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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인의 말을 귀담아 들으라


오랜만에 일을 시작하면서 포스팅이 늦었다. 달랑 1달에 2주를 나가는 것뿐인데, 글을 쓸 여유를 내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건 그래도 일하러 나가는데 남은 2주는 쉬어야지 하는 안락한 마음 때문이었다.


다행이 2주 간의 빡빡한 마감, 2주간의 굴러먹는 시간의 반복 속에 1장의 사진과 마주쳤다. 마이클 안토니우스 우리(MU)가 페이스북에 남긴 몇 장의 사진 중 하나였다. MU는 동티모르의 그리움과 애정을 담아 '보고싶다'는 글을 남겼다. 덕분에 푹푹 찌는 여름 한가운데서도 잠시 웃을 수 있었다.



파사베로 가기 위해 트럭에 오르자마자 찍은 사진이다. 소가 보이고, 브라더 송의 뒷모습, 모자에 스카프로 칭칭 감아 자외선 완전 차단에 도전한 도라와 아직은 하얀 연정이, 이제 막 살이 빠지기 시작한 내모습과, 이런 여행일 거라 예상했다는 표정의 윤애 누나가 보인다. 그리고 그 주변에 우린 한국인 아닌 현지인이오 하는 표정으로 있는 분들이 서 있다.


피부 하얀 무리가 사람들 눈에 띄긴 했나 보다. 유엔 경찰 1명이 우리에게 접근했다. 경찰이 맞나 의문이 들 정도로 뱃살이 많던 그는 우리 중 한국에서 온 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2003년 3월 오에쿠시 에까뜨 강에서 숨진 상록수 부대원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공원에 추모비가 있으니 꼭 들러 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동티모르 주재 한국 대사관은 이날의 사건을 이렇게 짧게 소개한다. "2003.3.6 오꾸시 소재 에까뜨강 도하중 집중호우로 불어난 강물에 휩쓸려 4명 순직, 1명 실종되었으며, 그 추모비가 오꾸시 공원에 건립됨"(동티모르 주재 한국대사관', 동티모르 개황', 2009.6)


그 죽음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는 그 죽음이 거룩하고 성스럽다고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현지 주민들의 이야기는 180도 달랐다. 집중호우로 불어난 물은 절대 건널 수 없다고 수없이 말렸지만, 제 정신이 아니었던 그들이 이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다리를 넘었다는 것이다. 마른 강을 달리는 트럭 위에서 윤애 누나는 우기만 되면 강을 건널 수 없다고, 우기 동안에 건너 마을은 고립된다고 거듭 말했다. 이런 안내와 충고는 이후 1년간의 일정을 정할 때 많은 도움이 됐다. 우기를 피해 건기에만 오에쿠시를 드나들었다.


무슨 일을 하는지 통 이해되지 않는 유엔 경찰을 뒤로 하고 우린 소와 함께 쩍쩍 갈라진 강바닥을 건넜다. 사실 2000년 동티모르 사태 때, 인도네시아 군이 다시 밀고 들어올 때도 유엔군은 가장 먼저 자국 또는 주변국으로 도망가기 바쁘지 않았던가. 우리가 그 죽음을 통해 교훈삼을 수 있는 건 단 하나였다. "현지인의 말을 귀담아 들으라"


우리가 올라 탄 노란 트럭엔 우리만 타는 게 아니었다. 3마리의 소, 그 등에 올라 탄 새카만 쇠파리, 뚜민, 퀴비셀로, 우시타케노, 파사베로 가는 사람들이 무리지어 하나하나 타기 시작했다. 마른 강을 걸어 가던 이들도 차를 세우곤 합승하기도 했다. 난간에 걸터 앉고 여기저기 쪼그려 앉으니 족히 30명이 넘는 이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팔 힘이 좋은 남자들은 천막을 덮도록 해 놓은 쇠 위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덜컹덜컹 하는 차 위에서.


먼지 폴폴, 꾸불꾸불 산을 넘어, 퀴비셀로에 소들을 내리고, 파사베에 도착했다. 알고 지내던 집에 가방을 던져 놓고는 말레랏으로 향했다. 오에쿠시에서 가장 높다는 마을, 그래서 건기가 한창인 중에도 긴팔을 챙겨가야 초저녁을 날 수 있다는 곳이었다. 평화캠프에 참가했다는 파사베 마을 청년의 뒤를 따라 지름길로 올랐다. 모든 지름길은 험하다. 거의 수직으로 오르는 길이었다.


