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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에는 이름이 없다 - 기획 노동, 누구나 하지만 아무도 부르지 않은 일
김희경 지음 / 웨일북 / 2026년 7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완독 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저는 결혼과 가정을 생각할 때 사랑이나 관계 자체보다 그 이후에 따라오는 삶의 운영이 더 먼저 걱정되는 편입니다. 지금 당장 결혼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결혼을 상상하면 육아와 집안일, 부모 돌봄 같은 일들이 한꺼번에 떠오릅니다. 특히 아이가 생긴 뒤에도 직장생활을 계속한다면 회사 일과 집안일을 병행하면서 과연 제 시간과 삶을 얼마나 지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일에는 이름이 없다>를 읽으면서 제가 막연하게 두려워했던 것이 단순히 ‘집안일이 많아지는 것’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김희경 작가는 <이상한 정상가족>과 <에이징 솔로>에서도 우리가 너무 익숙해서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가족의 모습을 다시 질문해온 작가입니다. 이번 책에서는 돌봄과 살림 뒤에 숨어 있는 ‘기획 노동’을 이야기합니다. 직접 밥을 하고 청소하고 아이를 돌보는 것이 실행 노동이라면, 그 일이 가능하도록 미리 생각하고 정보를 찾고 일정을 조정하고 결정하는 과정이 기획 노동입니다.

본문 첫 장의 제목부터 인상적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노동, 기획 노동을 호명하다.’ 집안일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실제 행동만으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무엇을 먹을지 생각하고, 필요한 물건을 확인하고, 병원 예약일을 기억하고, 가족의 일정을 조율하고, 예상되는 문제를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문제는 이런 과정이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을 한 사람조차 ‘내가 오늘 뭘 했지?’ 싶을 만큼 결과가 손에 잡히지 않지만 머리는 끊임없이 돌아갑니다.
특히 책에 등장하는 맞벌이 부부 이야기는 제가 결혼을 망설이는 이유와 정확히 맞닿아 있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가사노동을 5대5로 나누고 있다고 해도 실제로 누가 먼저 일을 발견하고, 언제 해야 하는지 기억하고, 상대에게 부탁하고, 끝났는지 확인하는가에 따라 부담은 전혀 달라집니다. 그래서인지 ‘똑같이 나누어도 남는 차이’라는 표현이 그래서 기억에 남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일의 양만 반으로 나눈다고 해서 머릿속의 책임까지 반으로 나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 ‘시키는 것도 또 다른 기획 노동’이라는 장의 제목에도 공감했습니다. 흔히 한쪽이 “말하면 하지”라고 말하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발견하고 설명하고 부탁하는 일 자체가 이미 노동입니다. 저는 결혼 후 이런 관계가 반복된다면 상당히 지칠 것 같습니다. 배우자를 사랑하더라도 상대방의 생활까지 계속 관리해야 한다면 어느 순간 배우자가 아니라 프로젝트 매니저가 된 듯한 기분이 들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사랑이 갑자기 업무 관리 프로그램으로 변하는 순간입니다.
책은 특히 여성에게 기획 노동이 집중되는 현실도 짚습니다. 2018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조사와 2023년 EBS 프로그램에서 확인한 사례들이 소개되는데, 실행 노동보다도 기획 노동의 성별 격차가 크게 나타났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육아휴직을 한 남편이 상당한 가사노동을 담당하면서도 정작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판단하는 역할은 아내에게 남아 있는 사례도 등장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저출생 문제를 단순히 ‘요즘 사람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피상적인지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출산 한 번으로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수년, 어쩌면 수십 년 동안 누군가는 아이의 건강, 교육, 생활, 감정, 일정과 미래까지 계속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에 직장생활까지 병행한다면 머릿속에는 회사와 가정이라는 두 개의 운영체제가 동시에 돌아가는 셈입니다. 제가 육아를 두려워하는 것도 아이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이 끝없는 정신적 책임을 감당하다가 제 삶과 일이 뒤로 밀릴 가능성이 두렵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이 책이 ‘그러니 결혼하지 말라’거나 ‘여성만 희생한다’는 식으로 단순하게 결론 내리는 책은 아닙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이 노동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름이 생겨야 무엇을 나누어야 하는지도 보이기 때문입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처음부터 기획과 실행을 함께 맡고, 가족 내부에서 해결할 수 없는 돌봄은 제도와 사회가 분담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저는 이 부분이 이 책에서 가장 현실적인 메시지라고 느꼈습니다. 결혼이나 육아가 두렵다고 해서 그 두려움 자체를 없앨 필요는 없습니다. 대신 무엇이 두려운지를 구체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저에게는 ‘가족을 갖는 것’보다 가족을 유지하는 모든 책임이 자연스럽게 한 사람에게 몰리는 구조가 훨씬 두렵습니다.
그래서 만약 언젠가 결혼을 생각하게 된다면 저는 단순히 “집안일 잘 도와주는 사람”보다, 집안일과 돌봄을 자신의 일로 인식하고 먼저 발견하고 계획하고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더 중요하게 볼 것 같습니다. ‘도와준다’는 말부터 사실 조금 이상합니다. 함께 꾸린 삶이라면 누군가의 일을 돕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공동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에는 이름이 없다>는 제가 막연히 가지고 있던 결혼과 육아에 대한 불안을 없애준 책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불안을 더 선명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조금 편해졌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보다 이름이 붙은 문제는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살림과 돌봄은 사랑만으로 굴러가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기억과 판단과 계획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일이 노동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비로소 어떻게 나눌 것인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제게 이 책은 결혼을 권하는 책도, 비혼을 권하는 책도 아니었습니다. 어떤 관계와 가정을 선택하든, 내 삶을 잃지 않기 위해 무엇을 먼저 확인해야 하는지를 알려준 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