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집에서 죽을 수 있을까? - 정보·선택·용기로 완성하는 마지막 삶의 설계
박동자 지음 / 예미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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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를 무료로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내 집에서 죽을 수 있을까?>라는 제목을 보자마자 마음이 조금 멈칫했습니다. 저는 종종 아주 먼 미래의 제 모습을 상상합니다. 머리가 희끗해지고, 걷는 속도가 느려지고,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하는 일들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시기가 오면 나는 어떤 모습일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상상은 자연스럽게  ‘나는 어디에서 죽게 될까?’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가능하다면 저는 익숙한 집에서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병원의 밝은 형광등 아래보다 제가 오래 사용한 물건과 책, 익숙한 냄새가 있는 공간에서 조용히 생을 정리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는 내 집에서 죽을 수 있을까?>를 읽으며 그 소망이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집에서 죽는다는 것은 단순히 장소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의료, 돌봄, 가족, 행정, 경제적 준비가 모두 연결된 문제였습니다.





책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가정형 호스피스 이야기가 특히 오래 남았습니다. 말기 환자가 병원이 아닌 집에서 세 딸의 돌봄을 받으며 세상을 떠났지만, 자택 사망이라는 이유로 유족들이 경찰의 조사를 받아야 했다는 대목입니다. 가족에게는 오래 준비한 마지막 작별이었는데, 제도가 그 죽음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 평온했던 순간이 혼란으로 바뀝니다. 죽음을 어디에서 맞을 것인가라는 개인의 선택도 결국 사회의 제도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선명하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이 책을 누군가의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읽었다기보다 제 죽음에 대해 한번 제대로 생각해보고 싶어서 읽었습니다. 막연히 ‘가능하면 오래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과 ‘어떤 상태까지 치료를 원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습니다.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사실과 그 치료를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같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이 책의 좋은 점은 죽음을 감상적으로만 다루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장기요양서비스, 치매 돌봄, 국민연금과 주택연금, 건강보험, 복지용구처럼 매우 현실적인 문제까지 함께 이야기합니다. 결국 좋은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죽는 순간만 준비하는 일이 아니라 그 이전의 긴 노년을 어떻게 살아갈지 준비하는 일이었습니다. 건강이 나빠졌을 때 누구에게 도움을 받을 것인지, 경제적으로 얼마나 자립할 수 있을지, 가족에게 어디까지 부탁하고 싶은지까지 미리 생각해야 합니다.


독일과 한국의 제도를 비교한 부분도 흥미로웠습니다. 어느 나라의 제도가 완벽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이 마지막까지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도록 사회가 어디까지 도울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죽음은 지극히 개인적인 사건 같지만 실제로는 사회복지와 의료, 행정 시스템의 수준이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책을 읽고 나니 예전보다 죽음이 덜 추상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물론 아직 제가 어떤 노년을 살게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건강하게 살다가 어느 날 조용히 떠날 수도 있고, 오랜 돌봄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계획대로 되는 인생도 드문데 죽음이라고 얌전히 계획표를 따라줄 리는 없겠지요.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해졌습니다. 저는 마지막까지 가능한 한 제 삶의 선택권을 가지고 싶습니다. 어디에서 지낼지, 어떤 치료를 받을지, 누구와 함께 있을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죽음을 애써 생각하지 않는 것보다 살아 있을 때 조금씩 준비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나는 내 집에서 죽을 수 있을까?>는  이상하게도 읽고 나면 삶을 더 구체적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결국 제가 원하는 마지막은 거창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익숙한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과도한 짐을 남기지 않고, 제 뜻을 가능한 한 지킨 채 조용히 떠나는 것.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내집에서죽을수있을까 #박동자 #예미  #리뷰의숲 #리뷰의숲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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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 원대로 떠나는 갓성비 유럽 여행 - 낭만을 놓치지 않는 또사라의 실속 여행법
또사라 지음 / 책밥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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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 원대로 떠나는 갓성비 유럽 여행>을 읽으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예전에 다녀왔던 프랑스 여행이었습니다. 일주일 정도 여행했는데 당시에는 제대로 된 유럽여행준비도 하지 않았고, 현지 물가에 대한 감각도 부족했습니다. 어디서 먹어야 저렴한지, 교통권은 무엇을 사야 하는지, 관광지 예약은 언제 해야 하는지도 잘 몰랐습니다. 그러니 여행이 끝나고 남은 것은 아름다운 파리의 기억과 함께 예상보다 훨씬 커진 카드값이었습니다. 그때는 진심으로 ‘유럽은 한 번 갔으면 됐다. 다시는 안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100만 원대로 떠나는 갓성비 유럽 여행>이라는 제목을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조금 의심부터 했습니다. 요즘 같은 유럽 물가에 정말 가능할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어보니 무조건 굶고 걷는 식의 짠내투어를 권하는 책은 아니었습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갓성비는 돈을 안 쓰는 여행이 아니라, 같은 돈을 쓰더라도 정보 부족 때문에 불필요하게 새는 비용을 줄이는 여행팁이 담긴 책이었습니다.


