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버 - 제15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113
나혜림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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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맑고 온전해야할 일상이 조금씩 깨지고 금이 가는 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잘못된 선택, 예상 밖의 결과, 불운한 사고, 대중의 심리, 따라오며 괴롭히는 비난. 그 중 돈이 가장 큰 문제가 되는 인생은 이 세상에 과연 몇 개나 될까?
초등학생이던 시절, 나는 인터넷 세상에 푹 빠져있었다. 좋아하는 만화의 팬 카페에 매일같이 들락거리며 회원들과 채팅을 하거나 게임을 하며 놀았다. 그곳에는 학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 지식이 있었다. 나의 월드 와이드 웹(WWW, world wide web) 탐방은 어느 날 ‘이번 달에 전기세가 왜 이렇게 많이 나왔지?’ 하는 엄마의 혼잣말을 듣기 전까지 계속됐다. 그 한숨 소리가 유년의 나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는지. 나 때문이구나. 내가 컴퓨터를 너무 많이 해서 우리 집에서 돈이 새고 있어. 다 내 잘못 같았다. 그길로 하교하자마자 접속하곤 했던 팬 카페에 발길을 끊었다. 발길을 끊은 게 뭐야. 아예 컴퓨터 전원도 안 켰다.
그만큼 어른들의 세계는 아이들에게 강력하게 작동한다. 그게 돈이랑 엮이면 더더욱. 어른들의 어깨 너머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배우며 그 이치를 자신의 삶에도 적용시켜보는 건 모름지기 다음 세대의 영역이라지만, 아이들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돈의 가치를 깨닫는다.
『클로버』의 주인공 정인도 마찬가지이다. 정인은 어린 시절 부모님을 여의고 할머니와 단 둘이 볕이 들지 않는 단칸방에서 살아간다. 리어카를 끄는 할머니를 따라 폐지를 줍던 습관은 지금까지 이어져서, 하교하는 길에 골판지나 폐플라스틱이 보이면 서슴없이 책가방에 주워 담는다. 고물상에 가서 그것들을 단돈 2천원에 바꾸고, 주인장 박 코치의 한화 이글스를 향한 분노를 참고 듣는다. 학원가 사거리에 있는 햄버거 집에서 주 3일 아르바이트도 한다. 배달기사 형의 푸념과 점주의 비양심적 행동은 모르는 척 하면서, 정인은 자신을 둘러싼 그 모든 것을 필터 없이 흡수한다.
나혜림 작가는 교편에 있을 무렵,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100만원을 모으고 싶다고 한 학생의 말이 아직까지 기억에 박혀있다고 했다. ‘100만원 그게 뭐라고’어른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별로 어마 무시한 금액도 아닌 돈이 너의  평생소원이냐고.  그러나 그깟 돈 몇 푼이 없어서 하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못하고 참고 발악하듯 살아가는 인생도 있다.
마태복음 5장 45절에서는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고 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다. 때때로 ‘어떤 이는 펜트하우스에서 누군가의 집이 폭우에 떠내려가는 걸 구경하고, 그 집엔 빨래를 말릴 햇빛조차’ 없단 뉴스를 접하게 되는 것처럼, 과연 누구에게나 공정해야 할 해와 비조차 현대 사회의 만인을 굽어 살피지는 않는다. 그 차이는 예수도 해결해주지 못할 돈이 만든다.
그런 정인의 인생으로 성큼 들어온 건 다름 아닌 악마, ‘헬렐’의 존재이다. 비행기를 타 본 적도 없고, 좋아하는 여자아이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는 정인에게 헬렐은 수많은 ‘만약에’를 제시한다.
저자는 이 만약(萬若)을 만일(萬一)과 동일한 개념으로 보고, ‘지금과 다른 상황을 하나만 제시하면 모든 것이 뒤바뀔 거야.’라고 속삭이며 궁극적으로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진다. 
특히 음식에 조예가 깊은 헬렐은 식품 전체의 향을 결정하는 0.01%의 냄새 분자를 언급하며, 자신이 인생의 향과 색을 결정해 줄 수 있다고 유혹한다.
그런데 정인은 이 세상에 어떤 음식이 있는지 잘 모른다. 오르톨랑이나 샤토 페트뤼스, 캐비어 같은 고급 식문화는 들어본 적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그저 라면과 햇반으로 인생이 가득 차 있을 뿐이다. 찬장이 비어있으면 그날은 굶어야한다는 게 곧 정인네의 법이고 진리다. 만약 정인이 성냥팔이 소녀였다면 마지막 환각으로 보게되는 건 칠면조와 크리스마스트리가 아니라 라면이나 햇반일 정도이다.
『브리야 사바랭의 미식 예찬』에서는 ‘당신이 먹은 것이 무엇인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고 하지만, 이제껏 먹은 것이 별로 없는 정인은 자신에게 어떤 선택지가 주어질 수 있는지조차 모른다.
인생은 B(birth, 생生)와 D(death, 사死) 사이의 C(choice, 선택)라는 말이 있듯,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선택을 하게 된다. 사고 싶은 물건이 있어 포털에 검색할 때에, 최고 성능이 아닌데다 가격 또한 최저가가 아니더라도 가장 많이 팔린 제품이라면 눈길이 가는 것처럼, 수많은 알고리즘 속에서 욕망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애쓰고 있다.
마케팅 전략에도 골디락스, 또는 프로크로스테스의 침대라는 개념이 있다. 미끼 상품들이 섞여 있을 때, 사람들은 대게 중간 정도로 적당해 보이는 물건을 고르더라는 것이다.
이 알고리즘과 마케팅 전략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목적지로 도달하는 길에 제한을 걸기도 되기도 한다. 꼭 맞는 선택보다 더 보편적인 선택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에 저자는 당신이라면 그 섬세하고 자잘한 한계선이 무너졌을 때 어떤 선택을 할 지 악마 헬렐을 통해 묻는다.
악마라고 하면 보통 사이코패스처럼 공감 무능력자, 혹은 남들에게 크게 해를 끼치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헬렐은 겉보기에는 평범하고 귀여운 고양이로, 때로는 정인을 지극히 생각하는 동료처럼 그려진다. 
헬렐은 정인이 도피처가 필요할 때 찾는 쓰레기장에서 말동무가 되어준다. 고급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게도 해준다. 그럼에도 정인은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소설 중반부까지 그의 손을 잡지 않는다. 본인 스스로를 그렇게 착하지 않다고 칭하기 때문일까. '그렇게 영리하지도 않고, 바르지도 않고, 꿋꿋하지도 않은' 아이에게 후원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스스로 반문하며 복지관 선생님의 손길조차 거절하는 정인에게, 헬렐의 존재는 거부의 대상 그 자체이다.
성경에서 예수가 광야로 가 사십 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할 때 악마가 찾아왔던 것처럼, 주변을 이루는 모든 것이 모래처럼 부서지려 할 때 정인은 결국 헬렐의 손을 잡게 된다. 밑창이 다 떨어진 운동화, 주 5일 근무를 꿈꾸던 가게의 깨져버린 유리창, 교통사고로 의식을 잃고 병원에 실려 간 할머니. 모든 것이 나비 효과처럼 날아가고 있기에 정인이 선택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다.
이미 절망밖에 없을 위치에서 그리는 미래란 좀 더 근사해도 될 텐데, 어쩐지 헬렐이 보인 문 건너편에서 정인이 보는 장면들은 이전보다 더 많은 가능성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상상조차 자신이 아는 최선의 것에만 국한되어 있는 곳은 천국이 아니라 엄연히 지옥, 이승과 저승의 경계로 아발론이라 불리는 곳이다.
아발론에서 정인은 세 가지 문을 넘으며 비행기 퍼스트클래스를 타게 되고, 재아와 속 깊은 대화를 나눈 뒤 고급 호텔에서 할머니와의 식사를 하게 된다. 그동안 정인이 원했던 것들이다. 사실 이 세 가지 모두 정인이 간절히 진정으로 원했다고 하기에는 앞서 언급한 알고리즘 같은 선택 같아 보인다. 퍼스트클래스는 수학여행을 가지 못하게 된 데에서, 좋아하는 이성 친구의 대화는 헬렐이 불을 지핀 데에서, 고급 레스토랑은 헬렐이 데려간 호텔에서 보았던 메뉴판에서. 그러니 진짜 소원이라고 보기는 조금 애매하다.
마테를링크만의 희곡 『파랑새』에서는 주인공들이 파랑새, 곧 진정한 행복을 찾아 떠난 여정에서 의인화된 행복들을 만나게 된다. 그것들은 뚱뚱한 행복들로, 각각 사치스러운 행복, 소유하는 행복,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행복, 잠만 자는 행복 등의 이름을 가진다. 비록 백 년 전에 쓰인 작품이지만, 여기서 시사하는 바는 현대 사회의 우리에게도 빗대 볼 수 있다. 흔히 생각하는 빈둥거리며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에 느끼는 행복은 사실 이 뚱뚱한 행복들, 다시 말해 한 꺼풀 벗겨보면 불행에 가까운 행복들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의 제목인 클로버도 불행에 가까운 행복을 뜻한다. 클로버(trifolium)의 학명은 세(tri-)잎(-folium)이란 뜻으로 기본형이 3개 잎인 콩과 식물이다. 어쩌다보면 네 개의 잎이 달려 있는 경우가 있어, 왠지 특별한 것을 발견했다는 기분으로 즐거워지기도 하는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네잎클로버는 행운을, 세 잎 클로버는 행복을 상징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 약속, 희망 등이고 ‘잎말’은 그 어느 식물도 가지지 않는다.
일본의 한 농부가 클로버 잎의 개수를 18개, 21개, 56개까지 개량하여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는데, 사진을 찾아보면 기괴하다는 인상이 강하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인간의 욕망이 잔뜩 들어가 있단 걸 증명해보이기만 하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헬렐도 한평생을 부자로 살아왔지만 소문난 구두쇠였던 진 폴 게티의 말을 들먹이며 말한다. ‘가진 돈을 셀 수 있다면 그건 부자가 아니다’라고. ‘한 잔은 너무 많고 천 잔은 너무 적다’고. 
클로버의 열매나 씨앗, 꽃에는 크게 관심이 없고 잎만 보는 세태는 『클로버』 속에서 정인을 대하는 사람들의 것과 닮아 있다. 동정과 무시가 기저에 있는 어른들의 시선은 아직 꽃도 피우지 않고 이제 막 생을 시작한 미숙한 생명체인 클로버를 잎의 개수만 보고 속단하는 것과 같다.
이 책은 희망과 욕망이 딱 떨어지는 명확한 결말을 제시하지 않는다. 할머니가 후유증 없이 깨어나는 것 같지도 않고, 후원자와 관계를 맺게 된다고 해서 정인의 사정이 나아진다거나 태주의 놀림이 없어진다는 보장도 없다. 그럼에도 정인은 헬렐이 제시한 모든 만약을 거절하고 낡아빠진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뛰어나간다.
‘지금은 그냥 한 번 더 진짜를 살아볼게요.’
그동안 스스로를 응달에서 사는 아이로 일컫던 정인은 다시 세상을 향해 뛰어나간다. '못난 꼴, 못난 마음을 훤히 비추는 빛이 싫어서, 비와 어둠 속에 숨고 싶었던' 시절을 뒤로하고, 비록 미련하고 비굴해보이고 미완일지라도, 현재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는 용기를 내 보려고 말이다. 비로소 정인은 선택의 여지들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자신의 파랑새를 찾게 된다.
모든 ‘만약에’를 뿌리치고 다시 돌아간 단칸방에는 여전히 볕이 잘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재고해 볼 것은 주인공 정인의 이름 뜻이 빛나는 사람炡人이란 것이다. 그러니 부디 세상의 모든 빛나는 사람들이 주변의 응달에도 불구하고, 걸어가는 길에 짙은 어둠이 깔려있더라도, 당신이란 사람 자체가 빛이란 걸 불현듯 깨닫길 바란다. '작열하며 그 아래에 있는 것들을 노동하게 하는 햇빛과 달리 뭉근하게 뜸을 들이며 상념이라는 김을 뿜어내는 달빛'과 더 닮아 있을 악마의 이름에조차 빛이 있는 것처럼, 어쩐지 나는 응달에서 피는 꽃을 더 응원하고 싶다.
힘이 드는 순간이 오면 그늘에서도 자라는 유머를 보여주는 클로버를 떠올려보자. 한 걸음 내딛을 수 있다면 또 한걸음, 다시 한 걸음은 전혀 어렵지 않단 걸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동의할 수 없더라도, 유모레스크 인생이니까.