말레랏의 노을을 뒤로 하고 우리는 한 무덤 앞에 섰다. 길을 가던 청년을 불러 세웠다. 물을 길러 집에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양 손에 들고 있는 물통이 꽤나 무거워 보였다. 그에게 무덤에 관해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어려운 부탁은 아닌 듯했는데 그는 주저했다. 영어를 못한다, 말을 잘 못한다 하던 그에게 현지어로 말해도 된다고 사정했다. 그가 망설인 이유는 언어에 있지 않았다. 그 자리는 그의 형이 묻힌 곳이었다. 독립을 지지했던 그의 형은 인도네시아 독립군에게 죽었다고 했다. 그 뒤로 붉게 타던 노을이 어둠으로 사라졌다.


그를 다시 만나 건 다음 해 4월 부활절 즈음 오에실로에서였다. 그새 초등학교 선생님이 됐고, 우리가 진행하는 평화학교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특히 저녁 시간 그의 처소에서 같이 마시던 커피, 그 달콤함이 계속 입가에 남아 있다. 선한 눈망울 그렁그렁 맺힌 눈물 방울을 애써 참으며 그의 형 이야기를 해 주던 착하디 착한 그가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을 만나며 어떤 미래를 이야기할지, 어떤 과거를 들려줄지 기대하고 있다.


MU는 그날 그 말레랏의 밤, 선생님에게 "인도네시아인으로서 깊이 사과한다"고 말했다. 직접 가해자는 아니었지만, 책임을 기꺼이 지겠다는 이들에게서 평화의 싹은 트기 시작한다. 그러나 말보다 행동이다. 그게 늘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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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테테(Gutete, 이 마을의 이름이 G로 시작하는지 K로 시작하는진 정확하지 않다)에서의 하룻밤은 열정적이었다. 마을 분들은 우리를 성심껏 환영했다. 나빤-오에실로(Napan-Oesilo) 국경을 넘자 왜건 한 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짐칸에 움직일 틈도 없이 철썩 붙어 앉아 두세 시간을 달려 마을에 도착했다. 엉덩이는 딱딱해 지고 다리엔 쥐가 났지만 이런 여행은 호사였다. (우리 여행의 목적 중 하나는 현장의 교통 수탄을 익힌다도 있었는데, 그 점에서 이번 여행은 사치스럽기도 했다. 바로 다음 글에서 언급할 말레랏(Malelat)까지의 이동 수단을 보면 얼마나 호사였는지 짐작하고 남을 것이다.) 우리에겐 호사였으나 작은 왜건은 버티기 힘들었는지 마을을 바로 앞에 두고 퍼져 버리고 말았다.

 

구테테는 산악마을이다. 높은 길을 구불구불 돌아 마을 어귀에 도착했다. 이미 그곳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곧 춤판이 벌어졌다. 동티모르 전통춤, 떼베떼베였다. 10여 명의 여자들이 북소리에 맞춰 발을 구르는 군무다. 동티모르에서는 마을에 큰 행사가 있거나 귀한 손님이 방문할 때 꼭 이 춤을 춘다. 마을은 축제 분위기였다. 떼베떼베를 춘 여성 중에 한 명이 나와 윤애 누나의 목에 타이(tai)를 걸어 주었다. 동티모르를 대표하는 상품이었다. 마을 어른이 손으로 직접 짠 것이었다.


마을은 잘 정돈돼 있었다. 이랑과 고랑이 잘 정리된 밭과 저장을 위해 말리고 있는 작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구테테를 이렇게 가꾼 이는 서양에서 온 신부였다. 우리가 갔을 때 그는 본국으로 출장 중이었기에 직접 보진 못했다. 그의 이름이 리치몬드였는지 레이몬드였는지도 호주 출신인지 영국에서 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윤애 누나의 설명은 이렇다. 인도네시아의 폭정이 그에 달하던 때 오에쿠시 지역의 부모를 잃은 아이들, 집을 잃은 사람들, 위태한 삶을 사는 이들을 불러 마을을 꾸렸다. 그는 그들의 보호자(Fadre)가 되기를 자칭한 이였다.