특히 마음에 들었던 것은 여행 전 단계부터 비용을 구조적으로 나누어 설명한다는 점입니다. 유럽여행경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항공권과 숙소부터 교통, 관광지 입장료, 환전과 카드 사용법까지 꽤 구체적으로 다룹니다. 항공권싸게구매하는법처럼 누구나 가장 궁금해할 만한 내용부터 캐리어 사이즈, 유럽의 여름 날씨와 옷차림 같은 사소해 보이지만 실제 여행에서는 돈과 직결되는 문제까지 챙깁니다. 여행지에서 급하게 무언가를 다시 사는 것만큼 억울한 소비도 없으니까요.


책을 읽으면서 눈에 들어왔던 것은 도시 이동 방법이었습니다. 파리 같은 곳에서는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방법 하나만 잘못 선택해도 이동비 차이가 생깁니다. 유럽은 도시마다 지하철, 트램, 버스, 국철의 체계가 다르고 티켓 종류도 복잡해서 초보여행자에게는 생각보다 큰 장벽입니다. 예전에 저는 이런 것을 현지에서 그때그때 알아보는 편이었는데, 돌이켜보면 가장 비효율적인 방식이었습니다. 현지에 도착해서 피곤한 상태로 검색하면 결국 가장 쉬운 방법, 즉 가장 비싼 방법을 선택하게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한 유럽가이드북이라기보다 유럽가성비여행을 위한 여행치트키 또는 꿀팁모음집에 가깝습니다. 어디가 예쁜지를 소개하는 유럽여행책은 많지만, 이 책은 ‘그곳을 현실적으로 얼마에 어떻게 다녀올 것인가’를 먼저 고민합니다. 카드 결제 때 원화가 아닌 현지 통화를 선택하는 방법, 여행 후반부에 기념품과 선물을 몰아서 구입하는 방식처럼 작은 경비절약 팁도 실제 여행에서는 꽤 유용해 보였습니다.


물론 ‘100만 원대’라는 금액은 여행 시기나 항공권, 방문 도시, 숙박 수준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여행자가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 절대적인 유럽예산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 숫자보다 여행 비용에도 전략이 필요하다는 책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생배낭여행이나 직장인배낭여행을 처음 준비하는 분이라면 특히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유명한 유럽여행지추천만 잔뜩 보고 출발했다가 현지에서 돈을 펑펑 쓰는 것보다, 먼저 이 책으로 여행의 비용 구조를 익혀두는 편이 훨씬 현실적입니다.





