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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초반 내가 국민학교를 다닐때 우리집에는 120권짜리 계몽사문고시리즈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워낙에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이라 방구석에 틀어박혀
책만 읽던 나에게 우리부모님이 사주신 책이었는데 커가면서부터
나는 어린시절 내게 이런 책을 읽을수 있게 해주신 부모님과
계몽사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내가 알아야 할 그리고
알고있는 대부분의 것들은 모두 이 계몽사문고에서
배웠다고 할 수 있을정도니까 말이다.
서론은 그만하고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감명깊게 읽었던
- 사실 이 작품외에도 주옥같은 명작들이 잔뜩 있었지만 -
작품의 하나인 백경에 대해서 나의 감상을 써보고자한다.
백경(白鯨)은 말 그대로 흰고래라는 뜻이다.
실질적으로 이 작품의 주인공이 아니면서도 이 작품전체를
이끌어나가는 존재가 바로 이 흰고래이다.
몸전체가 하얀 우윳빛으로 빛나는 바다의 하얀악마 모비딕.

이 작품은 19세기 미국 낸트포트항의 한 포경선에서부터 시작된다.
주인공 이슈마일은 낸트포트에 와서 일자리를 구하다가
식인종원주민이 사는 어느 섬나라의 왕자라는 쿠이켁을 만나게된다.
쿠이켁과 이슈마일의 첫만남의 묘사가 아직도 생생한데
식인종이라는 여관주인의 말에 전전긍긍하며 불안에 떠는
이슈마일과 과묵하고 무뚝뚝하지만 인정많고 의리있는
쿠이켁과의 만남이 아주 흥미진진하게 묘사되어있다.
쿠이켁과 이슈마일은 바로 친구가 되고 그들은 일자리를
구하러 나갔다가 피쿼드호라는 포경선의 선원자리를 얻게된다.
그 자리도 사실 쿠이켁의 작살솜씨를 보고 반한 고용인덕분에
이슈마일은 그냥 덤으로 얻게된 자리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리하여 그들은 피쿼드호에 몸을 싣고 고래를 잡기위해
바다로 나가게 되고 그때부터 그들의 바다생활이 시작된다.
이 작품에서 무엇보다도 독자들을 사로잡는 매력은
자연을 상징하는 거대한 흰고래와 그 고래를 쫓는 사람들과의
숨막히는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포경선의 선상생활과 바다사나이들의 모습,
그리고 고래사냥의 생생한 묘사는 독자들의 상상력을 한껏 자극하여
푸른바다에서
물살을 헤치며 고래의 등에 작살을 꽂는 장면을 떠올리게한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깊은 건 고래를 쫓는 뱃사람들의
다양하고도 흥미진진한 갈등과 인간성에 대한 묘사라고 할 수 있다.
모비딕에게 한 쪽 다리를 잃은후 오직 복수하겠다는 일념에 불타
복수의 화신이 된 에이허브선장은 다른 모든 상황은 무시한채
오로지 복수에만 집착한다.
그에게 다른 고래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으며 선원들의 안위와
본업인 고래잡이는 안중에도 없다.
일등항해사인 스타벅은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런 성격으로
복수에 미친 선장을 막기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 선장의 집념에 굴복하고 만다.
복수심에 불타 이성을 상실한 에이허브선장의 광기어린 모습과
선원들에게 겁쟁이취급을 받으면서도 모두의 안전을 위해
선장을 막으려는 스타벅과의 갈등과 대립구도는 멜빌의 탁월한
글솜씨로 인해 바로 눈앞에 펼쳐지듯 아주 생생하게 묘사된다.
특히 압권을 이루는 장면은 도저히 에이허브의 의지를 꺾을수
없다는걸 알게된 스타벅이 잠들어있는 에이허브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고뇌하다가 에이허브의 잠꼬대를 듣고 차마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고 그냥 돌아서는 장면인데 십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도 그 장면의 인상과 감동이 생생히
남아있는걸 보면 원작이 아주 훌륭했거나 번역자의 능력이
출중했거나 아니면 그 당시 내가 너무 어려서였기때문일게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분명 이슈마일이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다른 선원들, 특히 에이허브선장과 스타벅의 갈등관계와
선원들의 고래잡는 모습들, 그리고 바다의 악마 모비딕과
복수의 화신 에이허브선장의 대결을 지켜보고 서술해주는
화자의 역할일뿐 자신이 이야기의 중심에서는 인물은 아니었다.
이 작품의 캐릭터들은 뱃사람다운 개성이 독특하고 인물묘사가
잘 되어 있어서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게된다.
이등항해사인 스텁은 항상 파이프담배를 피우는데 잘때를
제외하고는 입에 항상 파이프를 물고 생활한다.