 

간단한 식사로 파티가 시작됐다. 카사바와 고구마 등을 이용한 간식거리가 나오고, 염소 고기와 각종 채소로 배를 채웠다. 마을에서 직접 재배해 로스팅까지 했다는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이장님 댁 뒷마당으로 나갔다. 염소 머리 하나가 내 살점이 네 뱃속에 있다며 원망하듯 쳐다보고 있었다. 놀람도 잠시 해맑은 호기심으로 타국의 청년들을 바라보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였다. 꾸밈 하나 없는 아이들과 함께 신나게 한 판 놀았다. ‘얼음(es)’, ‘을 외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마당을 채웠다.

 

그렇게 해가 지고 이장님이 안내해 준 숙소에 둘러앉았다. 그런데 웬일인지 윤애 누나의 표정이 밝지 않다. 마을 분들이 우리를 투자자 내지 개발 원조자로 생각하는 듯하다고 말했다. 생각 이상의 환대가 부담이고, 그들의 기대와 우리의 목적이 다르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다고 했다. 동티모르에 있은 지 수 년, 다른 지역을 많이 돌아본 코디네이터의 감이었다. 근심이 짙어갈 때, 이장님이 다시 들어왔다. 이제 댄스파티가 준비됐으니 다들 나오라는 거였다.

 

몸치에 박치, 거기에 음치를 더한 내겐 오지 않았으면 하는 시간이었다. 무겁게 발걸음을 옮겼다. 동티모르에서 댄스파티가 차지하는 위치는 크다. 사람들은 춤과 음악을 좋아했다. 그런 그들의 초대에 응하지 않는 건 큰 결례였다. 이해는 달라도 관계는 소중했다. 그렇게 자리에 앉았지만 가시방석이었다. 그 맛있던 카사바와 고구마, 커피 모두 돌처럼 보였다.

 

그렇게 어려웠던 하루가 지나고 동이 트자마자 우리는 마을을 빠져나왔다. 예의 그 왜건에 올라 버스가 파사베로 가는 차들이 있는 삼거리 시장으로 향했다. 마땅한 교통편이 있는지 찾아야 했다. 30여 분 끝에 퀴비실로에 소를 배달하고 파사베로 간다는 트럭을 찾았다. 그렇게 소가 기다리고 있는 짐칸에 올랐다. 덩치 좋은 소들의 등 뒤에는 쇠파리들이 붙어 있었다. 소는 물론 사람의 피까지 빨아 먹는 무시무시한 녀석들이었다. 반바지를 입고 있던 우리 일행을 가장 반긴 것은 쇠파리가 아니었을까. 우리는 이제야 진짜 여행의 출발지에 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당장의 쇠파리보다는 오에쿠시의 넒은 대지, 뜨거운 태양, 트럭 위로 부는 바람에서 여행의 낭만을 느끼기도 했다.


*사진은 같이 여행한 명식이가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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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 대학살을 다룬 내일 우리 가족이 죽게 될 거라는 걸, 제발 전해주세요!(필립 고레비치, 강미경 역, 갈라파고스, 2011)를 읽고 있다. 편집자는 책의 부제를 아프리카의 슬픈 역사, 르완다 대학살이라고 붙였다. 르완다 인구의 85%인 후투족이 15% 정도에 불과한 투치족을 청소, 100일 동안 인구의 10분의 1100만 명이 학살당한 사건이다. 19944월이었다.

 


저자 필립 고레비치는 이 사건의 시작을 벨기에 식민 통치 시절까지 끌고 올라간다. 벨기에가 착취 지배 구조를 수월하게 완성하기 위해 소수민족인 투치족을 지도자 계급으로 다수민족인 후투족을 노예계급으로 나눈 게 피를 부른 원인이었다는 게 그의 해석이다. 이전까진 평화롭게 살던 이들이 서로의 피를 열망한 건 이때부터였다. 제국주의 인간 문명이 지닌 야만이 제노사이드를 부른 셈이다.

