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으로 끝내는 SF 그리기 - 외계 생명체, 로봇, 비행선과 미지의 세계까지
프렌티스 롤린스 지음, 김창규 옮김 / 시공아트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은 SF 불모지다. 소설은 특히 그러하고, 솔직히 만화도 많이 부족하다. 하지만 이제 시장이 달라지고 있다. 특히 웹툰 덕분에 상황이 훨씬 호전되고 있는 듯하다. 많은 이들이 장르문학, 특히 SF 작품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영화 <극한직업>에서 악역의 이름으로 테드 창이 등장한 것을 보고 많이 웃었다. 하드 SF 단편의 거장 이름이 이렇게 불쑥 등장한다는 것이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나. 이제 SF는 우리의 문화 중심으로 진입할 채비를 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다. 웹툰계가 포화 상태로 치닫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SF 쪽은 아쉬움이 많다. 그런 우리에게 <한 권으로 끝내는 SF 그리기>와 같은 드로잉 자료집은 매우 절실하다. 저자 프렌티스 롤린스는 주로 DC 진영에서 활동한 일러스트레이터다. 부제 그대로 외계 생명체, 로봇, 비행선과 미지의 세계까지다룬다. 이 자료집은 유토피아에서 디스토피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미래(또는 실제와 전혀 다른 과거)를 다룬다.”(9)

 

이 자료집의 가치는 어디에 있나? 기술이 아니라 의미를 전수한다는 데 그 진수가 있다. 인간, 외계인과 로봇, 지상 이동 수단과 비행 수단, 그리고 도시 풍경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재를 다루면서 그 소재가 담지하는 의미를 자세하게 가르친다. 그 설명만 자세하게 읽어도 SF 서사를 진행함에 있어서 소재를 활용하는 역량이 현격하게 늘어날 것이다. 원리를 이해하면, 적용은 용이해지게 마련이다. 가령 외계인과 로봇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괴물 같은 외계인과 로봇은 인간의 잠재의식 안에 있는 추하고 폭력적인 충동을 시각적으로 상징하는, 일종의 경고다. 반면에 아름다운 외계인과 로봇은 우리 모두의 내면에 존재하는 아직 개발되지 않은 잠재적 선과 완벽함을 시각적으로 상징하는, 이정표이자 지침이다. 그러나 좋은 SF 작품에서 이처럼 어딘가 이상한 인물을 등장시키는 진짜 목적은 우리가 그로부터 우리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게 만드는 데 있다.”(77)

 

단지 드로잉의 기초만 소개하고, 여러 작품들을 보여주고 설명하는 데에 치중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생각이 중요하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저자가 보여주는 모든 그림에는 연결되는 이야기가 있다.” 그렇기에 SF 작품 활동은 그저 단순히 멋진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아니다.” 애초에 SF의 목적이 이야기를 현실에 비추어 보도록 자극하려는”(이상 14) 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SF 창조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생각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한 권으로 끝내는 SF 그리기>는 드로잉 자료집이다. 그렇기에 구체적인 작품 설명과 실제적인 기법 안내가 담겨있다. 특히 1장은 드로잉을 위한 기초를 닦는 데에 유용하다. 하지만 이 자료집을 제대로 숙독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SF라는 장르와 그 소재에 대한 이해가 심화될 것이다(수학 실력을 늘리려면, 공식을 적용하기 전에 공식을 이해해야 하듯이). SF 세계의 훌륭한 창조자가 되려면, 이 책을 집어들고 공부하라고 권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인더스 키퍼스 - 찾은 자가 갖는다 빌 호지스 3부작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빌 호지스시리즈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스티븐 킹은 믿고 보는 작가이다. 공포, 스릴러, 판타지 등을 막론하고 전방위적으로 활약한다. 그런데 그가 추리소설을 쓴다면, 과연 읽을 만 할 것인가? 그가 이 분야로 쓴 작품이 없지 않던가. 하지만 그가 빌 호지스라는 새로운 인물을 창조해낸 순간 우리는 그가 곧바로 추리소설의 대가로 우뚝 서게 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

