르 영토이지만 서티모르 속에 속해 있어서 육로로는 수도인 딜리에 들어갈 수 없다. 꼭 나크로마(Nakroma)라고 하는 배를 타고 움직여야 한다. 현지인들이 섬 속에 섬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지역 언어인 다완어를 가장 많이 사용한다. 동티모르인들은 보통 떼뚬(동티모르어)과 인도네시아어를 둘 다 사용하는데 이 지역 주민 중 연세가 지긋한 노인들은 인도네시아어를 모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투민(Tumin)이라는 마을 촌장님이 그랬는데, 인도네시아 군과 동티모르 민병대의 학살을 피해 산속 굴에서 생활하다 보니 인도네시아어를 배울 기회도 그럴 마음도 없었다고 한다. (이 일과 관련한 에피소드는 우노와의 여행에서 다시 한 번 이야기하겠다.)

 

첫 번째 오에쿠시 여행 일정은 이랬다.

 

'나빤(Napan, 인도네시아 국경 마을) -> 오에실로(동티모르 국경 마을) -> 꾸테테(Kutete) -> 파사베(Passabe) -> 말레랏(Malerat) -> 투민(Tumin) -> 오에쿠시(kota Oekusi)'

 

개척자들은 대중교통 이용을 원칙으로 한다. 간혹 태워주겠다는 다른 단체 사람들의 선의를 무시하진 않지만, 우리 이동을 편하게 하기 위해 트럭이나 지프를 빌리지 않는다. 돈을 아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자연스럽게 현지인을 만나고, 그들의 문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었다. 이렇게 이동하다보니 어려운 게 하나있었는데 여행 도중 밥은 직접 해 먹는다는 원칙에 따라 11명의 식기구(밥솥, 접시, , 수저 등)를 무겁게 들고 다녀야 한다는 거다. 이후에 동쪽 지방인 라우템 지역 여행 말미에는 심신이 바닥나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아직은 처음 만나는 설렘이 가득했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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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edireVeritati 2012-05-08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업뎃이 너무 늦어지는 감이 있어 일단 프롤로그부터 띄웁니다. 다음엔 본격 로드 여행이 시작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 20세기가 남긴 기독교 최고의 유산, 본회퍼의 삶과 신앙과 신학
에릭 메택시스 지음, 김순현 옮김 / 포이에마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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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본회퍼, 가슴 설레게 하는 이름이다. 독일 전통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안정된 삶을 선택할 수 있었지만, 진실을 추구하며 살아 온 가풍을 이어 받아 나치 독일을 가장 앞서 반대했던 사람. 제국교회의 길도, 고백교회의 길도 아닌 독자적인 길을 고독하게 뚜벅뚜벅 걸어가던 목사. 윤리를 틀에 박힌 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서 행동의 결단을 촉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스스로 그 길을 걸어간 신앙인.

 

이 책은 그의 일생을 가장 꼼꼼하게기록한 책이다. 에버하르트 베트게가 쓴 본회퍼 전기가 유년기에 대한 기록과 가족에 대한 묘사가 부족했던 반면 메태시스의 책은 유년과 청년 시절의 본회퍼와 그의 가족들의 삶을 상세하게 적고 있다. 독자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유익은 본회퍼의 성정이 어떠한지, 보통 독일인과 비교해 안정되게 살 수 있는 본회퍼가 변하게 되는 계기들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유럽 여행 중 스페인에서 투우 경기를 즐기는 본회퍼의 모습에서 생소함을 느꼈다. 잔인한 경기 중 열광하는 본회퍼, 평화주의자로 알고 있었기에 상상하기 힘들었다.

 

본회퍼는 1931년 미국 뉴욕에서 경험한 다문화(흑인뿐인 예배였을 수도 있다) 공동체 예배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한 일면을 본 듯하다. 그 경험은 유대 분리주의와 학살 홀로코스트를 저지르는 나치와 독일(제국)교회의 적극적 찬성(또는 침묵)을 비판하는 연설과 대외 활동으로 이어진다. 사상과 경험의 조화는 인간을 주체 시민으로 성숙하게 하는 두 개의 날개다.

 

저자는 이때를 고백의 시간이라고 부른다. 아직은 대중 활동과 조직을 통해 엇나간 독일의 길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희망을 본회퍼는 품고 있었다. 니묄러와 같은 독일 고백교회 지도자들은 그 희망을 오래 품었던 듯하다. 히틀러와의 면담을 통해 사태를 개선할 수 있다고 믿었던 니묄러는 8년 동안을 감옥에서 살아야 했다. 더 치욕적인 것은 교회에서 설교권을 박탈당한 채 보낸 몇 개월의 시간이었을지 모른다.

 

본회퍼가 고백을 넘어 공모의 때라고 판단한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저자가 밝혔듯 공모자 외에 아무도 몰라야 했다. 누군가를 암살하겠다는, 그 대상이 아무리 미치광이일지라도 목사가 그 일을 하겠다고 결단하기엔 마음의 부담이 많았을 것이다. 소설 분노의잔은 그런 이유에서 검으로 흥한 자는 검으로 망한다는 성서의 구절을 그가 결정을 내리던 고뇌의 시간에 삽입했는지도 모른다. 3번의 암살 시도는 모두 실패로 끝났고, 실행 계획과 공모자 명단이 밝혀지며 194549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본회퍼의 신앙과 신학은 오늘 제국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소수자를 억압하는 데 앞장서는 한국교회에 치열함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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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본회퍼의 삶만을 연도순으로 나열하지 않는다. 독일 정세의 변화, 1차 대전 이후 패전국 처리에 대한 독일인들의 감정, 총통 체제 독일에 대한 비판과 문제의식을 꽤 자세하게 담는다. 그것이 본회퍼 신앙과 신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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