※ 이 책에서 가져온 몇 개 구절은 작은따옴표 안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23/05/13 대구 고산도서관에서 진행한 저자 강연(’만약에’가 가득한 세상에서 선택의 가치)에서 참고한 내용이 있습니다.



"당신이 먹은 것이 무엇인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브리야 사바랭의 미식 예찬』 중에서) - P45

"’유모레스크’라는 곡이야. (중략) ‘유머 있는’이라는 뜻이래." 하지만 이름을 풀어서 설명해 주자 한결 외우기 쉽다. 그 뜻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 P60

햇빛은 작열하며 그 아래에 있는 것들을 노동하게 하지만 달빛은 뭉근하게 뜸을 들이며 상념이라는 김을 뿜어낸다. - P124

정인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자기가 왜 화가 나는지도 몰랐고, 왜 눈물이 나는지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아니라고 했다. 할머니는 더 묻지 않았다. 더 물어 봤자 어쩔 수 없다는 걸 이미 알았다. 그냥, 그게 할머니와 정인의 방식이었다. 자신이 못나 보인다 싶으면 학교 뒤꼍에 숨었고 약해졌다 싶으면 그림자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안 보이는 척, 모르는 척, 슬쩍 덮어놓고 살다 보면 지나갔다. 어떻게든 살아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그게 잘 안 됐다. - P136

정인은 쓰레기통 옆에 쪼그려 앉았다. 여기 가만히 앉아 있으면 새벽에 수거차가 와서 날 싣고 가지 않을까. - P137

"다 아저씨 때문이에요." "뭐가?" "난 괜찮았는데." "……." "뭐가 괜찮았는데?" 악마는 기어코 고개를 들게 만들었다. "네 일? 아니면 네 집? 그것도 아니면 네 신발? 뭐가 괜찮았는데? 내가 뭘 괜찮지 않게 만들었지?" - P138

"재미있냐고? 재밌지 않을 리 없잖아? 폭력은 비디오 게임, 전쟁은 뉴스 속보, 착취는 초콜릿, 생명 경시는 모피 코트, 환경 오염은 아보카도와 스포츠카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 신명 나는 파티의 클라이맥스에선 돈이 비처럼 내려. 모두가 쇼를 좋아하잖아? ‘쇼는 계속될지어다!’" (중략) "난 야구였구나." "뭐?" 정인이 피식 웃었다. "나한테는 지긋지긋한 이 시간이 누군가한테는 이야기고 스포츠고 파티인 거에요?" "바로 맞혔어! 하지만 넌 그 파티에 초대받지 못했지. 평생 햄버거를 씹으며 진열장 너머 반짝이는 걸 구경만 할 거야?" - P140

"그분이 저한테 실망하면 어쩌죠? 저 그렇게 착하지 않은데. 저는 그렇게 영리하지도 않고 바르지도 않고 꿋꿋하지도 않아요." - P167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고, 그 빛이 보기에 좋았다는데……. 정인은 빛이 싫었다. 못난 꼴, 못난 마음을 훤히 비추는 빛이 싫었다. 비와 어둠 속에 숨고 싶었다. - P168

"철이 당겨서 들긴 했어요. 왜, 식물에 햇빛이 부족하면 위로만 가늘게 웃자란다면서요. 제가 좀 웃자랄 환경이었거든요." 헬렐이 고개를 끄덕였다. "웃자란 식물에게는 늦거름을 줘야지. (중략)" - P176

‘해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똑같이 비추고, 비는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 모두에게 내린다.’ (「마태복음」 5장 45절에서 변형하여 인용)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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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 외딴 성 (영화 특별판)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서혜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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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다혜기자/정세랑작가와 함께한 GV를 곁들여서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원작을 먼저 읽는 사람과 영화를 먼저 보는 사람. 하나의 스토리에 기반한 작품을 감상할 때에 어떤 매체로 그것을 먼저 접하는가의 순서는 감상에 있어 아주 중요하게 작용한다. 주요한 사건 구성을 이해하는 건 최초의 단 한 번 뿐이기에 우리는 때로 엄청난 고민에 빠지게 된다.


자주 볼 수 있는 사례는 연재 중이거나 완결된 소년만화가 애니(J-Animation)로 제작되는 케이스이다. 흑백 갱지의 얇은 책 속에 촘촘한 선화와 대사로 표현된 만화는 음악과 색이 입혀져 다채롭게 움직이는 영상과는 엄연히 다르다. 좋아하는 캐릭터에 부여된 목소리와 화려한 액션이 거듭나는 경험은 대게 짜릿하거나 실망적이거나 둘 중 하나일테지만, 이것이 소설과 영화의 관계로 이동하면 그 인식의 차이는 좀 복잡하다.


영화를 먼저 보는 관객은 주어진 사건을 따라가며 실시간으로 주인공과 호흡을 같이 한다는 장점이 있다. 시각적으로 보이는 연출의 힘은 생각보다 대단해서, 별다른 언어적 표현과 미사여구 없이도 관객은 몰입할 수 있다. 영화가 너무 좋아 관련 정보를 찾아보던 중 원작 소설이 있는 걸 발견한다면, 빈 곳을 채워넣듯 다시금 세밀한 감정선과 서사를 보충하며 경이롭고 완전한 감상을 할 수 있다.


반대로 소설을 먼저 읽을 때면 독자는 글로 표현된 문장을 바탕으로 스스로 세계를 창조해내고 그 속에서 주인공과 교감하며 상상을 뻗어나간다. 그러고 나서 영화를 보게 되면 나만의 이미지가 재현이 됐을지, 차이가 있다면 어떤 점인지 차분히 관찰할 수 있다. 모름지기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이 복습 활동은 본인이 세운 세계를 좀 더 굳건히 만드는 경험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츠지무라 미즈키 작가의 소설 『거울 속 외딴 성』은 책 먼저 읽어야할까, 인기에 힘입어 나온 만화부터 읽어야할까, 아니면 최근에 개봉한 영화부터 봐야할까? 물론 책을 e-book으로 읽는 보기까지 더할 수도 있겠지만 그 얘긴 『다시, 책으로』(매리언 울프 저, 2019)나 『다시, 어떻게 읽을 것인가』(나오미 배런 저, 2023)를 읽는 것으로 차치하도록 하고(다행히도(?) 『거울 속 외딴 성』은 e-book이 없기도 하다), 여전히 우리에겐 선택할 수 있는 경로가 얼마나 많은지!


우선 나부터 말하자면, 명동CGV 씨네라이브러리에서 이다혜 기자와 정세랑 작가가 진행한 GV에 참석하기 위해 후다닥 도서관에 가서 원작 소설부터 읽었다.


그렇다. 나는 원작부터 먼저 보는 부류에 속한다. 책을 읽지 않은 채 영화관에 가서 몰아치는 스토리라인과 흡입력을 온전히 느끼는 선택지도 있지만, 내 고집이, <해리 포터>의 연재를 실시간으로 함께했던 자들이 가진 성미가 이번에도 어김없이 발했다. 어떤 영화일지 미리 알아보고 싶기도 했고, 시간이 좀 남아서 그랬다.


아니나 다를까, GV의 문을 연 대화도 매체의 차이에서 따라오는 효과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다혜 기자는 애니메이션을 먼저, 정세랑 작가는 소설을 먼저. 직업상 특징 때문이었을까 헤아리며 그게 참 재미있다고 느꼈다.


내가 이 산업에 그저 소비자이자 관람자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창작자의 시선이 궁금하기도 했다. 정세랑 작가는 소설가로도 유명하지만, 곧 열릴 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스타워즈>를 기념하여 만든 애니메이션 시리즈에도 참여했을 만큼 요즈음 영상 작업도 잦게 하는 편이기에 초대 손님으로 아주 적절했다(물론 요즘들어 신작 영화 GV에 가수나 다른 분야의 예술가들을 초대하는 일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기도 하지만).


그의 대표작 『보건교사 안은영』은 소설이 드라마화된 케이스로, 공개 후 호불호가 갈리긴 했으나 전반적으로 호평을 받았다. 이후 정세랑 작가는 인물의 외양적인 변화를 CG 처리 하거나, 장면마다 등장하는 엑스트라를 고용하기 위한 비용 등 제작비 측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버릇이 생겼다며 농담했다.


그런 의미에서 애니메이션은 제약 없이 자유롭단 특징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고코로가 소원 열쇠를 가지고 시계탑으로 향하는 엔딩에서는 공중을 돌아가는 나선형 계단이 등장하는데, 이는 원작에는 없는 오리지널 장면이다. 현관문 밖으로도 못 나가던 고코로가 자기 의지를 보이는 순간이라 의미가 남다르기도 하지만,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하이라이트를 향해 나아가는 금빛 연출은 애니메이션이란 매체의 장점을 극대화한다.


또한 이 작품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아키의 정체가 후반부에서 밝혀질 때에, 책에서는 성이 바뀐 이유 등을 들먹이며 반전을 열심히 설명하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이미지에서는 이것을 아주 간단하고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


다른 한편, 600 페이지에 달하는 원작 소설이 영상화될 때 필연적으로 아쉬운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다. 책에서는 고코로가 학교에 가지 않을 때의 마음이라든가, 주변 사람들의 말 한마디에도 분노하거나 상심하는 등의 극적인 반응을 아주 자세하고 섬세하게 그렸으나, 영화에서는 감독이 이 과정을 고의로 잘랐다.


정세랑 작가는 읽는 데에 4시간 가량이 걸리는 이 두꺼운 책을 시각적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어떤 장면을 가감할 지 조직하는 건 애정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작업이라 일컬었다. 만약 모든 심리 서술과 대화를 그대로 옮겼다면 게으른 각색이 되었을 것이라며, 만약 주인공들이 어떻게 친해졌고, 고코로가 어떻게 집 밖으로 나가게 됐는지의 결심 등을 샅샅이 집어넣었다면 섬세한 내면을 표현할 수 있었을진 몰라도 시각적인 힘을 싣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즉, 애니메이션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과감히 이야기의 어떤 부분을 빼버리는 것은 포기하는 것보다 의도에 가깝다.


