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삐딴리 - 을유라이브러리 16 을유 라이브러리 16
전광용 지음 / 을유문화사 / 1994년 4월
평점 :
절판


*꺼삐딴 - captain에 해당하는 러시아어. 고교문학수업시간에 그나마 작가와 작품의 이름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우리네 문학수업이라는게 시대별로 대표적인 작품과 작가의 연표와 연대기나 쭉 암기하고 각 작품의 시대사적 특징과 주제와 개략적인 줄거리만을 뽑아서 외우는 식이다 보니 수업시간에 이 작품의 이름이 나올때마다 호기심을 금치 못했던것이 과연 제목으로 사용된 '꺼삐딴'이라는 단어가 도대체 무슨 뜻을 가진 말이냐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나의 청소년시절 '아Q정전'과 함께 내 머릿속에 너무나도 생소하고 인상깊은 제목으로 인해 호기심과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던 2대소설의 하나였던 꺼삐딴리가 도대체 무슨 말인지 너무나 궁금해하던 차에 마침 눈에 띈 이 책을 서슴없이 집어들고 읽게 되었던 것이다.

주인공인 이인국박사는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요 출세지상주의자로서 그때 그때마다 시대상황의 변화에 맞추어 발빠르고 약삭빠르게 대응하여 부를 축적하고 성공한 사회인이 되어 살아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제시대에는 충실한 친일파로서 살아가다가 해방후 소련군이 내려오자 자신의 천부적인 의술을 활용하여 천재일우의 기회를 얻어 소련간부의 수술을 성공적으로 집도하고 풀려나게된다.그후에도 시대변화에 따라 러시아에 붙었다가 결국 미국유학길에 오르게된다. 대단히 기민하고도 또한 운이 좋은 사람이 아닌가!
가히 처세술에 있어서 입신의 경지에 도달한 모습을 보여주는 이인국박사. 20세기초중반을 살아왔던 한국인으로서 당시의 급변하는 역사의 소용돌이속에서 그 풍파에 휩쓸려 침몰하지 않고 결국 꿋꿋이 간과 쓸개사이를 붙어다니며 살아남은 박쥐같은 인간형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런 유형의 사람들을 매우 혐오하고 증오하고 싫어한다. 물론 나도 자신의 안위와 출세에만 눈이 멀어 조국과 민족은 팽개친채 이렇게 줏대없이 지배권력에만 빌붙어 아첨하며 살아가는 기생충같은 인간들을 혐오하긴 하지만 솔직히 자신있게 욕할 수만은 없다.

나 역시도 그와 같은 상황에 처했을때 그처럼 행동하지 않았을거라는 확신도 보장도 없기에. 극중의 이인국박사처럼 그렇게 적극적으로 아부하고 아첨하고 비위를 맞추며 비굴한 기회주의자로 살지는 못했겠지만 그러나 나 역시도 그러한 시대상황속에서 살았었더라면 목숨을 걸고 독립투쟁을 하거나 어느 사상에 경도되어 격렬하게 이념투쟁을 하지는 않았을것이다. 그저 선의의 방관자가 되어 일제치하에서는 속으로나 욕하며 겉으로는 일제앞에 설설 기며 살았을테고 해방후에는 미국놈이 이기든 소련놈이 이기든 아무튼 상관없이 내 한 목숨 온전히 보전하고 잘 살아나갈 방도를 찾아나섰을것이다.

어떻게 보면 극중의 이인국박사를 욕할 자격이 있는 대한민국국민이 얼마나 될지 참 의아하게 생각되기도 한다. 진정 죄없는 자만이 이 창부에게 돌을 던지라. 그 역시 20세기 한반도의 격동의 현장속에 태어난 죄로 부표처럼 떠다니며 자신의 목숨과 부귀영화를 정착시킬 새로운 기회를 찾아 어쩔수 없이 방황하게 된 시대의 희생양이 아닐런지. 그렇다 해도 그에게 면죄부가 주어지는건 아니지만, 그렇다 해도 그를 용서하고 이해하고 옹호해줄수있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섣불리 자신있게 그를 마냥 욕할수만은 없다. 어찌보면 어차피 세상에 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선의의 방관자가 될수밖에 없는 노릇이고 그는 그중에서도 조금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상황에 대처한 사람일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방향이 잘못됐긴 하지만. 지금도 우리사회에는 수많은 현대의 꺼삐딴리들이 활개를 치고 여전히 잘 살고있고 오히려 그보다 더 심한 인간군상들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을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부지불식간에 그러한 꺼삐딴리중의 한명이 되어가고 있는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천하에 둘도없는 기회주의자인 이인국박사를 맘편히 욕할수만은없는 내자신의 모습이 씁쓸하게 느껴지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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