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이어지다: 궁극의 욕망을 찾아서 - 명상가 한바다와 종교학자 성해영의 만남
한바다.성해영 지음 / 김영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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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에이지에 따르면, 물고기 시대는 지나가고, 이제 물병자리 시대가 도래했다. 물고기 시대가 종교의 시대라면, 물병자리 시대는 영성의 시대이다. 종교의 시대는 수직적, 위계적인 성격이 강한 반면, 영성의 시대는 수평적, 상호적인 성격이 도드라진다. 그렇기에 물고기 시대의 전달 형식이 스승의 제자를 향한 일방적 선포라면, 물병자리 시대의 전달 형식은 멘토와 멘티가 주고받는 쌍방향 대화이다.

 

 

아마 종교에 관심있는 독자분이라면, 나의 말에 바로 반기를 제기할 것이다. 위대한 종교의 창시자들, 곧 대 스승들은 모두 대화를 통해서 가르침을 주지 않았던가, 그들이 남긴 경전은 모두 그들이 서재에서 집필한 원고(글)가 아니라 그들이 거리에서 주고받은 대화(말)를 담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 그들의 대화를 현대적 기준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대화는 사제간의 평등한 상호작용이 아니다.

 

 

(주로 -칼 야스퍼스가 말한- 차축시대에 등장한) 대 종교의 창시자이자 대 스승들에게 대화는 매우 중요한 매체이다. 한 면으로 제자들(그 중에서도 스승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내부 핵심 집단-inner circle-을 우선한다)과 밖의 무리에게 가르침을 내려주는 주요한 형식이며, 다른 한 면으로 각각의 상황과 대상에 따라 역동적으로 반응하는 면에서 대화는 유용한 방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스승은 불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스승은 제자가 봉착한 문제에 대한 대답을 갖고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스승은 제자의 기대가 투영되는 스크린이라 해도 무방하다(이런 부분에서 도움이 되는 책이 바로 우치타 타츠루의 <스승은 있다>이다). 반면 지금의 뉴에이지 영성은 쌍방적이고 민주주의적인 틀 안에서 작동한다. 멘토는 멘티와 함께 걷는 구도자이다.

 

 

뉴에이지 시대에 부합하는 종교학자 성해영 교수가 대화 형식으로 책을 펴낸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쓴 공저 8권과 역서 한 권(프로이드의 <문명과 불만>), 그리고 연구서 한 권(<수운 최제우의 종교 체험과 신비주의>)을 제외하고, 대중을 상대로 내놓은 저작은 두 권이다. 하나가 오강남 교수와의 대화를 담은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와 한바다와의 대화를 담은 이 책이다.

 

 

이는 뒤집어도 동일하다. 뉴에이지 시대의 명상가인 한바다 님 또한 대화를 통해 자신의 영성 세계를 펼쳐보이고자 하였다. 성해영 교수와 오강남 교수의 공저를 보며, "'이거다!' 하고 공감을 하"고, "명상을 평생 벗삼아온 저와는 입장이 좀 다르겠지만, 대화가 진행되다 보면 좋은 이야기들이 많이 나올 거라고 믿"는다(11쪽). 도그마를 선포하기보다 대화를 통해 좋은 이야기를 끄집어내고자 한다.

 

 

'선포와 대화'를 한바다 명상가의 '예언과 비전'으로 옮겨도 무방하다. "비전이나 예언은 언어에 있어서는 거의 같은 내용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 비전은 가능성을 내포한 소통의 언어이고, 예언은 가능성을 고착하는 언어에요."(21쪽) 예언은 과정을 생략하고 결론만 던진다. 반면 "비전은 가능성의 언어이기 때문에 한 개인이 열려나가는 과정을 중시합니다."(22쪽) 잠재성 발현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둘의 대화 또한 열린 과정이며, 독자들도 이 과정 속으로 초대된다. "오늘 이 만남은 결론을 내리려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함께 탐구해보는 과정입니다. 그 자체가 새로운 만남의 경험이기도 하고요. 어떤 것도 정해지지 않은 만남이지만, 우리 안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여정에 독자들을 함께 동승시켜서 어떤 결론이 나오는지 함께 알아보고 싶습니다."(59쪽)

 

 

다시 말해서 확정된 진리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열린 대화를 통해 각자가 창조적 깨달음을 얻기를 바란다. "우리는 어떤 고정된 신념이나 관념을 가르치거나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영성이 어떻게 삶을 행복으로 이끌어가는지, 우리의 마음이 다른 사람과 만날 때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 함께 물어보자는 겁니다."(59쪽) 이는 새 시대(new age)의 영성에 걸맞는 접근이다.