이다혜 기자는 한 인물에 깊고 완전히 빠져드는 게 책이라고 한다면, 그 인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사건 중심으로 속도감 있게 이야기를 끌어가는 게 애니메이션이랬다. 독서에 시간을 들이다보면 고코로의 심리를 완전히 이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읽다보면 답답함을 느끼는 것도 바로 그 이유를 알기 때문이란 것이다. 바꿔 말하면 영화에서는 모든 것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압도적인 기분이 드는 건 마찬가지란 소리다. 마치 등교거부아들이 거울의 성 안에서 학교 얘기를 꺼내지 않아도 그 상태만으로 함께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책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에서 저자 이나다 도요시는 대사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작품이 늘어난 현상이 영상 매체 감상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 지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본래 영상 작품에서는 배우의 표정으로 슬픔을 드러내고, 땀을 닦는 동작으로 곤란한 상황임을 나타낸다. 배우가 “슬프다”, “어떡하지” 등을 입에 담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혹자는 <거울 속 외딴 성> 영화가 애니 <귀멸의 칼날>처럼 화려한 액션이 없어 정적이고 루즈하다는 평을 남겼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그런 움직임과 묘사에 너무 익숙해져버린 나머지 호흡과 쉼을 침묵으로 판단하게 된 지도 모른다. 억지스럽다거나, 뻔뻔하다거나, 플랫폼의 전환과 러닝타임의 한계로 당연히 따라올 수밖에 없는 아쉬움을 눈에 불 켠 듯 찾아내고, 그 찝찝함을 관람하는 내내 곱씹는다는 건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하나도 긍정적이지 못하다. 그러니 요지는, 최선을 다해 선사받은 충분한 감동과 눈물을 잠자코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그게 이 영화가, 이 전환이 쏘는 신호탄이지 않을까.


그래. 눈물. 이제 작품 얘기를 좀 해볼까 한다.


책을 보면서 운 건 초등학생 때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를 읽다 베갯잇을 적신 이후로 처음이다. 당연히 영화를 보면서도 울었다.


『거울 속 외딴 성』은 같은 학교에 다니지만, 다른 시대에 살고 있는 등교거부 학생 7명이 각자 방에 있는 거울을 통해 ‘거울의 성’에 초대받게 되고, 그 안에서 소원을 이룰 수 있는 열쇠를 찾게 되며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제목에도 들어가고 작품에서 주요한 소재인 ‘거울’은 우리의 모습을 비추는 역할을 한다. 유리를 사이에 두고 빛이 통과하는 창문과 달리 상이 거기에 반사된다는 점에서 많이 쓰이고 연출가들이 좋아하는 장치라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에 ‘영화속거울(@mirrorinfilm)’이라는 이름으로 영화 속 쇼트를 모으는 계정이 있을 정도이다.


『거울 속 외딴 성』의 거울도 어김없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아상을 확인하는 비유의 대상으로 쓰인다. 7명의 아이들은 모두 거울 속에 들어가 자기가 현재 처한 상황에 대해 생각하거나 도망친다.


거울 성에는 공용 공간 외에도 개인 방이 주어지는데, 각자의 특성이 반영되어 있다. 피아노를 전공하는 후카의 방에는 피아노가 있다든가, 동화책을 좋아하는 고코로의 방에는 빼곡한 책장이 있다든가 하는 식이다. 이는 모두 성의 지킴이 같은 존재인 ‘늑대님’이 마련한 것으로, 알쏭달쏭한 힌트를 던지고 갑자기 사라지기도 하지만, 본인이 간절히 원한 시간일만큼, 아이들에게 성에서 적응하고 서로 알아가거나 열쇠를 찾을 시간을 넉넉히 준다. 이는 어른의 입장에서 무척 자상한 태도로 읽힌다.

지금의 우리에게 학교 폭력과 따돌림, 등교거부란 이슈는 전혀 생소한 주제는 아니다. 실제로 GV에 참석한 관객들의 입을 빌리면, 학교 밖 청소년이었다가 예술가가 되는 경우가 은근히 흔하다고 하니, 자신만의 속도로 목소리를 찾게 되는 이야기 속 아이들은 어떠한 과장도 없이 시선을 끌지 않고도 피해자 입장에서의 고통과 그 심각성을 충분히 보여준다. 이는 어른인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하는 지에 대해서도 좋은 본보기가 되는데, 최근 인기를 끈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가 복수를 중점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보다 섬세하고 복잡하며, 단정지을 수 없는 편이다.


부모님과 대체 스쿨의 선생님에게조차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자기 영역을 침범당하는 일을 겪은 고코로는 내향적인 사람이 자기방어적 표현과 발언을 못 할 때 얼만큼 무너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게 되는 아키란 캐릭터도 의붓아버지의 위협에서 간신히 살아돌아오고, 우레시노의 빵셔틀, 스바루의 무관심, 리온의 단절, 이 모든 것들을 다룰 때에 어른스러운 태도가 깔려있어 다시 읽어도 좋을 책이다. 청소년 문학으로 분류되지만, 그 나이가 아니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게 GV에서의 공통적인 의견이었다.


책의 후반부에서 아이들은 모든 기억을 간직한 채 성을 떠날지, 소원을 이루는 대신 모든 기억을 잃을 지 갈림길에 서게 된다.

이들의 우정은 나이 차이 때문에라도 한시적인 것처럼 보인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할 수 없고, 스치듯이 만날 수밖에 없는 인연인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인간 관계의 한시성을 뚜렷히 보여주면서도 이 또한 의미가 있단 걸 말해준다. 어떤 관계가 너무 좋다면 계속 유지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 욕심 때문에 변질되거나 무너지는 경우도 빈번한 걸 보면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일전에 참여했던 프로그램에서 정세랑 작가에게 질문한 적이 있다. 지금 쌓고 있는 모든 인간 관계가 지친다고. 그랬더니 작가는 이렇게 답변하였다. 사실 그 관계가 본인에게 안 맞을 수도 있어요. 억지로 붙들고 있을 필요 없어요. 그래, 정말 그렇다.

이에 더해, 같은 지역의 다른 시대에 살고 있는 설정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까닭은 그들의 이야기는 지금뿐만이 아니라 예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고 암시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과거부터 미래까지 여러 세대의 사람들이 같은 고통 속에 있다 해도 그 해결책이 아이들을 몰아세우는 방식으로는 쓰이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에 힘을 싣는다. 책은 분명히 얘기한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서 마주칠 갈등을 두고 ‘너는 매일 싸우고 있잖아. 싸우지 않아도 돼.’라고 말해줘야한다고. 싸워야만 하고 이기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결국은 아이들을 몰아세우고 필승의 방법을 가르치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남들이 어떻다 해도 너는 존중받아야 하며, 지금 겪는 일은 마음을 충분히 이해받아야 하는 고통이라고 얘기해주는 것. 그것으로 충분해, 라고 말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다혜 기자는 이런 류의 작품을 '소원을 비는 아이들의 이야기'로 불렀다. 아이가 어른이 되는 순간은 비록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어도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단 걸 깨달을 때라면서, 강력한 목표인 '소원'을 향해 달려갈 때 결국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친구를 구하기 위해서, 우정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타인을 위해서 두려움을 뛰어넘었을 때 이야기는 해피 엔딩으로 향한다. 상투적인 신파일지라도, 어김없이 감동을 주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우리 모두에겐 소원이 있고, 어쩌면 고민하는 사람들이 더 현명한 선택을 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나도 청소년으로 돌아간다면, 청소년문학을 사랑하던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더 마음껏 울고 위로받아도 된다고 알려주고 싶다. 굳이 어른들이 권장하는 책을 따라 읽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줄테다. 빨간모자와 늑대와 어린양들을 사랑해도 된다고. 공감하고 슬퍼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용기를 내고 응원하는 건 진짜 용감한 일이라고 꼭 알려주고 싶다. 싸울 의지가 있다는 건 정말로 멋진 일이야.





p.s. 정세랑 작가는 동 작가의 <슬로하이츠의 신>, <야미하라>, <호박의 여름>도 추천하였다. 아마 청춘과 호러, 종교를 혼재하며 장르를 눈속임하는 추리 소설에 일가견이 있기 때문에 취향을 저격했으리라(『슬로하이츠의 신』은 타 프로그램에서도 추천한 적이 있을 정도이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블러드 차일드』 뒷편에 실린 「마사의 책」도 추천하셨으니 참고하실 분들은 읽어보셔라. 나 또한 단순히 소원을 다룬다는 점에서 영화 <3000년의 기다림>과 소설 『마법소녀 은퇴합니다』가 떠올랐기 때문에 같이 추천해본다.




스바루가 나쁜 게 아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될지, 자신은 언제까지 이대로일지 모르는데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을 보면 단지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조여든다. 갑자기 초조해지고 두려워진다. - P456

성 안의 다른 친구들 또한 주위에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를, 그 사람이 그 아이들의 힘이 돼주기를, 하고 바란다. (…) 아키는 자신은 힘들 거라고 했었다. (…) 가능성을 생각해주는 사람이 주위에 없었다는 얘기다. 아키는 어떻게 될까. 다른 모든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각자에게는 각자의 인생이 있는 거니까 너도 네 인생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라.’ ‘똑바로 해라.’라고 야단치는 것으로 끝. 즉 아무도 나를 위해 필사적으로 애써주지 않는다고 스바루는 생각한다. 그런 게 편하긴 하지만 한편 (…) - P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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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구들 - 여성은 왜 원하는가
캐럴라인 냅 지음, 정지인 옮김 / 북하우스 / 2021년 5월
평점 :
품절


여성이라면 모두가 한 번쯤은 꼭 읽어보길 바라는 책입니다.

비록 거식증과 관련 없는 삶을 살고 있다 믿더라도, 무언가에 몰두하고 중독되어 있지 않다 느끼더래도, 생활 방식과 사고관의 전환점이 될 수 있는 계기로 충분한 이 책은 어디에 있건, 어느 시점에 살아있건 우리에게 꼭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욕망의 응어리는 보이는 것보다 가까운 곳에 있음을 깨달으며, 오랫동안 독후감을 적었습니다. 아주 사적이고 창피한 고백이니, 읽어주시는 분께는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 큰 따옴표 속 문장들은 모두 인용 구절 입니다.


캐럴라인 냅의 『욕구들』에 대한 감상은 자기 고백 혹은 회고록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옮긴이의 말마따나 나와 독서 모임을 같이 한 친구들은 모두 "내가 선택하는지도 모르면서 선택한 내 인생의 몇몇 결정들과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이유들을 알게 되었고, 누군가의 이해할 수 없었던 상처와 슬픔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며, 알고 있었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고 지나갔던 사실들도 재확인했다”.

그야말로 난도질이다. 한 쪽씩 넘길때마다 그동안 숨기고만 싶었던 욕망과 비밀스레 정해놨던 한계선을 낱낱이 해부당하고 가감없이 뜯겨보였다. 이런 경험은 난생 처음이라 분명 첫 몇 장 읽을 적에는 인덱스를 하나씩 떼어 붙이던 것이, 정신 차리고 보니 아예 형광펜을 들고 줄을 죽죽 긋고 있었다. 그마저도 페이지마다 뒤덮인 노란 색깔에 이럴거면 불필요한 부분(조사나 어미같은)을 지우는 게 낫지 않을까란 생각도 들었다.

추리고 추렸음에도 원고지 몇십 페이지는 훌쩍 넘길 것 같은 이 독후감은 왜 이전에는 그것들이 당연하단 걸 몰랐었는지, 동시에 왜 그것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걸 몰랐었는지에 대한 의문과 대답들로 가득하다.

 

[서론]

책의 서론에서는 욕구란 것이 여자들에게 얼마나 진득하게 붙어있는가에 대해 얘기하며 총괄적인 주제에 대해 포문을 연다. 대표적으로 음식, 섹스, 쇼핑 같은 게 있다. 우리는, 그러니까 여자들은 갈망하는 대상을 위해 대가와 노력을 지불하는데도 그것을 희생으로 여기는 풍조와 자기 혐오에 부딪힌다.

