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쿠시센트로, 베코라, 딜리(Becusi-Centro, Becora, Dili). 동티모르에서 1년간 살게 된 곳은 동티모르 수도 딜리의 동쪽 끝에 있는
마을이었다. 마이크로넷이라고 부르는 작은 버스, 01번이나
02번을 타고 베코라성당 앞에서 내려 골목길로 쭉 5분정도
걸으면 왼편으로 우리가 사는 집이 있었다. 두 그루의 큰 망고나무,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한 바나나나무, 집주인 마나 마리아가 가꾸는 화분들이 집 주위를 두르고 있었다. 우린 이 집을 희망공장(Esperansa Factory)라고 부르기로
했다. 마나 마리아 가족이 동의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같이 모여 찍은 첫 번째 사진. 왼쪽부터 마이클, 짤레스, 엠마, 윤애, 우노, 떼와스, 얀초(개), 나)
일곱 색깔 공동체
개척자들이 2000년부터 진행한 동티모르 평화캠프에 처음부터 참여하고, 2005년부터 이곳에 사무실을 꾸리고 삶을 시작한 마나 윤애(마나는
언니 혹은 누나의 경칭이다. 그러나 아무에게나 붙이는 호칭은 아니다.
오빠나 형의 경칭인 마웅도 마찬가지 신뢰와 애정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붙여 부른다.)가 공장장이었다. 윤애 누나는 자기 기준이 확고했다. 2006년 5월에 동티모르에 내전이 터져 자국민 대피령이 내려졌을 때, 윤애 누나는
총탄을 피해 수녀원으로 모인 난민들 곁에서 며칠 밤을 보냈다. "고통받는 사람과 함께한다"는 개척자들의 원칙과 자기 신념을 지키기 위한 결정이었다.
까 우노(Yunus Karpada. 까는 인도네시아어 까까의 준말이다. 형·오빠·누나·언니 같은 바로 윗사람을 부르는 말이다.)는 '자유' 그 자체였다. 어느
것 하나, 그 누구도 그를 구속하지 못했다. 서티모르의 주도
쿠팡에서 온 그는 저녁이면 기타를 치거나 그림을 그렸다. 동티모르 사람들은 인도네시아에 대한 반감이
있었지만 서티모르인에 대해서는 관대했다. 오히려 그들의 삶과 문화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사람들을 좋아하는 우노의 주변에는 늘 '호기심'으로 가득 찬 동티모르 청년들이 모여 그와 대화하기를 즐겼다. 아침·점심·저녁을
바나나로 먹어도 좋다고 말하는 '바나나 광'이기도 했는데, 그 덕분에 온갖 종류의 바나나를 맛보는 호사를 누렸다. (필자는
그 후로 한국에서 바나나를 먹지 못한다. 너무 싱겁고, 떫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서는 서티모르, 오에쿠시 지방 여행에서
더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 같다.
우노가 쿠팡에서 나서 자란 '서티모르 토박이'라면 짤레스(Aprys Charles Meluk)는 쿠팡에서 태어나
딜리에서 공부한 '티모르 떠돌이'라고 할 수 있다. 친화력이 뛰어나서 티모르섬 전역에 인맥이 뻗어 있다. 어디를 가든
그와 함께 가면 숙식은 해결됐다. 짤레스는 봉사 정신이 투철한 사나이였는데, 그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분단의 경험이었다. 청년기를 딜리에서
공부하며 보내던 2000년대 초반 동티모르의 독립은 짤레스에겐 분단이었다. 짤레스만 경험한 것이 아니었다. 동티모르와 서티모르의 국경에는 하룻밤
사이에 지도 위에 그은 선 하나로 국적이 갈린 이산가족들이 산적했다. '동병상련'. 짤레스는 분리 이후 헤어짐의 아픔을 겪은 이들을 찾아 영상편지를 전달하는 '메신저'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2008년 동티모르에서 활동을 시작한 짤레스는
2012년 지금도 동티모르 전역을 돌며 자신이 맡은 일을 감당하고 있다.
1975년부터 25년간 있었던 인도네시아의 식민통치는 피로
얼룩진 역사였다. 한국인이 일본인을 바라보는 시선과 감정, 그러한
것이 이곳 동티모르인에게도 존재한다. 특히 인도네시아 행정과 경제의 중심에 있는 자바인들을 보면 더욱
그렇다. 떼와스(Teguh Waskito)는 자바에서 왔다. 무슬림이 많은 자바인 중에는 드물게 기독교인으로 목사 지망생이었다. 쿠팡에서
처음 그를 봤을 때 그는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자신의 신앙에 대한 확고함이 간결한
언어에서 묻어났다. 진지하게 생긴 풍채와는 달리 유쾌하고 경쾌했다. 무슬림인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신앙과 삶의 진정성에 대해서 끊임 없이 질문할 수 있었다. 그의 진정성은 짤레스와 함께 이산가족을 만나며 빛이 났다.