 

 

다시 대화로 돌아가자. 대화는 만남이다. 신기술로든, 신자유주의로든 우리의 만남은 급격하게 증폭되었다. 증폭된 만남은 우리의 궁극적 욕망을 추구하는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었다고 성해영 교수는 말한다. 이는 궁극적 행복이며, 참된 기쁨이다. 원래 종교와 사상을 통해서 우리가 찾고, 두드리고, 구하던 것이다. 영원한 기쁨과 궁극적 행복을 얻고자 영성과 종교가 존재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제 우리는 종교, 정치, 경제,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다른 이들을 더욱 많이 만나게 되었다. 만남은 이어지고 연결되는 것이다. 폭발적으로 증가한 '이어짐' 속에서 기쁨을 찾지 못한다면 개인과 공동체의 행복은 불가능하다. '참된' 명상과 종교는 본디 하나였던 우리 모두를 다시 이어지게 해, 궁극적인 행복의 상태를 '지금 이곳'에서 구현하게 만든다."(6-7쪽)

 

 

저자의 핵심 주장이 담겨있는 세 번째와 네 번째 문장에 동의할 수 있는 지는 논외로 하고, 기본적인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있다. 세계화와 온라인 미디어를 통해서 세상이 하나로 어우러지고, 이제 진정으로 지구촌(global village)이 이루어지는 중이다. 그 속에서 여러 종교와 영성 또한 뒤섞이고 있다. 단전과 차크라가 교차하고, 사주와 점성술이 혼재하는 형국이다.

 

 

이렇게 뒤섞일 때에 중요한 것은 기준 설정이다. 물고기 시대가 상정하는  바는 바깥의 기준이다. 하늘의 뜻이다. 혹은 우주의 도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중요한 것은 판단의 준거가 내 안에 있지 않고, 밖에 있다는 것이다. 한데 성해영 교수와 한바다 명상가는 그 기준을 자기 안에서 찾으라고 충고한다. 바깥의 정답을 답습하는 것은 편의적이며(153쪽), 외부의 권위에 굴복하는(154쪽) 거라면서 말이다.

 

 

판단의 기준이 내 안에 있고, 오롯이 "나 스스로 책임진다는 떳떳함을 가져야"(155쪽) 한다.  결국 타자와의 대화와 만남을 통해서 내 안의 무언가를 끄집어낸다는 것이다. 성해영 교수는 이렇게 정리한다. "바깥에 있는 걸 보고 자극을 받아서 내 안에 그게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157쪽) 내 안에 가능성과 역량이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서 증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성해영] "진정한 나는 육체적 개체로서의 내가 아니라, 모든 사물에 열려 있고 타인과 자연, 그리고 신과 교류함으로써 거대하게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잖아요."(167-168쪽)

 

 

[한바다] "그 가능성 전체와 교류하고 이어지는 것이지요. 영혼의 인터넷이지요."(168쪽)

 

 

그 중심에 에고가 있다. 그렇기에 성해영의 자본주의 비판은 어딘가 헷갈릴 수밖에 없다. "저 역시 종교와 자본주의가 '나'라는 에고 개념믈 매개로 연결될 수 있다고 봅니다."(177쪽) 그 종교는 실상 지금의 뉴에이지 영성에 더 잘 부합될 것이다. 참된 자아와 거짓 자아를 구별해야 한다고 말하는 가운데 실상 에고에 대한 강박이 더욱 거세지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밀려온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허락하는 방식의 나약한 자기가 돼버리기 십상"(179쪽)이라는 성해영 교수의 평가 자체에는 동의한다. 자본주의가 우리의 자아를 (재)형성하기 때문이다. 하나 그게 "초개인적인 차원에 연결된 확장된 자아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한 탓"(179쪽)이라는 규명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애초에 우리 시대의 영성 자체가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형성된 탓에 '나약한 자기' 형성에 가세하고 있다.