한 예로 저자는 "내가 아는 어떤 이는 매일매일 운동량을 기준으로 먹는 양을 엄격하게 조절한다. (중략) 그 기준이 순전히 자의적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지만, 그래도 너무 오랫동안 매일 그 규칙을 엄수하며 살아온 탓에 이제 다르게 사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고 여긴다"며 여성이 스스로에게 세운 잣대에 대해 비판한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행위 주체성과 주도권을 지니고 있다는 느낌이나, 자신의 욕구는 건전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만족시켜도 될 타당성과 자격을 지니고 있다는 확신이 부재한다는 이야기다”. “여기에는 뭔가 문제가 있지만, 그것은 ‘낮은 자존감’처럼 단순한 문제가 결코 아니다”.

1장에서는 이런 구체적인 불안들에 ‘억압’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2장에서는 그 이유로 자라온 환경을 들고, 3장에서는 여성 혐오의 뿌리를, 4장에서는 소비문화가 어떻게 여성들을 방해하는지 강조한다. 5장에서는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야하는 이유에 대해 토로하며, 6장에서는 마침내, 그럼에도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한 답을 내린다.

 


 

[1장] 케이크 더하기, 자존감 빼기

첫번째 장에서는 여성으로서 선택할 자유와 그것에 대한 부담감 및 좌절에 대해 다룬다.

무한한 선택지에서 따라오는 차기의 부담과 미래, 혹은 커리어 비전 등에 대한 얘길 읽고 있자니 재작년 쯤 같은 팀 동료였던 N이 퇴사할 때에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비록 바로 옆자리로 나란히 앉은 사이였지만 이전까지 딱히 이렇다 할 친분 관계가 없었는데, 비로소 마지막 티타임 때 그동안 못다한 얘기를 진솔하게 나눌 수 있었다.

그때에 나는 예의상, 그러니까 지나가는 말처럼 퇴사 결심 계기를 물었다. 이직하는 사람들이 으레 내놓는 변명이 돌아올 거라 예상했다. 지금 이 회사 돌아가는 꼴이 거지 같아서, 사람들이 싫어서, 직무가 안 맞아서. 그런 닳고 흔해 빠진 구실들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때 들은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N은 이 회사에서의 끝이 보였다고 했다. 본인의 자리를 지킴으로써 이룰 수 있는 건 단지 팀장이 되고, 실장이 되고, 딱 거기까지겠구나 하는. 자기계발적인 면에서 이미 어떤 주기를 봤기 때문에 도달 가능한 범위의 선이 느껴졌다고 했다. 그러니 자신은 좀 더 넓은 세상을 향해 가고싶댔다.

고개를 주억이면서 얘기를 듣고 있긴 했지만, 실은 그때 전혀 집중할 수 없었다. 딴 세상 얘기 같기도, 아니, 좀 충격이기도 했다. 그때에 갓 입사한 나에게 팀장이나 실장, 대표 이사직은 너무 먼 얘기였다. 미래의 내 얘기가 되리라고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애초에 어느 곳에서도 간부급이 되고싶지 않은 것 같았다.

이런 감정을 책에서는 아래와 같은 문장으로 정리한다.

“나는 수년간, 나 자신의 열정을 따르면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을 품고 있었어요.”

내가 앞서 ‘한계선을 낱낱이 해부당하고 가감없이 뜯겨보인다’라고 서두에서 했던 말을 기억하는가. 그렇다. 우리는 한평생 본능적인 욕구를, 눈에 보이는 몸의 부피를, 심지어는 자신의 미래까지도 제한하고 있다.

요 근래 한창 베스트셀러에 올라있던 이미예 작가의 『달러구트 꿈 백화점』에도 비슷한 얘기가 나온다.

갓 들어간 직장에서 막 1년차가 된 페니는 연봉협상을 앞두고 동기 모태일의 원대한 계획을 듣는다. 비슷하게 입사한 처지지만, 페니가 단지 첫 연봉협상에 대한 설렘과 긴장을 안고 있을 때, 모태일은 본인이 담당하는 층의 장長이 되고 싶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페니는 모태일의 얘기에 살짝 충격을 받았지만, 티 내지 않으려고 칭찬으로 얼버무렸다. 아무래도 동갑내기인 모태일이 저만치 앞서 나가려는 모습이 페니에게는 불안한 자극제가 된 게 틀림없었다. ‘왜 진작 깨닫지 못했을까?’ 페니는 막연히 올해도 작년과 같은 한 해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중략) 신입사원이라는 무적의 방패 뒤에 숨으면 어떻게든 해결되던 일들도 더는 기대해선 안 될 뿐만 아니라, 모태일처럼 자신만의 계획이 있는 직원과는 점점 격차가 벌어질 게 뻔했다.

아름다운 꿈 동산 저편의 세계를 다룬 소설에서조차 한없이 순수한 영혼을 가진 자는 여성이고, 원대한 포부를 가진 자는 남성이다. 우연일지 모를 이분화된 성별로 마찬가지로 이분화된 얘기를 하고싶진 않지만, 그렇다. 여기서 ‘나’의 개인적인 경험과 내가 속해있는 사회 환경을 ‘우리’로 치환해도 되는지 확실하진 않지만, 나, 또는 페니와 같은 충격을 받은 사람이 우리 사회에서 몇이나 될까?

나는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는 법이 없었다. 남들처럼 죽어라 공부하지 않아도 그런대로 성적이 잘 나왔고, 특출나게 재능을 보이는 분야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웬만큼 못하는 것도 없었다. 부모의 선택과 결정에 따라온 주변의 인프라, 교육 제반 등은 나의 의지와 노력과 무관하게 이미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인생에 별 굴곡없이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연히 보통의 평범한 인생을 살다보면 무언가를 잘 한다는 건 어떤 재능을 타고나야 진정히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까 내가 수영을 십 몇년을 했다하여도, 5살때부터 17살까지 개인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해도, 이건 나의 재능이 아니었고 특출나게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성인이 되어 다시 수영장을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을 땐 잦은 이사 탓에 센터와 회관 여러군데를 돌아다니면서 언제나 적당한 반, 그러니까 적당히 힘들고 적당히 알맞은 수준의 반에 들었다. 용의 꼬리보단 뱀의 머리가 되는 걸 선택한 셈이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당신들을 앞지를 수 있지만, 여유로운 게 좋아서 여기 있는거야. 그렇게 관망하는 태도로 수영장엘 나갔다. 어쩌다 운동을 하기 싫은 날이면 남들 다 마지막까지 에너지를 쥐어짜낼 때 꼭 한바퀴씩 빠져먹곤 했다. 진짜 힘든게 아니라 그냥 쉬고 싶어서, 숨이 차는 그 찰나의 시간을 버티기 싫어서 그랬다. 이런 태도는 수영장에서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곧잘 그랬다. 하기 싫은 일이 생기면 졸리지도 않으면서 피곤한 척 했고, 배가 고프지 않아도 배고픈 척을 했다. 그러면 당장 거길 벗어나서 쉬어갈 수 있으니까. 연기 천재. 장래 유망.


그런데 어느날, 어김없이 멀뚱히 서서 선생님과 수다떠는 나를 본 같은 반 수강생 분이 ‘뒤에서 쉬니까 민망하지?’하고 한마디 하셨다. 속으로는 ‘쉬는 거 아닌데요? 제가 선택한 거거든요? 힘든 게 아니라 체력 배분하는건데요?’ 우다다 핑계를 쏟아내며 화가 뻗쳤다. 그런데 어쩐지 집에 갈 때까지도 그 말을 곱씹었다. 실은 나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사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건 일종의 방어기제라는 것을. 괜히 용 썼다가 결과가 좋지 않으면 민망하니까 욕심조차 부리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쩌다 이런 나의 욕구를 억제하게 됐을까?

 


 

[2장] 어머니와의 관계

2장에서는 여성들이 본인의 욕구를 억누르는 이유로 자신들이 겪고 자라온 환경을 든다. 특히나 어머니와의 관계에 대해 본격적으로 파고들며 우리의 근본적인 욕구는 단순히 개인 차원에서 발생하는 일이 아니라는 주장을 피력한다. 즉 이러한 논점을 개인(후천적)에서 환경(선천적)으로 옮기며,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적인 구조와 문화적인 가치관이 우리의 욕구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강조한다.

욕망의 원초를 파헤치다 보면 어렸을 적 가정환경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어쩌면 진부한 분석일 수 있으나 저자는 다른 차원으로 속셈을 펼쳐간다. 즉 식욕과 관련된 문제 뿐만 아니라 섹슈얼리티 측면에서도 어머니를 관찰하고 따라하는 학습된 행동이 영향을 끼칠 수 있단 관점이다.

책에 언급된 어느 어머니의 생생한 기억, 즉, “하루 종일 일하고 난 뒤에도 말 그대로 손발을 모두 바닥에 대고 리놀륨 바닥을 문질러 닦고, 오븐을 문질러 닦고, 판벽을 문질러 닦던 엄마의 모습”은 나의 경험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우리 엄마가 당신의 엄마, 즉 나의 할머니에 대해 기억하는 양상과 더 닮아있다.

엄마가 말하길 할머니는 한평생을 부엌에서 지내시며 삼남매와 지아비를 그 두손으로 먹여 살리셨다. 그게 엄마는 불만이었다. 하루종일 음식을 하고, 청소를 하는 할머니. 누구나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겠노라' 마음 먹는 것처럼, 엄마도 그런 반항심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엄마는 진짜로 요리라거나 청소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 되었다.

내가 본가에서 10대의 마지막을 보낼 무렵까지도 우리집은 소위 말하는 ‘집밥’ 보다는 외식이나 배달에 의존하는 성향이 강했다. 나홀로 상경한 후에도 엄마는 당신이 직접 만든 반찬을 보내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가정식과 백반이 어떤 건지 회사에 들어가기 전까지 잘 몰랐다. 국은 급식에만 나오는 건 줄 알았다. 같이 지방에서 상경한 친구들이 엄마가 해 준 음식이 그립다고 했을때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메뉴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생활에 딱히 불만을 가진 적도 없었다. 불만을 가져야 한단 것조차 몰랐다. 여전히 단 한끼를 먹기 위해 웨이팅을 1시간 넘게 하는 건 이해도 못하고 질색하며, 특별히 가고 싶은 곳도 없고,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다.

이 책을 관통하는 이야기는 ‘거식증’이고, MD가 소개하는 한마디마저 ‘캐럴라인 냅이 거식증으로 고통받던 시절을 회고하며 쓴 생애 마지막 에세이’일만큼 거창하지만, 이정도까지 했으면 솔직히 내가 먹는 것에 별 관심이 없단 걸 눈치챘을 것이다. 이래봬도 어떤 음식을 먹고난 뒤 눈물이 날만큼 감격한 적도 없고, 자의로 맛집을 찾아가는 법도 없어서 지도 어플을 다운받은 지 1년 조금 넘은 사람이니까.

그래서 처음에 독서 모임 책으로 이 책이 언급됐을 땐 굳이 내가 얻어갈 게 있을까 의문이었다. 거식증이라니. 너무 뜬금없는 얘기 아닌가. '먹는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 그저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필요한 행위일 뿐이고, 식사란 건 허기짐을 채울 수단이지 목적이 되어본 적 없었다.

그런데 『욕구들』에 따르면 나는 그동안 음식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을 거부한 것이었다. 그것도 엄청 오래전부터. 기원을 거슬러, 다름아닌 우리 엄마 때문에.