 

개척자들의 출발점은 르완다였다. 르완다의 슬픔은 동티모르의 비극과 닮았다. 티모르섬의 동서 분화는 제국주의 시대 역사로 올라간다. 500년 전 포르투갈 함대는 티모르섬을 점령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의 인도네시아 지역(당시는 수백 개의 소수민족이었다)에 진출한 네덜란드가 티모르섬까지 밀고 들어왔다. 밀리고 밀리던 포르투갈은 네덜란드와 티모르섬 절반을 놓고 협상했고, 양국은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포르투갈은 협정을 맺으며 서티모르 지역의 오에쿠시 지방을 달라고 요구한다. 포르투갈 군인이 처음 정착한 상징적인 장소였다. 이 지역은 인도네시아 점령이 끝나가던 1990년대 후반 가장 잔인한 학살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2008년 한 달간의 평화캠프가 끝나고 현지 역사 기행이 시작됐다. 우리들이 처음 밟은 땅이 오에쿠시였다. 동티모르 영토이지만 서티모르 속에 속해 있어서 육로로는 수도인 딜리에 들어갈 수 없다. 꼭 나크로마(Nakroma)라고 하는 배를 타고 움직여야 한다. 현지인들이 섬 속에 섬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지역 언어인 다완어를 가장 많이 사용한다. 동티모르인들은 보통 떼뚬(동티모르어)과 인도네시아어를 둘 다 사용하는데 이 지역 주민 중 연세가 지긋한 노인들은 인도네시아어를 모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투민(Tumin)이라는 마을 촌장님이 그랬는데, 인도네시아 군과 동티모르 민병대의 학살을 피해 산속 굴에서 생활하다 보니 인도네시아어를 배울 기회도 그럴 마음도 없었다고 한다. (이 일과 관련한 에피소드는 우노와의 여행에서 다시 한 번 이야기하겠다.)

 

첫 번째 오에쿠시 여행 일정은 이랬다.

 

'나빤(Napan, 인도네시아 국경 마을) -> 오에실로(동티모르 국경 마을) -> 꾸테테(Kutete) -> 파사베(Passabe) -> 말레랏(Malerat) -> 투민(Tumin) -> 오에쿠시(kota Oekusi)'

 

개척자들은 대중교통 이용을 원칙으로 한다. 간혹 태워주겠다는 다른 단체 사람들의 선의를 무시하진 않지만, 우리 이동을 편하게 하기 위해 트럭이나 지프를 빌리지 않는다. 돈을 아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자연스럽게 현지인을 만나고, 그들의 문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었다. 이렇게 이동하다보니 어려운 게 하나있었는데 여행 도중 밥은 직접 해 먹는다는 원칙에 따라 11명의 식기구(밥솥, 접시, , 수저 등)를 무겁게 들고 다녀야 한다는 거다. 이후에 동쪽 지방인 라우템 지역 여행 말미에는 심신이 바닥나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아직은 처음 만나는 설렘이 가득했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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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edireVeritati 2012-05-08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업뎃이 너무 늦어지는 감이 있어 일단 프롤로그부터 띄웁니다. 다음엔 본격 로드 여행이 시작됩니다.
 

베쿠시센트로, 베코라, 딜리(Becusi-Centro, Becora, Dili). 동티모르에서 1년간 살게 된 곳은 동티모르 수도 딜리의 동쪽 끝에 있는 마을이었다. 마이크로넷이라고 부르는 작은 버스, 01번이나 02번을 타고 베코라성당 앞에서 내려 골목길로 쭉 5분정도 걸으면 왼편으로 우리가 사는 집이 있었다. 두 그루의 큰 망고나무,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한 바나나나무, 집주인 마나 마리아가 가꾸는 화분들이 집 주위를 두르고 있었다. 우린 이 집을 희망공장(Esperansa Factory)라고 부르기로 했다. 마나 마리아 가족이 동의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같이 모여 찍은 첫 번째 사진. 왼쪽부터 마이클, 짤레스, 엠마, 윤애, 우노, 떼와스, 얀초(개), 나)


일곱 색깔 공동체

개척자들이 2000년부터 진행한 동티모르 평화캠프에 처음부터 참여하고, 2005년부터 이곳에 사무실을 꾸리고 삶을 시작한 마나 윤애(마나는 언니 혹은 누나의 경칭이다. 그러나 아무에게나 붙이는 호칭은 아니다. 오빠나 형의 경칭인 마웅도 마찬가지 신뢰와 애정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붙여 부른다.)가 공장장이었다. 윤애 누나는 자기 기준이 확고했다. 20065월에 동티모르에 내전이 터져 자국민 대피령이 내려졌을 때, 윤애 누나는 총탄을 피해 수녀원으로 모인 난민들 곁에서 며칠 밤을 보냈다. "고통받는 사람과 함께한다"는 개척자들의 원칙과 자기 신념을 지키기 위한 결정이었다.