  

3부작으로 기획된 이 연작은 두 가지를 특징으로 한다. 첫째로 주인공이 초인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티비를 끼고 살며 총을 만지작거리면서 자살을 생각하는 60대의 퇴임 형사가 빌 호지스이다. 더욱이 그의 파트너들은 정서적으로 불완전한 여성 히키코모리 홀리와 명민하지만 미성년인 흑인 남학생 제롬이다(그래도 2권에서는 대학생이다).

 

하지만 이렇듯 취약하나 개성 강한 이들이 힘을 합쳐 사건을 해결한다는 데에 작품의 특징이 있다. 제롬은 호지스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본질을 간파하고, 브래디의 사기 수법을 찾아낸다. 브래디를 제압하는 것은 홀리이다. 다시 말해서 이들 없이 사건을 해결될 수가 없었다. 전지전능한 퇴임형사에게 약간의 도움을 주는 것에 불과하지 않다는 뜻이다.

 

둘째로, 발 호지스 시리즈는 범인의 정체를 초반부터 드러낸다. 아예 그들의 이야기가, 그들의 내면과 삶을 촘촘하게 직조하여 만들어진 조밀한 서사가 소설의 한 축을 이룬다. 특히 브래디 하츠필드(1권의 악역)와 모리스 벨러미(2권의 악역)가 그들의 삶에서 일관되게 욕망을 투사할 수밖에 없던 대상(사람이든 물건이든)의 결말과 마주한 상황은 독자의 연민을 자아낸다.

 

반전 없는 추리소설을 스티븐 킹이 거침없이 이끌어갈 수 있는 동력이 바로 이런 강력한 서사에 있다. 설득력 있는 캐릭터의 구축이 서사를 튼실하게 만들어주고, 결과적으로 독자를 흡인력 있게 끌어당긴다. 이런 진부하게 들리는 설명은 스티븐 킹의 작품에 대한 실례와도 같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사실이 그런 것을.

  

작가와 캐릭터

2권까지 읽은 지금 빌 호지스 시리즈는 일종의 성장담으로 읽힌다. 빌 호지스는 운동을 하고 살을 빼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자기의 한계를 자각한다. 그렇게 인간적인 탐정 하나가 탄생하는 것이다. 홀리는 이제 자기만의 방을 나와서 사람들과 마주하기 시작한다(이들 둘을 묶어주는 것은 빌 호지스가 마음을 주었던 여인이자 홀리의 사촌인 제이니의 죽음이다)

 

빌 호지스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반전을 찾을 수가 없다그 대신에 인간 내면에 공존하는 빛과 그림자의 세밀한 묘사를 통해서 구축된 입체적인 캐릭터가 강력하게 이끌어가는 서사에 올라타는 것으로 충분하다주인공과 악역의 모습들 속에서 우리는 울고 웃게 된다어느새 그들 곁에서 같이 뛰고 있는 우리를 발견하게 된다.

 

무엇보다 2권의 캐릭터가 보여주는 것은 작가와 팬의 내면이다. 악역인 모리스나 그의 타깃인 피트 소버스 모두 작가 존 로스스타인과 그가 창조한 주인공 지미 골드에게 매료되었다. 하나 미공개된 두 권을 마저 읽고 지미의 총체적 인물상을 파악하게 된 피트와 달리 이미 공개된 3권까지만 읽고 주인공의 변절에 실망한 모리스는 전혀 다른 길에 서게 된다.

 

모리스가 러너’ 3부작(그 자체로는 미완성인 <러너>, <러너, 전쟁에 나서다>, <러너, 속도를 늦추다>이고, 후에 <러너, 서부로 떠나다>, <러너, 깃발을 들다>가 이어진다)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고 가로막힌 지점을 영문학자인 모리스의 어머니 애니타 밸러미는 간파하고, 자신의 작가상을 들려준다(아마도 스티븐 킹 자신의 것으로 보이는 이 견해에 나 또한 동의한다).