이 책에는 “매일매일 운동량을 기준으로 먹는 양을 엄격하게 조절”하면서 “그 기준이 순전히 자의적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지만, 그래도 너무 오랫동안 매일 그 규칙을 엄수하며 살아온 탓에 이제 다르게 사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고” 여기는 여자들의 경험담이 나온다. “헬스장에 다녀온 날에만 디저트를 먹거나 저녁을 한 그릇 더 먹을 수 있는” 여자들. “식사 때마다 예외 없이 최소한 한 입은 남기는 걸 규칙으로 삼고”, “작은 케이크 조각 하나, 크림은 빼고”의 규칙을 고수하는 여자들. 어쩜. 딱 내 얘기였다. 알고보니 내가 바로 섭식장애 당사자였던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나는 인생 최저의 몸무게를 달성했다. 남들 다 책상 앞에서 공부하느라 움직임이 없어 살이 붙을 때 이상하게 나는 살이 좀 빠졌다. 이유는 당연했다. 급식이 맛없단 핑계로 밥은 겨우 두 주묵정도 푸고 반찬은 대부분 남긴다던가, 석식을 취소한 뒤 근처 떡볶이집에 가 치즈스틱 두개를 먹는다던가 그런 식이었으니까. 입시라는 같은 입장을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애들보다 체중이 덜 나간다는 생각에 남몰래 우월감을 느끼고 그걸 하나의 장점처럼 여겼다. 나는 이상하게 살이 안 쪄, 같은 재수없는 소리와 함께.

그 무렵 내 손목은 한뼘 안에 잡히고도 남았지만 그건 타고난 뼈의 두께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163cm에 46kg~49kg를 왔다갔다 했지만 그 키에는 평균 몸무게라고 생각했다. 스스로가 마른 체형이라고 느낀 적이 단 한순간도 없단 사실이 한몫했다. ‘오히려 체격이 있는 편이 아닌가?’라고 판단한 적이 더러 있었던 건 성장통을 앓기 전까지 양 뺨은 다람쥐처럼 통통했고, 의자에 앉을때마다 접히는 뱃살에 싫증 내며 피부가 뻘개질때까지 일부러 꼬집은 기억만 수십번이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를 끔찍이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탓에 “육체는 가장 중요한 재화였지만, 어느 순간이라도 나를 배신할 수 있는 재화”란 걸 누구보다 체감했다.

특히 매일밤마다 라면 한그릇을 끓이고 폭식하는 엄마를 혐오했다. 당시 엄마는 묵은 가정 불화와 사춘기에 들어선 자식들의 반항 때문에 남몰래 깊은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그런 엄마가 60kg 대를 넘어 70kg에 다다랐을 때, 나와 동생은 엄마가 돼지띠란 이유로 '돼지엄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밤늦게 야식을 먹고 드러누워있는 모습을 볼 때면 다른 엄마들처럼 요리와 청소도 안 하는 주제에 게으르다고 비아냥대거나 손가락질했고, '그러니까 살이 찌지' 따위의 폭언을 거리낌없이 해댔다. 그러면서 속으로 나는 절대 엄마처럼 되진 않겠노라 마음먹었다.

그렇게 자기 절제를 시작했다. 나는 엄마의 몸에서 태어난 몸이니까 유전과 닮은꼴이 나를 잠식할까봐 무서웠다. 스스로를 돌본다는 뜻이었겠지만, 현실은 자기 부정에 씌여있었다. ‘간헐적 단식’이란 키워드를 몰랐을 때에도 저녁 6시가 넘으면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배가 고프면 예민해진다’란 말을 들은 후로는 그 심리 상태를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별로 먹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았던 내가, 남들이 으레 짜증낼만한 이유를 이미지화하고 내재화한 것이다. 내가 지금 화가 난 건 배가 고파서야. 엄마가 밥을 주지 않기 때문에 엄마를 싫어하는거야.

사실 이 모든 악순환을 부채질한 건 다름아닌 나였단 사실은 돌이켜보면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나는 교육과 훈육 방식에 있어서는 아주 자유롭고 방목적인 가치관을 가진 어머니 밑에서 자랐지만, 항상 유언有言의 명령에 따라야 했다. 그 명령들은 대부분 복장에 관한 규제였다. 레깅스 위에 짧은 상의는 입지 못했고 (심지어 어두컴컴한 공기를 틈타 몰래 입고 나온 모습을 들켰을 땐 다시 귀가하여 갈아입어야만 했다), 공공장소에서는 치마를 입으나 바지를 입으나 다리를 모으고 앉아야 했으며, 옷을 갈아입을 때면 창문 앞에 딱 붙은 건물이 없음에도 (심지어 저층이 아닌데도!) 꼭 커튼을 치고 시야가 가로막힌 상태여야 했다. 노브라로 나온 걸 당신이 알아챘을 때 받은 멸시의 시선은 독립하고 난 후로도 끊임없이 따라다녔다. 그 망령은 더운 날씨면 거리낌없이 홀가분한 차림을 입었다가도 영 찝찝한 마음에 급하게 속옷을 챙겨입는 이유가 됐다. ’네가 여자이기 때문에 그래야만 해’ 같은 형태 있는 이유를 들어본 적은 없지만, 그 사정이 분명한 명령들은 “신랄한 힐난의 메아리”가 되어 평생을 쫓아다닐 셈이었다.

크고 투박한 옷들과 사랑에 빠졌지만, 유니섹스uni-sex 태그가 붙어 있는 옷들조차 엄마는 그거 남자옷 아니냐며 핀잔을 주고는 결국 사지 못하게 했다. '여자'다운 옷도 안 되고, '남자'다운 옷도 불허한 상황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의식적으로 몸을 숨기는 것이었다. 반발심으로 남들은 평소에 어떻게 입고 다니건 상관 않았으나, 나의 노출은 허용하지 않았다. 가슴을 드러내서도 안 되었고, 허벅지를 보여서도 안 되었다. 문제는 나 자신이 아니라 “약탈적인 남자아이들의 욕망”이었고, 이에 관한 “위협조의 잔소리 조각들”이 무의식중에 잔뜩 박혀있었다. 나는 여자이기 때문에 밤길을 걸을 땐 이어폰을 꽂으면 안 됐고, 항상 주변을 살펴야 했다. 아무리 통 큰 옷차림과 껄렁한 태도를 가졌더라도, 끊임없이 뒤를 돌아봐야하는 자기 검열이란 덫에 걸리면 자기 혐오에 빠지지 않는 건 불가능했다.

캐럴라인 냅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계속 나아가고, 당신의 어머니는 뒤에 남겨진 채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혹은 어떻게 거기 도달할 것인지 잘 알지도 못하는 가운데, 당신은 변화에 대한 무서움과 죄책감과 짜릿한 전율을 느끼는 동시에 어머니가 방향도 알려주지 않은 채 당신이 떠나도록 내버려둔 것에 대해, 아니 애초에 떠나게 허용한 것 자체에 대해 격한 분노를 느낀다”.

엄마는 내가 옷 매무새를 정돈하지 않는다고 혼만 내었지, 정작 어떻게 살아야 할 지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남자들과 어떻게 유대와 연애 감정을 쌓아야 할 지, 혼자 상경한 서울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밥을 얼만큼 먹어야 제대로 먹는 것인지 나는 몰랐다.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쾌락 추구와 자기 욕망의 충족은 어쩐지 부당하고 자격 없는 일이라는 느낌”으로 나타났고, 엇나가거나 스스로 자격을 박탈하거나, 위험 속에 몸을 던졌다.

지금은 술을 이전만큼 자주 마시지 않지만, 술에 취한 섹스가 잦았던 그날들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다. 20대 초, 동네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만난 J는 당시 대학가가 유일한 번화가였던 그 골목 토박이였다. 자유롭고 어린 치기에 들끓었던 나는 금방 매력적인 속삭임에 넘어갔고, J랑 만날 때면 매일같이 술을 마셨다. 소주 같은 건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맛도 잘 모르면서 따라주는대로 마셨다.

만나는 시간은 매일같이 야밤이었다. J는 일부러 술잔을 채웠고 나도 딱히 마다하진 않았다. 정신없는 키스와 섹스가 난탕하게 이어지던, 비 오는 여름날에 습하게도 달라붙던 끈적한 기억은 맨정신이 아니었던 걸 증명이라도 하듯 띄엄띄엄하다. 상대방 들으라고 내는 신음은 목이 졸리자 숨이 막혔고, 입을 통해 강제된 애무는 비릿한 정액을 삼길 통로였다.

어느 파티에서는 이런 적도 있다. 친구가 ‘여기까지 왔는데 잘생긴 남자랑 키스 한 번은 해야지’라고 말하자마자 긴장감이 풀려 그때까지 잘 붙들고 있던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적 말이다. 주변의 수많은 남자들을 붙잡고, 안기고, 키스하고, 매달리고, 결국 어느 남자 방으로 들어가 옷을 벗었던 기억.

나는 남자들과 술을 마실 때면 안주를 거의 먹지 않았는데 , 내숭이라기보단 혹시 섹스를 하게 되면 옷을 벗을때 배가 나와보일까봐서였다. 속옷 색을 위아래로 맞추고, 갈비뼈를 드러내보이고, 남자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홀쭉한 몸매를 보이기 위해서. 아니, 그보다도 내가 당신들이 원하는 몸에 부합하지 않아 부끄러울까봐.

일찍이 부모님이 별거를 시작하셔서 성적 얘기가 자유롭지 않은 가정에서 나고 자란 나는 남자애들이랑 침대에 같이 들어갈때마다 어떻게 해야할 지 잘 몰랐다. 내가 만족하고 싶은건지, 남자를 만족시켜야 하는지 그 우선순위를 잘 못 정했다. 종지에는 대부분의 연애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작가도 나와 같은 문제를 겪었는데, 고등학생 시절 단절된 상태에서의 애무에 이어 대학생 때의 단절된 상태에서의 성행위가 이어졌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내가 더 현명해지고 더 자신감이 생기고 성적으로 더 능숙해졌어야 할 (그래야 한다고 내가 느꼈던) 나이가 될수록 사실은 나를 더욱더 괴롭혔다”. “공허하고 하나같이 알코올의 힘에 이끌린 일들이었고, 대체로 수동성과 확인 욕구는 높았지만 행위 주체성이나 쾌락은 저조했다.”

결국 불가피한 욕구는 술, 담배, 사람이었다.

전형적인 회피형 애착 유형으로서, 곤란한 상황이 오면 습관적인 거짓말로 주변을 둘둘 싸맨 다음 그 뽁뽁이 같은 게 꽉 눌려지고 연쇄반응으로 터지자마자 다 들통나버리기 전에 큰 걸로 덮으려고 했다. 아무나 만나고, 소리소문없이 발을 빼버렸다. 서투름으로 치부할 때도 있었지만 속으로는 불안했던 가정환경이 그 배경의 기원이라며 탓했다. 그 대부분의 시간동안 나는 “자기 경멸에 절어 있었고, 그게 거의 본능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정보 공백”과 “솔직한 논의의 부재”는 미숙함을 낳았다. 1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선택할 자유는 바꿔 말하면 실수할 자유, 더듬거리다 실패할 자유, 자신의 결점과 한계와 두려움과 비밀과 정면으로 대면할 자유, 자아의 파괴가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끔찍한 불확실성을 견디며 살아갈 자유”를 의미한다. 그러나 동시에 “자유는 권력과 같지 않았다”. 내가 누군가와 만나기로 선택하는 자유는 나의 권력과 입지를 찾을 수 있는 통로가 되지 못했다.

하버드대학 심리학자인 데버라 톨먼은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몸에 관해 이야기하거나 이해하거나 의문을 던질 때 쓸 수 있는 언어가 없으니, 섹슈얼리티는 수수께끼가 되고 자신의 성적 흥분은 신비이자 금기가 되는 것이다”.