저 역시 프랑스 여행 이후 ‘유럽은 너무 비싸다’고 단정해버렸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어쩌면 문제의 절반은 유럽 물가가 아니라 정보 없는 여행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에 다시 유럽을 간다면 이 책을 꼼꼼하게 읽은 후 준비를 철저히 해서  예전처럼 무작정 떠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100만원대로떠나는갓성비유럽여행 #또사라 #책밥 #리뷰의숲 #리뷰의숲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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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인간적인 물리학 - 삶의 궤도를 찾아가는 10번의 시간 여행
팀 폴러트 지음, 배명자 옮김 / 21세기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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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인간적인 물리학>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제가 학창 시절 과학을 너무 일찍 포기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전형적인 문과형 인간이라 역사와 철학, 문학 쪽에는 자연스럽게 관심이 갔지만 물리학은 늘 ‘수식 많은 어려운 과목’이라는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우주에 관심이 생기면서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블랙홀, 우주의 탄생 같은 주제를 혼자 조금씩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토록 인간적인 물리학>은 저의 취향저격인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상대성이론에서 시작해 빅뱅, 별과 은하, 외계 생명체, 태양계와 지구, 진화, 양자역학, 인류의 미래와 우주의 죽음까지 138억 년의 시간을 한 권 안에 펼쳐 놓습니다. 언뜻 보면 범위가 너무 넓어 보이지만 실제로 읽을 때는 교과서처럼 딱딱하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개념을 설명하면서도 계속 인간의 위치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특히 시간의 상대성을 다루는 첫 장이 좋았습니다. 우리는 시간을 절대적인 것으로 느끼지만 상대성이론에서는 시간 역시 관측자의 상태와 중력에 따라 달라집니다. 같은 우주 안에서도 모두가 완전히 같은 시간을 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물리학적 명제이면서 묘하게 철학적으로 들렸습니다. 평소 철학책을 많이 읽어온 입장에서는 물리학과 철학이 생각보다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철학이 ‘시간이란 무엇인가’를 사유한다면 물리학은 그 질문을 실제 자연법칙 안에서 끝까지 밀어붙이는 학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 중 하나는 우주가 처음부터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빅뱅 직후의 우주는 우리가 알고 있는 원자도, 별도, 행성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사진 속 본문에서 설명하듯 우주의 초기에는 모래알갱이보다 훨씬 작은 공간 안에 지금의 우주 전체가 압축되어 있었다고 생각하면, 인간의 직관이 얼마나 작은 규모의 세계에 맞추어져 있는지도 새삼 느끼게 됩니다. 138억 년이라는 시간 역시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감각으로는 거의 붙잡을 수 없는 규모입니다. 우주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인간의 뇌가 참 귀엽다는 생각도 듭니다. 동네 편의점까지의 거리는 잘 계산하면서 10의 수십 제곱 년 앞의 우주를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으니까요.


별에 관한 부분도 인상 깊었습니다. 별은 단순히 밤하늘의 아름다운 점이 아니라 원소를 만들어내는 거대한 공장입니다. 우리 몸을 이루는 탄소와 산소, 여러 무거운 원소 역시 오래전 별의 내부와 죽음 과정에서 만들어졌습니다. 흔히 “우리는 별의 먼지로 이루어졌다”는 표현을 낭만적인 비유처럼 듣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물리적인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제대로 알고 나면 우주와 인간을 완전히 분리해서 생각하기 어려워집니다.  


외계 생명체를 다룬 장에서는 인간 중심적인 사고가 흔들리는 느낌도 재미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생명체라면 지구와 비슷한 환경과 형태를 떠올리지만, 책은 우리가 외계 문명을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가 그들이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일 가능성도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알고 있는 생명의 형태를 기준으로 우주를 찾고 있습니다. 이것은 과학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인식론의 문제처럼 느껴졌습니다.  


양자역학을 다룬 부분은 여전히 어렵지만 오히려 그래서 흥미로웠습니다. 이중 슬릿 실험이나 관측 문제를 접할 때마다 제가 갖고 있던 ‘현실은 이미 완성되어 있고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기만 한다’는 상식이 흔들립니다. 물론 양자역학을 곧바로 “생각하면 현실이 변한다” 같은 식으로 해석하면 곤란하지만, 최소한 인간의 일상적 직관만으로 자연 전체를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후반부에서 인류의 종말과 우주의 죽음까지 나아가는 구성도 좋았습니다. 항성 시대가 끝나고 블랙홀마저 사라질 정도로 먼 미래를 읽다 보면 인간의 수십 년은 정말 한순간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허무해지기보다는 반대의 감정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토록 인간적인 물리학>은 단순한 물리학 입문서라기보다 과학을 통해 인간의 위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책입니다.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을 깊이 공부하려면 별도의 전문서가 필요하겠지만, 왜 이런 학문이 흥미로운지 느끼게 해주는 힘은 충분합니다. 특히 저처럼 문과 공부를 오래 해왔고 뒤늦게 과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사람에게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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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열의 교양 - 알고도 모른 척해야 하는 지위의 법칙 세계척학전집 7
이클립스 지음 / 모티브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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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대놓고 서열을 말하는 것을 불편해합니다. 현대사회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말하고, 사람을 지위에 따라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현실의 인간관계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회사에는 직급이 있고, 학교에는 성적과 학벌이 있으며, 온라인에는 팔로워 수가 있습니다. 심지어 취향조차 때로는 사람을 구별하는 기준이 됩니다. <서열의 교양>은 우리가 없는 척하면서 매일 참여하고 있는 이 이상한 게임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정치학이나 사회학을 공부하다 보면 권력이 반드시 명령이나 강제의 모습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지배’와 ‘위신’을 구별하는 부분이었습니다. 누군가가 두려워서 따르는 것과 그 사람처럼 되고 싶어서 따르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조직에서도 직급 때문에 사람들이 말을 듣는 사람과, 직급과 관계없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의견을 구하는 사람은 분명히 다릅니다.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를 다루는 부분도 재미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취향을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떤 음악을 듣고, 어떤 책을 읽고, 무엇을 먹고 입는지는 내가 좋아해서 선택한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부르디외는 취향 역시 계급과 사회적 위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클래식을 듣고 어려운 책을 읽는 행동조차 때로는 문화적 취향인 동시에 ‘나는 이런 사람이다’를 보여주는 신호가 됩니다.


