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불꽃
프랑스와 까쌩제나-트레베디 지음, 서인석 옮김 / 분도출판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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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책 자체보다 책 안에 있는 특정한 문구를 중심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실은 그 마저도 본문이 아니라 추천의 말에 있는 문장이다. 한 문장에 눈과 마음이 붙들려서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해서 여기에 상념을 털어내고 가야할 것 같다. "사실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성서를 "읽는다" 하지 않고 "듣는다"고 하였습니다."(5쪽)


옳은 말이다. 성경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말씀은 듣는 것이다. 듣는 이유는 따르고자 함이다. 이는 학자의 자세가 아니라 제자의 자세다. 학자는 해석하나, 제자는 순종한다. 학자는 마주하나, 제자는 아래 선다. 그러므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귀를 활짝 여는 것이야말로 참된 제자의 자세다. 올바른 듣는 자세다. 


이 조그만 책자(말씀의 불꽃)는 렉티오 디비나를 다룬다. 렉티오 디비나야말로 말씀을 듣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머리로 말씀을 해석하기 위한 읽기가 아니라 마음으로 말씀을 순종하기 위한 듣기가 바로 렉티오 디비나이다. 추천의 말에 나온 것처럼, 렉티오 디비나는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에 기초를 두고 있다.


말씀을 듣는 이유는 따르기 위함이라고 했다. 경청은 순종의 전제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순종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말씀을 듣고 또 들어야 한다. 들은 말씀이 내 것이 되기까지 계속 곱씹어야 한다. 혹은 개가 뼈다귀를 물고 늘어지듯 집요하게 매달려야 한다. 이게 바로 묵상, 즉 렉티오 디비나다.


소가 여물을 되씹듯이 계속 반추함으로 머리 표면에 떠돌던 성구(와 그 진리)를 마음 깊은 곳으로 내려보내야 한다. 그래야 자연스레 삶으로, 즉 손과 발로 드러나게 된다. 머리의 지식이 가슴으로 내려와 지혜가 되고, 다시 삶으로 드러나 참로 내 것이 된다. 해서 이제 다시 말씀 앞으로 나아온다. "말씀하소서. 내가 따르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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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로역정 (완역본, 1·2부 통합, 양장) 기독교 명작 베스트 1
존 번연 지음, 유종남 옮김 / 선한청지기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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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대로다. <천로역정>을 펼쳐서 존 번연이 쓴 저자의 말을 보았다. 제목이 "이 책에 대한 저자의 변명"이다. 특히 그는 우화적 글쓰기에 대해 해명한다.

 

“비록 내 글이 모호하고 분명하지 않을지라도 진리를 담고 있다. 깊숙한 곳에 금덩이를 숨겨 놓은 장롱처럼 말이다.”(14쪽)

 

사실 오랜 만에 천로역정을 펼쳐든다. <천로역정>은 내게 참으로 의미가 깊은 책이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 맨 처음으로 읽은 신앙서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에는 무얼 얼마나 알고 읽었으랴 싶다. 심지어 그때의 나는 고작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하지만 내 신앙의 첫 단추를 꿰는 데에 제법 기여했으리라.

 

그때는 무심하게 넘긴 저자의 말(이 책에 대한 저자의 변명)을 읽는다. 새롭게 꼼꼼히 살펴보니 이제사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있다(어디 한두 개겠나 싶지만).

 

“그저 즐거운 마음으로 펜을 들고 빠르게 써나가자 생각이 명료해졌다. 어떤 방법으로 목표를 이룰지 결정하고 전체적인 구상에 따라 써 내려갔으며 결국 지금 여러분들이 보고 있는 길이와 넓이, 그리고 규모를 가진 책이 완성되었다.”(8-9쪽)

 

존 번연을 사로잡은 추동력(즐거운 마음)은 성령님이 주신 거룩한 열망이었을 게다. 성령님이 존 번연의 마음 속에 뿌린 씨앗은 어마어마한 결실을 맺었다.