마이클 안토니우스 우리(Michael A. Uri)는 연구 대상이었다. 가장 키가 컸지만, 가장 가벼웠다.
작은 바람에도 쓰러질 것 같은 체구였다. 그가 동티모르 전역을 돌며 평화학교를 ‘무사히’ 치렀다는 것은 사실 기적이었다. 용서와 희망의 상징인 무지개를 좋아했다. 성경을 늘 묵상하고, 다른 이를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다. 작은 징표, 남들에겐 사소해 보이는 경험조차 소중하게 간직하고 기억할 정도로 정이 많았다.
공동체에선 가장 나이가 많은 형 오빠였음에도 불구하고 종종 놀림감이 되기도 했는데, 순수하고
순박한 성정이라 화도 내지 않았다. 인도네시아 요가카르타에서 온 모태솔로는 이제 대만에서 온 엠마를
좋아해 수개월 동안을 속앓이를 해야했다.
엠마(Shin, Ying-Chu)는 대만에서 왔다. 늑대 같은 남자 다섯은 엠마를 좋아했다. 짝지를 삼고 싶어하며 속앓이
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우리가 엠마를 좋아한 이유는 성실함과 사교성 때문이었다. 함께 오에쿠시 지역 평화학교를 운영하며 몇 번을 놀라곤 했다. 이른
아침 일어나 주인 아주머니를 도와 밥을 하고, 식사 정리가 끝나기 무섭게 수업 준비를 위한 토론을 시작한다. 1~2시간 정도 평화학교를 진행하고 오면 지쳐 쉬고 싶을 법도 한데, 이제는
집주인 가족들과 사귐의 시간이 이어진다. 무엇이든 궁금하면 물었고, 해보고
싶은 것은 먼저 나서 해보고 싶다고 할 정도로 자기 표현도 적극적이었다. 국제 분쟁, 빈곤, 여성 문제에 대한 관심이 깊어 여러 나라를 돌며 활동을 하고
있다. 지금은 이집트에서 변화의 바람을 온 몸으로 받고 있는 엠마.
1년 동안 동티모르 사람처럼 살았던 엠마, 지금은 이집트 사람이 되어 진짜 민주화를 열망하고
있을 그를 다시 만나 이야기 보따리를 풀고 싶다.
빨간 배경 사진
우리는 가족이었다. 여느 보통의 가족들처럼 같이 찍은 사진이 별로 없다면
우리가 얼마나 친했는지 설명이 될까. 다같이 모여 사진을 찍을 시간이 없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우노가 사진을 찍기 싫어했기 때문이다. 4~5장
정도인 단체 사진 그나마 우노는 뒤돌아 서있거나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13개월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사진 찍기는 우연하게 그리고 불쾌하게 찾아왔다. 3개월에
한 번씩 동티모르 비자 연장을 위해 인도네시아를 방문해야 했다. 비자 연장 업무는 공동체 지원을 맡은
내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인도네시아 대사관은 비자 발급 인원을 하루에 50명 안으로 제한하는데 순서를 받기 위해서 오전 8시부터 나가 길게
줄을 서야 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1시간을 기다려 신청서를
냈는데, 사무관이 비자를 줄 수 없다고 결정했다. 사유가
황당했다. ‘빨간색’을 배경으로 하는 사진을 제출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한 달 전에 법령이 바꼈는데 공지가 제대로 되지 않아 몰랐던 것이다.
씩씩거리며 집에 돌아와선 우노, 짤레스,
떼와스, 마이클을 불러 분노를 쏟았다. 그들의
죄는 단 하나였다. 인도네시아인이라는 거다. "니들 나라
뭐냐, 빨간색이 무슨 의미냐, 비자를 신청하는 데 색깔이
무슨 의미냐?"라는 그들도 답하기 곤란한 질문들을 한참 퍼부었다. 그
물음과 성냄 이면에는 '다시 한 번 이른 아침에 일어나 대사관을 찾아야 한다'는 늦잠의 욕망과 하루 생활비에 맞먹는 비용을 증명사진 촬영에 소모해야 한다는 불편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노가 화가 난 나를 달래고 나섰다. 언제 빨았는 지 알 수 없는 빨간
타월을 들고 내려와서는 창문에 걸고 한 사람씩 세웠다. 찰칵. 찰칵. 평소라면 절대 안 된다며 뒤돌아 서던 우노도 이날은 정면을 응시했다. 다소
우스꽝스럽고, 촌스러운 빨간색을 배경으로 한 증명 사진은 이렇게 탄생했다.
다음에는 이들과 함께한 첫 번째 여행, 스펙타클했던
동티모르 역사 평화 기행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