 

훌륭한 소설가는 등장인물들을 선도하지 않아. 그냥 따라가지. 훌륭한 소설가는 사건을 만들어내지 않아. 벌어지는 사건을 주시하다가 목격한 그대로 기록하지. 훌륭한 소설가는 자기가 신이 아니라 비서라는 걸 알아.”(186)

 

캐릭터가 제대로 구축되면, 내러티브의 전개는 작가의 몫이 아니라 캐릭터의 몫이 된다. 빌 호지스 시리즈가 그 좋은 사례일 것이다. 그러나 지미가 계속 성장해가는 과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리스(“성인이 된 이후의 지미[]는 싫은 거지?”, 186)는 결국 자신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어른이 되길 거부”(188)한다.

 

Tolle lege

 

그럼에도 우리는 독서에 대한 모리스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책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을, 살면서 가장 짜릿했던 순간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책을 읽는 수준을 넘어 책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대책 없이 푹 빠져 버린 순간을 말이다.”(180) 그렇다. 독서는 사랑이고, 독서가는 사랑꾼이다.

 

로스스타인의 또 다른 애독자 피트는 어떠한가? “피트가 아는 한 시리즈의 마지막 두 권을 읽은 사람은 전 세계를 통틀어 그 한 명뿐이었는데 그로 인해 그의 인생이 달라졌다.”(129) 물론 이제 갓 열여덟 살이 된 그는 뒷부분에서 이렇게 정정한다. “그의 작품으로 인해 제 감성이 달라졌다고 하는 게 맞겠어요.”(552) 피트는 분명 훌륭한 평론가의 길을 갈 것이다!

 

피트와 모리스가 러너 시리즈를 탐독했듯이 <파인더스 키퍼스>, 아니 빌 호지스시리즈는 추리소설의 애독자나 스티븐 킹의 팬이나 매한가지로 탐독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아직 <미스터 메르세데스>를 읽지 않았다면, 곧바로 <파인더스 키퍼스>에 뛰어드는 것을 만류하고 싶다. 은퇴 형사 빌 호지스가 탐정으로 거듭나게 된 계기가 된 전작을 먼저 읽으시길 바란다.

 

이미 <미스터 메르세데스>을 읽었다면, 지금 이 서평을 보실 때가 아니다. 어서 빨리 <파인더스 키퍼스>를 집어드시길. Tolle lege(집어들어 읽어라).



"피트가 아는 한 시리즈의 마지막 두 권을 읽은 사람은 전 세계를 통틀어 그 한 명뿐이었는데 그로 인해 그의 인생이 달라졌다."(129쪽)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책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을, 살면서 가장 짜릿했던 순간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책을 읽는 수준을 넘어 책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대책 없이 푹 빠져 버린 순간을 말이다."(180쪽)

"훌륭한 소설가는 등장인물들을 선도하지 않아. 그냥 따라가지. 훌륭한 소설가는 사건을 만들어내지 않아. 벌어지는 사건을 주시하다가 목격한 그대로 기록하지. 훌륭한 소설가는 자기가 신이 아니라 비서라는 걸 알아."(18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
히노 에이타로 지음, 이소담 옮김, 양경수 그림 / 오우아 / 2016년 5월
평점 :
품절


우리 시대 청년들의 현실 처지는 회사가 키우는 가축(社畜)이다. 오너는 (저임과 과로가 보람 가운데 교차하는) 열정페이로 청년을 부려먹고, 멘토는 상처받은 청년을 달래서 다시 노예 주인에게 돌려보낸다. 이런 상황 속에서 조금씩 자신의 권리에 대한 인식이 싹트고 있다.