 

 

가장 냐약한 자기야말로  가장 강퍅한 자아이다. 구 시대의 종교 전통 안에 자기 자리를 찾다가 그만 종교적 에고가 강화될 수도 있다. 하지만 새 시대의 영성 흐름 속에 자기 자리를 두다가 역시 종교적 에고가 강화될 수도 있다. "제일 무서운 에고가 종교적 에고러라고요."(192쪽)라는 한바다 명상가의 말은, 그러므로 물고기 시대의 종교만큼이나 물병자리 자리의 영성에도 부합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새 시대를 이끄는 새 기술 또한 이를 강화한다. 성해영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네, 인터넷이 자기만의 영성을 발견하려는 영적 여정을 엄청나게 돕고 있는 거죠."(318쪽) 한바다 명상가도 이렇게 이어받는다. "결국엔 개인적으로 체험하고 자신이 직접 발견하는 방식의 종교성이 우세해지리라는 견해군요. 물론 제도화된 종교들도 공존하겠지만요."(318쪽)

 

 

나의 논지를 다시 밝혀둔다. 나약한 자기 혹은 헛된 자아 대신 참된 자아를 강조하면, 결국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게 된다. 한바다 명상가의 지적을 곱씹어보자. "종교 역시 제도화된 틀 바깥에서 종교성 혹은 영성의 근본적 의미를 개인들이 직접 묻게 된 것이지요."(324쪽) 개인이 직접 묻는다는 것은 전통보다 개인이 우위에 선다는 뜻이지 않나? 아무리 천재라도 개인보다 위대한 전통이 우위에 선다.

 

 

이 대담집을 읽고 난 소감은 간단하다. 입담 좋은 두 영성가들이 주고받는 대화 가운데 뉴에이지 영성이 적절하게 소개되는, 매력적인 텍스트다. 물론 구 시대적인 전제를 갖고 있는 내 입장(-註)에서는, 비록 많은 부분 공감하지만, 기본  논지에 동의하기 어렵다. 하나 이건 책의 가치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나의 입장에 대한 천명이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영성에 관심 있다면, 읽어보시길 바란다.

 

 

註 - 개인은 한 시대를 초월할 수 없다(나의 이러한 단언 또한 나의 포지션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자아는 유능한 집사, 혹은 에이전트에 불과하다. 자아를 중심에 두고 주인으로 모시면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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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는 밥이다
미즈노 겐조 지음, 박소금 옮김 / 선한청지기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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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 말미에 나오는 말이다. 기뻐하라, 기도하라, 감사하라. 그것도 항상, 쉬지 말고, 범사에.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하나님의 뜻이니 마땅히 따라야 할 바다. 그러나 만만한 게 아니다. 기뻐하되 항상 기뻐하고, 기도하되 쉬지 말고 기도하고, 감사하되. 범사에 감사해야 한다. 이러니 막막해질 수밖에 없다.

이럴 때에 뇌리를 스치는 구절이 이것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11:1)

그러니까 내가 구체적으로 모방할 수 있는 방도를 제시하고, 모방하고자 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믿음의 선배를 찾아야겠다는 뜻이다. 가령 쉬지 말고 기도하는 모본을 구하라면, 부활의 로랑(로렌스) 형제나 러시아의 어느 익명의 순례자에게 가르침을 받는 식이다. 물론 전자는 <하나님의 임재연습>을 말하고, 후자는 <순례자의 길>을 가리킨다.

법사에 감사하라는 명령에 대해서는 누구에게 배워야 할까? 나라면, 미즈노 겐조에게 가르침을 청하겠다. 즉 그의 시집, <감사는 밥이다>를 보겠다는 뜻이다. 그는 일본어 음가가 기록되어있는 아이우에오표를 따라 눈을 깜빡여서 문장을 만들어낸다. 그 수고로운 작업을 통해 써낸 시들을 묶어서 네 권의 시집을 냈고, 한국에서는 네 권에 수록된 시들을 추려서 <감사는 밥이다>라는 제하에 한 권의 책으로 출간하였다.

물론 여러분 가운데 <잠수종과 나비>를 연상하는 분도 계시리라 생각한다. <엘르>의 편집장 장 도미니크 보비가 뇌졸증으로 쓰러진 뒤에 3주 만에 정신을 차렸으나 그가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왼 쪽 눈꺼풀 하나 밖에 없다. 그 눈꺼풀을 움직여 써낸 애세이집이 <잠수종과 나비>이고, 이것이 나온 뒤에 그는 곧 세상을 떠났다. 잠수종 안에 갇히 나비처럼 속박된 15개월은 이 작고 아름다운 에세이집에 응축되었다. 개인적으로도 참 좋아하고,1997년에 <잠수복과 나비>라는 제목으로 나왔던 것을 후루룩 읽었다(지금은 <잠수종과 나비>라고 제목을 바로 잡아서 펴낸다).