 

까 우노(Yunus Karpada. 까는 인도네시아어 까까의 준말이다. 형·오빠·누나·언니 같은 바로 윗사람을 부르는 말이다.)'자유' 그 자체였다. 어느 것 하나, 그 누구도 그를 구속하지 못했다. 서티모르의 주도 쿠팡에서 온 그는 저녁이면 기타를 치거나 그림을 그렸다. 동티모르 사람들은 인도네시아에 대한 반감이 있었지만 서티모르인에 대해서는 관대했다. 오히려 그들의 삶과 문화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사람들을 좋아하는 우노의 주변에는 늘 '호기심'으로 가득 찬 동티모르 청년들이 모여 그와 대화하기를 즐겼다. 아침·점심·저녁을 바나나로 먹어도 좋다고 말하는 '바나나 광'이기도 했는데, 그 덕분에 온갖 종류의 바나나를 맛보는 호사를 누렸다. (필자는 그 후로 한국에서 바나나를 먹지 못한다. 너무 싱겁고, 떫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서는 서티모르, 오에쿠시 지방 여행에서 더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 같다.

 

우노가 쿠팡에서 나서 자란 '서티모르 토박이'라면 짤레스(Aprys Charles Meluk)는 쿠팡에서 태어나 딜리에서 공부한 '티모르 떠돌이'라고 할 수 있다. 친화력이 뛰어나서 티모르섬 전역에 인맥이 뻗어 있다. 어디를 가든 그와 함께 가면 숙식은 해결됐다. 짤레스는 봉사 정신이 투철한 사나이였는데, 그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분단의 경험이었다. 청년기를 딜리에서 공부하며 보내던 2000년대 초반 동티모르의 독립은 짤레스에겐 분단이었다. 짤레스만 경험한 것이 아니었다. 동티모르와 서티모르의 국경에는 하룻밤 사이에 지도 위에 그은 선 하나로 국적이 갈린 이산가족들이 산적했다. '동병상련'. 짤레스는 분리 이후 헤어짐의 아픔을 겪은 이들을 찾아 영상편지를 전달하는 '메신저'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2008년 동티모르에서 활동을 시작한 짤레스는 2012년 지금도 동티모르 전역을 돌며 자신이 맡은 일을 감당하고 있다.

 

1975년부터 25년간 있었던 인도네시아의 식민통치는 피로 얼룩진 역사였다. 한국인이 일본인을 바라보는 시선과 감정, 그러한 것이 이곳 동티모르인에게도 존재한다. 특히 인도네시아 행정과 경제의 중심에 있는 자바인들을 보면 더욱 그렇다. 떼와스(Teguh Waskito)는 자바에서 왔다. 무슬림이 많은 자바인 중에는 드물게 기독교인으로 목사 지망생이었다. 쿠팡에서 처음 그를 봤을 때 그는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자신의 신앙에 대한 확고함이 간결한 언어에서 묻어났다. 진지하게 생긴 풍채와는 달리 유쾌하고 경쾌했다. 무슬림인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신앙과 삶의 진정성에 대해서 끊임 없이 질문할 수 있었다. 그의 진정성은 짤레스와 함께 이산가족을 만나며 빛이 났다.

 

마이클 안토니우스 우리(Michael A. Uri)는 연구 대상이었다. 가장 키가 컸지만, 가장 가벼웠다. 작은 바람에도 쓰러질 것 같은 체구였다. 그가 동티모르 전역을 돌며 평화학교를 무사히치렀다는 것은 사실 기적이었다. 용서와 희망의 상징인 무지개를 좋아했다. 성경을 늘 묵상하고, 다른 이를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다. 작은 징표, 남들에겐 사소해 보이는 경험조차 소중하게 간직하고 기억할 정도로 정이 많았다. 공동체에선 가장 나이가 많은 형 오빠였음에도 불구하고 종종 놀림감이 되기도 했는데, 순수하고 순박한 성정이라 화도 내지 않았다. 인도네시아 요가카르타에서 온 모태솔로는 이제 대만에서 온 엠마를 좋아해 수개월 동안을 속앓이를 해야했다.