 

히노 에이타로의 <,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는 그러한 맥락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제목부터가 폐부를 찌르지 않나. 원제 자체도 이와 다를 바가 없다: “、「やりがいとかいらないんでとりあえず殘業代ください” (잔업대가 곧 야근수당이다.)

 

장과 절의 제목이 가슴에 절절하게 와닿는다. “오늘은 볼일이 있어서 정시에 퇴근하겠습니다” 1부의 표제이다. 그 안의 한 절은 이런 제목을 달고 있다. “칼퇴는 전설에만 존재할 뿐……일본 서적을 번역한 것이건만 우리에게도 한 치의 오차 없이 그대로 와닿는다.

 

20152월에 걸스데이의 멤버 혜리가 맑스돌로 등극했다. 그녀가 모델로 등장한 (구인, 구직 사이트인) 알바몬의 법정 최저시급을 강조하는 공익성 광고에 PC방 업자들의 단체(한국인터넷콘텐츠서비스협동조합)가 공개사과 요구공문을 냈던 해프닝을 두고 하는 말이다.

 

““야근수당을 다 줬다가는 회사가 망한다라며 대놓고 얼굴에 철판을 까는 경영자도 있다.

법을 지킨다고 회사가 망한다면 그런 회사는 망하면 된다. 법을 어기면서까지 회사를 연명시킨다고 해서 이 사회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31)

 

그래, 일본이나 한국이나 도긴개긴인 모양이다. 그렇다. 이런 회사는 망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회사도 못 들어가서 버둥대는 청춘들이 있다. 그렇기에 블랙기업(곤노 하루키의 2013년작 저서의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표현)의 입사 제의를 덥석 물고 후회하게 되는 것이다.

 

블랙기업(black企業)은 저임(低賃)에 과로로 고용하는 악덕기업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보람을 주고 임금을 줄이는 현실도 나쁘지만, 말단 계약직의 월급으로 오너 수준의 헌신을 요구하는 것은 더 나쁘다. 그러한 헌신의 요구에 응하다가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이는 개죽음이다.

 

과로사나 과로자살은 한마디로 회사에 의한 살인이다. [……] 그런데 노동자의 과로사나 과로자살을 유발한 회사는 그리 대단한 벌을 받지 않는다.” (35)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이런 비루한 처지가 중노년층을 비껴가는 것은 아니다. 청년층에 상대적으로 더 무거운 짐이 놓였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원래 블랙기업은 청년 고용자를 착취하는 악덕기업을 가리킨다), 헬게이트 자체는 모든 세대에게 활짝 열렸다.

 

특히 감정노동으로 시달리는 서비스 업계 종사자들이 그러하다. 이들이 상대하는 손님은 절대 신이 아니다.”(47) 또한 남들 다 하는 대로 정해진 레일을 따라 살아야 한다. 레일을 벗어나면 갑자기 인생이 하드 모드로 바뀐다.”(50)

 

노동에 종사하는 모든 이를 옭아매는 이데올로기가 있다. 바로 “‘일을 위해 사는 것이야말로 사람의 행복이라는 사고방식”(56)을 가리킨다. 어쩌면 한국이나 일본이나 매한가지인지 모르겠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주입되면 결국 사축이 만들어진다.

 

마르크스의 사위인 파울 라파르그가 설파한 게으를 수 있는 자유가 절실하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 정신은 노예=노동자가 될 수 있는 자유를 주창하고 있다. 요새는 취업이야말로 기업의 사회적 봉사라는 헛소리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나.

 

히노 에이타로는 심정적으로 탈()사축을 지지한다. “이 책의 목적은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회사의 독자적인 가치관, 이른바 사축적 가치관에서 탈출해 당연한것들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169) 그럼에도 결론으로 내놓는 것은 다소 소극적인 입장이다.