하지만 <잠수종과 나비>라는 이 아름다운 소품이 15개월만에 나온 반면, <감사는 밥이다>는 미즈노 겐조가 이십대 중반에서부터 사십대 중반까지 이십여 년의 세월 동안 쏟아낸 시들의 엑기스를 모은 것이다(일본그리스도교단출판국에서 정선시집으로 펴낸 것을 한국에서 번역출간하였다). 1975년부터 시작해서 매 3년을 간격으로 총 네 권을 펴냈다(1975, 1978, 1981, 1984). 비록 그의 언어는 소박하지만, 그 오랜 세월 동안 흘러나온 감사의 영이 만져진다. "감사함"이라는 제목의 시를 살펴보자.

 

"말을 못하는

나는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

대신에

미소를 짓는다

아침부터

몇 번씩

미소를 짓는다.

괴로울 때에도

슬플 때에도

진심으로

미소를 짓는다"(86쪽)

 

풀어말하자면,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감사한다. 심지어 괴로울 때에도, 슬플 때에도 진심으로 감사한다. 그러한 감사를 보비가 육체 안에 갇혀지내던 15개월 동안 하는 것도 놀랍지만, 이렇게 한 평생 동안 내내 해내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다. 그런 놀라운 감사생활의 근간은 물론 진지한 믿음이다. 1946년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 여름에 뇌성소아마비로 눈을 깜박이는 것이 유일한 소통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5년 정도 지난 후에 미야오 목사님의 전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의 가정에 들어왔다. 이후로는 그는 성경을 읽고, <루터 아워>나 <세상의 빛>과 같은 복음 방송을 들으며 신앙을 키워갔다. 이렇게 키워간 믿음이 그의 언어에 스며들었다. 그의 언어는 비교적 소박하나, 그의 믿음은 참으로 진실되다. 영이 맑은 소설가 미우라 야아코가 그의 시집에 주목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겐조의 시집 네 권 모두에 따뜻한 추천사를 주었다. 미우라 아야코와 아슐람 센터 주임 목사 에노모토 메구미가  따로 또 같이 추천한 "오늘 하루도"라는 시를 보라.

 

"신문 냄새에 아침을 느껴

차가운 물맛에 여름을 느껴

풍경 소리에 신선한 해 질 녘을 느껴

개구리 솔기에 졸음을 느껴

오늘 하루도 끝나지 않았어

하나 하나에

하나님의 은헤와 사랑을 느껴"(48쪽)

 

감사의 깊이가 다르다. 구절구절마다 겸손과 기쁨과 감사가 흘러나온다. 그저 겐조 시인의 발꿈치에도 채 못 따라가는 나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하고, 한걸음 씩 나아갈 따름이다. <감사는 밥이다>는 더 깊은 감사생활을 위해 나 자신을 비추어보기 위한 거울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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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불꽃
프랑스와 까쌩제나-트레베디 지음, 서인석 옮김 / 분도출판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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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책들로 구성된 책은, 거기, 그대의 책상 위에 펼쳐진 채로 놓여 있다. 이렇게 책은 온종일 그렇게 놓여 있어야 할 것이다. 그대가 규칙적으로 수행하는 거룩한 독서의 시간이 끝났을 때에도, 그대가 열중해야 할 다른 공부가 무엇이든지 상관없이, 이 책은 언제나 원천, 준거, 척도로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21쪽)

 

"거룩한 책들로 구성된 책"은 두말할 것도 없이 성경을 가리킨다. 성경은 (우리 개신교의 기준을 따르자면) 66권의 거룩한 책들로 구성된 문집(文集)이다.

 

"규칙적으로 수행하는 거룩한 독서의 시간"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게다. 사실 이 문장이 가리키는 거룩한 독서는 렉티오 디비나를 옮긴 것이다. 우리가 교회에서 배운 QT조차 제대로 하기 어려운 처지에 렉티오 디비나라니?

 

사실 이 중책자가 상정하는 독자가 수도자이며, 이 중책자가 지향하는 목적은 수도자의 묵상(렉티오 디비나)을 독려하는 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중책자의 유려하게 흘러가는 문장들 속에는 평범한 일상을 사는 우리의 마음을 강력하게 사로잡는 힘이 있다.