 

<천로역정>의 엄청난 확산에는 분명 그 우화적(=비유적) 글쓰기 또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물론 그 형식 속에 담긴 고갱이가 본질이지만, 형식 자체도 의미있다.형식과 내용, 두 가지 면에서 천로역정을 반복해서 읽고 공부할 가치가 있다. 무려 백번이나 읽었다는(독서백편의자현!) 스펄젼만큼은 아니라도, 여러 번 읽을 만 하다.

 

<천로역정 The Pilgrim's Progress>의 내용은 "영원한 상급을 얻으려 애쓰는 사람의 이야기"(17쪽)이다. 1부의 주인공은 크리스천이고, 2부의 주인공은 그의 아내 크리스티아나(와 네 아들)이다.

 

알다시피 우리는 모두 순례자(pilgrim)다. 그 여정에서 온갖 시험과 위험을 만날 수밖에 없지만, 우리는 모두 저 천성을 향해 멈추지 않고 가야(progress) 하는 존재이다.

 

이번에 다시 읽는 버전은 선한청지기 판이다. 두 가지가 두드러진 장점이다. 하나는 1부(남편 크리스천 편)와 2부(아내 크리스티아나 편)가 합본되어 있다는 점이다.

 

또한 본문 안에 새롭게 삽화를 그려넣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 하다. 40여 개의 부드러운 연필화가 각 장면으로 하여금 살아나게 만들어 읽는 맛에 보는 맛을 더해준다.

 

더불어 번역 문장도 비교적 부드럽게 다듬어져 있다(원서는 17세기 영어로 집필되어 매우 옛스럽다). 독자들의 입장에서 한결 편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천로역정>은 국내에 이미 다양한 버전이 소개되어 있다. 선한청지기 판은 그 중에서도 번역과 삽화 면에서 독자에게 부담없이 다가간다는 면에서 점수를 주고 싶다.

 

존 번연이 굳이 그 기법 사용에 대한 해명(변명)으로 시작한 우화의 세계가 바로 <천로역정>이다. 그 순례의 여정을 한결 편한 문장과 따뜻한 그림으로 만나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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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팬데믹 - 코로나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
톰 라이트 지음, 이지혜 옮김 / 비아토르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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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팬데믹>은 누구 말대로 환공포증이 생길 것 같은 표지 디자인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인상적인 표지의 중책자를 지인의 강력 추천에 힘입어 지난 주 목요일에 샀다. 곧바로 주말에 읽기 시작했다.


작고(46판) 얇은(132쪽) 책이라서 결코 읽기에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읽은 감상은 결코 가볍지 않다. 책은 얇지만, 내용이 깊어서다. 대가의 일필휘지가 무언가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일차적 소감이다.


톰 라이트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여기서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저 코로나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물어야 할 바와 행해야 할 바를 아야기할 따름이다. 그 이야기의 출처는 단연 성경이고, 또한 교회사를 참고한다.


고난 앞에 선 성도들의 자세를 논하고자 톰은 성경을 두루 살핀다. 성경을 다루는 그의 방식은 조자룡이 창을 휘두르듯 호쾌하기 그지없다. 신구약을 종횡무진 누비는 그의 스케일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다.


두 가지가 인상적이다. 하나는 왜에서 어떻게로 질문의 방향을 돌린 것이다. 고난의 원인 규명(인식론)을 추구하는 것보다 고난의 대처 방안(윤리학)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변한다(물론 탄식과 기도가 함께 한다).


다른 하나는 고난을 회개의 부름(표적)으로 해석하는 입장에 반대하여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야말로 궁극의 표적이라며, 예수님을 배제히고 다른 표적을 구하는 자세에 대해 질책한다. 참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을 위해 전개되는 톰의 호방한 해설은 절로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제대로 읽고 싶게 만든다. 또한 다시금 주님께로 마음을 돌이키고, 나아가 주님을 위해 세상을 섬길 마음을 먹게끔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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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네가 얼마나 행복한 아이인지 아니? : 북한 아이들 이야기 넌 네가 얼마나 행복한 아이인지 아니
이은서 지음, 강춘혁 그림, (사)북한인권시민연합 감수 / 국민출판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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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기리에 종영된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은 대중으로 하여금 북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알려주었다. 장르 자체는 로맨스 판타지라 해야 맞겠지만(현빈이 맡은 리정혁 캐릭터 자체가 여심 저격용 판타지다), 취재를 꼼꼼하게 한 흔적이 역력하다. 우리는 여전히 북을 잘 모르고 있다. 