이 부분을 읽으며 요즘의 SNS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전에는 비싼 자동차나 명품처럼 알아보기 쉬운 물건이 지위를 보여주었다면, 지금은 오히려 취향과 경험이 더 정교한 신호가 된 것 같습니다. 어떤 책을 읽는지, 어느 전시를 보는지, 어떤 여행을 하는지까지 자신을 설명하는 하나의 기호가 됩니다. 심지어 “나는 남들과 비교하지 않는다”는 태도마저 새로운 종류의 자기 과시가 될 수 있으니, 인간의 지위 게임은 참 끈질깁니다.





그렇다고 이 책이 모든 인간관계를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흥미로운 지점은 서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한 뒤, 그것에 얼마나 휘둘릴 것인가를 묻는 데 있습니다.


저 역시 조직생활을 하면서 이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처음에는 누군가의 말투나 평가에 기분이 상하면 그 내용을 곧바로 ‘나에 대한 평가’로 받아들이기 쉬웠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 다르게 보게 되었습니다. 조직에서 오가는 말 가운데 상당수는 개인의 절대적인 능력에 대한 판정이라기보다 그 사람이 차지한 자리, 권한, 조직문화가 만들어낸 관계의 산물일 수 있습니다.  


책에 등장하는 서열 스트레스 연구가 특히 현실적으로 느껴진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서열이 높으냐 낮으냐만이 아니라 자신의 상황을 얼마나 통제할 수 있다고 느끼는가입니다. 예측할 수 없는 지시를 받고, 언제 평가받을지 모르며, 자기 일의 순서를 스스로 결정하기 어려운 환경에서는 작은 사건에도 긴장하게 됩니다. 개인의 멘탈이 약해서라기보다 구조가 지속적으로 사람의 몸과 마음을 긴장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부분에서 윌리엄 제임스의 ‘선택된 자아’와 부버의 ‘나와 너’로 넘어가는 구성이 좋았습니다. 모든 게임에서 이기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학벌에서 이기면 재산이 남고, 재산에서 이기면 외모가 남고, 거기에서도 이기면 인기와 명성이 등장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면 타인의 평가가 내 삶의 기준이 됩니다.  


이 책이 좋았던 이유는 인간에게 비교하지 말라고 순진하게 충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지위를 의식하고 타인의 시선을 살피는 존재라는 사실부터 인정합니다. 그러고 나서 한 발 더 나아갑니다. 게임의 규칙을 아는 것과 그 게임에 인생 전체를 거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나이가 들수록 저는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만큼이나 어떤 서열에는 아예 참여하지 않는 능력도 중요하다고 느낍니다. 누가 나보다 앞섰는지 계속 확인하는 삶보다 내가 원하는 일을 선택하고,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과 관계를 맺고, 내 기준으로 시간을 사용하는 삶이 훨씬 어렵지만 결국 오래갑니다.


산에 오르는 동안에는 산이 보이지 않는다는 책의 문장처럼, 서열 안에서 정신없이 경쟁하는 동안에는 내가 무슨 게임을 하고 있는지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가끔은 판에서 조금 떨어져 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이었습니다.