물론 “비난을 모조리 어머니에게 돌리는 것은 문화나 미디어만 탓하는 것만큼이나 일차원적이고 단순한 일”일테지만,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두렵거나 위험하거나 더러운 것이라고 느끼는 어머니가 딸의 섹슈얼리티를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것 역시 쉽지 않다”. “이는 모두 학습된 행동이다”. “관찰하고 따라하는 것, 살면서 배우는 것이다.”

“여자들의 허기, 감춰진 허기, 갈등하는 허기, 금지된 허기"가 끊임없 새어나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은 다시 말해, "사랑과 인정에 대한 끝없는 허기였고, 섹스와 만족과 아름다움에 대한 허기, 보이고자, 알려지고자, 먹여지고자 하는 허기, 취하고 또 취하고자 하는 허기였다. 나는 그 허기를 정복했고, 그것을 지배했으며, 밧줄로 수소를 잡아매듯 꽁꽁 잡아맸다.”

 


 

[3장] 내 배가 싫어, 내 허벅지가 싫어 & [4장] 브라 태우기에서 폭풍 쇼핑으로

3장에서는 비로소 여성혐오의 뿌리를 파고든다. 여성들이 자신의 몸에 대해 느끼는 불안과 무력감, 그리고 이러한 감정이 어떻게 여성혐오와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해 다룬다.

‘이런 얘기’를 할 때면 빠질 수 없는 얘기도 나온다. 바로 사회에 짙게 퍼져있는 여성들의 소비문화이다. 여성들이 소비하는 제품들이 어떻게 여성혐오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분석하며, 이런 문화가 어떻게 여성들의 자유와 평등을 방해하는지 강조한다.

4장에서는 유달리 '만약 무언가가 된다면', '만약 그러기만 한다면' 식의 as-if 가정이 반복된다. "소비주의의 음흉함" 곧, ‘만약 저 최신 명품 옷을 입는다면 난 누구보다 인기 스타가 될 거야'란 보상 심리가 선사될 때 욕구는 희석되고 잊혀진단 것이다.

그렇다면 '특정한 옷이나 메이크업을 향한 강한 끌림을 느껴본 적 없음'이란 경험은 행운일까 축복일까.

학창시절 나는 또래들에 비해 외모 콤플렉스가 없는 편이었다. 며칠동안 감지 않아 부푼 곱슬머리도 자유롭게 방치했고, 색조 화장품은 종류도 잘 몰랐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 서술하고 있는 ‘만약에 ~한다면’ 구절이 나왔을 땐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화장기 없고 검소하던 우리 엄마는 “친구들의 어머니에게서는 보이지만 내 어머니에게서는 거의 볼 수 없었던 탐닉하는 능력을” 반증했다. 그런 집안에서 컸기 때문에 네일 아트, 좋은 옷, 헤어스타일, 외모에 관한 개념이 전무했다.

남들처럼 만약을 전제하지 않아서 스스로에게 더 엄격했던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타고나길 이렇게 태어났으니, 내가 동경하는 워너비wannabe 처럼 될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단 걸 이미 인정한 터였다.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향해 뛰어들었기 때문에 이카루스의 날갯짓처럼 끝도 없는 수렁텅이로 빠져들었다.

몸은 말라갔지만 어깨와 골반이 넓어 몸집을 더 커보이게 하는 원피스 같은 류의 옷은 쳐다보지도 않았고, 아예 실루엣을 가릴 수 있는 박시한 옷들에 더 집착했다. 프로아나(찬성하다의 'pro-'와 거식증의 'anorexia'가 합쳐진 합성어의 준말)의 이미지를 동경하면서, 그 현상에 부합하지 못한 몸매가 미웠다.

언제 한 번 환절기를 맞이 옷을 사기 위해 편집샵에 들러 유행하는 아이템 이것저것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난 충격을 금치 못했는데, 죄다 유아용 같아 보일 정도로 짧고 딱 달라붙는 상의들과 지독히도 허리를 졸라매는 하의들로만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이런 걸 누가 입는단 말인가? 아니, 애초에 사람이 입을 수나 있단 말인가? 같은 경악과 동시에 그 옷들을 입을 수 없는 내 몸뚱아리가 싫었다. 옷이 안 맞는 게 아니라, 내가 평균에 부합하지 못하는 거라고 질책했다.

저자가 말한대로 “신체 사이즈를 줄이는 것과 자아 자체의 소형화에 대한 강조가 여자들이 삶의 다른 영역들에서 성취를 이뤄내기 전까지는 그렇게 열기를 띠지 않았다는 사실은 되새겨볼 가치가 있다”. 이런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가치관을 재편해야 하고, 가치들 뒤에 자리한 뿌리 깊은 가정들을 서서히 제거해내가야 한다"는 것도 페미니즘 공부와 사회 운동을 통해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소비로 포커스를 옮기면, 그런 결심과 고찰은 쉽지 않다.

단순히 “뚱뚱해지면 자기를 혐오하게 될까 봐, 태만함 내지 게으름이나 통제력 결여를 연상시켜 수치심을 느끼게 될까봐”, “아니면 단순히 더 날씬하고 튼튼할 때 더 기분이 좋기 때문인가?”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충분히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현시대에도 여자아이들은 그 작은 옷에 몸을 우겨넣고 있다. 교육된 것일지, 문화적 예속일지, “우리는 자신의 몸을 이해해보겠다고 황급히 광고와 영화와 텔레비전에 나온 이미지들을 흡수했는데, 이 이미지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육체적 아름다움과 성적 무력함에 대한 시각적 선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물론 “영혼보다는 몸에 관해 걱정하는 것이 더 쉽고, 문화가 여자들에게 제시하는 좁은 정체성의 틈새에 자신을 끼워 맞추는 것이 처음부터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쉽겠지만, 이런 현상은 “사회의 보호라는 귀한 자원이 거의 없어서 발달 단계에서 지원을 받지 못하고 또래 압력과 과도한 대중 문화에 취약하게 노출된 상태에서 일어난다”.

 


 

[5장] 목소리가 된 몸

5장에서는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함의 필요성과 그 중요성을 다룬다. 침묵은 여성들의 욕구와 목소리를 굳어지게 만든다. 이러한 침묵을 깨기 위해서는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법과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이는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지난 2023년 2월 24일부터 3월 2일까지 서울 곳곳의 독립서점에서는 토크와 강연, 공연 세션이 포함된 국내 첫 섭식장애 인식주간이 진행되었다. 주최측인 잠수함토끼콜렉티브(인스타그램 @rabbitsubmarinecol)에서 내건 슬로건은 ‘우리가 우리를, 세상을 이해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병보다 더 지독하게 새로운 언어를 찾아야 한다!’ 였고, 참여 대상은 ‘거식증과 폭식증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사람들, 가족과 친구, 치료자, 먹는 것과 자신의 몸에 불화하는 모든 사람들’이었다. 그동안 섭식장애에 관해 ‘납작하게’ 이야기한 것들을 걷어내고 새롭게 해부하고 이야기해보자는 취지였다. 이전에도 섭식장애 가시화를 위한 움직임은 이어져왔으나, 다양한 형태로 진행되었단 점에서 기념비적인 행사였다. 내가 이 1년짜리 묵은 독후감을 다시 꺼내든 이유이기도 하다.

이걸 왜 해가 넘도록 질질 끌었냐면, 책을 막 다 읽고나서 떠오른 단상들을 모아놓고보니 이건 뭐 소수의 공감 내지는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 외에는 그 어떤 보상도 없을 한낱 독후감 속에서 지나치게 개인적인 경험을 늘어놓고 전시하는 경향은 배제하는 게 좋겠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기세라면 몇 페이지고 더 써내려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틈틈이 손질하려 애썼지만 잘 되지가 않았다.

허나 앞서 얘기했듯 이 책에 대한 독후감은 자기 고백의 길로밖에 이어질 수 없고, 그 주장에 힘을 실어볼까 한다. 어느 책 소개에 쓰인 것처럼 ‘일기에도 쓰지 못했고 보는 사람조차 감당하기 힘든 솔직한 고백들을 무서운 기세로 쏟아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로 그것이 이 책이 독자에게 요구하는 점이 아닐까. 자신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수치스럽더라도 무언가를 써내려가는 활동을 통해 뼈아프게 사력을 다하기. 그럼으로써 염오와 절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6장] 희망을 향해 헤엄치기

낯부끄럽고 수치스러우며 이제껏 숨겨야만 했던 역사를 전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건 아마 해방감일 것이다. 그만큼 『욕구들』은 조심스럽게만 쓰이지도, 단 한 명만의 해소를 위해 집필되지도 않았다. 그래서일까. 책을 덮고난 뒤 가장 크게 느꼈던 감정은 일종의 안도감과 감사함이었다. 불쾌감과 불미스러움, 불안함과 불온함에서 우러나온 나의 (과거의) 어리석음은 스스로 정한 규제 때문이 아니라 사실 “행위 주체성과 주도권을 지니고 있다는 느낌이나, 자신의 욕구는 건전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만족시켜도 될 타당성과 자격을 지니고 있다는 확신이 부재”하기 때문이었다.

이 책의 가장 놀라운 점은 읽는동안 스스로를 인터뷰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단 것이다. 어떤 챕터에서는 여태껏 나조차도 잊고 있던 기억들을 자동으로 반추하였고, 나의 길고도 짧은 생의 역사가, 그러니까 나의 부모, 나의 남자친구들, 나의 습관이 오로지 나만의 것임이 아님에 괄목했다. 굳이 들킨 것도 아니지만 심장이 들쑤셔졌다. 이 모든 일들이 어떤 오해로부터 기인했단 인사는 그 어떤 음식보다도 나의 뱃속을 들끓게 했다.

그렇다면 이제 ‘나’는, 그리고 ‘우리’는, 한밤중에 피어오르는 폭식에 대한 열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도 되는걸까? ‘지금 당장 야식을 먹게 된다면 내일 아침에 얼굴이 부을 게 분명하고, 또 살도 뒤룩뒤룩 찔거야’란 긴장감을 하루아침에 떨쳐내고 본능이 하고 싶은대로 해도 되는 것일까? 비록 허리춤 양 옆으로 살이 튀어나와도 길이가 확연히 짧은 티셔츠와 딱 달라붙는 레깅스를 입고 거리를 활보해도 되는걸까?

꽤 오래전에 책 속의 명언들을 소화시켰으나, 나는 여전히 수영장 탈의실에서 발가벗고 사방에 있는 거울을 지나칠 때마다 배에 힘을 주어 최대한 살가죽을 갈비뼈에 붙여 보인다. 길을 지나가다 쇼윈도에 비친 모습을 보면 무의식적으로 매무새를 정리한다. “슬쩍 보기만 해도 자기 점검이라는 현상이 호흡만큼 반사적으로 치고 들어올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나도 알고 있다. “음식과 체중에 관한 여성의 몰두가 자기혐오나 수치심이나 내면화된 여성 혐오 혹은 무엇이든 사회 정치적 성격을 띤 것과 관련 있다”는 것을. 뿌리깊은 자기혐오와 “행위 주체성, 즉 권리 의식과 힘이 결합되는 감정”은 한 끗 차이로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이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고자 한다. 남모르게, 나도 모르게 못되게 굴어 엉망이 된 내 몸에게, 우리 엄마와 과거의 여성들과 미래의 여자 아이들에게. 왜냐하면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 만으로도 “어쨌든 그것은 일어날 수 있는 변화”니까.

“’나는 충족될 자격이 있다’가 ‘나는 충족될 수 있다. 내가 그렇게 만들 수 있다.’가 되는 것이다.”