 

엠마(Shin, Ying-Chu)는 대만에서 왔다. 늑대 같은 남자 다섯은 엠마를 좋아했다. 짝지를 삼고 싶어하며 속앓이 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우리가 엠마를 좋아한 이유는 성실함과 사교성 때문이었다. 함께 오에쿠시 지역 평화학교를 운영하며 몇 번을 놀라곤 했다. 이른 아침 일어나 주인 아주머니를 도와 밥을 하고, 식사 정리가 끝나기 무섭게 수업 준비를 위한 토론을 시작한다. 1~2시간 정도 평화학교를 진행하고 오면 지쳐 쉬고 싶을 법도 한데, 이제는 집주인 가족들과 사귐의 시간이 이어진다. 무엇이든 궁금하면 물었고, 해보고 싶은 것은 먼저 나서 해보고 싶다고 할 정도로 자기 표현도 적극적이었다. 국제 분쟁, 빈곤, 여성 문제에 대한 관심이 깊어 여러 나라를 돌며 활동을 하고 있다. 지금은 이집트에서 변화의 바람을 온 몸으로 받고 있는 엠마. 1년 동안 동티모르 사람처럼 살았던 엠마, 지금은 이집트 사람이 되어 진짜 민주화를 열망하고 있을 그를 다시 만나 이야기 보따리를 풀고 싶다.

 

빨간 배경 사진

 

우리는 가족이었다. 여느 보통의 가족들처럼 같이 찍은 사진이 별로 없다면 우리가 얼마나 친했는지 설명이 될까. 다같이 모여 사진을 찍을 시간이 없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우노가 사진을 찍기 싫어했기 때문이다. 4~5장 정도인 단체 사진 그나마 우노는 뒤돌아 서있거나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13개월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사진 찍기는 우연하게 그리고 불쾌하게 찾아왔다. 3개월에 한 번씩 동티모르 비자 연장을 위해 인도네시아를 방문해야 했다. 비자 연장 업무는 공동체 지원을 맡은 내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인도네시아 대사관은 비자 발급 인원을 하루에 50명 안으로 제한하는데 순서를 받기 위해서 오전 8시부터 나가 길게 줄을 서야 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1시간을 기다려 신청서를 냈는데, 사무관이 비자를 줄 수 없다고 결정했다. 사유가 황당했다. ‘빨간색을 배경으로 하는 사진을 제출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한 달 전에 법령이 바꼈는데 공지가 제대로 되지 않아 몰랐던 것이다.

 

씩씩거리며 집에 돌아와선 우노, 짤레스, 떼와스, 마이클을 불러 분노를 쏟았다. 그들의 죄는 단 하나였다. 인도네시아인이라는 거다. "니들 나라 뭐냐, 빨간색이 무슨 의미냐, 비자를 신청하는 데 색깔이 무슨 의미냐?"라는 그들도 답하기 곤란한 질문들을 한참 퍼부었다. 그 물음과 성냄 이면에는 '다시 한 번 이른 아침에 일어나 대사관을 찾아야 한다'는 늦잠의 욕망과 하루 생활비에 맞먹는 비용을 증명사진 촬영에 소모해야 한다는 불편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노가 화가 난 나를 달래고 나섰다. 언제 빨았는 지 알 수 없는 빨간 타월을 들고 내려와서는 창문에 걸고 한 사람씩 세웠다. 찰칵. 찰칵. 평소라면 절대 안 된다며 뒤돌아 서던 우노도 이날은 정면을 응시했다. 다소 우스꽝스럽고, 촌스러운 빨간색을 배경으로 한 증명 사진은 이렇게 탄생했다

 

다음에는 이들과 함께한 첫 번째 여행, 스펙타클했던 동티모르 역사 평화 기행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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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edireVeritati 2012-04-25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빨간 배경 사진을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는다. 이번 주말 개척자들 사무실에서 사진을 찾아봐야 할 것 같다.
 

전국이 시끄럽다. 어제 오늘 하던 일도 아닌데 갑자기 큰 이슈가 되고 있다. 경북 영주에서 한 학생이 학교폭력 가해자에게 장례식에 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숨을 던졌다. 정부는 갑자기 전수 조사 결과를 공개하며 학교 폭력을 근절하겠다고 나섰다. 소위 문제 학교를 아웃팅하겠다는 이야기다. 언론이나 일선 교사들이 전수 통계 조사 과정의 문제점과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고 지적했음에도 정부는 통계 자료를 공개했다.