 

"이 책은 언제나 원천, 준거, 척도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성경을 원천, 준거, 척도로 드높여야 한다는 당위적 언명이 아니다. 항상 원천, 준거, 척도로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의 천명(闡明)이다. 인간의 말로 보이나, 실상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 당당한 선언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우리가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어떠하든 말씀은 언제나 원천, 준거, 척도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말씀이 우리에게 맞추는 게 아니라, 우리가 말씀에게 맞춰야 한다.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의 삶과 생각이 조율되어야 한다.

 

"밤기도 전에,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바로 이 책 위로 그대의 시선이 모아져야 할 것이다. 이 책은 또한 저녁에 잠들기 전에 그대의 마지막 책이 되어야 한다. 태양에 앞서 오는 책, 그리고 해가 진 후의 책, 아침과 저녁, 온종일과 한밤중, 그대가 살아갈 날들의 매일에 알파요 오메가의 책, 언제나 그대의 책상 위에 펼쳐 놓아둔 책, 주님께서 그대를 위해 차려놓으신, 그대 책상 위에 진설된 빵, 그대 독방의 책상을 제단처럼 여기라."(22-23쪽)

 

사실 이 문단 때문에 다시 포스팅을 올린 것이다. 읽는 중에 저자가 천명하는 헌신의 부름이 압도적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나의 책상이 나의 제단으로 여기라는 충고를 새겨 듣느다.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떠들어대지만, 과연 이 만큼 심각하게 대하는 지 의문이다.

 

우리가 하루를 시작할 때에 말씀과 더불어 시작하고, 우리가 하루를 마감할 때에 말씀과 더불어 마감하는가? 정녕 말씀과 함께 하루의 문을 열고, 닫는지를 자기 자신에게 되물어봐야 할 것이다. 나는 이 질문에 당당하게 답하기가 민망하다. 노력을 하지만, 간헐적이라서 부끄럽다.

 

"하[나]님께서는 그대에게 사랑의 편지를 한 통 써보내셨다. 사연이 아주 긴 편지 말이다. 그분은 그대에게 매일 이 편지 보내기를 거듭하신다. 그런데 어떻게 그대가 이 편지를 화급히 받아, 읽고 다시 읽으며 그 내용을 완전히 암기할 정도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26쪽)

 

소중한 친구나 연인의 편지를 기다리는 수신자의 마음이 필요하다. 그런 마음이면, 반복해서 읽게 될 것이고, 자연스레 서신의 내용을 완전히 암기하게 될 것이다. 외우라는 것이 아니라, 절로 외워질 만큼 부단히 읽는 마음가짐을 갖추라는 것이다. 그런 마음이 내게 있는지 자문한다.

 

책자는 얇아도, 내용은 두텁다. 성경을 대하는 자세를 바로 되새기게 한다. 한문장 한문장이 허투루 쓰인 데가 없다. 개신교든, 가톨릭이든 주님 안의  형제자매이다. 주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서로에게 배울 필요가 있다. 한 수도사의 글을 읽으며 나의 성경 읽기를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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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불꽃
프랑스와 까쌩제나-트레베디 지음, 서인석 옮김 / 분도출판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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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책 자체보다 책 안에 있는 특정한 문구를 중심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실은 그 마저도 본문이 아니라 추천의 말에 있는 문장이다. 한 문장에 눈과 마음이 붙들려서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해서 여기에 상념을 털어내고 가야할 것 같다. "사실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성서를 "읽는다" 하지 않고 "듣는다"고 하였습니다."(5쪽)


옳은 말이다. 성경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말씀은 듣는 것이다. 듣는 이유는 따르고자 함이다. 이는 학자의 자세가 아니라 제자의 자세다. 학자는 해석하나, 제자는 순종한다. 학자는 마주하나, 제자는 아래 선다. 그러므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귀를 활짝 여는 것이야말로 참된 제자의 자세다. 올바른 듣는 자세다. 


이 조그만 책자(말씀의 불꽃)는 렉티오 디비나를 다룬다. 렉티오 디비나야말로 말씀을 듣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머리로 말씀을 해석하기 위한 읽기가 아니라 마음으로 말씀을 순종하기 위한 듣기가 바로 렉티오 디비나이다. 추천의 말에 나온 것처럼, 렉티오 디비나는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에 기초를 두고 있다.


말씀을 듣는 이유는 따르기 위함이라고 했다. 경청은 순종의 전제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순종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말씀을 듣고 또 들어야 한다. 들은 말씀이 내 것이 되기까지 계속 곱씹어야 한다. 혹은 개가 뼈다귀를 물고 늘어지듯 집요하게 매달려야 한다. 이게 바로 묵상, 즉 렉티오 디비나다.