 

일에서 보람을 바라는 사람도, 보람을 바라지 않는 사람도, 상대의 가치관을 비난하지 않고 일할 수 있다면 이 사회의 직장도 조금은 편해지지 않을까? ‘다양한 가치관을 인정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널리 퍼지기를 바라며 이 책을 끝마치려 한다.” (170)

 

물론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이러한 입장이 저자로서는 타당하고 균형잡힌 결론이다. 솔직히 내가 책을 써도 결론은 이렇게 처리할 것 같다. 그럼에도 끝까지 호쾌하게 밀고 나가기를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다. 논리적으로는 수긍하나, 심정적으로는 아쉬움이 남는달까.

 

저자의 정의에 따르면, 사축은 회사와 자신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못하는 회사원”(61)이다. 그러니까 사축이 된다는 것은 회사라는 이름의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다. 우상을 숭배하는 만큼 그 우상에게 자유를 빼앗기게 마련이다. 사축도 그러하다. 회사의 노예가 곧 사축이다.

 

그러나 애초에 <,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의 전개 자체가 제법 차분하다. “중요한 것은 세상의 평가기준이 아니라 나의 평가기준이다.”(166) 이러한 문장만 본다면, 경박하고 도발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실제 거기에 이르는 과정은 옹골지다.

 

여기에 책에 수록된 양경수 작가의 그림과 대사가 양념처럼 더해진다. 이 부분이 워낙 찰지게 웃기는 지라 책의 성격을 오해하기 십상이다. 개인적으로는 여사원이 개에게 보람이라는 두 글자가 적혀 있는 종이쪽지를 건네주는 장면(81)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러니까 <,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는 차분한 글과 웃기는 그림의 콜라보레이션이다. 글과 그림 각각의 결과 호흡이 다소 상이하다. 이의 공존이 외려 이 책을 돋보이게 만들었다(단지 글이 그림에 좀 가려진 감이 없지 않다). 청년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야근수당을 다 줬다가는 회사가 망한다"라며 대놓고 얼굴에 철판을 까는 경영자도 있다.
법을 지킨다고 회사가 망한다면 그런 회사는 망하면 된다. 법을 어기면서까지 회사를 연명시킨다고 해서 이 사회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31쪽)

과로사나 과로자살은 한마디로 회사에 의한 ‘살인’이다. [……] 그런데 노동자의 과로사나 과로자살을 유발한 회사는 그리 대단한 벌을 받지 않는다. (35쪽)

이 책의 목적은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회사의 독자적인 가치관, 이른바 ‘사축’적 가치관에서 탈출해 ‘당연한’것들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169쪽)

일에서 보람을 바라는 사람도, 보람을 바라지 않는 사람도, 상대의 가치관을 비난하지 않고 일할 수 있다면 이 사회의 직장도 조금은 편해지지 않을까? ‘다양한 가치관을 인정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널리 퍼지기를 바라며 이 책을 끝마치려 한다. (170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믿음인가, 미신인가
조성노 지음 / 넥서스CROSS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설교를 통해 교리를 배우다

- <믿음인가, 미신인가>에 대한 단평 -

 

학부 때에 현대 신학에 대해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여러 책을 섭렵했다. 일차문헌과 더불어 이차문헌도 숱하게 읽었다. 어떤 책들은 반복해서 읽었다. 중요한 고전들과 명쾌한 교과서들을 주로 그렇게 여러 차례에 걸쳐 탐독했다. 그 당시에 내가 주로 참고했던 책들 가운데 국내 신학자가 쓴 것은 많지 않았다. 그 중 하나가 독일에서 유학한 조성노 교수의 개설서인 <현대신학개관>이다.