 

 


나는 내 나이 때 내 어머니는 꿈도 꿔보지 못했던 문제들(…)을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이런 모든 자유는 복되고 멋진 것이었지만 내게는 또 그만큼 무섭고 억압적이고 심지어 (물론 당시에는 입 밖에 내어 표현할 수 없었지만) 약간은 부당한 것으로도 느껴졌다. 그런 자유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에 관해 내가 품고 있던 불분명하지만 뿌리 깊은 일련의 감정들과 모순되는 것 같았다고 할까. - P25

거대하고 모호하고 압도적인 대상(일이나 사랑) 대신 작고 구체적이며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대상(팝콘 한 알)에 초점을 맞추게 한 것이다. - P29

음식, 섹스, 쇼핑. 당신의 독이 무엇인지 불러보라. 욕구, 특히 여자들이 경험하는 욕구는 으스스할 정도로 변신에 능하고 외적인 것들에 요령 좋게 찰싹 달라붙는다. (... p.32) 갈망은 그 자체로 어쩐지 부당하거나 잘못된 것 같다는 느낌, 원하는 대로 마음껏 누릴 권리는 대가를 지불하거나 스스로 노력해 얻어내야만 한다는 생각, 욕구를 채우려면 희생을 치러야 한다는 생각이다. - P31

대개 파편화된 렌즈를 통해서만 한 번에 한 가지 병폐만 따로 떼어 검토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 P34

내가 아는 어떤 이는 매일매일 운동량을 기준으로 먹는 양을 엄격하게 조절한다. (…) 그 기준이 순전히 자의적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지만, 그래도 너무 오랫동안 매일 그 규칙을 엄수하며 살아온 탓에 이제 다르게 사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고 여긴다. - P36

먹는 양과 칼로리와 지방의 문제로만 파악하면 여성의 갈망이 야기하는 더 폭넓고 다양한 감정들이 가려진다는 사실이다. - P44

욕구는 기본적 생명 유지 문제에서 분리되고 법적 제한에서 자유로워진 후 주로 내면과 관련된 현상이 되었고, 욕구를 만족시키는 역량은 물리적 틀이나 정치적 틀보다는 감정적 틀에 의해 규정되었으며, 그 결과 한 여성이 갈망과 만족에 대해 갖는 관계는 마치 거울처럼 그의 자아 의식과 더 넓은 세상에서 그가 자리한 위치를 비춰 보인다. (...) 이런 일들은 많은 여성에게 생사의 문제는 아닐지라도 기쁨과 괴로움의 표지임은 분명하며, (…) - P46

우리가 행위 주체성과 주도권을 지니고 있다는 느낌이나, 자신의 욕구는 건전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만족시켜도 될 타당성과 자격을 지니고 있다는 확신이 부재한다는 이야기다. - P48

여기에는 뭔가 문제가 있지만, 그것은 ‘낮은 자존감’처럼 단순한 문제가 결코 아니다. - P49

여자들 여럿이 모여 레스토랑에 갈 때면 섭취량과 자제력의 정도를 드러내고 비교하고 지적하는 그리 은밀하지도 않은 집단적 감시 활동 - P60

대부분 그 허용은 대가를 치르고 얻어내야earn 하며, 그러려면 감시하고monitor 통제해야control 한다. 그리하여 e=mc². - P63

다이어트하는 여자의 사적인 나스닥, 개인의 자기 고문 지수. - P65

신체 사이즈를 줄이는 것과 자아 자체의 소형화에 대한 강조가 여자들이 삶의 다른 영역들에서 성취를 이뤄내기 전까지는 그렇게 열기를 띠지 않았다는 사실은 되새겨볼 가치가 있다. - P70

선택할 자유도 실질적인 경제적 힘과 정치적 힘의 중량이 어떤 식으로든 밑받침해주지 않으면, 오히려 안정을 깨뜨리는 느낌, 지속되지 않을 것 같은 느낌, 얄팍하고 힘없는 느낌을 줄 수 있다. - P77

"나는 수년간, 나 자신의 열정을 따르면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을 품고 있었어요." - P84

소비자는 너무 많은 선택에 직면할 때 압도당하는 느낌, 마음대로 되지 않아 답답한 느낌, 우유부단함으로 마비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 "여자들은 선택할 것이 무한하다. (…) 그리고 이는 매우 무서운 일이다. 그것은 당신이 자기라는 존재의 부담을 짊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누구와 결혼할지, 어떤 경력을 추구할지, 머리카락을 어떻게 자를지 아무도 당신에게 말해주지 않을 것이고, 그러니 당신이 의지할 사람은 당신 자신밖에 없다." - P95

다이어트를 하는 여자가 ‘나는 날씬해지고 싶어’라고 말할 때 사실 그는 무엇이든 다른 특성을 갖길 원하는 것일 수도 있고, 날씬함으로 대표되지만 그것으로 보장되지는 않는 가치 의식, 소속감, 사랑받는 존재라는 느낌을 원하는 것일 수도 있다. - P103

이름 붙일 수 없는 불안들이 구체적인 불안들로 대체된다. - P105

나는 아버지에게는 직업이, 어머니에게는 취미가 있다고 생각하며 자랐다. - P128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두렵거나 위험하거나 더러운 것이라고 느끼는 어머니가 딸의 섹슈얼리티를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것 역시 쉽지 않다. - P131

이는 모두 학습된 행동이다. (…) 관찰하고 따라하는 것, 살면서 배우는 것이다. - P133

오늘날의 어머니에게 허기를 느낄 자유는 있을지 몰라도, 그 허기를 채울 자원까지 항상 있는 건 아니다. - P146

모든 세대는 바로 앞 세대를 기준으로 자신을 판단한다. - P147

당신은 계속 나아가고, 당신의 어머니는 뒤에 남겨진 채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혹은 어떻게 거기 도달할 것인지 잘 알지도 못하는 가운데, 당신은 변화에 대한 무서움과 죄책감과 짜릿한 전율을 느끼는 동시에 어머니가 방향도 알려주지 않은 채 당신이 떠나도록 내버려둔 것에 대해, 아니 애초에 떠나게 허용한 것 자체에 대해 격한 분노를 느낀다. - P150

쾌락 추구와 자기 욕망의 충족은 어쩐지 부당하고 자격 없는 일이라는 느낌으로 나타났다. - P153

심리적 예산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방법으로 집 안에 비참함을 불러들여 청구서에 납부 완료 도장을 받는 일 - P157

무. 식욕 없음. 내 몫은 아님. (…) 이런 일이 일종의 쾌거처럼 느껴졌다는 것이다. - P168

타인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면 경악할 테지만, 그럼에도 이런 독백은 너무나도 흔하고, 너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기 때문에 얼마나 혹독한 말인지도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 P170

피부는 (…) 하이드레이팅하고, 스무딩하고, 토닝하고, (…) 컨투어링하고, (…) 안티에이징하고, (…) 학위 취득만 빼고 다 해야 한다. - P187

내가 이런 생각의 오류를 알고 있다고 해도 이런 반응은 아주 깊은 수준에서 작동하여, 내가 여성 혐오의 뿌리를 이해하고 문화와 자아 사이의 관계를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성인 여성으로서 경험한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어리고 아직 한참 미숙한 존재로서 처음 경험했던 감정들을 촉발한다. - P189

육체는 가장 중요한 재화였지만, 어느 순간이라도 나를 배신할 수 있는 재화였다. - P204

내게 이 모든 걸 `거부할 힘`과 `의지력`이 있다는 식의, 일종의 자만심 같기도 하고. 사람들은 그런 나를 시기했어. - P215

그들에게 음식과 체중에 관한 여성의 몰두가 자기혐오나 수치심이나 내면화된 여성 혐오 혹은 무엇이든 사회 정치적 성격을 띤 것과 관련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그들의 눈빛은 이내 따분하다는 듯 흐리멍덩해진다. - P217

가치관을 재편해야 하고, 가치들 뒤에 자리한 뿌리 깊은 가정들을 서서히 제거해나가야 한다. - P225

마치 그게 실제로는 자기 체중이 아닌 것처럼. - P226

지적인 신념은 있지만 그에 상응하는 정서적 뿌리는 없다는 것. 페미니즘의 힘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몸으로는 알지 못한다는 것. - P244

그들의 갈망에 굴복하면 우리에게는 헤픈 여자라는 낙인이 찍혔고, 너무 많이 억제하면 내숭쟁이가 됐다. - P253

"아마 실제로 많은 여자아이들이 자신들의 몸을 인정해주지 않는 문화에 직면해 자신의 성적 욕망의 딜레마를 그 욕망을 느끼지 않는 것으로써 해결할 것이다." - P254

사회의 보호라는 귀한 자원이 거의 없어서 발달 단계에서 지원을 받지 못하고 또래 압력과 과도한 대중 문화에 취약하게 노출된 상태에서 일어난다. - P262

`괴로운 일은 상품으로 해결하세요, 자아의 바깥을 바라보세요.` - P274

나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불렀지만 그건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다소 반사적인 반응이었고, (…) 페미니즘에 대한 반격뿐 아니라 페미니즘의 성공 자체도 운동의 절박성에 찬물을 끼얹었다. - P281

슬픔은 주기적으로 뚜렷한 원인도 없이, 잠이 오지 않는 밤이나 상태가 나쁜 아침 잠에서 깬 첫 순간, 갑작스레 치고 들어오는 공허함과 갈망의 습격으로 제 존재를 알린다. - P319

프로이트는 인간의 ‘죽음의 본능’에 관해 썼다. 이 말은 실제로 삶을 끝내고 싶다는 바람보다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들어 있음 직한 그 초기의 마취 상태와도 같은 지극한 행복의 상태를, 원함과 존재함 사이에 긴장이 존재하지 않는 장소를, 완전한 평온함과 안도감의 상태를 되찾고 싶어하는 갈망과 더 깊은 관계가 있다. - P322

욕망에 이름을 붙여야 하고, 무엇이 그 욕망의 성취를 방해하고 있는지 이해해야 하며, 어떤 결과가 나올지 개의치 않은 채 억제를 부수고 나갈 힘과 용기와 자기 수용을 이끌어내야 한다. - P359

감정의 모든 뉘앙스와 근원을 이해하려는 본능을 억누르세요, (…) 그때의 나는 모든 집착에 따라붙는 전형적인 착각, 즉 욕망의 대상을 문제가 아닌 해결책으로 여기는 착각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 P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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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 일러스트 특별판 - 반지 원정대 + 두 개의 탑 + 왕의 귀환 톨킨 문학선
존 로날드 로웰 톨킨 지음, 김보원 외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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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추가 마일리지 적립을 위해 남김. 뜯어보딘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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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행복한 이유 워프 시리즈 1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 허블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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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면 SF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제대로 자세 잡고 읽은 건 몇 권 안 되지만, 이따금 친구들에게 확언한다.


SF란 아주 번거로운 장르이다. 수학/과학/이공계 지식이 전무하다면 본문에 지나가듯 거론되는 용어조차 무슨 뜻인지 몰라 갈피를 잡기에 쉽지 않다. 물론 상식이 특출나거나, 전공 분야를 공부했거나, 일말의 야트막한 지식이 있다면 그보다는 재미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작가가 구축한 세계관을 완전히 깨닫고 몰입하기 위해선 더한 노력이 필요하다. 플랏의 흐름만 이해하고 넘어가기엔 찝찝한 이 기분을 해소해주는 건 자료 조사일 테지만, 500여 쪽에 달하는 책을 순식간에 읽고 나면 그만한 에너지는 남아있지 않다. 그렇기에 완전한 독서가 불가능해지며, 그래서 이 장르가 싫다.


그러니까 내가 여기서 갈래를 펼치며 서술할 수 있는 건 철학적 시각뿐이다. 가정을 여러 개 세우고, 비틀고 꼬며 what-if 형식의 변증법 형식으로 독서를 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번 모임도 작가의 주장과 가치관이 어떤가 해석하기보단 각자의 인생에 초점을 맞추고 고유의 개성을 앞세워보았다.