 

추이를 지켜보며 학교 폭력을 대하는 정부의 정책과 우리 사회의 태도는 협박과 망각에 기초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왕따 문제의 근본 해결책이 사랑과 관심이라면 우리의 접근 방식은 얽혀있는 실타래를 풀기보다는 더 비비 꼬아 실마리조차 잡기 힘든 지경으로 몰고 가는 건 아닐까. 더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면 이것이야말로 폭력의 재생산인 셈이다.

 

찬찬히 우리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야 한다. 학교 폭력의 관찰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성찰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20~30대 대부분은 학교 폭력의 가해자이거나 피해자였다. 가해자의 범위를 방조자로까지 넓히면 누구도 내 손은 깨끗하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그 정도는 달랐을지 모르지만 그 윗세대도 비슷한 경험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교 폭력의 근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고민하며 자신의, 우리의 청소년 청년 시절을 반성해야 한다. 가해자의 죄의식도 좋고, 피해자의 수치도 좋다. 이야기를 꺼내놓고 풀어내야 화해와 치유의 길로 갈 수 있다. 주먹구구식 정책이 아닌 전인격적인 정책, 교사와 학생, 학부모와 교육 기관이 함께 고민하는 해결책이 나오길 바란다.

 

여기 내 경험들을 기록해 둔다.

 

무모했던 일진과의 싸움

 

중학교 2학년. 한 친구와 치고받았다. 무슨 이유로 싸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 걸 보니, 별 대수롭지 않은 이유로 싸운 듯하다. 짧은 쉬는 시간에 벌어난 일이었지만 사태는 커졌다. 친구가 홧김에 던진 의자가 뒷문을 들이박아 문이 깨지고 말았다. 다음 시간은 도덕 시간. 팔뚝만한 사랑의 매를 들고 다니던 선생님은 당사자 2명의 엉덩이가 불이 나도록 때렸다. 내가 21, 친구가 13대를 맞았다. 맞은 매 수가 차이 나는 이유는 단순했다. 나는 오래 버텼고, 그 녀석은 빨리 쓰러졌기 때문이다. 쓰라린 엉덩이를 부여잡고 뚝뚝 떨어지는 아픔의 눈물을 꾹 참으며 우린 쿨하게 화해했다.

 

그러나 우리가 화해했다는 데서 문제가 끝나지 않았다. 녀석은 소위 일진이었다. 건들지 말았어야 할 녀석을 건든 거다. 우리가 맺은 평화협정은 일진의 패거리 문화에 의해 깨지고 말았다. 감히 자기네 사람을 때린 몹쓸 놈이 누구인지 보겠다며 5~6명이 우르르 몰려왔다. 예고 없이 날아온 옆차기에 볼을 맞은 후에야 실감했다. 이게 일진이구나. 두려움, 공포라는 단어가 몸에 새겨진 시간이었다.

 

종수. 종수가 아니었다면 남은 중학교 생활을 비루하게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1~2달 전 일진의 우두머리와 끝까지 싸우며 괴력을 보였던 종수를 건드릴 수 있는 건 학교에선 아무도 없었다. 종수가 나서서 싸움을 말린 덕에 일진과의 분쟁은 거기서 멈췄고, 싸운 친구와도 다시 친하게 지냈다. 1996년 여름이었다. 16년 전이다. 일진이라는 패거리 문화는 그 이전부터 존재했다.

 

대규모 근신 사태를 부른 폭력 사건

 

자진 신고해야겠다. 나는 쉽게 화내고 열 받는 편이다. 욱하는 성격 덕에 코 성형수술을 할 수 있었다. 정신없이 받은 수술이라 얼마나 높아졌고, 멋있어졌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1 가을이었다. 3 선배들이 수능을 100일 정도 앞둔 날이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수열을 배우던 때였다. 야간자율학습 중간 20분의 자유시간에 친구들과 농구를 하곤 했다. 농구장 옆 족구장은 늘 선배들 차지였다. ‘’, 날아온 축구공에 머리를 맞았다. 괜찮냐는 물음이 이어져야 정상이었는데, 박장대소가 터졌다. 괜찮냐고 물은 건 친구들이었다. 기분이 상했다. 공을 집어 던지고 교실로 올라간 건 과잉 행동이었다.