 

한데 얼마 전에 내 손에 <믿음인가, 미신인가>(넥서스CROSS)라는 제목의 설교집이 들어왔다. 그 부제가 “설교로 배우는 기독교 교리”이다. 현직 목회자가 교리 설교를 묶어 책으로 낸 것이다. 그래서 저자 이름을 확인해 보니 바로 조성노라고 나와 있는 게 아닌가. 이분의 저서가 조직신학으로 전공을 밟기 전에 내가 거친 디딤돌 가운데 하나지 않나. 반가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분이 신학교를 떠나 교회를 개척하였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개척 이후의 소식은 거의 들은 바가 없었다. 그러다 이렇게 신작으로 나타나니 감회가 새롭다. 더욱이 교리 설교집이 아닌가. 목회자로서 설교집을 내놓았지만, 동시에 신학자로서 교리책을 내놓은 것이기도 하다. 아닌 게 아니라 “설교로 배우는 기독교 교리”라는 제목에 어울리게 명쾌하기 그지없다. 심지어 자신의 설교가 “간결하고 명쾌하며 독하기까지”(5쪽) 하다며 자평할 정도다.

 

“제 설교에 임팩트가 있습니다.”(5쪽)라는 단언에는 조금 당황했지만, 확실히 내용의 전개가 명쾌하고, 언어의 표현도 간결하다. 목회자로서의 파토스 못지않게 신학자로서의 로고스가 드러나고 있다. 하나님, 창조, 인간, 구원, 개혁, 교회, 종말이라는 일곱 개의 키워드로 총 마흔 개의 설교가 진행된다. 매 설교마다 그 말미에는 “한걸음 더”라는 제목으로 생각을 정리하도록 도와주는 질문들이 붙어 있다.

 

흥미로운 것은 구원(4부)과 교회(6부) 사이에 개혁이라는 항목(5부)이 들어있다는 점에 있다. 이는 한 면으로는 종교개혁에서 말하는 바로 그 신앙의 개혁을 가리킨다(162-3쪽). 즉 개신교의 입장이다. 또한 다른 한 면으로는 특정 교파, 즉 “개혁교회라고 명명하는 장로교”(162쪽)의 입장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장로교 소속으로 목회하고 있는 저자 자신의 입장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장로교가 바로 이런 개혁교회의 전통에 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개혁가들의 정신을 계승하는 개혁교회 성도로서의 존재감이 필요합니다. 교회만이 아닙니다. 사회도,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 다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그게 개혁이며 우리가 살 길입니다.”(162-3쪽)

 

<믿음인가, 미신인가>의 각 페이지마다 신학자의 명쾌한 지성과 목회자의 따스한 마음이 빛난다. 이 설교집은 신학자와 목회자가 하나된 모범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반가운 마음에 곧장 펼쳐들어 읽게 되었지만, 기대 이상으로 책이 좋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어서 기쁘다. 이 설교집은 기독교 교리 탐구의 장구한 여정에 갓 입문한 평신도들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줄 책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개혁가들의 정신을 계승하는 개혁교회 성도로서의 존재감이 필요합니다. 교회만이 아닙니다. 사회도,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 다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그게 개혁이며 우리가 살 길입니다."(162-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1.

 

김연수는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의 주제가 소통임을 밝힌다. 사람 사이의 심연을 가로지르는 소통을 모색하기 위해 그가 택한 매개는 기억이며, 등장인물들이 기억을 재구성해가는 과정이 소설의 전체 서사를 구성한다. 제목부터가 이를 함축한다. 사실 제목은 본문에서 가져온 것으로(228), 문장의 나머지는 이러하다.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벤야민이 지적하였듯이 기억은 구원론적 모티브를 담지하고 있다. 기억의 수정은 정체성의 변형을 수반한다. 기억의 확장에 따른 서사의 재구성은 정체성의 변형을 통한 구원의 체험이다. 애초에 그녀가 자신의 뿌리(어머니)를 찾아나서는, 즉 망각에서 기억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그녀의 구원을 향한 노정에 다름 아니다.

 

2.