  

 <북한 아이들 이야기>는 북한 아이들이 들려주는 북한 이야기라 봐도 무방하다. 물론 책 자체는 이은서 작가가 탈북 어린이들을 취재해서 재구성한 것이다. 탈북 어린이들이 겪은 북한은 아름다운 곳이 아니다. 

  

 학교에서조차 제대로 된 배움은 고사하고 꼬마과제라고 해서 철, 고무, 종이 등을 정해진 양만큼 학교에 바쳐야 한다. 학교 수업이 끝나도 버려진 철과 고무를 찾아 온 마을을 들쑤시고 다녀야 한다. 한데 그래봤자 나울 구석이 없으니, 과제물을 내기 위해서는 돈을 내든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가령 산에서 나무를 베려면, 돈을 내고 표를 끊어야 한다. 혹은 남의 집에서 장작을 훔쳐야 한다. 동(銅)을 구하기 위해 정전이 될 때, 전봇대에 올라가 멀쩡한 전선을 끊는다. 그러다 들키면 공개 처형을 당한다. 국가경제를 위험에 빠뜨린 죄라서 적당히 넘어갈 수가 없단다.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 이야긴가 싶다. 고구마를 한가득 삼킨 것 같은 느낌이다. 

  

 요덕에 있는 수용소, 일명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가는 아이들 이야기도 암울하기 그지없다. 인간 취급도 못 받고, 무자비한 폭력적 관리 속에서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가 강제 노동에 종사해야 한다. 그야말로 생지옥이 따로 없다. 죽어서도 떠날 수 없는 곳이다. 

  

 한데 수용소에서 살지 않는다고 다를 게 있나 싶다. 농촌지원이라고 군인과 어른들, 학생들 모두가 농촌에 가서 일을 한다. 모두 다 김매기 전투에로! 빨간 색으로 담벼락에 쓰인 구호다. 아이들도 오전 수업만 하고 농장에 가서 일을 하거나, 농번기에는 아예 학교 대신 농장으로 가기도 한다. 먹을 것도 주지 않은 채로 종일 일을 시킨다. 이게 말인가 방구인가 싶다. 

  

 <북한 아이들 이야기>는 참담한 북한 현실을 이렇게 어린이들의 처지에서 낱낱이 들려준다. 어디나 지옥이다. 도대체 지옥의 끝이 없다. 부모가 없거나 있어도 돌봐줄 수 없는 가난한 아이들을 꽃제비라고 한다. 이들은 나가서 음식을 구걸하거나 훔쳐 먹는다고 한다. 나이만 어릴 뿐 길가로 내몰린 노숙자에 다름 아니다.  중국으로 도망쳐도 아이들은 여전히 구걸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은 마지막 장에서 작은 희망의 씨앗을 뿌린다. 중국과 태국을 거쳐 한국으로 오는 위험한 탈북 여정에 나선 아이의 이야기로 마감한다.  그 엄혹함이 비단 아이들만의 이야기겠는가. 어른들 또한 마찬가지다. 새삼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살고 있음에 감사하고, 감사한다. 또한 어서 북의 엄혹한 세계를 사는 서민들, 특히 어린이들에게 훈훈한 봄바람이 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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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깊이를 더하라 토저 대표작 시리즈 8
에이든 토저 지음, 전의우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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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얼 감추랴. 나는 토저(A. W. Tozer, 1897-1963)를 매우 좋아한다. 그의 깊이있고 날카로운 문장을 애독하며, 그의 예언자다운 면모를 존경한다. "토저는 이따금 강연이냐 설교에서 그러듯이 거칠고 호된 내용의 글을 써 냈다."(11쪽) 해서 토저의 글이라면, 모두 좋아한다. 