소가 여물을 되씹듯이 계속 반추함으로 머리 표면에 떠돌던 성구(와 그 진리)를 마음 깊은 곳으로 내려보내야 한다. 그래야 자연스레 삶으로, 즉 손과 발로 드러나게 된다. 머리의 지식이 가슴으로 내려와 지혜가 되고, 다시 삶으로 드러나 참로 내 것이 된다. 해서 이제 다시 말씀 앞으로 나아온다. "말씀하소서. 내가 따르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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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로역정 (완역본, 1·2부 통합, 양장) 기독교 명작 베스트 1
존 번연 지음, 유종남 옮김 / 선한청지기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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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대로다. <천로역정>을 펼쳐서 존 번연이 쓴 저자의 말을 보았다. 제목이 "이 책에 대한 저자의 변명"이다. 특히 그는 우화적 글쓰기에 대해 해명한다.

 

“비록 내 글이 모호하고 분명하지 않을지라도 진리를 담고 있다. 깊숙한 곳에 금덩이를 숨겨 놓은 장롱처럼 말이다.”(14쪽)

 

사실 오랜 만에 천로역정을 펼쳐든다. <천로역정>은 내게 참으로 의미가 깊은 책이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 맨 처음으로 읽은 신앙서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에는 무얼 얼마나 알고 읽었으랴 싶다. 심지어 그때의 나는 고작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하지만 내 신앙의 첫 단추를 꿰는 데에 제법 기여했으리라.

 

그때는 무심하게 넘긴 저자의 말(이 책에 대한 저자의 변명)을 읽는다. 새롭게 꼼꼼히 살펴보니 이제사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있다(어디 한두 개겠나 싶지만).

 

“그저 즐거운 마음으로 펜을 들고 빠르게 써나가자 생각이 명료해졌다. 어떤 방법으로 목표를 이룰지 결정하고 전체적인 구상에 따라 써 내려갔으며 결국 지금 여러분들이 보고 있는 길이와 넓이, 그리고 규모를 가진 책이 완성되었다.”(8-9쪽)

 

존 번연을 사로잡은 추동력(즐거운 마음)은 성령님이 주신 거룩한 열망이었을 게다. 성령님이 존 번연의 마음 속에 뿌린 씨앗은 어마어마한 결실을 맺었다.

 

<천로역정>의 엄청난 확산에는 분명 그 우화적(=비유적) 글쓰기 또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물론 그 형식 속에 담긴 고갱이가 본질이지만, 형식 자체도 의미있다.형식과 내용, 두 가지 면에서 천로역정을 반복해서 읽고 공부할 가치가 있다. 무려 백번이나 읽었다는(독서백편의자현!) 스펄젼만큼은 아니라도, 여러 번 읽을 만 하다.

 

<천로역정 The Pilgrim's Progress>의 내용은 "영원한 상급을 얻으려 애쓰는 사람의 이야기"(17쪽)이다. 1부의 주인공은 크리스천이고, 2부의 주인공은 그의 아내 크리스티아나(와 네 아들)이다.

 

알다시피 우리는 모두 순례자(pilgrim)다. 그 여정에서 온갖 시험과 위험을 만날 수밖에 없지만, 우리는 모두 저 천성을 향해 멈추지 않고 가야(progress) 하는 존재이다.

 

이번에 다시 읽는 버전은 선한청지기 판이다. 두 가지가 두드러진 장점이다. 하나는 1부(남편 크리스천 편)와 2부(아내 크리스티아나 편)가 합본되어 있다는 점이다.

 

또한 본문 안에 새롭게 삽화를 그려넣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 하다. 40여 개의 부드러운 연필화가 각 장면으로 하여금 살아나게 만들어 읽는 맛에 보는 맛을 더해준다.

 

더불어 번역 문장도 비교적 부드럽게 다듬어져 있다(원서는 17세기 영어로 집필되어 매우 옛스럽다). 독자들의 입장에서 한결 편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천로역정>은 국내에 이미 다양한 버전이 소개되어 있다. 선한청지기 판은 그 중에서도 번역과 삽화 면에서 독자에게 부담없이 다가간다는 면에서 점수를 주고 싶다.

 

존 번연이 굳이 그 기법 사용에 대한 해명(변명)으로 시작한 우화의 세계가 바로 <천로역정>이다. 그 순례의 여정을 한결 편한 문장과 따뜻한 그림으로 만나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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