 

양모()와 딸(카밀라)의 관계는 양부 에릭이 보낸 여섯 개의 상자 속에 담긴 과거의 유물로 드러난다. 그 유물 속에 담긴 사진에서 비롯되고, 출판사의 요청으로 촉발된 과거에 대한 모색의 과정은 결국 정체성의 변형으로 완성된다. 즉 카밀라 포트만은 정희재가 된다(232). 점을 이어 만들어지는 선이 달라질 때마다 존재 역시 바뀌게 마련인 것이다(203).

 

더 이상 그녀가 카밀라로 돌아갈 수 없다면(138) 유이치와 결별할 수밖에 없다. 그는 어디까지나 카밀라의 남자이기 때문이다. 카밀라가 어머니를 찾아 나설 때에는 유이치가 동행하였으나 정희재가 과거를 복원해가는 과정에는 지훈이 함께 한다. 유이치(와 세상으)로부터 떠나 바다에 몸을 던진 카밀라를 구해낸 이가 바로 지훈이다.

 

3.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여 승리한 그날 밤에 승리의 결과로 새로운 이름(이스라엘)을 얻게 될 때에 그 부산물로 남은 생애 동안 다리를 절게 되듯이(창세기 3224-8), 그녀의 구원 또한 영혼의 어둔 밤을 경유해야 한다. 그녀가 과거의 조각을 맞춰감에 따라 직면하게 되는 현실은 그녀에게 고통으로 다가온다(202-3).

 

유이치가 사랑하는 카밀라는 자신의 어머니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불행과 유이치의 프로포즈라는 행복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150-1) 바다에 몸을 던짐으로써 사라진 셈이다. 마치 기독교에서 물속으로 들어갔다 나옴으로써(침례)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되듯이 지훈이 물에서 건져낸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카밀라가 아니다(138).

 

양모와의 관계가 과거의 유물에 응결되어 있는 반면, 친모(정지은)와의 관계는 그녀의 현재하는 기억으로 드러난다(“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단 하루도 그녀를 잊지 않는(228) 지은에게 그녀는 카밀라가 아니라 희재이다. 이는 희재가 자신의 근원이 되는 지은의 기억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따른 것이다.

 

4.

 

하지만 자신의 근원을 찾아나서는 그녀의 노정이 종결되기 위해서는 아직 더 만나야 할 사람, 즉 아버지가 있다. 희재가 만나야 할 이는 "자살한 그 아이를 사랑하고 있었"(162) 사람이다. 그리고 희재가 그를 만날 때, 비로소 그녀의 정체성은 완성된다(232). 그리고 이는 바로 다름 아닌 바로 서로의 이름에서 확인된다. 이름은 기억의 중심에 놓여 있다.

 

바람의 말 아카이브에 당도한 희재는 사랑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랑의 증거는 기억이다. 그녀는 기억의 조각을 완성함과 동시에 그 기억 속에서 온전히 희재가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은 두 번 진행된다. 처음에는 서로 고립된 점의 우연으로, 그다음에는 그 우연들을 연결한 선의 이야기로. 우리는 점의 인생을 살고 난 뒤에 그걸 선의 인생으로 회상한다.”(201-2)

 

5.

 

이러한 기억의 수정과 확장은 지은의 딸, 희재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외려 그녀보다 더 절실했던 이는 바로 지은의 친구들이 아니었을까. 특히 미옥은 지은의 아버지와 자신의 아버지 사이의 관계를 확인하게 되는 과정(282-3)을 거쳐 과거의 주박에서 풀려난다. 이는 유치했던 "소녀 시절이 마침내 종말을 고하는 순간이다(283).

 

또한 백인 소녀 앨리스가 양관을 서성거리던 이유도 마찬 가지가 아닌가. 그녀가 가장 자주 발견되던 시기는 동시에 기억나는 게 없기도 했고, 또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게 많기도 한, 말하자면 암흑기”(260)였다. 망각되는 기억이 유령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기억하며 바라보던 이는 이선호 일가의 마지막 생존자, 이희재와 그의 어머니였다.

