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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절(들)
클레르 마랭 지음, 류재화 옮김 / 사람in / 2026년 5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완독 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단절(들)>은 이별이나 절연을 극복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라, 단절을 겪은 뒤 인간이 어떻게 이전과 다른 존재가 되는지를 탐구하는 철학 에세이입니다. 클레르 마랭 작가님은 프랑스에서 철학을 가르치며 질병, 정체성, 관계처럼 삶과 직접 맞닿은 문제를 사유해 온 철학자입니다. 그리고 이 책의 번역을 맡은 류재화 번역가님은 프랑스 문학을 연구하고 파스칼 키냐르, 모리스 블랑쇼, 롤랑 바르트 등의 작품을 옮겨온 번역가로, 이 책에서도 개념의 정확성과 문장의 감각을 함께 살려냈습니다. 작가님과 번역가님의 이력만으로도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목의 복수형을 괄호에 넣은 <단절(들)>이라는 표기부터 의미심장합니다. 단절은 하나의 거대한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 가족, 질병, 진로, 장소, 과거의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여러 번 다른 모습으로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며 단절이 존재의 결핍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재편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내용에 큰 공감을 했습니다. 우리는 대개 단절을 실패나 상실로만 이해합니다. 관계가 끝나면 사랑을 지키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일을 그만두면 경력을 잃었다고 여기며, 몸이 아프면 이전의 정상적인 삶에서 밀려났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마랭 작가님은 단절 이후 이전의 나로 돌아가는 것을 회복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이미 깨진 존재는 완벽히 복원되는 대신, 깨진 자리와 함께 다른 형태로 살아갑니다. 니체가 시련을 인간을 단순히 무너뜨리는 힘이 아니라 자신을 새롭게 구성하는 계기로 보았듯, 이 책에서도 상처는 제거해야 할 흠이라기보다 새로운 정체성을 만드는 재료가 됩니다.

저 역시 관계나 진로에서 큰 변화가 생길 때마다 가능한 한 빨리 예전의 평온한 상태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무엇을 잃었는지 계산하고, 내가 잘못 선택한 것은 아닌지 되짚으며, 원래의 나를 복구하려 애썼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단절 이전의 나로 돌아가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했습니다. 대신 그 과정에서 이전에는 참았던 것을 더 이상 참지 않게 되었고, 타인의 기대보다 내 시간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으며, 관계와 일에서 지켜야 할 기준도 선명해졌습니다. 당시에는 삶이 잘려 나간 것처럼 느껴졌지만, 뒤돌아보면 잘려 나간 자리에서 오히려 새로운 방향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랑의 단절을 다룬 부분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사랑은 두 사람의 삶을 완전히 하나로 합치는 일이 아니라, 서로에게 열려 있으면서도 각자가 분리된 존재임을 유지하는 관계로 설명됩니다. 우리는 사랑하면 상대와 모든 것을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지나친 결합은 때로 자신을 잃게 만듭니다. 반대로 결별은 한 사람만 잃는 사건이 아니라 그와 함께 살던 나, 그가 바라보던 나, 둘이 만들었던 미래까지 함께 사라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별이 오래 아픈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빈자리를 견디는 동안 타인의 시선에 의해 유지되던 자아가 흔들리고, 그 아래 있던 또 다른 내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단절(들)>은 이별이나 가족 문제, 퇴사와 이주, 질병처럼 삶의 전환을 겪고 있는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다만 즉각적인 위로나 해결책을 기대한다면 조금 어렵고 차갑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 책은 “곧 괜찮아질 것”이라고 다독이는 대신, 이전과 같아질 수 없다는 사실부터 인정하게 합니다. 역설적으로 그 냉정함이 더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마음에 꼭 드는 책을 만나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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