 

3 교실이 뒤집어졌다는 건 2교시 야자가 시작되고야 알았다. 교실로 끌려가 죽도록 맞았다. 멈추지 않는 코를 부여잡고 병원에 도착한 건 930분쯤이었다. 누가 때렸는지, 몇 명이 때렸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처음 때린 녀석의 니킥으로 코가 주저앉았다는 기억만 선명하다. 1주를 입원하고 한 달가량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 구타한 선배들에게는 교내 봉사, 근신, 정학 등의 중징계가 떨어졌다.

 

1주나 학교 안 간 건 좋았지만, 한 달 동안 마스크를 쓰고 다닌 기억은 씁쓸하게 남아있다. 전교생들, 모든 선생님들이 '제가 걔구나' 하고 손가락질 하는 듯했다. 낙인처럼 남은 기억에는 다 이유가 있다. 퇴원하고 학교에서 처음 들은 이야기가 그랬다. "너 잘못도 크다." 대충 이런 이야기였다. 국어 시간, 연세가 지긋해 두꺼운 돋보기를 끼고 있던 선생님이 굳이 교실 앞으로 불러 한 이야기였다. 니킥의 순간과 함께 가장 강한 기억으로 머릿속에 남아 있다. 이 낙인은 고3들이 졸업하던 다음해 2월까지 계속됐다. 1998년 가을에서 1999년 초까지 계속된 이 기억이 생생한 만큼 두려운 건 나만의 경험이 아닐 것이다.

 

왕따와 짝사랑

 

신입생이던 2002. 나보다 다섯 살 많은 선배가 자신의 신앙을 이야기하며 자신이 '왕따'를 시켰던 경험을 나눴다. 형은 예수와 처음 만나던 날,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보며 같은 반 친구들을 괴롭혔던 사실에 대해 통렬하게 회개했다고 했다. 짧게 이야기했지만 가볍진 않았다. 돌아 나오는 길에 2명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 번은 방조했고, 한 번은 무시했다. 같은 반 친구가 당하는 왕따에는 신경을 껐고, 중학교부터 알고 지내던 녀석이 고등학교 때 왕따가 되자 난 그 친구의 존재를 무시했다.

 

아니 무시 정도가 아니었다. 면전은 아니었지만 "재수 없어"라는 말과 함께 마른 바닥에 침을 뱉었다. '난 너 싫으니 앞으론 말도 걸지 말라'는 의미였다. 간혹 그 녀석의 반에 놀러가곤 했는데, 큰 헤드폰을 끼고 드럼 스틱으로 비트를 맞추며 노래하던 녀석의 모습을 경멸하곤 했다. 다른 반 아이들은 애써 무시하는 것 같았다.

 

긴 무시의 시간은 고3 10월에 깨졌다. 매점에서 빵을 먹고 나오는데, 녀석이 성큼 성큼 다가왔다. " oo 죽은 거 알아?" 중학교 3학년 남자 셋 여자 셋 같이 모여 여기저기 놀러 다녔는데, 그 중 한 친구가 꽃다운 나이에 하늘로 간 사건 앞에 정신을 놓았다. 몇 번을 되물었고, 연락이 끊겼던 친구들에게도 전화해 확인했다. 남몰래 가슴 설레던 시간이 기억났다.

 

어린 나는 좋았던 중3의 기억과 살았어야 할 친구가 죽었다는 괴리감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한참을 방황했다. 마음 한켠에는 내가 그토록 무시하던 친구에게 빚을 졌다는 부채감도 생겼다. 어렴풋이 생각났다. 우리 셋은 짝이었다. 그녀를 가운데 두고 양 옆에 나와 그 친구가 앉았었다. 그 친구와 많이 친하진 않았지만 내가 그를 무시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비겁했지만, 그녀의 부고를 알려 준 그 친구는 용감했다.

 

눈을 감고 방조하던 왕따 친구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다. 학교 선배의 이야기를 들으며 언젠가 다시 만난 날을 상상하곤 하지만, 그때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여전히 탕감되지 않은 미안함이 가슴 깊이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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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edireVeritati 2012-04-24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 폭력은 이지메라는 단어가 일본에서 수입되기 훨씬 전부터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경쟁의 시대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이 정당한 사회에서 학생들을 구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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