하지만 여기에 소개할 <신앙의 깊이를 더하라 Keys to The Deeper Life>는 온전히 그의 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마지막 장은 그의 원고에서 가려뽑은 내용이고, 심지어 부록으로 인터뷰가 실려있다. 또한 이 책의 주요 원고는 <크리스천 라이프>에 기고한 원고다(이 책의 편집자가 바로 <크리스쳔 라이프>의 편집자인 로버트 워커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토저의 신랄함과 경건함은 한결 같다. 


토저의 날카로운 펜은 교회의 문제를 지적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교회와 세상을 구별하는 선이 완전히 지워져 버렸다."(23쪽) 이제는 교회가 세상을 따르기로 작정했다. "세상을 흉내 내며, 세상이 이들의 모델이"(24쪽) 되어버려 "세상을 향해 증명하느라 바쁘다."(24쪽) 현대 복음주의 교회로서는 이보다 더 아프고 날카로울 수는 없을 게다.


토저는 개혁에의 열정에도 가차없이 찬물을 끼얹는다. "수많은 신자들이 하나님께 부흥을 달라고 오랜 시간을 부르짖어도 소용이 없다. 우리에게 개혁의 의지가 없다면, 차라리 기도하지 않는게 낫다."(25쪽) 미국 교회의 부흥에 대한 진심을 그는 다음과 같이 과감하게 평가한다. "내가 깊이 생각해 보고 내린 결론은 현재 상황에서 우리는 부흥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9쪽) 


에이든 토저가 미국교회에 대해 지적한 내용은 아마도 반세기 후의 한국교회에도 적용된다. 아니, 나 자신에게 적용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성령의 전이며,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고 주장한다. 옳다. 나도 그렇게 고백한다. 하지만 토저는 이렇게 책망한다. 


"우리의 태도와 우리의 행동 때문에, 무엇보다도 우리의 열정이 부족하고 우리 안에 예배의 영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들은 힘을 잃는다."(32쪽)


나의 태도와 나의 행동이 문제라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또한 나의 열정이 부족하고, 내 안에 예배의 영이 충만하지 않다. 내가 문제다. 한국교회를 질책하기 전에 나를 반성할 일이다. 나의 영성 자체가 얄팍하기 그지없다. 한국 교회의 영적 수준을 묻는다면, 그저 내 삶을 보면 될 것이다. 맞다. 내 탓이다.   


"'더 깊은 삶'이 큰 의미가 있는 단 한 가지 이유는, 대부분 그리스도인의 평균적인 삶이 비극적일 만큼 얕기 때문이다."(38쪽)


그렇다고 이제까지의 나를 평토장한 무덤이었다며 자학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나의 얄팍한 영성을 화려한 언어로 은폐하고, 그것을 실제인 양 포장했다는 점을 감추지도 않겠다. 이제라도 태도를 돌아보고, 행동을 바로잡고, 열정을 회복코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영과 진리로 예배 드리는 자리에 나아와야 할 것이다.


"더 깊은 삶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땅한 특권을 체험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내적인 예배의 달콤함을 맛보아야 한다."(39쪽) 


에이든 토져는 언제나 옳다. 더 깊은 삶을 위해 나는 예배의 달콤함을 맛보아야 한다. 이는 성령의 인도에 이끌려야 가능하다. 따라서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성령으로 충만해야 교회도 충만하다. 내가 성령으로 이끌려야 교회도 예배의 영으로 회복된다. 성령 충만은 나를 포함한 우리 모든 성도의 사명이다. 


"교회는 성령이 충만할 때만 빛을 가질 수 있다. 나아가 교회를 이루는 지체들이 개인적으로 성령 충만해야 교회 또한 성령 충만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성령 충만이 하나님의 완전한 구속 계획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기 전에는 누구도 성령 충만할 수 없다."(60쪽)


주말을 맞이하며 새로운 마음으로 거룩한 예배를 드리고자 한다. 해서 마음을 새롭게 하고자 토저의 책을 다시 펼쳤다. <신앙의 깊이를 더하라>는 나에게 여전히 말한다. 더욱 깊이 들어가라고, 더욱 성령으로 충만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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