#서열의교양 #이클립스 #모티브 #리뷰의숲 #리뷰의숲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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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피 - 베로니카 곤살레스 라포르테 장편소설
베로니카 곤살레스 라포르테 지음, 최혜정 옮김 / 슬로우리드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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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피>는 처음에는 꽤 기묘한 소설처럼 느껴졌습니다. 팬데믹 시기의 한국, 성형외과 의사, AI 리얼돌, 무속신앙까지 등장합니다. 서로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소재들이 한꺼번에 섞여 있는데, 읽다 보면 완벽하게 만들어진 대상과의 관계를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주인공 지호는 현실의 여자들과 관계를 맺는 데 계속 실패한 뒤 자신의 욕망을 그대로 구현한 AI 리얼돌 ‘성미’를 만듭니다. 성미는 현실의 연인과 달리 지호를 실망시키거나 거부하지 않습니다. 관계에서 생기는 갈등과 불편함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아주 편안한 관계입니다. 그런데 저는 오히려 바로 그 지점이 섬뜩했습니다. 상대가 나를 거절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존재하며, 내 욕망에 맞춰 반응한다면 그것은 정말 사랑일까요. 






특히 “이 세상에 완벽한 관계가 어디 있어.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타인을 완전히 알 수는 없는 거야”라는 대목이 이 소설의 핵심처럼 느껴졌습니다. 실제 인간관계를 겪어보면 정말 그렇습니다. 좋아하는 사람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고, 가까웠던 사람과도 어느 순간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관계가 끝난 뒤에야 ‘나는 저 사람을 정말 알고 있었던 걸까’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소설의 내용이 꽤 기묘했음에도 빠져들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성미는 지호에게 가장 완벽한 연인이면서 가장 완벽하게 외로운 관계입니다. 타인에게는 나와 다른 욕망과 의지가 있다는 사실을 삭제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상처받아본 사람이라면 잠깐은 지호의 마음을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솔직히 사람 때문에 지칠 때면 “그냥 나랑 완벽하게 맞는 존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정도는 해볼 수 있으니까요. 문제는 나와 완벽하게 맞는 존재란 결국 나에게 맞춰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편안함은 얻을 수 있어도 진짜 타인을 만날 가능성까지 사라집니다.


이 소설이 더 흥미로웠던 것은 이런 이야기를 한국 사회의 풍경 속에 집어넣었다는 점입니다. 외국인 작가가 한국에서 6년 동안 생활하며 관찰한 사회라서인지, 우리가 너무 익숙해서 지나치는 장면들이 조금 낯설게 보입니다. 성형외과와 미용 산업, 획일화된 아름다움, 첨단 기술, 코로나19의 봉쇄와 감염 공포, 무속신앙이 한 작품 안에 공존합니다. 스마트 뷰티와 AI가 등장하는 초현대적인 사회에서 누군가는 무당에게 운명을 묻습니다. 처음에는 이 조합이 다소 엉뚱하게 느껴졌는데, 생각해보면 이것 역시 한국 사회의 묘하게 익숙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최신 기술을 믿으면서 동시에 운세를 보고, 과학적 의료를 받으면서도 중요한 순간에는 설명할 수 없는 징조에 마음이 흔들립니다.





성형외과라는 공간 역시 절묘합니다. 피부와 얼굴을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는 공간에서 지호는 급기야 자신의 욕망에 맞는 연인까지 만들어냅니다. 외모도 관계도 기술로 수정할 수 있다면 인간은 어디까지 자신이 원하는 세계를 만들어도 되는 것인지, 소설은 계속 이야기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며 기술이 인간의 외로움을 완전히 해결해줄 수는 없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AI가 점점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인간의 취향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시대가 되어도, 인간관계의 본질에는 여전히 내 뜻대로 되지 않는 타인이 존재합니다. 


<박피>는 편안하게 읽고 덮는 소설은 아니었습니다. 조금 기괴하고, 불편하고, 때로는 “이게 어디까지 가는 거지?” 싶습니다. 그런데 그 불편함 자체가 꽤 오래 남았습니다. 이 소설은 완벽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존재와도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무엇인지 재미있게 들여다보게 하는 작품이었습니다.


#박피 #베로니카_곤살레스_라포르테 #슬로우리드 #컬처블룸 #컬처블룸리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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