삼등항해사인 플라스크는 - 어라 잘 기억이 안난다.
이 사람은 별 뚜렷한 특징이 없었나보다.
이 세명의 항해사는 각각 자신만의 작살잡이를 거느리고
있는데 스타벅은 쿠이켁을 스텁은 원주민인 대구를
플라스크는 인디언인 테슈테고를 각각 거느리고 있고
그들 셋은 각자가 아주 뛰어난 작살잡이였다.
이 작품을 통해서 나는 19세기 고래잡이의 현장을
어느정도 알 수 있었는데 피쿼드호의 경우 고래떼를
발견하면 세척의 보트가 내려지고 각각의 보트에
항해사와 일급작살잡이들이 하나씩 배당되고
노젓는선원들이 타게된다.
그리고 고래떼속을 헤치며 작살로 고래를 잡는데
살려고 버둥거리는 고래떼속에서 그 흔들리는
파도위의 보트뱃전에 서서 작살을 던져 고래의
급소를 맞추는 장면이 아주 생생하게 묘사되어있다.
이야 실제로 예전에는 그렇게 무식하고도 용감하게
고래를 잡았었단 말인가.
작살잡이들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존경스럽다.
마치 분대장과 스나이퍼하나에 일반보병들로 이루어진
세개의 분대로 구성된 하나의 소대가 백전노장인 소대장의
명에 따라 게릴라전을 펼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왜 지금 갑자기 노인과 바다와 백경이 비슷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드는걸까.
산티아고 노인은 다랑어를 에이허브선장은 고래를 잡는다는
전체적인 줄거리나 바다로 대표되는 자연과의 사투가
생생하게 그려져있다거나 인물들의 심리묘사가 치밀하고
짜임새있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어서일까?
결말- 정말 니힐하다. 어쩌면 상당히 깔끔하고 쿨한
기법일수도 있다. 하지만 웬지 아쉽고 상당히 여운이 남는.
결국 에이허브 선장의 잘못된 집착으로인해 애은,
그리고 유능한 선원들은 피쿼드호와 함께 바닷속으로
가라앉는다.
화자였던 이슈마일만이 수장을 면하고 유일한 생존자가
되어 - 그가 살아남게된 원인이 바로 가장 친했던
친구 쿠이켁의 나무관이라는 사실은 뭐랄까 가장
소설다운 착상이면서 소설적인 이야기이면서
뭔가 모를 아이러니와 모순을 느끼게 해주면서도
상당히 현실적인 느낌까지 들게 만드는 묘한 느낌을
준다.- 자신의 회고담을 남기는게 바로 이 백경이다.
 이 작품에서는 에이허브와 모비딕이라는 두 개의 카리스마가 격돌하는데
이 두 존재는 같은 하늘아래 함께 살 수 없는 불구대천의 원수이다.
에이허브는 인간을 대표하고 모비딕은 자연을 대표하며
결국 인간과 자연의 갈등과 투쟁을 그렸다는 교과서적인 주제의식은 그러나 이제 생각해보니 내가 읽었던 책이 어린이용 책이라
그렇게 쉽게만 후기를 써놨던 것 같다.
요즘 들어서야 모비딕이 상징하는 것이 미국의 원주민,혹은 미국땅 그자체라는등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지만 지금 쓰는글은 어디까지나 나의 국민학생일때의 기억을 바탕으로 쓰는 글이기 때문에 자세하고 정확한 내용이나 더이상의 깊은 이야기는 쓸 여력이 없다.
훗날을 기약할 수 밖에.
이 글을 읽으며 느꼈던 모비딕과 에이허브선장의
카리스마는 정말 강렬했다.
그래서 아직까지 내 기억속에 가장 인상깊게 읽은
책으로 남아있는지 모른다.
나는 이 작품을 내가 읽었던 소설중 최고의 작품중의
하나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겠다.
모두에게 꼭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물론 나와 문학적 취향이 다른 사람에게는 억지로
권할수야 없겠지만.
대부분의 천재들의 삶이 그러했듯이 멜빌의
백경도 살아서는 전혀 인정을 못받고 빛을
못보다가 그가 비참한 생애를 마친후에야
비로서 호평을 받고 빛을보게 되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지만 원래 천재들이란
범인(凡人)과 다르게 그렇듯 불행한 삶을 살기마련아니겠는가.
그래서 후일 더욱 유명해지고 그를 애석해하는
사람들도 많아지는 법이니 말이다.
언젠가 기회가 되서 완역본을 읽게 된다면
- 능력만 된다면 원서로 읽어보고 싶지만 이 짧은 영어실력으로 언제 공부해서 원서를 읽어보랴.- 다시 한 번 음미해보고 부족한 오늘의 이 글을 보완해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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