 

6.

 

이희재의 고통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관련된다. 에릭이 아내()의 사후에 새로운 여자와의 관계를 위해 그녀가 가장 사랑한 카밀라(13)의 물건을 보내서 아내에 대한 기억을 정리하듯이 그의 아버지(이상수) 또한 마찬가지 이유로 죽은 아내의 물건을 처분해버리는데(293), 이는 이희재의 부친을 향한 분노(와 이로 말미암은 그의 살부 충동)의 원인이 된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바람의 말 아카이브를 통해 옛 기억의 수집과 보존을 추구하게 되었을 게다. 이는 구원을 향한 몸부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 아카이브에서 상영되고 있는, 지은와 미옥의 친구 유진의 필름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유진이 필름을 통해 보존하고 복원했던 과거 역시 그녀()의 과거를 새롭게 하고, 치유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단이다.

 

7.

 

앞서 언급한 지훈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와 여자친구(미연) 사이의 결별은 사투리(라는 빌미)에 기인하는 소통의 좌절 때문이다. 그는 바람의 말 아카이브와 함께 제작한 라디오 방송(<우리들의 사랑 이야기>)에서 제공되는 숱한 사랑 이야기들, 즉 다른 이들의 만남과 이별에 대한 기억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하고, 그 동일시 가운데 위로를 얻게 된다.

 

지훈과 희재의 만남은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심연으로 말미암은 상처(327)와 이의 극복(곧 구원)에 관계되는 것이다. 바람의 말 아카이브에 영구 보존되는 사랑의 이야기”(157) 속에 희재의 부모 이야기가 들어있다. 이곳에 소장된 이야기들을 통해 위로 받은 지훈으로 말미암아 희재는 마침내 이곳에 당도한다.

 

그리고 24년 전과 동일하게 이곳에는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231; 323). 그의 기다림은 곧 지은의 기다림이기도 하다(150; 223; 230). 희망(327)은 기다림이다. 둘의 기다림은 오로지 그녀(희재)의 당도를 통해서만 종결될 수 있으며, 기억과 현재가 그녀를 통해 연결된다. 정희재는 심연을 가로질러 정지은과 이희재를 다시 이어주는 날개인 것이다(278).

 

8.

 

구원은 기억과 이를 경유한 소통의 다른 이름이다. 소설의 인물들은 기억을 통해 구원을 경험한다. 정지은의 기억 속에서 카밀라는 정희재가 된다. 유진의 필름 속에서 미옥은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한다. 바람의 말 아카이브에서 지훈은 이별의 상처를 치유 받는다. 이희재와 모친의 관심으로 인해 앨리스는 이제 유령으로 떠돌지 않는다.

 

반면 최성식 부부에게는 구원이 없다. 아내의 강요로 인해 제자(지은)에게 낙태를 요구한 최성식은 평생을 그 죄책감 속에서 살아야 했다(211). 남편과 지은 사이를 의심하던 신혜숙은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희재의 과거를 조작하여 강제 입양시킨다. 마침내 남편의 결백을 알게 된 후에도 여전히 그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216)은 이러한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은이 죽음에 이르게 한 거짓말의 장본인인 미옥과 신혜숙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신혜숙의 거짓은 자존심에 그 동기가 있지만, 미옥의 거짓은 실제 고통에 기인한다. 지은의 아버지가 선동하여 일어난 일단의 사건, 즉 아버지의 죽음과 이로 인한 가정의 파탄이 그녀의 소녀 시절을 드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유진의 필름을 통해 자신의 과오를 직면하는 가운데 드디어 어른이 된다.

 

기억을 통한 구원을 둘러싼 이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심연이며(326), 소통은 이러한 심연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심연을 넘어서는 소통은 신비에 다름 아니며, 우리는 이를 희망하는 가운데 최선을 다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말의 마지막 문장에 담긴 희망은 우리 모두의 희망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