특히 표제작인 「내가 행복한 이유」는 4,000명의 취향 샘플이 단 한 명의 인간 개체에 모두 담겼을 때 찾아오는 선호의 딜레마를 다루는데, 우리는 이를 어떤 한 등장인물의 것으로 판단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좀 더 확장된 범위에서 가름하고 유추하는 과정을 거쳤다.


  • 개인
    • 만약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단순히) 좋은가? 싫은가?
    • 불가피하게 찾아오는 감정의 고저가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하는가?
  • 다수 대 소수
    • 나를 제외한 사회구성원 대부분이 제어 패널로 감정을 조절할 수 있을 때 따라오는 소외감은 얼마나 클까?
    • 인간을 이루는 건 고민과 결정(choice)인가?
    • 함께 언급한 작품들: 같은 책 「내가 되는 법 배우기」, 『SFnal 2022 vol. 2』 中 「알약」
  • 사회 윤리
    • 살인 충동이 해소되었을 때만 쾌감을 느끼는 어느 사이코패스 범죄자가 있다고 가정했을 때, 그에게 두라니의 치료법을 거행하는 일은 독립된 개인 혹은 사회적 측면에서 옳은가? 그 까닭은?


이런 단계는 상완을 다채롭게 하지만, 본 책에 대한 감상을 찾아보면 간혹 철학적 질문을 배제하고 SF의 장르적 재미를 고조했으면 더 좋았으리란 평도 존재한다. 총 11편에 거쳐 인간의 자유의지, 정체성, 진리 등을 아우르는 이데올로기는 처음 접하는 이들에겐 충격적이고 어떤 사유의 시발점이 될지라도, 이제 그 수준을 벗어났거나 무뎌진 독자들에겐 질릴만한 소재이다. 예를 들어 「루미너스」에서 시사한 현 인류의 수학 공리를 전복하는 존재의 가능성은 한평생 '진실'로 체화한 개념이 뿌리부터 틀린 것일 수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우리는 곧바로 이런 반기를 제기할 수도 있다. '굳이 SF가 그 기폭제가 될 필요는 없다'. 밀란 쿤데라가 『농담』에서 절대 신념과 획일주의를 경고했던 것처럼, 여타 고전 문학 작품에서도 이미 충분히 볼 수 있는 문제이다.


또한 SF는 장르 소설로 묶이고,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도 있다. 주제의 유사성 탓에 메들리처럼 반복되는 회화는 낡아서 매력이 닳은 고전적 피상으로 보인다. 상이한 키워드 안에 숨어있는 패턴을 읽기에 별로 어렵지 않다는 소리다.

특히 이 전에 읽었던 SF 소설이 『SFnal』 시리즈, 즉 최신의 그것들을 묶은 출간물이라 더 그렇다. 해당 책의 독후감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무엇이든 많이, 또 오래 보면 그 패턴이 보이고 연출된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법이다. 이 책에 수록된 단 하나의 단편을 읽는 동안에도 자연스레 여타 SF 소설, 드라마, 영화와 같은 작품들이 두세 편, 많으면 5편 이상 한꺼번에 떠올랐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SF는 자꾸 무언가를 상기시키고 연결되어있다고 보면 되는 것일까?


처음에는 수많은 작품이 떠오르고 그것들이 하나의 유기체를 형성하며 집약적이고 또 그물망 같은 인식 체계를 구성하는 게 새롭고 뿌듯했으나, 이제는 달갑지 않다. '이런 생각은 어떻게 하는 거야?' 같은 반응이 따라오는 기발함이 번뜩일 때도 있으나, 평균 수준의 스토리텔링과 흐지부지한 마무리는 아쉬움을 낳는다. 종교 원리주의자의 비도덕성을 고발한 「도덕적 바이러스 학자」를 두고 누가 '『데스노트』가 연상될 정도로 조잡하기 그지없다'고 한 말에 손뼉을 쳤을 정도니까. 종교로 입혀진 인체의 신비, 우매한 추종이 흔들릴 때 오는 인지부조화는 겨우 어떤 논점을 표방한 정도로만 포장되고, 우스워지기도 한다. 이에 더해, 작가가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어 보일까 봐 중반부에 대뜸 정리된 내용을 짚고 넘어가는 행위는 친절에 대한 감사보다 '진즉에 좀….' 하고 짜증이 난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단 두 가지였다. 종래의 수론에는 본질적인 결함이 있고, 자연수에 관한 플라톤적인 이데아는 궁극적으로 모순일 가능성. 또는 앨리슨이 옳았고, 몇십 억 년 전에 '계산적으로 멀리 떨어진' 지역 일부를 일종의 대체 수론이 지배하게 되었을 가능성이다. / p.354 「루미너스」 中


「100광년 일기」도 살펴보자. 자칫 결정론·운명론을 논하는 듯 보여서 '인생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있다면 만족감보다는 지루함이 더 클 것이다'라는 얘기를 나누겠지만, 작품을 해체하는 과정 중에 이것의 핵심은 '계획'이 아닌 '자유'라는 것을 밝혀낼 수 있다. 그렇다. (진부하게도…) 이러한 시간 구속과 자유의지는 전혀 새롭지 않은 주제이다.


「무한한 암살자」도 마찬가지이다. 거대한 타임 패러독스 안에서 '절대자' 혹은 '비켜 나가는 자'를 파괴하기 위해 뒤쫓는 설정은 이미 도처에 깔려있어 걷는 거리마다 발에 챌 지경이다. 앞서 언급했듯 사상적 근원을 파헤치고 역사와 정치 상황을 향해 물음을 던지는 이야기는 작가의 입장에선 퍽 유혹적이어서, 하드 SF의 옷을 입고 탈이념의 시대 정신을 굳이 또 한 번 구현했을 뿐이다.


그러나 옮긴이의 말에 도달했을 때, 수록된 단편들 대부분이 90년대에 집필되었단 점은 위에서 구구절절이도 써놓은 평들을 놀랄 만큼 뒤집는다.


  1. 「적절한 사랑」 (1991)
  2. 「100광년의 일기」 (1992)
  3. 「내가 행복한 이유」 (1997)
  4. 「무한한 암살자」 (1991)
  5. 「도덕적 바이러스 학자」 (1990)
  6. 「행동 공리」 (1990)
  7. 「내가 되는 법 배우기」 (1990)
  8. 「바람에 날리는 겨」 (1993)
  9. 「루미너스」 (1995)
  10. 「실버파이어」 (1995)
  11. 「체르노빌의 성모」 (1994)


자고로 SF란 신기술과 가능 세계, 최근의 인간 군상이 상상에 합쳐지며 먼 미래의 내러티브, 아니 말 그대로 '공상'으로 구성되는 법 아니었나. SF는 자연스레 미래 시제를 띄기 마련이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흐르는 과학이기에 과거에서 이미 정해진 부동의 유산은 모름지기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유명 TV 프로그램 <쇼미더머니 777>에서 기리보이가 프로듀싱한 곡 '공상과학기술'을 노래한 래퍼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나의 동공 안엔 가상현실 / 타임머신 티켓 2장 있어 / 알약 몇 개만 삼키고선 암 퇴치 ♪


그래. 분명 SF는 달을 넘고, 공기 위로 걷고, 영생을 얻는 삶이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지만 언젠가는 이뤄질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고 있다. 이는 문자도 없던 선사시대 분위기에는 절대 끼어들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먼 미래의 얘기만은 아니란 건 안다. 아주 근거리에서도 충분한 상상력이 곁들여지는 모습이 종종 보이기 때문이다. 여태 칭송받는 <블레이드 러너>(1982)나 <백 투 더 퓨쳐>(1985) 같은 걸 떠올려보면 쉽다. 번화가의 냄새는 향수를 자극하고, 어딜 가도 아이들은 유행을 좇고 있다.


VR 게임장의 앞 유리는 이미 신물이 나도록 본 게임의 초현실적 영상들로 반짝였고, 게임장 안에 모인 10대 초반의 아이들은 하나같이 예의 텍사스 풍의 꼴사나운 패션을 두르고 있었다. 공기에서조차도 토요일 밤의 밀라노와 똑같은 냄새가 났다. 감자튀김, 팝콘, 리복 운동화와 코카콜라. / p.476 「체르노빌의 성모」 中


굳건한 믿음은 읽는 내내 시의적절하다고 여겼던 글들이 (특히 「실버파이어」의 감염 사태는 코로나19로 팬데믹 시대가 열리며 오늘날 SF에서 꾸준히 활용되고야 만다) 실은 지금으로부터 2~30년 전에 집필되었단 사실에 철저히 깨부수어진다. 고백하건대 내내 시대적 배경이 나오지 않아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것도 어떤 장치로써 작용했을 수 있음은 의견을 나눠봄 직하다. '어라, 이거 언제 써진 글이지?' 하고 의문 가득 고개를 든 건 책의 절반쯤 다다랐을 때야 겨우 발견한 인명 덕이었다. 역서가 2022년 처음 소개되었으니 당연히 최신 글인 줄 알았다.


미국 대통령41대 미국 대통령 조지 H. W. 부시은 손에 계란 타이머를 수평으로, 그러나 언제나 기울일 수 있는 자세로 쥐고 있었고, 그 안에는 그가 전임자40대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의 대선 당선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일부러 석방을 지연시킨 비쩍 마른 이란 대사관 인질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 p. 280 「바람에 날리는 겨」 中


고의로 제거되었더라도, 역사는 항상 현재와 과거 사이의 관계를 구성하고 새로운 힘을 얻는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대목이다. 존 버거가 저서 『다른 방식으로 보기』(2012)에서 말했듯 오래된 예술 작품이 아직도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지금의 우리가 그맘때의 사회와 어느 정도 유사한 성격을 지닌 사회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SF도 유화와 같다. 뚱딴지처럼 갑자기 튀어나온 게 아니란 소리다.


'SF 작가들의 작가'라는 호칭은 그래서 붙은 모양이다(아니, 일단 이 사람 61년생이다….). 선구적인 주자로서 다수의 작품을 발표하고 잇달아 수상하며 명성을 확립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서두에 나는 SF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썼다. 혹자는 섣불리 속단하지 말라 조언할 것이다. 단편집의 파편들을 주워 담고 엮기에 급급하다는 평이라고 일컬을 것이다. 그럼 다시 이렇게 대답하겠다. 어쩌면, 장편 하나를 진득하게 읽어보면 또 다른 생각이 똬리를 틀지도 모르겠다고.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단 두 가지였다. 종래의 수론에는 본질적인 결함이 있고, 자연수에 관한 플라톤적인 이데아는 궁극적으로 모순일 가능성. 또는 앨리슨이 옳았고, 몇십 억 년 전에 ‘계산적으로 멀리 떨어진‘ 지역 일부를 일종의 대체 수론이 지배하게 되었을 가능성이다. - P354

VR 게임장의 앞 유리는 이미 신물이 나도록 본 게임의 초현실적 영상들로 반짝였고, 게임장 안에 모인 10대 초반의 아이들은 하나같이 예의 텍사스 풍의 꼴사나운 패션을 두르고 있었다. 공기에서조차도 토요일 밤의 밀라노와 똑같은 냄새가 났다. 감자튀김, 팝콘, 리복 운동화와 코카콜라. - P476

미국 대통령은 손에 계란 타이머를 수평으로, 그러나 언제나 기울일 수 있는 자세로 쥐고 있었고, 그 안에는 그가 전임자의 대선 당선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일부러 석방을 지연시킨 비쩍 마른 이란 대사관 인질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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